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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공동체

6월 1일 “격동의 시대 – 통일과 평화를 어떻게 재결합할 것인가”를 주제로 내건 학술 심포지엄이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이 주최했다. 트럼프 2기 출범으로 심화된 세계적 변동과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이후 우리가 처하게 된 새로운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 첫 세션의 과제였다. 둘째 세션은 최근 남북한 2국가론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 평화공존을 새 목표로 내걸자는 일각의 주장 속에서 통일론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를 다루었다. 세번째 세션은 기존의 민족공동체 방안을 대신할 어떤 비전이 가능할지를 탐색하는 대안모색이 주 관심이었다. 이영선 통일과나눔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통일과 평화의 두 화두를 묶어내기 위한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했고 150여 청중들이 시종 경청하여 몰입도가 높은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윤영관 아산재단 이사장은 현재의 상황을 ‘지정학 시대의 귀환’으로 규정하고 향후 가능한 세 시나리오를 소개한 후 그것이 세계질서와 동아시아, 그리고 한반도에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를 설명했다. 이전 질서로의 회귀, 신냉전, 세력권 정치 중 어떤 미래가 전개되든 한국에겐 큰 도전이 되리라 예상하면서 특히 한반도문제가 국제정치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국민들의 통일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형중 박사는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핵능력 증진으로 북한의 위상과 강제력이 더욱 강화된 조건 속에서 ‘북한 우위 적대병존관계 수립’ 전략으로 해석했다. 적대성은 향후 북한체제존속의 한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고, 그 맥락에서 평화공존은 실현불가능한 전망이라고 했다. 평화적 2국가론은 허상이며 억제와 위기관리역량을 재설계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마상윤 교수, 민태은 박사가 참여한 토론에서는 향후 세계질서 변동을 해석하는 제 시나리오의 적절성 여부, 특히 세력권정치의 전개가능성, 지정학의 회귀라는 표현의 정확한 내용, 한국문제의 국제화라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거래주의적 동맹관이 동맹약화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등이 논의되었다. 박형중 박사에 대해선 과연 북한의 대남적대성이 고정불변일 것이라 단정할 수 있는지, 평화공존 불가능론은 너무 구조적 변수만을 강조하는 편향이 아닌지, 이런 상황에서도 신뢰의 접점을 찾고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두 번째 세션에서 김병연 교수는 경제통합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통일론을 제시했다. 경제협력에서 경제통합을 거쳐 통일로 가는 모델이 북한에게도 실익이 크고 한국의 부담도 크지 않다고 했다. 북한의 현 경제상황은 매우 구조적으로 취약하기에 체제안정을 위해서라도 경제협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가능성을 주목한다. 다만 경제협력은 위임형 제도화를 수반해야 하고 공동의 규칙을 발전시킴으로써 북한이 시장화를 넘어 시장경제화로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전우택교수는 현 북한이 지도자의 강국욕망과 잘살려는 인민의 욕망이 부딪치는 상태로 파악했다. 시장, 사상, 문화 전반에 걸친 가혹혼 통제가 심화되는 현실은 그 자체가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고 고통과 불안정을 키울 것으로 판단했다. 통일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즉 평화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운 우리의 대응력, 입체적이고 모순을 포용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토론에서 양문수 교수는 경제통합의 실제 유형도 역사적으로 다양했음을 설명하면서 한반도에서의 통합개념을 좀더 세분화, 정교화할 필요를 지적했다. 또 동구권에서 확인된 경제통합이론이 한반도에도 충분히 적용가능한지, 북한이 과연 통합이라는 개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시됨을 지적했다. 김성경 교수는 1국가 1체제를 상정하는 통일개념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두 국가론에 대해 좀더 전향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21세기 첨단기술이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도 좀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첨언했다.

세 번째 세션에서 나 (박명규 교수)는 현 시기를 ‘기본합의서 체제의 파탄’ 국면이라 설명했다. 미중대립과 북러밀착, 북한 핵보유 자신감 등을 배경으로 북한은 1991년 이후 남북관계를 지탱해온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원칙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한국에서도 대북정책이나 남남갈등을 조율하는 전략적 대원칙으로서의 위상과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다. 같은 민족이란 정체성이 약화되고 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간주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동시에 북한에 대한 거부감과 안보불안은 증대하고 있어 기존방안을 유지하기도 2국가론을 수용하기도 어려운 딜렘마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착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선 민족공동체에 기반한 기존 시각을 ‘코리아 공동체’ 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제안했다. South Korea와 North Korea라는 두 현존하는 국가성을 인정하는 새 통합구상으로 바꾸자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남북간 특수관계도 역사문화적 공동성보다 분단국가관계로 재조정되고 그에 기반하여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모색하는 형태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코리아 공동체는 단일민족국가형 통일체를 지향하기보다 경제, 문화, 재난, 보건, 안보 등 여러 영역별로 다차원의 통합이 병행발전는 복합공동체가 되어야 함도 언급했다. 박영호 박사, 조동호 교수, 김병로 교수, 류경아 박사 등 패널토론자들은 대체로 큰 방향에 공감하면서도 실질적인 대안이 되기 위해선 어려 측면에서 좀더 다듬어져야 할 쟁점들이 있음을 지적했다.

전반적으로 심포지엄의 짜임새는 좋았고 발제와 토론도 밀도가 있어서 휴식도 없이 계속된 4시간이 길지 않게 느껴졌다.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세가지 쟁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지정학의 도래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국제정치적 전략과 남북관계적 논리가 어떻게 종합적 대응력으로 재구축될 수 있을지가 그 하나다. 동맹-자주, 평화-통일을 나누어 양자택일하려는 편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중요해졌다. 둘째는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공세적으로 볼 것인가 방어적으로 볼 것인가의 쟁점이다. 양면이 다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양자를 전제한 위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셋째는 경제통합 구상이나 코리아공동체 비전에서 보듯 급진적 통일보다 삶과 연동되는 ‘통합’을 더욱 주목할 필요성이다. 이런 통합형 구상을 어떻게 전략과 정책 차원으로 체계화할 것인가가 미래의 주요한 과제가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관계상 이런 쟁점들이 좀더 예리하게 토론되고 예각화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은 아쉬웠다. 향후 동북아 지정학의 향방, 북한과의 평화공존 가능성, 남북 경제통합의 전망, 코리아 공동체의 적실성 등에 대한 밀도있는 논의는 후속 과제로 남겨진 셈이다. 향후 더많은 논쟁과 검토를 거쳐 이런 쟁점들이 다듬어지기 기대하면서 그러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파적 대립, 단순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한 지성적 성찰이 더욱 절실하리란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코리아 공동체’라는 화두가 꽉막한 남북관계를 열어가는 대안으로 발전해갔으면 하는 희망을 더욱 갖게 되었다. 2차대전을 거치면서 심화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을 넘어서 평화와 번영을 향한 유럽공동체 꿈을 꾸었던 장 모네의 구상이 실현되는데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음을 생각하며, 긴 호흡과 폭넓은 토론, 유토피스틱스적 전망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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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의 역사박제

5월 21일 고등학교 동창들과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오전엔 다산생가와 기념관 일대를 둘러보고 오후엔 동구릉을 답사하는 일정이었다.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였는데 야외에서 하루 종일 걷는데는 오히려 천상맞춤이었다. 두 곳 모두 오래 전에 와 본 곳이지만 처음 온 듯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느낀 바가 적지 않다

남양주 마재마을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마을로 그가 오랜 유배 생활 끝에 다시 돌아와 생을 마감한 곳이다. 1986년에 복원된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떨어져 있는 구조로 안마당을 넓게 쓰도록 설계한 중부지방의 전형적 양반집 모습이다.기념관에는 다산의 대표 저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 <흠흠신서>의 사본과 수원 화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가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문화관은 실학과 관련한 유무형 자료와 정보를 수집·보존·연구·전시하는 다목적 복합 문화 공간이다. 두물머리를 앞에 둔 다산 유적지는 주변 풍광도 수려하여 산책하기에 퍽 좋은 장소다. 여유당 뒤편의 다산 묘소는 2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추모 공간이 되었다.

다산 집안은 8대가 과거에 합격한 명문가였다. 그 부친 정재원은 참의공 정시윤의 4대종손이었고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지적 탐구열이 뛰어나 실학은 물론이고 서학도 선구적으로 수용한 인물들이 다수 이 집안과 연결되어 있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던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었고 그를 매개로 성호 이익의 실학을 이어받았다. 다산은 남인학파로 꼽히지만 실제적인 사고와 경험적 지식을 중시했다. 다산초당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해 1표2서의 대작을 남겼고 적지 않은 편지와 시문으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다산의 사상을 집대성한 위당 정인보는 다산에 대한 연구가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라고 했다. 그가 자녀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글은 오늘날 교육적으로도 활용가치가 높아 다산유적지 거리 곳곳에 그의 글이 새겨진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다산유적지는 그 인근에 있는 마재성지와 함께 둘러보아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의 형제들의 생애까지 포괄해야 다산의 고민과 지성, 삶의 궤적들이 입체적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 마재성지는 셋째 형 약종과 그 가족의 순교를 기념하는 곳인데 다산유적지와 마재성지가 함께 소개되는 안내서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쉽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한 조선 천주교의 초기 지도자였다. 그 자신이 신앙을 지켜 순교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부인 유조이 세실리아, 장남 정철상 카를로, 차남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이 모두 신유사옥과 기해박해에서 순교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가족 모두가 성인으로 시복되었고 마재성지는 한국천주교의 대표성지가 되었다. 다산유적지와 마재성지의 가깝지만 먼 공간구성은 약종과 약용의 엇갈린 생애만큼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오후에 들러 본 동구릉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서울 근교에 50만평이 넘는 왕조의 묘역이 이처럼 잘 관리되고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조선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그의 유언에 따라 함흥의 억새풀로 덮여있다는 설명이 흥미로왔다. 이성계로서는 그가 성장한 함경도 변경지방에의 그리움을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500년 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왕릉이 그 이후 조성된 왕과 왕비의 묘역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아홉 릉이 크기나 형태에서 너무 유사해서 설명을 읽지 않으면 누구의 릉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니 조선왕조 역사에서 태조의 유훈이라는게 큰 힘을 발휘한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선조가 묻힌 목릉 앞에서 조선왕조를 망친 임금이 저렇게 대우받아도 되는가라는 한 친구의 일갈이 잠을 깨우듯 와 꽃혔다. 그러고보니 임진년 왜란과 병자년 호란을 겪고 조선사회가 극도의 피폐상태로 몰렸던 시기의 국왕, 당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학계의 평가가 좋지 않은 선조인데 죽은 이후의 무덤은 오히려 태조의 릉보다 더 좋아 보일 정도다. 유일한 외국 출신 국왕이었던 현종의 묘 숭릉, 탕평책을 실시한 영조의 원릉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여서 마치 복제한 듯 비슷하다. 죽음 앞에선 살아서의 잘잘못도 모두 묻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당대의 치적이나 세평과는 무관하게 국왕이란 존재에 대한 의례와 장법만이 존중된 결과일지 모르겠다.

동구릉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이곳을 둘러보는 외국인들은 조선왕조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을 어떻게 유추할까? 왕조와 왕실에 대한 애착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한국사회인데 지금도 오래전 국왕의 제사가 계속되는 이 살아있는 문화공간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K-Culture 가 주목받으면서 태종과 문종과 선조와 현종의 구체적 역사와 스토리는 사라지고 국왕과 황후, 예법이라는 문화적 코드만 부각될 수도 있다. 하긴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로마의 콜로세움의 여행에서도 시간과 스토리는 배경으로 박제되는게 보통이니 왕조의 무덤 앞에서 명말선초의 14세기와 풍전등화의 16세기, 영정조의 18세기 간 차이를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그 여러 가지 소회를 그림으로 담고 싶어 화선지를 폈다. 숭릉의 단아한 풍경을 수묵으로 그리고 이런 발문을 썼다. “오월의 신록, 유네스코 문화유산, 왕조의 잔재와 영화, 권력무상, 역사의 진전 —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당연하지만 이 물음 속에는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담겨있다. 스토리와 진정성이 박제화되는 것은 먼 역사에만 해당되는게 아니다. 온갖 과거가 이념과 정치의 잣대로 재단되는 오늘의 역사오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스토리가 빠진 문화적 기호, 미학적 대상으로 유적을 만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래도 유적지의 참된 의미는 삶의 스토리, 그 속에 담긴 진정성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다산유적지도 마재성지도 동구릉의 건원릉과 숭릉도 제 각각의 존재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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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와 지식인

4월 22-23일 도헌학술원 포럼 참석차 춘천에 다녀왔다. 70여권의 책, 710여편의 컬럼에 여러권의 소설까지 내 놓은 이 시대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지식인인 송호근 원장이 학자로서의 반세기를 되돌아보면서 그 세대의 정신사적 궤적을 성찰하는 자리였다. 나는 논평자로 초청을 받아 참여했지만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친구이자 동료로서 축하와 공감의 마음으로 함께 했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송교수는 자신을 베이비붐세대, 좀더 구체적으로는 70년대 경험에 그 정신적 뿌리를 내린 세대로 표현했다. 유신시대에 대학을 다니고 80년대의 격변과 환희를 맞보고 90년대의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경험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채 IMF 경제위기를 겪었지만 새로운 변화를 일구어낸 역동적 시대를 살아온 세대이다. 실제로 그가 쓴 많은 책과 컬럼은 이 시대가 보여준 다양한 애환과 갈등의 면면들을 다루고 있다.

당연 나도 같은 세대에 속한다. 이 세대는 문학으로부터 세상과 인간, 역사를 보는 눈을 키웠다는 송원장의 발표에 공감했다. 나 역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도 소설과 시, 종교 서적에 더 끌렸던 기억이 있다. 80년대 후반 ‘사회과학의 시대’가 도래했고 한편 그 변화를 환영했지만 이청준, 최인훈, 황석영, 신경림의 정서가 마르크스와 사회구성체 논리, 민중해방과 계급의식을 강조하던 사회변혁적 사유와 같을 수는 없었다. 그 거리감은 인간적인 것의 기반이지만 이념적으로 철저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송원장은 사회과학의 시대도 저물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영향력은 동반하락 중이다. 테크놀로지와 포스트 휴머니즘의 정신이 그 뒤를 이을지는 미지수다. 어쩌면 우리는 지배적 정신이 부재한 상태, 지적 아노미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미래에의 꿈이 사라지고 돈으로 환산되는 즉각적 효용만능의 세태가 확대일로다. 젊은 세대에게 조언을 해줄 여유를 갖기 전에 스스로 의 혼란과 어지러움을 곧추세우기도 힘겨운 시대를 맞고 있다.

문학적 상상, 사회과학적 분석, 현실문제에의 개입은 한 사람의 정신 속에 공존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의 세계, 사회학자의 몫이 언론인의 역할과 같지 않은 이유다. 송원장은 이 세 영역을 평생 움켜쥐고 살았다. 현실적인 쟁점들을 다루는 컬럼니스트의 역할을 중시하면서 작가적 상상력과 사회학적 분석력을 꼭같이 견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한 정신 긴장을 견디고 사유의 경계를 예리하게 관리하는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원한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이자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발제의 처음과 끝에서 김소월의 산유화를 인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사여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지천에 꽃이 피는 4월의 자연을 노래한 듯 하지만 학자로서의 삶을 비유하는 시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피는 꽃, 제가 좋아 산에 사는 꽃의 모습이 꼿꼿하게 자기 정신세계를 지켜온 지식인의 모습과 닮았다. 그 꽃이 얼마나 향기로울지 어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지는 본질이 아니다. 꽃은 그 자체로 꽃인 것이다.

‘내 인생은 복되었다’는 말을 발제의 앞뒤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다. 말 그대로 그의 인생은 남부러워 할 정도로 복되다. 내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배가 아프다’고 표현했지만 정말 배아플 정도로 그의 학문적 성취와 사회적 존재감은 동년배의 누구보다도 대단하다. 이제는 하산하는 시대를 살아야 하는 만큼 ‘글없는 송호근’과 대면할 준비를 하라 조언했다. 하지만 사실 그 주문은 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꼭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한림대 도헌학술원 이 내실있는 지적 플랫폼으로 자리잡아 가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4년전 송원장 부탁으로 쓴 ‘도헌학술원’ 현판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학내외 일로 분주할 이사장과 총장이 포럼에 함께 자리하여 격의없는 토론을 주고 받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학내의 교수들과 지역의 유지들이 함께 문화와 역사, 인생을 논하는 장이 한림대 바깥으로도 확대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한림대 도헌학술원이 새로운 대학의 한 모델로 자리잡고 지속적으로 발전해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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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통평원 20주년

그제 4월 16일 저녁,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창립 2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설립을 주도한 정운찬 전 총장을 비롯하여 오랜만에 뵙는 학교 안팎의 여러분들을 반갑게 만났다. 2006년 4월 초대 소장으로 임명된 후 다섯번의 임기를 연임하면서 내 50대의 전부를 쏟아부은 곳이기에 그 20년의 족적을 되돌아보는 자리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남북관계는 모순적이다. 가까우면서 멀고 신뢰를 원하면서 불신한다. 정파와 이념, 이해관계에 따른 남남갈등도 심하다. 균형잡힌 시야와 종합적 판단이 절실한 분야인데 현실은 그와 정반대다. 열린 토론과 객관적 분석이 쉽지 않고 신뢰가능한 데이터도 부족하다. 나는 서울대학교가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미력이나마 그 사명을 감당하고자 안깐 힘을 썼다.

2007년부터 시작된 통일의식조사, 2008년부터 발표된 남북통합지수, 2009년부터 추진한 평화인문학, 2012년부터 조사한 북한 사회변동 등은 그런 노력의 사례들이다. 그 분석자료와 문제의식이 지금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공유되고 있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낀다. 한동안 낯설어하던 ‘통일평화’란 말이 익숙해진 것도 통일과 평화가 병행연계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10년의 기간, 힘들었지만 보람된 시절이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꿈같은 일들을 추진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눈덮인 금강산에서 워크샵을 열기도 했고 평양의 병원과 영유아 시설, 학교도서관을 돕는 일로 여러 기관과 협력체계를 모색하기도 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대-김일성대-연변대의 공동학술회의가 성사되고 그 정례화를 상의할 때의 감격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있다.

안타깝게도 이 모두 과거사가 되었다. 오늘 남북관계는 냉전시대를 방불할 정도로 철저히 단절되었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은 민족관계나 통일목표 자체를 부정하기에 언제 새로운 기회가 열릴지도 막막하다. 전세계가 전쟁의 비극 앞에 첨단무기를 자랑하고 핵무력을 선망하는 상황에서 평화의 깃발도 외면당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연구원을 이끌어가는 김범수 원장을 비롯한 후배교수들에게 격려와 성원을 보낸다.

사방이 막혀 있을 때 하늘을 보라 했다. 나는 요즘 1930년대를 종종 떠올린다. 일본제국이 만주와 동남아를 아우르는 대동아공영권의 맹주로 승승장구할 때, 독립의 가능성이 희미해지던 그 때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선각자들이야말로 푸른 하늘을 쳐다본 자들이 아니었을까. 냉정한 분석, 치밀한 계산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희망하는 미래, 포기할 수 없는 꿈의 진정성을 재확인해야 할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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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 예수의 길

“마지막 고언”이라는 타이틀을 단, 한완상 출판기념 강연회가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있었다. 마지막 강연이 될지 몰라 작은 자리를 준비했다는 따님의 연락을 몇 주 전 받았을 때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나 생각했고 무거운 마음으로 종로5가로 향했다. 그런데 행사장은 어느 유명 인사의 출판기념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만원이었고 열기도 뜨거웠다. 한 교수님의 거동은 다소 불편했지만 목소리와 말씀은 여전히 또렷하고 열정적이었다.

​”예수의 길을 가라” – 강연의 제목이자 책의 핵심화두다. 스스로 개척해서 수십년간 봉직한 새길교회 설교를 중심으로 그간의 메시지들을 정리한 책인데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만난 성령님, 내가 만난 예수님’으로 구성된 목차를 보면 전형적인 신앙 간증집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책의 띠지에도 “나는 민중사회학자이지만 한국교회 신학자로 평가받고 싶다. 그리고 영원한 ‘예수따르미’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적혀있다.

​사실 한교수님의 글에서 예수의 삶이 언급되지 않는 걸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모든 사회현상에 예수의 시각을 적용했다. 어릴 적 내면화한 신앙의 힘이 그 바탕이 되었을터지만 본의 아니게 학계를 떠나게 된 것도 그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엄혹한 남북관계, 이념문제를 다루는 현장에서도 그는 예수정신을 강조했다. 교계는 물론이고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를 넘어 현실을 모르는 낭만주의자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늘 꿋꿋하게 지론을 견지해왔다.

​꽤 오래전 ‘평화’를 주제로 하는 어느 심포지엄 자리에서 나는 한완상과 라인홀드 니부어를 비교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말로 유명한 니부어는 정치영역에서 지나친 도덕론이 갖는 한계와 위험을 지적했다. 그에 반해 예수정신에 입각한 ‘우아한 패배’를 옹호하는 한교수님의 관점은 종교적 윤리의 한 전형일 수 있다. ‘심정윤리’와 ‘책임윤리’를 준별해야 한다는 막스 베버의 견해에 공감하는 나로서 당시 비판적인 견해를 발표했던 기억이 있다.

​한교수님께 축하 인사를 드렸다. 반갑게 손을 잡으시면서 자네 작품을 책 앞에 넣었노라 했다. 작년 90 생신 무렵 학교와 교계 등에서 도움을 입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저녁자리를 준비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인연과 사랑을 이어온 나는 화선지에 한교수님 얼굴과 그간 강조해온 화두들을 쓴 작품을 만들어 증정했다. 감사의 말과 함께 “평화의 땅 하나님 나라가 속히 오기 바라며”란 바램을 적어서..

​이후 몇 분으로부터 한교수님 댁 거실에 그 족자가 걸려있고 한교수님이 자랑스러워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유명한 김병종 화가의 작품이 걸려있는 그곳에 감히 어울릴 수준일 리 만무하지만 내 마음을 읽어주신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책을 펼치니 과연 내지의 첫 페이지에 그림이 실려있다. 반갑고 고마왔는데 원래 족자의 상하비율을 조정한 듯 글자가 너무 붙어있고 낙관의 붉은 색이 드러나지 않아 편집이 다소 아쉬웠다.

​이만열, 김용덕, 이삼열 교수님 등 오랫만에 얼굴을 보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동기인 권태선 이사장도 논평자로 참석해서 반갑게 만났다. 스스로 그 자리가 계면쩍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진솔한 의견표명이 와닿았다. 젊은 세대의 참석자가 별로 보이지 않아 ‘청년 예수’를 내걸기엔 너무 고령화한 한국교계의 현주소를 보는 듯 했다. 종로5가, 기독교회관의 옛역사는 기억할 사람을 찾기 힘들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가르치는 시대가 되었다. 예수의 길을 가라 – 강연장 플래카드가 어딘지 낯설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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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정리

여러 날에 걸쳐 연구실을 정리했다. 2월 말로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내 공식적 활동이 끝나기 때문이다. 연구실의 책은 대부분 광주과학기술원 융합교육연구센터에 기증했다. 각종 복사물, 임명장, 제안서, 감사패 등은 과감히 폐기했다. 손으로 할 일과 연락처를 빼곡이 적어둔 1990년대의 수첩들, 이런 저런 사정을 담아 주고받은 편지, 오랜 기간 정들었던 필기구 등은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필요없는 낡은 자료들도 그것을 입수하느라 치룬 시간과 애씀, 추억과 애환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80년대 후반 처음으로 해외 한국학회의를 개최하느라 고심했던 기획자료들, 처음으로 만난 북한 학자들과의 회합에서 주고받은 논문들, 여러 나라의 연구소들을 방문하면서 받았던 기념품들 – 크건 작건 내겐 소중한 기억이 담긴 품목들이어서 개인 박물관을 만든다면 모두 진열해야 마땅한 것들이다.

그래도 이제 버려야 한다. 연구실 없는 생활을 새롭게 살아내야 한다. 돌이켜보면 40년이 넘도록 나는 5-7평 남짓한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서울대를 위시하여 내가 거쳐온 모든 대학들, 연구교수로 나가있던 해외의 대학들도 연구실 중심의 생활은 꼭같았다. 아마도 집보다 연구실서 보낸 절대시간이 더 많았을 터이니 가히 연구실 속 인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연구실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 그래야 가벼워질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연구실 없는 생활에 대한 약간의 허전함과 염려도 없진 않다. 당분간 아침에 일어나면 어딜 갈까 서성이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수업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함으로 극복할 일이다. 강의는 즐거움이면서 고통이었다. 특히 펜데믹과 인공지능의 충격이라는 미증유의 격변을 겪으면서 담당한 과학기술대학에서의 강의는 흥미로우면서 부담스러웠고 가르치며 배우는 현장이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대학에서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을 함께 이야기한 뜻이 어렴풋 느껴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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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2025년 12월 31일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은 옛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비교적 출입국이 원활했다. 하지만 자유롭고 편안하게 국경을 오가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생각에 이전보단 공항에서의 긴장감이 좀더 크게 다가왔다.

오는 비행기 안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일생을 다룬 영화를 봤다. 부제가 “목사, 스파이, 암살자”라고 붙어있다. 스릴러물 같은 느낌을 주려고 영화수입업자측에서 붙인 것이라는데 영화의 구성도 목사로서의 정체성이나 종교적 고뇌보다 히틀러 폭정에 저항하는 행동가로서의 본회퍼가 더 부각된 느낌이다. 대학시절 본회퍼의 책을 탐독하며 좋아했는데 그가 유니온 신학교 유학시절 뉴욕 할렘의 흑인교회에서 강한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는 사실, 피아노를 잘 치던 고전음악 애호가에서 재즈와 흑인영가에빠져드는 경험을 했다는 내용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가 ’주님은 교회나 종교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비단 독일 제국교회에 대한 비판만 아니라 미국의 블랙쳐치에서 확인되는 살아있는 영성에 영향받은 것일 수 있겠다 싶다.

영화를 보는 중 2026년을 맞이했다. 사실 태평양 상공을 날아오면서 시간도 변하는 중이었으니 정확히 언제 새해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쨋든 2026년은 이전보다 더 힘들고 염려스러운 상황이 도래하리라는 예감이 마음을 무겁게 했고 그래서인지 영화의 시대배경과 오늘의 현실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독일에 나찌즘을 찬양하기도 하는 극우세력이 급부상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독일의 재무장이 본격화되며 징병제가 추진되고 있는 현실이 1930년대 초반의 영화 속에서 겹쳐 보였다. 그 시절 나찌즘이 부지불식간에 학교, 종교, 문화, 예술 등 전 분야로 확산되고 전독일을 그 광풍 속으로 몰아넣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전례없이 속도가 빨라지는 오늘날의 상황은 더욱 위태로울 수 있을 터이다.

영화는 투사로서의 본회퍼 이미지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하지만 직접적인 정치투쟁가나 혁명가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책임성에 기반한 결단으로 그려진다. 히틀러 암살계획의 모의와 발각이라는 스릴러적 전율감을 흥미위주로 표현하기보다 그 전 과정에서 본회퍼를 견디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드러내려는 진지한 문제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감독은 디트리히 본회퍼를 당당하게 죽음으로 이끈 것은 바로 믿음이고 절대자 신 앞에 선 인간의 진지한 응답이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 나온 두 사람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그 하나는 본회퍼의 아버지 칼 본회퍼가 아들과의 대화에서 한 ’아직도 사람을 믿느냐?‘는 말이다. 빵만 주면 투표하는 사람들, 유태인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를 거침없이 내뱉는 사람들이 나찌의 광풍을 뒷받침하리라는 그 말은 현실 속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또 하나는 고백교회의 니뮐러 주교가 체포되기 전 강론에서 한 말이다. “나치가 사회주의자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기에 침묵했습니다. 나치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을 때도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란 이유로 침묵했습니다. 유대인을 잡아 갈 때도 나는 너무 늦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요. 나치가 나를 잡으러 올 때 나를 위해 대변해 줄 사람이 과연 남아 있을까요?”

흥미롭게도 미국의 트럼프를 추종하는 극우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미국의 민주당을 나치당과 일치시키고 민주당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히틀러 독재에 대한 본회퍼의 저항과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다. 트럼프 지지자이자 극우 기독교의 정치화에 큰 영향을 미친 저널리스트 에릭 메탁사스가 『본회퍼: 목사, 순교자, 예언자, 스파이』라는 책을 썼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흑인 공동체와 라틴계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오늘날의 정치적인 의도가 이 영화의 소비형태에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도 광화문 광장의 극우시위를 주도한 전광훈은 본회퍼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정치활동을 정당화했다. ’본회퍼의 길과 전광훈의 길‘이라는 시사논평이 실리는 웃픈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의 기독교 일각에서 독특한 영웅숭배, 특정 지도자 추종이 확산되는 현실이 이 영화와 기묘하게 오버랩되었다. 종교가 제도화되고 그것이 사회적 영향력을 뚜렷이 하게 될 때 외부로부터는 이용하려는 유혹이, 내부로부터는 힘을 과시하고픈 욕망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쓴 한 본회퍼 연구자는 영화가 본회퍼의 신학적 고민과 경건한 삶의 모습을 좀더 드러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본회펴가 초대 원장으로 사역했던 핑켄발데 신학원의 공동체적 생활, 즉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고 연주하고 축구도 하는 모습은 고백교회가 그런 삶을 통해 값비싼 은혜, 제자도, 원수 사랑, 홀로 있음, 함께 있음, 성경 읽기와 묵상, 기도, 섬김, 성찬의 중요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이었는데 다소 정치적 저항을 위한 훈련과정처럼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본회퍼가 종교없는 기독교를 주장한 것도 이런 유혹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일테다. 동시에 과연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기독교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는 여전한 숙제다. 뒤르켐이 말하는 ’시민종교‘의 형태로 전화하거나 요즘 말하는 가나안 신자를 떠올려볼 수 있겠지만 그것도 국가주의와 결합하거나 세속적 편리주의로 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말이다. 신학적 내면적 초월적 관심과 사회적 정치적 세속적 관심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치우치지 않을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그걸 찾아가는 길이 구도자의 삶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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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포럼 -헬싱키,반둥,한반도

2차대전 종전 80주년, 한국 해방 80주년, 반둥회의 70주년, 헬싱키 협정 50주년을 맞이한 2025년,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가 주관한 베를린 포럼이 Korea At a Crossroads 란 주제로 11월 19-21일간 열렸다. 이번이 여덟 번째인데 유럽 내 한반도 문제, 특히 평화와 통일에 관심을 가진 많은 학자, 전문가들이 모이는 뜻깊은 행사다. 유럽도, 한반도도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모두가 공유하는 가운데 노학자와 새 세대의 젊은 연구자들이 함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열기가 뜨거웠다.

반가운 분들을 만나는 기회가 되어 개인적으로 더 기뻤다. SIPRI 소장을 역임한 평화연구자 Dan Smith, 주한 독일대사를 지냈고 내가 서울대 강연자로 초청한 바 있던 Nobert Bass 박사, Korea World Forum에서 자주 만났던 전 유럽의회 의원 Glyn Ford, 유엔인권 한국사무소장을 역임한 UNHCR 안윤교 전문관, 임상범 주독일 대사 등과 반가운 인사를 했다. 특히 제9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으로 이번 행사를 공동 호스트하기 위해 먼 길을 날아온 김범수 교수와 통평원 세계한인 통일평화 최고위과정 원우인 비엔나의 정종완 팬아시아 회장, 베를린의 David Jang 사장과 유익한 담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참 좋았다.

주제가 2025년에 걸맞게 시의적절했다. 헬싱키의 교훈과 반둥의 정신을 어떻게 한반도 문제에 적용할 수 있을지, 특히 한반도의 평화구축의 맥락에서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첫날은 SIPRI 의 소장을 역임한 Dan Smith 박사가 “The Korean Peninsula: Cracking the Code of the Security Dilemma”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Gwendalyn Domning, Michael Staak 교수, 차지호 의원 등이 참여한 패널 토론이 이어졌다. Smith 박사는 신뢰가 부족한 국가들 사이에 나타나는 안보딜렘마를 해소하기 위한 접점과 계기를 만드는 실천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헬싱키 선언이 결과적으로 유럽의 해빙과 독일통일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한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면서 목적론적 해석을 경계했다.

둘째날 오전에는 헬싱키 협정의 정신과 그 효과를 검토하고 오늘날 한반도 문제에 줄 교훈을 논의하는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허지영 박사는 현상태의 인정, 대화촉진, 지역협력강화가 중요하다고 했고 다자적 engagement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Howe 교수는 현실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시각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무엇보다 ‘타자’를 인정하고 새로운 미래를 구성해가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강조했다. M.Staak 교수는 CSCE 중심으로 과정중심적 접근, 주변국가들과의 협력, 신뢰구축, 영역별 협력 같은 중요한 교훈을 헬싱키 협정으로부터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한반도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했다. 대체로 전날 기조강연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작은 접점, 가능한 대화와 신뢰조성의 작은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언급되었다.

오후 세션은 반둥 70년과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자리였다. UNHCR 안윤교 님이 “From Geneva to Global South: Understanding Human Rights Interactions”를 발표했다. 제네바에서의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유엔 차원의 UPR을 통한 북한의 반응은 결코 미미하거나 부정적이지 않다는 점, 인권의제를 통해서도 대화를 이어갈 공간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Kee Park 박사는 “DPRK’s pivot away from ROK’s aid money: Is Inter-Korean cooperation over?” 라는 발제를 통해 현재 남북한 의료지원과 협력의 현실을 논의하고 특별 펀드조성 방안 등을 제안했다. Tony Binn 교수는 아프리카에서의 ODA 중요성과 그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여러 교훈들을 발표했다. “Rethinking Korea’s ODA and Global South Policies” 란 제목처럼 반둥을 직접 논의하는 대신 Global South와의 교류지원사업을 통해 한국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자리가 되었다.

셋째날은 이곳의 젊은 신진 연구자들의 발표가 있었는데 전날의 전문가들 토론 못지 않게 신선하고 활기찼다. 내 개인적으론 이 세션이 더 흥미롭고 좋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Emytro Andrianov 는 이광수, 한용운, 김소월의 문학 속에 나타난 서사를 통해 Literary Memory와 National Healing 을 연결시키는 문화사회학적 분석작업을 수행했다. 중국에서 온 Yujin Xu는 한국 MZ세대의 통일의식을 분석적으로 검토하면서 세대간의 의식차, 그 속에 나타나는 시대의식과 집합적 꿈의 변화를 추적하고자 했다. 한국 연구자들도 쉽지 않을 문학작품의 결을 추적하고 조사연구의 문항과 응답의 향방을 이론화하려는 젊은 학자들의 지적 역정이 느껴져 감동적이었다.

몽고 출신의 Munkhzul Bat-Erdene는 Small State’s Shelter Seeking Diplomacy를 이론적으로 검토하면서 몽고가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에 작용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주목하고자 했다. Small State 라는 규정이 자칫 잘못된 프레임을 강화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반둥의 정신을 현재의 한반도에 접목시켜보려는 진지한 태도나 몽고의 지정학적 함의를 주목해보자는 제안은 신선했다. Natalia Matiaszczyk은 폴란드와 독일의 화해를 위해 각 지방도시들이 어떤 활동과 연대를 보여주었는지를 한일 도시간의 사례들과 비교했다. 역시 두 비교사례에서 지방도시의 현저한 자율성 차이를 통제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지방 차원에서 평화구축과 신뢰조성의 실천을 사고할 필요성을 보여준 것은 뜻깊은 점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배운 자리였다, 긴 회의와 토론을 마치면서 두가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헬싱키의 교훈을 강조한 유럽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가능한 것, 실천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현재의 북한태도를 고려할 때 대화와 접촉이 불가능할 큰 아젠다, 예컨대 통일, 비핵화, 인권 등은 내세우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는 조언이 많았다. 하지만 과연 그런 접근이 대화와 신뢰조성을 보장할 것인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때로는 쉽지 않지만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헬싱키 협정에서 인권을 끝내 고집하면서도 현실적인 관계에서는 유연한 태도를 취했던 방식을 꼭 손쉬운 접촉우선이라 하기는 어렵다. 가치지향이 없는 당장의 효과만을 중시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도 깊이 숙고하면서 헬싱키의 교훈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생각은 차지호 의원이 제기한 인공지능의 영향이다. 앞으로 ODA를 비롯하여 국제적 협력이나 교류에서 첨단기술, 인공지능이 미칠 충격 및 여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이 회의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향후 깊이 숙고할 쟁점임에 분명하다. 인공지능이 단순히 기술혁신에 머물지 않고 자원분배, 고용변화, 사회적 관계 조정, 나아가 군사기술과 안보영역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이기 때문에 남북관계나 사회전반의 평화구축에서도 이 변수는 피하기 어려운 문제다. 현 정부나 국회에서 AI기반 사회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직은 슬로건 차원에 머무는 느낌이어서 더욱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학문 분야에도 세대교체가 진행중이고 유능한 젊은 세대의 한국연구자를 배출하는 것은 어디든 중요하다. 시니어 전문가들과 주니어 연구자들 사이의 관심도 같지 않고 문제의식도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의 경우 세대경험, 시대상황이 너무 다르고 접하는 정보의 차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 좋은 환경일수 있지만 그만큼 한국사회의 역사적 뒤틀림과 내적 문제를 접해볼 기회는 줄어든다. 그런 점에서 여러 세대의 다양한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진지한 발표와 토론을 거듭한 이 포럼 자체가 매우 귀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런 포맷을 유지하는데는 보이지 않게 수고하는 분들의 헌신과 집념이 필수적이다. 이은정 교수를 비롯한 몇 분들의 열정이 참으로 소중하고 고마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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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문화가 될 때

제14차 한독통일자문회의가 11월 17, 18일 이틀간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엘리자베스 카이저 동독특임관 겸 재무부 정무차관이 독일측 단장으로, 국감으로 참석하지 못한 김남중 통일부 차관을 대신한 김병대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이 한국측 단장으로 회의를 주재했다. 현저히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할 한국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와 AfD의 급부상이라는 환경에 직면한 독일이나 분단과 통일, 통합의 쟁점이 만만치 않음을 재확인한 자리였다

독일이 통일된지 35년, 우리가 일제 식민통치를 받았던 것과 꼭같은 시간이 흘렀다. 장벽이 있던 곳은 유적지가 되었고 1990년의 대격변도 교과서에서 배우는 과거사가 되었다. 하지만 ‘화해의 교회’의 낡아진 외벽처럼 과거는 사라졌다기보다 변색된 형태로 지속되면서 또다른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중이다. 건축을 통해 분단과 통일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현장답사를 하면서 나는 도시공간도 정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 또 시간이 흐르면 살벌했던 정치적 대립도 달빛 속 풍경같은 문화가 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독일측이 기획하고 안내한 현장답사의 첫 방문지는 소련전승기념공원이었다. 나찌 독일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소련군의 위용을 드러내고 희생당한 장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조성한 곳이라 한다. 공원의 규모가 엄청나고 공산주의 조형물의 전형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소련과 동독이 사라진 이후에도 이 공원이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신기했는데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한다.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북한 주체탑을 연상시키는 추모탑을 둘러보며 나는 8.15 광복절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을 떠올렸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 북한은 ‘쏘련군 장병들의 숭고한 국제주의 정신’과 ‘조선-러시아 친선의 영원한 생명력’을 힘주어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 러시아 정서가 복잡해지는 오늘 독일인들은 이 공간에서 어떤 과거를 떠올리고 어떻게 그 시기를 재해석할까 궁금했다.

오후엔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축으로 2차대전 직후에 조성된 근대건축지구를 답사했다. 동서 베를린에서 각기 경쟁적으로 도시재건사업을 전개했던 현장인데 이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는 전문가가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동쪽에는 스탈린 거리로 명명되고 이후 칼 마르크스 대로로 개칭된 거리의 양편에 사회주의의 위용을 과시하는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고대 로마건축의 느낌도 포함된 웅장하고 아름다운 외양이 강조된 건물들이었다. 반면 서베를린에서는 한자(Hansa)지역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의 이념을 드러내는 도시계획이 추진되었다. 전세계의 유명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다양성과 개별성을 강조하는 다른 유형의 주거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고층빌딩 대신 낮은 주택들, 외부공간보다는 내부를 중시하고 녹지공간을 곳곳에 배치한 설계로 서베를린의 개인주의와 다원주의를 드러내려 한 특징이 뚜렷하다.

동서를 잇는 이 거리는 언뜻 여느 도시의 한 구역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주목해보면 건물의 외양도 모습도 사뭇 다르다. 그래서 동서독의 자존심을 대변하려는 체제경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전시공간이 되고 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동베를린은 노동자들의 주택이 강조되고 서베를린에서는 ‘사회주택’을 강조한 차이가 있지만 모두 공동주택의 개념을 공유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왔다. 이념적인 체제대결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공히 주민 모두의 집단적 생활공간을 중시하려는 공동체적 지향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현장인 셈이다. 어쩌면 그런 특징이 서독에서도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SPD의 오랜 정치적 위상과 역할을 가능케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값비싼 주거지대로 변했으나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쉽게 변형할 수는 없다고 한다.

회의가 개최된 연방 재무부 청사 역시 역사성이 뚜렷한 건물이었다. 브리핑에 따르면 이 건물은 히틀러 시대인 1935년 독일제국의 ‘힘의 상징’으로 건축된 곳인데 2차대전 중에는 공군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전쟁 중에 심한 폭격을 받았지만 상당부분이 온존했던 덕분에 동독의 건국과 개혁이 진행되는 주요한 정치공간으로 활용 되었다. 1991년 통일 직후엔 그 논란 많던 신탁청이 이곳에 자리잡았다. 통일직후 동독의 구조조정, 국유재산 민영화를 담당했던 기관인데 이 업무를 관장했던 데틀레프 로베더 신탁청장이 집에서 총격으로 살해될 정도로 심한 갈등이 내재되었던 곳이다. 이 사건은 [퍼펙트 크라임: 로베더 암살사건]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당대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히틀러 시대(1935-45), 분단시대(1945-1990), 통일시대(1990- )를 거쳐오면서 뒤섞이고 중첩된 상이한 시대성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이해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히틀러의 독일 제국, 동독의 의회, 그리고 통일독일 신탁청의 역사가 같은 공간 안에서 이어짐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저런 방식은 ‘잘못된 역사’를 지우고 ‘바른 역사’를 다시 쓰려는 우리의 열망과 꽤나 다르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평가는 섣불리 내리기 어렵지만 정치적 차원과 문화적 층위가 무분멸하게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과거가 재해석될 때마다 정파적 정쟁으로 비화되지 않으려면 인간사의 모순과 역사적 갈등을 문화적 입체화로 그려보는 역량이 중요할 터이다. ‘역사의 현장’이라는 말은 이런 역설적인 중첩성과 아이러니를 함께 보여줄 때 더 잘 어울리고 그런 속에서 새로운 상상력과 대응력도 더 잘 길러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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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학자의 아름다움

100세 시대라 하지만 90년을 건강하게 활동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공부한 사회학계에 한정해서 본다면 한완상 교수님, 김경동 교수님, 신용하 교수님 등이 모두 구순이 되셨거나 가까왔는데도 변함없이 명석하고 열정적이시다. 직접 스승 제자 사이는 아니지만 이런 저런 관계로 가까이 뵈었던 백낙청, 이만열 교수님도 여전히 건강하고 지적인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각자 몸과 마음을 지키는 노력이 컸겠지만 이미 고인이 되셨거나 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동세대의 여러 분들에 비해보면 복을 많이 타고 나신 분들임에 틀림이 없다.

지난 6월에는 한완상 교수님을 모시고 몇 제자들이 모여 9순을 축하하는 조촐한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걸음걸이가 다소 불편하고 질환도 있으시다지만 기억력과 말씀이 여느 젊은이들 못지 않았다. 특히 사회학 공부를 하던 학창시절, 유학시절의 이야기를 하실 때는 젊은 때의 꿈을 상기하시는 모습이 장년같이 보였다. 기독교의 정신과 사회학 공부를 연결시키려던 당신 삶의 스토리를 정리하는 일을 도와달라신 청에 부응하지 못한 송구한 마음이 한켠에 여전하다. 나는 한 선생님 얼굴과 함께 평생 추구한 지적 화두들과 내 감사함을 담은 족자 한 점을 제작해서 헌정했다. 이후 한선생님 댁을 방문한 여러 분으로부터 그 족자가 거실 한복판에 걸려 있었다는 인사를 전해 듣고 다소나마 도리를 다한 듯 마음 한켠이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다.

지난 9월에는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제작하는 서울대 샤복샤복 유투브에 신용하 교수님과 대담을 나누는 역할을 했다. 다리가 다소 불편하지만 여전히 건강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모습이 후학 제자들에게는 큰 귀감이 된다. 내가 사회학자로 활동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학은과 배려를 베푸신 분이기에 굳이 연세와 상관없이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서울대에 기증하신 화양 신용하 문고 특별전시가 현재 준비 중이어서 그 행사와 함께 구순을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어볼 계획인데 모든 분들께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학은에 감사하는 자리를 어떻게 만들어볼지 고민 중이다.

이번 주엔 호산 김경동 교수님의 구순기념논문집 봉정식이 있었다. 60년대 학번인 김성국 교수와 70년대 초반 학번인 배규한 교수 등이 힘을 모아 두툼한 기념 책자를 간행했다. [선구자의 길- 김동의 동서융합 사회학] (박영사) 이라는 책인데 모두 3부로 구성되어 1부는 김경동의 학문세계의 총괄적 조망, 2부는 김경동 사회학의 계승과 확장을 다룬 논문들로 3부는 인품과 추억들을 담은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에세이를 쓴 분들은 대체로 70년대 관악시절을 기억하는 선후배 들인데 시대는 암울했지만 학창생활에는 나름 열정과 낭만이 없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요즘 분위기로는 구순기념논문집을 내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자칫 민폐가 되기 쉽고 자발적이고 흔쾌하게 진행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부분 60대를 넘기고 현재 70대 중반을 넘어서는 후학들이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했다. 교수님 댁을 방문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받던 일, 청아한 노래와 그림솜씨에 경탄하던 일, 꾸중을 들으면서도 고마왔던 일 등이 담겨있어 글 속에 훈훈한 온기가 가득하다.마치 60-70 들의 동문회장 같다는 농담이 오갈 정도로 학창시절의 추억담으로 행사장 역시 따뜻했다. 나도 참 오랜만에 선후배들과 옛날 생각을 하는 자리가 되었다.

아마도 이런 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호산 선생의 푸근한 인품, 이론적 포용력, 그리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지적 탁월함이 두드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누구보다 뛰어난 영어실력과 국제적 감각을 가진 분이면서도 동양사상, 선비정신을 이론화하려는 문제의식도 남달랐다. 시를 쓰고 소설에도 도전하며 기타도 치며 노래하는 르네상스형 지식인의 풍모가 이런 결과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 나는 명심보감의 한 귀절을 쓴 서예작품을 봉정했다. 김경동 교수님이 매우 좋아하셨고 사모님은 집안 거실에 두고 매일 감상하겠노라 하셨다. 아이오와대 김재온 교수님 축하글과 함께 책의 맨 앞을 장식하는 영광도 누렸다.

그러고보니 세 분의 선생님들을 올 한 해 이런 저런 계기로 뵙고 축하드리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 변변치 않지만 여러 형태로 감사의 뜻을 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이 세 분은 학문의 지향은 물론이고 인품과 인격의 색깔도 매우 다르다. 감사하면서 나는 90의 때 어떤 빛깔로 사람들에게 비칠까 생각해 본다. 그 때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부터 불확실한데 너무 이른 고민일수도 있겠다. 아름답게 물든 낙엽들 보면서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이 어렵고도 귀한 것이란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