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7월부터 1년 반동안 나는 하바드 엔칭연구소의 visiting fellow 로 보스톤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 내 시야도 넓어졌고 연구주제도 다양해졌다. 낯선 곳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공부하는 일 이외에는 큰 부담이 없었던 탓에 비교적 잘 적응했던 것 같다. 두 딸이 취학전 유아 시절을 보냈고 아들이 그곳에서 태어났으니 내 가족사에서도 매우 특기할만한 때였다.
대학원 시절 미국유학을 하지 않겠노라고 큰소리 치며 소위 ‘국내학파’ 형성을 주장했었다. 여전히 그런 정서가 강했던 1988년에 해외로 연구를 떠나려 마음먹고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실제로 주위에서 강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의 한정된 논의와 패러다임에 한계를 크게 느끼던 터라 나로서는 더없이 절실했다. 하바드 대학 출신으로 버클리 인류학과에서 박사논문을 작성 중이던 낸시 애이블먼 이 당시 고창 지방에서 농민운동 필드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다. 낸시는 후에 일리노이대 교수로서 한국학 발전과 대학행정에 큰 기여를 했고 나와는 지속적으로 교류했으나 안타깝게 수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6월 말에 도착한 하바드 대학 캠퍼스는 방학이 시작되어서 조용했다. 엔칭 연구소는 나처럼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연구자들을 위한 영어 프로그램을 두 달간 제공해 주었다. 나를 포함하여 중국 학자들이 여럿 참여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언어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얼마전 발생한 베이징의 민주화운동과 비극적인 천안문 사태가 초래한 충격 때문이었다. 6월 4일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가 무력으로 강제진압되고 많은 희생자가 생기났다. 이 시위의 주도자들 중 일부는 미국과 서방으로 탈출하여 중국자유화 운동을 계속하고자 했고 강제진압을 선택한 중국 정부에 대한 국제적 비난도 거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미국에만 약 5만여명의 중국유학생이 머물고 있었다. 천안문 사태 발생직후인 89년 6월5일부터 90년 4월11일 사이에 미국에 입국한 유학생은 귀국후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미국체류를 연장하는 법안도 통과되었다. 엔칭에 와있던 학자들 사이에서도 곧바로 귀국할 것인가 미국에 체류연장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비극적 진압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면서 나는 한국의 80년 서울의 봄을 떠올렸다. 중국도 어느 시기를 지나면 한국의 87년 같이 결국은 민주화의 길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되돌아보면 다소 순진한 희밍적 사고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한국연구는 와그너 교수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는 족보 연구의 대가였고 조선시대가 전공이었는데 꼼꼼한 실증적 역사연구자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근대사회변동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대화할 계기가 많지 않았다. 대신 막 부임한 카터 에커트 교수가 여러 측면에서 내겐 자극도 주고 조언도 주었다. 또 일본 메이지유신 연구자인 알버트 크레이그 교수의 수업도 청강했는데, 그는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비교연구하려는 내 연구계획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대신 한국과 베트남을 비교해보라고 조언했는데 당시 내 정서로는 잘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쨌든 하바드 엔칭연구소에서의 1년 반은 내가 동아시아를 지적으로 발견하는 시기였다. 지나치게 한국만을 주목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는 협소함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생각은 진작 했지만 동아시아라는 범주를 깊이 생각하는데 이르진 못했다. 근대와 전근대, 발전과 저발전, 서구와 한국 같은 대비가 그 결과였다. 하지만 1990년 엔칭에서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동아시아라는 배경이 중요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와 같이 온 분 가운데 일본 교토대학의 푸마 스스무 교수가 있었다. 그는 매우 성실한 중견연구자였는데 중국 청대가 전공이었지만 조선사에도 꽤 식견이 있었다. 나중 푸마교수의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기도 했고 15세기 전후의 연구에 종종 인용되기도 했다. 그와 대화하면서 나의 시야가 너무 한반도에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11월 영어 공부를 하려는 목적으로 자주 시청하던 티비 뉴스에서 접한 베를린 장벽 뉴스는 지금도 그 충격이 생생하다. 동독을 탈출하는 대규모 행렬이 등장하기 시작한지는 제법 되었지만 사실 나로선 그 변화를 주목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베를린 장벽을 망치로 부수고 브란덴부르그 문 위에 빼곡이 올라선 시민들의 영상이 올라왔다. “Wir sind ein Volk”라는 피켓을 든 동독시민들의 시위 장면과 동서 베를린을 나누던 경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아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고 기적이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12월 2일과 3일 이틀간 지중해의 몰타 섬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미소정상회담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냉전종식을 선언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유럽에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 냉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조짐을 뚜렷히 드러냈다. 1989년 폴란드에서는 6월 자유선거가 이루어져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솔리다르노시치가 압승하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등 다른 동구권 국가들도 대규모 소요사태들을 겪으면서 동구권의 붕괴는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황이었다.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세계는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평화의 시대로 가는 먼 길에 서있죠. 무력을 통한 위협, 불신, 심리적 이념적 투쟁은 모두 과거의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저는 절대로 미국과의 열전을 시작하지 않겠다고 미합중국의 대통령께 약속드립니다.“ 라고 덧붙였다. 이에 부시 대통령은 ”우리는 지속 가능한 평화를 현실화하고 동서관계를 지속된 화합으로 바꿔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제가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것입니다.“라고 화답했다. 바야흐로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사가 열리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 이런 세계사적 격동의 거대한 무게감을 내가 바로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속을 걷고 있었던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