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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정리

여러 날에 걸쳐 연구실을 정리했다. 2월 말로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내 공식적 활동이 끝나기 때문이다. 연구실의 책은 대부분 광주과학기술원 융합교육연구센터에 기증했다. 각종 복사물, 임명장, 제안서, 감사패 등은 과감히 폐기했다. 손으로 할 일과 연락처를 빼곡이 적어둔 1990년대의 수첩들, 이런 저런 사정을 담아 주고받은 편지, 오랜 기간 정들었던 필기구 등은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필요없는 낡은 자료들도 그것을 입수하느라 치룬 시간과 애씀, 추억과 애환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80년대 후반 처음으로 해외 한국학회의를 개최하느라 고심했던 기획자료들, 처음으로 만난 북한 학자들과의 회합에서 주고받은 논문들, 여러 나라의 연구소들을 방문하면서 받았던 기념품들 – 크건 작건 내겐 소중한 기억이 담긴 품목들이어서 개인 박물관을 만든다면 모두 진열해야 마땅한 것들이다.

그래도 이제 버려야 한다. 연구실 없는 생활을 새롭게 살아내야 한다. 돌이켜보면 40년이 넘도록 나는 5-7평 남짓한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서울대를 위시하여 내가 거쳐온 모든 대학들, 연구교수로 나가있던 해외의 대학들도 연구실 중심의 생활은 꼭같았다. 아마도 집보다 연구실서 보낸 절대시간이 더 많았을 터이니 가히 연구실 속 인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연구실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 그래야 가벼워질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연구실 없는 생활에 대한 약간의 허전함과 염려도 없진 않다. 당분간 아침에 일어나면 어딜 갈까 서성이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수업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함으로 극복할 일이다. 강의는 즐거움이면서 고통이었다. 특히 펜데믹과 인공지능의 충격이라는 미증유의 격변을 겪으면서 담당한 과학기술대학에서의 강의는 흥미로우면서 부담스러웠고 가르치며 배우는 현장이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대학에서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을 함께 이야기한 뜻이 어렴풋 느껴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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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2025년 12월 31일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은 옛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비교적 출입국이 원활했다. 하지만 자유롭고 편안하게 국경을 오가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생각에 이전보단 공항에서의 긴장감이 좀더 크게 다가왔다.

오는 비행기 안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일생을 다룬 영화를 봤다. 부제가 “목사, 스파이, 암살자”라고 붙어있다. 스릴러물 같은 느낌을 주려고 영화수입업자측에서 붙인 것이라는데 영화의 구성도 목사로서의 정체성이나 종교적 고뇌보다 히틀러 폭정에 저항하는 행동가로서의 본회퍼가 더 부각된 느낌이다. 대학시절 본회퍼의 책을 탐독하며 좋아했는데 그가 유니온 신학교 유학시절 뉴욕 할렘의 흑인교회에서 강한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는 사실, 피아노를 잘 치던 고전음악 애호가에서 재즈와 흑인영가에빠져드는 경험을 했다는 내용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가 ’주님은 교회나 종교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비단 독일 제국교회에 대한 비판만 아니라 미국의 블랙쳐치에서 확인되는 살아있는 영성에 영향받은 것일 수 있겠다 싶다.

영화를 보는 중 2026년을 맞이했다. 사실 태평양 상공을 날아오면서 시간도 변하는 중이었으니 정확히 언제 새해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쨋든 2026년은 이전보다 더 힘들고 염려스러운 상황이 도래하리라는 예감이 마음을 무겁게 했고 그래서인지 영화의 시대배경과 오늘의 현실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독일에 나찌즘을 찬양하기도 하는 극우세력이 급부상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독일의 재무장이 본격화되며 징병제가 추진되고 있는 현실이 1930년대 초반의 영화 속에서 겹쳐 보였다. 그 시절 나찌즘이 부지불식간에 학교, 종교, 문화, 예술 등 전 분야로 확산되고 전독일을 그 광풍 속으로 몰아넣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전례없이 속도가 빨라지는 오늘날의 상황은 더욱 위태로울 수 있을 터이다.

영화는 투사로서의 본회퍼 이미지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하지만 직접적인 정치투쟁가나 혁명가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책임성에 기반한 결단으로 그려진다. 히틀러 암살계획의 모의와 발각이라는 스릴러적 전율감을 흥미위주로 표현하기보다 그 전 과정에서 본회퍼를 견디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드러내려는 진지한 문제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감독은 디트리히 본회퍼를 당당하게 죽음으로 이끈 것은 바로 믿음이고 절대자 신 앞에 선 인간의 진지한 응답이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 나온 두 사람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그 하나는 본회퍼의 아버지 칼 본회퍼가 아들과의 대화에서 한 ’아직도 사람을 믿느냐?‘는 말이다. 빵만 주면 투표하는 사람들, 유태인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를 거침없이 내뱉는 사람들이 나찌의 광풍을 뒷받침하리라는 그 말은 현실 속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또 하나는 고백교회의 니뮐러 주교가 체포되기 전 강론에서 한 말이다. “나치가 사회주의자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기에 침묵했습니다. 나치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을 때도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란 이유로 침묵했습니다. 유대인을 잡아 갈 때도 나는 너무 늦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요. 나치가 나를 잡으러 올 때 나를 위해 대변해 줄 사람이 과연 남아 있을까요?”

흥미롭게도 미국의 트럼프를 추종하는 극우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미국의 민주당을 나치당과 일치시키고 민주당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히틀러 독재에 대한 본회퍼의 저항과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다. 트럼프 지지자이자 극우 기독교의 정치화에 큰 영향을 미친 저널리스트 에릭 메탁사스가 『본회퍼: 목사, 순교자, 예언자, 스파이』라는 책을 썼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흑인 공동체와 라틴계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오늘날의 정치적인 의도가 이 영화의 소비형태에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도 광화문 광장의 극우시위를 주도한 전광훈은 본회퍼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정치활동을 정당화했다. ’본회퍼의 길과 전광훈의 길‘이라는 시사논평이 실리는 웃픈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의 기독교 일각에서 독특한 영웅숭배, 특정 지도자 추종이 확산되는 현실이 이 영화와 기묘하게 오버랩되었다. 종교가 제도화되고 그것이 사회적 영향력을 뚜렷이 하게 될 때 외부로부터는 이용하려는 유혹이, 내부로부터는 힘을 과시하고픈 욕망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쓴 한 본회퍼 연구자는 영화가 본회퍼의 신학적 고민과 경건한 삶의 모습을 좀더 드러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본회펴가 초대 원장으로 사역했던 핑켄발데 신학원의 공동체적 생활, 즉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고 연주하고 축구도 하는 모습은 고백교회가 그런 삶을 통해 값비싼 은혜, 제자도, 원수 사랑, 홀로 있음, 함께 있음, 성경 읽기와 묵상, 기도, 섬김, 성찬의 중요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이었는데 다소 정치적 저항을 위한 훈련과정처럼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본회퍼가 종교없는 기독교를 주장한 것도 이런 유혹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일테다. 동시에 과연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기독교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는 여전한 숙제다. 뒤르켐이 말하는 ’시민종교‘의 형태로 전화하거나 요즘 말하는 가나안 신자를 떠올려볼 수 있겠지만 그것도 국가주의와 결합하거나 세속적 편리주의로 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말이다. 신학적 내면적 초월적 관심과 사회적 정치적 세속적 관심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치우치지 않을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그걸 찾아가는 길이 구도자의 삶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