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재 (居然齋)
박명규의 온라인 집 | https://mkpark.net
덕유산 자락인 安義의 화림 계곡은 풍광과 산수가 빼어나 옛부터 산림처사들이 사랑한 장소다. 농월정(弄月亭), 심원정 (尋源亭) 거연정(居然亭) 같은 멋진 정자들이 지금도 옛모습을 간직한 채 연이어 서 있다. 어릴 적 오가던 이곳이 선비의 절개와 은둔자의 지혜가 모여있는 공간으로 느껴진 것은 내 도시 생활이 오래된 이후였다. 아마도 내 마음 한 켠에 이곳의 정서와 분위기가 정신적 고향처럼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정년을 맞아 서울대를 떠났다. 다행히 광주과학기술원에서 가르치게 되었지만 조만간 정년 이후의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한다. 고향으로 내려가 귀거래사를 읊을 처지는 못되어 대신 온라인에 한 거처를 마련했다. 화림계곡의 고즈녁한 분위기를 닮아 달을 노래하는 여유로움 (弄月), 근원을 탐구하는 성찰성 (尋源), 자연 속에 거하는 담담함 (居然) 이 거하는 곳이 되기를 바라 거연재 (居然齋) 라 이름한다.

박명규 (朴明圭)
1955년 경남 함양 출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자 광주과학기술원(GIST) 초빙석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연구자이자 교육자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육군사관학교와 전북대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오랫동안 한국사회사, 민족사회학, 공동체와 아이덴티티, 문화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장을 지냈고 2006년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을 설립, 초대원장으로 10년간 재임하면서 남북관계와 평화연구의 확산에 힘을 쏟았다. 사단법인 한국사회학회와 한국사회사학회의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최근에는 과학기술의 문명론적 함의를 탐구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반도평화연구원의 연구위원, [계간 창비], [사회와 역사], [지식의 지평], [문명과 경계]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포스텍 융합문명연구원과 한림대 도헌학술원의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2020년 서울대 정년을 기념하여 제자들을 비롯한 동학들에게 써준 글씨들로 [以文會友- 학문의 인연 묵향에 담다/ 제1회 박명규 서예전]을 개최한 바 있다. 산책과 서예를 즐기며 아호는 정헌(靜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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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
이곳에 내 가족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둔다. 족보나 혈통, 가문을 내세우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도 그런 전통에는 관심이 적은 편이다. 다만 자녀들이, 또 나를 아는 사람들이 언젠가 궁금할 때 최소한의 내력을 알 수 있게 하려는 뜻이다. 개별 가족의 역사도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의 역사가 담겨있고 다소 과장하자면 인류문명사가 서려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은 한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한국사회에서는 가족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유학을 중시하셨던 조부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사고뱡식이 강했던 부친도 유교적인 태도와 가치가 몸에 밴 분이셨다. 하지만 조부는 일찌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제사를 폐했을 뿐 아니라 동네에 교회를 세워 설교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이질적일 수 있는 기독교적 가치와 유교적 가치가 묘하게 공존하는 집안이었다. 그런 이중성은 종종 조부와 조모, 부친과 모친 사이의 견해 차이로 나타나기도 했고 자녀교육의 방식을 둘러싼 가족 내 긴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했던 탓에 내 속에 그 두 세계관이 때론 사이좋게 때론 갈등하며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다.
내 집안은 밀양 박씨 규정공파에 속한다. 전해오는 족보에 의하면 나는 시조로부터 69대 손에 해당한다. 신라의 건국으로까지 이어지는 이런 가계의 연속성이 일견 대단하기도 하지만 그다지 중요하거나 실감이 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게 큰 영향을 미친 부모님, 문집과 글들을 꽤 남기신 조부대에 관하여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국내외에 흩어져 살며 각기 제 앞가림하느라 경황이 없는 아이들이 이런 가족사에 접할 기회는 점점 더 희박해질 것이다. 집안에 전해져오는 오래된 문집이나 문적들이 언제까지 보존될 수 있을지 내 스스로도 자신이 없을 정도다. 따라서 최소한의 도리일 듯 싶은 정도 내에서 간략하게 내 가족사의 흐름을 정리해 두려 한다.
[부모님] 내 아버지는 박희민 (朴熙敏) 님으로 호를 남강(南岡)이라 했다. 경남 함양에서 1914년 박영화-오상옥 님의 1남 3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가 무사시노 학원을 다녔고 해방후 귀국하여 초등교육계에 투신했다. 교원이 부족하던 시기여서인지 금방 교장으로 발령을 받아교직생활 대부분을 교장으로 재임하셨다. 60년대 국가주의적 교육철학에 공감하여 거의 학교일에 매어달리다시피 열심을 다했다. 지역사회와 젊은 교사들에게도 온화하면서도 분명한 리더십을 행사한 분으로 인정을 받았다. 문장력이 좋고 역사에 대해서도 식견이 풍부해 [함양군지]를 비롯하여 여러 향촌사와 문화유적관련 글들을 쓰기도 했다. 붓글씨를 잘 쓰셔서 인근의 기념비 등에 그 서체가 제법 남아있고, 정년 이후 서울에서 한때 서예교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상당한 커피 애호가였으며 양식을 즐기셨다. 술은 잘 드시지 않았고 항상 깔끔한 와이셔츠에 주름이 잘 잡힌 바지와 정장을 입으셨다. 집안에서도 자세를 흐트리는 법이 없어 주무실 때를 제외하고 누워계시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여름에는 하얀 백구두를 신고 차가운 바람이 불면 중절모를 쓰며 영국 신사같은 지팡이를 들기도 하신 멋을 아는 분이셨다. 젊은 시절에는 발명, 사업 등에도 관심을 두어 만능자 등 몇 개의 실용신안특허를 얻어 상품화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부산시내의 학교장으로 전임되었지만 병행한 출판사업의 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안의초등학교, 함양초등학교를 거쳐 초동국민학교에서 정년을 했다.
부친은 매우 열정적인 교육자이자 창의적인 연구자였다. 일본에서 당시 힘을 얻던 ‘가설실험수업’을 도입, 재직하던 학교에 그 방식을 적용하려 많은 애를 썼다. 지방의 초등학교에서 이런 교육방법을 수년간 지속하고 그 결과를 기록하며 출판하려 했던 사실이 당시에도 교육계의 주목을 끌었고 이 성과가 일본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되기도 했다. 학교에서의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가설실험수업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저술, 출간하기도 했다. 주입식 교육이 아닌, 학생들 스스로 가설을 세워 해답을 찾아가는 교육방법은 후일 ‘프로젝트’ 중심 수업이나 토론중심 교육론과도 상통하는 선구적인 실험이었다. 지금 보아도 그 문제의식은 꽤 선구적이었다 여겨진다. 이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비롯한 많은 상훈과 정부 훈장을 수여받았다. 정년을 맞이해서 여러 글들을 모아 [남강 박희민선생 논집]을 자녀들이 간행, 봉정했다
내 어머니는 송경숙 (宋景淑)님이다. 경남 수동이 고향이고 송정헌 님의 3남 4녀 중 맏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일제시대에 진주의 일신고녀에 유학을 보낼 정도로 외할아버지가 아끼셨다 한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씨가 일신고녀에 함께 다닌 조선인 여학생이었다. 해방 후 교편을 잡았고 잠시 학교를 떠나셨다가 다시 교직으로 복직해서 학생을 가르치셨다. 눈물과 인정이 많은 반면에 세속적인 계산이나 몸치장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셨던 분이다. 매우 지적이셨고 문장력이 좋았으며 옳은 일이라면 학교장과 의견대립을 마다하지 않으실 정도로 강직한 분이셨다.
어머니는 기독교 신앙을 깊이 내면화하고 전도에 관심이 많았다. 성경공부와 전도사역에 시간과 노력을 더 쏟지 못하는 상황을 늘 아쉬워했고 집안에 선교를 하던 분들이 자주 들리곤 했다. 조부가 세운 고향마을의 교회당이 무너진 후 한동안 집의 사랑채를 교회당으로 사용했는데 어머니가 그 곳을 오래 지켰다. 학교를 퇴직하신 후 퇴직금의 상당부분을 교회건립을 위해 헌금하실 정도로 교회와 전도를 집안의 사명처럼 여기셨다. 서울로 올라오신 후 수유동교회에서 권사 직분을 받고 내가 직장을 갖게 되자 서울동노회 주관의 성서대학에 입학, 2년반 신학과정을 마쳤다. 남들이 어려워하는 조직신학, 철학사, 교회사가 너무 재미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유학적인 사고와 태도가 몸에 배신 분이셨다. 체면을 중시하고 명분을 강조하셨으며 지적인 수월성을 존중했다. 권력과 돈을 멀리하라는 이야기를 종종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이에 반해 어머니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강했고 사람을 중시했다. 예의나 격식보다 마음을 더 중시했고 격의없이 어려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표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어머니는 내가 성직자가 되었으면 하셨다. 어릴 적부터 두 분이 심하게 다투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 바탕에는 하나같이 유교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의 대립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아버지는 1996년 6월 25일에 서울에서 수술 후유증으로 보라매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그보다 앞서 1989년 12월 31일 전주의 집에서 숨을 거두셨다. 두 분 모두 고향의 선산 양지바른 곳, 두 분이 재직하셨던 초동국민학교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모셨다. ‘성도 박희민, 권사 송경숙의 묘’ 라는 비석이 서 있고 두 분의 생애에 대한 글이 적혀있다. 비문은 내가 썼다.
두 분이 잠든 선산은 채봉골이라 불리는 동네 뒷산이다. 그 산 안쪽에 조부모님 묘소가 있고 더 윗쪽으로는 증조부모님 묘소도 있다. 어머니는 특히 이 산을 아끼셨다. 자녀들이 나이들면 찾아올 수 있는 땅이 필요하다고 이곳에 낙엽송, 밤나무를 열심히 식재하셨다. 골짜기에 밭을 일구시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과거엔 나무가 별로 없었으나 지금은 많이 우거져 입산이 쉽지 않을 정도다.
[조부모님] 내 조부는 박영화 (朴永和) 님으로 화사(花史) 라는 호를 사용했다. [화사집]이란 시문집을 저술했고 한학에 밝은 선비로 박동 마을에 거주했다. 빈한하지는 않았으나 그다지 부유한 편도 아니었다 한다. 동네에서는 학식과 바른 언행으로 어른 역할을 하셨고 서당 훈장으로 존경을 받았다. 자신의 부친인 박준구 (朴準求) 공을 기려 정자를 짓고 그의 호를 따서 애산당(愛山堂)이라 이름했다. 애산당의 다른 한 편은 정자의 형태를 갖추고 귀원정(歸園亭)이라는 현액이 걸려있었다. 애산이란 말과 귀원이라는 말 속에 그 지향하는 바가 어렴풋 느껴진다. 앞마당에는 아름드리 벗꽃나무가, 옆에는 큰 바위가 서 있고 뒷편에는 대나무가 자라는 운치있는 공간이었다.
이 정자에는 의친왕 이강의 글씨를 비롯하여 경향 각지 문인들의 글을 현액으로 각자해둔 작품들이 40여점 걸려 있었다. 각자를 잘하는 장인을 수소문해서 한 서각장인이 몇 달간 집에서 기식하며 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보아도 글씨에 맞춘 각자의 수준이 매우 높다는 느낌을 받는다. 조부께서는 의친왕 이강공과 교분이 있어 그의 글씨가 꽤 여러 점 집안에 전한다. ‘밀성세족 화림사보’라는 글씨는 ‘화사’ 집안에 대대로 문인전통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의친왕이 써준 글씨다. ‘애산당’이라는 글씨를 비롯하여 ‘경운독월 은사정취’나 ‘이조우로’ 같은 현액은 글씨도 좋고 각자도 훌륭해서 보존할만한 문화재적 가치도 있다고 여겨진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지금은 이 정자가 무너지고 없어졌고 멋진 현판들이 정자가 아닌 내 아파트 광 속에 있으니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없어 아쉽다. 애산당 정자의 모습은 [함양문화재]에 옛 사진으로 전해진다. 조부가 직접 붓으로 쓴 시문집이 여러편 전하는데 글씨는 단아하고 깔끔하게 장정되어 있다. 현재 조부의 영정 사진이 전해지는데 총명해 보이는 눈빛이 매섭고 강직한 조선 선비의 전형적인 인상을 풍긴다. 증조모의 효성을 조정에 상신하여 효녀열녀로 표창받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돌로 세운 효부열녀 정문이 먼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채봉골 산소 입구로 옮겨져 있다.
할머니는 오상옥 님인데 어질고 유순한 분이셨다. 어느 누구에게도 화를 내시거나 큰 소리를 치시는 법이 없으셨다. 늦게 태어난 손자라고 나를 끔직하게 아끼셨고 귀한 사탕들을 숨겨두었다가 나에게 쥐어주곤 하셨다. 며느리인 어머니와 기독교 신앙관이 일치하기도 했지만 늘 며느리 편을 드실 정도로 포용적인 분이셨다.
[형제자매] 우리 집안은 밀양 박씨 문중 가운데 규정공파에 속한다. [밀성박씨 규정공파 세보] 에 의하면 규정공 鉉 님은 박혁거세의 45대 손이다. 그로부터 9대를 내려와 해백공 召榮님 대에서 다시 여러 분파가 나뉘어지는데 우리 집안은 해백공파에 속한다. 나는 시조인 박혁거세의 69대손이고 규정공의 25대손에 해당하며 해백공의 16대 손이 된다. (사실 혁거세 시조왕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니 이 족보상의 세대계산이 얼마나 정확한 것일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신라의 역사시대와 연대는 비슷하다.) 해백공의 후손들은 남자가 귀했다. 내 위로 6대가 독자였다.
나의 대에 이르러 비로소 남동생 양규가 태어나 형제를 이루었다. 동생인 양규는 진주고등학교를 나와 항공대학을 거쳐 항공기 전문 엔지니어로 대한항공, 삼성항공에 재직하다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자유로운 삶을 늘 추구하던 동생은 오클랜드의 자연과 바다를 즐기면서 종훈, 종언 두 아들을 두고 행복하게 살았으나 지병으로 2016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사망했다. 그곳 공원묘지에 한 해 전에 먼저 떠난 사랑하던 제수 오진숙과 함께 뭍혀있다. 종훈, 종언 두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뉴질랜드 현지에서 의사로 생활하고 있다.
내 위로 네 분의 누이 (정갑, 남희, 정옥, 윤규)가 계시고 여동생(정순)이 한 명 있다. 누이 세분과 여동생은 모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제는 모두 정년을 했다. 자형들은 축협과 한전, 중학교와 대학교에서 일하고 가르치셨다. 다들 기독교 신앙을 지닌 집안으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남강동기회]를 결성해서 매년 가족들이 모이고 있다.
[나] 나는 1955년 함양의 지곡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께서 지곡국민학교 교장으로 계셔서 그 교장사택이 내 탄생지다. 그 바로 옆이 유명한 하동 정씨 종택인데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촬영지가 되고 있다. 내 부모님과 종택의 종손 내외분은 가까이 지냈고 내가 태어났을 때 그 종부께서 턱받이를 만들어 주셨다고 들었다. 후일 내가 서울대에서 은사로 모신 김진균 교수가 이 댁의 사위이고 그 사모님이 국민학교 졸업할 때 아버지가 교장이셨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몇년전 지곡 마을을 들러 종손 어른을 만났을 때도 아버지 함자를 기억하고 계셨다.
안의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혼자 유학을 떠났다. 서울의 친척이 보내준 원서가 보성중학교여서 이곳에 시험을 치고 합격했다. 시골 촌놈인데다 자취하는 학생인데도 입학성적이 좋았고 계속 성적이 최상위권이었던 탓에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학생들로부터 존중을 받았다. 보성중학교는 일제 시대 민족문화유산을 지키는데 큰 힘을 쏟았던 간송 전형필이 세웠고 그 아들인 전성우 님이 교장이셨기에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자취하던 수유리에는 보성중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이 여럿 있었고 그때 내가 출석하던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평생의 우정을 유지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사실 1960년대 후반 경남 함양에서 서울로의 유학, 그것도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의 단신 유학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전화는 물론이고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이어서 가족과의 소식 주고받기도 매우 힘들었다. 연락은 편지를 보내야했고 급한 일이 있으면 전보를 쳐야했다. 방학 때나 하루 종일 걸려 남원이나 김천을 거쳐 고향으로 내려올 수 있었고 학기 중에는 부모님도 오실 기회가 거의 없었다. 중학교 1학년 시기를 고모님 댁에서 생활했고 그 이후에는 줄곧 자취를 했다. 수유리의 작은 방 한칸에서 생활을 해야 했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그때는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는지 크게 고생했다는 기억은 들지 않는다.
당시 다니던 수유동교회와 우이감리교회가 내 힘든 자취생활을 지켜주는 소중한 울타리였다. 목사님은 어린 자취생을 불쌍하게 여기셨는지 자주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셨고 내 당돌한 질문을 소중하게 여겨 주셨다. 가끔 힘들 때 나는 캄캄한 교회당에 혼자 기도하면서 내 마음을 가리앉히곤 했다. 지금도 조용한 교회당이나 성당을 들어서면 그 때의 느낌이 난다.
나는 고등학교는 더 좋은 곳으로 가고싶었다. 동계진학이 되던 시기였고 학교에서는 고등학교 3년의 장학금을 주겠다고 만류했는데 극구 경기고등학교에 입시원서를 제출했다. 나 혼자 내린 결정이었는데 왜 그런 결기가 작동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 있었던 그 시험에서 낙방하고 2차로 중앙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크게 낙담하거나 위축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내 뜻이 좌절된 경험을 한 셈이다.
중앙고등학교는 의외로 내 정서에 잘 맞았다.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를 중심으로 교장이었던 최남선, 교사이기도 했던 주시경, 이희승 등 한국 근대의 유명인들이 거쳐간 이 학교의 문화적 자산과 민족적 지향이 내겐 큰 자긍심을 제공했다. 묘하게 보성학교의 간송 전형필과 중앙학교의 인촌 김성수는 여러모로 유사한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다. 지금 학교에는 3.1운동 발상지, 6.10 만세운동 발원지 비와 함께 최남선, 채만식, 기형도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비원을 옆에 끼고 있으면서 석조건물의 우아한 교정이 주는 느낌도 좋았다. 이곳에서도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선생님과 학생들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았다.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컸던 나로서는 이런 중앙학교의 분위기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것이 큰 행운이었다.
1974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계열에 입학했다. 서울대학교 중에서도 가장 가기 힘든 곳에 합격한 기쁨이 컸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버님은 당연히 내가 법대로 진학할 것이라 생각하셔서 고향에 내가 법대에 합격했다고 말씀을 하셨다. 당시 사회과학계열에 법학이 포함되어 있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법대 진학이 가능했으니 틀린 말씀은 아니었다. 후일 내가 사회학과를 진학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신 듯 되어 동네 어른들께 그 사정 설명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회학과 진학에는 한완상 교수님 영향이 컸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늘 만나던 분이었는데 내 장래 진로에 대해서도 애정을 갖고 조언해 주셨다. 내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도 한 교수님께서 가장 먼저 알려주셨고 함께 기뻐해 주셨는데 내가 진학하는 해에 서울대학교에서 해직되신 탓에 나는 한번도 그 수업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대신 신용하 교수님의 사회사에 매료되었고 한국현대사를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려는 시도가 매력적으로 다가와 이 분야를 전공하게 되었다. 내가 한국사회사, 역사사회학을 전공하면서도 종교사회학이나 문화사회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