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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매화도

지인이 보내준 매화 사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났다. 시절의 하수상함에 휘둘려 봄이 온 것도 몰랐구나 싶었다. 지금부터라도 나무의 새잎 나는 소리, 잔디 색 변하는 모습, 풀꽃 피는 자리들을 유심히 살펴보리라 다짐한다. 매화 필 때 ‘以文會友’ 하자 약속한 ‘매암동인’ 제자들에게도 안부를 전해야겠다.

몇년 전부터 이맘때면 매화를 그렸다. 옛 문인화를 모사하기도 하고 직접 본 매화를 그리기도 했다. 작년에는 섬진강변의 화려한 매화 동네의 감흥을 표현해 보느라 적지 않은 화선지를 파지로 만들었다. 매화 그리기가 새 봄을 맞이하는 내 나름의 연례 의식이었던 셈인데 올해는 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으니 세상사의 회오리가 내 정서의 영역까지 꽤나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문득 작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중국 작가 우웨스의 작품이 생각났다. 전통적인 문인화와는 다른 짙은 농묵의 묵매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래, 올해는 이런 매화도를 그려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심기일전하여 먹을 갈고 굽은 등걸과 뻗은 가지를 짙은 먹으로 강하게 그렸다. 꽃이 무성해야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꽃잎도 그려 넣었다.

이백의 시 한 구절을 화제로 썼다. 寒雪梅中盡 春風柳上歸 (찬눈은 매화향기에 사라지고 봄바람이 버드나무 위로 돌아온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노래한 시인데 세상사의 이치를 담은 글로 읽을 수도 있다. 한겨울 눈보라가 요란헤도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듯이, 어지러운 나라 안팎의 상황도 결국은 사필귀정의 새 날로 이어지리라는 소망으로 읽어도 좋겠다. 매화향기 은은한 봄기운 속에서 힘든 시기를 견뎌낼 힘과 지혜를 얻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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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아일랜드 여행길

2박 3일간 로드 아일랜드 여행을 다녀왔다. 바닷가에서 잠시라도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처의 희망을 따라 로드 아일랜드 일대에서 전망이 좋은 숙소를 찾았다. 위릭, 뉴포트, 브리스톨 등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한 집을 빌렸다. 브리스톨 해변가에 위치한 작은 주택으로 사진으로 보고 선택한 곳인데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내부는 깔끔했고 거실의 전면이 통유리창으로 되어 탁트인데다 그 앞으로는 넓은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여행을 매우 뜻깊게 해 준 것은 날씨였다. 보스턴을 출발할 당시만해도 눈발이 날리고 예보 상으로는 궂은 날씨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숙소에 도착한 직후 2시경부터 날씨는 활짝 개이고 파란 하늘과 햇살이 강렬했다. 거실에서 구름이 걷히고 그 사이로 파란 하늘과 붉은 태양이 나타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잠시 휴식한 후 반대편 해안으로 건너가 일몰을 보기로 했다. 역시 해변가에 위치한 비치 레스토랑은 음식보다도 분위기와 풍경이 일품이었다.

말을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일몰을 보는 호사를 누리고 나니 밤에 선명한 별자리를 보고 싶은 욕심이 솟아났다. 실제 이 정도면 총총한 밤하늘을 기대할 만 했다. 평소보다 훨씬 선명한 오리온,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등을 만났지만 은하수를 보려던 꿈은 이루지 못했다. 도시의 불빛이 가까이 있는 지역에서 이것까지 바라다니, 지나친 기대였을 수도 있다. 그 아쉬움을 달래준 것은 아침의 일출 광경이었다. 이 일출을 여유있게 보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던킨 도너츠와 커피를 사왔다. 도너츠의 맛을 잃게 만들 정도로 일출 모습은 장관이었다. 넓게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부터 붉은 기운이 펼쳐나가는 모습 앞에서 우리는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프로비던스를 둘러보고 한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장님 내외분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부산에서 지내다가 미국으로 건너온지 23년이 넘었다니 아마도 IMF 직후 미국행을 결심했던 분들이 아닐까 싶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말에 반가와하면서 최근 대통령의 계엄과 탄핵 사태로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라고 했다. 트럼프 정부의 출범에 대해서는 미국의 백인들이 대체로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이 어려운 상황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민을 왔지만 한국상황에 대한 관심은 결코 약해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날은 밤새 눈이 내려 또다른 바닷가 설경을 선사했다. 불과 2박 3일의 여행인데 일출, 일몰, 밤하늘, 설경을 모두 감상할 수 있었으니 큰 다행이었다.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길에 샌드위치 시의 조그만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지중해식 움식이 전문인 듯 했고 주문을 받는 젊은 여성도 그쪽 출신으로 보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갑자기 표정과 어투가 달라졌다. ‘아 정말요? 너무나 가고 싶은 곳이에요. 내가 제일 좋아하고 보고싶은 곳입니다’ 라고 했다. 한국의 위상, 문화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하는 기회였다. 이들에게는 계엄과 탄핵이라는 정치적 격랑은 관심 바깥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믿기 어려운 이중적 상황이 계속될 경우 한국을 보는 대중적 인식에도 영향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까움을 또 한번 느끼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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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과의 긴 인연

보스턴 – 1989년 하바드 엔칭연구소의 방문학자로 와서 1년 8개월을 살면서 박사논문의 초고를 만든 곳이며 내 평생의 학문적 자산이 된 소중한 경험을 얻은 곳이다. 그런가하면 아들이 이곳에서 태어난 덕분에 엔칭 관계자 및 여러 나라의 학자들로부터 큰 축하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아들일지 딸일지를 놓고 20여명 학자들이 1달러씩 모아 베이비 샤워를 해준 멋진 추억이 앨범과 뇌리에 남아있다. 갓난 아기를 낳고 키우느라 Womens and Brigham Hospital 과 Childrens Hospital 을 오갔고 딸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데려다 주느라 분주했던 기억도 새롭다.

이곳의 학자들을 만나 내 좁은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두고두고 내 생애의 자산이 되었다. 카터 에커트, 에드워드 베이커, 낸시 에이블먼, 존 리, 김선주 교수와의 이런 저런 인연도 이곳을 통해 맺어졌다. 낸시는 내가 이곳에 올 수 있도록 추천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하바드 의대 교수로 재직하시던 그 부모님 댁으로 우리 가족을 초청해 주었다. 오랜동안 이 분들과 교류했지만 내가 도움을 준 것보다 그들로부터 받은 것이 훨씬 많다. 특히 고마운 에커트와 낸시 두 분이 모두 타계하셔서 감사함을 좀더 자주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곳과의 인연은 둘째가 유학을 오면서 새롭게 이어졌다. 약학을 전공한 둘째는 식약청에 잠시 재직하다가 하바드 보건대학원으로 유학을 와 약물역학 epidemiology 과 의료통계 medical statistics 를 함께 전공했다. 재학 중에 몇 번 오가면서 격려도 했지만 그 모든 학업과정은 결국 혼자의 몫이었는데 잘 감당하고 견뎌주었다. 2017년 딸이 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에 부모로서 하바드대 졸업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가문의 영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딸은 이곳에서 멋진 신랑감을 찾아서 결혼을 했다. 둘이 잠시 한국으로 나와 작은 결혼식만 마치고 다시 돌아와 공부를 마무리하고 학위 취득 후 취업을 했다. 사위도 이곳에 직장을 갖고 있어서 둘 다 보스턴에 정착하게 되었다. 첫 손녀가 태어나던 2018년에 다시 하바드 엔청연구소 방문학자로 와서 8개월을 지냈고 둘째 손녀가 태어날 때도 짧은 시간 와서 머물렀다. 이제 두 손녀가 자라 학교와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으니 이곳과의 인연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 같다. 낯익은 찰스 강변을 지나면서 내 인생사 속에 깊이 자리한 하바드와 보스턴이 새삼 와닿아 마음이 뭉클하다.

딸 내외가 마련한 벨몬트의 집을 들어서면서 더욱 감사한 마음이 벅차오른다. 재택근무로 오전 회의를 막 마친 딸과 반가운 포옹을 했다. 한국에서의 대학공부는 물론이고 미국 유학시절까지 부모의 경제적 뒷바라지가 필요없을 정도로 장학금으로 전과정을 마친 자랑스런 딸이다. 먼 외국에서 결혼할 상대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며 두 딸을 키우고 마침내 좋은 지역에 좋은 거처를 마련하는 과정도 전적으로 스스로 해결해온 대견한 아이다. 그 독립성이 고마우면서도 힘들고 외로운 때가 어찌 없었을까 싶어 짠한 마음이 솟구친다.

미국도 아이들 교육여건과 안전정도에 따라 주택지 선호도가 크게 달라진다. 벨몬트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곳 주민들도 선호하는 좋은 지역이었다. 집은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3층 건물로 4 룸 4 화장실 구조다. 1층에 거실과 주방과 응접실이 있고 2층에 침실 2개와 놀이방, 그리고 재택근무용 작업실이 있다. 3층에는 방문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침대와 소파와 여유공간이 있다. 뒤로는 호수가 보이고 각종 물건들을 넣어둘 꽤 넓은 지하공간이 별도로 있다. 뒷마당은 바비큐 파티가 가능한 데크와 작은 창고가 있고 토끼들이 오가는 아담한 잔디밭이 있으며 주위로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둘러서 있다. 창이 많은데다 내부 공간이 모두 흰색 톤으로 되어 있어 종일 햇살이 쏟아들어와 밝고 아늑한 느낌이다.

저녁에 손녀들과 반갑게 만났다. 하루가 멀다하고 화상으로 통화하고 사진을 보던 아이들이었지만 직접 만나니 더욱 새롭다. 둘째 손녀가 먼저 집으로 와서 반갑게 만났다. 말도 배우기 전에 잠시 함께 있었을 뿐이었는데 잠시 어색한 듯 머뭇거리다가 곧 2층으로 뛰어 올라가 공주옷을 갈아입고 내려와 애교를 부렸다. 조금 후 큰 손녀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이젠 많이 커서 제법 학생티가 났다. 첫째도 곧장 2층으로 올라가더니 팅크벨 요정의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와 거실을 뛰어다니며 인사를 했다. 두 명의 예쁜 천사를 보는 듯 황홀한 기쁨이었다.

언젠가 딸은 아이들이 너무 여성스러움을 강요받지 않게 키우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두 손녀는 하나같이 공주옷을 좋아하고 화장품 장난감을 좋아한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런 모습은 타고나는 모양이라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다들 자기 재능과 개성을 갖고 태어나는게 아닌가 싶다. 저 아이들이 평생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또 키우느라 애쓰는 딸과 사위가 힘들지 않고 기쁨 가운데 미국생활을 잘 해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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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13일 아침

2025년 1월 13일 아침을 두 번 맞았다. 인천공항에서 아침 해를 보면서 떠나 13시간을 날아 왔는데 보스턴 공항에서 또다시 13일 아침 해를 마주한 것이다. 탑승한 후 한 숨 잤을 뿐인데 태평양 건너 지구 반대편에 나를 데려다주는 비행기라는 문명 모빌리티에 또한번 놀란다. 동시에 날짜와 시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는다.

1989년 내가 해외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 이곳 보스턴이다. 하바드 엔칭연구소에 있는 동안 탈냉전 선언과 독일통일 소식을 접했고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학자들의 우려를 가까이서 보았다. 내 학문적 자산의 한부분이 형성되고 좋은 연구자들과의 인연이 맺어진 곳이기도 하다. 한달 전 타계한 카터 에커트 교수는 잠시 자신의 아파트에 내가 기거할 수 있게 해 줄 정도로 여러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곳 마운트 어번 묘지에 잠들어 있는 낸시 교수는 한국의 세대와 계층, 사회운동 연구에 큰 성과를 낸 탁월한 학자이면서도 늘 나를 지적 멘토처럼 여기며 한국학계를 존중한 분이셨다.

이번은 이전까지와는 달라 더이상 학술적 방문이 아니다. 대학이나 연구소를 찾을 계획도 없고 특별히 지적 대화를 나눌 상대나 계기를 애써 마련하지도 않았다. 내 여행 가방은 손녀들에게 줄 한글동화책과 과자봉지로 가득 채워졌고 대부분의 시간을 딸과 손녀를 위해 쓸 마음의 각오도 충분하다. 손녀가 다닐 초등학교와 동네 도서관을 함께 가거나 좋아하는 옷이나 장난감을 사주면서 인기를 얻는데 최대의 노력을 할 생각이다. 딸과 사위가 근무하는 회사 상황과 출석하는 교회공동체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면서 과거에 나누지 못한 정을 되살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으려 한다.

한국을 떠난지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한국뉴스로부터 멀어진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한편의 궁금함과 또한편의 회피심리가 뒤섞여 마음은 염려와 무심의 이상한 조합상태다. 주요 현안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초조한 바 없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애써 뉴스를 뒤지고 조바심을 내지는 않을 작정이다. 이런 저런 주장들이 내 정서와 의식을 마냥 흔들지 못하도록 현실을 긴 호흡으로 직시하고 냉정한 거리감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볼까 한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 이곳에서도 뉴스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현 한국상황을 트럼프 신정부가 어떻게 평가할지 어떤 요구를 내놓을지, 미국의 새 정책기조에 한국은 얼마나 지혜롭고 효율적인 대응책을 마련할지 따라올 걱정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정파적 이익투쟁과 내부의 정치동학을 넘어 불확실성이 커지는 국제환경에 대응할 집단적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때다. 위기 속에서 미래의 복합 충격을 감당할 역량이 성장하는, 대전환의 역설적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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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의 문화와 경관

일본은 영주가 지배하는 번국체제를 오래 유지했던 탓에 지역별로 고유한 풍습과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4면이 바다이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지형에다 화산지대여서 자연풍경도 이색적인 곳이 적지 않다.

하기의 문화로 햐기 야키로 불리는 도자기가 우선적으로 꼽힌다. 일본의 유명 도자기가 다 그러하듯 이곳 도자기 역사도 임진왜란에서 끌려온 조선도공으로부터 시작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조선에 출병했던 영주 모리 데루모토는 도공인 이작광과 이경을 데려와 영지에서 사용될 도기 제품을 만들도록 했다. 가고시마에서 활동중인 심수관 집안이나 아리타의 이삼평 가문과 비슷한 역사인 셈이다. 다만 이들 두 지역에 비해서 하기 야키와 아직광 집안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야마구치 지역이 관광이나 접근성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탓일지 모르겠다.

하기 야키의 두드러진 특징은 흡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차나 사케를 담는 용도로 제품을 오래 사용하면 물이 들어 색상이 변한다. 그래서 하기 야키는 특히 차 애호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는데 사용할수록 미세하게 변하는 빛깔이 심미적으로 독특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기 야키의 또다른 특징은 형태와 장식의 단순함이다. 밑그림이나 상회칠 장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구울 때 도공이 어떤 효과가 예상되는지를 알고 그 예상을 최대한 활용하여 단순한 미감을 드러내려 한다. 초기엔 조선의 스타일을 따랐지만 점차 소박한 일본적 특성이 추가되어 오늘날의 개성적인 스타일이 되었다고 한다.

400년 역사의 하기야키 모습은 우라가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이 미술관은 하기시 출신의 실업가 우라가미 도시로가 17세기 풍속화인 우키요에, 동양 도자기 등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1996년에 개관했다.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우키요에는 화려한 색채가 특징인데 현재 약 5,500여점이 소장되어 있고 매월 30여점을 테마별로 전시한다. 2010년에는 도예의 진흥을 목적으로 새로이 도예관을 증축. 하기 야키를 포함하여 한국과 중국의 도자기 약 500점, 근현대 도예작품 약 750점(2015년 현재)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지역별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마츠리 (祭つり)는 일본 문화의 대표적 아이템의 하나다. ‘제사를 지낸다’는 동사 마츠루(祭る)가 명사화하여 축제를 뜻하게 되었다는 해석도 있듯이 전통적인 마츠리의 대부분은 제사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절이나 신사와 무관한 전통적인 영주가문의 행사나 막부시대 의례가 그 기원이 되는 경우도 있고 마을공동체의 세시풍습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된다. 규모가 큰 대규모 마츠리는 지역민들이 함께 참가할 뿐 아니라 지방정부가 행정적 재정적으로 뒷받침하여 지역의 공식적인 축제가 되어 있다.

히기에서는 ‘하기 시대 퍼레이드’이라 불리는 축제가 유명하다. 1603년에 시작된 에도시대. 전국의 다이묘들은 2년마다 많은 사무라이를 거느리고 쇼군을 찾아가는 의례 습관이 있었다. ‘다이묘 행렬’이라 불리던 이 이동은 각 영주들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규모가 크고 호화로웠다. 하기에서는 에도시대의 무사와 성주, 기타 중요한 사람들이 그 신분을 드러내는 의상을 입고 퍼레이드하는 다이묘 행렬을 매년 거행한다. 행진의 마무리는 무사의 무구와 의상을 신사에 봉납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막부전통과 신토 문화가 결합된 흥미로운 사례라 하겠다.

하기의 등불축제도 오래된 축제의 하나인데 조상숭배와 관련된다. 일본의 불교 전통에 따르면 여름의 오본(백중맞이) 동안 조상들의 영혼을 기리게 되는데 하기 등불 출제는 이곳 영주였던 모리 가문의 제사 행위를 그 내용으로 한다. 다이쇼인 절에서 8월 13일 500개가 넘는 석재 등불에 불을 붙이며, 8월 15일에는 도코지 절에서 등불을 밝히는데 마법 같은 분위기가 인상적이라 알려져 있다. 시모노세키 쵸후에 위치한 이미노미야신사에서는 매년 수호테이 마츠리가 열린다. 옛날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으로 춤을 춘 것이 그 유래라고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조상에 대한 감사와 풍년 기원 등의 뜻을 담은 행사가 되어 있다.

일대의 자연경관으로는 아키요시다이를 우선 꼽는다. 석회암이 늘어선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한 자연공원인 아키요시다이는 3억 5,000만년 전에는 바다였고 산호초가 오랜 시간에 걸쳐 석회암이 되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아키요시다이의 석회암에는 태곳적 바다에서 서식했던 생물 화석이 다량 포함되어 있어 산호초였던 바다의 기억을 현대에 남기고 있는 셈이다. 초원과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초록색과 흰색의 풍경미가 대단하다.

멀리서 보면 삿갓모양이어서 ‘카사야마’ 라는 이름이 붙은 카사야마산과 그 안의 동백나무길도 유명하다. 현무암류로 이루어진 성층화산으로 60m 화산대지 위에 분화구가 있고 화산 언덕에는 소규모이지만 완벽한 모양의 화구가 남아있다. 작은 활화산으로 산 속에는 한난지성 식물이 혼생하고 있어 학술상 가치가 높다. 산의 정상까지 드라이브웨이가 있어 정상에서 일본해와 떠오르는 섬들을 바라볼 수 있다. 넓은 지역에 25,000의 그루의 동백꽃이 꽃을 피워, 한겨울 화려한 색조를 보여주는 경관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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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를 어떻게 만날까?

하기(萩)를 여행할 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하기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슈번의 번청이 있던, 인구 4만 정도의 소도시다. 토쿄는 물론이고 교토로부터도 꽤 떨어져 있고 항공편이나 신칸센이 닿지 않아 한국에서는 더더욱 접근하기가 불편한 곳이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탐방하고 싶었던 곳이인데 기회가 없었던 만큼 여느 일본 여행 때와는 다른 기대감이 느껴진다.

나는 하기보다 조슈(長州)란 지명에 더 친숙하다. 솔직히 말하면 하기가 조슈번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 알았다. 1988년부터 1년 반 동안 하바드 엔칭 도서관의 일본자료실에서 메이지 유신 관련 연구들을 조사하고 검토하면서 조슈와 사쓰마 이야기를 무척 많이 접했다. 특히 요시다 쇼인이 세운 소카손주쿠에서 막부를 무너뜨리는 핵심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것, 그들이 드라마 같은 메이지 유신 정치변동의 주역이었다는 것, 이들이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등을 알게 되면서 조슈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 사쓰마의 중심지인 가고시마는 두 차례 들릴 기회가 있었는데 하기는 이번에야 가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한국사회사학회에서 오랫동안 학문활동을 함께 해온 사사친 동료들과 이 여행을 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뜻깊다. 정근식 , 김필동 교수가 제안하고 나를 비롯하여 황경숙, 노치준, 김경일 교수 등이 동의하여 성사된 여행이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박맹수 총장도 참여한데다 서울교육감 당선으로 가지 못하는 정교수 대신 채규성 님이 합류했다. 모두 학구적인 타입인데다 야심차게 일정을 계획한 탓에 오가며 보고 들을 내용들이 기대가 되고 오래 전 해답을 찾아보려던 질문들이 새롭게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모처럼의 여행인만큼 너무 답사여행 같이 되지 않고 편하고 즐거운 여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모두 노는데는 재주가 없는 진지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관광청에서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야마구치를 검색하니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뜬다. “야마구치현은 조용한 시골이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적지가 많습니다. 한때 무사가 지배한 영지의 수도였던 하기에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게 잘 보존된 성곽 마을이 있고, 이 지방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야마구치는 고요한 해변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신사, 일본에서 가장 큰 석회동굴인 아키요시도 등 기막힌 경치로 유명합니다. 시모노세키 시내 시장과 식당에서는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데, 특히 복어가 이 지역 별미로 유명합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말로 일단 복잡한 역사적 기억을 둘러싼 논란은 괄호쳐두기로 하자.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태도는 여행의 즐거움을 잠식하기 마련이니 아름다운 자연, 오래된 유적들을 영화보듯 관람하는 마음의 여유를 준비할 일이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범주나 근대화 비교욕구 같은 지적 관심도 잠시 제쳐두고 가볍고 즐겁게 이질적인 문화에 대면해 보자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그러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눈, 낯선 지역을 방문하는 호기심 많은 여행자의 눈을 가질 필요가 있으리라. 어슬프게 갖고 있는 사전지식도 일단 내려놓고 몸도 마음도 시선도 가볍게…. ‘조슈’를 만나기 위한 첫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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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노래들

10월 17알부터 4일간 “이적의 노래들”이라는 타이틀로 가수 이적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열었다. 나는 이적의 초대로 첫날 공연을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공연은 엄청난 팬들의 운집과 알찬 노래향연으로 풍성했다. 이제 셀럽의 반열에 오른 유명가수로부터 초청을 받아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함성 속에 뭍혀보는 자리는 뿌듯하고 감동스러웠다.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왔지만 오래 전 졸업해서 유명인이 된 제자가 학창 시절 교수와 끈끈한 유대를 지속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문화사회학 수업에서 이적이 쓴 보고서의 내용이 탁월해서 내 기억에 깊이 남은 학생이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대화의 기회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미 대가수가 되어 있는 그가 내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예비 신부와 함께 연구실을 찾아왔을 때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주례를 허락하면서 두 사람에게 어떻게 만났고 어떤 각오로 가정을 꾸리기로 했는지 적어서 보내 달라 했다. 두 사람은 정말 진지하고 성실하게 각자 살아온 여정과 생각, 앞으로 기대하고 지켜가려는 가치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써서 보내왔다. 나는 그 글을 바탕으로 주례사를 작성했고 진심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축복했다. 이적은 그 만남의 감격을 ‘다행이다’라는 노래를 통해 표현했고 결혼식에서 스스로 축가로 불렀다. 내가 한국사회학회장으로 사회학회 60주년 행사를 연세대에서 개최했을 때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와서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내 퇴임에 즈음해서 나는 내가 지도했던 박사 제자들에게 글씨를 하나씩 써 주기로 했다. 글씨를 받은 수십명은 대부분 교수로서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중 두세명 학자가 아니면서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도 제안을 했다. 이적은 그 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매우 고마와하면서 자신의 노래인 ‘나침반’ 의 내용을 써주기 부탁했다. 이후 ‘이문회우 정헌 박명규 서예전’에 와서 진심으로 내 정년을 축하해 주었고 심보선 교수와 함께 자신의 서명을 담은 음반과 플레이어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이적은 그때 내가 써준 글을 자신의 SNS에 올려놓고 자랑을 하기도 했으니 나와는 꽤 오래 깊은 인연을 이어오는 셈이다.

난 다시 일어날 수 있어/ 아직 내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 아직 이 황량한 세상 속에/ 너는 내 곁에 있어주니까 /어지러웠던 하루하루가/ 먹구름처럼 내 앞을 가로막아도 /너의 눈빛이/ 마치 꼭 나침반처럼/ 내 갈 길 일러주고 있으니 /아직 내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아직 이 황량한 세상 속에/ 너는 내 곁에 있어주니까

공연 중 김동률이 우정 출연을 해서 열렬한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김동률은 이적의 결혼식에서도 축가를 불렀던 것 같은데 그 때의 기억으로는 매우 장난끼 어린 느낌이었는데 이날은 매우 조용하고 사색형의 연예인 풍모가 느껴졌다. 그 다름 사이에 짙게 확인되는 우정이 보기 좋았다. 이적은 자신의 노래를 부르던 중간에 얼마전 타계한 김민기의 노래를 불러 그의 삶을 기렸다. 70년대 후반 내 대학시절의 떠올라 마음이 찡했는데 청중들도 대부분 그러했던 것 같다.

공연을 보며 80년대의 노래를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노래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랑,우정,인생 등을 노래하는 대중가요가 오랜 역사와 함께 주류를 형성하는 한편에 김민기로부터 시작해서 노찿사로,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 이어지는 강렬한 사회의식 지향의 노래가 있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제3의 범주로 클래식, 가곡, 종교음악 등이 있었다. 대중가요는 통속적이었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운동권 노래는 진지했지만 부담스러웠다. 클래식은 어쩐지 상층계급과 서구지향적인 분위기여서 접근하는데 문턱이 높았다. ‘유행가’라 불리던 대중가요에 대해선 거리감을 보였지만 술집에서는 즐겨 부르기도 했다. 팝송을 즐겨 듣기도 했고 익숙한 노래에 가사를 바꿔 시대적 정서를 표출하기도 했다.

이적의 노래는 이 세 부류의 틀을 재조합하고 재구성하여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음악이 아닐까 싶다. 그는 통속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탈대중적이지도 않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지만 운동권 가요처럼 투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의 곡의 선율은 고급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지만 클래식처럼 부담스럽거나 고고한 분위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가 탁월한 작곡가이자 가창력 있는 가수일 뿐 아니라 좋은 작사가라는 사실이 이런 종합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의 노래, 특히 노랫말이 젊은 세대 뿐 아니라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적의 노랫말에는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은유’가 포함되어 있다. 너무 현학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으면서도 통속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삶의 다양한 면모를 성찰하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의 힘이 이적 노래를 다른 어떤 가수와도 다른 것으로 만드는게 아닐까. 거위의 꿈, 다행이다, 거짓말, 물좀 줘요, 같이 걸을까 등의 노랫말은 이 시대의 정조와 혼동을 확인하고 음미하는 소중한 메타포이자 코드라 여겨진다. 이날 공연에서 청중들과 열정적으로 함께 불렀던 ‘물 좀 줘요’는 그의 노래에 담긴 시대정서를 잘 표현한 것 아닐까 싶다.

한눈팔지 말고 나만 봐줘요/ 아직 나는 잔뜩 목이 말라요 / 숨이 넘어갈 듯 노랠 부르며/ 그대가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 땀이 비 오도록 눈이 빠지도록/ 여기 이 자리에서 그대가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 내게 약속해 떠나지 않겠다고 /우리 꿈꿨던 그곳에 닿을 때까지 // 물 물 물 물 물 물 좀 줘요 목 목 목 목 목말라요 / 내 머리가 흠뻑 젖게 해줘요 난 그대 거예요 // … 핏빛이 지워지지 않아 자꾸만 어지러워져/ 붙잡을 사람이 필요해 여보세요 날 다시 일으켜주세요/ 물 물 물 물 물 물 좀 줘요 목 목 목 목 목말라요

1988 드라마 OST 로 이적이 부른 걱정 말아요 그대 역시 그의 음악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 아닐까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인권이 불렀던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하지만 이적이 부른 노래도 그에 못지 않게 와 닿았다. 같이 걸을까 라는 노래의 노랫말도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피곤하면 잠깐 쉬어가 / 갈길은 아직 머니깐 / 물이라도 한잔 마실까 / 우리는 이미 오랜 먼길을/ 걸어온 사람들 이니깐 //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 깊은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오늘도 // 길을 잃은 때도 있었지/ 쓰러진 적도 있었지/ 그러던 때마다 서로 다가와 / 좁은 어깨라도 내주어 / 다시 무릎에 힘을 넣어 //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 깊은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 오늘도 // 어느 곳에 있을까/ 그 어디로 향하는 걸까/ 누구에게 물어도 모른 채 다시 일어나 /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 오늘도

이적은 삶이 여러모로 모순적이고 ‘만만치 않더라’고 고백하는 가운데서도 꿈과 기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노래가 있고 누군가 함께 하는 이웃이 있고 또 나도 모르던 세포까지 깨어나는 순간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적은 스스로 이런 경험을 했기에 독특한 예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노래’라는 가사는 노래에 담긴 힘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런 힘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노래는 소리칠 수 있게 해줬고 / 노래는 울어도 괜찮다 해줬고 / 노래는 내 몸 속에 감춰진 / 나도 모르던 세포까지 / 한꺼번에 잠 깨웠지 // 문도 없는 벽에 부딪혀 / 무릎 꿇으려 했을 때 / 손 내밀어 일으킨 건/ 결국 내 맘속 노래야 / 노래는 꿈을 꿀 수 있게 해줬고 / 노래는 다시 힘을 내게 해줬고 / 노래는 독약 같은 세상에/
더럽혀졌던 혈관까지/ 짜릿하게 뚫어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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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학 2

그리스는 올림픽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인간의 강인한 육체의 힘을 최대로 발휘하려는 이 제전은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발전하고 있다. 얼마전 끝난 올림픽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월드컵, NBA, 각종 스포츠 경기의 배후에도 그리스의 유산이 어른거린다. 물론 돈과 명예, 경쟁과 좌절이 너무 크게 결합된 프로 스포츠의 경우 그리스에서의 정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테네에서 나는 사라진 고대문명의 정신적 자취를 찾아보려 애썼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르스토텔레스의 철학자들과 아고라에서 공화정을 이끌던 자유 시민들의 숨결을 만나보고 싶었다. 파르테논과 로만 아고라 광장을 둘러보면서 그런 모습을 느껴본 듯 하지만 엄밀하게는 내 상상의 소산일 뿐이다. 실제 아테네의 현장에는 말없는 고고학적 유물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나는 그리스인들이 강조했던 또다른 모습에 주목했다. 육체의 강인함을 통해 용맹과 용기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음을 새삼 느꼈던 것이다. 특히 올림픽의 배경이 되었을 남성적인 힘, 불굴의 투지를 상징하는 근육질의 육체성을 작품 속에서 만났다. 오늘날 ‘남성성’은 종종 페미니즘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지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여성성과 꼭같이 남성성도 하나님이 주신 품성으로서 그것은 아름답게 구현되고 다듬어가야 할 자질이다. 그 모습의 한 부분을 스케치로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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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미학 1

    그리스 아테네를 둘러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먼 옛날 그들이 보여준 조형미의 아름다움은 대단했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위용을 접했을 때 느낀 감동은 말로 하기 어렵다. 사진으로 본 바와 다를 바 없고 원형도 많이 훼손된 상태인데도 가히 건축미학의 최고경지라 일컬을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중국의 만리장성이 놀랍고 경이로우며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장대하지만 이런 미학을 표현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난 조각품에서 그리스인들의 미학을 좀더 가까이 느꼈던 것 같다. 조각품의 섬세한 기법은 물론이고 인체의 아름다움을 놀랍도록 표현한 예술적 감각이 가히 압권이다. 인간이 추한 면모도 적지 않지만 만물 중 인간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리스 조각의 최고품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의 박물관에 가 있다고 한다. 온전하지 못하거나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작품일지라도 아테네 현장에서 직접 만나는 유물이 풍기는 아우라는 남다르다.

    르네상스는 이런 그리스 미학을 부흥시키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카톨릭 하의 중세 유럽은 영혼을 중시하고 육체를 경시하는 엄숙주의가 강했다. 그리스 예술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인간의 욕망을 승인함으로써 중세 암흑기를 해체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제국 박물관에서 그리스 조각작품을 최고의 소장품으로 전시하는 것도 이런 르네상스 미학에 대한 공감과 무관치 않으리라. 약소국 유물의 약탈이라는 제국주의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서구문명의 계승자로 자처하고픈 그들 욕망의 소산인 셈이다.

    그리스 조각은 인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많다. 남성의 경우는 용맹함과 근육질의 신체, 역동적인 움직임 등이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다. 통상 다산과 풍요의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던 여타 문화권과는 다르게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을 극단적으로 추구했다. 특히 여성은 우아한 얼굴과 균형잡힌 몸매, 신비로운 곡선미가 유난히 돋보인다. 개인적 느낌으로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느끼는 바지만 하나님이 여성을 남성보다 더 정교하게 빚으신 것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어릴 적 도덕론이 우세한 환경에서 성장한 탓에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내겐 낯설었다. 유교적 가풍과 기독교적 가르침이 독특하게 혼합되어 의복, 치장, 춤, 음식 등에 대한 무관심이 몸에 배었다. 하지만 성장해 가면서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도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영육 이원론을 넘어서 아름다움, 감성, 충동, 축제, 욕망 등의 가치를 새롭게 느끼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종의 내 의식의 르네상스였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리스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난 많은 작품들이 주는 감흥이 남달랐다. 그 중에서도 고개를 들고 무릎을 꿇은 상반신 여인상은 정말 인상 깊었다. 아름다움과 우수가 함께 뭍어나는 그 작품을 앞뒤로 오가며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중앙 홀에 서있는 아프로디테의 상은 놀라운 균형미와 곡선미로 내 눈을 끌었다. 이들 작품은 오늘 현대의 작가들도 쉽게 따라가기 어려운 명실상부 최고의 수준이다. 누군지 모르는 그 시대 조각가들의 손과 마음을 떠올리며 나도 도화지에 선을 그리며 음영을 넣었다. 미학은 이렇게 시대를 넘어 교감할 수 있는 것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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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기, 70년대, 노래

    김민기의 부음을 접했다. 얼마전 학전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과 함께 병세가 위중하다는 사실도 알려졌던만큼 뜻밖의 놀랄 뉴스는 아니다. 그래도 여느 유명인사의 죽음을 접할 때와는 다른 아련한 감정이 생겨난다. 그의 이름과 노래가 70년대 내 대학시절에 미친 영향 탓일 것이다. 페북에는 여러 사람들이 그의 노래와 엵힌 경험과 기억들을 적어 놓고 있다. 결혼식 축가로 김민기의 노래를 합창했다는 기억에서부터 그가 어두운 세월에 ‘푸른 하늘’을 보여준 사람이었다고 쓴 글도 있다. 쉽지 않았다는 그의 인터뷰 기사들도 여기저기 나타난다. 학전의 마지막 공연장에서 찍은 사진을 애도의 글과 함께 올린 글도 여럿 보였다. 그의 영향력이 오랫동안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모습들이다.

    카톡방에선 때아닌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암울했던 시대’에 맞선 김민기라는 글에 대해 그런 표현은 불성실한 왜곡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70년대는 정치적으로 불행했지만 긴 한국현대사에서 결코 암울한 시대로 단정할 일이 아니라는 항변이었다. 김민기의 생애를 두고 70년대의 성격을 논하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맥락을 벗어난 것이다. 우리의 시대인식은 너무 정치화되어 있어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도 이런 논쟁이 생기는구나 다소 씁쓸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표준화된 역사인식이나 관용적인 서술어가 얼마나 실체적 진실과 가까운가는 사실 쉬운 문제가 아니다. 김민기의 죽음을 계기로 70년대를 어찌 이해해야할까 자문해본다.

    대학생으로 보낸 70년대 중후반을 우울하고 답답하게 경험했던 것은 분명하다. 일상의 생활전선에 힘겨워하던 사회인들이 당시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자유로운 삶과 지성인되기를 꿈꾸던 사람들에겐 참으로 힘든 시대였다. 외마디 외침 한두마디로 제적과 투옥을 감내해야 했던 친구들이 느낀 절박함은 더욱 컸을 터이다. 그래서일까 내 주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고 몸부림치던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하던 한 친구는 진지하게 신학교 진학을 고려한다고 내게 말했는데 사회를 바꿀 저항운동을 위해 ‘종교인의 외피’, 특히 기독교의 힘을 빌리는게 유용할 것같다는게 그 이유였다. 또 한 친구는 유명가수를 ‘의식화’ 시키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수의 영향력을 이용하자는 것인데 남진은 너무 의식이 없으니 생각이 깊은 조용필을 그 대상으로 하는게 좋으리라는 구체적인 구상도 덧붙였다. 두 제안 모두 실현 되지 않았고 뜬금없는 망상같은 발상이었지만 각자 제 나름대로 시대의 중압감을 벗어나려던 몸부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시절에 노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 저곳 생겨났다. 노래를 이용하여 메시지를 퍼트리고 사람들을 결집시키려는 노력이었는데 초기엔 출처도 잘 모르는 노래들 (알고 보니 러시아 민요이거나 미국의 반전가요 등이었다), 또는 찬송가 같은 노래도 활용되었다. 노래가사바꿔부르기 (노가바)는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좀더 목적의식적으로 메시지를 담으려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가사내용도 점점 더 과격하고 노골적인 것으로 변했다. 77년 소위 26동 사건이라 불리는 대형 시위를 촉발시킨 사회학과 심포지엄이 있었다. 진행 사회를 맡은 나는 미리 행사장에 가 았었는데 시간이 넘어도 발제와 토론을 맡은 후배들이 나타나질 않았다. 시위로 번질 것을 우려한 교직원들이 이들을 격리시킨 탓인데 그 사정을 알 수 없는 현장에서는 웅성거림이 시작되고 청중석에서는 자연스럽게 구호와 노래가 시작되었다. 잘 알려져 있는 건전가요의 곡에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노랫말이 그날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날 밤 많은 친구들이 관악경찰서로 잡혀갔다. 밤샘 취조의 내용은 이 행사를 시위로 이어지게 사전에 모의했는지, 누가 기획했는지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경찰은 그날 새롭게 불린 노랫말 가사에 주목하고 이 노래를 퍼트린 사람을 찾아내려 했다. 거짓말을 못하던 1학년 후배가 일부 기억이 난다고 가사를 불러주었고 그는 이 날의 시위를 기획하고 주동한 인물의 하나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다. 후일 그가 학교에서도 제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 속에 분노와 계면쩍음이 뒤섞여 올랐던 기억이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마음 한켠에 남아있다.

    대학4학년 때 주변의 몇몇이 노래모임을 만들자고 권유했다. ‘메아리’라는 이 노래동아리는 실천과 노래를 연결하는 일종의 문화운동을 모색했던 것으로 나는 초창기에 함께 하다가 꾸준히 참여하진 않았다. 메아리는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들을 확산시키고자 애썼는데 그 가운데 김민기의 노래는 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후일 80년대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이어져 큰 주목을 받고 이들의 노래 중에는 아름다운 선율과 묵직한 노랫말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곳이 적지 않다. 광주의 비극을 거치고 노동운동이 확대되면서 노랫말과 곡조도 점점 강하고 투쟁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70년대에 바탕한 내 생활세계의 경험 속에는 작은 연못, 아침이슬, 상록수, 공장의 불빛, 금관의 예수 등 혼자 조용히 읖조리며 부르던 김민기 노래의 서정성이 깊이 자리한다. 존 바에즈를 좋아하던 친구가 김민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내 자신 70이 되어 그 시절을 상징하던 인물의 부음을 들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미자가 ‘노래는 나의 인생’이라 했지만 우리의 개인사나 시대사도 노래의 변천사와 겹친다. 뽕짝이라 부르며 도외시하고 공순이들의 노래라 천시했던 가요는 트로트 열풍을 타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다. 통기타를 치며 청년세대의 우울한 감수성을 일깨우던 노래는 사랑을 노래하는 발라드 가수들의 감미로운 정조로 이어지고 있다. 노찻사 출신의 가수가 유명인의 대열에 올라서기도 하고 각종 시위에 운동가요가 여전히 불리지만 더이상 독특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런가하면 서태지와 아이들을 효시로 터저나온 새로운 복합장르는 오늘날 K-Pop이란 대형 문화현상이자 기획산업으로 발전했다.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 숱한 아이돌 그룹이 나타나고 이들의 노래는 이해하기조차 어려울만큼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소비와 자극을 찾는 포스트 시대의 경향을 대변하는 노래도 있지만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게릴라 정신을 내거는 노래도 인기를 끈다.

    리듬과 운율, 달라진 노랫말을 보노라면 반세기 한국사회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해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노래를 좋아하던 나도 이젠 거의 대부분의 노래가 생소하고 곡조를 흉내내기조차 쉽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함께 노래한다는 것, 합창으로 연대하고 노랫말에 공감하는 감수성 자체가 크게 변하고 있다. 70년대 우리의 삶에 녹아있던 김민기, 노가바, 번안가요의 노래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김민기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