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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의 발명? – 4

동독이란 범주, 동독인이란 정체성은 통일 이후에 발명된 것이다 – 이번 한독통일자문회의 토론 과정에서 나온 말인데 최근 이런 시각이 독일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분단 시대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동독인’이란 범주가 오히려 통일 30년이 지나면서 ‘서독인’에 대비되는 실체로 뚜렷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동독(인)이라는 범주의 재창조는 사회경제적 차별과 ‘뒤처점’의 감정을 근거로 하여 구성된다. 독일측의 발제에서 확인되는 동독지역의 경제적 낙후, 엘리트의 부재, 기회구조의 약화, 분노의 정서 등은 암묵적으로나마 서독(인)과의 대비를 전제한다.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의 대립상태는 종식되었는데 통일독일 내부에서 동독이란 범주가 재창조되고 있다는 말은 역설적이다. 그런데 내 개인적 인상으로도 이전에 비해 이번 회의에서 동독(인)이란 표현이 더 뚜렷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은 동독지역이 겪는 여러 현실적 어려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와 관련된다. 동독지역은 서독지역에 비해 총소득수준이 15% 정도 낮고 엘리트층 배출비율도 현저히 낮으며 심리적 자존감도 낮다는 것인데 이런 현실을 통일의 귀결로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크게 나누어졌다. 텔칙은 당시 동독이 적극적으로 서독의 시스템 수용을 원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슈뢰더는 더욱 분명하게 소규모 동독인들의 불만이나 움직임을 동독인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당시 적극적으로 서독의 방식을 수용하려 한 동독혁명의 시대정신을 충분히 고려해서 통일을 이해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식민지화라는 표현은 신중하게 사용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글라이케 전 차관은 최근 ‘동독인’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열심히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 화가 난다고 했다. 도대체 2023년에 누가 동독인이란 말인가라는 그녀의 질문은 왜 이 시점에서 동서독인이라는 범주가 계속 사용되고 소비되는가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읽혔다.

나는 이 토론을 들으면서 북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북한’이란 말을 사용하지 못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북한이라는 용어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남한의 시각이라고 화를 냈고 그래서 늘 북측, 또는 귀측이란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기실 명맥하게 이질적인 국가성을 고집하면서도 두 국가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타난 임시변통인 셈이다. 어쩌면 통일이 되고 나면 저런 억지 방패도 어려워지고 북한(인)과 남한(인)이라는 범주가 더욱 분명한 실체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반도에서 북한과 남한이라는 말이 남북한간에 상호소통을 돕는 어휘로 자리잡지 못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철저한 분단과 단절의 결과일 터이다. 영남사람, 호남사람, 서울사람이라는 범주가 커다란 차별의식 없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이 국가적 통합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동서독 범주가 새로이 부상하는 것은 통일독일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현상의 하나라 볼 수도 있다.

몇년 만에 다시 가본 포츠담 플라츠 장벽들의 그림은 빛이 바랬고 베르나우의 장벽박물관 역시 퇴락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독일 통일은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다만 통일을 전후하여 개개인이 겪은 변화, 이동과 좌절과 성공의 이야기들은 시민들의 일상과 인생 경험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동독(인)의 담론이 최근 부상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현실의 반영이고 국가통일이라는 거시적 변화가 삶의 미시적 문제로 전환되었음을 말해준다. 동서독 정치통합의 숙제가 사회적 통합과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그런 연유일테다. 이 새로운 숙제가 유럽통합과 이주자 난민의 포용까지 포함하는 다차원적 통합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이 문제를 어렵게 만든다. 동독에서 부상하는 극우 포퓰리즘의 정서는 ‘보편적 통합’에 앞서서 ‘우리부터’ 통합하라는 목소리이고 그것은 결국 종족주의적인 지향, 인종차별주의의 정서를 띠기 쉽다.

개인적으로 재개장된 독일역사박물관이 이런 쟁점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려 하는지 보고 싶었다. 십여년 전 이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제국 독일의 역사서술에 비해 통일과정이 너무 소략하게 설명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다시 문을 닫고 재개장을 준비 중인데 2025년에야 문을 연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통일을 상징하는 거대한 기념물이나 떠들석한 전시관을 찾기 어려운 이유를 막연하게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통일과정을 해석하는 다양한 경험들을 역사적 기억으로 상징화하는 것은 종종 해석의 단순화, 국가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특히 통일 이후의 삶을 분노와 좌절로 경험한 사람들에게 통일의 기념물보다는 그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는 비전이 더욱 긴요할 것이다. 3만여명 탈북자의 수용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드러내고 외국인 정주자들과의 사회통합이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놓여있는 한국으로서 통일지향성이 여전히 민족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사고되는 현실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