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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공동체

6월 1일 “격동의 시대 – 통일과 평화를 어떻게 재결합할 것인가”를 주제로 내건 학술 심포지엄이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이 주최했다. 트럼프 2기 출범으로 심화된 세계적 변동과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이후 우리가 처하게 된 새로운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 첫 세션의 과제였다. 둘째 세션은 최근 남북한 2국가론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 평화공존을 새 목표로 내걸자는 일각의 주장 속에서 통일론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를 다루었다. 세번째 세션은 기존의 민족공동체 방안을 대신할 어떤 비전이 가능할지를 탐색하는 대안모색이 주 관심이었다. 이영선 통일과나눔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통일과 평화의 두 화두를 묶어내기 위한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했고 150여 청중들이 시종 경청하여 몰입도가 높은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윤영관 아산재단 이사장은 현재의 상황을 ‘지정학 시대의 귀환’으로 규정하고 향후 가능한 세 시나리오를 소개한 후 그것이 세계질서와 동아시아, 그리고 한반도에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를 설명했다. 이전 질서로의 회귀, 신냉전, 세력권 정치 중 어떤 미래가 전개되든 한국에겐 큰 도전이 되리라 예상하면서 특히 한반도문제가 국제정치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국민들의 통일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형중 박사는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핵능력 증진으로 북한의 위상과 강제력이 더욱 강화된 조건 속에서 ‘북한 우위 적대병존관계 수립’ 전략으로 해석했다. 적대성은 향후 북한체제존속의 한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고, 그 맥락에서 평화공존은 실현불가능한 전망이라고 했다. 평화적 2국가론은 허상이며 억제와 위기관리역량을 재설계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마상윤 교수, 민태은 박사가 참여한 토론에서는 향후 세계질서 변동을 해석하는 제 시나리오의 적절성 여부, 특히 세력권정치의 전개가능성, 지정학의 회귀라는 표현의 정확한 내용, 한국문제의 국제화라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거래주의적 동맹관이 동맹약화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등이 논의되었다. 박형중 박사에 대해선 과연 북한의 대남적대성이 고정불변일 것이라 단정할 수 있는지, 평화공존 불가능론은 너무 구조적 변수만을 강조하는 편향이 아닌지, 이런 상황에서도 신뢰의 접점을 찾고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두 번째 세션에서 김병연 교수는 경제통합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통일론을 제시했다. 경제협력에서 경제통합을 거쳐 통일로 가는 모델이 북한에게도 실익이 크고 한국의 부담도 크지 않다고 했다. 북한의 현 경제상황은 매우 구조적으로 취약하기에 체제안정을 위해서라도 경제협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가능성을 주목한다. 다만 경제협력은 위임형 제도화를 수반해야 하고 공동의 규칙을 발전시킴으로써 북한이 시장화를 넘어 시장경제화로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전우택교수는 현 북한이 지도자의 강국욕망과 잘살려는 인민의 욕망이 부딪치는 상태로 파악했다. 시장, 사상, 문화 전반에 걸친 가혹혼 통제가 심화되는 현실은 그 자체가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고 고통과 불안정을 키울 것으로 판단했다. 통일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즉 평화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운 우리의 대응력, 입체적이고 모순을 포용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토론에서 양문수 교수는 경제통합의 실제 유형도 역사적으로 다양했음을 설명하면서 한반도에서의 통합개념을 좀더 세분화, 정교화할 필요를 지적했다. 또 동구권에서 확인된 경제통합이론이 한반도에도 충분히 적용가능한지, 북한이 과연 통합이라는 개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시됨을 지적했다. 김성경 교수는 1국가 1체제를 상정하는 통일개념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두 국가론에 대해 좀더 전향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21세기 첨단기술이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도 좀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첨언했다.

세 번째 세션에서 나 (박명규 교수)는 현 시기를 ‘기본합의서 체제의 파탄’ 국면이라 설명했다. 미중대립과 북러밀착, 북한 핵보유 자신감 등을 배경으로 북한은 1991년 이후 남북관계를 지탱해온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원칙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한국에서도 대북정책이나 남남갈등을 조율하는 전략적 대원칙으로서의 위상과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다. 같은 민족이란 정체성이 약화되고 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간주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동시에 북한에 대한 거부감과 안보불안은 증대하고 있어 기존방안을 유지하기도 2국가론을 수용하기도 어려운 딜렘마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착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선 민족공동체에 기반한 기존 시각을 ‘코리아 공동체’ 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제안했다. South Korea와 North Korea라는 두 현존하는 국가성을 인정하는 새 통합구상으로 바꾸자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남북간 특수관계도 역사문화적 공동성보다 분단국가관계로 재조정되고 그에 기반하여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모색하는 형태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코리아 공동체는 단일민족국가형 통일체를 지향하기보다 경제, 문화, 재난, 보건, 안보 등 여러 영역별로 다차원의 통합이 병행발전는 복합공동체가 되어야 함도 언급했다. 박영호 박사, 조동호 교수, 김병로 교수, 류경아 박사 등 패널토론자들은 대체로 큰 방향에 공감하면서도 실질적인 대안이 되기 위해선 어려 측면에서 좀더 다듬어져야 할 쟁점들이 있음을 지적했다.

전반적으로 심포지엄의 짜임새는 좋았고 발제와 토론도 밀도가 있어서 휴식도 없이 계속된 4시간이 길지 않게 느껴졌다.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세가지 쟁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지정학의 도래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국제정치적 전략과 남북관계적 논리가 어떻게 종합적 대응력으로 재구축될 수 있을지가 그 하나다. 동맹-자주, 평화-통일을 나누어 양자택일하려는 편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중요해졌다. 둘째는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공세적으로 볼 것인가 방어적으로 볼 것인가의 쟁점이다. 양면이 다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양자를 전제한 위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셋째는 경제통합 구상이나 코리아공동체 비전에서 보듯 급진적 통일보다 삶과 연동되는 ‘통합’을 더욱 주목할 필요성이다. 이런 통합형 구상을 어떻게 전략과 정책 차원으로 체계화할 것인가가 미래의 주요한 과제가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관계상 이런 쟁점들이 좀더 예리하게 토론되고 예각화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은 아쉬웠다. 향후 동북아 지정학의 향방, 북한과의 평화공존 가능성, 남북 경제통합의 전망, 코리아 공동체의 적실성 등에 대한 밀도있는 논의는 후속 과제로 남겨진 셈이다. 향후 더많은 논쟁과 검토를 거쳐 이런 쟁점들이 다듬어지기 기대하면서 그러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파적 대립, 단순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한 지성적 성찰이 더욱 절실하리란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코리아 공동체’라는 화두가 꽉막한 남북관계를 열어가는 대안으로 발전해갔으면 하는 희망을 더욱 갖게 되었다. 2차대전을 거치면서 심화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을 넘어서 평화와 번영을 향한 유럽공동체 꿈을 꾸었던 장 모네의 구상이 실현되는데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음을 생각하며, 긴 호흡과 폭넓은 토론, 유토피스틱스적 전망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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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의 역사박제

5월 21일 고등학교 동창들과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오전엔 다산생가와 기념관 일대를 둘러보고 오후엔 동구릉을 답사하는 일정이었다.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였는데 야외에서 하루 종일 걷는데는 오히려 천상맞춤이었다. 두 곳 모두 오래 전에 와 본 곳이지만 처음 온 듯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느낀 바가 적지 않다

남양주 마재마을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마을로 그가 오랜 유배 생활 끝에 다시 돌아와 생을 마감한 곳이다. 1986년에 복원된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떨어져 있는 구조로 안마당을 넓게 쓰도록 설계한 중부지방의 전형적 양반집 모습이다.기념관에는 다산의 대표 저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 <흠흠신서>의 사본과 수원 화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가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문화관은 실학과 관련한 유무형 자료와 정보를 수집·보존·연구·전시하는 다목적 복합 문화 공간이다. 두물머리를 앞에 둔 다산 유적지는 주변 풍광도 수려하여 산책하기에 퍽 좋은 장소다. 여유당 뒤편의 다산 묘소는 2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추모 공간이 되었다.

다산 집안은 8대가 과거에 합격한 명문가였다. 그 부친 정재원은 참의공 정시윤의 4대종손이었고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지적 탐구열이 뛰어나 실학은 물론이고 서학도 선구적으로 수용한 인물들이 다수 이 집안과 연결되어 있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던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었고 그를 매개로 성호 이익의 실학을 이어받았다. 다산은 남인학파로 꼽히지만 실제적인 사고와 경험적 지식을 중시했다. 다산초당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해 1표2서의 대작을 남겼고 적지 않은 편지와 시문으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다산의 사상을 집대성한 위당 정인보는 다산에 대한 연구가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라고 했다. 그가 자녀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글은 오늘날 교육적으로도 활용가치가 높아 다산유적지 거리 곳곳에 그의 글이 새겨진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다산유적지는 그 인근에 있는 마재성지와 함께 둘러보아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의 형제들의 생애까지 포괄해야 다산의 고민과 지성, 삶의 궤적들이 입체적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 마재성지는 셋째 형 약종과 그 가족의 순교를 기념하는 곳인데 다산유적지와 마재성지가 함께 소개되는 안내서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쉽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한 조선 천주교의 초기 지도자였다. 그 자신이 신앙을 지켜 순교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부인 유조이 세실리아, 장남 정철상 카를로, 차남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이 모두 신유사옥과 기해박해에서 순교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가족 모두가 성인으로 시복되었고 마재성지는 한국천주교의 대표성지가 되었다. 다산유적지와 마재성지의 가깝지만 먼 공간구성은 약종과 약용의 엇갈린 생애만큼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오후에 들러 본 동구릉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서울 근교에 50만평이 넘는 왕조의 묘역이 이처럼 잘 관리되고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조선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그의 유언에 따라 함흥의 억새풀로 덮여있다는 설명이 흥미로왔다. 이성계로서는 그가 성장한 함경도 변경지방에의 그리움을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500년 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왕릉이 그 이후 조성된 왕과 왕비의 묘역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아홉 릉이 크기나 형태에서 너무 유사해서 설명을 읽지 않으면 누구의 릉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니 조선왕조 역사에서 태조의 유훈이라는게 큰 힘을 발휘한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선조가 묻힌 목릉 앞에서 조선왕조를 망친 임금이 저렇게 대우받아도 되는가라는 한 친구의 일갈이 잠을 깨우듯 와 꽃혔다. 그러고보니 임진년 왜란과 병자년 호란을 겪고 조선사회가 극도의 피폐상태로 몰렸던 시기의 국왕, 당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학계의 평가가 좋지 않은 선조인데 죽은 이후의 무덤은 오히려 태조의 릉보다 더 좋아 보일 정도다. 유일한 외국 출신 국왕이었던 현종의 묘 숭릉, 탕평책을 실시한 영조의 원릉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여서 마치 복제한 듯 비슷하다. 죽음 앞에선 살아서의 잘잘못도 모두 묻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당대의 치적이나 세평과는 무관하게 국왕이란 존재에 대한 의례와 장법만이 존중된 결과일지 모르겠다.

동구릉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이곳을 둘러보는 외국인들은 조선왕조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을 어떻게 유추할까? 왕조와 왕실에 대한 애착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한국사회인데 지금도 오래전 국왕의 제사가 계속되는 이 살아있는 문화공간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K-Culture 가 주목받으면서 태종과 문종과 선조와 현종의 구체적 역사와 스토리는 사라지고 국왕과 황후, 예법이라는 문화적 코드만 부각될 수도 있다. 하긴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로마의 콜로세움의 여행에서도 시간과 스토리는 배경으로 박제되는게 보통이니 왕조의 무덤 앞에서 명말선초의 14세기와 풍전등화의 16세기, 영정조의 18세기 간 차이를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그 여러 가지 소회를 그림으로 담고 싶어 화선지를 폈다. 숭릉의 단아한 풍경을 수묵으로 그리고 이런 발문을 썼다. “오월의 신록, 유네스코 문화유산, 왕조의 잔재와 영화, 권력무상, 역사의 진전 —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당연하지만 이 물음 속에는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담겨있다. 스토리와 진정성이 박제화되는 것은 먼 역사에만 해당되는게 아니다. 온갖 과거가 이념과 정치의 잣대로 재단되는 오늘의 역사오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스토리가 빠진 문화적 기호, 미학적 대상으로 유적을 만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래도 유적지의 참된 의미는 삶의 스토리, 그 속에 담긴 진정성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다산유적지도 마재성지도 동구릉의 건원릉과 숭릉도 제 각각의 존재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life · 오늘의 화두

녹비홍수 인수가비 (綠肥紅瘦 人瘦可肥)

정민 교수가 자신이 쓴 컬럼을 보내왔다. 제목은 녹비홍수 (綠肥紅瘦) – 초록은 무성해지고 붉은 꽃은 시든다는 뜻인데 5월을 맞이하는 계절에 걸맞는 표현이다. 매일 내가 산책하는 집 주변 공원에도 날이 다르게 초록은 짙어져 학창 시절 읽었던 ‘신록예찬’이 저절로 떠올려지곤 한다. 곳곳에 철쭉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이팝나무의 흰 꽃과 천변 야생화들의 제각각 원색을 뽐내는 중이라 ‘꽃이 시든다’라는 표현은 다소 와닿지 않는 느낌이긴 하다.

초록과 붉음, 신록과 꽃을 살짐과 수척함으로 표현한 옛사람의 단어구사가 신선하다. 단순히 문학적 비유에 그치지 않고 삼라만상의 생명연쇄를 꿰뚫은 철학적 표현으로도 읽힌다. 만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누군가 성장하면 누군가 사라지는 것이 섭리다. 다산, 추사 등이 편지에 이 말을 즐겨 썼다는데 성리학에 친숙했던 그들의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던 시선과도 친화력이 있었을 법 하다. 그에 비해보면 성장지향의 시대, 효용중심의 현실, 각자도생의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 친숙해지기는 쉽지 않은 표현이기도 하다.

오늘날 녹비홍수란 표현이 매우 낯설게 된 것은 편지글이 사라진 탓이 클 터이다. 편지는 언제나 그 시작부분이 어려워 일종의 공식적 표현에 의존했다. 건강과 안부를 묻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계절의 변화를 함께 언급하는 것이 상례였다. 내 경험에 비춰보면 주로 입춘지절에, 폭염가운데, 엄동설한에, 환절기에… 등등을 골라 썼고 녹비홍수를 써본 기억은 없다. 어느 때부터인가 편지를 쓸 일이 없어졌고 자연히 저런 표현들을 사용할 기회도 사라졌다.

컬럼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어렵게 말하고 찔러 얘기하는 대신 빙 돌려 말하는 것이 문화’라 했다. 전달과 접수 사이에 여백이 많아야 정서의 두께가 생긴다는 것인데 공감하면서도 그런 문화개념으로 오늘을 이해하기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온갖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시공의 간격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즉각적인 정보연쇄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카톡 덕분에 의외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안부를 묻게 된 것을 고마워할 때가 있으니 잃는 것만 있는 건 아니라 하겠다. 문화의 양식과 내용이 달라지고 있는게다.

녹비홍수 – 살짐과 수척함의 대비를 읽다 보니 언젠가 소동파의 글귀 ‘인수상가비 사속불가의’(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를 썼던 기억이 난다. ‘사람의 수척함은 다시 살찌울 수 있으나 선비가 속되면 고칠 길이 없다’는 뜻이다. 좋아하던 후배 교수가 정치권을 기웃거리면서 점점 권력과 위세를 탐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안타까와 그 글을 썼었다. 그때 비(肥)-수(瘦) 대비의 시적 표현에 깊이 공감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화두로 삼아야겠다 생각했었다.

​두번의 정년을 지낸 지금이야말로 그 말을 일상 속에서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인생여정을 계절에 비유하면 은퇴 후의 삶은 가을 이후에 해당하니, 당연히 살집이 아니라 수척함에 대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건강용 다이어트가 아니라 생명연쇄의 자각 위에 삶을 조망하는 내적 역량으로서의 비움 노력이 필요하다. 박경리의 시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는 표현이 있는데 정말 그런 홀가분함이 내면에 자리하기를 바래야 할 때다. 속되지 않고 의연하게, ‘인수상가비(人瘦尙可肥) 대신 ‘인비상가수’ (人肥尙可瘦)를 새 화두로 삼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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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와 지식인

4월 22-23일 도헌학술원 포럼 참석차 춘천에 다녀왔다. 70여권의 책, 710여편의 컬럼에 여러권의 소설까지 내 놓은 이 시대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지식인인 송호근 원장이 학자로서의 반세기를 되돌아보면서 그 세대의 정신사적 궤적을 성찰하는 자리였다. 나는 논평자로 초청을 받아 참여했지만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친구이자 동료로서 축하와 공감의 마음으로 함께 했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송교수는 자신을 베이비붐세대, 좀더 구체적으로는 70년대 경험에 그 정신적 뿌리를 내린 세대로 표현했다. 유신시대에 대학을 다니고 80년대의 격변과 환희를 맞보고 90년대의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경험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채 IMF 경제위기를 겪었지만 새로운 변화를 일구어낸 역동적 시대를 살아온 세대이다. 실제로 그가 쓴 많은 책과 컬럼은 이 시대가 보여준 다양한 애환과 갈등의 면면들을 다루고 있다.

당연 나도 같은 세대에 속한다. 이 세대는 문학으로부터 세상과 인간, 역사를 보는 눈을 키웠다는 송원장의 발표에 공감했다. 나 역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도 소설과 시, 종교 서적에 더 끌렸던 기억이 있다. 80년대 후반 ‘사회과학의 시대’가 도래했고 한편 그 변화를 환영했지만 이청준, 최인훈, 황석영, 신경림의 정서가 마르크스와 사회구성체 논리, 민중해방과 계급의식을 강조하던 사회변혁적 사유와 같을 수는 없었다. 그 거리감은 인간적인 것의 기반이지만 이념적으로 철저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송원장은 사회과학의 시대도 저물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영향력은 동반하락 중이다. 테크놀로지와 포스트 휴머니즘의 정신이 그 뒤를 이을지는 미지수다. 어쩌면 우리는 지배적 정신이 부재한 상태, 지적 아노미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미래에의 꿈이 사라지고 돈으로 환산되는 즉각적 효용만능의 세태가 확대일로다. 젊은 세대에게 조언을 해줄 여유를 갖기 전에 스스로 의 혼란과 어지러움을 곧추세우기도 힘겨운 시대를 맞고 있다.

문학적 상상, 사회과학적 분석, 현실문제에의 개입은 한 사람의 정신 속에 공존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의 세계, 사회학자의 몫이 언론인의 역할과 같지 않은 이유다. 송원장은 이 세 영역을 평생 움켜쥐고 살았다. 현실적인 쟁점들을 다루는 컬럼니스트의 역할을 중시하면서 작가적 상상력과 사회학적 분석력을 꼭같이 견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한 정신 긴장을 견디고 사유의 경계를 예리하게 관리하는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원한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이자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발제의 처음과 끝에서 김소월의 산유화를 인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사여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지천에 꽃이 피는 4월의 자연을 노래한 듯 하지만 학자로서의 삶을 비유하는 시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피는 꽃, 제가 좋아 산에 사는 꽃의 모습이 꼿꼿하게 자기 정신세계를 지켜온 지식인의 모습과 닮았다. 그 꽃이 얼마나 향기로울지 어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지는 본질이 아니다. 꽃은 그 자체로 꽃인 것이다.

‘내 인생은 복되었다’는 말을 발제의 앞뒤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다. 말 그대로 그의 인생은 남부러워 할 정도로 복되다. 내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배가 아프다’고 표현했지만 정말 배아플 정도로 그의 학문적 성취와 사회적 존재감은 동년배의 누구보다도 대단하다. 이제는 하산하는 시대를 살아야 하는 만큼 ‘글없는 송호근’과 대면할 준비를 하라 조언했다. 하지만 사실 그 주문은 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꼭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한림대 도헌학술원 이 내실있는 지적 플랫폼으로 자리잡아 가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4년전 송원장 부탁으로 쓴 ‘도헌학술원’ 현판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학내외 일로 분주할 이사장과 총장이 포럼에 함께 자리하여 격의없는 토론을 주고 받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학내의 교수들과 지역의 유지들이 함께 문화와 역사, 인생을 논하는 장이 한림대 바깥으로도 확대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한림대 도헌학술원이 새로운 대학의 한 모델로 자리잡고 지속적으로 발전해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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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통평원 20주년

그제 4월 16일 저녁,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창립 2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설립을 주도한 정운찬 전 총장을 비롯하여 오랜만에 뵙는 학교 안팎의 여러분들을 반갑게 만났다. 2006년 4월 초대 소장으로 임명된 후 다섯번의 임기를 연임하면서 내 50대의 전부를 쏟아부은 곳이기에 그 20년의 족적을 되돌아보는 자리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남북관계는 모순적이다. 가까우면서 멀고 신뢰를 원하면서 불신한다. 정파와 이념, 이해관계에 따른 남남갈등도 심하다. 균형잡힌 시야와 종합적 판단이 절실한 분야인데 현실은 그와 정반대다. 열린 토론과 객관적 분석이 쉽지 않고 신뢰가능한 데이터도 부족하다. 나는 서울대학교가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미력이나마 그 사명을 감당하고자 안깐 힘을 썼다.

2007년부터 시작된 통일의식조사, 2008년부터 발표된 남북통합지수, 2009년부터 추진한 평화인문학, 2012년부터 조사한 북한 사회변동 등은 그런 노력의 사례들이다. 그 분석자료와 문제의식이 지금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공유되고 있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낀다. 한동안 낯설어하던 ‘통일평화’란 말이 익숙해진 것도 통일과 평화가 병행연계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10년의 기간, 힘들었지만 보람된 시절이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꿈같은 일들을 추진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눈덮인 금강산에서 워크샵을 열기도 했고 평양의 병원과 영유아 시설, 학교도서관을 돕는 일로 여러 기관과 협력체계를 모색하기도 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대-김일성대-연변대의 공동학술회의가 성사되고 그 정례화를 상의할 때의 감격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있다.

안타깝게도 이 모두 과거사가 되었다. 오늘 남북관계는 냉전시대를 방불할 정도로 철저히 단절되었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은 민족관계나 통일목표 자체를 부정하기에 언제 새로운 기회가 열릴지도 막막하다. 전세계가 전쟁의 비극 앞에 첨단무기를 자랑하고 핵무력을 선망하는 상황에서 평화의 깃발도 외면당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연구원을 이끌어가는 김범수 원장을 비롯한 후배교수들에게 격려와 성원을 보낸다.

사방이 막혀 있을 때 하늘을 보라 했다. 나는 요즘 1930년대를 종종 떠올린다. 일본제국이 만주와 동남아를 아우르는 대동아공영권의 맹주로 승승장구할 때, 독립의 가능성이 희미해지던 그 때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선각자들이야말로 푸른 하늘을 쳐다본 자들이 아니었을까. 냉정한 분석, 치밀한 계산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희망하는 미래, 포기할 수 없는 꿈의 진정성을 재확인해야 할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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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甘露)와 천은(泉隱)

남도 순례길에 나선 한 친구가 구례 천은사(泉隱寺) 의 홍매 사진을 보내왔다. 봄을 알리는 매화의 붉은 기운 뒤로 먼 산자락 능선과 사찰지붕의 멋진 곡선이 마치 한폭의 수묵화같다. 천은사라는 이름도 저 풍광에 어울리게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찰문화에 밝은 또 다른 동학께서 천은사 현판 사진을 올려주었다. ‘수체’(水體)라 불리는 이광사의 작품이라는 설명과 함께.

몇 년전 저곳을 들렀을 때 천은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신라 때 창건된 이 절의 원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17세기 절을 중수하게 되었는데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한 스님이 그 뱀을 잡아 죽이자 그 이후로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고 ‘샘이 숨었다’는 의미의 ‘천은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찰에 연이은 화재가 발생하는 등 크고 작은 불상사가 잇따랐고 그 이유가 사찰의 물기운(水氣)을 지켜주던 이무기를 죽인 탓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원교(圓嶠) 이광사가 이 사찰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지리산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는 편액 글씨를 세로로 써 주자 더이상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 동국진체의 창시자가 물흐르듯 유려한 ‘수체(水體)’의 기운으로 쓴 현판이 불의 기운을 다스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당연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수려한 모습으로 일주문을 지키고 있다.

‘감로’ – 달콤한 이슬이나 맛있는 물을 감로수라하고 불교에서는 이것을 부처의 가르침이나 시원한 차에 비유한다. 중국에는 감로사라는 이름의 오래된 사찰이 있고 한국에도 같은 이름의 사찰이 있다. 목마른 중생들에게 생명같은 단물을 제공해주는 절이란 뜻이니 내용도 상서롭다. 이에 비해 샘이 말랐다는 뜻의 ‘천은’은 사찰의 이름으론 어울리지 않는다. 원교가 저 현퍈을 쓴 이후 샘이 다시 맑은 물을 솟구쳤다 하니 다시 감로사라 해도 무방했을 터인데 천은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의아하다. 세간에 전해지는 말과는 달리 그 이름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격화되고 있는 이란사태와 전세계의 오일 쇼크 가능성을 우려하는 뉴스를 들으면서 감로와 천은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석유는 인류의 문명을 가능케 한 ‘감로’와도 같고 일부 산유국에겐 큰 부를 가져다 준 고마운 자원이지만 그로 인한 기회비용은 만만치 않다. 강대국의 침략과 간섭이 끝이 없고 국내적으로도 독재권력의 힘을 강화하여 국민들의 성숙과 민주주의의 성장을 억누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걸프만의 하늘에 수없이 오고가는 미사일과 그 가공할 파괴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차라리 석유가 고갈되는 ‘천은’의 때를 그리워할 수도 있을 지경이다. 누구도 원치않는 저 ‘불의 기운’을 억누를 오늘의 이광사는 어디 있으며 그가 내놓을 처방과 글씨는 무엇일까 – 억측같은 생각을 해보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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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매화

매년 이맘때면 매화를 그렸다. 보통 2월 말을 넘기지 않았는데 올해는 나도 바쁘고 꽃소식도 늦은 듯 하여 3월 초에 그리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매화를 그리는 마음은 따뜻한 봄이 오는 자연의 순환 앞에서 느끼는 희망, 기대, 설레임 같은 정서와 가깝다. 눈 속에 피는 매화인 설중매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매화가지를 통해 강인한 의지, 고생 끝에 얻는 영광을 상징하는 소재로도 종종 사용된다.

그런데 갑작스런 전쟁소식이 이런 기분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오늘 아침에는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전세계는 첨단 무기와 정보자산이 동원되는 현대전의 가공할 위협과 새로운 문법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있다. 세계 어느 곳보다도 지구화된 한국사회에 미칠 전방위적 충격은 피하기 어려운데 이미 유가와 주가를 염려하는 뉴스가 쏟아진다. 우리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심대한 충격을 받았을 북한은 강력한 대미 비난 성명을 내놓았다. 북한의 핵무력에의 집착이 더욱 강해지리라는 논평들이 뒤를 잇는다.

전쟁의 뉴스가 들리는 와중에 매화를 그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싶었다. 마음이 따뜻해야 그림의 매화줄기도 힘을 얻는 법인데 전쟁 소식을 듣고 있으니 먹을 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눈내리는 혹한 속에서 설중매를 그리는 심정을 떠올리며 화선지를 폈다. 전쟁이 벌어지는 엄혹한 현실에서도 봄은 찾아오고 강인한 줄기에는 매화가 필 것이다. 인간사의 불행에도 자연의 운행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임을 생각했지만 붓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아 줄기도 꽃도 엉성하다. 이것도 내 마음이 담긴 것이리라 여겨 다시 그리지 않기로 했다.

“전쟁이 그 꽃을 심어주었다”라는 제목의 시를 떠올렸다. 김명수 시인은 옛집의 황매화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물어보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임하면 대추월, 옛날 우리집/ 꽃꿈처럼 피어나던 겹겹 황매화/ 꽅밭 황매화는/ 누가 심으셨나요? // 길고양이 울어대는/ 추운 겨울밤/ 무릎 시린 새벽녂 언뜻 잠깨어// 물어본다, 물어본다/ 못 물어봤던/ 황매화는 어느 때/ 누가 심으셨나요? // 아버지가 목소리로 대답하셨어요/ 추운 겨울이 심어주었다 /전쟁이 그 꽃을 심어주었다

꽃꿈처럼 피어나던 황매화라는 표현에 눈이 간다. 꽃의 꿈, 꿈같은 꽃 – 매화는 전장의 전령처럼 앞서 달려오는 꽃이다. 전쟁 소식에 피어날 전국의 매화를 생각하면서 이런 때에도 매화의 맑은 향기는 온누리에 퍼지리라는 마음을 담아 ‘청향만리’를 제사로 썼다. 안팎이 요란해도 한반도와 우리 삶이 매화향기처럼 평안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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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 신년휘호

2026 병오년 설을 맞아 신년 휘호를 써서 서재에 걸었다. 이번 달로 오랜 교직생활을 마무리하는 내 자신에게 주는 글로 自處超然 (자처초연) 對人靄然 (대인애연) 失意泰然 (실의태연) 無事澄然 (무사징연) 16자를 골랐다. 홀로 있을 때 초연하고, 사람을 만날 때 따뜻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 태연하며, 일이 없을 때 맑은 마음을 가지라 – 올 한 해의 좌우명으로 삼기 적합한 내용이다.

이 글귀는 명나라 말기 학자 최선이 시인 왕양명에게 준 글로 알려진 처세육연 중 4연이다. 원문의 순서와는 달리 일이 없을 때 (無事) 맑은 마음을 유지하라는 부분을 마지막으로 배치했다. 현재의 내게 가장 절실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2연은 有事敢然 (유사감연) 得意淡然 (득의담연) 인데 일이 생기면 과감히 감당하고 뜻을 이루어도 담담하라는 내용이다. 유학적 태도와 도교적 정신이 어우러져 있는 이 처세론은 경주 최부자댁 가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성경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하면 다른 것들도 더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사회학자로서 나 역시 개인적인 차원보다 공동체적 쟁점을 늘 중요하게 여겼다. 계엄과 탄핵의 격랑 속에서 맞이한 작년에 ‘事必歸正 (사필귀정)’ 을 신년휘호로 쓴 것도 헝클어진 질서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공의적 바램을 담은 것이었다. 나라 안팎이 여전히 불확실한 2026년에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건 여전히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천하를 다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궁극적 가치는 개인의 존엄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창조주의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더 근원적이다. 동양에서도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공적 활동도 개인의 자기 관리에서 출발한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가르쳐왔다. 홀로 있을 때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유학의 가르침은 은둔자의 삶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올곧은 선비가 되기 위함이었다.

공적 활동에서 물러난 자유로운 생활인에게 내면의 자세를 우선 돌아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달라진 환경 속에서 흔들리기 쉬운 정서와 생활 방식을 새롭게 재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확실한 상황, 의외의 곤경, 외로움의 장애를 감당하고 이겨낼 정서적 맷집을 키워야 한다. 홀로 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일이 없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 – 이 4연을 새해의 화두로 붙잡고 애쓰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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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 예수의 길

“마지막 고언”이라는 타이틀을 단, 한완상 출판기념 강연회가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있었다. 마지막 강연이 될지 몰라 작은 자리를 준비했다는 따님의 연락을 몇 주 전 받았을 때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나 생각했고 무거운 마음으로 종로5가로 향했다. 그런데 행사장은 어느 유명 인사의 출판기념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만원이었고 열기도 뜨거웠다. 한 교수님의 거동은 다소 불편했지만 목소리와 말씀은 여전히 또렷하고 열정적이었다.

​”예수의 길을 가라” – 강연의 제목이자 책의 핵심화두다. 스스로 개척해서 수십년간 봉직한 새길교회 설교를 중심으로 그간의 메시지들을 정리한 책인데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만난 성령님, 내가 만난 예수님’으로 구성된 목차를 보면 전형적인 신앙 간증집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책의 띠지에도 “나는 민중사회학자이지만 한국교회 신학자로 평가받고 싶다. 그리고 영원한 ‘예수따르미’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적혀있다.

​사실 한교수님의 글에서 예수의 삶이 언급되지 않는 걸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모든 사회현상에 예수의 시각을 적용했다. 어릴 적 내면화한 신앙의 힘이 그 바탕이 되었을터지만 본의 아니게 학계를 떠나게 된 것도 그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엄혹한 남북관계, 이념문제를 다루는 현장에서도 그는 예수정신을 강조했다. 교계는 물론이고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를 넘어 현실을 모르는 낭만주의자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늘 꿋꿋하게 지론을 견지해왔다.

​꽤 오래전 ‘평화’를 주제로 하는 어느 심포지엄 자리에서 나는 한완상과 라인홀드 니부어를 비교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말로 유명한 니부어는 정치영역에서 지나친 도덕론이 갖는 한계와 위험을 지적했다. 그에 반해 예수정신에 입각한 ‘우아한 패배’를 옹호하는 한교수님의 관점은 종교적 윤리의 한 전형일 수 있다. ‘심정윤리’와 ‘책임윤리’를 준별해야 한다는 막스 베버의 견해에 공감하는 나로서 당시 비판적인 견해를 발표했던 기억이 있다.

​한교수님께 축하 인사를 드렸다. 반갑게 손을 잡으시면서 자네 작품을 책 앞에 넣었노라 했다. 작년 90 생신 무렵 학교와 교계 등에서 도움을 입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저녁자리를 준비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인연과 사랑을 이어온 나는 화선지에 한교수님 얼굴과 그간 강조해온 화두들을 쓴 작품을 만들어 증정했다. 감사의 말과 함께 “평화의 땅 하나님 나라가 속히 오기 바라며”란 바램을 적어서..

​이후 몇 분으로부터 한교수님 댁 거실에 그 족자가 걸려있고 한교수님이 자랑스러워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유명한 김병종 화가의 작품이 걸려있는 그곳에 감히 어울릴 수준일 리 만무하지만 내 마음을 읽어주신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책을 펼치니 과연 내지의 첫 페이지에 그림이 실려있다. 반갑고 고마왔는데 원래 족자의 상하비율을 조정한 듯 글자가 너무 붙어있고 낙관의 붉은 색이 드러나지 않아 편집이 다소 아쉬웠다.

​이만열, 김용덕, 이삼열 교수님 등 오랫만에 얼굴을 보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동기인 권태선 이사장도 논평자로 참석해서 반갑게 만났다. 스스로 그 자리가 계면쩍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진솔한 의견표명이 와닿았다. 젊은 세대의 참석자가 별로 보이지 않아 ‘청년 예수’를 내걸기엔 너무 고령화한 한국교계의 현주소를 보는 듯 했다. 종로5가, 기독교회관의 옛역사는 기억할 사람을 찾기 힘들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가르치는 시대가 되었다. 예수의 길을 가라 – 강연장 플래카드가 어딘지 낯설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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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정리

여러 날에 걸쳐 연구실을 정리했다. 2월 말로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내 공식적 활동이 끝나기 때문이다. 연구실의 책은 대부분 광주과학기술원 융합교육연구센터에 기증했다. 각종 복사물, 임명장, 제안서, 감사패 등은 과감히 폐기했다. 손으로 할 일과 연락처를 빼곡이 적어둔 1990년대의 수첩들, 이런 저런 사정을 담아 주고받은 편지, 오랜 기간 정들었던 필기구 등은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필요없는 낡은 자료들도 그것을 입수하느라 치룬 시간과 애씀, 추억과 애환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80년대 후반 처음으로 해외 한국학회의를 개최하느라 고심했던 기획자료들, 처음으로 만난 북한 학자들과의 회합에서 주고받은 논문들, 여러 나라의 연구소들을 방문하면서 받았던 기념품들 – 크건 작건 내겐 소중한 기억이 담긴 품목들이어서 개인 박물관을 만든다면 모두 진열해야 마땅한 것들이다.

그래도 이제 버려야 한다. 연구실 없는 생활을 새롭게 살아내야 한다. 돌이켜보면 40년이 넘도록 나는 5-7평 남짓한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서울대를 위시하여 내가 거쳐온 모든 대학들, 연구교수로 나가있던 해외의 대학들도 연구실 중심의 생활은 꼭같았다. 아마도 집보다 연구실서 보낸 절대시간이 더 많았을 터이니 가히 연구실 속 인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연구실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 그래야 가벼워질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연구실 없는 생활에 대한 약간의 허전함과 염려도 없진 않다. 당분간 아침에 일어나면 어딜 갈까 서성이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수업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함으로 극복할 일이다. 강의는 즐거움이면서 고통이었다. 특히 펜데믹과 인공지능의 충격이라는 미증유의 격변을 겪으면서 담당한 과학기술대학에서의 강의는 흥미로우면서 부담스러웠고 가르치며 배우는 현장이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대학에서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을 함께 이야기한 뜻이 어렴풋 느껴질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