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진주문고 전시

하동에서의 전시가 진행되는 중 뜻밖에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진주지역 문화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여대표는 감사하게도 내 전시를 진주에서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때마침 진주문고 40주년을 기념하는 해여서 여러 전시가 기획되고 있는 터라 그 일환으로 전시로 7월 29일부터 8월 10일까지 진행되었다.

진주문고라는 큰 공간, 현대적 분위기의 전시실이 하동 빈산갤러리와는 또다른 느낌을 주었다. 고즈녁한 풍경이 없는 대신 서점과 연결되어 책을 보러오는 많은 사람들과 자연스레 만나는 장점이 크다. 박경리 작가를 좋아하는 90대 어르신도 만나고 20대 청년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박경리 선생과 내 어머니가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란 생각때문인지 특별한 친근함을 느꼈다. 진주여고(일신고녀)는 작년에 100주년을 맞았는데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의 하나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외우 이종민 교수와 김사인 시인이 우정출연해 주어 작가와의 대화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교수는 생각지도 않게 그동안 내가 간간히 쓰고 그린 작품들을 모아 ppt 로 참석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나를 ‘작가’ 처럼 대우해 주었다. 김사인 시인은 진솔하게 내 글씨 속에 담긴 정성을 읽어보라고 덧붙임으로써 내 격을 높였다. 박남준 시인, 한길사 김언호 대표도 자리를 함께 했고 지역의 문화계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다. 진주와 마산의 누이 가족도 참석해 주어 감사했다. 다음날에는 정근식 교육감, 한경구 교수, 김시연 사장 등도 내려와 격려해 주었다. 마지막날엔 전 인제대 총장 성창모 박사가 힘든 발걸음을 해주었다.

온종일 진주문고를 중심으로 책과 사람과 문화의 연결이 신선하게 이루어지는걸 경이롭게 경험했다. 건강한 지역의 문화생태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 단면을 본 느낌이다. 이 소중한 경험을 어떻게 기록해둘까 고민하던 중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의 글을 접했다. 과분한 평가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저런 정성과 노력이 진주문고 책방을 주목할만한 문화공간으로 만든 원동력이었으리라는 생각에 그의 글 일부를 옮긴다. 그 바램대로 간밤의 단비같은 시원함과 풍성함이 사회 곳곳에 가득하길 기원한다.

[박명규 서예전 2] – 진주문고 여태훈

하동 악양 빈산 갤러리에서 시작된 박명규 서예전이 진주에서 끝났다. 박경리 선생 탄생 100주년, 진주문고 창립 40주년 맞이 특별 기획이었다. 열흘간 전시된 작품은 수많은 갤러리의 탄성을 자아냈고 비치된 방명록 3권이 모자라게 감상평을 남겼다.

전시 이튿날 대담이 백미였다. 이종민 교수의 박학다식과 순발력 있는 진행, 박명규 작가의 막힘없는 술술 답변, 두 분을 오가며 빠진 것은 채우고 모자란 것은 살을 붙여 완벽한 보충을 해주신 김사인 시인. 2시간을 넘겨도 자리를 꽉 채운 독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세분의 정담에 귀를 기울였다.

작가와의 만남 다음 날(7.31)엔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이 전시장을 방문했다. 권순기 경남 교육감도 오셨다. 덕분에 경남과 서울시 교육을 책임지는 두 수장이 저희 서점에서 자리를 함께한 영광스러운 장면을 남기게 되었다. 두 분은 기꺼이 서점을 위한 응원과 모델을 자청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지필묵을 보고 연필보다 붓을 먼저 잡았다는 박명규 작가. 작품은 필법에 얽매이지 않았지만 단아하고 자유롭다. 칠순을 넘긴 노학자의 꼿꼿한 기상이 낡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적인데 캘리그라피와는 다른 질감을 보여준다.

전시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을 사연과 사람은 남았다. 책과 사람이 만나, 사람과 사람을 잇는 40살 책의 집에 기분 좋은 빚과 빛이 쌓여만 간다. 모처럼 간밤부터 시작된 단비가 지리산 자락에 내린다. 사납지 않은 순한 비가 메마른 대지를 흠뻑 적시고도 남아 섬진강을 채우고 남해로 잘 흘러가기를…

life · 오늘의 화두

박경리 100주년 기념 서예전

6월 27일부터 7월 18일까지 개인 서예 전시회를 열었다.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전시로 “비오고 바람불고 눈오고”라는 표제로 하동의 작은 갤러리 빈산에서 열렸다. 5년 전 서울대에서 전시회를 한 적이 있고 간간히 작품 의뢰를 받기도 했지만 막상 ‘초대전’이나 ‘서예가’라 적힌 것을 보노라니 계면쩍음이 앞서지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설렘도 함께 느껴진다.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 너른 벌판을 내다보는 언덕, 폐가를 갤러리로 만든 작지만 정겨운 전시장 – 최참판댁의 크고 웅장한 건물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전시장으로 올라오는 돌담길, 소박한 갤러리, 그 앞 마당의 감나무가 마치 토지속 평범한 농민들이 살던 현장에 와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박경리 선생도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과 시, 대담 중에서 마음에 와닿는 글들을 골라 만든 23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적절한 구도와 서체를 구상하느라 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쓸수록 모자람을 느끼고 아쉬웠지만 그럴수록 새로운 시도를 할 동기도 생겼다. 그 애씀 속에서 나름 아름다운 한글의 조형미를 제법 살렸다는 자부심도 가져보는 전시다. 김석영 님이 초한 갤러리 빈산의 “기획의 글”을 옮겨 적는다.

고난을 통해 피어나는 우주적 생명의 찬가 – 박명규 서예전에 부쳐

“사시장철 갠 날만 있다믄 그기이 어디 극락이겄나.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오는 그기이 땅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이치이드시 사람으 경우도 매한가지 이치일 기니…….” 소설 『토지』 속 윤보의 이 한마디는 박경리 작가가 평생을 통해 일궈온 ‘생명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 선생은 인간의 삶을 자연의 거대한 순리와 동일선상에 놓았다. 기쁨과 평화 같은 ‘갠 날’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닥치는 시련과 고난인 ‘비바람과 눈보라’ 역시 생태계를 유지하려는 ‘자연의 ‘순리이고 ‘우주의 섭리’라는 깨달음이다. 온 생명이 겪는 생로병사의 굴곡이 모두 천변만화의 날씨와 다를 바 없다. 당연히 ‘인간’이란 존재 또한 그러하다.

<박경리작가 탄생 100주년 특별기획전>의 다섯 번째 무대에 정헌靜軒 박명규 작가를 모셨다. 그는 평생을 한국사회사와 평화학 등을 탐구한 ‘사회학자’이자 연구 틈틈이 붓을 들고 묵향에 젖어 온 ‘서예가’이다. 박경리 선생의 문학을 사회사적으로 규명하려고 남다른 공을 들여 세상에 알린 이력이 있다. 문학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선생을 기리는 건 흔한 일이나 사회학자의 눈으로 선생의 문학과 사상을 조명하고, 그 정수를 길어내 그것도 외양간 갤러리에서 붓끝으로 재해석까지 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이번 무대가 오롯이 박경리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비영리 헌정전시>로 이뤄진다는 점 또한 특별하다.

작가는 박경리 선생의 글과 문장의 행간에 서린 생명사상을 붓끝에 실어 펼쳐내고 있다. 작가의 어머니와 선생이 진주 일신여고 동창인 인연으로 선생의 사상이 담긴 문장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다고 한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 흔쾌히 동참하고 혼신을 다해 작품을 준비한 까닭이다. 이십여 점의 작품에 작가가 기울인 공력이 다채롭게 스며있다. 작가의 글씨는 사회학자의 지성과 전통 서법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깊은 울림을 준다. 서법에 바탕을 두었으나 ‘선비풍의 글씨’에 머물지 않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한글 서체의 조형미’를 살려서 획의 강약과 농담, 그림의 자유로운 변용까지 나타내어 정갈하면서도 풍요롭기 그지없다.

작가는 “글기둥 하나 붙들고 예까지 왔네”라는 선생의 고백처럼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언어의 몸부림’을 ‘서예’라는 몸짓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했다.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우리 많이 살았다. 여한이 없제.”, “슬픔도 기쁨도 왜 그리 찬란한가”,“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 등과 같이 선생이 남긴 문장마다 서린 자연과 생명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이 작가의 필치에 실려 되살아난다. 작가가 비뚤배뚤 얽히고설켜 서로 기댄 듯 어울려 핀 민들레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씨 “험난한 로정, 아아 너는 피었구나”(「민들레」)를 보는데 왈칵 눈물이 솟는다. 아아. 이게 우리 ‘인간 존재의 모습’ 아닌가.

activities · life · 시공간 여행

변경유정(邊境有情)

일주일에 걸친 북중국경지역 답사를 마치며 일행 한분이 한시를 한 수 지어보라 제안했다. 그에 응할 실력은 전혀 못되는 걸 알지만 중국을 여행한다는 기분에 웬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두보의 ‘春望’ 첫귀절,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을 떠올리며 이런 저런 생각과 감정들을 갈무리해 보고자 했다. 어려운 중국식 작법이나 차운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뜻만 드러내는 한시도 가능하다 하고 이를 신체시 (新體詩)라 이름했던 선친의 시도에 기대어 용기를 냈다.

延邊山河連兩岸 圖們橋上無人聲 (연변의 강산은 양안을 잇고 있는데, 도문의 다리 위엔 오가는 사람이 없다) // 欲對龍井先驅者 東柱古家滿遊客 (용정에서 선구자를 만나보려 하나, 윤동주 옛집엔 관광객만 그득하네) // 天池風光如前秀 鐵網警告此國境 (백두산 천지의 풍광은 여전히 빼어난데, 철망은 이곳이 국경이라 경고하고) // 自遠方來卒本城 皇宮舊址盛雜草 (먼곳에서 애써 졸본성을 찾아 왔으나 왕궁의 옛터엔 잡초만 무성하다) // 實見好太王碑文 懷憶千年古史蹟 (광개토왕비문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천년 옛 사적을 떠올린다) // 五女山傳朱蒙業 誰言此地高句麗 (오녀산은 주몽의 건국위업을 전하지만, 오늘 누가 이 땅을 고구려라 칭할 것인가) // 鴨綠江上望義州 默念恨別已百年 (압록강 위에서 신의주를 바라보며 한스럽게 나뉘어진지 어언 백년임을 생각한다) // 難免悲感世上事 豈不待後靑年起 (세상사 비감함을 누를 길 없으니 어찌 후대 청년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으랴)

귀국한 후에도 여행의 감회가 사라지지 않아 이 한시를 화선지에 썼다. 어줍잖치만 시(詩)와 서(書)를 함께 하던 옛 문인이 된 느낌이다. 시도 서도 내놓을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지만 어차피 격식을 무시한 작품이니 짝퉁이나 습작이란 힐난이 있어도 개의할 바 아니다. 그런데 7언 절구의 앞과 뒤가 대비되고 풍경과 인간사가 서로 어긋나는 모습이 역연하여 스스로 흥미롭기도 또 씁쓸하기도 하다. 여행에서 자연스레 얻게된 정서의 양면이 반영된 결과일텐데 이런 역설과 회한의 감정을 표현하고 누군가와 교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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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다시 긴 시간을 달려 단동에 도착했다. 석양이 지는 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신의주, 그 풍경의 변화가 우선 내 눈길을 끌었다. 고층건물이 꽤 들어섰고 붉고 둥근 랜드마크 건물이 새롭다. 카지노장으로 건설되었다는데 아직 개장은 안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위화도에는 최근에 완공된 듯 깔끔한 고층건물들이 십수개 동 연이어 서있다. 넓지 않은 공간에 꼭같은 건물들만 세워진 것으로 보아 역동적인 경제활동이나 생활공간이 될 곳은 아닌 듯 하지만 북한 내부에도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진행 중임을 보여주기에는 족해 보였다.

단동시의 압록강변은 더욱 활발하고 역동적인 관광지가 된 듯 했다. 북한과의 연계와는 무관하게 중국 내부의 발전과 여행수요가 가져온 결과로 보인다. 실제 연변에서도 확인했지만 동북삼성이 중국인들의 국내관광 대상지로 되고 있다. 조선족이 주도하는 음식문화,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K-Culture, 변경지에서의 독특한 분위기 등이 여행을 자극하는 요인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압록강변 넓은 지역을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강 건너 북한은 그다지 관심거리가 아닌 듯 했다.

단동은 중국의 역사해석, 정치교육의 현장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더 커진 모습이다. 6.25때 끊어진 압록강철교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은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교육용 설명간판이 곳곳에 부착되어 있다. 철교 중간에는 6.25 당시 이곳을 폭파한 미군전투기 사진과 함께 이곳이 ‘항미원조전쟁출정지’였다고 적혀있다. 기념품점에도 ’항미원조‘를 테마로 한 물건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런 경향은 동북지방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경향이라 하겠다. 관광과 역사와 정치가 중화주의 세계관을 매개로 곳곳에서 정교하게 결합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압록강변의 백화점과 상점들은 불야성처럼 밝고 ’한조(韓朝)상점‘이란 상호도 눈에 띄었지만 남북한과 중국을 한데 잇는 변경도시로서의 역할은 제한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 모습이다. 십여년 전에 북한과 중국을 잇는 신압록강대교가 거의 완공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기대감을 가졌었다. 북중간 경제가 활발해지고 한국과의 관계도 강화될 것을 기대하여 인근지역에 부동산 개발붐이 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완공 이후 북한측 연결부분 공사미진으로 오랫동안 개통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니 아직은 정중동이라 해야할지 모르겠다.

단동철교에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컨테이너 화물차량이 줄을 이어 서 있어 어떤 부분에서는 유의미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저 물동량의 변화가 얼마나 지속적일지, 인적 교류로 어느 정도 발전할지 앞으로 지켜볼 일이겠다. 북한이 적대적 2국가론을 내세우고 러시아와의 관계가 현저히 가까워진 이후 북중간 협력이 어느 정도 진행될지는 예측하기 쉽지 않다. 다만 향후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중국 관계의 중대한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고 그럴수록 이 지역은 또다시 주목 받을 것이다. 때마침 북한에서 신압록대교 개통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보인다는 뉴스도 접했고 북미대화의 가능성도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반도가 어떻게 안정과 평화를 제도화하고 궁극적 통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배전의 지혜와 숙고가 필요한 때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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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구려

8월 19일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온 후 서쪽으로 달려 집안에 도착했다. 압록강변 고구려의 옛 도읍이다. 십여년 전 서울대 교수들과 서안의 둔황고굴을 들린 후 티벳 방문이 무산되어 대신 이곳을 왔던 적이 있다. 그 때에 비해선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호텔시설도 꽤 좋아져 오는 길이 훨씬 편해졌다. 이곳의 압록강은 강폭이 넓지 않고 북한의 만포시와 연결되어 있지만 변경지대로서의 특성은 크지 않다.

고구려 역사를 품은 곳이지만 오늘 이곳은 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이다. 주몽이 졸본성에 나라를 세운 후 두 번째 도읍을 세운 국내성 성벽 일부가 시내에 남아있지만 고대의 강성했던 시절을 보여주기엔 역부족이다. 호텔 앞을 흐르는 훈강이 비류수로 비정된다 하나, 주몽의 건국역사를 기억할 사람도 찾기 어렵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환도산성에는 건물들이 있던 주춧돌이 발굴되고 ‘고구려왕성지‘라 일컬어지고 있지만 옛 위용을 체감하기에는 유적이 너무 소박하다.

그 아쉬움은 통구고분군 앞에서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이 일대에 고구려 무덤은 만여기 이상 존재한다는데 실제 전기차를 타고 돌아보아야 할 정도로 넓은 지역에 수많은 무덤들이 빼곡하다. 일대는 ’고구려고묘박물관‘이라는 야외전시관으로 단장되어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의 세력이 왕성했음을 느끼기엔 충분하지만, 무덤만 남아있고 다른 유적은 거의 사리진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고구려의 역사적 존재감은 역시 광개토대왕비에서 명료해진다. 호태왕비라 적힌, 6미터를 훨씬 넘는 거대한 비석이 주는 압도감은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1775자가 또렷한 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은 육안으로 읽을 수 있다. 글씨와 석각이 모두 뛰어나 비문의 탁본 자체가 예술품 같다. 동북아 고대사를 실물로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인데 일부 글자가 보이지 않고 그 해석을 둘러싸고 한중일 학계의 논란도 뜨겁다. 이어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을 들러 석실 내부까지 둘러보았다. 동방의 피라미드로 일컬어지는 장수왕릉은 잘 단장되어 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이전에 비해 감동이 덜한 느낌이었다.

다음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졸본성이 있던 오녀산성으로 향했다. 평지에서 바라보는 오녀산은 천혜의 낭떠라지로 둘러쳐진 높은 곳으로 수성에는 유리한 지형임은 한눈에도 분명해 보였다. 입구에는 ”고구려시조비”라는 큰 돌비석이 서 있고 주몽의 건국을 알라는 안내문이 서있다. 천여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산성과 주거지터, 제사터 동이 있다. 최근에 건립되었다는 말을 탄 주몽의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천여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하는 입구에 이곳 역사를 기록한 돌비가 시기별로 서 있다. “기원전 37년 북부여 왕자 주몽이 졸본천 (지금의 환인)에 정착, 고구려국을 세웠다” ”기원전 34년 주몽이 부족에게 명하여 학령에 왕성을 축성하게 했다 (지금의 오녀산성)“ ”기원전 19년 9월 태자 유리가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 2대왕 유리명왕이 되었다“ ”기원후 32년 12월 한나라 광무제가 구려후를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기원후 167년에서 619년까지 신대왕 영류왕 등 9왕이 졸본천으로 가 시조묘에 제사하다“ ”기원후 2004년 7월 오녀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네번째 돌비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졌다.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정권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는 중대한 내용이었다. 중국의 후한서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한국의 삼국사기와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후한서는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고구려가 한나라에 조공을 바친 후 제후국으로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고 오녀산성의 네 번째 돌비는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소급하여 해석하면 주몽도, 유리왕도, 고구려 벽화나 고분군도 결국 중국제국, 중화문명의 한 부분으로 설명될 소지가 강해질 것은 분명하다.

역사를 흔히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 등으로 구분하지만, 현실에서 고대사가 가장 치열한 정치적 논란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동지방의 오랜 갈등의 뿌리에는 종교적 성지를 둘러싼 대립이 놓여있고 그것은 다시 고대의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에 맣닿아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미래를 내다볼 때 이 지역의 고대사가 어떻게 재구성되고 현재화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다. 고구려 유적지를 단지 흘러간 과거사로 바라보지 못하는 염려가 마음 한켠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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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유감

8월 17일부터 일주일간 북중국경지대를 답사했다. 재단법인 통일과나눔이 준비한 여행에 초청을 받아 뜻깊은 여행을 했다. 두만강 동쪽 끝 방천에서 시작하여 도문, 연변, 용정, 송강하, 통화, 집안, 환인, 압록강 끝 단동을 거쳐 심양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삼십여년간 여러 차례 오고간 곳이지만 최근의 변화가 생각보다 크고 생소한 장면들이 적지 않았다. 놀라움과 안타까움, 기대와 우려가 혼재하는 이중적 감정이 시종 떠나지 않았다.

연길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친 후 곧장 북중러 삼국 국경지대인 방천으로 향했다. 두만강변의 모습은 예와 다름없었지만 국경 철조망은 더 새로워진 듯 했다. 훈춘 지역에 웅장한 세관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아직 북중간 물류 이동은 활발하지 않다 한다. 방천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9층 건물이 들어서 삼국 국경을 조망할 수 있었고 많은 관광객들로 복잡했다. 이곳이 발해문명의 고장임을 알리는 큰 간판과 함께 “애국주의가 곧 중화민족의 민족심이자 민족혼“이라는 표어가 강렬하다.

이튿날 아침 도문을 들렀다. 이곳을 오면 으례 오는 국경지대이고 북한으로 통하는 다리 중간까지 걸어가 북한땅을 바라보곤 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제 그 다리는 차단되어 사람이 오가지 못한다. 대신 아래쪽 ’두만강 나루터‘가 새로운 조망공간으로 개발되었고 ‘성수동 까페‘라 이름한 대형 찻집이 관광객을 부르고 있었다. 피아노를 둔 서양식 인테리어와 서울 성수동이란 브랜드가 이곳까지 진출한 것이 놀라왔지만 전반적으로 도문의 외지고 낙후한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91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감흥을 잊지 못하는 나로서는 저 다리가 다시 이어질 날이 언제 올까 궁금했다.

새로이 건립된 연변박물관을 들러 보았다. 규모나 전시내용, 설명방식 등에서 그 수준이 놀라왔다. 연변 정도의 지방도시에 이처럼 거대한 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문화정책이 얼마나 조밀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컨텐츠의 서사가 정책적으로 체계화되는데 따르는 문제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민족 고유의 문화와 역사적 역할은 그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중화민족‘의 다문화적 성격을 강조하는 기조가 뚜렷하다.. 만주지역을 개척해온 조선족의 활약상이 ’생산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 것도 같은 맥락일 터이다.

용정을 지나는데 가이드가 박경리 ‘토지’ 이야기를 했다. 이곳이 토지 2부의 주무대였기 때문인데 얼마전 끝낸 박경리 기념 서예전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하동 평사리와 진주에서의 전시를 끝내고 이곳 만주지역을 오게 된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사의 맥락에서 용정의 일송정, 명동촌 명동학교, 민족시인 윤동주를 떠올리는 기억은 점차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화민족의 역사서술이란 큰 틀 속에 조선족의 역할을 배치시키는 유적의 재해석 작업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 등정은 언제나 이 지역 여행의 핵심이다. 이전에 천지를 세번 올랐었지만 남파로 올라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송강하의 리조트에서 새벽 6시에 길을 나섰는데 북파나 서파에 비해 남파는 하루에 입장가능한 사람수를 훨씬 적게 제한한다고 한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별로 혼잡하지 않았고 큰 기다림 없이 13인용 승합차를 탈 수 있었다. 천지로 올라가는 길 바로 옆으로 북중 국경선을 알리는 철책이 길게 이어져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이십여분 동안에도 기상은 시시각각 변해 긴장하게 했지만 마침내 정상에서 파란 하늘과 툭트인 천지를 만났다. 과연 장관이었고 북파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수많은 인파로 자리다툼을 해야 했던 이전과는 달리 여유롭게 천지를 조망할 수 있어서 특히 좋았다. 전망 좋은 곳은 돈을 내고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이곳에서 돈을 아낄 사람은 없지 싶었다. 천지의 사진을 걸어두고 답답한 일상과 숨막히는 더위에도 가능하면 푸른 하늘과 파란 물빛을 잊지말고 지내자 마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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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공동체

6월 1일 “격동의 시대 – 통일과 평화를 어떻게 재결합할 것인가”를 주제로 내건 학술 심포지엄이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이 주최했다. 트럼프 2기 출범으로 심화된 세계적 변동과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이후 우리가 처하게 된 새로운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 첫 세션의 과제였다. 둘째 세션은 최근 남북한 2국가론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 평화공존을 새 목표로 내걸자는 일각의 주장 속에서 통일론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를 다루었다. 세번째 세션은 기존의 민족공동체 방안을 대신할 어떤 비전이 가능할지를 탐색하는 대안모색이 주 관심이었다. 이영선 통일과나눔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통일과 평화의 두 화두를 묶어내기 위한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했고 150여 청중들이 시종 경청하여 몰입도가 높은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윤영관 아산재단 이사장은 현재의 상황을 ‘지정학 시대의 귀환’으로 규정하고 향후 가능한 세 시나리오를 소개한 후 그것이 세계질서와 동아시아, 그리고 한반도에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를 설명했다. 이전 질서로의 회귀, 신냉전, 세력권 정치 중 어떤 미래가 전개되든 한국에겐 큰 도전이 되리라 예상하면서 특히 한반도문제가 국제정치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국민들의 통일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형중 박사는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핵능력 증진으로 북한의 위상과 강제력이 더욱 강화된 조건 속에서 ‘북한 우위 적대병존관계 수립’ 전략으로 해석했다. 적대성은 향후 북한체제존속의 한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고, 그 맥락에서 평화공존은 실현불가능한 전망이라고 했다. 평화적 2국가론은 허상이며 억제와 위기관리역량을 재설계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마상윤 교수, 민태은 박사가 참여한 토론에서는 향후 세계질서 변동을 해석하는 제 시나리오의 적절성 여부, 특히 세력권정치의 전개가능성, 지정학의 회귀라는 표현의 정확한 내용, 한국문제의 국제화라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거래주의적 동맹관이 동맹약화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등이 논의되었다. 박형중 박사에 대해선 과연 북한의 대남적대성이 고정불변일 것이라 단정할 수 있는지, 평화공존 불가능론은 너무 구조적 변수만을 강조하는 편향이 아닌지, 이런 상황에서도 신뢰의 접점을 찾고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두 번째 세션에서 김병연 교수는 경제통합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통일론을 제시했다. 경제협력에서 경제통합을 거쳐 통일로 가는 모델이 북한에게도 실익이 크고 한국의 부담도 크지 않다고 했다. 북한의 현 경제상황은 매우 구조적으로 취약하기에 체제안정을 위해서라도 경제협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가능성을 주목한다. 다만 경제협력은 위임형 제도화를 수반해야 하고 공동의 규칙을 발전시킴으로써 북한이 시장화를 넘어 시장경제화로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전우택교수는 현 북한이 지도자의 강국욕망과 잘살려는 인민의 욕망이 부딪치는 상태로 파악했다. 시장, 사상, 문화 전반에 걸친 가혹혼 통제가 심화되는 현실은 그 자체가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고 고통과 불안정을 키울 것으로 판단했다. 통일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즉 평화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운 우리의 대응력, 입체적이고 모순을 포용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토론에서 양문수 교수는 경제통합의 실제 유형도 역사적으로 다양했음을 설명하면서 한반도에서의 통합개념을 좀더 세분화, 정교화할 필요를 지적했다. 또 동구권에서 확인된 경제통합이론이 한반도에도 충분히 적용가능한지, 북한이 과연 통합이라는 개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시됨을 지적했다. 김성경 교수는 1국가 1체제를 상정하는 통일개념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두 국가론에 대해 좀더 전향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21세기 첨단기술이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도 좀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첨언했다.

세 번째 세션에서 나 (박명규 교수)는 현 시기를 ‘기본합의서 체제의 파탄’ 국면이라 설명했다. 미중대립과 북러밀착, 북한 핵보유 자신감 등을 배경으로 북한은 1991년 이후 남북관계를 지탱해온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원칙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한국에서도 대북정책이나 남남갈등을 조율하는 전략적 대원칙으로서의 위상과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다. 같은 민족이란 정체성이 약화되고 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간주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동시에 북한에 대한 거부감과 안보불안은 증대하고 있어 기존방안을 유지하기도 2국가론을 수용하기도 어려운 딜렘마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착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선 민족공동체에 기반한 기존 시각을 ‘코리아 공동체’ 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제안했다. South Korea와 North Korea라는 두 현존하는 국가성을 인정하는 새 통합구상으로 바꾸자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남북간 특수관계도 역사문화적 공동성보다 분단국가관계로 재조정되고 그에 기반하여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모색하는 형태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코리아 공동체는 단일민족국가형 통일체를 지향하기보다 경제, 문화, 재난, 보건, 안보 등 여러 영역별로 다차원의 통합이 병행발전는 복합공동체가 되어야 함도 언급했다. 박영호 박사, 조동호 교수, 김병로 교수, 류경아 박사 등 패널토론자들은 대체로 큰 방향에 공감하면서도 실질적인 대안이 되기 위해선 어려 측면에서 좀더 다듬어져야 할 쟁점들이 있음을 지적했다.

전반적으로 심포지엄의 짜임새는 좋았고 발제와 토론도 밀도가 있어서 휴식도 없이 계속된 4시간이 길지 않게 느껴졌다.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세가지 쟁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지정학의 도래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국제정치적 전략과 남북관계적 논리가 어떻게 종합적 대응력으로 재구축될 수 있을지가 그 하나다. 동맹-자주, 평화-통일을 나누어 양자택일하려는 편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중요해졌다. 둘째는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공세적으로 볼 것인가 방어적으로 볼 것인가의 쟁점이다. 양면이 다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양자를 전제한 위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셋째는 경제통합 구상이나 코리아공동체 비전에서 보듯 급진적 통일보다 삶과 연동되는 ‘통합’을 더욱 주목할 필요성이다. 이런 통합형 구상을 어떻게 전략과 정책 차원으로 체계화할 것인가가 미래의 주요한 과제가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관계상 이런 쟁점들이 좀더 예리하게 토론되고 예각화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은 아쉬웠다. 향후 동북아 지정학의 향방, 북한과의 평화공존 가능성, 남북 경제통합의 전망, 코리아 공동체의 적실성 등에 대한 밀도있는 논의는 후속 과제로 남겨진 셈이다. 향후 더많은 논쟁과 검토를 거쳐 이런 쟁점들이 다듬어지기 기대하면서 그러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파적 대립, 단순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한 지성적 성찰이 더욱 절실하리란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코리아 공동체’라는 화두가 꽉막한 남북관계를 열어가는 대안으로 발전해갔으면 하는 희망을 더욱 갖게 되었다. 2차대전을 거치면서 심화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을 넘어서 평화와 번영을 향한 유럽공동체 꿈을 꾸었던 장 모네의 구상이 실현되는데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음을 생각하며, 긴 호흡과 폭넓은 토론, 유토피스틱스적 전망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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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동구릉 – 유적의 박제?

5월 21일 고등학교 동창들과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오전엔 다산생가와 기념관 일대를 둘러보고 오후엔 동구릉을 답사하는 일정이었다.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였는데 야외에서 하루 종일 걷는데는 오히려 천상맞춤이었다. 두 곳 모두 오래 전에 와 본 곳이지만 처음 온 듯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느낀 바가 적지 않다

남양주 마재마을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마을로 그가 오랜 유배 생활 끝에 다시 돌아와 생을 마감한 곳이다. 1986년에 복원된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떨어져 있는 구조로 안마당을 넓게 쓰도록 설계한 중부지방의 전형적 양반집 모습이다.기념관에는 다산의 대표 저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 <흠흠신서>의 사본과 수원 화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가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문화관은 실학과 관련한 유무형 자료와 정보를 수집·보존·연구·전시하는 다목적 복합 문화 공간이다. 두물머리를 앞에 둔 다산 유적지는 주변 풍광도 수려하여 산책하기에 퍽 좋은 장소다. 여유당 뒤편의 다산 묘소는 2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추모 공간이 되었다.

다산 집안은 8대가 과거에 합격한 명문가였다. 그 부친 정재원은 참의공 정시윤의 4대종손이었고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지적 탐구열이 뛰어나 실학은 물론이고 서학도 선구적으로 수용한 인물들이 다수 이 집안과 연결되어 있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던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었고 그를 매개로 성호 이익의 실학을 이어받았다. 다산은 남인학파로 꼽히지만 실제적인 사고와 경험적 지식을 중시했다. 다산초당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해 1표2서의 대작을 남겼고 적지 않은 편지와 시문으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다산의 사상을 집대성한 위당 정인보는 다산에 대한 연구가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라고 했다. 그가 자녀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글은 오늘날 교육적으로도 활용가치가 높아 다산유적지 거리 곳곳에 그의 글이 새겨진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다산유적지는 그 인근에 있는 마재성지와 함께 둘러보아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의 형제들의 생애까지 포괄해야 다산의 고민과 지성, 삶의 궤적들이 입체적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 마재성지는 셋째 형 약종과 그 가족의 순교를 기념하는 곳인데 다산유적지와 마재성지가 함께 소개되는 안내서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쉽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한 조선 천주교의 초기 지도자였다. 그 자신이 신앙을 지켜 순교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부인 유조이 세실리아, 장남 정철상 카를로, 차남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이 모두 신유사옥과 기해박해에서 순교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가족 모두가 성인으로 시복되었고 마재성지는 한국천주교의 대표성지가 되었다. 다산유적지와 마재성지의 가깝지만 먼 공간구성은 약종과 약용의 엇갈린 생애만큼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오후에 들러 본 동구릉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서울 근교에 50만평이 넘는 왕조의 묘역이 이처럼 잘 관리되고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조선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그의 유언에 따라 함흥의 억새풀로 덮여있다는 설명이 흥미로왔다. 이성계로서는 그가 성장한 함경도 변경지방에의 그리움을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500년 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왕릉이 그 이후 조성된 왕과 왕비의 묘역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아홉 릉이 크기나 형태에서 너무 유사해서 설명을 읽지 않으면 누구의 릉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니 조선왕조 역사에서 태조의 유훈이라는게 큰 힘을 발휘한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선조가 묻힌 목릉 앞에서 조선왕조를 망친 임금이 저렇게 대우받아도 되는가라는 한 친구의 일갈이 잠을 깨우듯 와 꽃혔다. 그러고보니 임진년 왜란과 병자년 호란을 겪고 조선사회가 극도의 피폐상태로 몰렸던 시기의 국왕, 당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학계의 평가가 좋지 않은 선조인데 죽은 이후의 무덤은 오히려 태조의 릉보다 더 좋아 보일 정도다. 유일한 외국 출신 국왕이었던 현종의 묘 숭릉, 탕평책을 실시한 영조의 원릉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여서 마치 복제한 듯 비슷하다. 죽음 앞에선 살아서의 잘잘못도 모두 묻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당대의 치적이나 세평과는 무관하게 국왕이란 존재에 대한 의례와 장법만이 존중된 결과일지 모르겠다.

동구릉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이곳을 둘러보는 외국인들은 조선왕조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을 어떻게 유추할까? 왕조와 왕실에 대한 애착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한국사회인데 지금도 오래전 국왕의 제사가 계속되는 이 살아있는 문화공간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K-Culture 가 주목받으면서 태종과 문종과 선조와 현종의 구체적 역사와 스토리는 사라지고 국왕과 황후, 예법이라는 문화적 코드만 부각될 수도 있다. 하긴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로마의 콜로세움의 여행에서도 시간과 스토리는 배경으로 박제되는게 보통이니 왕조의 무덤 앞에서 명말선초의 14세기와 풍전등화의 16세기, 영정조의 18세기 간 차이를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그 여러 가지 소회를 그림으로 담고 싶어 화선지를 폈다. 숭릉의 단아한 풍경을 수묵으로 그리고 이런 발문을 썼다. “오월의 신록, 유네스코 문화유산, 왕조의 잔재와 영화, 권력무상, 역사의 진전 —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당연하지만 이 물음 속에는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담겨있다. 스토리와 진정성이 박제화되는 것은 먼 역사에만 해당되는게 아니다. 온갖 과거가 이념과 정치의 잣대로 재단되는 오늘의 역사오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스토리가 빠진 문화적 기호, 미학적 대상으로 유적을 만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래도 유적지의 참된 의미는 삶의 스토리, 그 속에 담긴 진정성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다산유적지도 마재성지도 동구릉의 건원릉과 숭릉도 제 각각의 존재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life · 오늘의 화두

녹비홍수 인수가비 (綠肥紅瘦 人瘦可肥)

정민 교수가 자신이 쓴 컬럼을 보내왔다. 제목은 녹비홍수 (綠肥紅瘦) – 초록은 무성해지고 붉은 꽃은 시든다는 뜻인데 5월을 맞이하는 계절에 걸맞는 표현이다. 매일 내가 산책하는 집 주변 공원에도 날이 다르게 초록은 짙어져 학창 시절 읽었던 ‘신록예찬’이 저절로 떠올려지곤 한다. 곳곳에 철쭉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이팝나무의 흰 꽃과 천변 야생화들의 제각각 원색을 뽐내는 중이라 ‘꽃이 시든다’라는 표현은 다소 와닿지 않는 느낌이긴 하다.

초록과 붉음, 신록과 꽃을 살짐과 수척함으로 표현한 옛사람의 단어구사가 신선하다. 단순히 문학적 비유에 그치지 않고 삼라만상의 생명연쇄를 꿰뚫은 철학적 표현으로도 읽힌다. 만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누군가 성장하면 누군가 사라지는 것이 섭리다. 다산, 추사 등이 편지에 이 말을 즐겨 썼다는데 성리학에 친숙했던 그들의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던 시선과도 친화력이 있었을 법 하다. 그에 비해보면 성장지향의 시대, 효용중심의 현실, 각자도생의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 친숙해지기는 쉽지 않은 표현이기도 하다.

오늘날 녹비홍수란 표현이 매우 낯설게 된 것은 편지글이 사라진 탓이 클 터이다. 편지는 언제나 그 시작부분이 어려워 일종의 공식적 표현에 의존했다. 건강과 안부를 묻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계절의 변화를 함께 언급하는 것이 상례였다. 내 경험에 비춰보면 주로 입춘지절에, 폭염가운데, 엄동설한에, 환절기에… 등등을 골라 썼고 녹비홍수를 써본 기억은 없다. 어느 때부터인가 편지를 쓸 일이 없어졌고 자연히 저런 표현들을 사용할 기회도 사라졌다.

컬럼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어렵게 말하고 찔러 얘기하는 대신 빙 돌려 말하는 것이 문화’라 했다. 전달과 접수 사이에 여백이 많아야 정서의 두께가 생긴다는 것인데 공감하면서도 그런 문화개념으로 오늘을 이해하기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온갖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시공의 간격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즉각적인 정보연쇄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카톡 덕분에 의외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안부를 묻게 된 것을 고마워할 때가 있으니 잃는 것만 있는 건 아니라 하겠다. 문화의 양식과 내용이 달라지고 있는게다.

녹비홍수 – 살짐과 수척함의 대비를 읽다 보니 언젠가 소동파의 글귀 ‘인수상가비 사속불가의’(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를 썼던 기억이 난다. ‘사람의 수척함은 다시 살찌울 수 있으나 선비가 속되면 고칠 길이 없다’는 뜻이다. 좋아하던 후배 교수가 정치권을 기웃거리면서 점점 권력과 위세를 탐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안타까와 그 글을 썼었다. 그때 비(肥)-수(瘦) 대비의 시적 표현에 깊이 공감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화두로 삼아야겠다 생각했었다.

​두번의 정년을 지낸 지금이야말로 그 말을 일상 속에서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인생여정을 계절에 비유하면 은퇴 후의 삶은 가을 이후에 해당하니, 당연히 살집이 아니라 수척함에 대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건강용 다이어트가 아니라 생명연쇄의 자각 위에 삶을 조망하는 내적 역량으로서의 비움 노력이 필요하다. 박경리의 시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는 표현이 있는데 정말 그런 홀가분함이 내면에 자리하기를 바래야 할 때다. 속되지 않고 의연하게, ‘인수상가비(人瘦尙可肥) 대신 ‘인비상가수’ (人肥尙可瘦)를 새 화두로 삼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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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와 지식인

4월 22-23일 도헌학술원 포럼 참석차 춘천에 다녀왔다. 70여권의 책, 710여편의 컬럼에 여러권의 소설까지 내 놓은 이 시대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지식인인 송호근 원장이 학자로서의 반세기를 되돌아보면서 그 세대의 정신사적 궤적을 성찰하는 자리였다. 나는 논평자로 초청을 받아 참여했지만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친구이자 동료로서 축하와 공감의 마음으로 함께 했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송교수는 자신을 베이비붐세대, 좀더 구체적으로는 70년대 경험에 그 정신적 뿌리를 내린 세대로 표현했다. 유신시대에 대학을 다니고 80년대의 격변과 환희를 맞보고 90년대의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경험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채 IMF 경제위기를 겪었지만 새로운 변화를 일구어낸 역동적 시대를 살아온 세대이다. 실제로 그가 쓴 많은 책과 컬럼은 이 시대가 보여준 다양한 애환과 갈등의 면면들을 다루고 있다.

당연 나도 같은 세대에 속한다. 이 세대는 문학으로부터 세상과 인간, 역사를 보는 눈을 키웠다는 송원장의 발표에 공감했다. 나 역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도 소설과 시, 종교 서적에 더 끌렸던 기억이 있다. 80년대 후반 ‘사회과학의 시대’가 도래했고 한편 그 변화를 환영했지만 이청준, 최인훈, 황석영, 신경림의 정서가 마르크스와 사회구성체 논리, 민중해방과 계급의식을 강조하던 사회변혁적 사유와 같을 수는 없었다. 그 거리감은 인간적인 것의 기반이지만 이념적으로 철저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송원장은 사회과학의 시대도 저물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영향력은 동반하락 중이다. 테크놀로지와 포스트 휴머니즘의 정신이 그 뒤를 이을지는 미지수다. 어쩌면 우리는 지배적 정신이 부재한 상태, 지적 아노미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미래에의 꿈이 사라지고 돈으로 환산되는 즉각적 효용만능의 세태가 확대일로다. 젊은 세대에게 조언을 해줄 여유를 갖기 전에 스스로 의 혼란과 어지러움을 곧추세우기도 힘겨운 시대를 맞고 있다.

문학적 상상, 사회과학적 분석, 현실문제에의 개입은 한 사람의 정신 속에 공존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의 세계, 사회학자의 몫이 언론인의 역할과 같지 않은 이유다. 송원장은 이 세 영역을 평생 움켜쥐고 살았다. 현실적인 쟁점들을 다루는 컬럼니스트의 역할을 중시하면서 작가적 상상력과 사회학적 분석력을 꼭같이 견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한 정신 긴장을 견디고 사유의 경계를 예리하게 관리하는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원한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이자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발제의 처음과 끝에서 김소월의 산유화를 인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사여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지천에 꽃이 피는 4월의 자연을 노래한 듯 하지만 학자로서의 삶을 비유하는 시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피는 꽃, 제가 좋아 산에 사는 꽃의 모습이 꼿꼿하게 자기 정신세계를 지켜온 지식인의 모습과 닮았다. 그 꽃이 얼마나 향기로울지 어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지는 본질이 아니다. 꽃은 그 자체로 꽃인 것이다.

‘내 인생은 복되었다’는 말을 발제의 앞뒤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다. 말 그대로 그의 인생은 남부러워 할 정도로 복되다. 내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배가 아프다’고 표현했지만 정말 배아플 정도로 그의 학문적 성취와 사회적 존재감은 동년배의 누구보다도 대단하다. 이제는 하산하는 시대를 살아야 하는 만큼 ‘글없는 송호근’과 대면할 준비를 하라 조언했다. 하지만 사실 그 주문은 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꼭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한림대 도헌학술원 이 내실있는 지적 플랫폼으로 자리잡아 가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4년전 송원장 부탁으로 쓴 ‘도헌학술원’ 현판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학내외 일로 분주할 이사장과 총장이 포럼에 함께 자리하여 격의없는 토론을 주고 받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학내의 교수들과 지역의 유지들이 함께 문화와 역사, 인생을 논하는 장이 한림대 바깥으로도 확대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한림대 도헌학술원이 새로운 대학의 한 모델로 자리잡고 지속적으로 발전해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