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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민족 – 1

한국은 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통일을 정당화한다. 나찌즘의 비극을 기억하는 독일사회는 민족의 정치화에 거부감이 있다. 89년 말에서 90년 3월에 걸쳐 ‘우리는 인민이다’라는 구호가 ‘우리는 민족이다’라는 구호로 대체되면서 통일열기가 부상할 때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민족감정을 놓고 격렬한 대립을 겪었다. 십여년전 당시의 논쟁을 정리하면서 나는 독일통일에 민족정서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검토해본 바 있다. 작가 귄터 그라스 등의 강력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통일이 진행된 이 대전환에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크게 작용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단시대 독일은 언제나 문화국가로의 통일을 강조했다. 전 연방내무부 차관보였던 크노블로흐는 수십년에 걸친 동서독 대립과 두 국가론에도 불구하고 단일국가로의 지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토대가 문화였다고 했다. 72년의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과 86년 문화협정으로 이어진 바탕에는 독일이 공통의 문화를 지닌 역사적 공동체라는 믿음이 놓여있다. “문화는 독일 국가가 통일을 이루는 과정과 유럽연합으로 가는 길에 있어 자주적이며 필수불가결한 기여를 한다”는 조항이 그런 신념의 소산이다. 각 주의 ‘문화주권’과 연방정부의 관할권 사이의 긴장이 없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평화통일의 능동적 요인으로 작동한 것으로 평가한다. 클라우디어 로스 장관 역시 미리 배포한 발제문에서 “문화”가 신뢰와 중재의 힘을 발휘했고 음악, 연극, 문학이 동독 내부의 불만, 비판, 자유를 향한 열망을 대변하면서도 그것에 ‘평화로운’이란 수식어를 붙게 만드는 핵심적 요인이었다고 썼다.

슈납파우프는 기본조약의 체결로 서로의 실체를 제도화하면서도 “독일 민족이 자유로운 자결권을 바탕으로 한 재통일”을 추구할 권리를 부인하지 않는 지속적 노력이 통일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기본조약이 국적관련 사안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표명도 같은 맥락이다. 헌법재판소 역시 “기본법이 독일의 분단을 인정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을 근거로 양독 간 경계선을 연방주들 사이의 경계선과 같은 성격으로 판시했다. 비행기 속에서 읽었던 김영희 대기자의 [베를린 여행]에서 브란트 정부가 동방정책을 추진하고 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도 모스크바와 주변국가들을 대상으로 독일의 통일이라는 미래비전을 인정받으려고 부단히 애썼음을 읽은 바 있었다. 조약이라는 양자관계의 틀을 발전시키면서 외교라는 고도의 정치과정을 통해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놓으려 한 노력이 1990년 통일에 소중한 자산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문화와 조약을 근거로 동서독의 단일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독일 민주주의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한 특성이다. 문화국가는 민족국가의 부정적 함의를 대신할 대안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독일인을 증명하는 국적법의 핵심 요소는 혈통이다. 속지주의를 채택한 미국과 달리 독일은 한국과 같은 속인주의를 견지한다. 실제로 통일과정에서 동독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독일인이 국적을 인정받고 독일로 이주했다. 나는 토론에서 국적법의 혈통변수가 독일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어떤 비중을 점하는지 질문했으나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다. 극우의 부상에 담긴 종족주의를 우려하는 독일사회에서 민족 개념은 여전히 인정하기엔 부담스럽고 부정하기엔 뿌리깊은 그 무엇일지 모르겠다. 언어, 문자, 전통, 역사, 신화가 문화의 핵심이라면 문화는 종족의 특성을 가르키는 것일 수 있으니 문화국가와 민족국가의 간격은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문화국가와 민족국가의 구별과 대비는 매우 중요했다고 판단된다. 문화가 혈통을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여백과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문화국가라는 말이 갖는 유연함, 포괄성, 비정치성을 내세워 민족감정의 분출을 우려하는 안팎의 염려를 관리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하버마스가 강조한 ‘헌법 애국주의’도 민주주의를 본질로 하는 헌법적 가치를 중시하고 혈통주의적 민족론을 극복하게 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문화국가론은 통일과정의 여러 문제들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기능도 수행했고 냉정한 계산을 넘어 기대와 꿈을 갖게 만드는 유토피아적 전망으로도 작용했다. 통일 후의 여러 비판과 논란은 문화라는 말에 담겼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의 긴장에서 유래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의 민족국가론도 문화주의적인 재해석과 국제주의적 감각을 보다 수용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정주외국인 비율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다문화적 상황이 확대되는 시대에 통일논의의 종족주의적 혐의를 벗어나려면 공동체의 문화적 재구성이 절실하다. 또한 그런 지향이 전지구적 가치와 연대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것임을 설득하고 보여주려는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이산가족찾기에서 보듯 민족정서는 남북을 하나로 잇는 강력한 자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21세기 한국사회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다원화하고 있고 북한의 민족관념도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다성과 이질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포용적 정체성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권헌익 교수가 발제에서 민족을 넘는 다양한 남북간 소통과 관계양식을 고민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으리라. BTS를 위시한 K-Culture의 개방성과 역동성을 수용하고 다양한 혈통과 다중적 존재를 포용할 수 있는 혼성적 정체성이 자리잡을 때 통일의 가능성도 커질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려면 민주주의 가치의 일상화, 제도화가 필수적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