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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민족 – 1

한국은 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통일을 정당화한다. 나찌즘의 비극을 기억하는 독일사회는 민족의 정치화에 거부감이 있다. 89년 말에서 90년 3월에 걸쳐 ‘우리는 인민이다’라는 구호가 ‘우리는 민족이다’라는 구호로 대체되면서 통일열기가 부상할 때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민족감정을 놓고 격렬한 대립을 겪었다. 십여년전 당시의 논쟁을 정리하면서 나는 독일통일에 민족정서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검토해본 바 있다. 작가 귄터 그라스 등의 강력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통일이 진행된 이 대전환에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크게 작용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단시대 독일은 언제나 문화국가로의 통일을 강조했다. 전 연방내무부 차관보였던 크노블로흐는 수십년에 걸친 동서독 대립과 두 국가론에도 불구하고 단일국가로의 지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토대가 문화였다고 했다. 72년의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과 86년 문화협정으로 이어진 바탕에는 독일이 공통의 문화를 지닌 역사적 공동체라는 믿음이 놓여있다. “문화는 독일 국가가 통일을 이루는 과정과 유럽연합으로 가는 길에 있어 자주적이며 필수불가결한 기여를 한다”는 조항이 그런 신념의 소산이다. 각 주의 ‘문화주권’과 연방정부의 관할권 사이의 긴장이 없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평화통일의 능동적 요인으로 작동한 것으로 평가한다. 클라우디어 로스 장관 역시 미리 배포한 발제문에서 “문화”가 신뢰와 중재의 힘을 발휘했고 음악, 연극, 문학이 동독 내부의 불만, 비판, 자유를 향한 열망을 대변하면서도 그것에 ‘평화로운’이란 수식어를 붙게 만드는 핵심적 요인이었다고 썼다.

슈납파우프는 기본조약의 체결로 서로의 실체를 제도화하면서도 “독일 민족이 자유로운 자결권을 바탕으로 한 재통일”을 추구할 권리를 부인하지 않는 지속적 노력이 통일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기본조약이 국적관련 사안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표명도 같은 맥락이다. 헌법재판소 역시 “기본법이 독일의 분단을 인정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을 근거로 양독 간 경계선을 연방주들 사이의 경계선과 같은 성격으로 판시했다. 비행기 속에서 읽었던 김영희 대기자의 [베를린 여행]에서 브란트 정부가 동방정책을 추진하고 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도 모스크바와 주변국가들을 대상으로 독일의 통일이라는 미래비전을 인정받으려고 부단히 애썼음을 읽은 바 있었다. 조약이라는 양자관계의 틀을 발전시키면서 외교라는 고도의 정치과정을 통해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놓으려 한 노력이 1990년 통일에 소중한 자산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문화와 조약을 근거로 동서독의 단일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독일 민주주의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한 특성이다. 문화국가는 민족국가의 부정적 함의를 대신할 대안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독일인을 증명하는 국적법의 핵심 요소는 혈통이다. 속지주의를 채택한 미국과 달리 독일은 한국과 같은 속인주의를 견지한다. 실제로 통일과정에서 동독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독일인이 국적을 인정받고 독일로 이주했다. 나는 토론에서 국적법의 혈통변수가 독일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어떤 비중을 점하는지 질문했으나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다. 극우의 부상에 담긴 종족주의를 우려하는 독일사회에서 민족 개념은 여전히 인정하기엔 부담스럽고 부정하기엔 뿌리깊은 그 무엇일지 모르겠다. 언어, 문자, 전통, 역사, 신화가 문화의 핵심이라면 문화는 종족의 특성을 가르키는 것일 수 있으니 문화국가와 민족국가의 간격은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문화국가와 민족국가의 구별과 대비는 매우 중요했다고 판단된다. 문화가 혈통을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여백과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문화국가라는 말이 갖는 유연함, 포괄성, 비정치성을 내세워 민족감정의 분출을 우려하는 안팎의 염려를 관리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하버마스가 강조한 ‘헌법 애국주의’도 민주주의를 본질로 하는 헌법적 가치를 중시하고 혈통주의적 민족론을 극복하게 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문화국가론은 통일과정의 여러 문제들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기능도 수행했고 냉정한 계산을 넘어 기대와 꿈을 갖게 만드는 유토피아적 전망으로도 작용했다. 통일 후의 여러 비판과 논란은 문화라는 말에 담겼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의 긴장에서 유래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의 민족국가론도 문화주의적인 재해석과 국제주의적 감각을 보다 수용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정주외국인 비율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다문화적 상황이 확대되는 시대에 통일논의의 종족주의적 혐의를 벗어나려면 공동체의 문화적 재구성이 절실하다. 또한 그런 지향이 전지구적 가치와 연대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것임을 설득하고 보여주려는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이산가족찾기에서 보듯 민족정서는 남북을 하나로 잇는 강력한 자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21세기 한국사회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다원화하고 있고 북한의 민족관념도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다성과 이질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포용적 정체성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권헌익 교수가 발제에서 민족을 넘는 다양한 남북간 소통과 관계양식을 고민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으리라. BTS를 위시한 K-Culture의 개방성과 역동성을 수용하고 다양한 혈통과 다중적 존재를 포용할 수 있는 혼성적 정체성이 자리잡을 때 통일의 가능성도 커질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려면 민주주의 가치의 일상화, 제도화가 필수적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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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차 한독통일자문회의

12차 한독통일자문회의가 베를린에서 개최되어 5월 20-25일간 독일을 방문했다. 한국과 독일 정부간 정례 회의로 양국을 오가며 개최되는 이 모임은 분단의 경험과 통일의 과제와 관련한 정보와 지식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장이다. 유럽에서 독일이 겪고 있는 여러 난관과 동북아의 지정학적 동요 속에서 한국이 감당해야 할 여러 문제들을 서로 나누는 공부기회이기도 하다. 감사하게도 나는 한국측 위원으로 여러 차례 이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가졌다.

이번 회의는 슈나이더 독일 연방총리실 차관과 한국의 김기웅 통일부차관이 주재했다. 회의는 총리실 대회의장에서 열렸는데 출입시 철저한 보안체크를 받아야 하는 불편이 있었지만 그만큼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데나워부터 역대 총리의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아직 메르켈 총리의 그림은 걸려 있지 않았다. 때마침 슐츠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고 DMZ에서 한국분단의 현실을 안타까와하며 통일의 열정에 공감을 표한 뉴스가 전해져 회의의 시의성이 더 크게 느껴졌다. 콜 총리의 외교자문으로 통일과정을 조율한 텔칙과 통일의 전후과정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 슈뢰더도 80대 후반의 나이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회의에 열심으로 참여했다. 여러해 이 모임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 글라이케 차관, 슈납아우프 박사 등과도 반갑게 인사했다.

많은 쟁점들이 이틀동안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현장 답사를 통해서도 새로운 사실들을 접했다. 언제나 그렇듯 두 나라 상황이 다른 탓에 발제의 초점과 고민의 수준이 일대 일로 대응되지는 않는다. 분단과 통일이라는 큰 화두를 공유하고 있고 모든 주제가 그렇게 모아지지만 구체적인 문제들과 정책구상, 사회적 평가등에는 차이도 적지 않다. 2023년에 개최된 이번 회의는 두 나라 사이에 고민의 성격과 내용의 차이가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느껴졌다. 남북한 간의 단절이 심해지고 핵위기로 인한 정치군사적 대결상황이 강화된 한반도 상황이 동서독 내부통합과 민주주의의 성숙을 고민하는 독일의 현실과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진 탓일지 모르겠다. 다만 독일측이 통일의 성공이야기를 내놓는 대신 현재 겪고 있는 고민과 갈등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우리로서 참조할 공부거리를 새롭게 얻은 느낌이다.

회의가 종료된 후 개인적으로 만난 한 원로 정치학자는 자신은 요즈음 독일통일을 점점 더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한국도 독일로부터 배우려는 태도를 벗어날 필요가 있으리라고 했다. 여전히 독일의 많은 점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바 없지 않으나 저 부분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시선이 없이 독일통일 과정을 단순화하거나 공식화하는 것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여러모로 생각을 많이 하게 한 학술회의였기에 그 쟁점을 몇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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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신록 단상

5월 코로나에서 벗어난 신록의 달을 맞이하는 마음이 새롭다. 학생들의 수업 분위기도 달라 보인다. 봄이 봄같지 않았던 지난 3년에 비추어 보면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수목의 초록빛도 확실히 더 활기찬 듯하다. 경제적으로 불경기가 계속되고 한반도 주변 안보상황도 어려움이 가중되어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운데 계절이 주는 활력 만이라도 듬뿍 받아 누리는 것은 너나 없이 소중한 일일테다.

그래서인지 세종 집에 걸어둔 도연명 ‘귀거래사’가 내용은 좋지만 너무 은둔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연은 조용하기도 하지만 활기차기도 한 것인데 이 글은 너무 소극적인 정서에 쏠려 있어 봄의 역동성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언젠가 한 후배가 세종 집에 왔을 때 정년 후 보다 적극적인 활동력이 필요한 데 저런 글은 도움이 되지 않으니 떼어 내는게 좋겠다고 핀잔을 준 적이 있다. 욕심을 줄이고 세상사의 관심을 축소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새 봄 푸르게 변하는 자연의 활력을 보노라면 그 후배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된다.

지난 3월 학과의 후배 정 교수 퇴임행사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렸을 때 축사를 부탁받았다. 축사 내용을 준비하면서 통상의 덕담과 함께 정년 전후의 삶이 달라질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력과 인적 네트워크를 과시하고 또 모든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해온 정 교수에게는 정년 후에 더 열정적으로 활동하라는 조언이 적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2년간 열심을 다했던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직을 내려놓은 허전함과 퇴직이 가져올 공허함을 당당히 넘어서고 지속가능한 생활패턴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정년 전후의 질적 변화를 진지하게 수용하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조언은 사실 내 자신의 댜짐이기도 했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서 수십년간 몸담았던 학교를 떠나면서 새로운 변화에 정서적, 심리적으로 얼마나 잘 적응할지 내심 염려가 없지 않았고, 그럴수록 내 기대수준을 줄여야 한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애써 강조하곤 했다. 그 이후 비교적 소프트랜딩한 것은 참으로 다행인데, 광주과학기술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활동의 폭을 축소하려고 애쓴 나름의 각오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소프트랜딩은 소프트랜딩일 뿐, 앞으로 지속가능한 생활태도의 확립은 또 다른 과제임을 깨닫고 있다.

결국은 균형잡기가 문제다. 열심히 활동하되 과욕을 줄이고, 평안을 유지하되 활력을 잃지 않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은 과제다. 새로운 활동영역을 찾아나서는 것도 지혜로와야 하고 변해가는 환경에 자족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려면 내면이 더욱 충실해져야 한다. 소망의 끈을 지상에서 하늘로 옮기는 종교적 실천만이 답일지도 모르겠다. 조용했던 주변이 놀랍게 깨어나고 있는 5월의 신록을 보며 앞으로 필요한 균형잡힌 생활양식이 어떤 것이어야할지를 곰곰 자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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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회 월봉상 시상식

4월 28일 49회 월봉상 시상식이 명동의 유네스코 회관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코로나 시기동안은 매우 축소된 약식 시상식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올해 다소 완화된 상황이어서 조금 초청자가 확대되어 그간 못본 분들도 여럿 참여했다. 이철우 이사장과 수상자의 지도교수와 동료 학자들, 한성구 교수, 한민구 교수, 한승미 교수 등 월봉의 후손, 이선민 선생 등 기념사업회 관련 인사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올해의 월봉상은 장진엽이란 신진 학자가 조선후기 일본을 왕래한 통신사의 필담집을 분석한 책자에 주어졌다. 한국문화를 일본에 전수하는 활동이라고 이해되어온 조선통신사의 면모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구다. 저자는 이 통산사의 내왕이 두 나라의 외교적 행사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부분적으로 조선지식인과 일본지식인 사이에서 드물게 이루어진 지적 소통과 학술적 대화의 장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필담집 역시 공식적 문서에서 볼 수 없는 내밀한 교류를 담고 있는 사료라고 보고 그 속에 담긴 문화적 상호작용을 드러내려 했다.

도진순 교수는 ‘차가운 평화, 뜨거운 필전’이란 멋진 제목을 단 심사평을 작성했다. 세밀한 분석력과 남다른 문장력을 지닌 도교수는 언제나 상당한 공력을 기울여 글을 작성하는 분이다. 안중근이나 이육사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들도 자료 하나 사료 한 문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꼼꼼함에서 얻어진 결과다. 이번 심사평도 제목을 두고 여러 분의 의견을 청해듣는 정성을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뜨거운 필전’이라 이름할 정도의 치열함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후학에 대한 애정과 유익한 조언이 담긴 좋은 글이라 생각된다.

심사위원으로 월봉상에 관여해온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매년 다양한 영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책들 가운데 하나를 선정하는 작업은 쉽지 않고 해마다 그 어려움은 가중되는 느낌이다. 언제나 참신함과 노련함, 흥미와 중요성,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의 어디에 무게추를 놓아야 할지 고민거리다. 다양한 연구서를 평가할 안목과 식견이 충분치 못하고 국내외 학문분야 동향에 대한 정보도 부족함을 절감하면서 오히려 내 스스로가 심사를 받는 느낌조차 든다. 식사 자리에서 농담조로 언젠가는 심사위원의 자격도 심사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한 것도 그런 마음의 반영이었던 셈이다.

시상식이 끝나고 유네스코 사무총장 방에서 한홍구 교수 등과 잠시 환담을 했다. 내가 한글로 쓴 유네스코 헌장의 두 폭 병풍이 접견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게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한 총장의 설명으로는 이곳에 오는 국내외 인사들이 한결같이 이 병풍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그때마다 한글의 아름다운 조형미에 대한 말들을 주고 받는다 했다. 알만한 분들에겐 내가 쓴 작품이란 설명도 덧붙인다니 감사하고 개인적으로는 영광이다. 이 글씨의 일부를 이용해서 다시 제작한 에코백을 선물로 받고 나온 명동길은 시민과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오랫만에 활기를 되찾은 듯 해서 반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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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평화포럼

4월 20일 포스텍 평화포럼 일곱번째 행사가 개최되었다. 최근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추진 중인, 제3자변제를 통한 강제동원피해자 보상안에 입각한 한일관계 개선 노력을 평가하고 국내외 파장과 향후 전망을 논의하는 자리로 기획한 것이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의 기조발제와 이원덕, 박찬승, 이근 교수의 토론, 여러 패널리스트의 의견개진으로 밀도있는 대화를 통한 배움과 소통의 장이 되었다.

발제자는 현 정부의 시도가 아쉬운 점이 있음에도 의미 있는 결단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국내의 반응이 우호적이지 않고 일본측의 대응 역시 불확실하여 향후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토론에서는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전략적 선택이란 긍정적 평가와, 우리 대법원 판결의 정신을 훼손하고 향후 한일관계 정립에도 악영향을 끼칠 잘못된 정책이란 지적이 함께 제기되었다. 패널들의 견해 역시 이런 스펙트럼 상에 위치해 있었다. 다만 한일문제가 매우 어려운 난제이고 미래를 향해서는 해결되어야 하는 과제라는 점에는 다들 공감했다.

기획단계에서 가급적 다양한 관점을 지닌 분들을 초청하려 했다. 한국사, 한일관계, 남북관계, 한미관계, 동북아 지역연구 전문가들이 두루 참여해서 서로 다른 시각을 나누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뜻깊은 포럼이었지만 역시 국제관계학의 시각과 역사학의 시각은 접점찾기가 쉽지 않았다. 미래를 향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당위와 과거의 족쇄를 풀어야 한다는 당위 사이의 긴장을 역동적 해법찾기로 풀어가는 지혜를 찾는 길은 여전히 멀어 보였다. “과거의 굴레와 미래의 도전”이란 부제에서 이 양자를 함께 넘어설 것을 목표로 했지만 그만큼 어려운 과제임도 확인된 자리다.

최근 뉴스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및 대만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외신기자회견 언급으로 야기된 러시아와 중국의 강력한 반발이 대서특필되고 있다. 외교적 언사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거친 말들이 오가는 현 동북아 상황은 분명 그 자체로 염려스러운 현실이다. 중국의 강력한 부상과 중국중심주의가 큰 요인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이를 지혜롭게 다루는 외교역량의 부족, 미국일변도 전략 마인드도 심각한 문제인 듯 하다. 지구적인 상황변화에 따른 한국의 지정학적 리스크도 커지는데 그 복합방정식을 풀 능력은 오히려 퇴조하고 있는 것 아닌가 걱정스럽다.

방향이 옳다는 것과 방향전환을 지혜롭게 이루어내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큰 틀에서 방향에 동의하더라도 이를 감당할만큼 충분한 소프트파워를 갖추었는지는 별도로 따져볼 일이다. 실제로 안팎의 여건과 상황을 고려한 시간계획, 선후연계, 강약조절의 정치외교적 역량이 어떠한가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달라질 수 있는데 현 정부의 추진방식에 대해서는 신뢰보다 염려가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3차방정식을 2차방정식처럼 풀고자 하는 단순화의 오류가 21세기 지정학의 복합성에 제대로 대응할 역량을 약화시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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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논리

김성국 교수께서 새로이 출간한 신간 [하나논리] (2023, 이학사)를 보내주셨다. 국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온 원로 사회학자이자 부산 지역사회의 현안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동아시아 지식인 네트워크에도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분이다. 정년을 한지 꽤 되었는데 여전히 왕성한 학문적 활동을 하고 계신데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동아시아 사회이론의 모색이란 부제가 달려있지만 이 책은 여느 사회이론 서적과 다른 분위기다. 학계의 보편적 관심사와 학계 내부의 논의도 없진 않지만, 핵심은 지난 시기 서구 사회과학의 사상적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을 독창적으로 구성하는 데 있다. 저자는 1960년대 이래로 자신이 주목해온 여러 사상적 맥락들을 실존주의, 구조주의, 맑스주의, 시민사회론, 탈근대론 등으로 추적하면서 그 특성과 한계를 성찰의 자원으로 삼아 대안적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

미래적 전망을 지닌 대안적 사회이론의 가능성을 저자는 ‘하나논리’를 통해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삼라만상의 존재론적 연결성과 가치론적 하나됨을 중시하는 通一의 관점이 특히 중요한데, 이런 시각은 동아시아 유, 불, 도의 사상적 자원과 한국에서 그 맥을 이어온 선가의 사유를 지적 자원으로 삼아 구성할 수 있으리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은 천부경을 비롯하여 한국 전통사상에서 발견되는 천인합일 사유를 재해석하면서 저자 자신의 독특한 전망들, 즉 유아유심적 탈물질주의, 주체적 개인주의, 비관적 신비주의, 중도자비와 자유해방의 안락주의 등 문명론적 함의를 담은 새로운 이론적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21세기 사회이론의 탐구가 삶의 깨달음,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출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실천적 함의도 담고 있다. 저자는 오랫동안 아나키즘의 현대적 의의에 주목해왔고 몇 년전 잡종사회의 문명적 비전을 다룬 대작을 상재한 바 있다. 이 책에도 저자는 하기락 교수의 아호인 ‘허유’ 개념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동서문명을 넘어서는 대안적 삶을 희구하는 바램을 피력하고 있다. 자유롭고 개방적이면서도 창의적이고 주체적이며 늘 진지한 탐구의 자세를 잃지 않는 노학자의 애씀이 21세기의 소중한 지적 자원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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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에서 탈식민으로

반일을 넘어 탈식민의 성찰로 – 조형근 박사가 쓴 [우리 안의 친일] 책의 부제로 달린 화두다. 나는 우리 사회 곳곳에 강한 정서와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집합적 정동, 자긍심과 혐오심의 이중주를 볼 때마다 이 주제가 우리 시대의 시급한 과제라는 생각을 한다. 한 쟁점에 대한 반대 자체가 무비판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로 자리잡을 때 제대로 된 성찰이나 문제해결로 나아가기는 어렵다.

윤석렬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소위 통 큰 결단을 강조하고 있다. 3.1 절 기념사에서 일본의 잘못과 식민통치의 수탈성을 강조해온 이전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게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로 나가자는 주장을 내세우고 일본 기시다 수상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의 반성과 사과에 대한 담보 없이 일방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매듭짓겠다고 했다. 한일관계를 개선하겠다는 뜻임을 밝혔지만 치밀하지 못한 접근에 대한 안팎의 우려가 만만치 않다. 예상대로 역사학계를 비롯하여 강력한 반발이 이어지고 있어서 과연 기대한 방향으로 진전될지 염려스럽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개인도 국가도 이미 지나간 것에 연연하는 것은 좋을 것이 없다. 감정과 정서, 이해관계로 얽힌 이웃 국가간의 관계가 늘 과거사로 묶여 다람쥐 쳇바퀴돌 듯 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동시에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분명히 하자는 주장이 그런 미래로의 진전과 배치되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사과를 하고 응분의 책임을 묻는 것은 과거를 넘어서기 위함이지 지난 일 속으로 퇴행하려는 것이 아님을 한일의 지도자는 깨달아야 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이 덫을 지혜롭게 넘어서는 일이 21세기 최대의 난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조박사는 이 책의 챕터에 여러 부제를 달았다. 나에게는 각 장의 제목과 부제가 저자의 뜻을 드러내는 명료한 메시지처럼 와 닿는다. “민족주의 – 제국의 욕망과 동행하다”, ” 역사의 단죄 – 당신은 친일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프랑스와 독일의 과거사 청산 – 역사에는 단판 승부가 없다” –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저자가 던지는 말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역사에 성실하려는 자세에서만 제대로 된 탈식민도 가능할 터… 우리 내부의 욕망을 숨기지 않을 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약점과 떨림을 정면으로 대면하면서 화해와 연대를 이룰 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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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로 얽힌 사람, 땅, 문화

봄은 매화와 더불어 오는가. 한겨울 매서운 날씨를 견디고 고고하게 계절의 변화를 알라는 매화의 향기가 곳곳에서 풍겨난다. 예로부터 매화는 그 기개와 품성이 선비와 닮았다 해서 사군자의 첫 소재로 꼽혔고 고택이나 서원의 한 켠에 자리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남도 섬진강변은 산기슭을 온통 매화가 차지할 정도로 군락을 이룬 곳들이 적지 않다. 매실을 재배하는 농원들이 많기 때문이겠지만 남도의 야트막한 산세와 풍광이 일조를 했을 터이다. 하동에서 벌어지는 매화축제에는 100만명을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한국사회사학회 활동을 처음부터 함께 했고 퇴임 후에도 학연을 이어가던 사사친 멤버들이 모처럼 매화 탐방을 내세운 여행길에 나섰다. 고매로 이름난 승주의 선암사, 홍매로 유명한 화엄사를 비롯하여 사람들로 들끓는 매화축제장 농원도 들렀다. 여행이 꽃구경 만일 수는 없는 법, 악양별서라는 멋진 이름의 집에서 시와 춤과 노래의 작은 모임도 갖고, 오래된 집을 전시관으로 만든 빈산 갤러리에서 작품도 감상했으며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알려진 악양들판을 내려다 보는 조씨 고택에서 조선조 명문가의 위세와 품격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높은 산마루에 올라 사방을 에워싼 지리산 주능선, 굽이치는 섬진강, 그 속에 넓게 자리잡은 땅을 한 눈에 바라보는 즐거움도 맛보았다.

선암사의 고매는 아름다운 사찰의 풍경과 어우러져 장관이었다. 이곳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롯하여 이름있는 사람들의 현판들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크다. 태고종으로 많은 불사를 하지 않아 오히려 고풍스런 옛 아름다움이 유지되고 있다는 역설이 새삼스러웠다. 화엄사는 신라시대의 여러 유물로 이름있는 고찰인데 때마침 만개한 홍매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국보로 지정된 각황전 앞 사자석등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우람한 기세의 등걸과 붉은 색의 화려함으로 사찰의 분위기를 일거에 바꾸는 홍매의 절경이 가히 명불허전이다. 평소에 매화는 백매가 본류이고 홍매는 웬지 아류 같이 여겨졌는데 화엄사 홍매는 내 편견을 일순간 날려버렸다.

재작년 이맘때 제자들이 매암동인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내가 정년을 기념하여 제자들에게 써준 글씨들로 ‘以文會友’ 전시화를 열게 된 것을 계기로 서로의 근황과 관심사를 나누고 소중한 학연을 이어가자는 뜻에서였다. 지금도 개인적으로 또 몇명씩 간간히 만나면서 학문의 길에서 부딪친 생각과 경험들을 나누곤 한다. 고마운 인연들은 이래 저래 이어지고 이번 여행에서도 멋진 꿈과 뜻을 지닌 개성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선암사의 고매, 화엄사의 홍매만 아니라 나와 인연을 맺은 이 모든 이들이 각각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매화 나무란 생각이 든다. 좋은 제자와 동학을 만난 복을 감사하고 새롭게 이어지는 인연들을 생각하며 선암사 백매의 모습을 화선지에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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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헌학술원 심포지엄

한림대학교 도헌학술원이 개원되어 2월 16일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하는 기술혁신의 큰 흐름 속에서 대학의 역할을 묻는 학술회의였다. 하지만 한국 산업의 견인차이자 21세기 쌀이라고까지 여겨지는 반도체가 미중 기술패권경쟁의 핵심쟁점이 되어 기존의 글로벌 공급과 생산의 체인에 큰 변화가 예상되는 시점이어서 관심이 대학에 한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최근 반도체 경기의 하락이 무역적자폭을 크게 하는 시점이고 미국의 압력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어서 한국사회 전반에까지 시야가 확대될 수밖에 없는 회의였다.

삼성전자, 하이닉스에서 반도체 산업을 총괄하는 CEO 들과 서울대, 카이스트, 한림대 총장들이 참여하는 발표자 면면도 관심을 끌기에 족했다. 한림대학 이사장으로 자신의 아호을 딴 연구원의 첫 행사인만큼 이사장의 관심이 컸을 것은 분명하고 실제로 윤대원 이사장의 인사말은 기조강연에 해당할만큼 밀도가 있었다. 행사가 이처럼 성대하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것은 초대 원장으로 취임한 송호근 교수의 네트워크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나는 도헌학술원의 자문위원으로 그 설립과정에 작은 힘을 보탰다. 이전 한림학술원의 뜻을 기억하면서 또 송원장의 새로운 활동을 성원하는 뜻도 겸하여 이 학술원이 잘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헌학술원의 현판을 쓰고 기념달력 제작을 위해 스케치한 작품을 제공했다. 내 글씨와 그림이 뜻깊은 학술원의 출범을 장식할 수 있어서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 오세정 총장과 최양희 총장의 발제에 대한 토론에서 언급했듯이 한림대가 새로운 지방명문대학의 모델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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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랜드 미술관

한겨울의 포틀랜드는 다소 을씨년스러웠다. 날씨가 흐렸던 탓도 있지만 여행객도 드물고 가게들도 대부분 문을 닫은 거리풍경 탓이 더 컸다. 해안을 따라 여러 등대들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사람은 없고 비는 내렸지만 경치는 아름다왔다. 곳곳에 과거 전투의 기억, 요새로서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어서 이곳이 독립전쟁 당시의 격전지였음을 말해주지만 대부분 희미하게 퇴색되고 눈에 띄지도 않는다. 평화상태가 오래 지속된 미국의 풍요가 낳은 결과일터이다. 전쟁터가 관광지가 되는 것 – 좋은 것이다.

랍스터를 먹는 아름다운 레스토랑을 찾아 빗길을 무릅쓰고 찾아간 ‘두 등대’ 지역도 문을 닫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안으로 태국 음식점을 찾아 한 시간을 달려간 곳도 역시 closed!. 결국 five guys 에서 햄버거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그런데 저녁에 들렀던 레스토랑은 예상밖으로 멋지고 인상적이었다. 넓은 홀, 개방된 주방, 각종 해산물과 와인 바, 관광객이라기보다 지역주민들인 듯 싶은 많은 손님들이 제각기 즐겁게 담소하는 모습이 정말 정겹고 아름다왔다. 자연풍광이 주는 아름다움과 각양 인간들의 역동적인 활동이 주는 멋스러움은 그 결이 다른 듯 싶다.

이튿날 아침 포틀랜드 아트 미술관을 종인이와 함께 관람했다. 계획했던 곳이 아니었기에 큰 기대를 가졌던 것은 아닌데 의외로 전시내용이 훌륭했다. 고풍스러운 건물 외부에는 ‘인간’을 주제로 한 조각품이 설치되어 있었고 1층에는 다양한 인간들을 카메라에 담았던 사진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특히 Richard Avedon 의 마릴란 먼로, 에즈라 파운드, 마틴 루터 킹 등 유명인의 표정사진이 인상적이었다. 이름없는 평범한 시민의 일상을 담은 사진들의 무게감도 삶의 진정성이란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우리 모두도 저런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Picasso, Renoir, Degas, Mattise, Sisley, Sargent 등 낯익은 화가의 작품들도 있어 친숙한 느낌이었다. 현대화가들의 강렬하고 추상적인 이미지 가운데서도 간간히 눈길이 가는 작품이 없지 않지만, 역시 나같이 평범한 관람객의 입장에서 인상파, 낭만파의 그림만큼 한결같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장르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작가의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 있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느낌과 감동은 역시 주관적일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