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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삶 (2)] 하바드 엔칭 연구소

1989년 7월부터 1년 반동안 나는 하바드 엔칭연구소의 visiting fellow 로 보스톤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 내 시야도 넓어졌고 연구주제도 다양해졌다. 낯선 곳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공부하는 일 이외에는 큰 부담이 없었던 탓에 비교적 잘 적응했던 것 같다. 두 딸이 취학전 유아 시절을 보냈고 아들이 그곳에서 태어났으니 내 가족사에서도 매우 특기할만한 때였다.

대학원 시절 미국유학을 하지 않겠노라고 큰소리 치며 소위 ‘국내학파’ 형성을 주장했었다. 여전히 그런 정서가 강했던 1988년에 해외로 연구를 떠나려 마음먹고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실제로 주위에서 강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의 한정된 논의와 패러다임에 한계를 크게 느끼던 터라 나로서는 더없이 절실했다. 하바드 대학 출신으로 버클리 인류학과에서 박사논문을 작성 중이던 낸시 애이블먼 이 당시 고창 지방에서 농민운동 필드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다. 낸시는 후에 일리노이대 교수로서 한국학 발전과 대학행정에 큰 기여를 했고 나와는 지속적으로 교류했으나 안타깝게 수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6월 말에 도착한 하바드 대학 캠퍼스는 방학이 시작되어서 조용했다. 엔칭 연구소는 나처럼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연구자들을 위한 영어 프로그램을 두 달간 제공해 주었다. 나를 포함하여 중국 학자들이 여럿 참여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언어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얼마전 발생한 베이징의 민주화운동과 비극적인 천안문 사태가 초래한 충격 때문이었다. 6월 4일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가 무력으로 강제진압되고 많은 희생자가 생기났다. 이 시위의 주도자들 중 일부는 미국과 서방으로 탈출하여 중국자유화 운동을 계속하고자 했고 강제진압을 선택한 중국 정부에 대한 국제적 비난도 거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미국에만 약 5만여명의 중국유학생이 머물고 있었다. 천안문 사태 발생직후인 89년 6월5일부터 90년 4월11일 사이에 미국에 입국한 유학생은 귀국후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미국체류를 연장하는 법안도 통과되었다. 엔칭에 와있던 학자들 사이에서도 곧바로 귀국할 것인가 미국에 체류연장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비극적 진압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면서 나는 한국의 80년 서울의 봄을 떠올렸다. 중국도 어느 시기를 지나면 한국의 87년 같이 결국은 민주화의 길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되돌아보면 다소 순진한 희밍적 사고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한국연구는 와그너 교수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는 족보 연구의 대가였고 조선시대가 전공이었는데 꼼꼼한 실증적 역사연구자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근대사회변동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대화할 계기가 많지 않았다. 대신 막 부임한 카터 에커트 교수가 여러 측면에서 내겐 자극도 주고 조언도 주었다. 또 일본 메이지유신 연구자인 알버트 크레이그 교수의 수업도 청강했는데, 그는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비교연구하려는 내 연구계획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대신 한국과 베트남을 비교해보라고 조언했는데 당시 내 정서로는 잘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쨌든 하바드 엔칭연구소에서의 1년 반은 내가 동아시아를 지적으로 발견하는 시기였다. 지나치게 한국만을 주목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는 협소함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생각은 진작 했지만 동아시아라는 범주를 깊이 생각하는데 이르진 못했다. 근대와 전근대, 발전과 저발전, 서구와 한국 같은 대비가 그 결과였다. 하지만 1990년 엔칭에서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동아시아라는 배경이 중요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와 같이 온 분 가운데 일본 교토대학의 푸마 스스무 교수가 있었다. 그는 매우 성실한 중견연구자였는데 중국 청대가 전공이었지만 조선사에도 꽤 식견이 있었다. 나중 푸마교수의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기도 했고 15세기 전후의 연구에 종종 인용되기도 했다. 그와 대화하면서 나의 시야가 너무 한반도에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11월 영어 공부를 하려는 목적으로 자주 시청하던 티비 뉴스에서 접한 베를린 장벽 뉴스는 지금도 그 충격이 생생하다. 동독을 탈출하는 대규모 행렬이 등장하기 시작한지는 제법 되었지만 사실 나로선 그 변화를 주목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베를린 장벽을 망치로 부수고 브란덴부르그 문 위에 빼곡이 올라선 시민들의 영상이 올라왔다. “Wir sind ein Volk”라는 피켓을 든 동독시민들의 시위 장면과 동서 베를린을 나누던 경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아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고 기적이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12월 2일과 3일 이틀간 지중해의 몰타 섬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미소정상회담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냉전종식을 선언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유럽에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 냉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조짐을 뚜렷히 드러냈다. 1989년 폴란드에서는 6월 자유선거가 이루어져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솔리다르노시치가 압승하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등 다른 동구권 국가들도 대규모 소요사태들을 겪으면서 동구권의 붕괴는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황이었다.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세계는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평화의 시대로 가는 먼 길에 서있죠. 무력을 통한 위협, 불신, 심리적 이념적 투쟁은 모두 과거의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저는 절대로 미국과의 열전을 시작하지 않겠다고 미합중국의 대통령께 약속드립니다.“ 라고 덧붙였다. 이에 부시 대통령은 ”우리는 지속 가능한 평화를 현실화하고 동서관계를 지속된 화합으로 바꿔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제가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것입니다.“라고 화답했다. 바야흐로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사가 열리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 이런 세계사적 격동의 거대한 무게감을 내가 바로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속을 걷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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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삶 (1)] 1989년의 충격

[탈냉전 역사의 현장을 건네오다 : 나는 1989년 7월부터 1년 반동안 미국 하바드 엔칭 연구소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하기 위해 도미했다. 이 시기는 세계사적 변화가 심대하여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내 개인사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40년 가까운 그 이후 나의 활동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변화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 격동의 과정은 예상한 바 아니었고 이러한 변화의 성격을 헤아리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탈냉전과 세계화의 시대가 저물고 나도 청장년기를 지난 오늘, 내가 겪어온 삶의 궤적을 통해 시대전환의 함의와 전망의 단초를 찾아보려한다.]

1989년 새해 한국은 세계여행을 지유화했다. 그리고 동구권 구공산권국가와 수교하는 북방정책이 시작되었다. 전지구적 탈냉전 흐름이 뒷받침한 것이지만, 87년 민주화와 88년 서울올림픽 성공에 뒤이은 국내의 자신감이 큰 요인이었다. 학계와 정치권에서 국제화, 세계화 논의가 커지고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이 히트를 치기도 했다. 북한 역시 이 흐름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세계청년학생축제를 거행하고 북한체제의 강고함을 대내외로 선전했다. 임수경이 비밀리에 이곳에 참석함으로써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것도 기본적으로는 이 시대적 흐름에 대한 광범위한 낙관과 희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989년의 변화는 한반도 바깥에서 더욱 심대했다. 2차대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쇼와 천황이 연초에 사망함으로써 일본도 새로운 시대로 이행했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구권 내부에서 자유화 움직임이 가시화되었고 6월 4일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다. 중국정보는 무력으로 이를 강제진압했는데 이것이 오늘까지 중국체제의 기몬조선을 좌우한 결정적 사건이 된 셈이다. 8월에는 소련에서 발트국가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분출되었다.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곧이어 동독의 에곤 크렌츠 서기장이 물러남으로써 사실상 동독이 해체의 길에 접어들었다. 루마니아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발발하여 독재자 차우체스쿠 동상이 시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졌고 마침내 차우체스쿠 부부가 처형당했다. 12월 2일에는 몰타 섬에서 부시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역사적인 ‘냉전종식’을 선언했다. 1990년에 접어들어서 이런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어 폴란드 집권당이 해체되었고 몰도바와 벨라루스가 연이어 소련으로부터 탈퇴했다. 9월 30일엔 한국이 소련과 수교하는 역사적 변화가 시작되었고 10월 3일에는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나는 이 모든 변화를 보스턴에 앉아 뉴스로 접했다. 엔칭 연구소에는 주로 중국, 일본, 한국 학자들이 모여있었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격동의 역사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 그것이 자국 사회에 어떤 충격을 미칠지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제한된 뉴스와 행동반경 탓에 이런 사건들의 중대함과 깊은 영향력을 즉각적으로 깨닫진 못했다. 다만 중국에서 온 학자들은 천안문 사태 이후 개혁개방노선, 중미관계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가도 좋을 것인지 걱정이 많았고 실제로 자신들의 향후 진로를 두고 고민을 계속했다. 국제정치 전문가가 아닌 일반적인 미국의 학자와 시민들도 격동하는 세계적 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거대한 변화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그 세 격동이 함께 진행되는 과정에서 기대와 우려, 확신과 주저함이 끝없이 교대했다. 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과잉된 확신으로 큰 소리를 치기도 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공부도 모자랐고 지혜는 부족했으며 종종 부끄러운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때 시작된 탈냉전 세계화 자유화 개방화의 큰 흐름 탓에 의 삶이 역동적이고 새로운 도전으로 점철될 수 있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2026년의 오늘을 보는 마음은 어둡다. 1989년에 시작되었던 그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느낌은 강하다. 탈냉전 30년의 변화, 놀라운 과학기술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해묵은 전쟁과 문화 갈등, 지진과 기상이변으로 인류공동체의 종말을 논의하는 시점에 도달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때 미국 잔류를 선택했던 중국 학자들은 오늘의 변화된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던 1989년의 저 감격을 목도했던 독일 시민들이 오늘 AfD 극우정당이 급부상하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찬찬히 지난 40년의 개인사를 돌아보면서 이 시대적 성취와 아이러니에 마주쳐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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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유정(邊境有情)

일주일에 걸친 북중국경지역 답사를 마치며 일행 한분이 한시를 한 수 지어보라 제안했다. 그에 응할 실력은 전혀 못되는 걸 알지만 중국을 여행한다는 기분에 웬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두보의 ‘春望’ 첫귀절,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을 떠올리며 이런 저런 생각과 감정들을 갈무리해 보고자 했다. 어려운 중국식 작법이나 차운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뜻만 드러내는 한시도 가능하다 하고 이를 신체시 (新體詩)라 이름했던 선친의 시도에 기대어 용기를 냈다.

延邊山河連兩岸 圖們橋上無人聲 (연변의 강산은 양안을 잇고 있는데, 도문의 다리 위엔 오가는 사람이 없다) // 欲對龍井先驅者 東柱古家滿遊客 (용정에서 선구자를 만나보려 하나, 윤동주 옛집엔 관광객만 그득하네) // 天池風光如前秀 鐵網警告此國境 (백두산 천지의 풍광은 여전히 빼어난데, 철망은 이곳이 국경이라 경고하고) // 自遠方來卒本城 皇宮舊址盛雜草 (먼곳에서 애써 졸본성을 찾아 왔으나 왕궁의 옛터엔 잡초만 무성하다) // 實見好太王碑文 懷憶千年古史蹟 (광개토왕비문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천년 옛 사적을 떠올린다) // 五女山傳朱蒙業 誰言此地高句麗 (오녀산은 주몽의 건국위업을 전하지만, 오늘 누가 이 땅을 고구려라 칭할 것인가) // 鴨綠江上望義州 默念恨別已百年 (압록강 위에서 신의주를 바라보며 한스럽게 나뉘어진지 어언 백년임을 생각한다) // 難免悲感世上事 豈不待後靑年起 (세상사 비감함을 누를 길 없으니 어찌 후대 청년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으랴)

귀국한 후에도 여행의 감회가 사라지지 않아 이 한시를 화선지에 썼다. 어줍잖치만 시(詩)와 서(書)를 함께 하던 옛 문인이 된 느낌이다. 시도 서도 내놓을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지만 어차피 격식을 무시한 작품이니 짝퉁이나 습작이란 힐난이 있어도 개의할 바 아니다. 그런데 7언 절구의 앞과 뒤가 대비되고 풍경과 인간사가 서로 어긋나는 모습이 역연하여 스스로 흥미롭기도 또 씁쓸하기도 하다. 여행에서 자연스레 얻게된 정서의 양면이 반영된 결과일텐데 이런 역설과 회한의 감정을 표현하고 누군가와 교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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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매화도

지인이 보내준 매화 사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났다. 시절의 하수상함에 휘둘려 봄이 온 것도 몰랐구나 싶었다. 지금부터라도 나무의 새잎 나는 소리, 잔디 색 변하는 모습, 풀꽃 피는 자리들을 유심히 살펴보리라 다짐한다. 매화 필 때 ‘以文會友’ 하자 약속한 ‘매암동인’ 제자들에게도 안부를 전해야겠다.

몇년 전부터 이맘때면 매화를 그렸다. 옛 문인화를 모사하기도 하고 직접 본 매화를 그리기도 했다. 작년에는 섬진강변의 화려한 매화 동네의 감흥을 표현해 보느라 적지 않은 화선지를 파지로 만들었다. 매화 그리기가 새 봄을 맞이하는 내 나름의 연례 의식이었던 셈인데 올해는 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으니 세상사의 회오리가 내 정서의 영역까지 꽤나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문득 작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중국 작가 우웨스의 작품이 생각났다. 전통적인 문인화와는 다른 짙은 농묵의 묵매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래, 올해는 이런 매화도를 그려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심기일전하여 먹을 갈고 굽은 등걸과 뻗은 가지를 짙은 먹으로 강하게 그렸다. 꽃이 무성해야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꽃잎도 그려 넣었다.

이백의 시 한 구절을 화제로 썼다. 寒雪梅中盡 春風柳上歸 (찬눈은 매화향기에 사라지고 봄바람이 버드나무 위로 돌아온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노래한 시인데 세상사의 이치를 담은 글로 읽을 수도 있다. 한겨울 눈보라가 요란헤도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듯이, 어지러운 나라 안팎의 상황도 결국은 사필귀정의 새 날로 이어지리라는 소망으로 읽어도 좋겠다. 매화향기 은은한 봄기운 속에서 힘든 시기를 견뎌낼 힘과 지혜를 얻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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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아일랜드 여행길

2박 3일간 로드 아일랜드 여행을 다녀왔다. 바닷가에서 잠시라도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처의 희망을 따라 로드 아일랜드 일대에서 전망이 좋은 숙소를 찾았다. 위릭, 뉴포트, 브리스톨 등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한 집을 빌렸다. 브리스톨 해변가에 위치한 작은 주택으로 사진으로 보고 선택한 곳인데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내부는 깔끔했고 거실의 전면이 통유리창으로 되어 탁트인데다 그 앞으로는 넓은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여행을 매우 뜻깊게 해 준 것은 날씨였다. 보스턴을 출발할 당시만해도 눈발이 날리고 예보 상으로는 궂은 날씨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숙소에 도착한 직후 2시경부터 날씨는 활짝 개이고 파란 하늘과 햇살이 강렬했다. 거실에서 구름이 걷히고 그 사이로 파란 하늘과 붉은 태양이 나타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잠시 휴식한 후 반대편 해안으로 건너가 일몰을 보기로 했다. 역시 해변가에 위치한 비치 레스토랑은 음식보다도 분위기와 풍경이 일품이었다.

말을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일몰을 보는 호사를 누리고 나니 밤에 선명한 별자리를 보고 싶은 욕심이 솟아났다. 실제 이 정도면 총총한 밤하늘을 기대할 만 했다. 평소보다 훨씬 선명한 오리온,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등을 만났지만 은하수를 보려던 꿈은 이루지 못했다. 도시의 불빛이 가까이 있는 지역에서 이것까지 바라다니, 지나친 기대였을 수도 있다. 그 아쉬움을 달래준 것은 아침의 일출 광경이었다. 이 일출을 여유있게 보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던킨 도너츠와 커피를 사왔다. 도너츠의 맛을 잃게 만들 정도로 일출 모습은 장관이었다. 넓게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부터 붉은 기운이 펼쳐나가는 모습 앞에서 우리는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프로비던스를 둘러보고 한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장님 내외분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부산에서 지내다가 미국으로 건너온지 23년이 넘었다니 아마도 IMF 직후 미국행을 결심했던 분들이 아닐까 싶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말에 반가와하면서 최근 대통령의 계엄과 탄핵 사태로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라고 했다. 트럼프 정부의 출범에 대해서는 미국의 백인들이 대체로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이 어려운 상황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민을 왔지만 한국상황에 대한 관심은 결코 약해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날은 밤새 눈이 내려 또다른 바닷가 설경을 선사했다. 불과 2박 3일의 여행인데 일출, 일몰, 밤하늘, 설경을 모두 감상할 수 있었으니 큰 다행이었다.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길에 샌드위치 시의 조그만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지중해식 움식이 전문인 듯 했고 주문을 받는 젊은 여성도 그쪽 출신으로 보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갑자기 표정과 어투가 달라졌다. ‘아 정말요? 너무나 가고 싶은 곳이에요. 내가 제일 좋아하고 보고싶은 곳입니다’ 라고 했다. 한국의 위상, 문화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하는 기회였다. 이들에게는 계엄과 탄핵이라는 정치적 격랑은 관심 바깥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믿기 어려운 이중적 상황이 계속될 경우 한국을 보는 대중적 인식에도 영향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까움을 또 한번 느끼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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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과의 긴 인연

보스턴 – 1989년 하바드 엔칭연구소의 방문학자로 와서 1년 8개월을 살면서 박사논문의 초고를 만든 곳이며 내 평생의 학문적 자산이 된 소중한 경험을 얻은 곳이다. 그런가하면 아들이 이곳에서 태어난 덕분에 엔칭 관계자 및 여러 나라의 학자들로부터 큰 축하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아들일지 딸일지를 놓고 20여명 학자들이 1달러씩 모아 베이비 샤워를 해준 멋진 추억이 앨범과 뇌리에 남아있다. 갓난 아기를 낳고 키우느라 Womens and Brigham Hospital 과 Childrens Hospital 을 오갔고 딸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데려다 주느라 분주했던 기억도 새롭다.

이곳의 학자들을 만나 내 좁은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두고두고 내 생애의 자산이 되었다. 카터 에커트, 에드워드 베이커, 낸시 에이블먼, 존 리, 김선주 교수와의 이런 저런 인연도 이곳을 통해 맺어졌다. 낸시는 내가 이곳에 올 수 있도록 추천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하바드 의대 교수로 재직하시던 그 부모님 댁으로 우리 가족을 초청해 주었다. 오랜동안 이 분들과 교류했지만 내가 도움을 준 것보다 그들로부터 받은 것이 훨씬 많다. 특히 고마운 에커트와 낸시 두 분이 모두 타계하셔서 감사함을 좀더 자주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곳과의 인연은 둘째가 유학을 오면서 새롭게 이어졌다. 약학을 전공한 둘째는 식약청에 잠시 재직하다가 하바드 보건대학원으로 유학을 와 약물역학 epidemiology 과 의료통계 medical statistics 를 함께 전공했다. 재학 중에 몇 번 오가면서 격려도 했지만 그 모든 학업과정은 결국 혼자의 몫이었는데 잘 감당하고 견뎌주었다. 2017년 딸이 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에 부모로서 하바드대 졸업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가문의 영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딸은 이곳에서 멋진 신랑감을 찾아서 결혼을 했다. 둘이 잠시 한국으로 나와 작은 결혼식만 마치고 다시 돌아와 공부를 마무리하고 학위 취득 후 취업을 했다. 사위도 이곳에 직장을 갖고 있어서 둘 다 보스턴에 정착하게 되었다. 첫 손녀가 태어나던 2018년에 다시 하바드 엔청연구소 방문학자로 와서 8개월을 지냈고 둘째 손녀가 태어날 때도 짧은 시간 와서 머물렀다. 이제 두 손녀가 자라 학교와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으니 이곳과의 인연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 같다. 낯익은 찰스 강변을 지나면서 내 인생사 속에 깊이 자리한 하바드와 보스턴이 새삼 와닿아 마음이 뭉클하다.

딸 내외가 마련한 벨몬트의 집을 들어서면서 더욱 감사한 마음이 벅차오른다. 재택근무로 오전 회의를 막 마친 딸과 반가운 포옹을 했다. 한국에서의 대학공부는 물론이고 미국 유학시절까지 부모의 경제적 뒷바라지가 필요없을 정도로 장학금으로 전과정을 마친 자랑스런 딸이다. 먼 외국에서 결혼할 상대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며 두 딸을 키우고 마침내 좋은 지역에 좋은 거처를 마련하는 과정도 전적으로 스스로 해결해온 대견한 아이다. 그 독립성이 고마우면서도 힘들고 외로운 때가 어찌 없었을까 싶어 짠한 마음이 솟구친다.

미국도 아이들 교육여건과 안전정도에 따라 주택지 선호도가 크게 달라진다. 벨몬트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곳 주민들도 선호하는 좋은 지역이었다. 집은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3층 건물로 4 룸 4 화장실 구조다. 1층에 거실과 주방과 응접실이 있고 2층에 침실 2개와 놀이방, 그리고 재택근무용 작업실이 있다. 3층에는 방문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침대와 소파와 여유공간이 있다. 뒤로는 호수가 보이고 각종 물건들을 넣어둘 꽤 넓은 지하공간이 별도로 있다. 뒷마당은 바비큐 파티가 가능한 데크와 작은 창고가 있고 토끼들이 오가는 아담한 잔디밭이 있으며 주위로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둘러서 있다. 창이 많은데다 내부 공간이 모두 흰색 톤으로 되어 있어 종일 햇살이 쏟아들어와 밝고 아늑한 느낌이다.

저녁에 손녀들과 반갑게 만났다. 하루가 멀다하고 화상으로 통화하고 사진을 보던 아이들이었지만 직접 만나니 더욱 새롭다. 둘째 손녀가 먼저 집으로 와서 반갑게 만났다. 말도 배우기 전에 잠시 함께 있었을 뿐이었는데 잠시 어색한 듯 머뭇거리다가 곧 2층으로 뛰어 올라가 공주옷을 갈아입고 내려와 애교를 부렸다. 조금 후 큰 손녀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이젠 많이 커서 제법 학생티가 났다. 첫째도 곧장 2층으로 올라가더니 팅크벨 요정의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와 거실을 뛰어다니며 인사를 했다. 두 명의 예쁜 천사를 보는 듯 황홀한 기쁨이었다.

언젠가 딸은 아이들이 너무 여성스러움을 강요받지 않게 키우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두 손녀는 하나같이 공주옷을 좋아하고 화장품 장난감을 좋아한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런 모습은 타고나는 모양이라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다들 자기 재능과 개성을 갖고 태어나는게 아닌가 싶다. 저 아이들이 평생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또 키우느라 애쓰는 딸과 사위가 힘들지 않고 기쁨 가운데 미국생활을 잘 해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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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13일 아침

2025년 1월 13일 아침을 두 번 맞았다. 인천공항에서 아침 해를 보면서 떠나 13시간을 날아 왔는데 보스턴 공항에서 또다시 13일 아침 해를 마주한 것이다. 탑승한 후 한 숨 잤을 뿐인데 태평양 건너 지구 반대편에 나를 데려다주는 비행기라는 문명 모빌리티에 또한번 놀란다. 동시에 날짜와 시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는다.

1989년 내가 해외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 이곳 보스턴이다. 하바드 엔칭연구소에 있는 동안 탈냉전 선언과 독일통일 소식을 접했고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학자들의 우려를 가까이서 보았다. 내 학문적 자산의 한부분이 형성되고 좋은 연구자들과의 인연이 맺어진 곳이기도 하다. 한달 전 타계한 카터 에커트 교수는 잠시 자신의 아파트에 내가 기거할 수 있게 해 줄 정도로 여러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곳 마운트 어번 묘지에 잠들어 있는 낸시 교수는 한국의 세대와 계층, 사회운동 연구에 큰 성과를 낸 탁월한 학자이면서도 늘 나를 지적 멘토처럼 여기며 한국학계를 존중한 분이셨다.

이번은 이전까지와는 달라 더이상 학술적 방문이 아니다. 대학이나 연구소를 찾을 계획도 없고 특별히 지적 대화를 나눌 상대나 계기를 애써 마련하지도 않았다. 내 여행 가방은 손녀들에게 줄 한글동화책과 과자봉지로 가득 채워졌고 대부분의 시간을 딸과 손녀를 위해 쓸 마음의 각오도 충분하다. 손녀가 다닐 초등학교와 동네 도서관을 함께 가거나 좋아하는 옷이나 장난감을 사주면서 인기를 얻는데 최대의 노력을 할 생각이다. 딸과 사위가 근무하는 회사 상황과 출석하는 교회공동체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면서 과거에 나누지 못한 정을 되살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으려 한다.

한국을 떠난지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한국뉴스로부터 멀어진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한편의 궁금함과 또한편의 회피심리가 뒤섞여 마음은 염려와 무심의 이상한 조합상태다. 주요 현안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초조한 바 없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애써 뉴스를 뒤지고 조바심을 내지는 않을 작정이다. 이런 저런 주장들이 내 정서와 의식을 마냥 흔들지 못하도록 현실을 긴 호흡으로 직시하고 냉정한 거리감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볼까 한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 이곳에서도 뉴스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현 한국상황을 트럼프 신정부가 어떻게 평가할지 어떤 요구를 내놓을지, 미국의 새 정책기조에 한국은 얼마나 지혜롭고 효율적인 대응책을 마련할지 따라올 걱정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정파적 이익투쟁과 내부의 정치동학을 넘어 불확실성이 커지는 국제환경에 대응할 집단적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때다. 위기 속에서 미래의 복합 충격을 감당할 역량이 성장하는, 대전환의 역설적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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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의 문화와 경관

일본은 영주가 지배하는 번국체제를 오래 유지했던 탓에 지역별로 고유한 풍습과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4면이 바다이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지형에다 화산지대여서 자연풍경도 이색적인 곳이 적지 않다.

하기의 문화로 햐기 야키로 불리는 도자기가 우선적으로 꼽힌다. 일본의 유명 도자기가 다 그러하듯 이곳 도자기 역사도 임진왜란에서 끌려온 조선도공으로부터 시작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조선에 출병했던 영주 모리 데루모토는 도공인 이작광과 이경을 데려와 영지에서 사용될 도기 제품을 만들도록 했다. 가고시마에서 활동중인 심수관 집안이나 아리타의 이삼평 가문과 비슷한 역사인 셈이다. 다만 이들 두 지역에 비해서 하기 야키와 아직광 집안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야마구치 지역이 관광이나 접근성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탓일지 모르겠다.

하기 야키의 두드러진 특징은 흡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차나 사케를 담는 용도로 제품을 오래 사용하면 물이 들어 색상이 변한다. 그래서 하기 야키는 특히 차 애호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는데 사용할수록 미세하게 변하는 빛깔이 심미적으로 독특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기 야키의 또다른 특징은 형태와 장식의 단순함이다. 밑그림이나 상회칠 장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구울 때 도공이 어떤 효과가 예상되는지를 알고 그 예상을 최대한 활용하여 단순한 미감을 드러내려 한다. 초기엔 조선의 스타일을 따랐지만 점차 소박한 일본적 특성이 추가되어 오늘날의 개성적인 스타일이 되었다고 한다.

400년 역사의 하기야키 모습은 우라가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이 미술관은 하기시 출신의 실업가 우라가미 도시로가 17세기 풍속화인 우키요에, 동양 도자기 등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1996년에 개관했다.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우키요에는 화려한 색채가 특징인데 현재 약 5,500여점이 소장되어 있고 매월 30여점을 테마별로 전시한다. 2010년에는 도예의 진흥을 목적으로 새로이 도예관을 증축. 하기 야키를 포함하여 한국과 중국의 도자기 약 500점, 근현대 도예작품 약 750점(2015년 현재)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지역별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마츠리 (祭つり)는 일본 문화의 대표적 아이템의 하나다. ‘제사를 지낸다’는 동사 마츠루(祭る)가 명사화하여 축제를 뜻하게 되었다는 해석도 있듯이 전통적인 마츠리의 대부분은 제사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절이나 신사와 무관한 전통적인 영주가문의 행사나 막부시대 의례가 그 기원이 되는 경우도 있고 마을공동체의 세시풍습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된다. 규모가 큰 대규모 마츠리는 지역민들이 함께 참가할 뿐 아니라 지방정부가 행정적 재정적으로 뒷받침하여 지역의 공식적인 축제가 되어 있다.

히기에서는 ‘하기 시대 퍼레이드’이라 불리는 축제가 유명하다. 1603년에 시작된 에도시대. 전국의 다이묘들은 2년마다 많은 사무라이를 거느리고 쇼군을 찾아가는 의례 습관이 있었다. ‘다이묘 행렬’이라 불리던 이 이동은 각 영주들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규모가 크고 호화로웠다. 하기에서는 에도시대의 무사와 성주, 기타 중요한 사람들이 그 신분을 드러내는 의상을 입고 퍼레이드하는 다이묘 행렬을 매년 거행한다. 행진의 마무리는 무사의 무구와 의상을 신사에 봉납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막부전통과 신토 문화가 결합된 흥미로운 사례라 하겠다.

하기의 등불축제도 오래된 축제의 하나인데 조상숭배와 관련된다. 일본의 불교 전통에 따르면 여름의 오본(백중맞이) 동안 조상들의 영혼을 기리게 되는데 하기 등불 출제는 이곳 영주였던 모리 가문의 제사 행위를 그 내용으로 한다. 다이쇼인 절에서 8월 13일 500개가 넘는 석재 등불에 불을 붙이며, 8월 15일에는 도코지 절에서 등불을 밝히는데 마법 같은 분위기가 인상적이라 알려져 있다. 시모노세키 쵸후에 위치한 이미노미야신사에서는 매년 수호테이 마츠리가 열린다. 옛날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으로 춤을 춘 것이 그 유래라고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조상에 대한 감사와 풍년 기원 등의 뜻을 담은 행사가 되어 있다.

일대의 자연경관으로는 아키요시다이를 우선 꼽는다. 석회암이 늘어선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한 자연공원인 아키요시다이는 3억 5,000만년 전에는 바다였고 산호초가 오랜 시간에 걸쳐 석회암이 되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아키요시다이의 석회암에는 태곳적 바다에서 서식했던 생물 화석이 다량 포함되어 있어 산호초였던 바다의 기억을 현대에 남기고 있는 셈이다. 초원과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초록색과 흰색의 풍경미가 대단하다.

멀리서 보면 삿갓모양이어서 ‘카사야마’ 라는 이름이 붙은 카사야마산과 그 안의 동백나무길도 유명하다. 현무암류로 이루어진 성층화산으로 60m 화산대지 위에 분화구가 있고 화산 언덕에는 소규모이지만 완벽한 모양의 화구가 남아있다. 작은 활화산으로 산 속에는 한난지성 식물이 혼생하고 있어 학술상 가치가 높다. 산의 정상까지 드라이브웨이가 있어 정상에서 일본해와 떠오르는 섬들을 바라볼 수 있다. 넓은 지역에 25,000의 그루의 동백꽃이 꽃을 피워, 한겨울 화려한 색조를 보여주는 경관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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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를 어떻게 만날까?

하기(萩)를 여행할 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하기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슈번의 번청이 있던, 인구 4만 정도의 소도시다. 토쿄는 물론이고 교토로부터도 꽤 떨어져 있고 항공편이나 신칸센이 닿지 않아 한국에서는 더더욱 접근하기가 불편한 곳이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탐방하고 싶었던 곳이인데 기회가 없었던 만큼 여느 일본 여행 때와는 다른 기대감이 느껴진다.

나는 하기보다 조슈(長州)란 지명에 더 친숙하다. 솔직히 말하면 하기가 조슈번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 알았다. 1988년부터 1년 반 동안 하바드 엔칭 도서관의 일본자료실에서 메이지 유신 관련 연구들을 조사하고 검토하면서 조슈와 사쓰마 이야기를 무척 많이 접했다. 특히 요시다 쇼인이 세운 소카손주쿠에서 막부를 무너뜨리는 핵심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것, 그들이 드라마 같은 메이지 유신 정치변동의 주역이었다는 것, 이들이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등을 알게 되면서 조슈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 사쓰마의 중심지인 가고시마는 두 차례 들릴 기회가 있었는데 하기는 이번에야 가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한국사회사학회에서 오랫동안 학문활동을 함께 해온 사사친 동료들과 이 여행을 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뜻깊다. 정근식 , 김필동 교수가 제안하고 나를 비롯하여 황경숙, 노치준, 김경일 교수 등이 동의하여 성사된 여행이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박맹수 총장도 참여한데다 서울교육감 당선으로 가지 못하는 정교수 대신 채규성 님이 합류했다. 모두 학구적인 타입인데다 야심차게 일정을 계획한 탓에 오가며 보고 들을 내용들이 기대가 되고 오래 전 해답을 찾아보려던 질문들이 새롭게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모처럼의 여행인만큼 너무 답사여행 같이 되지 않고 편하고 즐거운 여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모두 노는데는 재주가 없는 진지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관광청에서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야마구치를 검색하니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뜬다. “야마구치현은 조용한 시골이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적지가 많습니다. 한때 무사가 지배한 영지의 수도였던 하기에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게 잘 보존된 성곽 마을이 있고, 이 지방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야마구치는 고요한 해변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신사, 일본에서 가장 큰 석회동굴인 아키요시도 등 기막힌 경치로 유명합니다. 시모노세키 시내 시장과 식당에서는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데, 특히 복어가 이 지역 별미로 유명합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말로 일단 복잡한 역사적 기억을 둘러싼 논란은 괄호쳐두기로 하자.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태도는 여행의 즐거움을 잠식하기 마련이니 아름다운 자연, 오래된 유적들을 영화보듯 관람하는 마음의 여유를 준비할 일이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범주나 근대화 비교욕구 같은 지적 관심도 잠시 제쳐두고 가볍고 즐겁게 이질적인 문화에 대면해 보자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그러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눈, 낯선 지역을 방문하는 호기심 많은 여행자의 눈을 가질 필요가 있으리라. 어슬프게 갖고 있는 사전지식도 일단 내려놓고 몸도 마음도 시선도 가볍게…. ‘조슈’를 만나기 위한 첫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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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노래들

10월 17알부터 4일간 “이적의 노래들”이라는 타이틀로 가수 이적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열었다. 나는 이적의 초대로 첫날 공연을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공연은 엄청난 팬들의 운집과 알찬 노래향연으로 풍성했다. 이제 셀럽의 반열에 오른 유명가수로부터 초청을 받아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함성 속에 뭍혀보는 자리는 뿌듯하고 감동스러웠다.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왔지만 오래 전 졸업해서 유명인이 된 제자가 학창 시절 교수와 끈끈한 유대를 지속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문화사회학 수업에서 이적이 쓴 보고서의 내용이 탁월해서 내 기억에 깊이 남은 학생이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대화의 기회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미 대가수가 되어 있는 그가 내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예비 신부와 함께 연구실을 찾아왔을 때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주례를 허락하면서 두 사람에게 어떻게 만났고 어떤 각오로 가정을 꾸리기로 했는지 적어서 보내 달라 했다. 두 사람은 정말 진지하고 성실하게 각자 살아온 여정과 생각, 앞으로 기대하고 지켜가려는 가치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써서 보내왔다. 나는 그 글을 바탕으로 주례사를 작성했고 진심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축복했다. 이적은 그 만남의 감격을 ‘다행이다’라는 노래를 통해 표현했고 결혼식에서 스스로 축가로 불렀다. 내가 한국사회학회장으로 사회학회 60주년 행사를 연세대에서 개최했을 때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와서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내 퇴임에 즈음해서 나는 내가 지도했던 박사 제자들에게 글씨를 하나씩 써 주기로 했다. 글씨를 받은 수십명은 대부분 교수로서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중 두세명 학자가 아니면서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도 제안을 했다. 이적은 그 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매우 고마와하면서 자신의 노래인 ‘나침반’ 의 내용을 써주기 부탁했다. 이후 ‘이문회우 정헌 박명규 서예전’에 와서 진심으로 내 정년을 축하해 주었고 심보선 교수와 함께 자신의 서명을 담은 음반과 플레이어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이적은 그때 내가 써준 글을 자신의 SNS에 올려놓고 자랑을 하기도 했으니 나와는 꽤 오래 깊은 인연을 이어오는 셈이다.

난 다시 일어날 수 있어/ 아직 내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 아직 이 황량한 세상 속에/ 너는 내 곁에 있어주니까 /어지러웠던 하루하루가/ 먹구름처럼 내 앞을 가로막아도 /너의 눈빛이/ 마치 꼭 나침반처럼/ 내 갈 길 일러주고 있으니 /아직 내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아직 이 황량한 세상 속에/ 너는 내 곁에 있어주니까

공연 중 김동률이 우정 출연을 해서 열렬한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김동률은 이적의 결혼식에서도 축가를 불렀던 것 같은데 그 때의 기억으로는 매우 장난끼 어린 느낌이었는데 이날은 매우 조용하고 사색형의 연예인 풍모가 느껴졌다. 그 다름 사이에 짙게 확인되는 우정이 보기 좋았다. 이적은 자신의 노래를 부르던 중간에 얼마전 타계한 김민기의 노래를 불러 그의 삶을 기렸다. 70년대 후반 내 대학시절의 떠올라 마음이 찡했는데 청중들도 대부분 그러했던 것 같다.

공연을 보며 80년대의 노래를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노래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랑,우정,인생 등을 노래하는 대중가요가 오랜 역사와 함께 주류를 형성하는 한편에 김민기로부터 시작해서 노찿사로,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 이어지는 강렬한 사회의식 지향의 노래가 있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제3의 범주로 클래식, 가곡, 종교음악 등이 있었다. 대중가요는 통속적이었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운동권 노래는 진지했지만 부담스러웠다. 클래식은 어쩐지 상층계급과 서구지향적인 분위기여서 접근하는데 문턱이 높았다. ‘유행가’라 불리던 대중가요에 대해선 거리감을 보였지만 술집에서는 즐겨 부르기도 했다. 팝송을 즐겨 듣기도 했고 익숙한 노래에 가사를 바꿔 시대적 정서를 표출하기도 했다.

이적의 노래는 이 세 부류의 틀을 재조합하고 재구성하여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음악이 아닐까 싶다. 그는 통속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탈대중적이지도 않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지만 운동권 가요처럼 투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의 곡의 선율은 고급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지만 클래식처럼 부담스럽거나 고고한 분위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가 탁월한 작곡가이자 가창력 있는 가수일 뿐 아니라 좋은 작사가라는 사실이 이런 종합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의 노래, 특히 노랫말이 젊은 세대 뿐 아니라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적의 노랫말에는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은유’가 포함되어 있다. 너무 현학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으면서도 통속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삶의 다양한 면모를 성찰하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의 힘이 이적 노래를 다른 어떤 가수와도 다른 것으로 만드는게 아닐까. 거위의 꿈, 다행이다, 거짓말, 물좀 줘요, 같이 걸을까 등의 노랫말은 이 시대의 정조와 혼동을 확인하고 음미하는 소중한 메타포이자 코드라 여겨진다. 이날 공연에서 청중들과 열정적으로 함께 불렀던 ‘물 좀 줘요’는 그의 노래에 담긴 시대정서를 잘 표현한 것 아닐까 싶다.

한눈팔지 말고 나만 봐줘요/ 아직 나는 잔뜩 목이 말라요 / 숨이 넘어갈 듯 노랠 부르며/ 그대가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 땀이 비 오도록 눈이 빠지도록/ 여기 이 자리에서 그대가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 내게 약속해 떠나지 않겠다고 /우리 꿈꿨던 그곳에 닿을 때까지 // 물 물 물 물 물 물 좀 줘요 목 목 목 목 목말라요 / 내 머리가 흠뻑 젖게 해줘요 난 그대 거예요 // … 핏빛이 지워지지 않아 자꾸만 어지러워져/ 붙잡을 사람이 필요해 여보세요 날 다시 일으켜주세요/ 물 물 물 물 물 물 좀 줘요 목 목 목 목 목말라요

1988 드라마 OST 로 이적이 부른 걱정 말아요 그대 역시 그의 음악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 아닐까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인권이 불렀던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하지만 이적이 부른 노래도 그에 못지 않게 와 닿았다. 같이 걸을까 라는 노래의 노랫말도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피곤하면 잠깐 쉬어가 / 갈길은 아직 머니깐 / 물이라도 한잔 마실까 / 우리는 이미 오랜 먼길을/ 걸어온 사람들 이니깐 //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 깊은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오늘도 // 길을 잃은 때도 있었지/ 쓰러진 적도 있었지/ 그러던 때마다 서로 다가와 / 좁은 어깨라도 내주어 / 다시 무릎에 힘을 넣어 //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 깊은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 오늘도 // 어느 곳에 있을까/ 그 어디로 향하는 걸까/ 누구에게 물어도 모른 채 다시 일어나 /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 오늘도

이적은 삶이 여러모로 모순적이고 ‘만만치 않더라’고 고백하는 가운데서도 꿈과 기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노래가 있고 누군가 함께 하는 이웃이 있고 또 나도 모르던 세포까지 깨어나는 순간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적은 스스로 이런 경험을 했기에 독특한 예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노래’라는 가사는 노래에 담긴 힘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런 힘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노래는 소리칠 수 있게 해줬고 / 노래는 울어도 괜찮다 해줬고 / 노래는 내 몸 속에 감춰진 / 나도 모르던 세포까지 / 한꺼번에 잠 깨웠지 // 문도 없는 벽에 부딪혀 / 무릎 꿇으려 했을 때 / 손 내밀어 일으킨 건/ 결국 내 맘속 노래야 / 노래는 꿈을 꿀 수 있게 해줬고 / 노래는 다시 힘을 내게 해줬고 / 노래는 독약 같은 세상에/
더럽혀졌던 혈관까지/ 짜릿하게 뚫어주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