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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길 – 2

‘독일역사박물관’ 에서 전시 중인 “가지 않은 길” (Roads not Taken) 기획전을 관람했다. 유명한 프루스트의 시 제목과 동일한 주제를 통해 “실현되지 않은 역사적 가능성”을 생각하자는 의도라 했다. 통상 역사박물관의 전시는 연대기 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 전시는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1989년 독일통일에서 시작하여 1848년의 혁명기 까지 주요 사건들을 계기적으로 전시하고 있는데 각각의 사건들은 이후 역사전개의 분기점으로 해석된다. 그 사건들 속에는 동방정책, 베를린 장벽 설치, 냉전과 나찌즘, 1차 세계대전이 있고 전시 속에서 한국전쟁도 바이마르 공화국도 만나게 된다. 유럽과 세계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지 못하면 맥락을 찾아내기조차 쉽지 않은 전시형태여서 일견 당혹스러우면서도 신선하고 흥미로왔다.

전시를 알리는 소개문에는 라파엘 그로스 관장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다. “모든 역사학자는 왜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방향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묻고 통상 그 지점에서 멈춘다. 일반인도 그 지점 이상을 나가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전시는 감히 다른 방향으로의 역사도 가능했음을 보여주려 한다.” “순간적인 열림” (momentary opening)이 드러난 역사적 국면과 계기들을 되돌아보면서 실현되지 않았지만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상상해 보자는 것이다. 예컨대 1989년의 시점에서 공산당 정부의 개혁을 요구했던 동독인민의 열정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동서독을 통합시키는 평화통일로 이어졌는데 과연 이 흐름은 필연적으로 정해진 경로였을까? 다른 길로 이어질 계기나 무력충돌의 가능성은 없었을까를 묻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을 상상한다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역사경로를 선택할 수 있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전시 브로셔에는 역사학자 Dan Diner의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있다. “이 전시는 다른 경로나 허구적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목적은 여러 가능성을 살펴봄으로써 실제로 진행된 역사과정에 대한 더욱 명증한 시각을 얻으려는 것이다.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살펴봄으로써 실현된 역사를 보다 잘 이해힐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미래에도 여러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모든 것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선택과 그에 따른 기회비용, 공동의 부담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막연한 기대나 무책임한 허구의 역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로 이어지게 된 진정한 요인과 기회비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는다.

미래의 경로도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방향이 선택 가능한 것도 아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여건을 준비하는 노력 속에서 싹트는 것이 가능성이다. 단순한 기대나 무책임한 허구와 구별되는 가능성의 포착, 막연한 목표를 실현가능한 영역으로 이끌어낼 역량이 국가의 가장 고급한 능력일테다. ‘역사적 가능성’ 그 자체가 다양한 변수의 결합으로 구성되는 것이고 준비하고 기획하며 책임지는 행동의 결과값임을 깨우칠 필요가 있겠다. 역사를 본다는 것은 곧 미래를 보는 일이고 그것은 다시 현재의 책임이기도 하다. “가지 않은 길”은 “선택하지 않은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 그만큼 기회비용에 대한 선택의 무거움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