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감로(甘露)와 천은(泉隱)

남도 순례길에 나선 한 친구가 구례 천은사(泉隱寺) 의 홍매 사진을 보내왔다. 봄을 알리는 매화의 붉은 기운 뒤로 먼 산자락 능선과 사찰지붕의 멋진 곡선이 마치 한폭의 수묵화같다. 천은사라는 이름도 저 풍광에 어울리게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찰문화에 밝은 또 다른 동학께서 천은사 현판 사진을 올려주었다. ‘수체’(水體)라 불리는 이광사의 작품이라는 설명과 함께.

몇 년전 저곳을 들렀을 때 천은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신라 때 창건된 이 절의 원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17세기 절을 중수하게 되었는데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한 스님이 그 뱀을 잡아 죽이자 그 이후로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고 ‘샘이 숨었다’는 의미의 ‘천은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찰에 연이은 화재가 발생하는 등 크고 작은 불상사가 잇따랐고 그 이유가 사찰의 물기운(水氣)을 지켜주던 이무기를 죽인 탓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원교(圓嶠) 이광사가 이 사찰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지리산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는 편액 글씨를 세로로 써 주자 더이상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 동국진체의 창시자가 물흐르듯 유려한 ‘수체(水體)’의 기운으로 쓴 현판이 불의 기운을 다스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당연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수려한 모습으로 일주문을 지키고 있다.

‘감로’ – 달콤한 이슬이나 맛있는 물을 감로수라하고 불교에서는 이것을 부처의 가르침이나 시원한 차에 비유한다. 중국에는 감로사라는 이름의 오래된 사찰이 있고 한국에도 같은 이름의 사찰이 있다. 목마른 중생들에게 생명같은 단물을 제공해주는 절이란 뜻이니 내용도 상서롭다. 이에 비해 샘이 말랐다는 뜻의 ‘천은’은 사찰의 이름으론 어울리지 않는다. 원교가 저 현퍈을 쓴 이후 샘이 다시 맑은 물을 솟구쳤다 하니 다시 감로사라 해도 무방했을 터인데 천은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의아하다. 세간에 전해지는 말과는 달리 그 이름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격화되고 있는 이란사태와 전세계의 오일 쇼크 가능성을 우려하는 뉴스를 들으면서 감로와 천은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석유는 인류의 문명을 가능케 한 ‘감로’와도 같고 일부 산유국에겐 큰 부를 가져다 준 고마운 자원이지만 그로 인한 기회비용은 만만치 않다. 강대국의 침략과 간섭이 끝이 없고 국내적으로도 독재권력의 힘을 강화하여 국민들의 성숙과 민주주의의 성장을 억누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걸프만의 하늘에 수없이 오고가는 미사일과 그 가공할 파괴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차라리 석유가 고갈되는 ‘천은’의 때를 그리워할 수도 있을 지경이다. 누구도 원치않는 저 ‘불의 기운’을 억누를 오늘의 이광사는 어디 있으며 그가 내놓을 처방과 글씨는 무엇일까 – 억측같은 생각을 해보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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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甘露)와 천은(泉隱)

남도 순례길에 나선 동료교수가 구례 천은사(泉隱寺) 의 홍매 사진을 보내왔다. 봄을 알리는 매화의 붉은 기운 뒤로 먼 산자락 능선과 사찰지붕의 멋진 곡선이 마치 한폭의 수묵화같다. 천은사라는 이름도 풍광에 어울리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분이 천은사 현판 사진을 올렸다. ‘수체’(水體)라 불리는 이광사의 수려한 작품이라는 설명과 함께.

나도 몇 년전 저곳을 들렀을 때 천은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신라 때 창건된 이 절의 원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다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17세기 절을 크게 중수하게 되었는데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한 스님이 그 뱀을 잡아 죽였는데 그 이후로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고 ‘샘이 숨었다’는 의미의 ‘천은사’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사찰에 연이은 화재가 발생하는 등 크고 작은 불상사가 잇따랐다. 사찰의 물기운(水氣)을 지켜주던 이무기를 죽인 탓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한국의 독자적 서체인 동국진체 창시자 원교(圓嶠) 이광사(1705~1777)가 이 사찰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지리산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는 편액 글씨를 세로로 써 주자 더이상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 물흐르듯 쓴 ‘수체(水體)’의 기운으로 불의 기운을 다스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당연하다. 그 이야기의 진위와는 무관하게 이광사의 현판은 지금도 수려한 모습으로 일주문을 지키고 있다.

천은사의 원이름인 감로사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중국에도 그 이름을 단 오래된 사찰이 있고 한국에도 같은 이름의 사찰이 경기도에 있다. 목마른 중생들에게 생명같은 단물을 제공해주는 절이란 뜻이니 내용도 상서롭다. 그런데 그 샘이 마르고 물줄기가 사라졌다는 뜻의 천은은 사찰의 이름으론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원교가 저 현퍈을 쓴 이후로는 샘이 다시 맑은 물을 솟구쳤다 하니 다시 감로사라 해도 무방했을 터인데 천은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흥미롭다. 세간에 전해지는 말과는 달리 그 이름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격화되고 있는 이란사태와 전세계의 오일 쇼크 가능성을 우려하는 뉴스를 들으면서 감로와 천은의 이름을 생각한다. 석유는 인류의 문명을 가능케 한 ‘감로’와 같은 자원이고 일부 산유국에겐 큰 부를 가져다 준 고마운 존재지만 그로 인한 기회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강대국의 침략과 간섭이 끝이 없었고 국내적으로도 독재권력의 힘을 강화하여 국민들의 성숙과 민주주의의 성장을 억누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걸프만의 하늘에 수없이 오고가는 미사일과 그 가공할 파괴력을 보는 마음은 아프고 참담하다. 차라리 석유가 고갈되는 ‘천은’의 때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원치않는 저 ‘불의 기운’을 억누를 오늘의 이광사는 어디 있으며 그가 내놓을 처방은 무엇일까 – 억측같은 생각을 해보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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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매화

매년 이맘때면 매화를 그렸다. 보통 2월 말을 넘기지 않았는데 올해는 나도 바쁘고 꽃소식도 늦은 듯 하여 3월 초에 그리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매화를 그리는 마음은 따뜻한 봄이 오는 자연의 순환 앞에서 느끼는 희망, 기대, 설레임 같은 정서와 가깝다. 눈 속에 피는 매화인 설중매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매화가지를 통해 강인한 의지, 고생 끝에 얻는 영광을 상징하는 소재로도 종종 사용된다.

그런데 갑작스런 전쟁소식이 이런 기분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오늘 아침에는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전세계는 첨단 무기와 정보자산이 동원되는 현대전의 가공할 위협과 새로운 문법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있다. 세계 어느 곳보다도 지구화된 한국사회에 미칠 전방위적 충격은 피하기 어려운데 이미 유가와 주가를 염려하는 뉴스가 쏟아진다. 우리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심대한 충격을 받았을 북한은 강력한 대미 비난 성명을 내놓았다. 북한의 핵무력에의 집착이 더욱 강해지리라는 논평들이 뒤를 잇는다.

전쟁의 뉴스가 들리는 와중에 매화를 그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싶었다. 마음이 따뜻해야 그림의 매화줄기도 힘을 얻는 법인데 전쟁 소식을 듣고 있으니 먹을 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눈내리는 혹한 속에서 설중매를 그리는 심정을 떠올리며 화선지를 폈다. 전쟁이 벌어지는 엄혹한 현실에서도 봄은 찾아오고 강인한 줄기에는 매화가 필 것이다. 인간사의 불행에도 자연의 운행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임을 생각했지만 붓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아 줄기도 꽃도 엉성하다. 이것도 내 마음이 담긴 것이리라 여겨 다시 그리지 않기로 했다.

“전쟁이 그 꽃을 심어주었다”라는 제목의 시를 떠올렸다. 김명수 시인은 옛집의 황매화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물어보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임하면 대추월, 옛날 우리집/ 꽃꿈처럼 피어나던 겹겹 황매화/ 꽅밭 황매화는/ 누가 심으셨나요? // 길고양이 울어대는/ 추운 겨울밤/ 무릎 시린 새벽녂 언뜻 잠깨어// 물어본다, 물어본다/ 못 물어봤던/ 황매화는 어느 때/ 누가 심으셨나요? // 아버지가 목소리로 대답하셨어요/ 추운 겨울이 심어주었다 /전쟁이 그 꽃을 심어주었다

꽃꿈처럼 피어나던 황매화라는 표현에 눈이 간다. 꽃의 꿈, 꿈같은 꽃 – 매화는 전장의 전령처럼 앞서 달려오는 꽃이다. 전쟁 소식에 피어날 전국의 매화를 생각하면서 이런 때에도 매화의 맑은 향기는 온누리에 퍼지리라는 마음을 담아 ‘청향만리’를 제사로 썼다. 안팎이 요란해도 한반도와 우리 삶이 매화향기처럼 평안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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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 신년휘호

2026 병오년 설을 맞아 신년 휘호를 써서 서재에 걸었다. 이번 달로 오랜 교직생활을 마무리하는 내 자신에게 주는 글로 自處超然 (자처초연) 對人靄然 (대인애연) 失意泰然 (실의태연) 無事澄然 (무사징연) 16자를 골랐다. 홀로 있을 때 초연하고, 사람을 만날 때 따뜻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 태연하며, 일이 없을 때 맑은 마음을 가지라 – 올 한 해의 좌우명으로 삼기 적합한 내용이다.

이 글귀는 명나라 말기 학자 최선이 시인 왕양명에게 준 글로 알려진 처세육연 중 4연이다. 원문의 순서와는 달리 일이 없을 때 (無事) 맑은 마음을 유지하라는 부분을 마지막으로 배치했다. 현재의 내게 가장 절실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2연은 有事敢然 (유사감연) 得意淡然 (득의담연) 인데 일이 생기면 과감히 감당하고 뜻을 이루어도 담담하라는 내용이다. 유학적 태도와 도교적 정신이 어우러져 있는 이 처세론은 경주 최부자댁 가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성경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하면 다른 것들도 더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사회학자로서 나 역시 개인적인 차원보다 공동체적 쟁점을 늘 중요하게 여겼다. 계엄과 탄핵의 격랑 속에서 맞이한 작년에 ‘事必歸正 (사필귀정)’ 을 신년휘호로 쓴 것도 헝클어진 질서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공의적 바램을 담은 것이었다. 나라 안팎이 여전히 불확실한 2026년에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건 여전히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천하를 다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궁극적 가치는 개인의 존엄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창조주의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더 근원적이다. 동양에서도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공적 활동도 개인의 자기 관리에서 출발한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가르쳐왔다. 홀로 있을 때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유학의 가르침은 은둔자의 삶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올곧은 선비가 되기 위함이었다.

공적 활동에서 물러난 자유로운 생활인에게 내면의 자세를 우선 돌아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달라진 환경 속에서 흔들리기 쉬운 정서와 생활 방식을 새롭게 재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확실한 상황, 의외의 곤경, 외로움의 장애를 감당하고 이겨낼 정서적 맷집을 키워야 한다. 홀로 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일이 없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 – 이 4연을 새해의 화두로 붙잡고 애쓰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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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 예수의 길

“마지막 고언”이라는 타이틀을 단, 한완상 출판기념 강연회가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있었다. 마지막 강연이 될지 몰라 작은 자리를 준비했다는 따님의 연락을 몇 주 전 받았을 때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나 생각했고 무거운 마음으로 종로5가로 향했다. 그런데 행사장은 어느 유명 인사의 출판기념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만원이었고 열기도 뜨거웠다. 한 교수님의 거동은 다소 불편했지만 목소리와 말씀은 여전히 또렷하고 열정적이었다.

​”예수의 길을 가라” – 강연의 제목이자 책의 핵심화두다. 스스로 개척해서 수십년간 봉직한 새길교회 설교를 중심으로 그간의 메시지들을 정리한 책인데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만난 성령님, 내가 만난 예수님’으로 구성된 목차를 보면 전형적인 신앙 간증집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책의 띠지에도 “나는 민중사회학자이지만 한국교회 신학자로 평가받고 싶다. 그리고 영원한 ‘예수따르미’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적혀있다.

​사실 한교수님의 글에서 예수의 삶이 언급되지 않는 걸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모든 사회현상에 예수의 시각을 적용했다. 어릴 적 내면화한 신앙의 힘이 그 바탕이 되었을터지만 본의 아니게 학계를 떠나게 된 것도 그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엄혹한 남북관계, 이념문제를 다루는 현장에서도 그는 예수정신을 강조했다. 교계는 물론이고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를 넘어 현실을 모르는 낭만주의자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늘 꿋꿋하게 지론을 견지해왔다.

​꽤 오래전 ‘평화’를 주제로 하는 어느 심포지엄 자리에서 나는 한완상과 라인홀드 니부어를 비교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말로 유명한 니부어는 정치영역에서 지나친 도덕론이 갖는 한계와 위험을 지적했다. 그에 반해 예수정신에 입각한 ‘우아한 패배’를 옹호하는 한교수님의 관점은 종교적 윤리의 한 전형일 수 있다. ‘심정윤리’와 ‘책임윤리’를 준별해야 한다는 막스 베버의 견해에 공감하는 나로서 당시 비판적인 견해를 발표했던 기억이 있다.

​한교수님께 축하 인사를 드렸다. 반갑게 손을 잡으시면서 자네 작품을 책 앞에 넣었노라 했다. 작년 90 생신 무렵 학교와 교계 등에서 도움을 입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저녁자리를 준비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인연과 사랑을 이어온 나는 화선지에 한교수님 얼굴과 그간 강조해온 화두들을 쓴 작품을 만들어 증정했다. 감사의 말과 함께 “평화의 땅 하나님 나라가 속히 오기 바라며”란 바램을 적어서..

​이후 몇 분으로부터 한교수님 댁 거실에 그 족자가 걸려있고 한교수님이 자랑스러워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유명한 김병종 화가의 작품이 걸려있는 그곳에 감히 어울릴 수준일 리 만무하지만 내 마음을 읽어주신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책을 펼치니 과연 내지의 첫 페이지에 그림이 실려있다. 반갑고 고마왔는데 원래 족자의 상하비율을 조정한 듯 글자가 너무 붙어있고 낙관의 붉은 색이 드러나지 않아 편집이 다소 아쉬웠다.

​이만열, 김용덕, 이삼열 교수님 등 오랫만에 얼굴을 보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동기인 권태선 이사장도 논평자로 참석해서 반갑게 만났다. 스스로 그 자리가 계면쩍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진솔한 의견표명이 와닿았다. 젊은 세대의 참석자가 별로 보이지 않아 ‘청년 예수’를 내걸기엔 너무 고령화한 한국교계의 현주소를 보는 듯 했다. 종로5가, 기독교회관의 옛역사는 기억할 사람을 찾기 힘들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가르치는 시대가 되었다. 예수의 길을 가라 – 강연장 플래카드가 어딘지 낯설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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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정리

여러 날에 걸쳐 연구실을 정리했다. 2월 말로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내 공식적 활동이 끝나기 때문이다. 연구실의 책은 대부분 광주과학기술원 융합교육연구센터에 기증했다. 각종 복사물, 임명장, 제안서, 감사패 등은 과감히 폐기했다. 손으로 할 일과 연락처를 빼곡이 적어둔 1990년대의 수첩들, 이런 저런 사정을 담아 주고받은 편지, 오랜 기간 정들었던 필기구 등은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필요없는 낡은 자료들도 그것을 입수하느라 치룬 시간과 애씀, 추억과 애환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80년대 후반 처음으로 해외 한국학회의를 개최하느라 고심했던 기획자료들, 처음으로 만난 북한 학자들과의 회합에서 주고받은 논문들, 여러 나라의 연구소들을 방문하면서 받았던 기념품들 – 크건 작건 내겐 소중한 기억이 담긴 품목들이어서 개인 박물관을 만든다면 모두 진열해야 마땅한 것들이다.

그래도 이제 버려야 한다. 연구실 없는 생활을 새롭게 살아내야 한다. 돌이켜보면 40년이 넘도록 나는 5-7평 남짓한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서울대를 위시하여 내가 거쳐온 모든 대학들, 연구교수로 나가있던 해외의 대학들도 연구실 중심의 생활은 꼭같았다. 아마도 집보다 연구실서 보낸 절대시간이 더 많았을 터이니 가히 연구실 속 인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연구실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 그래야 가벼워질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연구실 없는 생활에 대한 약간의 허전함과 염려도 없진 않다. 당분간 아침에 일어나면 어딜 갈까 서성이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수업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함으로 극복할 일이다. 강의는 즐거움이면서 고통이었다. 특히 펜데믹과 인공지능의 충격이라는 미증유의 격변을 겪으면서 담당한 과학기술대학에서의 강의는 흥미로우면서 부담스러웠고 가르치며 배우는 현장이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대학에서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을 함께 이야기한 뜻이 어렴풋 느껴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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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2025년 12월 31일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은 옛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비교적 출입국이 원활했다. 하지만 자유롭고 편안하게 국경을 오가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생각에 이전보단 공항에서의 긴장감이 좀더 크게 다가왔다.

오는 비행기 안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일생을 다룬 영화를 봤다. 부제가 “목사, 스파이, 암살자”라고 붙어있다. 스릴러물 같은 느낌을 주려고 영화수입업자측에서 붙인 것이라는데 영화의 구성도 목사로서의 정체성이나 종교적 고뇌보다 히틀러 폭정에 저항하는 행동가로서의 본회퍼가 더 부각된 느낌이다. 대학시절 본회퍼의 책을 탐독하며 좋아했는데 그가 유니온 신학교 유학시절 뉴욕 할렘의 흑인교회에서 강한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는 사실, 피아노를 잘 치던 고전음악 애호가에서 재즈와 흑인영가에빠져드는 경험을 했다는 내용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가 ’주님은 교회나 종교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비단 독일 제국교회에 대한 비판만 아니라 미국의 블랙쳐치에서 확인되는 살아있는 영성에 영향받은 것일 수 있겠다 싶다.

영화를 보는 중 2026년을 맞이했다. 사실 태평양 상공을 날아오면서 시간도 변하는 중이었으니 정확히 언제 새해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쨋든 2026년은 이전보다 더 힘들고 염려스러운 상황이 도래하리라는 예감이 마음을 무겁게 했고 그래서인지 영화의 시대배경과 오늘의 현실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독일에 나찌즘을 찬양하기도 하는 극우세력이 급부상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독일의 재무장이 본격화되며 징병제가 추진되고 있는 현실이 1930년대 초반의 영화 속에서 겹쳐 보였다. 그 시절 나찌즘이 부지불식간에 학교, 종교, 문화, 예술 등 전 분야로 확산되고 전독일을 그 광풍 속으로 몰아넣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전례없이 속도가 빨라지는 오늘날의 상황은 더욱 위태로울 수 있을 터이다.

영화는 투사로서의 본회퍼 이미지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하지만 직접적인 정치투쟁가나 혁명가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책임성에 기반한 결단으로 그려진다. 히틀러 암살계획의 모의와 발각이라는 스릴러적 전율감을 흥미위주로 표현하기보다 그 전 과정에서 본회퍼를 견디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드러내려는 진지한 문제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감독은 디트리히 본회퍼를 당당하게 죽음으로 이끈 것은 바로 믿음이고 절대자 신 앞에 선 인간의 진지한 응답이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 나온 두 사람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그 하나는 본회퍼의 아버지 칼 본회퍼가 아들과의 대화에서 한 ’아직도 사람을 믿느냐?‘는 말이다. 빵만 주면 투표하는 사람들, 유태인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를 거침없이 내뱉는 사람들이 나찌의 광풍을 뒷받침하리라는 그 말은 현실 속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또 하나는 고백교회의 니뮐러 주교가 체포되기 전 강론에서 한 말이다. “나치가 사회주의자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기에 침묵했습니다. 나치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을 때도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란 이유로 침묵했습니다. 유대인을 잡아 갈 때도 나는 너무 늦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요. 나치가 나를 잡으러 올 때 나를 위해 대변해 줄 사람이 과연 남아 있을까요?”

흥미롭게도 미국의 트럼프를 추종하는 극우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미국의 민주당을 나치당과 일치시키고 민주당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히틀러 독재에 대한 본회퍼의 저항과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다. 트럼프 지지자이자 극우 기독교의 정치화에 큰 영향을 미친 저널리스트 에릭 메탁사스가 『본회퍼: 목사, 순교자, 예언자, 스파이』라는 책을 썼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흑인 공동체와 라틴계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오늘날의 정치적인 의도가 이 영화의 소비형태에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도 광화문 광장의 극우시위를 주도한 전광훈은 본회퍼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정치활동을 정당화했다. ’본회퍼의 길과 전광훈의 길‘이라는 시사논평이 실리는 웃픈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의 기독교 일각에서 독특한 영웅숭배, 특정 지도자 추종이 확산되는 현실이 이 영화와 기묘하게 오버랩되었다. 종교가 제도화되고 그것이 사회적 영향력을 뚜렷이 하게 될 때 외부로부터는 이용하려는 유혹이, 내부로부터는 힘을 과시하고픈 욕망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쓴 한 본회퍼 연구자는 영화가 본회퍼의 신학적 고민과 경건한 삶의 모습을 좀더 드러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본회펴가 초대 원장으로 사역했던 핑켄발데 신학원의 공동체적 생활, 즉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고 연주하고 축구도 하는 모습은 고백교회가 그런 삶을 통해 값비싼 은혜, 제자도, 원수 사랑, 홀로 있음, 함께 있음, 성경 읽기와 묵상, 기도, 섬김, 성찬의 중요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이었는데 다소 정치적 저항을 위한 훈련과정처럼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본회퍼가 종교없는 기독교를 주장한 것도 이런 유혹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일테다. 동시에 과연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기독교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는 여전한 숙제다. 뒤르켐이 말하는 ’시민종교‘의 형태로 전화하거나 요즘 말하는 가나안 신자를 떠올려볼 수 있겠지만 그것도 국가주의와 결합하거나 세속적 편리주의로 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말이다. 신학적 내면적 초월적 관심과 사회적 정치적 세속적 관심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치우치지 않을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그걸 찾아가는 길이 구도자의 삶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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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포럼 -헬싱키,반둥,한반도

2차대전 종전 80주년, 한국 해방 80주년, 반둥회의 70주년, 헬싱키 협정 50주년을 맞이한 2025년,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가 주관한 베를린 포럼이 Korea At a Crossroads 란 주제로 11월 19-21일간 열렸다. 이번이 여덟 번째인데 유럽 내 한반도 문제, 특히 평화와 통일에 관심을 가진 많은 학자, 전문가들이 모이는 뜻깊은 행사다. 유럽도, 한반도도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모두가 공유하는 가운데 노학자와 새 세대의 젊은 연구자들이 함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열기가 뜨거웠다.

반가운 분들을 만나는 기회가 되어 개인적으로 더 기뻤다. SIPRI 소장을 역임한 평화연구자 Dan Smith, 주한 독일대사를 지냈고 내가 서울대 강연자로 초청한 바 있던 Nobert Bass 박사, Korea World Forum에서 자주 만났던 전 유럽의회 의원 Glyn Ford, 유엔인권 한국사무소장을 역임한 UNHCR 안윤교 전문관, 임상범 주독일 대사 등과 반가운 인사를 했다. 특히 제9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으로 이번 행사를 공동 호스트하기 위해 먼 길을 날아온 김범수 교수와 통평원 세계한인 통일평화 최고위과정 원우인 비엔나의 정종완 팬아시아 회장, 베를린의 David Jang 사장과 유익한 담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참 좋았다.

주제가 2025년에 걸맞게 시의적절했다. 헬싱키의 교훈과 반둥의 정신을 어떻게 한반도 문제에 적용할 수 있을지, 특히 한반도의 평화구축의 맥락에서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첫날은 SIPRI 의 소장을 역임한 Dan Smith 박사가 “The Korean Peninsula: Cracking the Code of the Security Dilemma”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Gwendalyn Domning, Michael Staak 교수, 차지호 의원 등이 참여한 패널 토론이 이어졌다. Smith 박사는 신뢰가 부족한 국가들 사이에 나타나는 안보딜렘마를 해소하기 위한 접점과 계기를 만드는 실천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헬싱키 선언이 결과적으로 유럽의 해빙과 독일통일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한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면서 목적론적 해석을 경계했다.

둘째날 오전에는 헬싱키 협정의 정신과 그 효과를 검토하고 오늘날 한반도 문제에 줄 교훈을 논의하는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허지영 박사는 현상태의 인정, 대화촉진, 지역협력강화가 중요하다고 했고 다자적 engagement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Howe 교수는 현실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시각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무엇보다 ‘타자’를 인정하고 새로운 미래를 구성해가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강조했다. M.Staak 교수는 CSCE 중심으로 과정중심적 접근, 주변국가들과의 협력, 신뢰구축, 영역별 협력 같은 중요한 교훈을 헬싱키 협정으로부터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한반도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했다. 대체로 전날 기조강연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작은 접점, 가능한 대화와 신뢰조성의 작은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언급되었다.

오후 세션은 반둥 70년과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자리였다. UNHCR 안윤교 님이 “From Geneva to Global South: Understanding Human Rights Interactions”를 발표했다. 제네바에서의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유엔 차원의 UPR을 통한 북한의 반응은 결코 미미하거나 부정적이지 않다는 점, 인권의제를 통해서도 대화를 이어갈 공간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Kee Park 박사는 “DPRK’s pivot away from ROK’s aid money: Is Inter-Korean cooperation over?” 라는 발제를 통해 현재 남북한 의료지원과 협력의 현실을 논의하고 특별 펀드조성 방안 등을 제안했다. Tony Binn 교수는 아프리카에서의 ODA 중요성과 그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여러 교훈들을 발표했다. “Rethinking Korea’s ODA and Global South Policies” 란 제목처럼 반둥을 직접 논의하는 대신 Global South와의 교류지원사업을 통해 한국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자리가 되었다.

셋째날은 이곳의 젊은 신진 연구자들의 발표가 있었는데 전날의 전문가들 토론 못지 않게 신선하고 활기찼다. 내 개인적으론 이 세션이 더 흥미롭고 좋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Emytro Andrianov 는 이광수, 한용운, 김소월의 문학 속에 나타난 서사를 통해 Literary Memory와 National Healing 을 연결시키는 문화사회학적 분석작업을 수행했다. 중국에서 온 Yujin Xu는 한국 MZ세대의 통일의식을 분석적으로 검토하면서 세대간의 의식차, 그 속에 나타나는 시대의식과 집합적 꿈의 변화를 추적하고자 했다. 한국 연구자들도 쉽지 않을 문학작품의 결을 추적하고 조사연구의 문항과 응답의 향방을 이론화하려는 젊은 학자들의 지적 역정이 느껴져 감동적이었다.

몽고 출신의 Munkhzul Bat-Erdene는 Small State’s Shelter Seeking Diplomacy를 이론적으로 검토하면서 몽고가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에 작용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주목하고자 했다. Small State 라는 규정이 자칫 잘못된 프레임을 강화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반둥의 정신을 현재의 한반도에 접목시켜보려는 진지한 태도나 몽고의 지정학적 함의를 주목해보자는 제안은 신선했다. Natalia Matiaszczyk은 폴란드와 독일의 화해를 위해 각 지방도시들이 어떤 활동과 연대를 보여주었는지를 한일 도시간의 사례들과 비교했다. 역시 두 비교사례에서 지방도시의 현저한 자율성 차이를 통제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지방 차원에서 평화구축과 신뢰조성의 실천을 사고할 필요성을 보여준 것은 뜻깊은 점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배운 자리였다, 긴 회의와 토론을 마치면서 두가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헬싱키의 교훈을 강조한 유럽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가능한 것, 실천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현재의 북한태도를 고려할 때 대화와 접촉이 불가능할 큰 아젠다, 예컨대 통일, 비핵화, 인권 등은 내세우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는 조언이 많았다. 하지만 과연 그런 접근이 대화와 신뢰조성을 보장할 것인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때로는 쉽지 않지만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헬싱키 협정에서 인권을 끝내 고집하면서도 현실적인 관계에서는 유연한 태도를 취했던 방식을 꼭 손쉬운 접촉우선이라 하기는 어렵다. 가치지향이 없는 당장의 효과만을 중시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도 깊이 숙고하면서 헬싱키의 교훈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생각은 차지호 의원이 제기한 인공지능의 영향이다. 앞으로 ODA를 비롯하여 국제적 협력이나 교류에서 첨단기술, 인공지능이 미칠 충격 및 여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이 회의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향후 깊이 숙고할 쟁점임에 분명하다. 인공지능이 단순히 기술혁신에 머물지 않고 자원분배, 고용변화, 사회적 관계 조정, 나아가 군사기술과 안보영역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이기 때문에 남북관계나 사회전반의 평화구축에서도 이 변수는 피하기 어려운 문제다. 현 정부나 국회에서 AI기반 사회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직은 슬로건 차원에 머무는 느낌이어서 더욱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학문 분야에도 세대교체가 진행중이고 유능한 젊은 세대의 한국연구자를 배출하는 것은 어디든 중요하다. 시니어 전문가들과 주니어 연구자들 사이의 관심도 같지 않고 문제의식도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의 경우 세대경험, 시대상황이 너무 다르고 접하는 정보의 차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 좋은 환경일수 있지만 그만큼 한국사회의 역사적 뒤틀림과 내적 문제를 접해볼 기회는 줄어든다. 그런 점에서 여러 세대의 다양한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진지한 발표와 토론을 거듭한 이 포럼 자체가 매우 귀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런 포맷을 유지하는데는 보이지 않게 수고하는 분들의 헌신과 집념이 필수적이다. 이은정 교수를 비롯한 몇 분들의 열정이 참으로 소중하고 고마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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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문화가 될 때

제14차 한독통일자문회의가 11월 17, 18일 이틀간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엘리자베스 카이저 동독특임관 겸 재무부 정무차관이 독일측 단장으로, 국감으로 참석하지 못한 김남중 통일부 차관을 대신한 김병대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이 한국측 단장으로 회의를 주재했다. 현저히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할 한국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와 AfD의 급부상이라는 환경에 직면한 독일이나 분단과 통일, 통합의 쟁점이 만만치 않음을 재확인한 자리였다

독일이 통일된지 35년, 우리가 일제 식민통치를 받았던 것과 꼭같은 시간이 흘렀다. 장벽이 있던 곳은 유적지가 되었고 1990년의 대격변도 교과서에서 배우는 과거사가 되었다. 하지만 ‘화해의 교회’의 낡아진 외벽처럼 과거는 사라졌다기보다 변색된 형태로 지속되면서 또다른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중이다. 건축을 통해 분단과 통일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현장답사를 하면서 나는 도시공간도 정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 또 시간이 흐르면 살벌했던 정치적 대립도 달빛 속 풍경같은 문화가 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독일측이 기획하고 안내한 현장답사의 첫 방문지는 소련전승기념공원이었다. 나찌 독일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소련군의 위용을 드러내고 희생당한 장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조성한 곳이라 한다. 공원의 규모가 엄청나고 공산주의 조형물의 전형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소련과 동독이 사라진 이후에도 이 공원이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신기했는데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한다.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북한 주체탑을 연상시키는 추모탑을 둘러보며 나는 8.15 광복절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을 떠올렸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 북한은 ‘쏘련군 장병들의 숭고한 국제주의 정신’과 ‘조선-러시아 친선의 영원한 생명력’을 힘주어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 러시아 정서가 복잡해지는 오늘 독일인들은 이 공간에서 어떤 과거를 떠올리고 어떻게 그 시기를 재해석할까 궁금했다.

오후엔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축으로 2차대전 직후에 조성된 근대건축지구를 답사했다. 동서 베를린에서 각기 경쟁적으로 도시재건사업을 전개했던 현장인데 이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는 전문가가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동쪽에는 스탈린 거리로 명명되고 이후 칼 마르크스 대로로 개칭된 거리의 양편에 사회주의의 위용을 과시하는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고대 로마건축의 느낌도 포함된 웅장하고 아름다운 외양이 강조된 건물들이었다. 반면 서베를린에서는 한자(Hansa)지역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의 이념을 드러내는 도시계획이 추진되었다. 전세계의 유명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다양성과 개별성을 강조하는 다른 유형의 주거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고층빌딩 대신 낮은 주택들, 외부공간보다는 내부를 중시하고 녹지공간을 곳곳에 배치한 설계로 서베를린의 개인주의와 다원주의를 드러내려 한 특징이 뚜렷하다.

동서를 잇는 이 거리는 언뜻 여느 도시의 한 구역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주목해보면 건물의 외양도 모습도 사뭇 다르다. 그래서 동서독의 자존심을 대변하려는 체제경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전시공간이 되고 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동베를린은 노동자들의 주택이 강조되고 서베를린에서는 ‘사회주택’을 강조한 차이가 있지만 모두 공동주택의 개념을 공유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왔다. 이념적인 체제대결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공히 주민 모두의 집단적 생활공간을 중시하려는 공동체적 지향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현장인 셈이다. 어쩌면 그런 특징이 서독에서도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SPD의 오랜 정치적 위상과 역할을 가능케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값비싼 주거지대로 변했으나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쉽게 변형할 수는 없다고 한다.

회의가 개최된 연방 재무부 청사 역시 역사성이 뚜렷한 건물이었다. 브리핑에 따르면 이 건물은 히틀러 시대인 1935년 독일제국의 ‘힘의 상징’으로 건축된 곳인데 2차대전 중에는 공군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전쟁 중에 심한 폭격을 받았지만 상당부분이 온존했던 덕분에 동독의 건국과 개혁이 진행되는 주요한 정치공간으로 활용 되었다. 1991년 통일 직후엔 그 논란 많던 신탁청이 이곳에 자리잡았다. 통일직후 동독의 구조조정, 국유재산 민영화를 담당했던 기관인데 이 업무를 관장했던 데틀레프 로베더 신탁청장이 집에서 총격으로 살해될 정도로 심한 갈등이 내재되었던 곳이다. 이 사건은 [퍼펙트 크라임: 로베더 암살사건]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당대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히틀러 시대(1935-45), 분단시대(1945-1990), 통일시대(1990- )를 거쳐오면서 뒤섞이고 중첩된 상이한 시대성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이해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히틀러의 독일 제국, 동독의 의회, 그리고 통일독일 신탁청의 역사가 같은 공간 안에서 이어짐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저런 방식은 ‘잘못된 역사’를 지우고 ‘바른 역사’를 다시 쓰려는 우리의 열망과 꽤나 다르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평가는 섣불리 내리기 어렵지만 정치적 차원과 문화적 층위가 무분멸하게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과거가 재해석될 때마다 정파적 정쟁으로 비화되지 않으려면 인간사의 모순과 역사적 갈등을 문화적 입체화로 그려보는 역량이 중요할 터이다. ‘역사의 현장’이라는 말은 이런 역설적인 중첩성과 아이러니를 함께 보여줄 때 더 잘 어울리고 그런 속에서 새로운 상상력과 대응력도 더 잘 길러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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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학자의 아름다움

100세 시대라 하지만 90년을 건강하게 활동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공부한 사회학계에 한정해서 본다면 한완상 교수님, 김경동 교수님, 신용하 교수님 등이 모두 구순이 되셨거나 가까왔는데도 변함없이 명석하고 열정적이시다. 직접 스승 제자 사이는 아니지만 이런 저런 관계로 가까이 뵈었던 백낙청, 이만열 교수님도 여전히 건강하고 지적인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각자 몸과 마음을 지키는 노력이 컸겠지만 이미 고인이 되셨거나 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동세대의 여러 분들에 비해보면 복을 많이 타고 나신 분들임에 틀림이 없다.

지난 6월에는 한완상 교수님을 모시고 몇 제자들이 모여 9순을 축하하는 조촐한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걸음걸이가 다소 불편하고 질환도 있으시다지만 기억력과 말씀이 여느 젊은이들 못지 않았다. 특히 사회학 공부를 하던 학창시절, 유학시절의 이야기를 하실 때는 젊은 때의 꿈을 상기하시는 모습이 장년같이 보였다. 기독교의 정신과 사회학 공부를 연결시키려던 당신 삶의 스토리를 정리하는 일을 도와달라신 청에 부응하지 못한 송구한 마음이 한켠에 여전하다. 나는 한 선생님 얼굴과 함께 평생 추구한 지적 화두들과 내 감사함을 담은 족자 한 점을 제작해서 헌정했다. 이후 한선생님 댁을 방문한 여러 분으로부터 그 족자가 거실 한복판에 걸려 있었다는 인사를 전해 듣고 다소나마 도리를 다한 듯 마음 한켠이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다.

지난 9월에는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제작하는 서울대 샤복샤복 유투브에 신용하 교수님과 대담을 나누는 역할을 했다. 다리가 다소 불편하지만 여전히 건강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모습이 후학 제자들에게는 큰 귀감이 된다. 내가 사회학자로 활동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학은과 배려를 베푸신 분이기에 굳이 연세와 상관없이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서울대에 기증하신 화양 신용하 문고 특별전시가 현재 준비 중이어서 그 행사와 함께 구순을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어볼 계획인데 모든 분들께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학은에 감사하는 자리를 어떻게 만들어볼지 고민 중이다.

이번 주엔 호산 김경동 교수님의 구순기념논문집 봉정식이 있었다. 60년대 학번인 김성국 교수와 70년대 초반 학번인 배규한 교수 등이 힘을 모아 두툼한 기념 책자를 간행했다. [선구자의 길- 김동의 동서융합 사회학] (박영사) 이라는 책인데 모두 3부로 구성되어 1부는 김경동의 학문세계의 총괄적 조망, 2부는 김경동 사회학의 계승과 확장을 다룬 논문들로 3부는 인품과 추억들을 담은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에세이를 쓴 분들은 대체로 70년대 관악시절을 기억하는 선후배 들인데 시대는 암울했지만 학창생활에는 나름 열정과 낭만이 없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요즘 분위기로는 구순기념논문집을 내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자칫 민폐가 되기 쉽고 자발적이고 흔쾌하게 진행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부분 60대를 넘기고 현재 70대 중반을 넘어서는 후학들이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했다. 교수님 댁을 방문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받던 일, 청아한 노래와 그림솜씨에 경탄하던 일, 꾸중을 들으면서도 고마왔던 일 등이 담겨있어 글 속에 훈훈한 온기가 가득하다.마치 60-70 들의 동문회장 같다는 농담이 오갈 정도로 학창시절의 추억담으로 행사장 역시 따뜻했다. 나도 참 오랜만에 선후배들과 옛날 생각을 하는 자리가 되었다.

아마도 이런 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호산 선생의 푸근한 인품, 이론적 포용력, 그리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지적 탁월함이 두드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누구보다 뛰어난 영어실력과 국제적 감각을 가진 분이면서도 동양사상, 선비정신을 이론화하려는 문제의식도 남달랐다. 시를 쓰고 소설에도 도전하며 기타도 치며 노래하는 르네상스형 지식인의 풍모가 이런 결과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 나는 명심보감의 한 귀절을 쓴 서예작품을 봉정했다. 김경동 교수님이 매우 좋아하셨고 사모님은 집안 거실에 두고 매일 감상하겠노라 하셨다. 아이오와대 김재온 교수님 축하글과 함께 책의 맨 앞을 장식하는 영광도 누렸다.

그러고보니 세 분의 선생님들을 올 한 해 이런 저런 계기로 뵙고 축하드리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 변변치 않지만 여러 형태로 감사의 뜻을 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이 세 분은 학문의 지향은 물론이고 인품과 인격의 색깔도 매우 다르다. 감사하면서 나는 90의 때 어떤 빛깔로 사람들에게 비칠까 생각해 본다. 그 때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부터 불확실한데 너무 이른 고민일수도 있겠다. 아름답게 물든 낙엽들 보면서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이 어렵고도 귀한 것이란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