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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삶 (2)] 하바드 엔칭 연구소

1989년 7월부터 1년 반동안 나는 하바드 엔칭연구소의 visiting fellow 로 보스톤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 내 시야도 넓어졌고 연구주제도 다양해졌다. 낯선 곳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공부하는 일 이외에는 큰 부담이 없었던 탓에 비교적 잘 적응했던 것 같다. 두 딸이 취학전 유아 시절을 보냈고 아들이 그곳에서 태어났으니 내 가족사에서도 매우 특기할만한 때였다.

대학원 시절 미국유학을 하지 않겠노라고 큰소리 치며 소위 ‘국내학파’ 형성을 주장했었다. 여전히 그런 정서가 강했던 1988년에 해외로 연구를 떠나려 마음먹고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실제로 주위에서 강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의 한정된 논의와 패러다임에 한계를 크게 느끼던 터라 나로서는 더없이 절실했다. 하바드 대학 출신으로 버클리 인류학과에서 박사논문을 작성 중이던 낸시 애이블먼 이 당시 고창 지방에서 농민운동 필드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다. 낸시는 후에 일리노이대 교수로서 한국학 발전과 대학행정에 큰 기여를 했고 나와는 지속적으로 교류했으나 안타깝게 수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6월 말에 도착한 하바드 대학 캠퍼스는 방학이 시작되어서 조용했다. 엔칭 연구소는 나처럼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연구자들을 위한 영어 프로그램을 두 달간 제공해 주었다. 나를 포함하여 중국 학자들이 여럿 참여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언어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얼마전 발생한 베이징의 민주화운동과 비극적인 천안문 사태가 초래한 충격 때문이었다. 6월 4일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가 무력으로 강제진압되고 많은 희생자가 생기났다. 이 시위의 주도자들 중 일부는 미국과 서방으로 탈출하여 중국자유화 운동을 계속하고자 했고 강제진압을 선택한 중국 정부에 대한 국제적 비난도 거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미국에만 약 5만여명의 중국유학생이 머물고 있었다. 천안문 사태 발생직후인 89년 6월5일부터 90년 4월11일 사이에 미국에 입국한 유학생은 귀국후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미국체류를 연장하는 법안도 통과되었다. 엔칭에 와있던 학자들 사이에서도 곧바로 귀국할 것인가 미국에 체류연장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비극적 진압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면서 나는 한국의 80년 서울의 봄을 떠올렸다. 중국도 어느 시기를 지나면 한국의 87년 같이 결국은 민주화의 길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되돌아보면 다소 순진한 희밍적 사고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한국연구는 와그너 교수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는 족보 연구의 대가였고 조선시대가 전공이었는데 꼼꼼한 실증적 역사연구자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근대사회변동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대화할 계기가 많지 않았다. 대신 막 부임한 카터 에커트 교수가 여러 측면에서 내겐 자극도 주고 조언도 주었다. 또 일본 메이지유신 연구자인 알버트 크레이그 교수의 수업도 청강했는데, 그는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비교연구하려는 내 연구계획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대신 한국과 베트남을 비교해보라고 조언했는데 당시 내 정서로는 잘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쨌든 하바드 엔칭연구소에서의 1년 반은 내가 동아시아를 지적으로 발견하는 시기였다. 지나치게 한국만을 주목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는 협소함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생각은 진작 했지만 동아시아라는 범주를 깊이 생각하는데 이르진 못했다. 근대와 전근대, 발전과 저발전, 서구와 한국 같은 대비가 그 결과였다. 하지만 1990년 엔칭에서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동아시아라는 배경이 중요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와 같이 온 분 가운데 일본 교토대학의 푸마 스스무 교수가 있었다. 그는 매우 성실한 중견연구자였는데 중국 청대가 전공이었지만 조선사에도 꽤 식견이 있었다. 나중 푸마교수의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기도 했고 15세기 전후의 연구에 종종 인용되기도 했다. 그와 대화하면서 나의 시야가 너무 한반도에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11월 영어 공부를 하려는 목적으로 자주 시청하던 티비 뉴스에서 접한 베를린 장벽 뉴스는 지금도 그 충격이 생생하다. 동독을 탈출하는 대규모 행렬이 등장하기 시작한지는 제법 되었지만 사실 나로선 그 변화를 주목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베를린 장벽을 망치로 부수고 브란덴부르그 문 위에 빼곡이 올라선 시민들의 영상이 올라왔다. “Wir sind ein Volk”라는 피켓을 든 동독시민들의 시위 장면과 동서 베를린을 나누던 경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아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고 기적이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12월 2일과 3일 이틀간 지중해의 몰타 섬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미소정상회담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냉전종식을 선언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유럽에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 냉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조짐을 뚜렷히 드러냈다. 1989년 폴란드에서는 6월 자유선거가 이루어져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솔리다르노시치가 압승하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등 다른 동구권 국가들도 대규모 소요사태들을 겪으면서 동구권의 붕괴는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황이었다.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세계는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평화의 시대로 가는 먼 길에 서있죠. 무력을 통한 위협, 불신, 심리적 이념적 투쟁은 모두 과거의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저는 절대로 미국과의 열전을 시작하지 않겠다고 미합중국의 대통령께 약속드립니다.“ 라고 덧붙였다. 이에 부시 대통령은 ”우리는 지속 가능한 평화를 현실화하고 동서관계를 지속된 화합으로 바꿔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제가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것입니다.“라고 화답했다. 바야흐로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사가 열리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 이런 세계사적 격동의 거대한 무게감을 내가 바로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속을 걷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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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삶 (1)] 1989년의 충격

[탈냉전 역사의 현장을 건네오다 : 나는 1989년 7월부터 1년 반동안 미국 하바드 엔칭 연구소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하기 위해 도미했다. 이 시기는 세계사적 변화가 심대하여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내 개인사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40년 가까운 그 이후 나의 활동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변화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 격동의 과정은 예상한 바 아니었고 이러한 변화의 성격을 헤아리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탈냉전과 세계화의 시대가 저물고 나도 청장년기를 지난 오늘, 내가 겪어온 삶의 궤적을 통해 시대전환의 함의와 전망의 단초를 찾아보려한다.]

1989년 새해 한국은 세계여행을 지유화했다. 그리고 동구권 구공산권국가와 수교하는 북방정책이 시작되었다. 전지구적 탈냉전 흐름이 뒷받침한 것이지만, 87년 민주화와 88년 서울올림픽 성공에 뒤이은 국내의 자신감이 큰 요인이었다. 학계와 정치권에서 국제화, 세계화 논의가 커지고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이 히트를 치기도 했다. 북한 역시 이 흐름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세계청년학생축제를 거행하고 북한체제의 강고함을 대내외로 선전했다. 임수경이 비밀리에 이곳에 참석함으로써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것도 기본적으로는 이 시대적 흐름에 대한 광범위한 낙관과 희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989년의 변화는 한반도 바깥에서 더욱 심대했다. 2차대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쇼와 천황이 연초에 사망함으로써 일본도 새로운 시대로 이행했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구권 내부에서 자유화 움직임이 가시화되었고 6월 4일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다. 중국정보는 무력으로 이를 강제진압했는데 이것이 오늘까지 중국체제의 기몬조선을 좌우한 결정적 사건이 된 셈이다. 8월에는 소련에서 발트국가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분출되었다.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곧이어 동독의 에곤 크렌츠 서기장이 물러남으로써 사실상 동독이 해체의 길에 접어들었다. 루마니아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발발하여 독재자 차우체스쿠 동상이 시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졌고 마침내 차우체스쿠 부부가 처형당했다. 12월 2일에는 몰타 섬에서 부시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역사적인 ‘냉전종식’을 선언했다. 1990년에 접어들어서 이런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어 폴란드 집권당이 해체되었고 몰도바와 벨라루스가 연이어 소련으로부터 탈퇴했다. 9월 30일엔 한국이 소련과 수교하는 역사적 변화가 시작되었고 10월 3일에는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나는 이 모든 변화를 보스턴에 앉아 뉴스로 접했다. 엔칭 연구소에는 주로 중국, 일본, 한국 학자들이 모여있었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격동의 역사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 그것이 자국 사회에 어떤 충격을 미칠지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제한된 뉴스와 행동반경 탓에 이런 사건들의 중대함과 깊은 영향력을 즉각적으로 깨닫진 못했다. 다만 중국에서 온 학자들은 천안문 사태 이후 개혁개방노선, 중미관계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가도 좋을 것인지 걱정이 많았고 실제로 자신들의 향후 진로를 두고 고민을 계속했다. 국제정치 전문가가 아닌 일반적인 미국의 학자와 시민들도 격동하는 세계적 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거대한 변화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그 세 격동이 함께 진행되는 과정에서 기대와 우려, 확신과 주저함이 끝없이 교대했다. 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과잉된 확신으로 큰 소리를 치기도 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공부도 모자랐고 지혜는 부족했으며 종종 부끄러운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때 시작된 탈냉전 세계화 자유화 개방화의 큰 흐름 탓에 의 삶이 역동적이고 새로운 도전으로 점철될 수 있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2026년의 오늘을 보는 마음은 어둡다. 1989년에 시작되었던 그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느낌은 강하다. 탈냉전 30년의 변화, 놀라운 과학기술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해묵은 전쟁과 문화 갈등, 지진과 기상이변으로 인류공동체의 종말을 논의하는 시점에 도달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때 미국 잔류를 선택했던 중국 학자들은 오늘의 변화된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던 1989년의 저 감격을 목도했던 독일 시민들이 오늘 AfD 극우정당이 급부상하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찬찬히 지난 40년의 개인사를 돌아보면서 이 시대적 성취와 아이러니에 마주쳐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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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광야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깊은 감회에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광대한 에메랄드빛 호수와 깍아지른 봉우리의 장관이 주는 호쾌함에 우선 놀라지만 백두란 말에 담긴 어떤 미묘한 정서가 마음 속에서 뭉클 솟아나는 걸 누구라도 느끼게 된다. 오랜 한반도 민족사에 얽힌 서사들을 떠올리고 이곳을 성산으로 숭배하던 사람들이 오늘 우리의 선조였고 현재까지 이어진 공동체의 바탕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천지 앞에 서서 눈앞의 현실에 일희일비하고 노심초사해온 그간의 삶을 되돌아본다. 긴 시간의 흐름과 장대한 만주벌판을 생각하며 우리는 망망대해로 흐르는 한 작은 물줄기에 다름없다는 겸손한 생각도 하게 된다. 오랜동안 풍화로 흘러내린 암석류, 완만히 펼쳐진 고산지대의 능선, 그 사이에 핀 이름모를 야생화, 매순간 변화하는 구름과 기상이 자연 본래의 위엄, 원시적인 것의 숭고함을 깨닫게 한다. 여러 면에서 천지에 오르는 것은 구도자의 여정과 닮아있다.

다행히 천지는 쾌청한 날씨 덕에 유난히 푸르고 아름다왔다. 내 사진을 본 한 지인이 북파의 천지가 남성적인데 비해 남파의 천지는 여성적이라 평했다.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나는 이곳에서 이육사의 시 ‘광야’를 떠올렸다. 육사도 저 시를 쓸 때 이 백두의 장엄한 위용을 생각했을 것 같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모든 산맥이 바다를 연모해 휘둘릴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을 땅,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 지면서 새로운 길이 난 곳, 장차 백마탄 초인이 와서 새로운 꿈을 이루게 할 약속의 공간을 ‘광야’라 이름했던 것이리라.

​천지의 모습과 함께 육사의 광야를 전지 한장에 썼다. 아름다운 천지보다 원시적인 천지, 산과 강이 생기기 전 태초의 이미지를 그리고 싶었다. 글씨도 가급적 그 분위기에 맞는 서체로 구상했다. ‘우리가 바라는 우리’라는 테마로 통일과나눔 재단이 광화문에 문화행사를 연다고 해서 그곳에 이 작품을 걸기로 했다. 지진과 홍수와 전쟁과 갈등으로 세상은 한층 더 격랑을 만날 듯 싶고 한반도에도 긴장과 불신의 벽이 점점 높아가는데 우리는 통일의 미래를 어떻게 꿈꾸어야 할까? 백마탄 초인이 올 때를 기다려야 할까?그 때가 오기는 할까?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 마음의 본질은 간절한 희망일 터, 가난하지만 부지런히 노래의 씨를 뿌리는 일은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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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고 전시

하동에서의 전시가 진행되는 중 뜻밖에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진주지역 문화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여대표는 감사하게도 내 전시를 진주에서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때마침 진주문고 40주년을 기념하는 해여서 여러 전시가 기획되고 있는 터라 그 일환으로 전시로 7월 29일부터 8월 10일까지 진행되었다.

진주문고라는 큰 공간, 현대적 분위기의 전시실이 하동 빈산갤러리와는 또다른 느낌을 주었다. 고즈녁한 풍경이 없는 대신 서점과 연결되어 책을 보러오는 많은 사람들과 자연스레 만나는 장점이 크다. 박경리 작가를 좋아하는 90대 어르신도 만나고 20대 청년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박경리 선생과 내 어머니가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란 생각때문인지 특별한 친근함을 느꼈다. 진주여고(일신고녀)는 작년에 100주년을 맞았는데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의 하나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외우 이종민 교수와 김사인 시인이 우정출연해 주어 작가와의 대화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교수는 생각지도 않게 그동안 내가 간간히 쓰고 그린 작품들을 모아 ppt 로 참석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나를 ‘작가’ 처럼 대우해 주었다. 김사인 시인은 진솔하게 내 글씨 속에 담긴 정성을 읽어보라고 덧붙임으로써 내 격을 높였다. 박남준 시인, 한길사 김언호 대표도 자리를 함께 했고 지역의 문화계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다. 진주와 마산의 누이 가족도 참석해 주어 감사했다. 다음날에는 정근식 교육감, 한경구 교수, 김시연 사장 등도 내려와 격려해 주었다. 마지막날엔 전 인제대 총장 성창모 박사가 힘든 발걸음을 해주었다.

온종일 진주문고를 중심으로 책과 사람과 문화의 연결이 신선하게 이루어지는걸 경이롭게 경험했다. 건강한 지역의 문화생태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 단면을 본 느낌이다. 이 소중한 경험을 어떻게 기록해둘까 고민하던 중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의 글을 접했다. 과분한 평가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저런 정성과 노력이 진주문고 책방을 주목할만한 문화공간으로 만든 원동력이었으리라는 생각에 그의 글 일부를 옮긴다. 그 바램대로 간밤의 단비같은 시원함과 풍성함이 사회 곳곳에 가득하길 기원한다.

[박명규 서예전 2] – 진주문고 여태훈

하동 악양 빈산 갤러리에서 시작된 박명규 서예전이 진주에서 끝났다. 박경리 선생 탄생 100주년, 진주문고 창립 40주년 맞이 특별 기획이었다. 열흘간 전시된 작품은 수많은 갤러리의 탄성을 자아냈고 비치된 방명록 3권이 모자라게 감상평을 남겼다.

전시 이튿날 대담이 백미였다. 이종민 교수의 박학다식과 순발력 있는 진행, 박명규 작가의 막힘없는 술술 답변, 두 분을 오가며 빠진 것은 채우고 모자란 것은 살을 붙여 완벽한 보충을 해주신 김사인 시인. 2시간을 넘겨도 자리를 꽉 채운 독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세분의 정담에 귀를 기울였다.

작가와의 만남 다음 날(7.31)엔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이 전시장을 방문했다. 권순기 경남 교육감도 오셨다. 덕분에 경남과 서울시 교육을 책임지는 두 수장이 저희 서점에서 자리를 함께한 영광스러운 장면을 남기게 되었다. 두 분은 기꺼이 서점을 위한 응원과 모델을 자청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지필묵을 보고 연필보다 붓을 먼저 잡았다는 박명규 작가. 작품은 필법에 얽매이지 않았지만 단아하고 자유롭다. 칠순을 넘긴 노학자의 꼿꼿한 기상이 낡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적인데 캘리그라피와는 다른 질감을 보여준다.

전시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을 사연과 사람은 남았다. 책과 사람이 만나, 사람과 사람을 잇는 40살 책의 집에 기분 좋은 빚과 빛이 쌓여만 간다. 모처럼 간밤부터 시작된 단비가 지리산 자락에 내린다. 사납지 않은 순한 비가 메마른 대지를 흠뻑 적시고도 남아 섬진강을 채우고 남해로 잘 흘러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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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100주년 기념 서예전

6월 27일부터 7월 18일까지 개인 서예 전시회를 열었다.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전시로 “비오고 바람불고 눈오고”라는 표제로 하동의 작은 갤러리 빈산에서 열렸다. 5년 전 서울대에서 전시회를 한 적이 있고 간간히 작품 의뢰를 받기도 했지만 막상 ‘초대전’이나 ‘서예가’라 적힌 것을 보노라니 계면쩍음이 앞서지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설렘도 함께 느껴진다.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 너른 벌판을 내다보는 언덕, 폐가를 갤러리로 만든 작지만 정겨운 전시장 – 최참판댁의 크고 웅장한 건물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전시장으로 올라오는 돌담길, 소박한 갤러리, 그 앞 마당의 감나무가 마치 토지속 평범한 농민들이 살던 현장에 와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박경리 선생도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과 시, 대담 중에서 마음에 와닿는 글들을 골라 만든 23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적절한 구도와 서체를 구상하느라 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쓸수록 모자람을 느끼고 아쉬웠지만 그럴수록 새로운 시도를 할 동기도 생겼다. 그 애씀 속에서 나름 아름다운 한글의 조형미를 제법 살렸다는 자부심도 가져보는 전시다. 김석영 님이 초한 갤러리 빈산의 “기획의 글”을 옮겨 적는다.

고난을 통해 피어나는 우주적 생명의 찬가 – 박명규 서예전에 부쳐

“사시장철 갠 날만 있다믄 그기이 어디 극락이겄나.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오는 그기이 땅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이치이드시 사람으 경우도 매한가지 이치일 기니…….” 소설 『토지』 속 윤보의 이 한마디는 박경리 작가가 평생을 통해 일궈온 ‘생명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 선생은 인간의 삶을 자연의 거대한 순리와 동일선상에 놓았다. 기쁨과 평화 같은 ‘갠 날’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닥치는 시련과 고난인 ‘비바람과 눈보라’ 역시 생태계를 유지하려는 ‘자연의 ‘순리이고 ‘우주의 섭리’라는 깨달음이다. 온 생명이 겪는 생로병사의 굴곡이 모두 천변만화의 날씨와 다를 바 없다. 당연히 ‘인간’이란 존재 또한 그러하다.

<박경리작가 탄생 100주년 특별기획전>의 다섯 번째 무대에 정헌靜軒 박명규 작가를 모셨다. 그는 평생을 한국사회사와 평화학 등을 탐구한 ‘사회학자’이자 연구 틈틈이 붓을 들고 묵향에 젖어 온 ‘서예가’이다. 박경리 선생의 문학을 사회사적으로 규명하려고 남다른 공을 들여 세상에 알린 이력이 있다. 문학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선생을 기리는 건 흔한 일이나 사회학자의 눈으로 선생의 문학과 사상을 조명하고, 그 정수를 길어내 그것도 외양간 갤러리에서 붓끝으로 재해석까지 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이번 무대가 오롯이 박경리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비영리 헌정전시>로 이뤄진다는 점 또한 특별하다.

작가는 박경리 선생의 글과 문장의 행간에 서린 생명사상을 붓끝에 실어 펼쳐내고 있다. 작가의 어머니와 선생이 진주 일신여고 동창인 인연으로 선생의 사상이 담긴 문장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다고 한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 흔쾌히 동참하고 혼신을 다해 작품을 준비한 까닭이다. 이십여 점의 작품에 작가가 기울인 공력이 다채롭게 스며있다. 작가의 글씨는 사회학자의 지성과 전통 서법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깊은 울림을 준다. 서법에 바탕을 두었으나 ‘선비풍의 글씨’에 머물지 않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한글 서체의 조형미’를 살려서 획의 강약과 농담, 그림의 자유로운 변용까지 나타내어 정갈하면서도 풍요롭기 그지없다.

작가는 “글기둥 하나 붙들고 예까지 왔네”라는 선생의 고백처럼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언어의 몸부림’을 ‘서예’라는 몸짓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했다.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우리 많이 살았다. 여한이 없제.”, “슬픔도 기쁨도 왜 그리 찬란한가”,“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 등과 같이 선생이 남긴 문장마다 서린 자연과 생명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이 작가의 필치에 실려 되살아난다. 작가가 비뚤배뚤 얽히고설켜 서로 기댄 듯 어울려 핀 민들레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씨 “험난한 로정, 아아 너는 피었구나”(「민들레」)를 보는데 왈칵 눈물이 솟는다. 아아. 이게 우리 ‘인간 존재의 모습’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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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유정(邊境有情)

일주일에 걸친 북중국경지역 답사를 마치며 일행 한분이 한시를 한 수 지어보라 제안했다. 그에 응할 실력은 전혀 못되는 걸 알지만 중국을 여행한다는 기분에 웬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두보의 ‘春望’ 첫귀절,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을 떠올리며 이런 저런 생각과 감정들을 갈무리해 보고자 했다. 어려운 중국식 작법이나 차운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뜻만 드러내는 한시도 가능하다 하고 이를 신체시 (新體詩)라 이름했던 선친의 시도에 기대어 용기를 냈다.

延邊山河連兩岸 圖們橋上無人聲 (연변의 강산은 양안을 잇고 있는데, 도문의 다리 위엔 오가는 사람이 없다) // 欲對龍井先驅者 東柱古家滿遊客 (용정에서 선구자를 만나보려 하나, 윤동주 옛집엔 관광객만 그득하네) // 天池風光如前秀 鐵網警告此國境 (백두산 천지의 풍광은 여전히 빼어난데, 철망은 이곳이 국경이라 경고하고) // 自遠方來卒本城 皇宮舊址盛雜草 (먼곳에서 애써 졸본성을 찾아 왔으나 왕궁의 옛터엔 잡초만 무성하다) // 實見好太王碑文 懷憶千年古史蹟 (광개토왕비문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천년 옛 사적을 떠올린다) // 五女山傳朱蒙業 誰言此地高句麗 (오녀산은 주몽의 건국위업을 전하지만, 오늘 누가 이 땅을 고구려라 칭할 것인가) // 鴨綠江上望義州 默念恨別已百年 (압록강 위에서 신의주를 바라보며 한스럽게 나뉘어진지 어언 백년임을 생각한다) // 難免悲感世上事 豈不待後靑年起 (세상사 비감함을 누를 길 없으니 어찌 후대 청년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으랴)

귀국한 후에도 여행의 감회가 사라지지 않아 이 한시를 화선지에 썼다. 어줍잖치만 시(詩)와 서(書)를 함께 하던 옛 문인이 된 느낌이다. 시도 서도 내놓을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지만 어차피 격식을 무시한 작품이니 짝퉁이나 습작이란 힐난이 있어도 개의할 바 아니다. 그런데 7언 절구의 앞과 뒤가 대비되고 풍경과 인간사가 서로 어긋나는 모습이 역연하여 스스로 흥미롭기도 또 씁쓸하기도 하다. 여행에서 자연스레 얻게된 정서의 양면이 반영된 결과일텐데 이런 역설과 회한의 감정을 표현하고 누군가와 교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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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다시 긴 시간을 달려 단동에 도착했다. 석양이 지는 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신의주, 그 풍경의 변화가 우선 내 눈길을 끌었다. 고층건물이 꽤 들어섰고 붉고 둥근 랜드마크 건물이 새롭다. 카지노장으로 건설되었다는데 아직 개장은 안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위화도에는 최근에 완공된 듯 깔끔한 고층건물들이 십수개 동 연이어 서있다. 넓지 않은 공간에 꼭같은 건물들만 세워진 것으로 보아 역동적인 경제활동이나 생활공간이 될 곳은 아닌 듯 하지만 북한 내부에도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진행 중임을 보여주기에는 족해 보였다.

단동시의 압록강변은 더욱 활발하고 역동적인 관광지가 된 듯 했다. 북한과의 연계와는 무관하게 중국 내부의 발전과 여행수요가 가져온 결과로 보인다. 실제 연변에서도 확인했지만 동북삼성이 중국인들의 국내관광 대상지로 되고 있다. 조선족이 주도하는 음식문화,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K-Culture, 변경지에서의 독특한 분위기 등이 여행을 자극하는 요인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압록강변 넓은 지역을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강 건너 북한은 그다지 관심거리가 아닌 듯 했다.

단동은 중국의 역사해석, 정치교육의 현장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더 커진 모습이다. 6.25때 끊어진 압록강철교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은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교육용 설명간판이 곳곳에 부착되어 있다. 철교 중간에는 6.25 당시 이곳을 폭파한 미군전투기 사진과 함께 이곳이 ‘항미원조전쟁출정지’였다고 적혀있다. 기념품점에도 ’항미원조‘를 테마로 한 물건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런 경향은 동북지방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경향이라 하겠다. 관광과 역사와 정치가 중화주의 세계관을 매개로 곳곳에서 정교하게 결합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압록강변의 백화점과 상점들은 불야성처럼 밝고 ’한조(韓朝)상점‘이란 상호도 눈에 띄었지만 남북한과 중국을 한데 잇는 변경도시로서의 역할은 제한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 모습이다. 십여년 전에 북한과 중국을 잇는 신압록강대교가 거의 완공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기대감을 가졌었다. 북중간 경제가 활발해지고 한국과의 관계도 강화될 것을 기대하여 인근지역에 부동산 개발붐이 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완공 이후 북한측 연결부분 공사미진으로 오랫동안 개통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니 아직은 정중동이라 해야할지 모르겠다.

단동철교에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컨테이너 화물차량이 줄을 이어 서 있어 어떤 부분에서는 유의미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저 물동량의 변화가 얼마나 지속적일지, 인적 교류로 어느 정도 발전할지 앞으로 지켜볼 일이겠다. 북한이 적대적 2국가론을 내세우고 러시아와의 관계가 현저히 가까워진 이후 북중간 협력이 어느 정도 진행될지는 예측하기 쉽지 않다. 다만 향후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중국 관계의 중대한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고 그럴수록 이 지역은 또다시 주목 받을 것이다. 때마침 북한에서 신압록대교 개통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보인다는 뉴스도 접했고 북미대화의 가능성도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반도가 어떻게 안정과 평화를 제도화하고 궁극적 통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배전의 지혜와 숙고가 필요한 때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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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구려

8월 19일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온 후 서쪽으로 달려 집안에 도착했다. 압록강변 고구려의 옛 도읍이다. 십여년 전 서울대 교수들과 서안의 둔황고굴을 들린 후 티벳 방문이 무산되어 대신 이곳을 왔던 적이 있다. 그 때에 비해선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호텔시설도 꽤 좋아져 오는 길이 훨씬 편해졌다. 이곳의 압록강은 강폭이 넓지 않고 북한의 만포시와 연결되어 있지만 변경지대로서의 특성은 크지 않다.

고구려 역사를 품은 곳이지만 오늘 이곳은 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이다. 주몽이 졸본성에 나라를 세운 후 두 번째 도읍을 세운 국내성 성벽 일부가 시내에 남아있지만 고대의 강성했던 시절을 보여주기엔 역부족이다. 호텔 앞을 흐르는 훈강이 비류수로 비정된다 하나, 주몽의 건국역사를 기억할 사람도 찾기 어렵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환도산성에는 건물들이 있던 주춧돌이 발굴되고 ‘고구려왕성지‘라 일컬어지고 있지만 옛 위용을 체감하기에는 유적이 너무 소박하다.

그 아쉬움은 통구고분군 앞에서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이 일대에 고구려 무덤은 만여기 이상 존재한다는데 실제 전기차를 타고 돌아보아야 할 정도로 넓은 지역에 수많은 무덤들이 빼곡하다. 일대는 ’고구려고묘박물관‘이라는 야외전시관으로 단장되어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의 세력이 왕성했음을 느끼기엔 충분하지만, 무덤만 남아있고 다른 유적은 거의 사리진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고구려의 역사적 존재감은 역시 광개토대왕비에서 명료해진다. 호태왕비라 적힌, 6미터를 훨씬 넘는 거대한 비석이 주는 압도감은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1775자가 또렷한 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은 육안으로 읽을 수 있다. 글씨와 석각이 모두 뛰어나 비문의 탁본 자체가 예술품 같다. 동북아 고대사를 실물로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인데 일부 글자가 보이지 않고 그 해석을 둘러싸고 한중일 학계의 논란도 뜨겁다. 이어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을 들러 석실 내부까지 둘러보았다. 동방의 피라미드로 일컬어지는 장수왕릉은 잘 단장되어 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이전에 비해 감동이 덜한 느낌이었다.

다음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졸본성이 있던 오녀산성으로 향했다. 평지에서 바라보는 오녀산은 천혜의 낭떠라지로 둘러쳐진 높은 곳으로 수성에는 유리한 지형임은 한눈에도 분명해 보였다. 입구에는 ”고구려시조비”라는 큰 돌비석이 서 있고 주몽의 건국을 알라는 안내문이 서있다. 천여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산성과 주거지터, 제사터 동이 있다. 최근에 건립되었다는 말을 탄 주몽의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천여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하는 입구에 이곳 역사를 기록한 돌비가 시기별로 서 있다. “기원전 37년 북부여 왕자 주몽이 졸본천 (지금의 환인)에 정착, 고구려국을 세웠다” ”기원전 34년 주몽이 부족에게 명하여 학령에 왕성을 축성하게 했다 (지금의 오녀산성)“ ”기원전 19년 9월 태자 유리가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 2대왕 유리명왕이 되었다“ ”기원후 32년 12월 한나라 광무제가 구려후를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기원후 167년에서 619년까지 신대왕 영류왕 등 9왕이 졸본천으로 가 시조묘에 제사하다“ ”기원후 2004년 7월 오녀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네번째 돌비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졌다.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정권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는 중대한 내용이었다. 중국의 후한서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한국의 삼국사기와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후한서는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고구려가 한나라에 조공을 바친 후 제후국으로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고 오녀산성의 네 번째 돌비는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소급하여 해석하면 주몽도, 유리왕도, 고구려 벽화나 고분군도 결국 중국제국, 중화문명의 한 부분으로 설명될 소지가 강해질 것은 분명하다.

역사를 흔히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 등으로 구분하지만, 현실에서 고대사가 가장 치열한 정치적 논란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동지방의 오랜 갈등의 뿌리에는 종교적 성지를 둘러싼 대립이 놓여있고 그것은 다시 고대의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에 맣닿아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미래를 내다볼 때 이 지역의 고대사가 어떻게 재구성되고 현재화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다. 고구려 유적지를 단지 흘러간 과거사로 바라보지 못하는 염려가 마음 한켠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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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유감

8월 17일부터 일주일간 북중국경지대를 답사했다. 재단법인 통일과나눔이 준비한 여행에 초청을 받아 뜻깊은 여행을 했다. 두만강 동쪽 끝 방천에서 시작하여 도문, 연변, 용정, 송강하, 통화, 집안, 환인, 압록강 끝 단동을 거쳐 심양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삼십여년간 여러 차례 오고간 곳이지만 최근의 변화가 생각보다 크고 생소한 장면들이 적지 않았다. 놀라움과 안타까움, 기대와 우려가 혼재하는 이중적 감정이 시종 떠나지 않았다.

연길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친 후 곧장 북중러 삼국 국경지대인 방천으로 향했다. 두만강변의 모습은 예와 다름없었지만 국경 철조망은 더 새로워진 듯 했다. 훈춘 지역에 웅장한 세관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아직 북중간 물류 이동은 활발하지 않다 한다. 방천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9층 건물이 들어서 삼국 국경을 조망할 수 있었고 많은 관광객들로 복잡했다. 이곳이 발해문명의 고장임을 알리는 큰 간판과 함께 “애국주의가 곧 중화민족의 민족심이자 민족혼“이라는 표어가 강렬하다.

이튿날 아침 도문을 들렀다. 이곳을 오면 으례 오는 국경지대이고 북한으로 통하는 다리 중간까지 걸어가 북한땅을 바라보곤 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제 그 다리는 차단되어 사람이 오가지 못한다. 대신 아래쪽 ’두만강 나루터‘가 새로운 조망공간으로 개발되었고 ‘성수동 까페‘라 이름한 대형 찻집이 관광객을 부르고 있었다. 피아노를 둔 서양식 인테리어와 서울 성수동이란 브랜드가 이곳까지 진출한 것이 놀라왔지만 전반적으로 도문의 외지고 낙후한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91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감흥을 잊지 못하는 나로서는 저 다리가 다시 이어질 날이 언제 올까 궁금했다.

새로이 건립된 연변박물관을 들러 보았다. 규모나 전시내용, 설명방식 등에서 그 수준이 놀라왔다. 연변 정도의 지방도시에 이처럼 거대한 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문화정책이 얼마나 조밀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컨텐츠의 서사가 정책적으로 체계화되는데 따르는 문제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민족 고유의 문화와 역사적 역할은 그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중화민족‘의 다문화적 성격을 강조하는 기조가 뚜렷하다.. 만주지역을 개척해온 조선족의 활약상이 ’생산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 것도 같은 맥락일 터이다.

용정을 지나는데 가이드가 박경리 ‘토지’ 이야기를 했다. 이곳이 토지 2부의 주무대였기 때문인데 얼마전 끝낸 박경리 기념 서예전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하동 평사리와 진주에서의 전시를 끝내고 이곳 만주지역을 오게 된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사의 맥락에서 용정의 일송정, 명동촌 명동학교, 민족시인 윤동주를 떠올리는 기억은 점차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화민족의 역사서술이란 큰 틀 속에 조선족의 역할을 배치시키는 유적의 재해석 작업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 등정은 언제나 이 지역 여행의 핵심이다. 이전에 천지를 세번 올랐었지만 남파로 올라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송강하의 리조트에서 새벽 6시에 길을 나섰는데 북파나 서파에 비해 남파는 하루에 입장가능한 사람수를 훨씬 적게 제한한다고 한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별로 혼잡하지 않았고 큰 기다림 없이 13인용 승합차를 탈 수 있었다. 천지로 올라가는 길 바로 옆으로 북중 국경선을 알리는 철책이 길게 이어져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이십여분 동안에도 기상은 시시각각 변해 긴장하게 했지만 마침내 정상에서 파란 하늘과 툭트인 천지를 만났다. 과연 장관이었고 북파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수많은 인파로 자리다툼을 해야 했던 이전과는 달리 여유롭게 천지를 조망할 수 있어서 특히 좋았다. 전망 좋은 곳은 돈을 내고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이곳에서 돈을 아낄 사람은 없지 싶었다. 천지의 사진을 걸어두고 답답한 일상과 숨막히는 더위에도 가능하면 푸른 하늘과 파란 물빛을 잊지말고 지내자 마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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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공동체

6월 1일 “격동의 시대 – 통일과 평화를 어떻게 재결합할 것인가”를 주제로 내건 학술 심포지엄이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이 주최했다. 트럼프 2기 출범으로 심화된 세계적 변동과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이후 우리가 처하게 된 새로운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 첫 세션의 과제였다. 둘째 세션은 최근 남북한 2국가론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 평화공존을 새 목표로 내걸자는 일각의 주장 속에서 통일론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를 다루었다. 세번째 세션은 기존의 민족공동체 방안을 대신할 어떤 비전이 가능할지를 탐색하는 대안모색이 주 관심이었다. 이영선 통일과나눔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통일과 평화의 두 화두를 묶어내기 위한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했고 150여 청중들이 시종 경청하여 몰입도가 높은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윤영관 아산재단 이사장은 현재의 상황을 ‘지정학 시대의 귀환’으로 규정하고 향후 가능한 세 시나리오를 소개한 후 그것이 세계질서와 동아시아, 그리고 한반도에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를 설명했다. 이전 질서로의 회귀, 신냉전, 세력권 정치 중 어떤 미래가 전개되든 한국에겐 큰 도전이 되리라 예상하면서 특히 한반도문제가 국제정치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국민들의 통일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형중 박사는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핵능력 증진으로 북한의 위상과 강제력이 더욱 강화된 조건 속에서 ‘북한 우위 적대병존관계 수립’ 전략으로 해석했다. 적대성은 향후 북한체제존속의 한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고, 그 맥락에서 평화공존은 실현불가능한 전망이라고 했다. 평화적 2국가론은 허상이며 억제와 위기관리역량을 재설계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마상윤 교수, 민태은 박사가 참여한 토론에서는 향후 세계질서 변동을 해석하는 제 시나리오의 적절성 여부, 특히 세력권정치의 전개가능성, 지정학의 회귀라는 표현의 정확한 내용, 한국문제의 국제화라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거래주의적 동맹관이 동맹약화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등이 논의되었다. 박형중 박사에 대해선 과연 북한의 대남적대성이 고정불변일 것이라 단정할 수 있는지, 평화공존 불가능론은 너무 구조적 변수만을 강조하는 편향이 아닌지, 이런 상황에서도 신뢰의 접점을 찾고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두 번째 세션에서 김병연 교수는 경제통합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통일론을 제시했다. 경제협력에서 경제통합을 거쳐 통일로 가는 모델이 북한에게도 실익이 크고 한국의 부담도 크지 않다고 했다. 북한의 현 경제상황은 매우 구조적으로 취약하기에 체제안정을 위해서라도 경제협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가능성을 주목한다. 다만 경제협력은 위임형 제도화를 수반해야 하고 공동의 규칙을 발전시킴으로써 북한이 시장화를 넘어 시장경제화로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전우택교수는 현 북한이 지도자의 강국욕망과 잘살려는 인민의 욕망이 부딪치는 상태로 파악했다. 시장, 사상, 문화 전반에 걸친 가혹혼 통제가 심화되는 현실은 그 자체가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고 고통과 불안정을 키울 것으로 판단했다. 통일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즉 평화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운 우리의 대응력, 입체적이고 모순을 포용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토론에서 양문수 교수는 경제통합의 실제 유형도 역사적으로 다양했음을 설명하면서 한반도에서의 통합개념을 좀더 세분화, 정교화할 필요를 지적했다. 또 동구권에서 확인된 경제통합이론이 한반도에도 충분히 적용가능한지, 북한이 과연 통합이라는 개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시됨을 지적했다. 김성경 교수는 1국가 1체제를 상정하는 통일개념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두 국가론에 대해 좀더 전향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21세기 첨단기술이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도 좀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첨언했다.

세 번째 세션에서 나 (박명규 교수)는 현 시기를 ‘기본합의서 체제의 파탄’ 국면이라 설명했다. 미중대립과 북러밀착, 북한 핵보유 자신감 등을 배경으로 북한은 1991년 이후 남북관계를 지탱해온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원칙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한국에서도 대북정책이나 남남갈등을 조율하는 전략적 대원칙으로서의 위상과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다. 같은 민족이란 정체성이 약화되고 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간주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동시에 북한에 대한 거부감과 안보불안은 증대하고 있어 기존방안을 유지하기도 2국가론을 수용하기도 어려운 딜렘마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착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선 민족공동체에 기반한 기존 시각을 ‘코리아 공동체’ 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제안했다. South Korea와 North Korea라는 두 현존하는 국가성을 인정하는 새 통합구상으로 바꾸자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남북간 특수관계도 역사문화적 공동성보다 분단국가관계로 재조정되고 그에 기반하여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모색하는 형태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코리아 공동체는 단일민족국가형 통일체를 지향하기보다 경제, 문화, 재난, 보건, 안보 등 여러 영역별로 다차원의 통합이 병행발전는 복합공동체가 되어야 함도 언급했다. 박영호 박사, 조동호 교수, 김병로 교수, 류경아 박사 등 패널토론자들은 대체로 큰 방향에 공감하면서도 실질적인 대안이 되기 위해선 어려 측면에서 좀더 다듬어져야 할 쟁점들이 있음을 지적했다.

전반적으로 심포지엄의 짜임새는 좋았고 발제와 토론도 밀도가 있어서 휴식도 없이 계속된 4시간이 길지 않게 느껴졌다.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세가지 쟁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지정학의 도래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국제정치적 전략과 남북관계적 논리가 어떻게 종합적 대응력으로 재구축될 수 있을지가 그 하나다. 동맹-자주, 평화-통일을 나누어 양자택일하려는 편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중요해졌다. 둘째는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공세적으로 볼 것인가 방어적으로 볼 것인가의 쟁점이다. 양면이 다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양자를 전제한 위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셋째는 경제통합 구상이나 코리아공동체 비전에서 보듯 급진적 통일보다 삶과 연동되는 ‘통합’을 더욱 주목할 필요성이다. 이런 통합형 구상을 어떻게 전략과 정책 차원으로 체계화할 것인가가 미래의 주요한 과제가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관계상 이런 쟁점들이 좀더 예리하게 토론되고 예각화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은 아쉬웠다. 향후 동북아 지정학의 향방, 북한과의 평화공존 가능성, 남북 경제통합의 전망, 코리아 공동체의 적실성 등에 대한 밀도있는 논의는 후속 과제로 남겨진 셈이다. 향후 더많은 논쟁과 검토를 거쳐 이런 쟁점들이 다듬어지기 기대하면서 그러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파적 대립, 단순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한 지성적 성찰이 더욱 절실하리란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코리아 공동체’라는 화두가 꽉막한 남북관계를 열어가는 대안으로 발전해갔으면 하는 희망을 더욱 갖게 되었다. 2차대전을 거치면서 심화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을 넘어서 평화와 번영을 향한 유럽공동체 꿈을 꾸었던 장 모네의 구상이 실현되는데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음을 생각하며, 긴 호흡과 폭넓은 토론, 유토피스틱스적 전망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