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이석증

당혹스러웠다. 한밤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일더니 천정이 팽그르 돌았다. 한참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겨우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다시 자리에 누우니 온 방이 도는 회전성 어지러움이 확 들이닥쳤다. 모로 누우면 바로 진정이 되지만 고개를 바로 눕히면 또 같은 증세가 밀려왔다. 뇌출혈인가? 하는 의심이 들면서 불안도 엄습해온다. 가슴도 답답하고 혈압도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불을 켜고 일어나 인터넷을 검색했다. 바로 누우면 어지럽다가도 일어나 앉거나 모로 누우면 진정되는 것은 전형적인 이석증이라고 했다. 속귀의 전정기관에 있는 이석이 떨어져 나와 평형고리관 속으로 들어갈 때 겪는 어지러움을 표현하는 이석증은 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증상이고 대체로 자연회복된다고 했다. 여러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뇌출혈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한밤 중에 식구들을 깨우는 소란을 겪지 않을 수 있어서 인터넷으로 얻은 정보가 이처럼 고맙고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일본 여행을 떠나기 전날이어서 출국을 할 수 있을 것인가는 또다른 문제였다. 한달여 전에 계획했던 니가타 여행을 지진으로 포기하고 새로 계획한 여행인데 내 컨디션 탓으로 또 무산시키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이석증이라면 그다지 위험한 것은 아닐터이고 일어서 다니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인천공항을 향해 새벽 버스를 타러 나서면서도 함께 떠난 처와 아들에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항의 모든 수속을 마치고 탐승하기 전에 나의 안색과 행동거지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처가 무슨 일인가고 다그쳤다. 그제서야 전날 밤에 겪은 상황을 말하고, 여행을 포기하고 병원으로 가자는 처와 아들에게 도리어 이석증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불안한 마음을 담은채 출발했지만 다행히 2박 3일간 여행은 별 문제 없이 잘 끝났다. 여전히 잠자는 자세는 모로 누워야 했고 첫날 식사 때 다소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았다. 조심하느라 온천욕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케 한잔 편히 마실 수 없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큰 일 없이 여행을 마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세종 집에 도착한 날 밤, 나는 큰 시험을 치룬 아이마냥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염려가 가셔서일까 그날 밤은 바로 누워서도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날 병원에서 내 상태를 들은 의사는 전형적인 이석증 증세인데 가볍게 왔다가 간 모양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 했다.

이 해프닝은 내게 두가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우선 몸이 얼마니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것인지가 놀라우리만치 피부에 와닿았다. 귀 속의 작은 돌멩이, 그것이 중력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내 몸의 균형을 바로잡게 한다는 사실, 미세한 돌멩이의 이탈이 내 온 몸을 흔들리게 한다는 과학적 진실이 새삼스러웠다. 동시에 내 건강과 생명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당연한 진실도 새롭게 깨달아졌다. 이곳 저곳 다니고 여러 활동을 참여하면서 나는 아직 건강하구나 자만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성경의 말씀대로 오늘 밤에라도 내 생명을 거두어가실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였구나 하는 반성도 했다. 이 일 이후 내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진 것은 단지 어지러움에 대한 조심 때문만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건강과 시간에 더 겸손하고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자는 다짐 때문이기도 하다.

activities

국민대, 해공, 2국가론

2월 6일 국민대 한반도미래연구원과 민주평통 교류협력분과위원회가 공동주최하는 라운드 테이블에 패널로 참여했다. ‘국제정세와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2024년을 전망한다’는 것이 전체 주제였다. 이 행사에는 조현 (서울대 교수, 전 유엔대사), 신각수 (세토포럼 이사장, 전 주일대사), 김천식 (통일연구원장, 전 통일부차관), 박명규 (GIST 초빙석학교수, 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 김병연 (서울대 교수, 전 국가미래연구원장)이 패널 발제자로 참여했고 김주현 초대 원장 (전 현대경제연구원장)이 좌장으로 토론을 이끌었다. 많은 숫자가 모인 것은 아니나 청중들의 경청하는 태도나 질문의 내용에서 진지함을 느낀 좋은 자리였다.

행사장으로 향하는 본관과 법학관 건물 입구에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이 서 있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소복히 눈덮인 동상 앞에서 잠시 국민대 설립자이자 초대총장이었던 해공을 떠올렸다. 해방 직후 건국을 담당할 인재양성을 위해 대학 설립이 긴요하고 그 새로운 대학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확신을 해공은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당시 미군정이 추진하던 ‘국립대학설립안’에 극력 반대했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1946년 9월 국민대학을 설립했다. 이 해에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과 서울의 국립서울대학이라는 두 대학이 쌍생아처럼 병립하게 된 현상은 제법 알려졌지만, 남한 사회 내부에서 국대안 파동 속에 국립 서울대와 민립 국민대가 함께 출범한 사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

사립학교를 방문할 때면 으례 접하는 설립자의 동상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때부터인가 생각이 다소 달라졌다. 뚜렷한 사명감과 정신적 가치를 지닌 설립자의 삶이 귀감이 되는 경우에는 그런 상징이 대학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주요한 구심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본 게이오대학에 있는 후쿠자와 유키찌의 흉상을 보았을 때 내가 느꼈던 부러움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해공의 동상 앞에서 변변한 상징적 인물을 내놓기 어려운 한국의 대학들, 특히 내가 다니고 근무했던 서울대학을 생각했다. 국립대학으로서 특정 인물로 상징화하기엔 어려움이 있을테고 보편적 인류적 사명감을 중시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빠리 소르본느에 꽁트, 파스퇴르, 위고의 흉상이 있음을 생각하면 그렇게만 해석할 일도 아닌 듯 싶다.

남북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려는 국민대의 정성은 해공 이래 대학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선한 노력이 아닌가 싶다. 김형진 교학부총장이 대독한 정승렬 총장의 인사말에서도 국민대의 이런 지향이 느껴졌는데 평화통일대학원 건립이 거의 실현단계에 도달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작금의 한반도 사정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일텐데 국민대의 건학이념에서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대체로 유사한 현실진단을 내리면서도 일부 쟁점에서는 상이한 견해들이 피력되기도 했다. 국제관계를 전망하면서 조현 교수는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약화, 유엔의 기능정지, global South의 확대, 경제와 안보의 수렴 등으로 인한 국제질서의 불안정성을 주요한 변수로 꼽았다. 특히 ‘취약국가 한국’이라는 표현이 눈에 띠었는데 변화하는 세계정세가 한국의 ‘취약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논지였다. 동북아 정세를 발표한 신각수 대사는 큰 틀에서 미중관계가 안정화되는 흐름을 보일 것으로 예측하면서도 중국경제의 부진, 미 대통령 선거, 북핵 고도화 등 여러 불확실한 변수에 대비해야 할 것을 지적했다. 특히 한미동맹을 위시하여 한일 및 한중간의 양자관계와 한미일 3각 협력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적극적 인태전략과 유럽연계를 통해 주변국에 의한 전략공간의 제약을 돌파할 필요성도 함께 지적했다.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김천식 원장은 1민족 1국가 1체제 통일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것과 남북한 동질성 회복노력을 지속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 맥락에서 북한의 최근 2국가론이 얼마나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인지, 통일의지의 확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북한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고 특히 적대적 2국가론은 잘못된 발상임을 전제하면서, 남북간의 상호성을 규율할 전략적 프레임을 재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분단 80년이 가까워오고 유엔 동시가입 30년을 넘긴 남북한이 실질적으로 별개의 주권적 실체로 존재함을 인정하면서 상호통합을 추구하기 위한 새로운 발상과 동력을 탐색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민의식에서도 무리하거나 급속한 통일보다는 평화공존 형태의 2체제 상태를 지지하는 경향이 높다. 이런 점에서 평화공존형, 통합지향형 2국가 상태를 필요한 중간단계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 쟁점은 객석에서의 질문과 토론으로도 이어졌는데 여전히 국가론과 민족론은 뜨거운 화두임을 느끼기에 족했다.

김병연 교수는 경제학자답게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빵에서 나오는 것이라 했다. 그런 맥락에서 김정은의 현 정책방향은 빵보다 총구를 중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 보았다. 내부의 시장효율성을 억제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는 오늘 북한의 경제는 지속가능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만 장기간의 국제제재와 내부자원결핍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강력한 군사주의와 동원체제를 유지해가는 나름의 물적 기반에 대해서 우리가 경시하는 것은 아닌지도 자문해 볼 일이다. 빵을 얻기 위해 총구를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독재자들도 역사에선 결코 드물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경제적 분석이 정치적 동학과 함께 숙고되어야 할 필요도 커지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세종으로 돌아온 다음날 RFA의 기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이날 내가 말한 논지를 잘 들었고 ‘한반도 2국가론’과 관련한 좀더 깊이있는 인터뷰를 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개학을 앞두고 여러 일들이 있는데다가 날짜 조정도 여의치 않아 다음 기회를 보자고 정중히 거절했다. 분명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선 북한에 대한 거부감과 따로 살자는 정서가 존재하지만 2국가론이라는 발상에 따르는 정치적 심리적 전략적 부담도 만만치 않아 고민스러운 것이 현실이다. 정주외국인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다종족 상황도 커지는 한국에서 전통적인 민족감정에만 기초해서 사회통합을 달성하기도 어려운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수년전에 “비대칭적 분단국가체제”로 이름했던 논지를 새롭게 다듬어 통일을 지향하되 2체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2 분단국가론”으로 좀더 정교한 틀을 발전시킬 필요를 느낀다. 나름 방향은 잡히는 듯 한데 당장 내딛을 길에 대한 확신이 아직은 부족하다. 아, 언제나 내 공부가 충분한 깊이에 도달할까, 임중도원 (任重道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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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

1980년대에 전북대학교에서 90년대에는 서울대학교로 옮겨 오랜 기간 교직생활을 함께 한 우한용 교수, 서경호 교수와 저녁을 함께 했다. 두 분 다 나보다는 선배지만 비슷한 시대에 대학생활을 했고 같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 인연으로 서로 좋아하고 최근에는 페북과 유네스코 활동을 통해 간간히 교류하기도 하는 사이다. 하지만 여유롭게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는 갖지 못했기에 정년을 한 이후 언제 한번 보자 하다가 이제야 그 약속을 이루게 된 것이다.

서경호 교수가 예약해둔 장소는 경복궁 옆 서촌의 한 조그만 한옥 까페 ‘한옥달’이었다. 좁은 골목길 안쪽 오래된 한옥을 그대로 활용하고 내부에도 전통적인 가구와 소품들을 배치한 예스런 분위기가 문화인들이 좋아할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한국측 위원장으로 활약한 서교수께서 경복궁의 문화재청에서 회의가 있을 때 종종 이용한 곳이라 했다. 음식도 이태리식을 한국인 입맛에 다소 퓨전화 한 것인데 맛깔스럽고 좋았다. 때마침 얕은 눈이 내려 작은 마당이 하얗게 덮였는데 강하지 않은 조명과 어우러져 옛날 어느 시대로 내가 돌아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한용 교수는 단편 10권, 중편 2권, 장편 5권의 소설집을 펴넨 중진 소설가다. 시집도 여러 권 출간했으며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다루면서 문학의 지경을 넓히는데 지금도 열정적인 분이다. 이 날도 소설집 [왕의 손님]을 증정받았다. 페북에도 적극적으로 글을 올리는 우교수의 글쓰기는 일상의 소재에서 인생사의 굴곡과 지혜를 찾아내는 중후하고도 맛깔나는 글로 페친들 사이에 정평이 나 있다. 나도 우교수가 올리는 글들은 늘 정독하는데 동서양의 시나 경구, 문학과 예술에 얽힌 각종 에피소드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소개하는 그의 글을 읽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올리는 글인데도 글의 길이와 깊이가 어느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여서 읽을 때마다 그 기억력과 상상력, 문장력에 경탄하곤 한다.

모임 바로 전에 뉴질랜드와 타이티를 여행하고 돌아왔노라 했다. 그 여행이 고갱에 대한 탐구와 맛닿아 있다는 것을 페북에서 읽어 알고 있었지만 쉽지 않은 여행동선을 들으면서 인문학자다운 탐사여행이란 생각을 했다. 내 페북에 보스톤 미술관에서 찍은 고갱의 대작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작품을 내 사진으로 올렸는데 우교수께서 ‘왜 그림 속에 웃는 여인은 없는가’고 물었었다. 고갱에 대한 깊은 관심과 맛닿아 있음을 뒤늦게 알았지만 제대로 답을 할 식견이 내겐 없었다. 고갱이 문명화된 빠리를 떠나 자연 그대로라 상상한 타이티로 갔으나 정작 파페에테는 당시에도 이미 도시화되어 있었던 현실에 실망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고갱은 파페에테의 ‘반얀트리’ 아래에 앉아 건너다 보이는 섬 우레아를 내다보고 또다른 탈출을 꿈꾸었다고 우교수는 적었다. 타이티를 두루 다니면서 그 답을 얻으셨을까?

서경호 교수는 [신해경연구]를 비롯하여 중국 고전문학의 탁월한 업적을 남긴 중문학자다. 또 [자메이카]라는 제목의 두툼한 장편소설을 상재한 작가이기도 하다. 하바드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지구촌 곳곳의 문화유적에 해박한 분이다. 전북대 시절부터 그의 자유롭고 폭넓은 식견과 문화적 포용력을 좋아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장으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융복합적 사고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늘 강조한 분이기도 하다. 작년부터 나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을 받아 간간히 회의에서 뵙는 기회가 있었지만 좀처럼 긴 시간 이야기 나눌 시간을 갖지 못했다.

나는 서교수님을 볼 때면 그의 소설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떠올린다. 탁월한 중문학자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소설이 다룬 시공간적 배경의 스케일이 매우 큰 것에 더욱 놀랐다. 그 소설은 한반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지구적인 동학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미래의 어느 시점을 상정한 상상력이 빚어낸 그 작품은 예상 가능한 국내의 징치동학과 해외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치밀하게 녹여내 미래학 탐구서로 사용되어도 좋을 정도였다. 이 소설에서는 한반도가 통일되는 대신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일종이 완충구역을 두자는 안이 미국을 비롯한 주변강국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소설적 상상력이지만 역사적인 개연성이 없다 할 수 없는 미묘한 포인트가 흥미롭지만 무겁게 전개된다. 임진왜란 전후하여 주변국가들 사이에 한반도 분할안이 여러 차례 등장했던 역사적 경험들을 떠올렸었다. 새 소설은 쓰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치신다. 한반도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재미있고 역동적이기보다 힘겹고 부담스러운 상황으로 이행하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두 병의 와인을 비우면서 나눈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즐거웠고 유쾌했으며 식견이 넓어지는 망외의 소득까지 있었다. 까페가 문을 닫는 시간까지 떠들다가 지하철도 함께 타고 각자의 집으로 갔다. 떠나기 전 찍은 사진을 다음날 보냈더니 우교수께서 ‘이 건달들을 어찌할 것인가’라고 적고 ‘호모 비아토르’라고 덧붙였다. 여행하는 자,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자라는 뜻인데 프랑스 철학자 마르셀이 인간의 속성으로 규정한 말이라 한다. 그 표현이 정겹게 느껴져 이 사진에 ‘호모 비아토르 – 아름다운 건달들’이란 이름을 붙여두었다. 모두들 건강하고 그 멋진 필력과 상상으로 더 많은 작품 남기시길 기원한다.

life · 시공간 여행

단양과 삼봉

큰 딸 내외, 아들, 손주 들과 단양 여행을 했다. 아시아나 마일리지 소멸분을 이용해서 편하게 가 볼 곳으로 이곳을 선택한 것이 한 달여 전이다. 단양은 이름만 들었지 실제로 가볼 기회가 없었다는 아이들은 좋아했다. 세종에서 단양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는데 어차피 손주들 중심의 여행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오가는 길의 풍광이나 문화적 요소는 큰 변수가 되지 않는다. 편안한 잠자리, 즐겁게 놀만한 시설과 공간, 맛있는 음식과 여행의 즐거움이 가장 중요한 것, 두루 괜찮은 가족여행이었다.

단양팔경이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지질학적으로 독특한 기암괴석이 산과 강과 어우러져 소금강이라 할만한 명승지가 여러 곳이라는 학창 시절의 교육 탓이다. 어릴적에 들었던 이런 내용은 대체로 현지에서는 실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솔직히 이번에도 실제 모습이 명성에 미치지 못한 느낌이 강했다. 지구 곳곳의 기이한 풍경과 관광지를 가보거나 영상으로 접하는 경우가 많은 현대인이 이동이 제한된 과거의 평가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오래전 역사지식과 여행객의 들뜬 정서를 잘 섞으면 명승지에 온 기분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상력이 쉽지 않은 아이들이나 일반인에게는 과거의 명성보다 맛집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도담삼봉의 모습은 아름다왔다. 차들이 달리는 큰 길과 바로 옆의 주차장, 그리고 멀리 보이는 아파트를 제외하고 보면 가히 명승지라 이름할만하다. 강 가운데 솟은 세 봉우리가 지는 해를 등지고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뒤섞여 한폭의 동양화를 선사한다. 조선왕조 창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으로 한 것이 이곳과 관계가 있다는 말도 전한다. 고려말 권신들을 비판하다가 유배와 유랑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때 제천 지방에도 잠시 머물렀다는 것이 근거인 모양이다. 하지만 삼봉이란 지명이 곳곳에 있는 데다가 정도전이 삼봉재라는 집을 지은 곳이 삼각산이었음을 고려하면 이곳보다 삼각산과 더 깊은 연관이 있을 개연성이 훨씬 높다. 불교에 기반한 고려체제를 혁신하고 신유학에 기초한 새 왕조 창건을 꿈꾸고 추진했던 혁명가 정도전을 생각하기에 도담 삼봉의 규모는 너무 작고 기세도 완만해 보였다.

삼봉 정도전은 한국사에서 접하는 몇 안되는 혁명적 사상가였다. 아니 사상적 혁명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권신배와는 전혀 달라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려 하지 않은 담대함이 있었고 당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 혁신적 인물이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쌓은 여러 조치들, 전제개혁, 사병철폐, 조선경국전, 한양천도, 숭유억불 등은 모두 정도전의 작품인데 어느 하나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정도전은 장량이란 별호를 갖고 있었는데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를 한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빗대었기 때문이라 한다. 정도전은 유방이 장량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하여 새 왕조를 개창했다고 할만큼 자부심이 컸으며 실제로 국왕보다도 재상의 역할을 중시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상상력과 미래비전의 폭과 깊이가 대단하다고 여겨지는데 이런 인물에 대한 우리의 이해수준은 너무 빈약하다.

온달산성 앞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궁궐과 왕성의 세트장에서 지난 역사를 떠올리게 된 것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경험이었다. 여러 사극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이용되었다는 이곳은 온달산성을 배후로 하고 앞으로 강이 흐르는 곳인데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실감 나게 만들어 특히 아이들에게 역사적인 시공간감각을 갖게 하는데 좋아 보였다. 유적지로서의 제약도 거의 없어 관람객이 왕궁의 용상에 올라 앉아 사진을 찍어도 괜찮았다. 쌀쌀한 겨울날,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산성 앞에서 왕실의 생활공간과 백성들의 마을 모습을 보노라니 나도 타임머신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온 느낌이 든다. 몇 년전 와본 최완규 총장의 멋진 별장에서 들렀던 보발재가 멀지 않아 그리로 가볼까 하다가 아이들 생각에 그만두었다. 이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 백제가 서로 다투던 ‘중원’ 지역이라는데 지금은 너무도 한적하고 온달산성조차 평온한 관광지가 되었으니 ‘산천은 의구하다’는 옛말도 언제나 맞는 말은 아닌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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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노시신 (筆老詩新)

신용하 교수께서 또 한 권의 대저를 출간하고 친필 서명과 함께 송부해 주셨다. 이미 간행된 [일제강점기 한국민족사] 상, 중에 이은 하권으로 제목을 달았지만 부제인 “1931년-1945년 한국의 민족과 사회”라는 제목의 독립 저서로 간주해도 무방한 책이다. 책갈피에는 그동안 출간한 신용하 저작집 66권의 제목이 빼곡히 적혀있어서 일생에 걸친 학문적 집념의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90을 향해가는 노학자의 책이 700쪽이 넘을 뿐 아니라 수많은 제자들의 부족한 논문들까지 일일이 찾아 인용하고 실사구시적 서술방식을 견지하신 연구자로의 일관된 자세가 새삼 놀랍고 경탄스럽다.

이 책은 서장, 종장을 포함하여 총 16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루는 주제가 포괄적이다. ‘일제의 만주침략과 대륙침략 병참기지화 정책’ (2장), ‘임시정부 한인애국단의 활동’ (3장),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무장독립운동'(4장), ‘동북인민 유격부대의 항일무장투쟁'(5장), ‘조선어문 수호 연구활동과 문자보급운동 및 브나르도 운동’ (6장), ‘1930년대의 문학예술’ (7장), ‘한국민족말살, 황국신민화정책’ (8장) ‘대륙침략 병참기지 확충과 군수산업'(9장), ‘일제 공출정책의 물자강탈과 조선인 생활상태’ (10장), ‘조선인 징용, 징병 정책과 강제연행’ (11장), ‘조선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12장), ‘중국 관내에서의 독립운동과 조선의용대 및 한국광복군 창설’ (13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합정부로의 개편’ (14장) – 제목만으로도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정책과 한국인의 독립운동 전반이 망라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책의 구성 내용을 살펴보면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은 기본적으로 조선 내부에서 전방위적으로 진행된 것이었음에 반해 독립운동은 대부분 한반도 바깥, 주로 중국 관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일제의 가혹한 통치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존재하기 어려웠음과 중국을 근거지로 하는 해외의 독립운동이 해방운동의 주요동력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만큼 부나르도 운동, 조선어문수호활동, 문학예술운동 등은 국내에서 조선인 전반을 대상으로 진행된 운동으로 새롭게 주목된다. 비록 비정치적이고 비폭력적인 운동이었지만 국내의 이런 흐름이 해외 독립운동세력과 함께 해방과 독립의 동력이 되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다만 선명성과 정치성에서 해외 부분이 정당성과 상징성을 더 컸던만큼 해방 공간에서의 주도권을 해외독립운동가들이 지니게 된 것도 어떤 점에서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독립국가건설과정에 외세의 영향이 강력했던 것도 이런 해외세력들의 과잉대표성, 국내세력의 미진한 발달에 그 일단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듯 싶다.

신용하 교수님의 대부분의 책이 그러하듯 이 책도 철저하게 사료와 전거에 입각하여 서술되어 있다. 흔히 좌파와 우파로 구분되는 독립운동의 여러 흐름과 정파들이 망라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한국과 일본, 중국 간에 일종이 역사전쟁의 대상이 되고 국내에서도 정파적인 해석에 따라 역사서술의 향방이 달라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사실에 입각하여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겠다는 연구자의 자세는 그 자체가 귀하고 전범이 될 만하다. 대가라고 부를만한 학자들이 사라지고 작은 쟁점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연구자들만 많아지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런 노학자의 대작을 접하니 과연 연부역강 (年富力强) 이란 말의 전형이다. 신용하 교수님 회갑기념논총을 증정할 때, 나는 ‘필노시신’ (筆老詩新) 이란 글씨를 써서 헌정해 드렸는데 연륜이 더할수록 더 새로운 작품이 쓰여지기를 바란 그 기대가 여실히 이루어지고 있는 놀라운 모습이다. 감사하고, 그에 미치지 못함에 송구한 마음을 금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