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절망과 기교

평생 남북경협을 위해 애쓰고 연구해온 조동호 교수가 정년에 즈음하여 [남북경협 80년] 책을 출간했다. 600쪽이 넘는 분량에 수미일관하게 한 주제를 천착한 좋은 연구서다. 상업출판사가 아니어서인지 장정은 화려하지 않고 사진도 별로 없으며 행간도 조밀하여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진 않는다. 그러나 남북경협 역사의 부침을 지켜봐온 동시대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의 진정성 앞에 숨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다소 무미건조한 제목과 달리 ‘절망과 가교의 역사’라는 부제는 독자의 눈을 잡아 끈다.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시에 등장하는 “절망은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라는 표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롤러코스터 타듯 부침을 거듭해온 남북경협 80년을 이런 표현 속에 담은 저자의 문학적 감수성에 놀란다. 대학시절 강의실에서의 충격을 지금도 잊지 않고 최승자 시인의 시를 삶의 지표처럼 여겨온 문청의 열정이 이런 화두를 주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지난 수십년 역사를 꿰뚫는 ‘촌철살인’의 화두가 되는 걸 보고 문학적 비유가 사회과학적 통찰과 이렇게 결합될 수 있구나 감탄하게 된다.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유명대학 박사, KDI 연구원과 이화여대 교수라는 저자의 경력은 한국 제일의 엘리트 코스 그 자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 책에는 전문적 경제이론이나 유명 학자들의 논리, 또는 통계적 수치나 효용분석의 내용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남북경협이라는 영역이 출현하게 된 역사적 맥락, 그 가능성의 공간에 헌신했던 경제인들과 정책구상자들의 의지와 꿈, 좌절과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분과학적 분류를 좋아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 책을 경제학 또는 북한학 영역에 포함시키겠지만 나로서는 성실한 현대사 연구, 당대사를 다룬 책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희망함이 없으면 절망도 없다. 따라서 절망이란 말 속에는 희망과 꿈을 추구했던 시대의 그림자가 서려있다. 꿈을 꾸면서 무언가를 이루려 했던 시대, 어려움을 어떻게 넘어설까 고민했던 자들의 열정이 저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특히 현장에서 남북경협을 실현하고 담당해야 했던 기업인, 경제인의 애씀과 고투를 엄정하면서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희망과 절망울 너무 정치적 효과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는지 모른다. 삶의 현장에서 먹고 사는 문제와 부닺치는 경제인들, 기업인들, 평범한 시민들이 느꼈던 희망과 좌절, 꿈과 절망을 좀더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했던 것은 아닐까.

기교란 말도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닐 터이다. 사실 무능한 사람은 기교도 부리지 못한다. 순수함을 고집하는 예술인이 현실에서 무능하단 소리를 듣는 이유다. 현실의 조건과 타협하면서 작은 결과라도 만들어내고 그것을 내세워 상징자산을 부풀려야 하는 정치는 애초 기교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다만 정치인에게는 성과이고 치적일 수 있는 여러 시도들이 그곳에 투신한 경제인들에겐 인생의 성패가 나뉘어지는 현장이었다는 지적, 정치적 기교로 현실의 장벽을 넘어서기 어려웠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기교가 얄팍한 정략적 술수가 아닌, 현실과의 진지한 대면역량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깊이 숙고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남북경협의 기대와 꿈을 가장 강력하게 꾸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대가 유난히 절망과 기교의 시대가 되었다는 평가는 역설적이다. 햇볕정책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상품도 구매력도 변변찮은 북한과 시장논리에 따른 교역은 불가능에 가까왔다. 주체경제만 외치는 북한을 대상으로 정부 주도의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이 시작되었지만 저자는 이것을 ‘절망을 해결한 듯 보이게 하는 기교’였다고 평가한다. 노무현 정부 역시 이 노선을 답습했다. 저자는 ‘기교로 절망을 이길 수는 없다’고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김대중 정부를 ‘문과기실’, 즉 무늬가 내실을 넘어선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 흥미로우면서도 그 엄정한 평가가 신선하다.

저자는 보수정부의 정책도 그 방향과 성격을 차분히 평가한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기교로 우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 원칙적 타당성을 인정한다. 다만 북한을 다룰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전략이 없는 원론적 입장표명에 그침으로써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상황만 악화되는 결과로 귀결되었음을 지적한다. 이 시기를 자승자박 교왕과직, 금의야행 구화투신이란 말로 평가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옳은 원칙이나 바른 생각이라도 상대방을 고려하는 유연함과 현실타개의 정치력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부정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교훈이 담겨있다.

개인적으로는 노태우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가 흥미로왔다. 저자는 노태우 정부를 선견지명과 운도시래로 표현했다. 노태우 정부시절의 기민한 대응에 대한 평가가 점점 긍정적이 되고 있는데 탈냉전이 채 본격화되지도 않은 시점에 77선언을 내놓고 대북정책을 포용적으로 재구성한 혜안이 과연 ‘선견지명’이고 뒤이은 탈냉전의 세계정세가 ‘운도시래’의 행운인 것도 분명하다. 그 행운이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 것은 그런 점에서 ‘운이 따르지 않은 것’이라 할까.

드라마틱했던 문재인 정부를 일장춘뭉 노이무공이라 표현한 대목에서는 사자성어의 촌철살인을 느꼈다. 2018년의 엄청난 기대가 2020년의 비아냥으로 마감된 이 짧은 시기를 ‘일장춘몽’이자 ‘노이무공’이라 부르는데 서운해할 사람들도 제법 있지 않을까 싶다. 이재명 정부가 다시 이 노선을 답습하려는 바탕에는 이 시기의 경험을 결코 ‘노이무공’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집착이 있을 터이다. 그런 점에서 5장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쟁점들은 앞으로 계속 논의하고 지혜를 모아가야 할 과제들이라 할 것이다. 상호주의를 어느 수준에서 요구할 것인가, 퍼주기라는 내부 반발은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졍치와 경제는 어느 선에서 분리되고 연계되어야 하는가, 불투명한 교역통계는 어떻게 구성되고 활용되어야 하는가, 남북경협에서 임금지급의 수준과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두 국가론의 논리는 어느 수준에서 수용되고 통제되어야 하는가.

지난 80년을 정리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절망은 불가피했고 기교는 불완전했다. 남북경협정책은 구조적 한계에서 기인한 좌절과 이를 우회하려는 시도 사이에서 재귀적 운동만을 반복했을 뿐이다.” 절망의 논리와 기교의 한계를 함께 벗어나야 할 것을 주문하면서 지나친 낙관도 지나친 비관도 우리의 길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 평가에 공감하면서 새로운 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한다. 저자는 단순한 교량잇기가 아닌, 북합교차로를 건설하려는 상상력을 주문하는데 그 표현이 문학적 은유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기교가 아닌 복합교차로를 어떻게 구축할지는 여전히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다는 느낌이다. 동시에 이런 질문도 다시 던지게 된다. “절망과 기교를 낳은 바탕, 꿈과 희망과 열정은 지금 어느 정도 남아 있을까?” “그 꿈과 희망, 열정은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life · 오늘의 화두

추석,추성,어머니

추석날이다. 보름달을 보기에는 날씨가 궂지만 곱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부는 시원한 바람이 상큼한 가을을 느끼게 한다. 조용하던 아파트 안팎에서 가족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들로 시끌벅적하다. 올해도 한국에서 줄잡아 2천만명이 이동할 것이라는 보도도 있다.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만날 계기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추석 명절의 존재의의는 오래 지속될 듯하다.

집집마다 차례를 지낸 탓인지 아침 엘리베이터에는 향내음이 가득했다. 조상을 기리는 관념은 현저히 옅어졌는데 여전히 지속되는 차례문화는 신기하다. 도시화와 개별화가 주는 외로움을 주기적으로 해소하려는 집단심리의 발현일 수도 있겠다. 일찍이 조부께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집안의 온갖 대소 제사를 없엔 탓에 나는 집에서 차례나 제사를 지내본 적이 없다. 추도예배가 그를 대신했지만 의례의 형식성에서 제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성묘 문화가 여전한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예전같진 않지만 지금도 성묘는 중요한 의례처럼 받아들여진다. 나도 여름 장마 때면 고향 선산의 부모님 묘소 축대가 무너질까 염려를 한다. 산소 가까이 살던 먼 친척이 돌아가신 이후엔 관심 가져주는 이가 없어 우거진 잡초가 민망할 때도 적지 않다. 가족들 사이에선 ‘평장을 하고 봉분을 없에자’, ‘서울 근교의 공원묘지로 이장하자’, ‘가족납골당으로 바꾸자’ 등 각양 대안도 논의되고 자식들이 이 문제를 떠안지 않도록 내 생전에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누이들의 압력도 뒤따른다.

올해 추석 연휴 마지막날 고향을 들려 부모님 산소를 둘러볼 예정이다. 향후 어떻게 할지 이번 길에 결론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 속엔 두 소리가 다투고 있다. 깔끔하게 산소를 재단장하거나 이장해서 새 묘역을 마련하자는 생각과, 평생 천국을 소망하며 사신 분들이고 육신은 이미 흙으로 돌아갔으니 그냥 세월의 풍화에 맡겨두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공존한다. 유학적 사유와 기독교적 사유의 긴장이라 할 수 있을텐데 어떤 방향으로 내 마음이 귀결될지 잘 모르겠다.

중국 송대의 문인이자 당송팔대가의 하나인 구양수는 그의 유명한 글 ‘추성부’에서 가을소리 (秋聲) 를 노래했다. 그가 말하는 추성은 가을이 왔다고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나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같은 물리적 소리가 아니다. 계절이 드러내는 우주의 섭리, 자연이 일러주는 메시지를 뜻한다.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면 쇄하게 되고 생명있던 것은 언젠가 죽게되는 자연의 이치가 그 핵심이다. 그런 이치를 구현하느라 매섭고 차가운 기운을 그 본질로 하는 것인만큼 가을이 다가옴을 안타까와할 이유가 없다 했다.

오히려 구양수는 “초목은 감정이 없지만 때가 되면 바람에 날리어 떨어질 줄 안다”고 자연에서 배울 것을 주장한다. “쇠나 돌같이 단단한 존재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고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을 질책한다.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자기 지혜로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면서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도 조언한다. 자연의 섭리를 조용히 받아들이라는 도교적 세계관이 글 속에 깊이 담겨있는 셈이다.

성경의 전도서와 시편에도 비슷한 표현들이 있다. 하늘 아래 새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전도서 구절과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라는 시편의 구절은 인생무상이란 체념의 정조와 매우 가깝다. 신약의 한 구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1:24)라는 구절은 “풀들은 가을이 스쳐가면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 잎을 떨군다.” 는 추성부의 표현과 다를 바가 없어 놀랍기까지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이런 구절들을 좋아하셨지만 그것으로 그치진 않았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2),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 11:16) 는 천국 소망을 강조하셨던 점에서 구양수와 달랐다. 기도할 때마다 우시던 어머니였지만 그럴수록 절대자에게 매어달리던 분이셨다. 지극한 허무함을 또다른 지극한 소망함으로 연결짓던 그 신앙의 깊이는 내게 늘 경이로움으로 다가왔었다. 나는 그 허무함의 정조는 공감할 듯 하면서도 소망함의 믿음에는 미치지 못해 어머니와 같은 신앙인을 존경하면서도 종내 그런 지경에 도달하지 못했다.

70이 되는 해 추석을 맞이하니 전과는 다른 여러 감회가 느껴진다. 성묘, 어머니, 전도서, 구양수, 추성, 낙엽과 죽음 등의 화두가 여러 정서를 동반한 채 다가오는 것이다. 가을이 오는데 무감각하거나 무덤덤하지 않고 초목이 시들고 마르는 변화 앞에 숙연해지고 어딘지 아쉬워지는 편이 더 나은 것은 분명하다. 다만 도교적인 수용론, 춘하추동의 순환론에 나를 맡기기에는 오랜 인생길의 애씀이 더욱 애틋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머니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죽음 이후의 소망을 찾는 메시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보자는 생각을 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는 전도서 말씀처럼 인생에도 생각의 계기와 시점이 있게 마련이다. 70세의 가을은 그런 새로운 때가 되기에 꽤 적절한 듯 싶다. 그래서인가 성경의 메시지가 새롭게 다가온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야 5: 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 25),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 3:5)  – 가을은 쇠락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다. 또 겨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봄과 이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추석 아침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구양수의 추성과는 또다른 하늘의 메시지를 듣는 귀가 열리기를 마음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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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장례하다

어느 정도 아는 분의 부음 소식을 접하면 의례 정중한 조의를 표하게 된다. 가까운 분이라면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게 통상의 예의다. 최근에는 관혼상제의 예법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상례’과 관련한 조문 문회는 강고하게 남아있다.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 작별인사를 한다는게 실질적인 의미가 있을리 없지만, 남은 자들에게 그런 의례가 주는 심리적 위안이 적지 않기 때문이리라.

평생 책과 함께 생활하고 이곳 저곳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모았다. 유별난 장서욕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좋은 책이라면 일단 사두려 했다. 절판된 책들을 복제해서 판매하는 서적판매원의 단골이 되기도 했고 흥미있어 보이는 자료나 논문들은 열심히 복사해 두었다. 서울대 정년을 하면서 상당부분 정리했지만 여전히 내 연구실과 서재는 많은 책과 자료들로 가득하다. 이제 광주과학기술원 교수직도 끝날 때가 되어 대대적인 정리, 과감한 버리기에 돌입했다. 단순한 방정리에서 시작한 일인데 지나간 내 인생의 조각 조각들을 되돌아보면서 그것을 ‘과거’로 돌려보내는 작업이 되고 있다.

그런데 결정을 못내리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더 이상 쓸모나 효용이 없어졌고 그다지 진귀한 자료라 할 수도 없지만 여러 기억과 인연이 떠올라 버리기가 주저되는 것들이다. 청계천 헌책방을 돌며 구했던 책, 몰래 복사해서 간직하던 자료, 역사유적지를 다니며 수집했던 팜플렛, 제자들이 공들여 쓴 박사학위논문 등 그 유형은 다양하다. 이곳 저곳에서 받았던 위촉장, 임명장, 표창장 등도 그렇거니와 여러 다양한 인연들이 서려있는 책이나 자료를 버리자는 결심이 여간 힘들지 않다.

문득 이럴 때 장례식 같은 어떤 절차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에 제대로 만나거나 연락하지 못했던 분의 마지막 자리에서 그동안 감사했고 잘 가시라 인사함으로써 민망하고 불편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의례’의 기능이 아닌가. 그래서 책을 정리하는 어떤 의례를 내 나름대로 거행하기로 했다. 더 이상 보관할 필요가 없는 자료나 책은 ‘할 일 다 했으니 이제 편안히 눈 감으라’고 이르고 폐기장소로 내다 놓는다. 혼자 짧은 순간이나마 그런 예를 갖추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매주 조금씩 책의 장례식을 치루다가 그중 어떤 책들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책이 내 손을 떠나는 것일 뿐 사라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구나. 그래서 그런 책들에 대해선 인사말을 따로 준비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있어주어서 고맙다. 이제 새 사람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아라’하고 인사한다. 저 녀석들이 어떤 새 주인을 찾게 될지, 끝내 찾지 못하고 미아처럼 떠돌아 다닐지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은 다소 위로가 된다. 반려동물을 떠나보내며 정성껏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