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vities · life · 시공간 여행

변경유정(邊境有情)

일주일에 걸친 북중국경지역 답사를 마치며 일행 한분이 한시를 한 수 지어보라 제안했다. 그에 응할 실력은 전혀 못되는 걸 알지만 중국을 여행한다는 기분에 웬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두보의 ‘春望’ 첫귀절,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을 떠올리며 이런 저런 생각과 감정들을 갈무리해 보고자 했다. 어려운 중국식 작법이나 차운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뜻만 드러내는 한시도 가능하다 하고 이를 신체시 (新體詩)라 이름했던 선친의 시도에 기대어 용기를 냈다.

延邊山河連兩岸 圖們橋上無人聲 (연변의 강산은 양안을 잇고 있는데, 도문의 다리 위엔 오가는 사람이 없다) // 欲對龍井先驅者 東柱古家滿遊客 (용정에서 선구자를 만나보려 하나, 윤동주 옛집엔 관광객만 그득하네) // 天池風光如前秀 鐵網警告此國境 (백두산 천지의 풍광은 여전히 빼어난데, 철망은 이곳이 국경이라 경고하고) // 自遠方來卒本城 皇宮舊址盛雜草 (먼곳에서 애써 졸본성을 찾아 왔으나 왕궁의 옛터엔 잡초만 무성하다) // 實見好太王碑文 懷憶千年古史蹟 (광개토왕비문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천년 옛 사적을 떠올린다) // 五女山傳朱蒙業 誰言此地高句麗 (오녀산은 주몽의 건국위업을 전하지만, 오늘 누가 이 땅을 고구려라 칭할 것인가) // 鴨綠江上望義州 默念恨別已百年 (압록강 위에서 신의주를 바라보며 한스럽게 나뉘어진지 어언 백년임을 생각한다) // 難免悲感世上事 豈不待後靑年起 (세상사 비감함을 누를 길 없으니 어찌 후대 청년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으랴)

귀국한 후에도 여행의 감회가 사라지지 않아 이 한시를 화선지에 썼다. 어줍잖치만 시(詩)와 서(書)를 함께 하던 옛 문인이 된 느낌이다. 시도 서도 내놓을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지만 어차피 격식을 무시한 작품이니 짝퉁이나 습작이란 힐난이 있어도 개의할 바 아니다. 그런데 7언 절구의 앞과 뒤가 대비되고 풍경과 인간사가 서로 어긋나는 모습이 역연하여 스스로 흥미롭기도 또 씁쓸하기도 하다. 여행에서 자연스레 얻게된 정서의 양면이 반영된 결과일텐데 이런 역설과 회한의 감정을 표현하고 누군가와 교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나 싶다.

activities

압록강은 흐른다!!

다시 긴 시간을 달려 단동에 도착했다. 석양이 지는 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신의주, 그 풍경의 변화가 우선 내 눈길을 끌었다. 고층건물이 꽤 들어섰고 붉고 둥근 랜드마크 건물이 새롭다. 카지노장으로 건설되었다는데 아직 개장은 안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위화도에는 최근에 완공된 듯 깔끔한 고층건물들이 십수개 동 연이어 서있다. 넓지 않은 공간에 꼭같은 건물들만 세워진 것으로 보아 역동적인 경제활동이나 생활공간이 될 곳은 아닌 듯 하지만 북한 내부에도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진행 중임을 보여주기에는 족해 보였다.

단동시의 압록강변은 더욱 활발하고 역동적인 관광지가 된 듯 했다. 북한과의 연계와는 무관하게 중국 내부의 발전과 여행수요가 가져온 결과로 보인다. 실제 연변에서도 확인했지만 동북삼성이 중국인들의 국내관광 대상지로 되고 있다. 조선족이 주도하는 음식문화,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K-Culture, 변경지에서의 독특한 분위기 등이 여행을 자극하는 요인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압록강변 넓은 지역을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강 건너 북한은 그다지 관심거리가 아닌 듯 했다.

단동은 중국의 역사해석, 정치교육의 현장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더 커진 모습이다. 6.25때 끊어진 압록강철교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은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교육용 설명간판이 곳곳에 부착되어 있다. 철교 중간에는 6.25 당시 이곳을 폭파한 미군전투기 사진과 함께 이곳이 ‘항미원조전쟁출정지’였다고 적혀있다. 기념품점에도 ’항미원조‘를 테마로 한 물건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런 경향은 동북지방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경향이라 하겠다. 관광과 역사와 정치가 중화주의 세계관을 매개로 곳곳에서 정교하게 결합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압록강변의 백화점과 상점들은 불야성처럼 밝고 ’한조(韓朝)상점‘이란 상호도 눈에 띄었지만 남북한과 중국을 한데 잇는 변경도시로서의 역할은 제한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 모습이다. 십여년 전에 북한과 중국을 잇는 신압록강대교가 거의 완공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기대감을 가졌었다. 북중간 경제가 활발해지고 한국과의 관계도 강화될 것을 기대하여 인근지역에 부동산 개발붐이 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완공 이후 북한측 연결부분 공사미진으로 오랫동안 개통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니 아직은 정중동이라 해야할지 모르겠다.

단동철교에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컨테이너 화물차량이 줄을 이어 서 있어 어떤 부분에서는 유의미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저 물동량의 변화가 얼마나 지속적일지, 인적 교류로 어느 정도 발전할지 앞으로 지켜볼 일이겠다. 북한이 적대적 2국가론을 내세우고 러시아와의 관계가 현저히 가까워진 이후 북중간 협력이 어느 정도 진행될지는 예측하기 쉽지 않다. 다만 향후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중국 관계의 중대한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고 그럴수록 이 지역은 또다시 주목 받을 것이다. 때마침 북한에서 신압록대교 개통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보인다는 뉴스도 접했고 북미대화의 가능성도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반도가 어떻게 안정과 평화를 제도화하고 궁극적 통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배전의 지혜와 숙고가 필요한 때를 맞이하고 있다.

activities

아! 고구려

8월 19일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온 후 서쪽으로 달려 집안에 도착했다. 압록강변 고구려의 옛 도읍이다. 십여년 전 서울대 교수들과 서안의 둔황고굴을 들린 후 티벳 방문이 무산되어 대신 이곳을 왔던 적이 있다. 그 때에 비해선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호텔시설도 꽤 좋아져 오는 길이 훨씬 편해졌다. 이곳의 압록강은 강폭이 넓지 않고 북한의 만포시와 연결되어 있지만 변경지대로서의 특성은 크지 않다.

고구려 역사를 품은 곳이지만 오늘 이곳은 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이다. 주몽이 졸본성에 나라를 세운 후 두 번째 도읍을 세운 국내성 성벽 일부가 시내에 남아있지만 고대의 강성했던 시절을 보여주기엔 역부족이다. 호텔 앞을 흐르는 훈강이 비류수로 비정된다 하나, 주몽의 건국역사를 기억할 사람도 찾기 어렵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환도산성에는 건물들이 있던 주춧돌이 발굴되고 ‘고구려왕성지‘라 일컬어지고 있지만 옛 위용을 체감하기에는 유적이 너무 소박하다.

그 아쉬움은 통구고분군 앞에서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이 일대에 고구려 무덤은 만여기 이상 존재한다는데 실제 전기차를 타고 돌아보아야 할 정도로 넓은 지역에 수많은 무덤들이 빼곡하다. 일대는 ’고구려고묘박물관‘이라는 야외전시관으로 단장되어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의 세력이 왕성했음을 느끼기엔 충분하지만, 무덤만 남아있고 다른 유적은 거의 사리진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고구려의 역사적 존재감은 역시 광개토대왕비에서 명료해진다. 호태왕비라 적힌, 6미터를 훨씬 넘는 거대한 비석이 주는 압도감은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1775자가 또렷한 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은 육안으로 읽을 수 있다. 글씨와 석각이 모두 뛰어나 비문의 탁본 자체가 예술품 같다. 동북아 고대사를 실물로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인데 일부 글자가 보이지 않고 그 해석을 둘러싸고 한중일 학계의 논란도 뜨겁다. 이어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을 들러 석실 내부까지 둘러보았다. 동방의 피라미드로 일컬어지는 장수왕릉은 잘 단장되어 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이전에 비해 감동이 덜한 느낌이었다.

다음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졸본성이 있던 오녀산성으로 향했다. 평지에서 바라보는 오녀산은 천혜의 낭떠라지로 둘러쳐진 높은 곳으로 수성에는 유리한 지형임은 한눈에도 분명해 보였다. 입구에는 ”고구려시조비”라는 큰 돌비석이 서 있고 주몽의 건국을 알라는 안내문이 서있다. 천여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산성과 주거지터, 제사터 동이 있다. 최근에 건립되었다는 말을 탄 주몽의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천여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하는 입구에 이곳 역사를 기록한 돌비가 시기별로 서 있다. “기원전 37년 북부여 왕자 주몽이 졸본천 (지금의 환인)에 정착, 고구려국을 세웠다” ”기원전 34년 주몽이 부족에게 명하여 학령에 왕성을 축성하게 했다 (지금의 오녀산성)“ ”기원전 19년 9월 태자 유리가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 2대왕 유리명왕이 되었다“ ”기원후 32년 12월 한나라 광무제가 구려후를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기원후 167년에서 619년까지 신대왕 영류왕 등 9왕이 졸본천으로 가 시조묘에 제사하다“ ”기원후 2004년 7월 오녀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네번째 돌비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졌다.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정권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는 중대한 내용이었다. 중국의 후한서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한국의 삼국사기와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후한서는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고구려가 한나라에 조공을 바친 후 제후국으로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고 오녀산성의 네 번째 돌비는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소급하여 해석하면 주몽도, 유리왕도, 고구려 벽화나 고분군도 결국 중국제국, 중화문명의 한 부분으로 설명될 소지가 강해질 것은 분명하다.

역사를 흔히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 등으로 구분하지만, 현실에서 고대사가 가장 치열한 정치적 논란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동지방의 오랜 갈등의 뿌리에는 종교적 성지를 둘러싼 대립이 놓여있고 그것은 다시 고대의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에 맣닿아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미래를 내다볼 때 이 지역의 고대사가 어떻게 재구성되고 현재화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다. 고구려 유적지를 단지 흘러간 과거사로 바라보지 못하는 염려가 마음 한켠에 자리한다.

activities

두만강 유감

8월 17일부터 일주일간 북중국경지대를 답사했다. 재단법인 통일과나눔이 준비한 여행에 초청을 받아 뜻깊은 여행을 했다. 두만강 동쪽 끝 방천에서 시작하여 도문, 연변, 용정, 송강하, 통화, 집안, 환인, 압록강 끝 단동을 거쳐 심양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삼십여년간 여러 차례 오고간 곳이지만 최근의 변화가 생각보다 크고 생소한 장면들이 적지 않았다. 놀라움과 안타까움, 기대와 우려가 혼재하는 이중적 감정이 시종 떠나지 않았다.

연길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친 후 곧장 북중러 삼국 국경지대인 방천으로 향했다. 두만강변의 모습은 예와 다름없었지만 국경 철조망은 더 새로워진 듯 했다. 훈춘 지역에 웅장한 세관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아직 북중간 물류 이동은 활발하지 않다 한다. 방천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9층 건물이 들어서 삼국 국경을 조망할 수 있었고 많은 관광객들로 복잡했다. 이곳이 발해문명의 고장임을 알리는 큰 간판과 함께 “애국주의가 곧 중화민족의 민족심이자 민족혼“이라는 표어가 강렬하다.

이튿날 아침 도문을 들렀다. 이곳을 오면 으례 오는 국경지대이고 북한으로 통하는 다리 중간까지 걸어가 북한땅을 바라보곤 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제 그 다리는 차단되어 사람이 오가지 못한다. 대신 아래쪽 ’두만강 나루터‘가 새로운 조망공간으로 개발되었고 ‘성수동 까페‘라 이름한 대형 찻집이 관광객을 부르고 있었다. 피아노를 둔 서양식 인테리어와 서울 성수동이란 브랜드가 이곳까지 진출한 것이 놀라왔지만 전반적으로 도문의 외지고 낙후한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91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감흥을 잊지 못하는 나로서는 저 다리가 다시 이어질 날이 언제 올까 궁금했다.

새로이 건립된 연변박물관을 들러 보았다. 규모나 전시내용, 설명방식 등에서 그 수준이 놀라왔다. 연변 정도의 지방도시에 이처럼 거대한 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문화정책이 얼마나 조밀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컨텐츠의 서사가 정책적으로 체계화되는데 따르는 문제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민족 고유의 문화와 역사적 역할은 그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중화민족‘의 다문화적 성격을 강조하는 기조가 뚜렷하다.. 만주지역을 개척해온 조선족의 활약상이 ’생산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 것도 같은 맥락일 터이다.

용정을 지나는데 가이드가 박경리 ‘토지’ 이야기를 했다. 이곳이 토지 2부의 주무대였기 때문인데 얼마전 끝낸 박경리 기념 서예전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하동 평사리와 진주에서의 전시를 끝내고 이곳 만주지역을 오게 된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사의 맥락에서 용정의 일송정, 명동촌 명동학교, 민족시인 윤동주를 떠올리는 기억은 점차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화민족의 역사서술이란 큰 틀 속에 조선족의 역할을 배치시키는 유적의 재해석 작업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 등정은 언제나 이 지역 여행의 핵심이다. 이전에 천지를 세번 올랐었지만 남파로 올라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송강하의 리조트에서 새벽 6시에 길을 나섰는데 북파나 서파에 비해 남파는 하루에 입장가능한 사람수를 훨씬 적게 제한한다고 한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별로 혼잡하지 않았고 큰 기다림 없이 13인용 승합차를 탈 수 있었다. 천지로 올라가는 길 바로 옆으로 북중 국경선을 알리는 철책이 길게 이어져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이십여분 동안에도 기상은 시시각각 변해 긴장하게 했지만 마침내 정상에서 파란 하늘과 툭트인 천지를 만났다. 과연 장관이었고 북파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수많은 인파로 자리다툼을 해야 했던 이전과는 달리 여유롭게 천지를 조망할 수 있어서 특히 좋았다. 전망 좋은 곳은 돈을 내고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이곳에서 돈을 아낄 사람은 없지 싶었다. 천지의 사진을 걸어두고 답답한 일상과 숨막히는 더위에도 가능하면 푸른 하늘과 파란 물빛을 잊지말고 지내자 마음 먹는다.

activities

코리아 공동체

6월 1일 “격동의 시대 – 통일과 평화를 어떻게 재결합할 것인가”를 주제로 내건 학술 심포지엄이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이 주최했다. 트럼프 2기 출범으로 심화된 세계적 변동과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이후 우리가 처하게 된 새로운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 첫 세션의 과제였다. 둘째 세션은 최근 남북한 2국가론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 평화공존을 새 목표로 내걸자는 일각의 주장 속에서 통일론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를 다루었다. 세번째 세션은 기존의 민족공동체 방안을 대신할 어떤 비전이 가능할지를 탐색하는 대안모색이 주 관심이었다. 이영선 통일과나눔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통일과 평화의 두 화두를 묶어내기 위한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했고 150여 청중들이 시종 경청하여 몰입도가 높은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윤영관 아산재단 이사장은 현재의 상황을 ‘지정학 시대의 귀환’으로 규정하고 향후 가능한 세 시나리오를 소개한 후 그것이 세계질서와 동아시아, 그리고 한반도에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를 설명했다. 이전 질서로의 회귀, 신냉전, 세력권 정치 중 어떤 미래가 전개되든 한국에겐 큰 도전이 되리라 예상하면서 특히 한반도문제가 국제정치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국민들의 통일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형중 박사는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핵능력 증진으로 북한의 위상과 강제력이 더욱 강화된 조건 속에서 ‘북한 우위 적대병존관계 수립’ 전략으로 해석했다. 적대성은 향후 북한체제존속의 한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고, 그 맥락에서 평화공존은 실현불가능한 전망이라고 했다. 평화적 2국가론은 허상이며 억제와 위기관리역량을 재설계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마상윤 교수, 민태은 박사가 참여한 토론에서는 향후 세계질서 변동을 해석하는 제 시나리오의 적절성 여부, 특히 세력권정치의 전개가능성, 지정학의 회귀라는 표현의 정확한 내용, 한국문제의 국제화라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거래주의적 동맹관이 동맹약화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등이 논의되었다. 박형중 박사에 대해선 과연 북한의 대남적대성이 고정불변일 것이라 단정할 수 있는지, 평화공존 불가능론은 너무 구조적 변수만을 강조하는 편향이 아닌지, 이런 상황에서도 신뢰의 접점을 찾고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두 번째 세션에서 김병연 교수는 경제통합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통일론을 제시했다. 경제협력에서 경제통합을 거쳐 통일로 가는 모델이 북한에게도 실익이 크고 한국의 부담도 크지 않다고 했다. 북한의 현 경제상황은 매우 구조적으로 취약하기에 체제안정을 위해서라도 경제협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가능성을 주목한다. 다만 경제협력은 위임형 제도화를 수반해야 하고 공동의 규칙을 발전시킴으로써 북한이 시장화를 넘어 시장경제화로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전우택교수는 현 북한이 지도자의 강국욕망과 잘살려는 인민의 욕망이 부딪치는 상태로 파악했다. 시장, 사상, 문화 전반에 걸친 가혹혼 통제가 심화되는 현실은 그 자체가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고 고통과 불안정을 키울 것으로 판단했다. 통일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즉 평화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운 우리의 대응력, 입체적이고 모순을 포용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토론에서 양문수 교수는 경제통합의 실제 유형도 역사적으로 다양했음을 설명하면서 한반도에서의 통합개념을 좀더 세분화, 정교화할 필요를 지적했다. 또 동구권에서 확인된 경제통합이론이 한반도에도 충분히 적용가능한지, 북한이 과연 통합이라는 개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시됨을 지적했다. 김성경 교수는 1국가 1체제를 상정하는 통일개념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두 국가론에 대해 좀더 전향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21세기 첨단기술이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도 좀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첨언했다.

세 번째 세션에서 나 (박명규 교수)는 현 시기를 ‘기본합의서 체제의 파탄’ 국면이라 설명했다. 미중대립과 북러밀착, 북한 핵보유 자신감 등을 배경으로 북한은 1991년 이후 남북관계를 지탱해온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원칙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한국에서도 대북정책이나 남남갈등을 조율하는 전략적 대원칙으로서의 위상과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다. 같은 민족이란 정체성이 약화되고 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간주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동시에 북한에 대한 거부감과 안보불안은 증대하고 있어 기존방안을 유지하기도 2국가론을 수용하기도 어려운 딜렘마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착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선 민족공동체에 기반한 기존 시각을 ‘코리아 공동체’ 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제안했다. South Korea와 North Korea라는 두 현존하는 국가성을 인정하는 새 통합구상으로 바꾸자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남북간 특수관계도 역사문화적 공동성보다 분단국가관계로 재조정되고 그에 기반하여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모색하는 형태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코리아 공동체는 단일민족국가형 통일체를 지향하기보다 경제, 문화, 재난, 보건, 안보 등 여러 영역별로 다차원의 통합이 병행발전는 복합공동체가 되어야 함도 언급했다. 박영호 박사, 조동호 교수, 김병로 교수, 류경아 박사 등 패널토론자들은 대체로 큰 방향에 공감하면서도 실질적인 대안이 되기 위해선 어려 측면에서 좀더 다듬어져야 할 쟁점들이 있음을 지적했다.

전반적으로 심포지엄의 짜임새는 좋았고 발제와 토론도 밀도가 있어서 휴식도 없이 계속된 4시간이 길지 않게 느껴졌다.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세가지 쟁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지정학의 도래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국제정치적 전략과 남북관계적 논리가 어떻게 종합적 대응력으로 재구축될 수 있을지가 그 하나다. 동맹-자주, 평화-통일을 나누어 양자택일하려는 편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중요해졌다. 둘째는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공세적으로 볼 것인가 방어적으로 볼 것인가의 쟁점이다. 양면이 다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양자를 전제한 위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셋째는 경제통합 구상이나 코리아공동체 비전에서 보듯 급진적 통일보다 삶과 연동되는 ‘통합’을 더욱 주목할 필요성이다. 이런 통합형 구상을 어떻게 전략과 정책 차원으로 체계화할 것인가가 미래의 주요한 과제가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관계상 이런 쟁점들이 좀더 예리하게 토론되고 예각화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은 아쉬웠다. 향후 동북아 지정학의 향방, 북한과의 평화공존 가능성, 남북 경제통합의 전망, 코리아 공동체의 적실성 등에 대한 밀도있는 논의는 후속 과제로 남겨진 셈이다. 향후 더많은 논쟁과 검토를 거쳐 이런 쟁점들이 다듬어지기 기대하면서 그러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파적 대립, 단순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한 지성적 성찰이 더욱 절실하리란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코리아 공동체’라는 화두가 꽉막한 남북관계를 열어가는 대안으로 발전해갔으면 하는 희망을 더욱 갖게 되었다. 2차대전을 거치면서 심화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을 넘어서 평화와 번영을 향한 유럽공동체 꿈을 꾸었던 장 모네의 구상이 실현되는데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음을 생각하며, 긴 호흡과 폭넓은 토론, 유토피스틱스적 전망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한 하루였다.

activities

다산과 동구릉 – 유적의 박제?

5월 21일 고등학교 동창들과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오전엔 다산생가와 기념관 일대를 둘러보고 오후엔 동구릉을 답사하는 일정이었다.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였는데 야외에서 하루 종일 걷는데는 오히려 천상맞춤이었다. 두 곳 모두 오래 전에 와 본 곳이지만 처음 온 듯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느낀 바가 적지 않다

남양주 마재마을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마을로 그가 오랜 유배 생활 끝에 다시 돌아와 생을 마감한 곳이다. 1986년에 복원된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떨어져 있는 구조로 안마당을 넓게 쓰도록 설계한 중부지방의 전형적 양반집 모습이다.기념관에는 다산의 대표 저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 <흠흠신서>의 사본과 수원 화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가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문화관은 실학과 관련한 유무형 자료와 정보를 수집·보존·연구·전시하는 다목적 복합 문화 공간이다. 두물머리를 앞에 둔 다산 유적지는 주변 풍광도 수려하여 산책하기에 퍽 좋은 장소다. 여유당 뒤편의 다산 묘소는 2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추모 공간이 되었다.

다산 집안은 8대가 과거에 합격한 명문가였다. 그 부친 정재원은 참의공 정시윤의 4대종손이었고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지적 탐구열이 뛰어나 실학은 물론이고 서학도 선구적으로 수용한 인물들이 다수 이 집안과 연결되어 있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던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었고 그를 매개로 성호 이익의 실학을 이어받았다. 다산은 남인학파로 꼽히지만 실제적인 사고와 경험적 지식을 중시했다. 다산초당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해 1표2서의 대작을 남겼고 적지 않은 편지와 시문으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다산의 사상을 집대성한 위당 정인보는 다산에 대한 연구가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라고 했다. 그가 자녀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글은 오늘날 교육적으로도 활용가치가 높아 다산유적지 거리 곳곳에 그의 글이 새겨진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다산유적지는 그 인근에 있는 마재성지와 함께 둘러보아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의 형제들의 생애까지 포괄해야 다산의 고민과 지성, 삶의 궤적들이 입체적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 마재성지는 셋째 형 약종과 그 가족의 순교를 기념하는 곳인데 다산유적지와 마재성지가 함께 소개되는 안내서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쉽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한 조선 천주교의 초기 지도자였다. 그 자신이 신앙을 지켜 순교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부인 유조이 세실리아, 장남 정철상 카를로, 차남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이 모두 신유사옥과 기해박해에서 순교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가족 모두가 성인으로 시복되었고 마재성지는 한국천주교의 대표성지가 되었다. 다산유적지와 마재성지의 가깝지만 먼 공간구성은 약종과 약용의 엇갈린 생애만큼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오후에 들러 본 동구릉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서울 근교에 50만평이 넘는 왕조의 묘역이 이처럼 잘 관리되고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조선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그의 유언에 따라 함흥의 억새풀로 덮여있다는 설명이 흥미로왔다. 이성계로서는 그가 성장한 함경도 변경지방에의 그리움을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500년 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왕릉이 그 이후 조성된 왕과 왕비의 묘역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아홉 릉이 크기나 형태에서 너무 유사해서 설명을 읽지 않으면 누구의 릉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니 조선왕조 역사에서 태조의 유훈이라는게 큰 힘을 발휘한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선조가 묻힌 목릉 앞에서 조선왕조를 망친 임금이 저렇게 대우받아도 되는가라는 한 친구의 일갈이 잠을 깨우듯 와 꽃혔다. 그러고보니 임진년 왜란과 병자년 호란을 겪고 조선사회가 극도의 피폐상태로 몰렸던 시기의 국왕, 당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학계의 평가가 좋지 않은 선조인데 죽은 이후의 무덤은 오히려 태조의 릉보다 더 좋아 보일 정도다. 유일한 외국 출신 국왕이었던 현종의 묘 숭릉, 탕평책을 실시한 영조의 원릉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여서 마치 복제한 듯 비슷하다. 죽음 앞에선 살아서의 잘잘못도 모두 묻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당대의 치적이나 세평과는 무관하게 국왕이란 존재에 대한 의례와 장법만이 존중된 결과일지 모르겠다.

동구릉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이곳을 둘러보는 외국인들은 조선왕조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을 어떻게 유추할까? 왕조와 왕실에 대한 애착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한국사회인데 지금도 오래전 국왕의 제사가 계속되는 이 살아있는 문화공간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K-Culture 가 주목받으면서 태종과 문종과 선조와 현종의 구체적 역사와 스토리는 사라지고 국왕과 황후, 예법이라는 문화적 코드만 부각될 수도 있다. 하긴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로마의 콜로세움의 여행에서도 시간과 스토리는 배경으로 박제되는게 보통이니 왕조의 무덤 앞에서 명말선초의 14세기와 풍전등화의 16세기, 영정조의 18세기 간 차이를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그 여러 가지 소회를 그림으로 담고 싶어 화선지를 폈다. 숭릉의 단아한 풍경을 수묵으로 그리고 이런 발문을 썼다. “오월의 신록, 유네스코 문화유산, 왕조의 잔재와 영화, 권력무상, 역사의 진전 —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당연하지만 이 물음 속에는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담겨있다. 스토리와 진정성이 박제화되는 것은 먼 역사에만 해당되는게 아니다. 온갖 과거가 이념과 정치의 잣대로 재단되는 오늘의 역사오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스토리가 빠진 문화적 기호, 미학적 대상으로 유적을 만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래도 유적지의 참된 의미는 삶의 스토리, 그 속에 담긴 진정성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다산유적지도 마재성지도 동구릉의 건원릉과 숭릉도 제 각각의 존재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activities

산유화와 지식인

4월 22-23일 도헌학술원 포럼 참석차 춘천에 다녀왔다. 70여권의 책, 710여편의 컬럼에 여러권의 소설까지 내 놓은 이 시대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지식인인 송호근 원장이 학자로서의 반세기를 되돌아보면서 그 세대의 정신사적 궤적을 성찰하는 자리였다. 나는 논평자로 초청을 받아 참여했지만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친구이자 동료로서 축하와 공감의 마음으로 함께 했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송교수는 자신을 베이비붐세대, 좀더 구체적으로는 70년대 경험에 그 정신적 뿌리를 내린 세대로 표현했다. 유신시대에 대학을 다니고 80년대의 격변과 환희를 맞보고 90년대의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경험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채 IMF 경제위기를 겪었지만 새로운 변화를 일구어낸 역동적 시대를 살아온 세대이다. 실제로 그가 쓴 많은 책과 컬럼은 이 시대가 보여준 다양한 애환과 갈등의 면면들을 다루고 있다.

당연 나도 같은 세대에 속한다. 이 세대는 문학으로부터 세상과 인간, 역사를 보는 눈을 키웠다는 송원장의 발표에 공감했다. 나 역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도 소설과 시, 종교 서적에 더 끌렸던 기억이 있다. 80년대 후반 ‘사회과학의 시대’가 도래했고 한편 그 변화를 환영했지만 이청준, 최인훈, 황석영, 신경림의 정서가 마르크스와 사회구성체 논리, 민중해방과 계급의식을 강조하던 사회변혁적 사유와 같을 수는 없었다. 그 거리감은 인간적인 것의 기반이지만 이념적으로 철저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송원장은 사회과학의 시대도 저물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영향력은 동반하락 중이다. 테크놀로지와 포스트 휴머니즘의 정신이 그 뒤를 이을지는 미지수다. 어쩌면 우리는 지배적 정신이 부재한 상태, 지적 아노미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미래에의 꿈이 사라지고 돈으로 환산되는 즉각적 효용만능의 세태가 확대일로다. 젊은 세대에게 조언을 해줄 여유를 갖기 전에 스스로 의 혼란과 어지러움을 곧추세우기도 힘겨운 시대를 맞고 있다.

문학적 상상, 사회과학적 분석, 현실문제에의 개입은 한 사람의 정신 속에 공존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의 세계, 사회학자의 몫이 언론인의 역할과 같지 않은 이유다. 송원장은 이 세 영역을 평생 움켜쥐고 살았다. 현실적인 쟁점들을 다루는 컬럼니스트의 역할을 중시하면서 작가적 상상력과 사회학적 분석력을 꼭같이 견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한 정신 긴장을 견디고 사유의 경계를 예리하게 관리하는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원한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이자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발제의 처음과 끝에서 김소월의 산유화를 인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사여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지천에 꽃이 피는 4월의 자연을 노래한 듯 하지만 학자로서의 삶을 비유하는 시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피는 꽃, 제가 좋아 산에 사는 꽃의 모습이 꼿꼿하게 자기 정신세계를 지켜온 지식인의 모습과 닮았다. 그 꽃이 얼마나 향기로울지 어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지는 본질이 아니다. 꽃은 그 자체로 꽃인 것이다.

‘내 인생은 복되었다’는 말을 발제의 앞뒤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다. 말 그대로 그의 인생은 남부러워 할 정도로 복되다. 내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배가 아프다’고 표현했지만 정말 배아플 정도로 그의 학문적 성취와 사회적 존재감은 동년배의 누구보다도 대단하다. 이제는 하산하는 시대를 살아야 하는 만큼 ‘글없는 송호근’과 대면할 준비를 하라 조언했다. 하지만 사실 그 주문은 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꼭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한림대 도헌학술원 이 내실있는 지적 플랫폼으로 자리잡아 가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4년전 송원장 부탁으로 쓴 ‘도헌학술원’ 현판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학내외 일로 분주할 이사장과 총장이 포럼에 함께 자리하여 격의없는 토론을 주고 받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학내의 교수들과 지역의 유지들이 함께 문화와 역사, 인생을 논하는 장이 한림대 바깥으로도 확대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한림대 도헌학술원이 새로운 대학의 한 모델로 자리잡고 지속적으로 발전해가기를 기원한다.

activities

서울대 통평원 20주년

그제 4월 16일 저녁,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창립 2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설립을 주도한 정운찬 전 총장을 비롯하여 오랜만에 뵙는 학교 안팎의 여러분들을 반갑게 만났다. 2006년 4월 초대 소장으로 임명된 후 다섯번의 임기를 연임하면서 내 50대의 전부를 쏟아부은 곳이기에 그 20년의 족적을 되돌아보는 자리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남북관계는 모순적이다. 가까우면서 멀고 신뢰를 원하면서 불신한다. 정파와 이념, 이해관계에 따른 남남갈등도 심하다. 균형잡힌 시야와 종합적 판단이 절실한 분야인데 현실은 그와 정반대다. 열린 토론과 객관적 분석이 쉽지 않고 신뢰가능한 데이터도 부족하다. 나는 서울대학교가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미력이나마 그 사명을 감당하고자 안깐 힘을 썼다.

2007년부터 시작된 통일의식조사, 2008년부터 발표된 남북통합지수, 2009년부터 추진한 평화인문학, 2012년부터 조사한 북한 사회변동 등은 그런 노력의 사례들이다. 그 분석자료와 문제의식이 지금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공유되고 있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낀다. 한동안 낯설어하던 ‘통일평화’란 말이 익숙해진 것도 통일과 평화가 병행연계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10년의 기간, 힘들었지만 보람된 시절이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꿈같은 일들을 추진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눈덮인 금강산에서 워크샵을 열기도 했고 평양의 병원과 영유아 시설, 학교도서관을 돕는 일로 여러 기관과 협력체계를 모색하기도 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대-김일성대-연변대의 공동학술회의가 성사되고 그 정례화를 상의할 때의 감격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있다.

안타깝게도 이 모두 과거사가 되었다. 오늘 남북관계는 냉전시대를 방불할 정도로 철저히 단절되었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은 민족관계나 통일목표 자체를 부정하기에 언제 새로운 기회가 열릴지도 막막하다. 전세계가 전쟁의 비극 앞에 첨단무기를 자랑하고 핵무력을 선망하는 상황에서 평화의 깃발도 외면당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연구원을 이끌어가는 김범수 원장을 비롯한 후배교수들에게 격려와 성원을 보낸다.

사방이 막혀 있을 때 하늘을 보라 했다. 나는 요즘 1930년대를 종종 떠올린다. 일본제국이 만주와 동남아를 아우르는 대동아공영권의 맹주로 승승장구할 때, 독립의 가능성이 희미해지던 그 때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선각자들이야말로 푸른 하늘을 쳐다본 자들이 아니었을까. 냉정한 분석, 치밀한 계산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희망하는 미래, 포기할 수 없는 꿈의 진정성을 재확인해야 할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다.

activities

강연회, 예수의 길

“마지막 고언”이라는 타이틀을 단, 한완상 출판기념 강연회가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있었다. 마지막 강연이 될지 몰라 작은 자리를 준비했다는 따님의 연락을 몇 주 전 받았을 때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나 생각했고 무거운 마음으로 종로5가로 향했다. 그런데 행사장은 어느 유명 인사의 출판기념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만원이었고 열기도 뜨거웠다. 한 교수님의 거동은 다소 불편했지만 목소리와 말씀은 여전히 또렷하고 열정적이었다.

​”예수의 길을 가라” – 강연의 제목이자 책의 핵심화두다. 스스로 개척해서 수십년간 봉직한 새길교회 설교를 중심으로 그간의 메시지들을 정리한 책인데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만난 성령님, 내가 만난 예수님’으로 구성된 목차를 보면 전형적인 신앙 간증집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책의 띠지에도 “나는 민중사회학자이지만 한국교회 신학자로 평가받고 싶다. 그리고 영원한 ‘예수따르미’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적혀있다.

​사실 한교수님의 글에서 예수의 삶이 언급되지 않는 걸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모든 사회현상에 예수의 시각을 적용했다. 어릴 적 내면화한 신앙의 힘이 그 바탕이 되었을터지만 본의 아니게 학계를 떠나게 된 것도 그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엄혹한 남북관계, 이념문제를 다루는 현장에서도 그는 예수정신을 강조했다. 교계는 물론이고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를 넘어 현실을 모르는 낭만주의자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늘 꿋꿋하게 지론을 견지해왔다.

​꽤 오래전 ‘평화’를 주제로 하는 어느 심포지엄 자리에서 나는 한완상과 라인홀드 니부어를 비교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말로 유명한 니부어는 정치영역에서 지나친 도덕론이 갖는 한계와 위험을 지적했다. 그에 반해 예수정신에 입각한 ‘우아한 패배’를 옹호하는 한교수님의 관점은 종교적 윤리의 한 전형일 수 있다. ‘심정윤리’와 ‘책임윤리’를 준별해야 한다는 막스 베버의 견해에 공감하는 나로서 당시 비판적인 견해를 발표했던 기억이 있다.

​한교수님께 축하 인사를 드렸다. 반갑게 손을 잡으시면서 자네 작품을 책 앞에 넣었노라 했다. 작년 90 생신 무렵 학교와 교계 등에서 도움을 입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저녁자리를 준비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인연과 사랑을 이어온 나는 화선지에 한교수님 얼굴과 그간 강조해온 화두들을 쓴 작품을 만들어 증정했다. 감사의 말과 함께 “평화의 땅 하나님 나라가 속히 오기 바라며”란 바램을 적어서..

​이후 몇 분으로부터 한교수님 댁 거실에 그 족자가 걸려있고 한교수님이 자랑스러워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유명한 김병종 화가의 작품이 걸려있는 그곳에 감히 어울릴 수준일 리 만무하지만 내 마음을 읽어주신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책을 펼치니 과연 내지의 첫 페이지에 그림이 실려있다. 반갑고 고마왔는데 원래 족자의 상하비율을 조정한 듯 글자가 너무 붙어있고 낙관의 붉은 색이 드러나지 않아 편집이 다소 아쉬웠다.

​이만열, 김용덕, 이삼열 교수님 등 오랫만에 얼굴을 보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동기인 권태선 이사장도 논평자로 참석해서 반갑게 만났다. 스스로 그 자리가 계면쩍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진솔한 의견표명이 와닿았다. 젊은 세대의 참석자가 별로 보이지 않아 ‘청년 예수’를 내걸기엔 너무 고령화한 한국교계의 현주소를 보는 듯 했다. 종로5가, 기독교회관의 옛역사는 기억할 사람을 찾기 힘들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가르치는 시대가 되었다. 예수의 길을 가라 – 강연장 플래카드가 어딘지 낯설게 다가왔다.

activities

연구실 정리

여러 날에 걸쳐 연구실을 정리했다. 2월 말로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내 공식적 활동이 끝나기 때문이다. 연구실의 책은 대부분 광주과학기술원 융합교육연구센터에 기증했다. 각종 복사물, 임명장, 제안서, 감사패 등은 과감히 폐기했다. 손으로 할 일과 연락처를 빼곡이 적어둔 1990년대의 수첩들, 이런 저런 사정을 담아 주고받은 편지, 오랜 기간 정들었던 필기구 등은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필요없는 낡은 자료들도 그것을 입수하느라 치룬 시간과 애씀, 추억과 애환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80년대 후반 처음으로 해외 한국학회의를 개최하느라 고심했던 기획자료들, 처음으로 만난 북한 학자들과의 회합에서 주고받은 논문들, 여러 나라의 연구소들을 방문하면서 받았던 기념품들 – 크건 작건 내겐 소중한 기억이 담긴 품목들이어서 개인 박물관을 만든다면 모두 진열해야 마땅한 것들이다.

그래도 이제 버려야 한다. 연구실 없는 생활을 새롭게 살아내야 한다. 돌이켜보면 40년이 넘도록 나는 5-7평 남짓한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서울대를 위시하여 내가 거쳐온 모든 대학들, 연구교수로 나가있던 해외의 대학들도 연구실 중심의 생활은 꼭같았다. 아마도 집보다 연구실서 보낸 절대시간이 더 많았을 터이니 가히 연구실 속 인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연구실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 그래야 가벼워질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연구실 없는 생활에 대한 약간의 허전함과 염려도 없진 않다. 당분간 아침에 일어나면 어딜 갈까 서성이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수업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함으로 극복할 일이다. 강의는 즐거움이면서 고통이었다. 특히 펜데믹과 인공지능의 충격이라는 미증유의 격변을 겪으면서 담당한 과학기술대학에서의 강의는 흥미로우면서 부담스러웠고 가르치며 배우는 현장이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대학에서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을 함께 이야기한 뜻이 어렴풋 느껴질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