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세상이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보내세요 함께 못가서 정말 미안해요’ – 한 때 선망의 도시였던 로스앤젤레스가 작년엔 대형산불로 올해는 격렬한 시위충돌로 세계인을 놀라게 하고 있다. 코로나 펜데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동남아에서 전해지는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 소식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갑자기 키오스크 주문으로 바뀌고 사람대신 로봇이 등장한 동네 식당에서 놀라고 나날이 복잡해져가는 까페 메뉴들 앞에서 당황한다. 날로 진화하는 인공지능에 놀라다가 그런 비서를 손바닥에 두고 사는데 익숙해져가는 자신에게 놀란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 – 나쁜 게 아니다. 놀랄 수 있기에 위험을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다. 그런 실용적 도움을 떠나서도 정서를 격동시키는 놀람은 그 자체가 무미건조함을 해소하는 활력이 된다. ‘자주 놀라는 것’이 활발한 삶을 가능케 하는 뇌과학적 근거도 분명하다는 주장도 들은 바 있다. 실제로 놀라움을 느낄 때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어떻게 할 것인가 숙고하며 내 행동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서일까 한 시인은 ‘절대로 달관하지 말고 아이처럼 울고 웃으라’고 했다.
놀라움이란 익숙치 않은 외부자극으로 인해 뇌가 고조된 각성상태로 돌입한 것을 의미한다. 0.3 초의 짧은 시간 안에 이 자극의 위협 여부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상반된 두 반응이 분기된다. 안전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wonder 의 느낌, 경이로움의 정서반응이 뒤따른다. 이 경우 ‘몸은 편안, 뇌는 보상모드’라는 하이브리드 상태가 되어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가 강화된다. 반면에 자극이 위협이라고 판단되면 교감 신경이 활성화되고 회피 회로가 강화되며 스트레스를 높인다. 이런 반응은 wonder와는 구별되는 fear, 즉 두려움의 정서를 가져온다.
이런 뇌과학적 설명은 흥미로운 점을 보여준다. 우리의 정신작용 전반이 뇌의 전기화학적 신경회로의 기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외부자극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부자극 그 자체보다도 이것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주관적 인지체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판단 과정에 누적된 경험과 장기기억, 세상의 해석모델이 필수적인 참조점으로 활용되는 것인만큼 인간의 행동반응에 사회문화적인 요인도 포함된 복합적 변수가 작용함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나라 안팎에서 들려오는 뉴스가 대체로 걱정스럽다. fear 보다 wonder 의 감정을 원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다보니 점차 놀라움 자체로부터 스스로를 멀리 떼어놓고자 하는 심경도 느낀다. 놀라운 외부자극에 짐짓 눈을 감음으로써 마음의 동요를 회피하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해법일 수는 없다. 의도적인 무관심은 평정심을 강화하기보다 정서적 대응력 약화와 회복력의 감퇴로 이어질 뿐이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놀라움의 정서에 좀더 민감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외부자극을 긍정적으로 의미부여하는 독해력을 강화할 일이다. 어차피 의외성이 커지는 환경이라 하더라도 경탄과 경이로움으로 독해하는 것이 당혹과 분노의 감정소모에 빠지지 않게 할 면역력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놀람’을 찾아 기록해 보는 것이 작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를 들뜨게 했던 보물찾기 시간처럼, 지나치기 쉬운 놀람과 감동의 소재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찾아내려 노력해 볼 일이다. 일상 속에서 경이로움을 확인하는 것은 곧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상통한다. ‘자기 전 일기쓰기’ 같은 의무적 숙제하기가 아니라 일상의 주변에 널려있는 다양한 아름다움과 신선한 파장에 놀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할 터이다. 스스로 무감각해지고 싶은 불확실한 격동의 시대에 경이로움을 찾아 나서는 보물찾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