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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 예수의 길

“마지막 고언”이라는 타이틀을 단, 한완상 출판기념 강연회가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있었다. 마지막 강연이 될지 몰라 작은 자리를 준비했다는 따님의 연락을 몇 주 전 받았을 때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나 생각했고 무거운 마음으로 종로5가로 향했다. 그런데 행사장은 어느 유명 인사의 출판기념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만원이었고 열기도 뜨거웠다. 한 교수님의 거동은 다소 불편했지만 목소리와 말씀은 여전히 또렷하고 열정적이었다.

​”예수의 길을 가라” – 강연의 제목이자 책의 핵심화두다. 스스로 개척해서 수십년간 봉직한 새길교회 설교를 중심으로 그간의 메시지들을 정리한 책인데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만난 성령님, 내가 만난 예수님’으로 구성된 목차를 보면 전형적인 신앙 간증집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책의 띠지에도 “나는 민중사회학자이지만 한국교회 신학자로 평가받고 싶다. 그리고 영원한 ‘예수따르미’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적혀있다.

​사실 한교수님의 글에서 예수의 삶이 언급되지 않는 걸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모든 사회현상에 예수의 시각을 적용했다. 어릴 적 내면화한 신앙의 힘이 그 바탕이 되었을터지만 본의 아니게 학계를 떠나게 된 것도 그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엄혹한 남북관계, 이념문제를 다루는 현장에서도 그는 예수정신을 강조했다. 교계는 물론이고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를 넘어 현실을 모르는 낭만주의자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늘 꿋꿋하게 지론을 견지해왔다.

​꽤 오래전 ‘평화’를 주제로 하는 어느 심포지엄 자리에서 나는 한완상과 라인홀드 니부어를 비교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말로 유명한 니부어는 정치영역에서 지나친 도덕론이 갖는 한계와 위험을 지적했다. 그에 반해 예수정신에 입각한 ‘우아한 패배’를 옹호하는 한교수님의 관점은 종교적 윤리의 한 전형일 수 있다. ‘심정윤리’와 ‘책임윤리’를 준별해야 한다는 막스 베버의 견해에 공감하는 나로서 당시 비판적인 견해를 발표했던 기억이 있다.

​한교수님께 축하 인사를 드렸다. 반갑게 손을 잡으시면서 자네 작품을 책 앞에 넣었노라 했다. 작년 90 생신 무렵 학교와 교계 등에서 도움을 입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저녁자리를 준비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인연과 사랑을 이어온 나는 화선지에 한교수님 얼굴과 그간 강조해온 화두들을 쓴 작품을 만들어 증정했다. 감사의 말과 함께 “평화의 땅 하나님 나라가 속히 오기 바라며”란 바램을 적어서..

​이후 몇 분으로부터 한교수님 댁 거실에 그 족자가 걸려있고 한교수님이 자랑스러워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유명한 김병종 화가의 작품이 걸려있는 그곳에 감히 어울릴 수준일 리 만무하지만 내 마음을 읽어주신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책을 펼치니 과연 내지의 첫 페이지에 그림이 실려있다. 반갑고 고마왔는데 원래 족자의 상하비율을 조정한 듯 글자가 너무 붙어있고 낙관의 붉은 색이 드러나지 않아 편집이 다소 아쉬웠다.

​이만열, 김용덕, 이삼열 교수님 등 오랫만에 얼굴을 보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동기인 권태선 이사장도 논평자로 참석해서 반갑게 만났다. 스스로 그 자리가 계면쩍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진솔한 의견표명이 와닿았다. 젊은 세대의 참석자가 별로 보이지 않아 ‘청년 예수’를 내걸기엔 너무 고령화한 한국교계의 현주소를 보는 듯 했다. 종로5가, 기독교회관의 옛역사는 기억할 사람을 찾기 힘들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가르치는 시대가 되었다. 예수의 길을 가라 – 강연장 플래카드가 어딘지 낯설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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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정리

여러 날에 걸쳐 연구실을 정리했다. 2월 말로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내 공식적 활동이 끝나기 때문이다. 연구실의 책은 대부분 광주과학기술원 융합교육연구센터에 기증했다. 각종 복사물, 임명장, 제안서, 감사패 등은 과감히 폐기했다. 손으로 할 일과 연락처를 빼곡이 적어둔 1990년대의 수첩들, 이런 저런 사정을 담아 주고받은 편지, 오랜 기간 정들었던 필기구 등은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필요없는 낡은 자료들도 그것을 입수하느라 치룬 시간과 애씀, 추억과 애환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80년대 후반 처음으로 해외 한국학회의를 개최하느라 고심했던 기획자료들, 처음으로 만난 북한 학자들과의 회합에서 주고받은 논문들, 여러 나라의 연구소들을 방문하면서 받았던 기념품들 – 크건 작건 내겐 소중한 기억이 담긴 품목들이어서 개인 박물관을 만든다면 모두 진열해야 마땅한 것들이다.

그래도 이제 버려야 한다. 연구실 없는 생활을 새롭게 살아내야 한다. 돌이켜보면 40년이 넘도록 나는 5-7평 남짓한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서울대를 위시하여 내가 거쳐온 모든 대학들, 연구교수로 나가있던 해외의 대학들도 연구실 중심의 생활은 꼭같았다. 아마도 집보다 연구실서 보낸 절대시간이 더 많았을 터이니 가히 연구실 속 인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연구실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 그래야 가벼워질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연구실 없는 생활에 대한 약간의 허전함과 염려도 없진 않다. 당분간 아침에 일어나면 어딜 갈까 서성이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수업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함으로 극복할 일이다. 강의는 즐거움이면서 고통이었다. 특히 펜데믹과 인공지능의 충격이라는 미증유의 격변을 겪으면서 담당한 과학기술대학에서의 강의는 흥미로우면서 부담스러웠고 가르치며 배우는 현장이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대학에서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을 함께 이야기한 뜻이 어렴풋 느껴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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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2025년 12월 31일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은 옛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비교적 출입국이 원활했다. 하지만 자유롭고 편안하게 국경을 오가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생각에 이전보단 공항에서의 긴장감이 좀더 크게 다가왔다.

오는 비행기 안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일생을 다룬 영화를 봤다. 부제가 “목사, 스파이, 암살자”라고 붙어있다. 스릴러물 같은 느낌을 주려고 영화수입업자측에서 붙인 것이라는데 영화의 구성도 목사로서의 정체성이나 종교적 고뇌보다 히틀러 폭정에 저항하는 행동가로서의 본회퍼가 더 부각된 느낌이다. 대학시절 본회퍼의 책을 탐독하며 좋아했는데 그가 유니온 신학교 유학시절 뉴욕 할렘의 흑인교회에서 강한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는 사실, 피아노를 잘 치던 고전음악 애호가에서 재즈와 흑인영가에빠져드는 경험을 했다는 내용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가 ’주님은 교회나 종교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비단 독일 제국교회에 대한 비판만 아니라 미국의 블랙쳐치에서 확인되는 살아있는 영성에 영향받은 것일 수 있겠다 싶다.

영화를 보는 중 2026년을 맞이했다. 사실 태평양 상공을 날아오면서 시간도 변하는 중이었으니 정확히 언제 새해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쨋든 2026년은 이전보다 더 힘들고 염려스러운 상황이 도래하리라는 예감이 마음을 무겁게 했고 그래서인지 영화의 시대배경과 오늘의 현실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독일에 나찌즘을 찬양하기도 하는 극우세력이 급부상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독일의 재무장이 본격화되며 징병제가 추진되고 있는 현실이 1930년대 초반의 영화 속에서 겹쳐 보였다. 그 시절 나찌즘이 부지불식간에 학교, 종교, 문화, 예술 등 전 분야로 확산되고 전독일을 그 광풍 속으로 몰아넣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전례없이 속도가 빨라지는 오늘날의 상황은 더욱 위태로울 수 있을 터이다.

영화는 투사로서의 본회퍼 이미지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하지만 직접적인 정치투쟁가나 혁명가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책임성에 기반한 결단으로 그려진다. 히틀러 암살계획의 모의와 발각이라는 스릴러적 전율감을 흥미위주로 표현하기보다 그 전 과정에서 본회퍼를 견디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드러내려는 진지한 문제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감독은 디트리히 본회퍼를 당당하게 죽음으로 이끈 것은 바로 믿음이고 절대자 신 앞에 선 인간의 진지한 응답이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 나온 두 사람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그 하나는 본회퍼의 아버지 칼 본회퍼가 아들과의 대화에서 한 ’아직도 사람을 믿느냐?‘는 말이다. 빵만 주면 투표하는 사람들, 유태인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를 거침없이 내뱉는 사람들이 나찌의 광풍을 뒷받침하리라는 그 말은 현실 속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또 하나는 고백교회의 니뮐러 주교가 체포되기 전 강론에서 한 말이다. “나치가 사회주의자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기에 침묵했습니다. 나치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을 때도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란 이유로 침묵했습니다. 유대인을 잡아 갈 때도 나는 너무 늦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요. 나치가 나를 잡으러 올 때 나를 위해 대변해 줄 사람이 과연 남아 있을까요?”

흥미롭게도 미국의 트럼프를 추종하는 극우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미국의 민주당을 나치당과 일치시키고 민주당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히틀러 독재에 대한 본회퍼의 저항과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다. 트럼프 지지자이자 극우 기독교의 정치화에 큰 영향을 미친 저널리스트 에릭 메탁사스가 『본회퍼: 목사, 순교자, 예언자, 스파이』라는 책을 썼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흑인 공동체와 라틴계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오늘날의 정치적인 의도가 이 영화의 소비형태에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도 광화문 광장의 극우시위를 주도한 전광훈은 본회퍼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정치활동을 정당화했다. ’본회퍼의 길과 전광훈의 길‘이라는 시사논평이 실리는 웃픈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의 기독교 일각에서 독특한 영웅숭배, 특정 지도자 추종이 확산되는 현실이 이 영화와 기묘하게 오버랩되었다. 종교가 제도화되고 그것이 사회적 영향력을 뚜렷이 하게 될 때 외부로부터는 이용하려는 유혹이, 내부로부터는 힘을 과시하고픈 욕망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쓴 한 본회퍼 연구자는 영화가 본회퍼의 신학적 고민과 경건한 삶의 모습을 좀더 드러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본회펴가 초대 원장으로 사역했던 핑켄발데 신학원의 공동체적 생활, 즉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고 연주하고 축구도 하는 모습은 고백교회가 그런 삶을 통해 값비싼 은혜, 제자도, 원수 사랑, 홀로 있음, 함께 있음, 성경 읽기와 묵상, 기도, 섬김, 성찬의 중요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이었는데 다소 정치적 저항을 위한 훈련과정처럼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본회퍼가 종교없는 기독교를 주장한 것도 이런 유혹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일테다. 동시에 과연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기독교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는 여전한 숙제다. 뒤르켐이 말하는 ’시민종교‘의 형태로 전화하거나 요즘 말하는 가나안 신자를 떠올려볼 수 있겠지만 그것도 국가주의와 결합하거나 세속적 편리주의로 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말이다. 신학적 내면적 초월적 관심과 사회적 정치적 세속적 관심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치우치지 않을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그걸 찾아가는 길이 구도자의 삶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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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포럼 -헬싱키,반둥,한반도

2차대전 종전 80주년, 한국 해방 80주년, 반둥회의 70주년, 헬싱키 협정 50주년을 맞이한 2025년,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가 주관한 베를린 포럼이 Korea At a Crossroads 란 주제로 11월 19-21일간 열렸다. 이번이 여덟 번째인데 유럽 내 한반도 문제, 특히 평화와 통일에 관심을 가진 많은 학자, 전문가들이 모이는 뜻깊은 행사다. 유럽도, 한반도도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모두가 공유하는 가운데 노학자와 새 세대의 젊은 연구자들이 함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열기가 뜨거웠다.

반가운 분들을 만나는 기회가 되어 개인적으로 더 기뻤다. SIPRI 소장을 역임한 평화연구자 Dan Smith, 주한 독일대사를 지냈고 내가 서울대 강연자로 초청한 바 있던 Nobert Bass 박사, Korea World Forum에서 자주 만났던 전 유럽의회 의원 Glyn Ford, 유엔인권 한국사무소장을 역임한 UNHCR 안윤교 전문관, 임상범 주독일 대사 등과 반가운 인사를 했다. 특히 제9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으로 이번 행사를 공동 호스트하기 위해 먼 길을 날아온 김범수 교수와 통평원 세계한인 통일평화 최고위과정 원우인 비엔나의 정종완 팬아시아 회장, 베를린의 David Jang 사장과 유익한 담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참 좋았다.

주제가 2025년에 걸맞게 시의적절했다. 헬싱키의 교훈과 반둥의 정신을 어떻게 한반도 문제에 적용할 수 있을지, 특히 한반도의 평화구축의 맥락에서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첫날은 SIPRI 의 소장을 역임한 Dan Smith 박사가 “The Korean Peninsula: Cracking the Code of the Security Dilemma”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Gwendalyn Domning, Michael Staak 교수, 차지호 의원 등이 참여한 패널 토론이 이어졌다. Smith 박사는 신뢰가 부족한 국가들 사이에 나타나는 안보딜렘마를 해소하기 위한 접점과 계기를 만드는 실천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헬싱키 선언이 결과적으로 유럽의 해빙과 독일통일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한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면서 목적론적 해석을 경계했다.

둘째날 오전에는 헬싱키 협정의 정신과 그 효과를 검토하고 오늘날 한반도 문제에 줄 교훈을 논의하는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허지영 박사는 현상태의 인정, 대화촉진, 지역협력강화가 중요하다고 했고 다자적 engagement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Howe 교수는 현실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시각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무엇보다 ‘타자’를 인정하고 새로운 미래를 구성해가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강조했다. M.Staak 교수는 CSCE 중심으로 과정중심적 접근, 주변국가들과의 협력, 신뢰구축, 영역별 협력 같은 중요한 교훈을 헬싱키 협정으로부터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한반도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했다. 대체로 전날 기조강연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작은 접점, 가능한 대화와 신뢰조성의 작은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언급되었다.

오후 세션은 반둥 70년과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자리였다. UNHCR 안윤교 님이 “From Geneva to Global South: Understanding Human Rights Interactions”를 발표했다. 제네바에서의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유엔 차원의 UPR을 통한 북한의 반응은 결코 미미하거나 부정적이지 않다는 점, 인권의제를 통해서도 대화를 이어갈 공간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Kee Park 박사는 “DPRK’s pivot away from ROK’s aid money: Is Inter-Korean cooperation over?” 라는 발제를 통해 현재 남북한 의료지원과 협력의 현실을 논의하고 특별 펀드조성 방안 등을 제안했다. Tony Binn 교수는 아프리카에서의 ODA 중요성과 그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여러 교훈들을 발표했다. “Rethinking Korea’s ODA and Global South Policies” 란 제목처럼 반둥을 직접 논의하는 대신 Global South와의 교류지원사업을 통해 한국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자리가 되었다.

셋째날은 이곳의 젊은 신진 연구자들의 발표가 있었는데 전날의 전문가들 토론 못지 않게 신선하고 활기찼다. 내 개인적으론 이 세션이 더 흥미롭고 좋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Emytro Andrianov 는 이광수, 한용운, 김소월의 문학 속에 나타난 서사를 통해 Literary Memory와 National Healing 을 연결시키는 문화사회학적 분석작업을 수행했다. 중국에서 온 Yujin Xu는 한국 MZ세대의 통일의식을 분석적으로 검토하면서 세대간의 의식차, 그 속에 나타나는 시대의식과 집합적 꿈의 변화를 추적하고자 했다. 한국 연구자들도 쉽지 않을 문학작품의 결을 추적하고 조사연구의 문항과 응답의 향방을 이론화하려는 젊은 학자들의 지적 역정이 느껴져 감동적이었다.

몽고 출신의 Munkhzul Bat-Erdene는 Small State’s Shelter Seeking Diplomacy를 이론적으로 검토하면서 몽고가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에 작용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주목하고자 했다. Small State 라는 규정이 자칫 잘못된 프레임을 강화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반둥의 정신을 현재의 한반도에 접목시켜보려는 진지한 태도나 몽고의 지정학적 함의를 주목해보자는 제안은 신선했다. Natalia Matiaszczyk은 폴란드와 독일의 화해를 위해 각 지방도시들이 어떤 활동과 연대를 보여주었는지를 한일 도시간의 사례들과 비교했다. 역시 두 비교사례에서 지방도시의 현저한 자율성 차이를 통제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지방 차원에서 평화구축과 신뢰조성의 실천을 사고할 필요성을 보여준 것은 뜻깊은 점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배운 자리였다, 긴 회의와 토론을 마치면서 두가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헬싱키의 교훈을 강조한 유럽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가능한 것, 실천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현재의 북한태도를 고려할 때 대화와 접촉이 불가능할 큰 아젠다, 예컨대 통일, 비핵화, 인권 등은 내세우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는 조언이 많았다. 하지만 과연 그런 접근이 대화와 신뢰조성을 보장할 것인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때로는 쉽지 않지만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헬싱키 협정에서 인권을 끝내 고집하면서도 현실적인 관계에서는 유연한 태도를 취했던 방식을 꼭 손쉬운 접촉우선이라 하기는 어렵다. 가치지향이 없는 당장의 효과만을 중시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도 깊이 숙고하면서 헬싱키의 교훈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생각은 차지호 의원이 제기한 인공지능의 영향이다. 앞으로 ODA를 비롯하여 국제적 협력이나 교류에서 첨단기술, 인공지능이 미칠 충격 및 여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이 회의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향후 깊이 숙고할 쟁점임에 분명하다. 인공지능이 단순히 기술혁신에 머물지 않고 자원분배, 고용변화, 사회적 관계 조정, 나아가 군사기술과 안보영역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이기 때문에 남북관계나 사회전반의 평화구축에서도 이 변수는 피하기 어려운 문제다. 현 정부나 국회에서 AI기반 사회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직은 슬로건 차원에 머무는 느낌이어서 더욱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학문 분야에도 세대교체가 진행중이고 유능한 젊은 세대의 한국연구자를 배출하는 것은 어디든 중요하다. 시니어 전문가들과 주니어 연구자들 사이의 관심도 같지 않고 문제의식도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의 경우 세대경험, 시대상황이 너무 다르고 접하는 정보의 차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 좋은 환경일수 있지만 그만큼 한국사회의 역사적 뒤틀림과 내적 문제를 접해볼 기회는 줄어든다. 그런 점에서 여러 세대의 다양한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진지한 발표와 토론을 거듭한 이 포럼 자체가 매우 귀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런 포맷을 유지하는데는 보이지 않게 수고하는 분들의 헌신과 집념이 필수적이다. 이은정 교수를 비롯한 몇 분들의 열정이 참으로 소중하고 고마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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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문화가 될 때

제14차 한독통일자문회의가 11월 17, 18일 이틀간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엘리자베스 카이저 동독특임관 겸 재무부 정무차관이 독일측 단장으로, 국감으로 참석하지 못한 김남중 통일부 차관을 대신한 김병대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이 한국측 단장으로 회의를 주재했다. 현저히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할 한국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와 AfD의 급부상이라는 환경에 직면한 독일이나 분단과 통일, 통합의 쟁점이 만만치 않음을 재확인한 자리였다

독일이 통일된지 35년, 우리가 일제 식민통치를 받았던 것과 꼭같은 시간이 흘렀다. 장벽이 있던 곳은 유적지가 되었고 1990년의 대격변도 교과서에서 배우는 과거사가 되었다. 하지만 ‘화해의 교회’의 낡아진 외벽처럼 과거는 사라졌다기보다 변색된 형태로 지속되면서 또다른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중이다. 건축을 통해 분단과 통일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현장답사를 하면서 나는 도시공간도 정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 또 시간이 흐르면 살벌했던 정치적 대립도 달빛 속 풍경같은 문화가 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독일측이 기획하고 안내한 현장답사의 첫 방문지는 소련전승기념공원이었다. 나찌 독일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소련군의 위용을 드러내고 희생당한 장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조성한 곳이라 한다. 공원의 규모가 엄청나고 공산주의 조형물의 전형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소련과 동독이 사라진 이후에도 이 공원이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신기했는데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한다.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북한 주체탑을 연상시키는 추모탑을 둘러보며 나는 8.15 광복절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을 떠올렸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 북한은 ‘쏘련군 장병들의 숭고한 국제주의 정신’과 ‘조선-러시아 친선의 영원한 생명력’을 힘주어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 러시아 정서가 복잡해지는 오늘 독일인들은 이 공간에서 어떤 과거를 떠올리고 어떻게 그 시기를 재해석할까 궁금했다.

오후엔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축으로 2차대전 직후에 조성된 근대건축지구를 답사했다. 동서 베를린에서 각기 경쟁적으로 도시재건사업을 전개했던 현장인데 이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는 전문가가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동쪽에는 스탈린 거리로 명명되고 이후 칼 마르크스 대로로 개칭된 거리의 양편에 사회주의의 위용을 과시하는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고대 로마건축의 느낌도 포함된 웅장하고 아름다운 외양이 강조된 건물들이었다. 반면 서베를린에서는 한자(Hansa)지역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의 이념을 드러내는 도시계획이 추진되었다. 전세계의 유명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다양성과 개별성을 강조하는 다른 유형의 주거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고층빌딩 대신 낮은 주택들, 외부공간보다는 내부를 중시하고 녹지공간을 곳곳에 배치한 설계로 서베를린의 개인주의와 다원주의를 드러내려 한 특징이 뚜렷하다.

동서를 잇는 이 거리는 언뜻 여느 도시의 한 구역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주목해보면 건물의 외양도 모습도 사뭇 다르다. 그래서 동서독의 자존심을 대변하려는 체제경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전시공간이 되고 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동베를린은 노동자들의 주택이 강조되고 서베를린에서는 ‘사회주택’을 강조한 차이가 있지만 모두 공동주택의 개념을 공유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왔다. 이념적인 체제대결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공히 주민 모두의 집단적 생활공간을 중시하려는 공동체적 지향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현장인 셈이다. 어쩌면 그런 특징이 서독에서도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SPD의 오랜 정치적 위상과 역할을 가능케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값비싼 주거지대로 변했으나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쉽게 변형할 수는 없다고 한다.

회의가 개최된 연방 재무부 청사 역시 역사성이 뚜렷한 건물이었다. 브리핑에 따르면 이 건물은 히틀러 시대인 1935년 독일제국의 ‘힘의 상징’으로 건축된 곳인데 2차대전 중에는 공군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전쟁 중에 심한 폭격을 받았지만 상당부분이 온존했던 덕분에 동독의 건국과 개혁이 진행되는 주요한 정치공간으로 활용 되었다. 1991년 통일 직후엔 그 논란 많던 신탁청이 이곳에 자리잡았다. 통일직후 동독의 구조조정, 국유재산 민영화를 담당했던 기관인데 이 업무를 관장했던 데틀레프 로베더 신탁청장이 집에서 총격으로 살해될 정도로 심한 갈등이 내재되었던 곳이다. 이 사건은 [퍼펙트 크라임: 로베더 암살사건]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당대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히틀러 시대(1935-45), 분단시대(1945-1990), 통일시대(1990- )를 거쳐오면서 뒤섞이고 중첩된 상이한 시대성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이해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히틀러의 독일 제국, 동독의 의회, 그리고 통일독일 신탁청의 역사가 같은 공간 안에서 이어짐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저런 방식은 ‘잘못된 역사’를 지우고 ‘바른 역사’를 다시 쓰려는 우리의 열망과 꽤나 다르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평가는 섣불리 내리기 어렵지만 정치적 차원과 문화적 층위가 무분멸하게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과거가 재해석될 때마다 정파적 정쟁으로 비화되지 않으려면 인간사의 모순과 역사적 갈등을 문화적 입체화로 그려보는 역량이 중요할 터이다. ‘역사의 현장’이라는 말은 이런 역설적인 중첩성과 아이러니를 함께 보여줄 때 더 잘 어울리고 그런 속에서 새로운 상상력과 대응력도 더 잘 길러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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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학자의 아름다움

100세 시대라 하지만 90년을 건강하게 활동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공부한 사회학계에 한정해서 본다면 한완상 교수님, 김경동 교수님, 신용하 교수님 등이 모두 구순이 되셨거나 가까왔는데도 변함없이 명석하고 열정적이시다. 직접 스승 제자 사이는 아니지만 이런 저런 관계로 가까이 뵈었던 백낙청, 이만열 교수님도 여전히 건강하고 지적인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각자 몸과 마음을 지키는 노력이 컸겠지만 이미 고인이 되셨거나 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동세대의 여러 분들에 비해보면 복을 많이 타고 나신 분들임에 틀림이 없다.

지난 6월에는 한완상 교수님을 모시고 몇 제자들이 모여 9순을 축하하는 조촐한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걸음걸이가 다소 불편하고 질환도 있으시다지만 기억력과 말씀이 여느 젊은이들 못지 않았다. 특히 사회학 공부를 하던 학창시절, 유학시절의 이야기를 하실 때는 젊은 때의 꿈을 상기하시는 모습이 장년같이 보였다. 기독교의 정신과 사회학 공부를 연결시키려던 당신 삶의 스토리를 정리하는 일을 도와달라신 청에 부응하지 못한 송구한 마음이 한켠에 여전하다. 나는 한 선생님 얼굴과 함께 평생 추구한 지적 화두들과 내 감사함을 담은 족자 한 점을 제작해서 헌정했다. 이후 한선생님 댁을 방문한 여러 분으로부터 그 족자가 거실 한복판에 걸려 있었다는 인사를 전해 듣고 다소나마 도리를 다한 듯 마음 한켠이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다.

지난 9월에는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제작하는 서울대 샤복샤복 유투브에 신용하 교수님과 대담을 나누는 역할을 했다. 다리가 다소 불편하지만 여전히 건강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모습이 후학 제자들에게는 큰 귀감이 된다. 내가 사회학자로 활동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학은과 배려를 베푸신 분이기에 굳이 연세와 상관없이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서울대에 기증하신 화양 신용하 문고 특별전시가 현재 준비 중이어서 그 행사와 함께 구순을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어볼 계획인데 모든 분들께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학은에 감사하는 자리를 어떻게 만들어볼지 고민 중이다.

이번 주엔 호산 김경동 교수님의 구순기념논문집 봉정식이 있었다. 60년대 학번인 김성국 교수와 70년대 초반 학번인 배규한 교수 등이 힘을 모아 두툼한 기념 책자를 간행했다. [선구자의 길- 김동의 동서융합 사회학] (박영사) 이라는 책인데 모두 3부로 구성되어 1부는 김경동의 학문세계의 총괄적 조망, 2부는 김경동 사회학의 계승과 확장을 다룬 논문들로 3부는 인품과 추억들을 담은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에세이를 쓴 분들은 대체로 70년대 관악시절을 기억하는 선후배 들인데 시대는 암울했지만 학창생활에는 나름 열정과 낭만이 없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요즘 분위기로는 구순기념논문집을 내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자칫 민폐가 되기 쉽고 자발적이고 흔쾌하게 진행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부분 60대를 넘기고 현재 70대 중반을 넘어서는 후학들이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했다. 교수님 댁을 방문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받던 일, 청아한 노래와 그림솜씨에 경탄하던 일, 꾸중을 들으면서도 고마왔던 일 등이 담겨있어 글 속에 훈훈한 온기가 가득하다.마치 60-70 들의 동문회장 같다는 농담이 오갈 정도로 학창시절의 추억담으로 행사장 역시 따뜻했다. 나도 참 오랜만에 선후배들과 옛날 생각을 하는 자리가 되었다.

아마도 이런 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호산 선생의 푸근한 인품, 이론적 포용력, 그리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지적 탁월함이 두드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누구보다 뛰어난 영어실력과 국제적 감각을 가진 분이면서도 동양사상, 선비정신을 이론화하려는 문제의식도 남달랐다. 시를 쓰고 소설에도 도전하며 기타도 치며 노래하는 르네상스형 지식인의 풍모가 이런 결과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 나는 명심보감의 한 귀절을 쓴 서예작품을 봉정했다. 김경동 교수님이 매우 좋아하셨고 사모님은 집안 거실에 두고 매일 감상하겠노라 하셨다. 아이오와대 김재온 교수님 축하글과 함께 책의 맨 앞을 장식하는 영광도 누렸다.

그러고보니 세 분의 선생님들을 올 한 해 이런 저런 계기로 뵙고 축하드리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 변변치 않지만 여러 형태로 감사의 뜻을 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이 세 분은 학문의 지향은 물론이고 인품과 인격의 색깔도 매우 다르다. 감사하면서 나는 90의 때 어떤 빛깔로 사람들에게 비칠까 생각해 본다. 그 때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부터 불확실한데 너무 이른 고민일수도 있겠다. 아름답게 물든 낙엽들 보면서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이 어렵고도 귀한 것이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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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위기 시대의 평화론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평화포럼’에 기조강연을 부탁받았다. 정부의 대외정책을 다루는 주요한 정책연구소인데 평소 별다른 연관이 없었던 나로서는 의외의 초청이었다. 포럼의 주제인 ‘평화체제구축’ 논의는 오래된 주제이고 나도 무관심하지는 않았으나 주요한 발언자로 참여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현실적인 정책논의에는 내 스스로 잘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파적으로 한 편에 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제도 부담스럽고 대부분 국제정치 전공자들로 구성된 심포지엄 구성과도 다소 거리가 있어 고민을 했지만 내 스스로도 정리를 해보고 싶은 욕심에 수락을 했다. 하지만 글을 준비하면서 몇 번 후회를 했다. 쉽지 않은 주제인데다 당장의 정책현안에 대해선 확신이 서지 않는 쟁점들도 많았다. 그래서 원칙적인 차원에서 발제를 하기로 마음먹고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려 했다. 첫째는 오늘날 평화를 위협하는 환경은 단순하지 않아 북한의 위협과 분단의 무게 못지 않게 21세기 국제절서의 변화, 지구생태계의 위험, 한국사회 내부의 갈등과 혐오도 주목해야 함을 지적했다. 복합위기의 시대 환경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중요성을 주문했다.

둘째로는 정중동의 한반도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살펴볼 것을 강조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이후 일각에서는 2018년의 시대로 되돌아갈 것을 기대하고 실제로 그런 정책을 주문하기도 한다. 그 당시 남북의 지도자가 판문점에서 밀담을 나누고 평양의 시민들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한국의 주선으로 북미간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싱가포르 북미공동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한반도의 먹구름이 걷히리라는 기대를 한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도 가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상황은 지금 현저히 변했고 그 변화가 구조적이고 불가역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고 했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더이상 동족, 동질의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국가관계로 재설정했다. 금년 7월 29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담화에서 “지난 몇년 간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한국은 절대로 화해와 협력의 대상으로 될수 없다는 대단히 중대한 력사적 결론에 도달” 했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동족이라는 수사적 표현에 구속되여 매우 피곤하고 불편했던 력사와 결별하고 현실모순적인 기성개념까지 말끔히 털어”버렸다고 했다. 남북교류의 확대를 내심 원치 않았던 곤혹스러움과 이제 그 현실모순적인 상황과 결별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평화론은 이전의 문제의식을 이어가면서도 이처럼 달라진 현실을 반영하여 업그레이드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냉전기의 안보평화론, 탈냉전기의 공존평화론, 핵위기 이후의 비핵평화론은 지금도 평화정책의 주요한 내용을 구성한다. 안보평화론은 오래된 고전적 평화론이다. 외부침략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힘을 가져야 평화가 가능하다는 관점은 지금도 중요하다. 동시에 탈냉전 이후 강조된 공존평화론의 유산도 여전히 주목되어야 한다. 남북간에 맺어진 모든 공동선언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군사적 신뢰를 구축하고 교류협력을 통해 상생공영을 추구함으로써 평화를 달성한다는 원칙을 표방한다.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되고 비핵화 의제가 국제적인 공동목표가 된 이후 평화논의는 비핵화 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비핵평화론이라 할 수 있는 이런 평화구상 아래 6자회담을 비롯한 다자적 프레임이 북한 비핵화를 위해 가동되었고 유엔의 많은 대북제제 역시 핵능력 고도화를 억제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현재 여러 어려움에 봉착해 있고 북한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비핵화가 평화의 핵심이라는 시각은 여전히 평화론의 주요 내용을 차지한다.

그래서 새로운 평화를 구상할 때 다음과 같은 세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첫째로 ‘복합역량으로서의 평화’라는 사고다. 평화는 구호나 이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고상한 슬로건으로 대체될 수도 없다. 평화는 비평화적 상황을 변화시키고 평화상태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역량이다. 전쟁억지력을 갖추는 것은 물론이고 내부의 갈등과 혐오, 환경이나 기후에서 오는 재난, 정보화 시대의 사이버 테러에도 대응할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로 ‘공존양식으로서의 평화’라는 시각이 중요하다. 평화의 최종상태는 갈등이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갈등의 부재나 종식이 아니라 갈등이 관리되고 조율되며 해소될 수 있는 역량이 자리잡는 것이다. 평화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주체들, 이질적 가치들의 공존양식이다. 민주주의 원리가 평화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이유도 이런 공존의 방식 때문이다. 완전한 화해보다는 상호 인정을 전제로 한 공존질서가 곧 평화일 수 있다는 관점인데 냉전기 ‘평화공존론’의 기본논리와 상통한다. 상이한 문화, 인종, 가치의 공존을 포함하는 다문화적 평화론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셋째로는 ‘미래전략으로서의 평화’ 에 대한 시각을 갖출 필요가 있다. 평화는 단지 갈등없는 상태가 아니며 평화가 내포하는 다양한 가치들을 실현하고 지향하는 공동체의 기본속성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이 경우 평화는 국가간에 한정되지 않고 시민사회 내 다양한 주체들의 일상에도 자리잡는 총체적인 것이 된다. 국제적으로, 내부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평화가 제도화하고 일상화하는 공동체를 구현하는 전략적 비전이 평화인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 나아가 한반도 국가공동체가 추구하려는 미래공동체의 모습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마무리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란 말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무는 중한데 갈 길이 멀다는 말을 ‘갈 길이 멀지만 임무가 중하다’는 의미로 고쳐 읽고 최선을 다하자는 덕담으로 끝을 맺었다. 안팎의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은 분명 멀고 어렵지만 그럴수록 이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는 임무의 중대함도 뚜렷하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지만, 현실 정책을 다루는 전문가들에게는 너무 원론적인 발제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기본과 원칙은 중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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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50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긴지 50주년이 된다. 2년여에 걸쳐 그 반세기를 지성사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공동연구를 수행했다. 나는 사회학 분과학 50년사와 별도로 전체 총론이 될 ‘사회과학 50년 지성사’도 집필을 부탁받았다. 그 결과물이 [서울대 사회대를 통해 본 사회과학 50년 지성사]라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10월 14일 그 내용을 발표하는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내가 총론을 발표하고 각 분과별로 집필자들이 개별 학문의 역사를 정리하는 시간으로 뜻깊은 자리였다.

1975년 서울대학교의 대대적 학제개편을 기점으로 문리대, 상대가 없어지고 인문대, 자연대, 사회대의 소위 ‘기초과학 3 대학’ 체제가 자리잡았다. 이것은 단지 한 대학의 행정편제 개편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한국사회에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이라는 학문분류방식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 ‘사회과학’이란 말이 소개된지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학문영역이라기보다 일종의 이데올로기, 좌파적 정치담론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오랜동안 ‘사회과학’이란 이름을 단 연구나 교육단위는 자리잡지 못했다. 북한에서 일찌기 ‘사회과학연구원’이 매우 중요한 정치이념기관으로 자리잡았던 것과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

한국의 사회과학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밀접히 연결되어 전개되었다. 대학의 팽창과 대학교육의 확장은 근대화의 주요 동력이자 그 결과였다. 한국의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세계화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회과학은 중요한 지적 자원을 제공했고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들이 그 인적 지적 자원을 제공했다. 1975년 사회대 출범을 가능케 했던 것은 1968년 4월에 확정된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이었는데 국가주도의 발전모델을 심화시키려던 시대적 상황이 그 배경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이 종합화계획은 정부의 강력한 법적 재정적 지원을 배경으로 추진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나는 총론을 발표하면서 반세기 지성사의 성과와 성취 못지 않게 여러 문제점도 지적했다. 80년대 사회대가 보여주었던 다학제적이고 종합적인 연구협력의 전통이 확대발전되었다기 보다는 학과별 내부화와 전문화로 더욱 치달은 점, 아카데미즘과 정책연구의 관계에 대해서도 대학의 자율성과 다양성, 교수의 독자성이라는 틀 속에서 공존해온 셈이지만, 진지한 논의를 통해 아카데미즘의 기본성격을 새롭게 정립하는 노력은 그다지 없었던 점도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어떤 학생을 키워낼 것인가라는 교육론에 있어서의 반성이 부족하고 여전히 최고대학이라는 이름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성찰해야 할 것을 주문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1999년 임마뉴엘 왈러스틴은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이라 책을 편집 출간하면서 “21세기를 위한 사회과학”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근대형성기에 구축된 사회과학의 적합성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새로운 세계질서는 새로운 사회과학을 필요로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책자였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그의 비관적 전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근대 초기 정립된 지식체계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데는 대부분 공감한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혁명의 급진전 속에서 대학의 개혁이 화두로 부상하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회과학은 미래를 위한 어떤 전망을 내놓을 수 있으며 우리 시대에 어떤 희망과 꿈을 던져줄 수 있을까? 융복합의 시대에 인문-사회-자연의 학문 3분류는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온라인에 쏟아지고 인공지능의 능력에 전인류가 놀라고 있는 상황에 대학은 언제까지 지식생산과 고등교육의 전담기구로 존속할 수 있을까? 각자도생의 경쟁에 함몰된 젊은 청년들에게 사회대가 제공하는 삶의 향방과 지혜는 무엇이어야 할까? 그 답을 얻었노라 자만하지 않고 이 질문들을 진실되게 되물으며 지식인으로서의 존재양식을 새롭게 고민하는 것, 시대적 우환의식을 공유하는 것에서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해 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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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그리다

광복 80주년 기념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개최하고 있는 “향수 고향을 그리다” 전시회를 관람했다. “일제강점기에서 현대까지 각 시대의 표정이 담긴 한국의 풍경화를 살펴본다”는 것이 이 전시의 기획의도라 한다. ‘Landscape of Homeland and Longing“이라는 영어 표현 그대로 ‘고향’과 ‘향수’와 ‘풍경’이 핵심 키워드이고 작품명에도 피난, 먕향, 귀로 등의 단어가 종종 등장한다.

총 4부로 나뉘어진 전시실을 둘러보면 한국현대사를 파노라마처럼 만난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20세기를 고향이란 화두로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풍경화라는 그림 장르가 그런 정서에 잘 어울리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림 사이에 배치된 정지용, 윤동주, 이상화, 김기림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들의 시도 그런 느낌을 더한다.

전시의 첫 공간은 1920-40년대에 그려진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빼앗긴 땅‘ 이미지로 식민지 상황을 형상화한 풍경들이다. 암울한 시대를 조선색, 향토색을 탐구하면서 견뎌내려 한 이들의 정서를 지금 내가 공감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론 새로운 미학적 표현욕을 추구하면서도 식민지라는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딜렘마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김용조, 이인성, 금정연 등의 작품이 언뜻 유럽의 미술관에서 보던 풍경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가로수, 마을, 인물 등 소재가 모두 향토에 대한 짙은 애정을 담고 있는 것이 그런 내면을 드러낸 것 아닌가 싶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의 형 이상정의 작품은 처음 보았다. 군인이자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망향곡’이란 서정시를 쓰기도 했고 망명생활을 ’표박기‘라는 일기로 남겼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가 사용하던 여러 중류의 낙관도 전시되어 있는데 작년에 그의 백부가 조카의 귀국을 기다리며 쓴 서예작품을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이상정, 이상화를 보니 뛰어난 사회학자이자 초대 IOC 위원이었던 이상백의 얼굴도 떠오른다. 한국 대표 명문가의 3형제를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셈이다.

2부는 광복 직후의 상황을 그린 작품들이다. 입구에 전시된 이상범의 6폭 병풍은 ’효천귀로‘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1945년 작품이다. 해방 직후 고향으로 돌아오는 감격을 풍경 속에 담은 것이 아닌가 싶은데 수묵화의 잔잔한 배치 속에 정겨움과 그리움이 안개처럼 서려있다. 나는 1948년 문신의 작품인 ’뒷산과 하늘‘ 앞에서 한참 머물렀다. 파란 하늘의 색감과 구름의 흰색이 너무도 선명해서 광복 이후의 흥분과 기대감이 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오지호의 1948년 풍경도 당시의 기대와 희망 속에 약간의 염려를 담고 있는 듯 했다.

3부는 ’실향‘이란 타이틀 하에 ’폐허의 땅‘이란 부제를 붙인 전시공간이다. 6.25 전쟁의 참화와 피난의 애환을 담은 그림들이다. 피난민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이종무, 서석규, 윤중식, 남관의 여러 그림들은 당시의 상황을 찍은 보도 사진 이상으로 시대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증언자료라 할 만하다. 솔직히 나는 전쟁과 분단, 이산의 역사가 이렇게 많은 미술 작품으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수억의 ‘625 동란’, 남관의 ‘피난길’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고 1951년 전쟁 중 윤중식이 그린 ‘전쟁드로잉’과 이달주의 ‘귀로’ 앞에서는 작가가 느꼈을 비애를 공감하는 듯 했다. 후일 한글의 조형화에 앞장섰던 이응노 화백이 전쟁의 폐허와 전후 도시풍경을 여러 화폭에 담았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전시실 한 켠에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가 걸려있다. “아모도 그에게 수심을 알려준 적이 없기에 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 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려서 공주처럼 지쳐서 도라온다 ” 인터넷 상의 설명을 빌어본다면 시에서 나비는 순수하고 연약한 인간존재를, 바다는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혹독하고 냉혹한 현실세계를 상징한다. 해방 후의 현실이 ‘청무우밭’인 양 환호했던 자신의 모습이 마치 물정모르는 흰 나비같다는 당혹감이 이런 시상을 낳았을 것이다.

마지막 전시실은 ’망향‘이라는 타이틀 하에 ’그리움의 땅‘이란 부제를 달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수많은 실향민들의 한, 망향의 그리움이 핵심 주제다. 대부분의 실향작가들은 개인적으로 이산과 가난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한국화단의 중심에 서기도 어려운 시기를 살았다. 박성환, 이중섭, 홍종명, 최영림, 전화황 등의 그림에는 주변성이란 값비싼 비용을 치루면서 일구어낸 독특한 미학이 아름답게 담겨있다. 이석우의 ‘피란길’은 남부여대하고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작년 그리스에서 보았던 ‘이주인의 애환’ 전시의 대표작을 생각나게 했다. 실향과 이산의 경험은 전세계 공통의 이미지를 낳는게 아닌가 싶다.

급격한 근대화 속 60년대 변화상을 그린 작품들을 만난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만익의 서울역 (1962)과 청계천 (1964), 김원의 서울전경 (1961) 등은 60년대 초 한국사회가 겪은 대변혁의 현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들 작품이 어떤 사진자료나 신문기사보다 이 시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느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소망을 그린 작가들의 상상력과 이상향의 추구도 새롭게 와 닿았다. 박돈의 ’성지‘ (1957), 홍종명의 환희 (1970), 윤종식의 삶(1953) , 이석우의 ’낙원‘(1970) 등이 그러하다. 굳이 사회성이나 시대성을 명시적으로 표방하지 않아도 구도와 소재, 표현에서 드러나는 당대의 분위기는 그 자체가 역사적 자료라 할 만하다.

21세기 오늘 젊은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노년세대들조차 고향의 정서는 예전같지 않다. 죽기 전 고향땅을 밟아보겠다던 실향민의 망향 정서도 세월과 더불어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래서인가, 망향으로 끝나는 전시가 웬지 허전하다. 어딘가 망향 이후의 그리움을 전시하는 공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21세기 도시인은 어디를 향한 향수를 노래하고 어떤 그리움을 그릴 수 있을까? 인생이 지향해야 할 ‘본향’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 덕수궁을 나서면서 그런 물음들을 혼자 던졌다. ‘본향을 향하네’ 흑인 영가의 한 귀절이 귓전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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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자본의 유형학

‘꿈의 사회학’ 강좌를 개설한 지 다섯 해가 되었다. 강좌가 개설된 학기에는 예외없이 학생들의 관심이 높았다. 매번 수강신청이 조기마감되고 추가신청자의 요구를 거절하느라 힘이 들었다. 이 과목이 자신의 삶, 미래설계와 직결되는 내용이리라는 기대가 관심을 끈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전에 없던 새 과목을 개설한 이유가 학생들의 고민에 부응하는 강의를 하려는 의도였으니 그런 반응은 반갑고 고마운 것이다.

매년 강의 내용을 업데이트하고 또 학생들이 쓴 보고서를 읽으면서 원래의 시각이 조정되기도 하고 새로운 쟁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이 과목이 유용하고 필요하다는 애초의 생각이 좀더 강한 확신으로 자리잡는 것을 느낀다. 다만, 꿈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이나 이론화 작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국내외를 통털어 이 강좌명으로 개설된 것이 거의 유일한 탓에 강의내용 구성에 힘이 꽤 많이 든다. 자칫 내 편견이나 생각이 수업내용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따르는 심리적 부담감도 크다.

사실 꿈이란 단어는 매력적이지만 정작 그것을 직면하고 분석하려들면 애매하고 부담스럽다. 꿈을 가지라는 조언은 상대방을 격려하는 말로 편하게 쓰이기도 하지만 맥락과 형편에 따라서는 자제하거나 피해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너도 큰 꿈을 키워라’는 말은 상대방을 믿어주는 호의의 표시일 수 있지만 자칫 성공을 향한 집념을 요구하는 강요가 될 수 있다. ‘너는 꿈도 없냐?’라든지 ‘그래서야 뭐가 되겠니?’라는 압박감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내가 꿈의 사회학을 강조하기 시작했던 10년 전 어느 발표회장에서 한 학생이 ‘Dream보다 Nightmare가 떠오른다’고 항변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꿈자본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내가 느끼는 딜렘마도 이와 연관된다. 애초 꿈자본이란 개념화를 시도한 김홍중 교수는 너무 생존과 경쟁에 허덕이는 청년층에게 새로운 방향과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음을 강조하려 했다. 꿈이 일종의 자산이자 자본일 수 있다는 말은 경제적 보상이 따르지 않아도 젊음과 열정 그 자체를 사랑하라는 격려성 의도가 강했다. 하지만 자본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순간, 그것은 많고 적음을 전제하는 정량적 속성을 수반한다. 꿈자본을 측정하고 객관화하면 할수록 그 자본의 크기에 따라 우열을 나누고 평가하는 경향도 함께 커진다.

분명히 꿈자본도 인적 자본 (human capital)의 하나이고 포괄적으로는 사회적 자본의 일부다. 그것이 자본인 한 크고 많은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실제로 학생들에게 꿈자본을 키우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록 현재 가진 것은 없고 당장 실현되기 어려운 미래일지라도 그것을 꿈꾸고 희구할 수 있는 것이 젊은이의 특권이 아니냐고 강조한다. 안팎의 상황이 어렵더라도 너무 위축되거나 기죽지 말라는 뜻이지만, 실제 학생들에게 가닿는 의미와 효과가 과연 그러할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자기의 꿈자본이 약하다고 자책하는 보고서도 없지 않다.

김석호 주윤정 교수팀이 꿈자본을 측정하고 유형화한 것은 이 분야의 선구적 시도로 그 의의가 크다. 다만 선구적인만큼 시론적인 차원에 머물러 여러가지 보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나로서는 꿈의 경로와 방식이라는 심리적 차원에 주목함으로써 꿈의 지향성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꿈은 개인이 꾸는 것이고 그 강도도 심리적인 속성이 강하지만 그 지향과 방향은 그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역사에서나 사회에서 강조되는 다양한 꿈, 그에 따르는 꿈자본의 다차원성이 좀더 부각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꿈의 사회학적 속성을 주목하는 내 입장에서는 꿈의 내용이 공동체 차원을 지향하는 것과 개인적 차원을 중시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유형화의 한 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신문화적 가치와 정치경제적 효용의 어느 부분을 강조하는가가 또 다른 한 축이 될 수 있다. 이 두 축으로 유형화를 하면 김석호 교수와는 다른 또다른 범주구분이 가능해진다. 그 유형은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1유형 – 공동체 차원을 중시하고 정치경제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꿈자본 / 2유형 – 공동체 차원을 중시하되 정신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는 꿈자본 / 3유형 – 개인 차원을 중시하고 정신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는 꿈자본 / 4유형 – 개인 차원을 중시하고 정치경제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꿈자본. 이를 그림으로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유형화는 지나치게 1유형의 꿈자본이 강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비판을 담고 있다. 우리 시대는 정치경제적으로 영향력이 크고 국가나 기업, 사회 전반을 염려하는 위인, 영웅, 큰 인물에 대한 선호가 강하다. 꿈을 키우라는 말이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연봉, 더 강한 권력을 향유하려는 성취지향성과 같이 이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결과는 끝없는 경쟁이고 비교이며 결과적으로 다수의 좌절감과 열패감이 커지는 것이다.

이에 대척점에 있는 것이 3유형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 전반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으면서 개인의 내면적 가치나 의미를 추구하는데 열심인 경우다. 사회적 관계에 서투르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유형이다. 일반적으로는 원대한 꿈이 없고 경쟁을 회피하는 소극적 인간으로 평가받기 쉽다. 하지만 많은 창의적 인간, 예술적 창조가 이런 덕후형 인간에게서 나타났음을 경시해서는 안되고 이 유형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 꿈이 지나치게 공동체 차원에서 고려되는 것은 문제다. 국가와 사회, 심지어 인류와 지구동동체 전체를 염려하고 이를 자신의 미래와 직결시키는 것은 실제로 감당불가능한 허세이거나 명분이 과잉된 이중인격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그렇다고 꿈이 개인적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을 전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환영할 수만은 없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적 세계, 개인적 차원의 행복만 추구한다면 그 공동체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웃과 공동체, 사회전체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꿈으로 내면화할 수 있어야 한다.

꿈자본도 사회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어느 정도 유형적 균형이 필요하다. 꿈자본의 사회적 포트폴리오라 할 수도 있겠다. 좋은 사회란 다양한 유형이 적절한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고 모든 구성원이 자기에게 맞는 꿈을 추구할 수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꿈의 사회학적 논의, 꿈자본의 유형화가 힘든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꿈의 지향성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내적인 자신감과 회복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