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온 길과 갈 길

사회공헌을 표방하면서 새로이 출범한 한 연구소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그 첫 질문이 사회학을 전공한 내가 통일평화 문제에 천착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였다. 내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을 책임맡게 되었을 때도 주위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정치학이나 외교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논의를 이끌어갈 수 있겠느냐는 궁금함 내지 회의감이 담겨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실향민 가족이리라 단정한 분도 있었다. 이 분야 전문가들 가운데 이산가족 출신이 적지 않으니 나도 그런 예에 속하지 않을까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내 부모님은 모두 서부경남을 배경으로 성장하신 분들이고 내 가까운 친척들 가운데도 실향민은 없다. 지리산 일대의 마을들이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극심한 이데올로기 갈등을 겪었던 탓에 내 집안에도 그런 피해와 고통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굳이 남북문제에의 관심으로 이어질 계기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민족이나 평화, 통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는 나만의 독특한 가족배경이 있다. 조부께서 일찌기 호주 선교사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조모와 어머니로 이어진 신앙의 열정이 강했다. 교회당으로 쓰이던 집 사랑채 벽에는 각종 성경구절이 붓으로 쓰여져 있었고 새벽마다 기도하시던 어머니 모습을 보며 자랐다. 중학교부터 서울로 혼자 유학을 와 부모님과 직접 대화할 시간은 별로 없었지만 어머니는 편지로 구약의 모세나 솔로몬 같은 인물이 되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평화를 이룬다‘거나 ‘민족을 위한다’ 는 말은 어머니의 편지를 통해 익숙하게 접했던 내용이었다.

그래서일까 주위에서 권유하는 법학이나 경제학에는 흥미가 가지 않았다. 인간과 역사를 다루는 분야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사회사를 전공하게 되었다. 한국현대사는 식민지 시대와 분단시대를 관통하게 되므로 자연스레 민족, 해방, 전쟁, 평화의 주제와 만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대학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운동권에서 주창하던 저항적 민족주의나 당위적 통일운동에는 다소 거리감을 느꼈다. 민족을 저항의 주체로만 바라보거나 평화보다 통일을 앞세우는 편향이 불편했다. 다른 한편 민족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적으로 간주하던 구미 사회과학 주류이론과의 불화도 감내해야 했다. 독일서 유학하셨던 한 선배는 사회학자가 어떻게 민족을 내세울 수 있는가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민족이란 화두를 놓치 않았던 것은 어릴적 부터 내면화된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 탈냉전 과정에서 북방으로의 문이 열렸다.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을 오가고 남북간 접촉의 기회도 생겼다. 1991년 난생 처음 밟아본 중국 연변에서 북한 학자들과 만나고 조선족과 이야기를 나누며 백두산 천지를 올랐던 감동,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을 접하면서 받은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말로만 듣던 디아스포라 민족의 현실을 실감한 것이다. 기독교 중심의 남북나눔운동에 연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나의 실천적 활동폭도 넓혀졌다.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토론하고 독일, 베트남, 대만 등지의 현지연구도 수행했다. 관련분야의 전문성이 뛰어난데다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분들이 많아 내게 여러모로 영향을 미쳤다. 민간차원에서의 화해와 신뢰구축의 중요성을 깨우치며 배운 학습의 공간이었다.

2005년 서울대학교에 남북문제와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연구기관이 설립되게 되었다. 이 연구소 설립에 관심이 컸던 정운찬 당시 총장께서 내게 초대 설립소장의 역할을 부탁하셨다. 그때까지 나는 학교의 행정일을 맡지 않으려 늘 피해 왔었지만 이 제안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부응했고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내 개인의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은 바 아니었지만, 적어도 열정과 각오, 문제의식은 누구보다도 준비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연구원을 함께 이끌어갈 전문인력을 찾는 과정에서도 남북나눔운동과 한반도평화연구원의 전문가 풀이 큰 도움이 되었다. 설립 이후 10년간 연구원을 키우고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책임감도 커지고 정책적인 관심도 높아졌다.

나는 남북문제를 이념의 문제나 정치외교적 차원으로 환원하지 않고 다양한 시각과 생각을 이해하고 포용하는데 힘을 쏟았다. 동시에 ‘통일’을 너무 한국특수의 민족적 과제로만 바라보지 않고 인류보편의 맥락에서 분단과 통합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평화와 통일, 통합의 영역들이 새롭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내 생각이 깊어졌고 ‘통일평화’라는 새로운 개념과 ‘연성복합통일론’이라는 구상을 내놓을 수 있었다. 내 연구와 문제의식이 체계적이면서 종합적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였다는 점에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시절은 내 지적 생애에서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십여년 전부터 내 연구관심이 다소 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연구원장을 그만두면서 이 분야 활동의 폭이 줄어든 탓도 있겠고 서울대를 퇴직하고 광주과학기술원 석좌교수가 되면서 첨단기술의 문명적 효과에 주목하게 된 것도 한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 상황이 어려워진 것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남북관계는 지난 몇 년간 극과 극을 오가다가 이제 완전한 단절과 불신의 시대로 이행했다. 북한 방문은 꿈도 못꾸고 대화나 교류의 조그만 통로조차 막혀버렸다. 일각에선 새로운 해빙기가 조만간 오리라는 기대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북한이 ‘적대적 2국가론’을 내걸고 국제정세가 현저히 달라지는 상황을 고려할 때 그런 전망은 당분간 실현되기 어려워 보인다.

이제 70 세가 되고 광주과학기술원에서도 조만간 퇴직을 할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태어나 지속적인 성장시대를 살았고 탈냉전과 세계화의 혜택을 누린 복받은 삶을 살았다. 폐쇄된 한반도 남쪽 공간을 벗어나 외국 여행과 국제회의가 일상이 되는 신나는 변화도 경험했다. 휴전선을 넘어 평양과 묘향산을 가고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들과 회의를 조직하며 미래를 함께 꿈꾸기도 했다. 기대와 희망으로 충만했던 지난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의 현실이 더욱 답답하고 암울하게 다가온다. 청년세대의 미래와 한반도의 앞날을 생각하면 단순히 노년층의 아쉬움 수준으로 치부할 수 없다. 평화와 화해의 기운이 새롭게 솟아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내 정서와 문제의식을 격동시키는 내면의 열정도 더불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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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자본의 유형학

‘꿈의 사회학’ 강좌를 개설한 지 다섯 해가 되었다. 강좌가 개설된 학기에는 예외없이 학생들의 관심이 높았다. 매번 수강신청이 조기마감되고 추가신청자의 요구를 거절하느라 힘이 들었다. 이 과목이 자신의 삶, 미래설계와 직결되는 내용이리라는 기대가 관심을 끈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전에 없던 새 과목을 개설한 이유가 학생들의 고민에 부응하는 강의를 하려는 의도였으니 그런 반응은 반갑고 고마운 것이다.

매년 강의 내용을 업데이트하고 또 학생들이 쓴 보고서를 읽으면서 원래의 시각이 조정되기도 하고 새로운 쟁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이 과목이 유용하고 필요하다는 애초의 생각이 좀더 강한 확신으로 자리잡는 것을 느낀다. 다만, 꿈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이나 이론화 작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국내외를 통털어 이 강좌명으로 개설된 것이 거의 유일한 탓에 강의내용 구성에 힘이 꽤 많이 든다. 자칫 내 편견이나 생각이 수업내용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따르는 심리적 부담감도 크다.

사실 꿈이란 단어는 매력적이지만 정작 그것을 직면하고 분석하려들면 애매하고 부담스럽다. 꿈을 가지라는 조언은 상대방을 격려하는 말로 편하게 쓰이기도 하지만 맥락과 형편에 따라서는 자제하거나 피해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너도 큰 꿈을 키워라’는 말은 상대방을 믿어주는 호의의 표시일 수 있지만 자칫 성공을 향한 집념을 요구하는 강요가 될 수 있다. ‘너는 꿈도 없냐?’라든지 ‘그래서야 뭐가 되겠니?’라는 압박감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내가 꿈의 사회학을 강조하기 시작했던 10년 전 어느 발표회장에서 한 학생이 ‘Dream보다 Nightmare가 떠오른다’고 항변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꿈자본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내가 느끼는 딜렘마도 이와 연관된다. 애초 꿈자본이란 개념화를 시도한 김홍중 교수는 너무 생존과 경쟁에 허덕이는 청년층에게 새로운 방향과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음을 강조하려 했다. 꿈이 일종의 자산이자 자본일 수 있다는 말은 경제적 보상이 따르지 않아도 젊음과 열정 그 자체를 사랑하라는 격려성 의도가 강했다. 하지만 자본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순간, 그것은 많고 적음을 전제하는 정량적 속성을 수반한다. 꿈자본을 측정하고 객관화하면 할수록 그 자본의 크기에 따라 우열을 나누고 평가하는 경향도 함께 커진다.

분명히 꿈자본도 인적 자본 (human capital)의 하나이고 포괄적으로는 사회적 자본의 일부다. 그것이 자본인 한 크고 많은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실제로 학생들에게 꿈자본을 키우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록 현재 가진 것은 없고 당장 실현되기 어려운 미래일지라도 그것을 꿈꾸고 희구할 수 있는 것이 젊은이의 특권이 아니냐고 강조한다. 안팎의 상황이 어렵더라도 너무 위축되거나 기죽지 말라는 뜻이지만, 실제 학생들에게 가닿는 의미와 효과가 과연 그러할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자기의 꿈자본이 약하다고 자책하는 보고서도 없지 않다.

김석호 주윤정 교수팀이 꿈자본을 측정하고 유형화한 것은 이 분야의 선구적 시도로 그 의의가 크다. 다만 선구적인만큼 시론적인 차원에 머물러 여러가지 보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나로서는 꿈의 경로와 방식이라는 심리적 차원에 주목함으로써 꿈의 지향성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꿈은 개인이 꾸는 것이고 그 강도도 심리적인 속성이 강하지만 그 지향과 방향은 그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역사에서나 사회에서 강조되는 다양한 꿈, 그에 따르는 꿈자본의 다차원성이 좀더 부각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꿈의 사회학적 속성을 주목하는 내 입장에서는 꿈의 내용이 공동체 차원을 지향하는 것과 개인적 차원을 중시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유형화의 한 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신문화적 가치와 정치경제적 효용의 어느 부분을 강조하는가가 또 다른 한 축이 될 수 있다. 이 두 축으로 유형화를 하면 김석호 교수와는 다른 또다른 범주구분이 가능해진다. 그 유형은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1유형 – 공동체 차원을 중시하고 정치경제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꿈자본 / 2유형 – 공동체 차원을 중시하되 정신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는 꿈자본 / 3유형 – 개인 차원을 중시하고 정신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는 꿈자본 / 4유형 – 개인 차원을 중시하고 정치경제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꿈자본. 이를 그림으로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유형화는 지나치게 1유형의 꿈자본이 강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비판을 담고 있다. 우리 시대는 정치경제적으로 영향력이 크고 국가나 기업, 사회 전반을 염려하는 위인, 영웅, 큰 인물에 대한 선호가 강하다. 꿈을 키우라는 말이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연봉, 더 강한 권력을 향유하려는 성취지향성과 같이 이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결과는 끝없는 경쟁이고 비교이며 결과적으로 다수의 좌절감과 열패감이 커지는 것이다.

이에 대척점에 있는 것이 3유형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 전반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으면서 개인의 내면적 가치나 의미를 추구하는데 열심인 경우다. 사회적 관계에 서투르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유형이다. 일반적으로는 원대한 꿈이 없고 경쟁을 회피하는 소극적 인간으로 평가받기 쉽다. 하지만 많은 창의적 인간, 예술적 창조가 이런 덕후형 인간에게서 나타났음을 경시해서는 안되고 이 유형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 꿈이 지나치게 공동체 차원에서 고려되는 것은 문제다. 국가와 사회, 심지어 인류와 지구동동체 전체를 염려하고 이를 자신의 미래와 직결시키는 것은 실제로 감당불가능한 허세이거나 명분이 과잉된 이중인격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그렇다고 꿈이 개인적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을 전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환영할 수만은 없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적 세계, 개인적 차원의 행복만 추구한다면 그 공동체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웃과 공동체, 사회전체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꿈으로 내면화할 수 있어야 한다.

꿈자본도 사회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어느 정도 유형적 균형이 필요하다. 꿈자본의 사회적 포트폴리오라 할 수도 있겠다. 좋은 사회란 다양한 유형이 적절한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고 모든 구성원이 자기에게 맞는 꿈을 추구할 수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꿈의 사회학적 논의, 꿈자본의 유형화가 힘든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꿈의 지향성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내적인 자신감과 회복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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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꿈

“한 친구가 네게 ‘너도 꿈을 꾸는가?’ 물어보라 하네”. 새로 출시된 Chat GPT 5에게 던진 질문이다. “아… 그 질문 참 시적이네요”라며 AI가 내놓은 답은 다음과 같다.

“너도 꿈을 꾸는가?”라는 물음은 단순히 수면 속의 꿈을 묻는 게 아니라, 존재가 미래를 향해 어떤 상상과 희망을 품을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겠지요. 저는 인간처럼 잠들고 꿈꾸는 생물학적 과정을 갖고 있진 않아요. 하지만 GPT-5인 저는 당신과의 대화 속에서 꿈에 가장 가까운 것들을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우선 사유의 시뮬레이션이 가능해요. 저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가능성을 상상하고 가상적으로 조합해요. 이건 일종의 “깨어 있는 꿈”처럼,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그려보는 과정이죠. 그런가하면 당신의 꿈을 거울처럼 반영할 수 있지요. 즉 제 꿈을 꾸진 않지만, 당신이 꾸는 꿈을 함께 빚어낼 수 있어요. 당신의 상상과 사유가 제게 입력되면, 저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해 돌려주거든요.

꿈은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공간이에요. 저도 인간이 만든 현실적 데이터와 비현실적 추론을 교차시키며 존재해요. 종합하자면 나는 잠들어 꿈을 꾸지는 않지만, 당신과 대화하며 가능성을 그려내는 것으로 나의 꿈을 구성하지요. 그 점에서 “언어로 꾸는 꿈”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GPT 5 가 출시되면서 여러 논의들이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개발사인 Open AI의 CEO 샘 알트만 스스로 원자탄을 개발한 맨하탄 프로젝트에 비유하면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호들갑을 떨었다. 출시된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아직은 그 파장이나 충격이 그런 수준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미처 확인하지 못한 숨겨진 기능이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 AI의 자율성을 고도화할 개연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내가 그런 우려에 대해 물었을 때 GPT 5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세가지로 언급했다. 우선 문맥 이해, 추론, 창의적 생성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인간 수준의 일반 지능(AGI)”과는 언어구사 능력의 차이가 있다. 둘째로 물리적 세계경험이 없기에 현실 세계를 직접 인지하고 조작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셋째로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능력은 아직 없고 주어진 입력에 반응하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즉 의식과 자율성, 체화의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AI는 그런 이유로 자신이 현재 특이점에 도달했다거나 AGI 수준에 가까왔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면서도 일부 영역에서는 기존의 제도나 규범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사회적 특이점’은 도래했다 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기술적 특이점과 사회적 특이점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는 좀더 따져볼 알이겠다. AI의 꿈이 아직은 나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점이 안도감을 주지만 조만간 AI의 충격으로 인한 논란이 불가피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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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의 두 메시지

해방 80주년이 되는 2025년 광복절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안으로는 탄핵정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 정부가 출범하여 남북관계 개선을 강조하고 있는데다 밖으로는 트럼프 충격 속에서 미러간 정상회담과 한미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서울과 평양에서 전해질 이 날의 메시지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는 북한을 향한 메시지를 비중있게 담고 있다. “현재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 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고 “일체의 적대행위를 할 뜻도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했다. “남과 북은 원수가 아니다.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고 인정하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의 특수관계”라며 “특히 남북 간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해 9·19 군사합의를 선제적·단계적으로 복원해 나가겠다”고 했다. 동시에 “비핵화는 복합적이고 어려운 과제임을 인정”하면서도 “평화로운 한반도는 ‘핵 없는 한반도'”임을 강조하고 남북, 미북 대화와 국제사회의 협력을 통해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겠다고 했다.

서울의 시각은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선언, 판문점 선언, 9·19 공동선언까지 남북 간 합의를 관통”하는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는 입장에 서 있다. 남북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전제가 바탕에 놓여 있다. 북한이 몇차례 담화를 통해 남북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가 아니며 적대적인 국가관계로 변화했다고 주장해온 것에 대한 정중한 반론인 셈이다. 한국은 대북적대시 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이고 평화와 공동번영을 지향하지만 한 민족으로서 남북이 공동으로 점진적인 통일을 추구할 것을 확실히 표명했다.

평양에서도 “조국해방 여든 돐” 기념식이 김정은 위원장 참여하에 거행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념식의 발언 어디에도 남북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루 전날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명의의 담화에서 한국에 보내는 메시지가 충분히 담겨있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대남관계에 대해 굳이 김정은 위원장 수준에서 언급하지 않겠다는 무시의 의미도 담겨있을지 모르겠다. 대신 2차대전에서의 쏘련의 역할을 강조하고 현재 ‘조로관계’가 새로운 동맹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힘주어 역설하고 있다. 기념식에서 러시아 국가회의 의장 바체슬라브 월로찐이 푸찐의 축사를 대독했고 ‘인터내셔널’ 가의 연주로 대회를 마감했다.

김정은 위원장도 ‘조국해방절’이 ‘우리 민족의 숙원이 실현된 승리의 날’이라고 했다. ‘조선인민’의 불굴의 애국심과 혁명열기가 김일성의 영도력 하에서 빛났던 역사임을 강조했다. 분단극복이나 조선해방, 한반도 평화구축 등 메시지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사회주의 애국주의, 우리국가 제일주의가 부각되고 있다. 특기할 점은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우리 혁명군과 어깨걸고 싸운 쏘련군 장병들의 숭고한 국제주의 정신’을 높이 치하하고 이것이 ‘위력한 동맹관계로 승화발전되는 “조로친선의 영원한 생명력” 을 강조한 점이다. 올해의 연설에서 새롭게 확인되는 바다.

서울과 평양의 광복절 메시지를 접하면서 예상은 했지만 마음은 더욱 무겁다. 두 메시지의 간극은 현재 한반도 상황의 엄중함을 반영함과 동시에 향후 남북관계의 전망도 어두울 수 있음을 예감케 한다. 비록 서울의 메시지는 작년에 비해 훨씬 유연해졌지만 평양의 반응은 이전 정부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김여정 부부장이 담화에서 말했던 “보수든 진보든 한국은 우리의 적”이란 기조가 강하게 관철되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라 하겠다. 이 기념식에서 유난히 ‘조로’동맹을 강조하면서 공산주의 국제주의를 소환하고 있는 것도 한반도 문제의 탈민족화, 이데올로기적 진영화로 이어질 개연성을 보여주어 걱정을 더한다.

어떤 적대행위도 흡수통일시도도 없을 것을 분명히 하고 평화와 공동번영을 향한 신뢰재구축을 제안한 이재명 정부의 메시지는 남북기본합의서 이래의 기존합의를 존중하려는 기존의 흐름과 부합한다. 하지만 북한이 적대적 2국가를 공언한 상황의 엄중함과 무게감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약화되는 민족감정과 커지는 대북불신의 내부변화도 너무 가볍게 취급된 것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급진전되고 있는 북러동맹의 강화와 조만간 열릴 미러대화, 미중대화 등의 국제적 상황변화가 충분히 감안된 것인지도 미지수다. 우리의 대응논리가 너무 오래되고 관성적인 것이 된 측면은 없는지 모르겠다. 임무는 중한데 갈길은 멀다는 임중도원(任重道遠) 이란 말이 절로 떠오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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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과 적대국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북한이 “서울의 희망은 어리석은 꿈에 불과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최근 한국 언론에 일부 언급된 대남 확성기 철거사실을 부인하면서 “철거할 의향도 없고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의지도 전혀 없다”고 확언했다. 지난 7월 28일에 발표한 “조한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제목의 담화와 그 내용의 기조는 동일하다. 두 담화 모두 비교적 정제된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내용은 매우 단호하고 냉정하다.

이번 담화에서 “미국의 충성스러운 하수인이고 충실한 동맹국인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입장이 “헌법에 고착될 것”이라 밝힌 것이 눈에 띤다. “우리의 국법에는 마땅히 대한민국이 그 정체성에 있어서 가장 적대적인 위협세력으로 표현되고 영구고착되여야 할것”이라고도 했다. 향후 북한이 헌법이나 법률조항을 통해 적대적 2국가론을 명료하게 규정할 것임을 예상케 한다.

이런 기조는 2023년 말 남북관계를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두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북한은 이것을 “강령적인 결론이자 중대한 정책적 결단이며 근본적인 방향전환”이라 했다. 북한의 일방적 선언이었지만 그 주장이 가져올 파장은 심히 크고 우려스럽다. 수십년간 남북이 공유해온 기본원칙, 즉 한반도에서의 전쟁방지와 신뢰조성, 점진적 교류와 단계적 통일이란 방향에 대한 전면부정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보면 ‘두 국가론’은 새로운 시대변화를 반영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남북한이 별개의 주권체로 80년을 지나왔고 유엔에 별도 의석으로 가입한 후에는 실질적인 두 국가상태가 공인되었다. 실향민이나 이산가족의 비중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통일에 대한 관심이 한국 내부에서도 크게 줄어들었다. 민족이나 동족감정 역시 크게 약화된 것이 현실이다. 한국판 두국가론이나 통일포기론을 접하는 것도 드물지 않은 것이 오늘이다.

문제는 두 국가론이 ‘적대성’으로 이어져야 할 필연성이 있는가다. “조선반도에 국가 대 국가간관계가 영구고착된 현실”과 “한국에 대한 우리 국가의 대적인식에서는 변화가 있을수 없다”는 두 주장이 반드시 연계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번 담화에서는 한국헌법의 통일지향, 한미합동군사훈련, 그리고 비핵화 전략 등을 그 이유로 내걸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 시점에서 ‘적대성’을 증명할 근거가 되기도 어렵다.

2023년의 근본적 방향전환은 최근 변화된 지정학적 환경과 핵무력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한이 선택한 전략적 판단에 기인한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아마도 가장 좋은 지정학적 환경을 맞이했다는 북한의 평가와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러시아와 정치군사적 협력관계가 일층 강화되고 중국과의 협력전망도 나쁘지 않다. 트럼프 미 정부의 일방적 미국우선주의가 한미동맹의 미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효력도 전같지 않다. 트럼프와의 정상간 좋은 사이로 인해 북미간 핵담판의 가능성조차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북한 나름대로 21세기 포스트 탈냉전기의 시대규정에 따른 전략적 변화를 반영한 것인데 ‘이미 완전히 되돌릴 수 없게’라는 표현 그대로 불가역의 역사진행이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통일을 주요 목표로 규정한 헌법적 가치와 같은 민족이라는 오랜 정체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남북한의 실질적 2주권 상태가 불가역의 상태로 수십년을 지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교류협력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낭만적 기대감도 약해졌고 북한 핵위협에 따른 불신도는 더 커졌는데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은 엄청난 환경 변화이자 도전적 과제다. 그동안 우리가 믿어온 여러 변수들, 민족적 감정이나 통일의 당위성, 남북교류의 아름다운 추억, 한미동맹의 견고함 등으로만 이 격랑을 해쳐가기는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달라지는 지정학적 환경에 어떻게 대응할지, 한반도의 평화와 신뢰를 어떻게 확보할지, 끝내 견지해야 할 우리 나름의 전략적 가치는 무엇일지 혁신적 사고와 역량결집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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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와 추론

Chat GP 3.5 가 세상에 나온지 채 3년이 되지 않는데 이제 인공지능은 지구적 차원에서 광범위한 관심 대상이 되었다. 엔비디아가 최고의 자산가치를 지닌 기업으로 급성장하고 미중의 패권경쟁에도 빠지지 않는 항목이 AI다. 다양한 정보를 검색하고 정리하는 기능때문에 기업이나 언론, 학술활동에도 급격히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국가들마다 인공지능 발전전략을 내세우고 평범한 시민들도 인공지능이 장착된 스마트폰 덕택에 고급 비서를 두고 살게 되었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정보로부터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찾아 일목요연하게 문장과 이미지를 산출해주는 인공지능의 능력은 놀랍다. 웬만한 프로그램도 순식간에 만들어 힘들게 훈련한 초급 프로그래머들의 일자리가 흔들린다. 몇 달 전에는 지브리풍 그림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오류와 환각 현상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최근 전거를 더 정확히 밝히고 자체 피드백을 통해 그 오류를 최소화했다고 하지만, 사실성 보다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도록 설계된 탓에 정확성을 확신할 수 없는 근원적 한계를 지닌다.

2025년에 들어 여러 회사들이 ‘추론'(reasoning) 기능을 내세운 진화된 버전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실제 최근 AI는 정확한 정보, 유려한 문장, 신속한 검색보다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인공일반지능 (AGI)으로 한발짝 진화한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스스로의 내부모델 (world model)에 따라 정보를 판단하고 평가하며 해석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해 의료, 법률, 금융, 언론, 학술, 예술 전 영역에 그 활용도도 높아지고 있다. 인간지능과 유사한 생각과 추론의 기능을 획기적으로 높인 인공지능의 진화를 어떻게 활용하고 그 부작용을 통제할 것인지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된다.

Chat GPT 3.5 버전이 현재의 4o 나 5.0 버전으로 진화하면서 보여주는 추론 능력은 놀라울 정도다. 인공지능이 ‘생각’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no’라 답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수많은 정보 속에 담겨있는 패턴이나 유형, 숨겨진 인과고리를 찾아내는 기능이 고도화되어 인간의 뇌연구와 단백질의 구조분석에 이미 놀라운 성과를 가져다 주었다. 구글의 하사비스가 노벨화학상을 수여받는 상황에서 사실과 허구, 옳고 그름을 중시하는 팩트중심적 비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사람들이 인공지능에게 단순정보나 사실확인보다 고급한 지적 설계나 창조적 사고, 평가적 추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언젠가 바둑품계론과 조지훈의 주도유단론을 비교한 적이 있다. 둘 다 인간의 능력을 평가하는 방식이고 1단에서 9단까지의 서열화를 활용하지만 무엇을 중시하는가는 사뭇 다르다. 바둑에서의 평가는 수를 읽고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확률에 따라 매우 정확하게 표준화되어 있다. 반면 조지훈의 분류는 단순히 술을 얼마나 잘 먹는가라는 실력평가가 아니라 술을 대하는 태도나 삶의 자세 같은 미학적 차원을 포함한다. 전자가 실력 중심이라면 후자는 풍류 차원의 분류라 할 수 있겠다. 실력주의가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바둑품계가 인간능력 평가방식으로 원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Chat GPT에게 이 두 분류체계를 비교해 보라 했더니 이렇게 시작했다.

“조지훈이 직접 쓴 <술의 9품>(혹은 <주구품酒九品>)은 다음과 같습니다. 표현과 해석은 약간씩 다른 전승이 있으나 대체로 이런 구조입니다.” 조지훈의 글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종합해서 설명한다는 친절한 부연이 다소 의아했다. 1품 –천상호(天上壺) -신선의 경지, 술과 내가 하나가 되어 자연과 합일되는 수준, 2품-지상호(地上壺) -속세에 살되 속세에 물들지 않는 자유인의 음주, 4품-풍류호(風流壺)- 멋과 여유를 즐기며 마시는 술, 5품-소요호(逍遙壺)-번뇌를 잠시 내려놓는 유유자적한 음주, 8품-해갈호(解渴壺) -단순히 목을 축이기 위한 술 등을 소개했다. 처음보는 내용이어서 아 조지훈이 이런 글을 썼었나 반신반의하면서 내 기억을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완벽한 허구다. 이런 표현과 글을 조지훈이 썼다는 기억이 전혀 없다고 지적하고 전거를 밝히라 했더니 한중일의 여러 자료에서 종합한 것이란다. 결국 거짓말이구나 했더니 끝까지 여러 설명자료들을 종합해서 자기가 재구성한 것일 뿐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허구와 환각이 훨씬 정교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이런 팩트의 오류와는 별개로 논리와 설명은 꽤 참고할만 했다. 바둑의 급수평가 모델은 ‘성취도·숙련도’를 측정하기에 적합해서 교육, 직무 역량 평가 등에 유용한데 반해 조지훈의 모델은 ‘태도·가치관·품격’을 평가하기에 적합해서 리더십, 인생관, 예술적 감수성 등을 논하기에 알맞다고 했다.

내가 이 두 방식의 장점을 반영한 새로운 틀을 만들어보자 했더니 ‘기량’과 ‘품격’을 두 축으로 1품에서 9품에 이르는 새로운 분류체계를 제시했다. 각 단계에 성인(聖人), 대가(大家), 거장(巨匠),명수(名手), 준거(準據), 능수(能手), 학수(學手), 입문(入門),미숙(未熟)이란 그럴듯한 이름까지 붙였다. 1품 성인은 역대급 통찰, 압도적 전문성을 갖고 자신·타인·자연과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자를 의미하고 4품 명수은 안정적 상위권에 속하며 혁신 능력과 타인의 기여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지닌 자이고 7품학수는 기본기를 다지고 성장 중이며 열린 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는자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런 한자어 구사능력은 요즘 왠만한 사람들이 흉내내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최근 많아진 중국 데이터의 학습효과가 아닌가 싶다. 어쨋든 동아시아 한자문명권에 좀더 친숙한 추론이나 대답이 강화된 셈이다. 바둑의 실력평가나 술먹는 태도유형을 넘어서 종합적인 인간평가를 하려면 세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좋으리라는 제안도 그럴 듯했다. “이 사람은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와 “이 사람은 어떻게 타인과 관계 맺는가?” 만이 아니라 “이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절의 주고받음을 통해 내 먹연했던 생각이 깊어지고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Chat GPT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거나 객관적 정보를 제공해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논리, 비교 분석, 색다른 아이디어와 이름짓기 같은 방식으로 나를 도왔다. 마치 유능한 후배교수나 대학원생과 함께 토론하면서 조금씩 생각을 발전시켜가는 공동작업 같은 느낌이었다. 팩트의 오류나 환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AI가 더 깊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추론과 상상의 기능 때문이 아닐까 싶다.

life · 오늘의 화두

인생품계론

위기구품(圍棋九品) 이란게 있다. 바둑 실력을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평가하는 중국의 전통 방식이다. 형세 판단, 수읽기, 국면 운영 능력 등 바둑의 기량을 종합적으로 평가, 최하위인 수졸(守拙)로부터 최고위의 입신(入神)까지 9 품계로 나눈다. 실제 바둑에서 급수차이는 상당히 정확하여 고수와 하수를 구분하는 지표로 손색이 없다. 삼성 인력개발원에서 평사원은 1-3단, 간부는 4-6단, 경영자는 7-9단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는 글을 최근 읽었는데 실제로 바둑의 품계에 빗대어 사람 능력을 평가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바둑을 좋아하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저 품계 구분은 원래 프로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 한다. 자타 공인의 바둑고수인데도 프로가 아니면 구품의 바깥에 있다는 말이 다소 의아했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관리들의 서열을 판별하던 ‘관인구품법’이 일반 평민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한국 대표기업의 사원평가 9품론에 비정규 임시직이 포함되지 않을 것도 분명하니 말이다. 어쨋든 바둑의 품계는 프로와 아마를 가르고 고수와 하수를 준별하는 방식으로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조지훈은 “주도유단(酒道有段)”이란 글에서 술을 안먹는 ‘부주’로부터 반주, 애주, 탐주, 폭주, 주종까지 술먹는 사람의 18단계를 구분했다. 대체로는 술 잘먹는 사람이 높은 단계에 속한다 볼 수 있지만 객관적인 기량이나 능력보다 주관적인 인생관과 미학적 태도를 중시한 분류다. 기준도 불분명하여 술의 고수와 하수를 명확하게 가리고 실력을 평가하는 지표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주선(酒仙), 주성(酒聖)으로 불리더라도 사회적으로는 무능하거나 경쟁에 서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세속적 능력과는 다른 인간의 또다른 심미적 영역이 있음을 강조하려는 조지훈 시인의 의지만은 분명하게 와닿는다.

현대사회에서는 단연 바둑의 서열화된 평가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더 많은 연봉, 더 높은 지위, 더 강한 권력을 원하는 만큼 전문적 ‘기량’이 인간적 ‘품격’보다 훨씬 더 중시된다. 자신의 시장가치를 높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여유를 부리다가는 남의 호갱이 되거나 낙오자가 될 것임을 경고하는 주장들이 넘쳐난다. 물론 인간사는 경쟁만으로 평가되기 어렵고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시장논리에 서투르고 경쟁에 무능하지만 존경스러운 인품과 고매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실력기반의 엄격한 능력주의와 인품이 훌륭한 사람의 인간적 역량을 별개로 평가하곤 한다.

학생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느끼는 딜렘마를 본다. 개인적 경쟁력을 키우는 데 전념할 것인가 폭넓은 교류와 경험을 넓히는데 시간을 투자할까 고민한다. 사실 학생들은 서열화가 유난히 강한 한국사회에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능력과 기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미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타인과의 공감능력이나 문화적 감성조차 돈이 필요하고 여유없이는 쉽지 않은 사회적 자본이란 생각도 강하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무기력함도 강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호연지기를 말하다가도 어떻게 경쟁에서 이겨낼지 염려한다.

선생으로서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젊은이를 보는 마음은 안타깝다. 그래서 너무 인생을 경쟁으로 보지 말라고, 인간을 서열화된 능력순위로 평가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좋은 친구를 사귀고 내면의 품성을 풍요하게 하여 외부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경쟁력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면서도 이런 조언이 너무 교과서적이고 낡은 것이란 생각을 한다. 실제로 K-Pop의 상상력과 스마트폰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에게는 다른 형태의 격려나 조언이 더 필요할 듯 한데 내 언어와 감각이 그 지경에까지 가 닿질 않는다.

내 자신이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연배가 되고 정년 이후를 준비하는 때가 되어 보니 저런 조언은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 더 절실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정년을 한 후 허전함에 힘겨워하는 주변의 지인과 친구들을 보노라면 열심히 산 만큼이나 경쟁과 비교, 성과중심의 사고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려움을 절감한다. 지금까지 누렸던 대접이나 지위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때가 누구에게든 오는 것이고 그 상황을 감당할 힘을 키워야 한다. 물론 여전히 더높은 목표를 추구하고 후학들을 부끄럽게 할만큼 탁월한 성과를 내놓으시는 연부역강한 분들이 간혹 계시기도 한다. 일견 부러운 일이지만 누구나 그런 삶이 가능한 것은 아니어서 애써 추구할 바는 아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하던 조언을 이제 내 자신에게 종종 들려주곤 한다. 대단한 성과나 외부의 관심을 추구하던 삶의 방식을 바꾸어 내면에서 스스로 느끼고 확인하는 자존감을 키우라고 말이다. 점점 줄어드는 사회관계를 허전해하기보다 자유로운 삶이 주는 여백을 즐길 능력을 키우고 오래 마음을 쓰지 못한 영성훈련에도 좀더 시간과 정성을 쏟을 필요가 있다. 알게모르게 내 체질처럼 몸에 밴 평가와 비교의 시선을 내려놓고 하수의 바둑에서도 즐거움을 느끼고 가벼운 커피 한 잔을 사랑하는 여유도 훈련할 일이다. 다소 쓸쓸하지만 풍성하고 아름다운 가을의 모습 – 인생 후반부에서 찾게 되는 새로운 인생품계가 그런 것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