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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삶 (2)] 하바드 엔칭 연구소

1989년 7월부터 1년 반동안 나는 하바드 엔칭연구소의 visiting fellow 로 보스톤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 내 시야도 넓어졌고 연구주제도 다양해졌다. 낯선 곳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공부하는 일 이외에는 큰 부담이 없었던 탓에 비교적 잘 적응했던 것 같다. 두 딸이 취학전 유아 시절을 보냈고 아들이 그곳에서 태어났으니 내 가족사에서도 매우 특기할만한 때였다.

대학원 시절 미국유학을 하지 않겠노라고 큰소리 치며 소위 ‘국내학파’ 형성을 주장했었다. 여전히 그런 정서가 강했던 1988년에 해외로 연구를 떠나려 마음먹고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실제로 주위에서 강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의 한정된 논의와 패러다임에 한계를 크게 느끼던 터라 나로서는 더없이 절실했다. 하바드 대학 출신으로 버클리 인류학과에서 박사논문을 작성 중이던 낸시 애이블먼 이 당시 고창 지방에서 농민운동 필드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다. 낸시는 후에 일리노이대 교수로서 한국학 발전과 대학행정에 큰 기여를 했고 나와는 지속적으로 교류했으나 안타깝게 수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6월 말에 도착한 하바드 대학 캠퍼스는 방학이 시작되어서 조용했다. 엔칭 연구소는 나처럼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연구자들을 위한 영어 프로그램을 두 달간 제공해 주었다. 나를 포함하여 중국 학자들이 여럿 참여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언어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얼마전 발생한 베이징의 민주화운동과 비극적인 천안문 사태가 초래한 충격 때문이었다. 6월 4일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가 무력으로 강제진압되고 많은 희생자가 생기났다. 이 시위의 주도자들 중 일부는 미국과 서방으로 탈출하여 중국자유화 운동을 계속하고자 했고 강제진압을 선택한 중국 정부에 대한 국제적 비난도 거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미국에만 약 5만여명의 중국유학생이 머물고 있었다. 천안문 사태 발생직후인 89년 6월5일부터 90년 4월11일 사이에 미국에 입국한 유학생은 귀국후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미국체류를 연장하는 법안도 통과되었다. 엔칭에 와있던 학자들 사이에서도 곧바로 귀국할 것인가 미국에 체류연장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비극적 진압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면서 나는 한국의 80년 서울의 봄을 떠올렸다. 중국도 어느 시기를 지나면 한국의 87년 같이 결국은 민주화의 길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되돌아보면 다소 순진한 희밍적 사고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한국연구는 와그너 교수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는 족보 연구의 대가였고 조선시대가 전공이었는데 꼼꼼한 실증적 역사연구자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근대사회변동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대화할 계기가 많지 않았다. 대신 막 부임한 카터 에커트 교수가 여러 측면에서 내겐 자극도 주고 조언도 주었다. 또 일본 메이지유신 연구자인 알버트 크레이그 교수의 수업도 청강했는데, 그는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비교연구하려는 내 연구계획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대신 한국과 베트남을 비교해보라고 조언했는데 당시 내 정서로는 잘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쨌든 하바드 엔칭연구소에서의 1년 반은 내가 동아시아를 지적으로 발견하는 시기였다. 지나치게 한국만을 주목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는 협소함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생각은 진작 했지만 동아시아라는 범주를 깊이 생각하는데 이르진 못했다. 근대와 전근대, 발전과 저발전, 서구와 한국 같은 대비가 그 결과였다. 하지만 1990년 엔칭에서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동아시아라는 배경이 중요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와 같이 온 분 가운데 일본 교토대학의 푸마 스스무 교수가 있었다. 그는 매우 성실한 중견연구자였는데 중국 청대가 전공이었지만 조선사에도 꽤 식견이 있었다. 나중 푸마교수의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기도 했고 15세기 전후의 연구에 종종 인용되기도 했다. 그와 대화하면서 나의 시야가 너무 한반도에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11월 영어 공부를 하려는 목적으로 자주 시청하던 티비 뉴스에서 접한 베를린 장벽 뉴스는 지금도 그 충격이 생생하다. 동독을 탈출하는 대규모 행렬이 등장하기 시작한지는 제법 되었지만 사실 나로선 그 변화를 주목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베를린 장벽을 망치로 부수고 브란덴부르그 문 위에 빼곡이 올라선 시민들의 영상이 올라왔다. “Wir sind ein Volk”라는 피켓을 든 동독시민들의 시위 장면과 동서 베를린을 나누던 경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아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고 기적이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12월 2일과 3일 이틀간 지중해의 몰타 섬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미소정상회담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냉전종식을 선언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유럽에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 냉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조짐을 뚜렷히 드러냈다. 1989년 폴란드에서는 6월 자유선거가 이루어져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솔리다르노시치가 압승하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등 다른 동구권 국가들도 대규모 소요사태들을 겪으면서 동구권의 붕괴는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황이었다.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세계는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평화의 시대로 가는 먼 길에 서있죠. 무력을 통한 위협, 불신, 심리적 이념적 투쟁은 모두 과거의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저는 절대로 미국과의 열전을 시작하지 않겠다고 미합중국의 대통령께 약속드립니다.“ 라고 덧붙였다. 이에 부시 대통령은 ”우리는 지속 가능한 평화를 현실화하고 동서관계를 지속된 화합으로 바꿔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제가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것입니다.“라고 화답했다. 바야흐로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사가 열리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 이런 세계사적 격동의 거대한 무게감을 내가 바로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속을 걷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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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삶 (1)] 1989년의 충격

[탈냉전 역사의 현장을 건네오다 : 나는 1989년 7월부터 1년 반동안 미국 하바드 엔칭 연구소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하기 위해 도미했다. 이 시기는 세계사적 변화가 심대하여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내 개인사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40년 가까운 그 이후 나의 활동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변화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 격동의 과정은 예상한 바 아니었고 이러한 변화의 성격을 헤아리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탈냉전과 세계화의 시대가 저물고 나도 청장년기를 지난 오늘, 내가 겪어온 삶의 궤적을 통해 시대전환의 함의와 전망의 단초를 찾아보려한다.]

1989년 새해 한국은 세계여행을 지유화했다. 그리고 동구권 구공산권국가와 수교하는 북방정책이 시작되었다. 전지구적 탈냉전 흐름이 뒷받침한 것이지만, 87년 민주화와 88년 서울올림픽 성공에 뒤이은 국내의 자신감이 큰 요인이었다. 학계와 정치권에서 국제화, 세계화 논의가 커지고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이 히트를 치기도 했다. 북한 역시 이 흐름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세계청년학생축제를 거행하고 북한체제의 강고함을 대내외로 선전했다. 임수경이 비밀리에 이곳에 참석함으로써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것도 기본적으로는 이 시대적 흐름에 대한 광범위한 낙관과 희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989년의 변화는 한반도 바깥에서 더욱 심대했다. 2차대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쇼와 천황이 연초에 사망함으로써 일본도 새로운 시대로 이행했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구권 내부에서 자유화 움직임이 가시화되었고 6월 4일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다. 중국정보는 무력으로 이를 강제진압했는데 이것이 오늘까지 중국체제의 기몬조선을 좌우한 결정적 사건이 된 셈이다. 8월에는 소련에서 발트국가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분출되었다.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곧이어 동독의 에곤 크렌츠 서기장이 물러남으로써 사실상 동독이 해체의 길에 접어들었다. 루마니아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발발하여 독재자 차우체스쿠 동상이 시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졌고 마침내 차우체스쿠 부부가 처형당했다. 12월 2일에는 몰타 섬에서 부시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역사적인 ‘냉전종식’을 선언했다. 1990년에 접어들어서 이런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어 폴란드 집권당이 해체되었고 몰도바와 벨라루스가 연이어 소련으로부터 탈퇴했다. 9월 30일엔 한국이 소련과 수교하는 역사적 변화가 시작되었고 10월 3일에는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나는 이 모든 변화를 보스턴에 앉아 뉴스로 접했다. 엔칭 연구소에는 주로 중국, 일본, 한국 학자들이 모여있었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격동의 역사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 그것이 자국 사회에 어떤 충격을 미칠지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제한된 뉴스와 행동반경 탓에 이런 사건들의 중대함과 깊은 영향력을 즉각적으로 깨닫진 못했다. 다만 중국에서 온 학자들은 천안문 사태 이후 개혁개방노선, 중미관계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가도 좋을 것인지 걱정이 많았고 실제로 자신들의 향후 진로를 두고 고민을 계속했다. 국제정치 전문가가 아닌 일반적인 미국의 학자와 시민들도 격동하는 세계적 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거대한 변화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그 세 격동이 함께 진행되는 과정에서 기대와 우려, 확신과 주저함이 끝없이 교대했다. 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과잉된 확신으로 큰 소리를 치기도 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공부도 모자랐고 지혜는 부족했으며 종종 부끄러운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때 시작된 탈냉전 세계화 자유화 개방화의 큰 흐름 탓에 의 삶이 역동적이고 새로운 도전으로 점철될 수 있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2026년의 오늘을 보는 마음은 어둡다. 1989년에 시작되었던 그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느낌은 강하다. 탈냉전 30년의 변화, 놀라운 과학기술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해묵은 전쟁과 문화 갈등, 지진과 기상이변으로 인류공동체의 종말을 논의하는 시점에 도달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때 미국 잔류를 선택했던 중국 학자들은 오늘의 변화된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던 1989년의 저 감격을 목도했던 독일 시민들이 오늘 AfD 극우정당이 급부상하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찬찬히 지난 40년의 개인사를 돌아보면서 이 시대적 성취와 아이러니에 마주쳐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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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고 전시

하동에서의 전시가 진행되는 중 뜻밖에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진주지역 문화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여대표는 감사하게도 내 전시를 진주에서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때마침 진주문고 40주년을 기념하는 해여서 여러 전시가 기획되고 있는 터라 그 일환으로 전시로 7월 29일부터 8월 10일까지 진행되었다.

진주문고라는 큰 공간, 현대적 분위기의 전시실이 하동 빈산갤러리와는 또다른 느낌을 주었다. 고즈녁한 풍경이 없는 대신 서점과 연결되어 책을 보러오는 많은 사람들과 자연스레 만나는 장점이 크다. 박경리 작가를 좋아하는 90대 어르신도 만나고 20대 청년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박경리 선생과 내 어머니가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란 생각때문인지 특별한 친근함을 느꼈다. 진주여고(일신고녀)는 작년에 100주년을 맞았는데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의 하나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외우 이종민 교수와 김사인 시인이 우정출연해 주어 작가와의 대화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교수는 생각지도 않게 그동안 내가 간간히 쓰고 그린 작품들을 모아 ppt 로 참석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나를 ‘작가’ 처럼 대우해 주었다. 김사인 시인은 진솔하게 내 글씨 속에 담긴 정성을 읽어보라고 덧붙임으로써 내 격을 높였다. 박남준 시인, 한길사 김언호 대표도 자리를 함께 했고 지역의 문화계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다. 진주와 마산의 누이 가족도 참석해 주어 감사했다. 다음날에는 정근식 교육감, 한경구 교수, 김시연 사장 등도 내려와 격려해 주었다. 마지막날엔 전 인제대 총장 성창모 박사가 힘든 발걸음을 해주었다.

온종일 진주문고를 중심으로 책과 사람과 문화의 연결이 신선하게 이루어지는걸 경이롭게 경험했다. 건강한 지역의 문화생태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 단면을 본 느낌이다. 이 소중한 경험을 어떻게 기록해둘까 고민하던 중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의 글을 접했다. 과분한 평가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저런 정성과 노력이 진주문고 책방을 주목할만한 문화공간으로 만든 원동력이었으리라는 생각에 그의 글 일부를 옮긴다. 그 바램대로 간밤의 단비같은 시원함과 풍성함이 사회 곳곳에 가득하길 기원한다.

[박명규 서예전 2] – 진주문고 여태훈

하동 악양 빈산 갤러리에서 시작된 박명규 서예전이 진주에서 끝났다. 박경리 선생 탄생 100주년, 진주문고 창립 40주년 맞이 특별 기획이었다. 열흘간 전시된 작품은 수많은 갤러리의 탄성을 자아냈고 비치된 방명록 3권이 모자라게 감상평을 남겼다.

전시 이튿날 대담이 백미였다. 이종민 교수의 박학다식과 순발력 있는 진행, 박명규 작가의 막힘없는 술술 답변, 두 분을 오가며 빠진 것은 채우고 모자란 것은 살을 붙여 완벽한 보충을 해주신 김사인 시인. 2시간을 넘겨도 자리를 꽉 채운 독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세분의 정담에 귀를 기울였다.

작가와의 만남 다음 날(7.31)엔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이 전시장을 방문했다. 권순기 경남 교육감도 오셨다. 덕분에 경남과 서울시 교육을 책임지는 두 수장이 저희 서점에서 자리를 함께한 영광스러운 장면을 남기게 되었다. 두 분은 기꺼이 서점을 위한 응원과 모델을 자청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지필묵을 보고 연필보다 붓을 먼저 잡았다는 박명규 작가. 작품은 필법에 얽매이지 않았지만 단아하고 자유롭다. 칠순을 넘긴 노학자의 꼿꼿한 기상이 낡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적인데 캘리그라피와는 다른 질감을 보여준다.

전시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을 사연과 사람은 남았다. 책과 사람이 만나, 사람과 사람을 잇는 40살 책의 집에 기분 좋은 빚과 빛이 쌓여만 간다. 모처럼 간밤부터 시작된 단비가 지리산 자락에 내린다. 사납지 않은 순한 비가 메마른 대지를 흠뻑 적시고도 남아 섬진강을 채우고 남해로 잘 흘러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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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100주년 기념 서예전

6월 27일부터 7월 18일까지 개인 서예 전시회를 열었다.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전시로 “비오고 바람불고 눈오고”라는 표제로 하동의 작은 갤러리 빈산에서 열렸다. 5년 전 서울대에서 전시회를 한 적이 있고 간간히 작품 의뢰를 받기도 했지만 막상 ‘초대전’이나 ‘서예가’라 적힌 것을 보노라니 계면쩍음이 앞서지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설렘도 함께 느껴진다.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 너른 벌판을 내다보는 언덕, 폐가를 갤러리로 만든 작지만 정겨운 전시장 – 최참판댁의 크고 웅장한 건물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전시장으로 올라오는 돌담길, 소박한 갤러리, 그 앞 마당의 감나무가 마치 토지속 평범한 농민들이 살던 현장에 와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박경리 선생도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과 시, 대담 중에서 마음에 와닿는 글들을 골라 만든 23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적절한 구도와 서체를 구상하느라 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쓸수록 모자람을 느끼고 아쉬웠지만 그럴수록 새로운 시도를 할 동기도 생겼다. 그 애씀 속에서 나름 아름다운 한글의 조형미를 제법 살렸다는 자부심도 가져보는 전시다. 김석영 님이 초한 갤러리 빈산의 “기획의 글”을 옮겨 적는다.

고난을 통해 피어나는 우주적 생명의 찬가 – 박명규 서예전에 부쳐

“사시장철 갠 날만 있다믄 그기이 어디 극락이겄나.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오는 그기이 땅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이치이드시 사람으 경우도 매한가지 이치일 기니…….” 소설 『토지』 속 윤보의 이 한마디는 박경리 작가가 평생을 통해 일궈온 ‘생명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 선생은 인간의 삶을 자연의 거대한 순리와 동일선상에 놓았다. 기쁨과 평화 같은 ‘갠 날’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닥치는 시련과 고난인 ‘비바람과 눈보라’ 역시 생태계를 유지하려는 ‘자연의 ‘순리이고 ‘우주의 섭리’라는 깨달음이다. 온 생명이 겪는 생로병사의 굴곡이 모두 천변만화의 날씨와 다를 바 없다. 당연히 ‘인간’이란 존재 또한 그러하다.

<박경리작가 탄생 100주년 특별기획전>의 다섯 번째 무대에 정헌靜軒 박명규 작가를 모셨다. 그는 평생을 한국사회사와 평화학 등을 탐구한 ‘사회학자’이자 연구 틈틈이 붓을 들고 묵향에 젖어 온 ‘서예가’이다. 박경리 선생의 문학을 사회사적으로 규명하려고 남다른 공을 들여 세상에 알린 이력이 있다. 문학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선생을 기리는 건 흔한 일이나 사회학자의 눈으로 선생의 문학과 사상을 조명하고, 그 정수를 길어내 그것도 외양간 갤러리에서 붓끝으로 재해석까지 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이번 무대가 오롯이 박경리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비영리 헌정전시>로 이뤄진다는 점 또한 특별하다.

작가는 박경리 선생의 글과 문장의 행간에 서린 생명사상을 붓끝에 실어 펼쳐내고 있다. 작가의 어머니와 선생이 진주 일신여고 동창인 인연으로 선생의 사상이 담긴 문장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다고 한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 흔쾌히 동참하고 혼신을 다해 작품을 준비한 까닭이다. 이십여 점의 작품에 작가가 기울인 공력이 다채롭게 스며있다. 작가의 글씨는 사회학자의 지성과 전통 서법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깊은 울림을 준다. 서법에 바탕을 두었으나 ‘선비풍의 글씨’에 머물지 않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한글 서체의 조형미’를 살려서 획의 강약과 농담, 그림의 자유로운 변용까지 나타내어 정갈하면서도 풍요롭기 그지없다.

작가는 “글기둥 하나 붙들고 예까지 왔네”라는 선생의 고백처럼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언어의 몸부림’을 ‘서예’라는 몸짓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했다.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우리 많이 살았다. 여한이 없제.”, “슬픔도 기쁨도 왜 그리 찬란한가”,“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 등과 같이 선생이 남긴 문장마다 서린 자연과 생명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이 작가의 필치에 실려 되살아난다. 작가가 비뚤배뚤 얽히고설켜 서로 기댄 듯 어울려 핀 민들레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씨 “험난한 로정, 아아 너는 피었구나”(「민들레」)를 보는데 왈칵 눈물이 솟는다. 아아. 이게 우리 ‘인간 존재의 모습’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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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유정(邊境有情)

일주일에 걸친 북중국경지역 답사를 마치며 일행 한분이 한시를 한 수 지어보라 제안했다. 그에 응할 실력은 전혀 못되는 걸 알지만 중국을 여행한다는 기분에 웬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두보의 ‘春望’ 첫귀절,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을 떠올리며 이런 저런 생각과 감정들을 갈무리해 보고자 했다. 어려운 중국식 작법이나 차운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뜻만 드러내는 한시도 가능하다 하고 이를 신체시 (新體詩)라 이름했던 선친의 시도에 기대어 용기를 냈다.

延邊山河連兩岸 圖們橋上無人聲 (연변의 강산은 양안을 잇고 있는데, 도문의 다리 위엔 오가는 사람이 없다) // 欲對龍井先驅者 東柱古家滿遊客 (용정에서 선구자를 만나보려 하나, 윤동주 옛집엔 관광객만 그득하네) // 天池風光如前秀 鐵網警告此國境 (백두산 천지의 풍광은 여전히 빼어난데, 철망은 이곳이 국경이라 경고하고) // 自遠方來卒本城 皇宮舊址盛雜草 (먼곳에서 애써 졸본성을 찾아 왔으나 왕궁의 옛터엔 잡초만 무성하다) // 實見好太王碑文 懷憶千年古史蹟 (광개토왕비문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천년 옛 사적을 떠올린다) // 五女山傳朱蒙業 誰言此地高句麗 (오녀산은 주몽의 건국위업을 전하지만, 오늘 누가 이 땅을 고구려라 칭할 것인가) // 鴨綠江上望義州 默念恨別已百年 (압록강 위에서 신의주를 바라보며 한스럽게 나뉘어진지 어언 백년임을 생각한다) // 難免悲感世上事 豈不待後靑年起 (세상사 비감함을 누를 길 없으니 어찌 후대 청년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으랴)

귀국한 후에도 여행의 감회가 사라지지 않아 이 한시를 화선지에 썼다. 어줍잖치만 시(詩)와 서(書)를 함께 하던 옛 문인이 된 느낌이다. 시도 서도 내놓을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지만 어차피 격식을 무시한 작품이니 짝퉁이나 습작이란 힐난이 있어도 개의할 바 아니다. 그런데 7언 절구의 앞과 뒤가 대비되고 풍경과 인간사가 서로 어긋나는 모습이 역연하여 스스로 흥미롭기도 또 씁쓸하기도 하다. 여행에서 자연스레 얻게된 정서의 양면이 반영된 결과일텐데 이런 역설과 회한의 감정을 표현하고 누군가와 교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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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비홍수 인수가비 (綠肥紅瘦 人瘦可肥)

정민 교수가 자신이 쓴 컬럼을 보내왔다. 제목은 녹비홍수 (綠肥紅瘦) – 초록은 무성해지고 붉은 꽃은 시든다는 뜻인데 5월을 맞이하는 계절에 걸맞는 표현이다. 매일 내가 산책하는 집 주변 공원에도 날이 다르게 초록은 짙어져 학창 시절 읽었던 ‘신록예찬’이 저절로 떠올려지곤 한다. 곳곳에 철쭉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이팝나무의 흰 꽃과 천변 야생화들의 제각각 원색을 뽐내는 중이라 ‘꽃이 시든다’라는 표현은 다소 와닿지 않는 느낌이긴 하다.

초록과 붉음, 신록과 꽃을 살짐과 수척함으로 표현한 옛사람의 단어구사가 신선하다. 단순히 문학적 비유에 그치지 않고 삼라만상의 생명연쇄를 꿰뚫은 철학적 표현으로도 읽힌다. 만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누군가 성장하면 누군가 사라지는 것이 섭리다. 다산, 추사 등이 편지에 이 말을 즐겨 썼다는데 성리학에 친숙했던 그들의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던 시선과도 친화력이 있었을 법 하다. 그에 비해보면 성장지향의 시대, 효용중심의 현실, 각자도생의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 친숙해지기는 쉽지 않은 표현이기도 하다.

오늘날 녹비홍수란 표현이 매우 낯설게 된 것은 편지글이 사라진 탓이 클 터이다. 편지는 언제나 그 시작부분이 어려워 일종의 공식적 표현에 의존했다. 건강과 안부를 묻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계절의 변화를 함께 언급하는 것이 상례였다. 내 경험에 비춰보면 주로 입춘지절에, 폭염가운데, 엄동설한에, 환절기에… 등등을 골라 썼고 녹비홍수를 써본 기억은 없다. 어느 때부터인가 편지를 쓸 일이 없어졌고 자연히 저런 표현들을 사용할 기회도 사라졌다.

컬럼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어렵게 말하고 찔러 얘기하는 대신 빙 돌려 말하는 것이 문화’라 했다. 전달과 접수 사이에 여백이 많아야 정서의 두께가 생긴다는 것인데 공감하면서도 그런 문화개념으로 오늘을 이해하기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온갖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시공의 간격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즉각적인 정보연쇄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카톡 덕분에 의외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안부를 묻게 된 것을 고마워할 때가 있으니 잃는 것만 있는 건 아니라 하겠다. 문화의 양식과 내용이 달라지고 있는게다.

녹비홍수 – 살짐과 수척함의 대비를 읽다 보니 언젠가 소동파의 글귀 ‘인수상가비 사속불가의’(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를 썼던 기억이 난다. ‘사람의 수척함은 다시 살찌울 수 있으나 선비가 속되면 고칠 길이 없다’는 뜻이다. 좋아하던 후배 교수가 정치권을 기웃거리면서 점점 권력과 위세를 탐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안타까와 그 글을 썼었다. 그때 비(肥)-수(瘦) 대비의 시적 표현에 깊이 공감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화두로 삼아야겠다 생각했었다.

​두번의 정년을 지낸 지금이야말로 그 말을 일상 속에서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인생여정을 계절에 비유하면 은퇴 후의 삶은 가을 이후에 해당하니, 당연히 살집이 아니라 수척함에 대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건강용 다이어트가 아니라 생명연쇄의 자각 위에 삶을 조망하는 내적 역량으로서의 비움 노력이 필요하다. 박경리의 시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는 표현이 있는데 정말 그런 홀가분함이 내면에 자리하기를 바래야 할 때다. 속되지 않고 의연하게, ‘인수상가비(人瘦尙可肥) 대신 ‘인비상가수’ (人肥尙可瘦)를 새 화두로 삼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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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甘露)와 천은(泉隱)

남도 순례길에 나선 한 친구가 구례 천은사(泉隱寺) 의 홍매 사진을 보내왔다. 봄을 알리는 매화의 붉은 기운 뒤로 먼 산자락 능선과 사찰지붕의 멋진 곡선이 마치 한폭의 수묵화같다. 천은사라는 이름도 저 풍광에 어울리게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찰문화에 밝은 또 다른 동학께서 천은사 현판 사진을 올려주었다. ‘수체’(水體)라 불리는 이광사의 작품이라는 설명과 함께.

몇 년전 저곳을 들렀을 때 천은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신라 때 창건된 이 절의 원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17세기 절을 중수하게 되었는데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한 스님이 그 뱀을 잡아 죽이자 그 이후로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고 ‘샘이 숨었다’는 의미의 ‘천은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찰에 연이은 화재가 발생하는 등 크고 작은 불상사가 잇따랐고 그 이유가 사찰의 물기운(水氣)을 지켜주던 이무기를 죽인 탓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원교(圓嶠) 이광사가 이 사찰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지리산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는 편액 글씨를 세로로 써 주자 더이상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 동국진체의 창시자가 물흐르듯 유려한 ‘수체(水體)’의 기운으로 쓴 현판이 불의 기운을 다스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당연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수려한 모습으로 일주문을 지키고 있다.

‘감로’ – 달콤한 이슬이나 맛있는 물을 감로수라하고 불교에서는 이것을 부처의 가르침이나 시원한 차에 비유한다. 중국에는 감로사라는 이름의 오래된 사찰이 있고 한국에도 같은 이름의 사찰이 있다. 목마른 중생들에게 생명같은 단물을 제공해주는 절이란 뜻이니 내용도 상서롭다. 이에 비해 샘이 말랐다는 뜻의 ‘천은’은 사찰의 이름으론 어울리지 않는다. 원교가 저 현퍈을 쓴 이후 샘이 다시 맑은 물을 솟구쳤다 하니 다시 감로사라 해도 무방했을 터인데 천은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의아하다. 세간에 전해지는 말과는 달리 그 이름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격화되고 있는 이란사태와 전세계의 오일 쇼크 가능성을 우려하는 뉴스를 들으면서 감로와 천은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석유는 인류의 문명을 가능케 한 ‘감로’와도 같고 일부 산유국에겐 큰 부를 가져다 준 고마운 자원이지만 그로 인한 기회비용은 만만치 않다. 강대국의 침략과 간섭이 끝이 없고 국내적으로도 독재권력의 힘을 강화하여 국민들의 성숙과 민주주의의 성장을 억누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걸프만의 하늘에 수없이 오고가는 미사일과 그 가공할 파괴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차라리 석유가 고갈되는 ‘천은’의 때를 그리워할 수도 있을 지경이다. 누구도 원치않는 저 ‘불의 기운’을 억누를 오늘의 이광사는 어디 있으며 그가 내놓을 처방과 글씨는 무엇일까 – 억측같은 생각을 해보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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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매화

매년 이맘때면 매화를 그렸다. 보통 2월 말을 넘기지 않았는데 올해는 나도 바쁘고 꽃소식도 늦은 듯 하여 3월 초에 그리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매화를 그리는 마음은 따뜻한 봄이 오는 자연의 순환 앞에서 느끼는 희망, 기대, 설레임 같은 정서와 가깝다. 눈 속에 피는 매화인 설중매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매화가지를 통해 강인한 의지, 고생 끝에 얻는 영광을 상징하는 소재로도 종종 사용된다.

그런데 갑작스런 전쟁소식이 이런 기분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오늘 아침에는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전세계는 첨단 무기와 정보자산이 동원되는 현대전의 가공할 위협과 새로운 문법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있다. 세계 어느 곳보다도 지구화된 한국사회에 미칠 전방위적 충격은 피하기 어려운데 이미 유가와 주가를 염려하는 뉴스가 쏟아진다. 우리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심대한 충격을 받았을 북한은 강력한 대미 비난 성명을 내놓았다. 북한의 핵무력에의 집착이 더욱 강해지리라는 논평들이 뒤를 잇는다.

전쟁의 뉴스가 들리는 와중에 매화를 그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싶었다. 마음이 따뜻해야 그림의 매화줄기도 힘을 얻는 법인데 전쟁 소식을 듣고 있으니 먹을 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눈내리는 혹한 속에서 설중매를 그리는 심정을 떠올리며 화선지를 폈다. 전쟁이 벌어지는 엄혹한 현실에서도 봄은 찾아오고 강인한 줄기에는 매화가 필 것이다. 인간사의 불행에도 자연의 운행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임을 생각했지만 붓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아 줄기도 꽃도 엉성하다. 이것도 내 마음이 담긴 것이리라 여겨 다시 그리지 않기로 했다.

“전쟁이 그 꽃을 심어주었다”라는 제목의 시를 떠올렸다. 김명수 시인은 옛집의 황매화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물어보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임하면 대추월, 옛날 우리집/ 꽃꿈처럼 피어나던 겹겹 황매화/ 꽅밭 황매화는/ 누가 심으셨나요? // 길고양이 울어대는/ 추운 겨울밤/ 무릎 시린 새벽녂 언뜻 잠깨어// 물어본다, 물어본다/ 못 물어봤던/ 황매화는 어느 때/ 누가 심으셨나요? // 아버지가 목소리로 대답하셨어요/ 추운 겨울이 심어주었다 /전쟁이 그 꽃을 심어주었다

꽃꿈처럼 피어나던 황매화라는 표현에 눈이 간다. 꽃의 꿈, 꿈같은 꽃 – 매화는 전장의 전령처럼 앞서 달려오는 꽃이다. 전쟁 소식에 피어날 전국의 매화를 생각하면서 이런 때에도 매화의 맑은 향기는 온누리에 퍼지리라는 마음을 담아 ‘청향만리’를 제사로 썼다. 안팎이 요란해도 한반도와 우리 삶이 매화향기처럼 평안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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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 신년휘호

2026 병오년 설을 맞아 신년 휘호를 써서 서재에 걸었다. 이번 달로 오랜 교직생활을 마무리하는 내 자신에게 주는 글로 自處超然 (자처초연) 對人靄然 (대인애연) 失意泰然 (실의태연) 無事澄然 (무사징연) 16자를 골랐다. 홀로 있을 때 초연하고, 사람을 만날 때 따뜻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 태연하며, 일이 없을 때 맑은 마음을 가지라 – 올 한 해의 좌우명으로 삼기 적합한 내용이다.

이 글귀는 명나라 말기 학자 최선이 시인 왕양명에게 준 글로 알려진 처세육연 중 4연이다. 원문의 순서와는 달리 일이 없을 때 (無事) 맑은 마음을 유지하라는 부분을 마지막으로 배치했다. 현재의 내게 가장 절실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2연은 有事敢然 (유사감연) 得意淡然 (득의담연) 인데 일이 생기면 과감히 감당하고 뜻을 이루어도 담담하라는 내용이다. 유학적 태도와 도교적 정신이 어우러져 있는 이 처세론은 경주 최부자댁 가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성경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하면 다른 것들도 더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사회학자로서 나 역시 개인적인 차원보다 공동체적 쟁점을 늘 중요하게 여겼다. 계엄과 탄핵의 격랑 속에서 맞이한 작년에 ‘事必歸正 (사필귀정)’ 을 신년휘호로 쓴 것도 헝클어진 질서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공의적 바램을 담은 것이었다. 나라 안팎이 여전히 불확실한 2026년에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건 여전히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천하를 다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궁극적 가치는 개인의 존엄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창조주의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더 근원적이다. 동양에서도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공적 활동도 개인의 자기 관리에서 출발한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가르쳐왔다. 홀로 있을 때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유학의 가르침은 은둔자의 삶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올곧은 선비가 되기 위함이었다.

공적 활동에서 물러난 자유로운 생활인에게 내면의 자세를 우선 돌아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달라진 환경 속에서 흔들리기 쉬운 정서와 생활 방식을 새롭게 재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확실한 상황, 의외의 곤경, 외로움의 장애를 감당하고 이겨낼 정서적 맷집을 키워야 한다. 홀로 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일이 없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 – 이 4연을 새해의 화두로 붙잡고 애쓰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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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기교

평생 남북경협을 위해 애쓰고 연구해온 조동호 교수가 정년에 즈음하여 [남북경협 80년] 책을 출간했다. 600쪽이 넘는 분량에 수미일관하게 한 주제를 천착한 좋은 연구서다. 상업출판사가 아니어서인지 장정은 화려하지 않고 사진도 별로 없으며 행간도 조밀하여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진 않는다. 그러나 남북경협 역사의 부침을 지켜봐온 동시대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의 진정성 앞에 숨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다소 무미건조한 제목과 달리 ‘절망과 가교의 역사’라는 부제는 독자의 눈을 잡아 끈다.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시에 등장하는 “절망은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라는 표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롤러코스터 타듯 부침을 거듭해온 남북경협 80년을 이런 표현 속에 담은 저자의 문학적 감수성에 놀란다. 대학시절 강의실에서의 충격을 지금도 잊지 않고 최승자 시인의 시를 삶의 지표처럼 여겨온 문청의 열정이 이런 화두를 주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지난 수십년 역사를 꿰뚫는 ‘촌철살인’의 화두가 되는 걸 보고 문학적 비유가 사회과학적 통찰과 이렇게 결합될 수 있구나 감탄하게 된다.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유명대학 박사, KDI 연구원과 이화여대 교수라는 저자의 경력은 한국 제일의 엘리트 코스 그 자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 책에는 전문적 경제이론이나 유명 학자들의 논리, 또는 통계적 수치나 효용분석의 내용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남북경협이라는 영역이 출현하게 된 역사적 맥락, 그 가능성의 공간에 헌신했던 경제인들과 정책구상자들의 의지와 꿈, 좌절과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분과학적 분류를 좋아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 책을 경제학 또는 북한학 영역에 포함시키겠지만 나로서는 성실한 현대사 연구, 당대사를 다룬 책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희망함이 없으면 절망도 없다. 따라서 절망이란 말 속에는 희망과 꿈을 추구했던 시대의 그림자가 서려있다. 꿈을 꾸면서 무언가를 이루려 했던 시대, 어려움을 어떻게 넘어설까 고민했던 자들의 열정이 저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특히 현장에서 남북경협을 실현하고 담당해야 했던 기업인, 경제인의 애씀과 고투를 엄정하면서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희망과 절망울 너무 정치적 효과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는지 모른다. 삶의 현장에서 먹고 사는 문제와 부닺치는 경제인들, 기업인들, 평범한 시민들이 느꼈던 희망과 좌절, 꿈과 절망을 좀더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했던 것은 아닐까.

기교란 말도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닐 터이다. 사실 무능한 사람은 기교도 부리지 못한다. 순수함을 고집하는 예술인이 현실에서 무능하단 소리를 듣는 이유다. 현실의 조건과 타협하면서 작은 결과라도 만들어내고 그것을 내세워 상징자산을 부풀려야 하는 정치는 애초 기교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다만 정치인에게는 성과이고 치적일 수 있는 여러 시도들이 그곳에 투신한 경제인들에겐 인생의 성패가 나뉘어지는 현장이었다는 지적, 정치적 기교로 현실의 장벽을 넘어서기 어려웠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기교가 얄팍한 정략적 술수가 아닌, 현실과의 진지한 대면역량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깊이 숙고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남북경협의 기대와 꿈을 가장 강력하게 꾸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대가 유난히 절망과 기교의 시대가 되었다는 평가는 역설적이다. 햇볕정책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상품도 구매력도 변변찮은 북한과 시장논리에 따른 교역은 불가능에 가까왔다. 주체경제만 외치는 북한을 대상으로 정부 주도의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이 시작되었지만 저자는 이것을 ‘절망을 해결한 듯 보이게 하는 기교’였다고 평가한다. 노무현 정부 역시 이 노선을 답습했다. 저자는 ‘기교로 절망을 이길 수는 없다’고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김대중 정부를 ‘문과기실’, 즉 무늬가 내실을 넘어선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 흥미로우면서도 그 엄정한 평가가 신선하다.

저자는 보수정부의 정책도 그 방향과 성격을 차분히 평가한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기교로 우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 원칙적 타당성을 인정한다. 다만 북한을 다룰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전략이 없는 원론적 입장표명에 그침으로써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상황만 악화되는 결과로 귀결되었음을 지적한다. 이 시기를 자승자박 교왕과직, 금의야행 구화투신이란 말로 평가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옳은 원칙이나 바른 생각이라도 상대방을 고려하는 유연함과 현실타개의 정치력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부정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교훈이 담겨있다.

개인적으로는 노태우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가 흥미로왔다. 저자는 노태우 정부를 선견지명과 운도시래로 표현했다. 노태우 정부시절의 기민한 대응에 대한 평가가 점점 긍정적이 되고 있는데 탈냉전이 채 본격화되지도 않은 시점에 77선언을 내놓고 대북정책을 포용적으로 재구성한 혜안이 과연 ‘선견지명’이고 뒤이은 탈냉전의 세계정세가 ‘운도시래’의 행운인 것도 분명하다. 그 행운이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 것은 그런 점에서 ‘운이 따르지 않은 것’이라 할까.

드라마틱했던 문재인 정부를 일장춘뭉 노이무공이라 표현한 대목에서는 사자성어의 촌철살인을 느꼈다. 2018년의 엄청난 기대가 2020년의 비아냥으로 마감된 이 짧은 시기를 ‘일장춘몽’이자 ‘노이무공’이라 부르는데 서운해할 사람들도 제법 있지 않을까 싶다. 이재명 정부가 다시 이 노선을 답습하려는 바탕에는 이 시기의 경험을 결코 ‘노이무공’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집착이 있을 터이다. 그런 점에서 5장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쟁점들은 앞으로 계속 논의하고 지혜를 모아가야 할 과제들이라 할 것이다. 상호주의를 어느 수준에서 요구할 것인가, 퍼주기라는 내부 반발은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졍치와 경제는 어느 선에서 분리되고 연계되어야 하는가, 불투명한 교역통계는 어떻게 구성되고 활용되어야 하는가, 남북경협에서 임금지급의 수준과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두 국가론의 논리는 어느 수준에서 수용되고 통제되어야 하는가.

지난 80년을 정리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절망은 불가피했고 기교는 불완전했다. 남북경협정책은 구조적 한계에서 기인한 좌절과 이를 우회하려는 시도 사이에서 재귀적 운동만을 반복했을 뿐이다.” 절망의 논리와 기교의 한계를 함께 벗어나야 할 것을 주문하면서 지나친 낙관도 지나친 비관도 우리의 길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 평가에 공감하면서 새로운 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한다. 저자는 단순한 교량잇기가 아닌, 북합교차로를 건설하려는 상상력을 주문하는데 그 표현이 문학적 은유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기교가 아닌 복합교차로를 어떻게 구축할지는 여전히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다는 느낌이다. 동시에 이런 질문도 다시 던지게 된다. “절망과 기교를 낳은 바탕, 꿈과 희망과 열정은 지금 어느 정도 남아 있을까?” “그 꿈과 희망, 열정은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