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스승되기, 제자되기

스승의 날이 하루 지난 16일, 서울에서 두 모임이 있었다. 점심은 제자들이 나를 위해 마련해준 자리였고 저녁은 내 세대 동학들이 대학 시절 은사님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사회 곳곳에서 중견으로 활동하는 제자들에게 ‘스승’이란 이름으로 축하를 받은 일도 감사하거니와 다들 현역에서 은퇴한 백발의 동학들이 90을 바라보는 선생님을 모시고 담소를 나눈 것도 아무나 누릴 복이 아니다.

점심에 모인 7명의 제자들과 반가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아무래도 최근 젊은 세대의 경험과 관심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정치 문제로부터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학계로부터 문화계에 걸쳐 다양한 화제가 오고 갔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해, 북한의 현실과 남북관계의 미래에 대해, 대학현장과 박물관에서의 컨텐츠 생산과 유통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엔 나를 위시해 한두해 밑의 후배들 포함해서 역시 7명이 모였다. 지도교수이셨던 신용하 교수님은 최근 좌골신경통으로 보행에 다소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지팡이를 짚고 참석하셨다. 이 자리에 오기 어려워질까 학술원 행사에도 양해를 구하고 불참하셨다 했다. 그 불편함을 제외하면 여전히 탁월한 기억력, 학문적 열정, 정확하고 분명한 자기관리가 여전하셨다. 최근의 저서를 가져오셔서 각자에게 직접 서명을 해고 전달해주셔서 제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신 것도 예와 다름이 없다.

밤늦게 기차로 집에 오면서 내가 누린 이 양면의 행복을 곰곰 되돌아보았다. 좋은 스승을 만난 복, 고마운 제자들을 만난 복 – 그 어느 쪽이 더 크다 할 것 없이 내 평생을 이끈 두 축이다. 감사한 마음 한켠에서는 스승의 기대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한 불민함에 대한 송구함이, 또 다른 한편에는 제자들의 잠재력을 키워주면서도 단단한 지적 훈련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심정이 솟구친다. 나는 제자로서도 분에 넘치는 스승의 복을 누렸고 선생으로서도 과분한 제자들의 사랑을 입었다.

점심 시간에 제자들이 사온 케잌을 자르면서 함께 ‘스승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다들 노래를 부르며 계면쩍어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는 어버이시다….’ 그 가사는 지극한 정성을 담았지만 지금 시대, 고등교육 현장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서둘러 저 노래는 ‘초등학교 선생님’께 어울린다고 둘러대었지만 과연 대학에서의 스승과 제자 간에는 어떤 존경의 마음이 핵심을 이루는 것일까 생각했다. 지식을 주고 받은 관계를 넘어 삶과 시대를 읽는 눈과 결을 공유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저녁에 신용하 교수님은 당신의 오랜 학술활동을 정리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학’, 그리고 ‘꿈을 설파하는 스토리’ 에 전념했노라 하셨다. 식민사학의 극복, 동북공정과의 싸움, 한국적 사회학의 정립을 위한 노력, 문명적 뿌리에 대한 탐구가 그것이라 했다. 지금은 그 마무리 작업의 하나로 ‘문명의 사회학’을 집필하고 있다 하셨고, 갑자기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연구와 집필이 중단된 것을 매우 안타까와 하셨다. 덧붙여 당신의 책이나 연구, 예컨대 ‘21세기 한국의 발전전략’이나 ‘고조선 문명론’이 학계로부터는 냉대를 받았지만 수많은 기업인과 젊은이, 시민들로부터 관심과 반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꿈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마무리를 했다.

꿈을 심어주는 지적 작업 —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 내가 ‘꿈의 사회학’을 강의하면서 마음 속에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공부할 때는 ‘꿈’을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늘 부차적으로 대했던 것 같다. 나는 실증과 분석, 자료와 논리를 가장 중시했고 그런 점에서 과학주의, 합리주의, 주지주의의 성실한 추종자였다. 꿈과 지향, 의지의 영역에서 벗어나려 했고 중립적인 태도를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내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신교수님께서 당신의 꿈을 이어받를 제자를 한 사람도 키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꽃힌다. 공식적으로는 내가 서울대 사회학과의 사회사 후임자로, 한국사회사학회의 다음 세대 대표격으로 활동한 것은 분명하고 나름 그 역할은 최소한이지만 감당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역사사회학, 한국사회사, 민족사회학 등의 영역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공부 이외의 일에 곁눈질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도연구, 고조선 문명연구에 합류하라던 제안을 끝내 수용하지 않았던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송구스러운 부분이다. 내 성향상 지금이라해도 선뜻 그 분야 연구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선생님의 저 꿈, 실증적 학문 너머에 자리한 일생의 열정과 기원에 대한 이해는 좀더 깊고 충실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열흘 전 한완상 교수께서 전화를 하셔서 장시간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는 중에 ‘내가 사회학을 선택한 배경에는 크리스챠니티가 중요한 요인의 하나인데 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해주는 후학이 없다’고 안타까와 했다. 당신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간행하는 일을 내가 맡아주기를 바란다는 말씀도 여러차례 하셨다. 내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여러모로 서운해 하신다는 주위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돌이켜보면 내가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에 한 교수님의 영향이 컸는데 그 분의 기대와 꿈도 내가 이어받질 못한 셈이다.

스승이 되는 것도 일생의 과업이라면 제자가 되는 것도 평생에 걸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정년으로 마무리될 수도 없고 스스로의 인격과 품성을 다듬어 가는 것, ‘신독’의 자기관리가 흐터러지지 않게 노력할 일이다. 그것만이 내가 받은 제자로서, 스승으로서의 큰 복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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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

헌재의 판결을 보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이 입에 올린 글귀가 ‘사필귀정’이었다. 모든 일은 결국 바르게 해결된다는 사자성어로 정의는 마침내 승리한다는 뜻으로도 종종 해석된다. 옳은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겐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경구임은 분명하다. 일의 결국이 좋을 것을 믿는 믿음은 난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물론 현실이 늘 이 말을 증명해주진 않는다. 옳은 행위를 추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성공하거나 그 뜻을 이룬다는 보장이 없다. 때로는 편법을 일삼는 사람이 위세를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엇이 ‘바른 결과’ 인가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이견도 해소되기 어렵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그 마지막 결과를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정답도 있기 어렵다.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아닌 한 한 세대를 지나서야 ‘귀정’의 결말이 나타나는 과정을 견뎌내기는 힘들다.

이번 탄핵인용을 두고서 ‘사필귀정’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의 생각도 각양 각색일 수밖에 없다. 야당의 입장에서는 탄핵인용으로 당대표의 사법리스크를 벗고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에서 이미 ‘귀정’의 큰 걸음이 내디뎌진 것이라 볼 것이다. 탄핵인용을 환영하지만 민주당에 호감을 갖지 않는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헌정질서가 회복되고 극단적 분열을 방지할 여건이 마련된 것을 ‘귀정’이라 여길 것이다. 반면 대통령의 복귀와 이재명의 유죄판결을 ‘바라고 있던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만의 ‘귀정’에 대한 집착과 반감을 견지할지 모른다.

앞으로 벌어질 대선정국과 그 이후의 사태진전을 겪으면서 이 말은 끊임없이 재해석될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완료태로 해석되어선 안된다. ‘귀정’을 독점하는 세력의 정당화 논리로 변질되는 것은 더더욱 피해야 한다. 이 말은 향후에 이루어질 상태를 소망하는 미래형 명제이고 모두가 함께 이루어야 할 책임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헌재의 결정이 ‘사필귀정’의 중요한 국면임은 분명하지만 이후의 사태진전이 모두가 바라는 ‘귀정’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다. 역사와 타자 앞에 더욱 겸손해져야 할 이유다. 그런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네 글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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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매화도

지인이 보내준 매화 사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났다. 시절의 하수상함에 휘둘려 봄이 온 것도 몰랐구나 싶었다. 지금부터라도 나무의 새잎 나는 소리, 잔디 색 변하는 모습, 풀꽃 피는 자리들을 유심히 살펴보리라 다짐한다. 매화 필 때 ‘以文會友’ 하자 약속한 ‘매암동인’ 제자들에게도 안부를 전해야겠다.

몇년 전부터 이맘때면 매화를 그렸다. 옛 문인화를 모사하기도 하고 직접 본 매화를 그리기도 했다. 작년에는 섬진강변의 화려한 매화 동네의 감흥을 표현해 보느라 적지 않은 화선지를 파지로 만들었다. 매화 그리기가 새 봄을 맞이하는 내 나름의 연례 의식이었던 셈인데 올해는 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으니 세상사의 회오리가 내 정서의 영역까지 꽤나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문득 작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중국 작가 우웨스의 작품이 생각났다. 전통적인 문인화와는 다른 짙은 농묵의 묵매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래, 올해는 이런 매화도를 그려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심기일전하여 먹을 갈고 굽은 등걸과 뻗은 가지를 짙은 먹으로 강하게 그렸다. 꽃이 무성해야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꽃잎도 그려 넣었다.

이백의 시 한 구절을 화제로 썼다. 寒雪梅中盡 春風柳上歸 (찬눈은 매화향기에 사라지고 봄바람이 버드나무 위로 돌아온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노래한 시인데 세상사의 이치를 담은 글로 읽을 수도 있다. 한겨울 눈보라가 요란헤도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듯이, 어지러운 나라 안팎의 상황도 결국은 사필귀정의 새 날로 이어지리라는 소망으로 읽어도 좋겠다. 매화향기 은은한 봄기운 속에서 힘든 시기를 견뎌낼 힘과 지혜를 얻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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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아일랜드 여행길

2박 3일간 로드 아일랜드 여행을 다녀왔다. 바닷가에서 잠시라도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처의 희망을 따라 로드 아일랜드 일대에서 전망이 좋은 숙소를 찾았다. 위릭, 뉴포트, 브리스톨 등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한 집을 빌렸다. 브리스톨 해변가에 위치한 작은 주택으로 사진으로 보고 선택한 곳인데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내부는 깔끔했고 거실의 전면이 통유리창으로 되어 탁트인데다 그 앞으로는 넓은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여행을 매우 뜻깊게 해 준 것은 날씨였다. 보스턴을 출발할 당시만해도 눈발이 날리고 예보 상으로는 궂은 날씨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숙소에 도착한 직후 2시경부터 날씨는 활짝 개이고 파란 하늘과 햇살이 강렬했다. 거실에서 구름이 걷히고 그 사이로 파란 하늘과 붉은 태양이 나타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잠시 휴식한 후 반대편 해안으로 건너가 일몰을 보기로 했다. 역시 해변가에 위치한 비치 레스토랑은 음식보다도 분위기와 풍경이 일품이었다.

말을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일몰을 보는 호사를 누리고 나니 밤에 선명한 별자리를 보고 싶은 욕심이 솟아났다. 실제 이 정도면 총총한 밤하늘을 기대할 만 했다. 평소보다 훨씬 선명한 오리온,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등을 만났지만 은하수를 보려던 꿈은 이루지 못했다. 도시의 불빛이 가까이 있는 지역에서 이것까지 바라다니, 지나친 기대였을 수도 있다. 그 아쉬움을 달래준 것은 아침의 일출 광경이었다. 이 일출을 여유있게 보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던킨 도너츠와 커피를 사왔다. 도너츠의 맛을 잃게 만들 정도로 일출 모습은 장관이었다. 넓게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부터 붉은 기운이 펼쳐나가는 모습 앞에서 우리는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프로비던스를 둘러보고 한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장님 내외분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부산에서 지내다가 미국으로 건너온지 23년이 넘었다니 아마도 IMF 직후 미국행을 결심했던 분들이 아닐까 싶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말에 반가와하면서 최근 대통령의 계엄과 탄핵 사태로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라고 했다. 트럼프 정부의 출범에 대해서는 미국의 백인들이 대체로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이 어려운 상황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민을 왔지만 한국상황에 대한 관심은 결코 약해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날은 밤새 눈이 내려 또다른 바닷가 설경을 선사했다. 불과 2박 3일의 여행인데 일출, 일몰, 밤하늘, 설경을 모두 감상할 수 있었으니 큰 다행이었다.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길에 샌드위치 시의 조그만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지중해식 움식이 전문인 듯 했고 주문을 받는 젊은 여성도 그쪽 출신으로 보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갑자기 표정과 어투가 달라졌다. ‘아 정말요? 너무나 가고 싶은 곳이에요. 내가 제일 좋아하고 보고싶은 곳입니다’ 라고 했다. 한국의 위상, 문화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하는 기회였다. 이들에게는 계엄과 탄핵이라는 정치적 격랑은 관심 바깥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믿기 어려운 이중적 상황이 계속될 경우 한국을 보는 대중적 인식에도 영향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까움을 또 한번 느끼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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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과의 긴 인연

보스턴 – 1989년 하바드 엔칭연구소의 방문학자로 와서 1년 8개월을 살면서 박사논문의 초고를 만든 곳이며 내 평생의 학문적 자산이 된 소중한 경험을 얻은 곳이다. 그런가하면 아들이 이곳에서 태어난 덕분에 엔칭 관계자 및 여러 나라의 학자들로부터 큰 축하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아들일지 딸일지를 놓고 20여명 학자들이 1달러씩 모아 베이비 샤워를 해준 멋진 추억이 앨범과 뇌리에 남아있다. 갓난 아기를 낳고 키우느라 Womens and Brigham Hospital 과 Childrens Hospital 을 오갔고 딸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데려다 주느라 분주했던 기억도 새롭다.

이곳의 학자들을 만나 내 좁은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두고두고 내 생애의 자산이 되었다. 카터 에커트, 에드워드 베이커, 낸시 에이블먼, 존 리, 김선주 교수와의 이런 저런 인연도 이곳을 통해 맺어졌다. 낸시는 내가 이곳에 올 수 있도록 추천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하바드 의대 교수로 재직하시던 그 부모님 댁으로 우리 가족을 초청해 주었다. 오랜동안 이 분들과 교류했지만 내가 도움을 준 것보다 그들로부터 받은 것이 훨씬 많다. 특히 고마운 에커트와 낸시 두 분이 모두 타계하셔서 감사함을 좀더 자주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곳과의 인연은 둘째가 유학을 오면서 새롭게 이어졌다. 약학을 전공한 둘째는 식약청에 잠시 재직하다가 하바드 보건대학원으로 유학을 와 약물역학 epidemiology 과 의료통계 medical statistics 를 함께 전공했다. 재학 중에 몇 번 오가면서 격려도 했지만 그 모든 학업과정은 결국 혼자의 몫이었는데 잘 감당하고 견뎌주었다. 2017년 딸이 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에 부모로서 하바드대 졸업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가문의 영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딸은 이곳에서 멋진 신랑감을 찾아서 결혼을 했다. 둘이 잠시 한국으로 나와 작은 결혼식만 마치고 다시 돌아와 공부를 마무리하고 학위 취득 후 취업을 했다. 사위도 이곳에 직장을 갖고 있어서 둘 다 보스턴에 정착하게 되었다. 첫 손녀가 태어나던 2018년에 다시 하바드 엔청연구소 방문학자로 와서 8개월을 지냈고 둘째 손녀가 태어날 때도 짧은 시간 와서 머물렀다. 이제 두 손녀가 자라 학교와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으니 이곳과의 인연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 같다. 낯익은 찰스 강변을 지나면서 내 인생사 속에 깊이 자리한 하바드와 보스턴이 새삼 와닿아 마음이 뭉클하다.

딸 내외가 마련한 벨몬트의 집을 들어서면서 더욱 감사한 마음이 벅차오른다. 재택근무로 오전 회의를 막 마친 딸과 반가운 포옹을 했다. 한국에서의 대학공부는 물론이고 미국 유학시절까지 부모의 경제적 뒷바라지가 필요없을 정도로 장학금으로 전과정을 마친 자랑스런 딸이다. 먼 외국에서 결혼할 상대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며 두 딸을 키우고 마침내 좋은 지역에 좋은 거처를 마련하는 과정도 전적으로 스스로 해결해온 대견한 아이다. 그 독립성이 고마우면서도 힘들고 외로운 때가 어찌 없었을까 싶어 짠한 마음이 솟구친다.

미국도 아이들 교육여건과 안전정도에 따라 주택지 선호도가 크게 달라진다. 벨몬트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곳 주민들도 선호하는 좋은 지역이었다. 집은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3층 건물로 4 룸 4 화장실 구조다. 1층에 거실과 주방과 응접실이 있고 2층에 침실 2개와 놀이방, 그리고 재택근무용 작업실이 있다. 3층에는 방문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침대와 소파와 여유공간이 있다. 뒤로는 호수가 보이고 각종 물건들을 넣어둘 꽤 넓은 지하공간이 별도로 있다. 뒷마당은 바비큐 파티가 가능한 데크와 작은 창고가 있고 토끼들이 오가는 아담한 잔디밭이 있으며 주위로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둘러서 있다. 창이 많은데다 내부 공간이 모두 흰색 톤으로 되어 있어 종일 햇살이 쏟아들어와 밝고 아늑한 느낌이다.

저녁에 손녀들과 반갑게 만났다. 하루가 멀다하고 화상으로 통화하고 사진을 보던 아이들이었지만 직접 만나니 더욱 새롭다. 둘째 손녀가 먼저 집으로 와서 반갑게 만났다. 말도 배우기 전에 잠시 함께 있었을 뿐이었는데 잠시 어색한 듯 머뭇거리다가 곧 2층으로 뛰어 올라가 공주옷을 갈아입고 내려와 애교를 부렸다. 조금 후 큰 손녀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이젠 많이 커서 제법 학생티가 났다. 첫째도 곧장 2층으로 올라가더니 팅크벨 요정의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와 거실을 뛰어다니며 인사를 했다. 두 명의 예쁜 천사를 보는 듯 황홀한 기쁨이었다.

언젠가 딸은 아이들이 너무 여성스러움을 강요받지 않게 키우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두 손녀는 하나같이 공주옷을 좋아하고 화장품 장난감을 좋아한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런 모습은 타고나는 모양이라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다들 자기 재능과 개성을 갖고 태어나는게 아닌가 싶다. 저 아이들이 평생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또 키우느라 애쓰는 딸과 사위가 힘들지 않고 기쁨 가운데 미국생활을 잘 해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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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13일 아침

2025년 1월 13일 아침을 두 번 맞았다. 인천공항에서 아침 해를 보면서 떠나 13시간을 날아 왔는데 보스턴 공항에서 또다시 13일 아침 해를 마주한 것이다. 탑승한 후 한 숨 잤을 뿐인데 태평양 건너 지구 반대편에 나를 데려다주는 비행기라는 문명 모빌리티에 또한번 놀란다. 동시에 날짜와 시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는다.

1989년 내가 해외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 이곳 보스턴이다. 하바드 엔칭연구소에 있는 동안 탈냉전 선언과 독일통일 소식을 접했고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학자들의 우려를 가까이서 보았다. 내 학문적 자산의 한부분이 형성되고 좋은 연구자들과의 인연이 맺어진 곳이기도 하다. 한달 전 타계한 카터 에커트 교수는 잠시 자신의 아파트에 내가 기거할 수 있게 해 줄 정도로 여러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곳 마운트 어번 묘지에 잠들어 있는 낸시 교수는 한국의 세대와 계층, 사회운동 연구에 큰 성과를 낸 탁월한 학자이면서도 늘 나를 지적 멘토처럼 여기며 한국학계를 존중한 분이셨다.

이번은 이전까지와는 달라 더이상 학술적 방문이 아니다. 대학이나 연구소를 찾을 계획도 없고 특별히 지적 대화를 나눌 상대나 계기를 애써 마련하지도 않았다. 내 여행 가방은 손녀들에게 줄 한글동화책과 과자봉지로 가득 채워졌고 대부분의 시간을 딸과 손녀를 위해 쓸 마음의 각오도 충분하다. 손녀가 다닐 초등학교와 동네 도서관을 함께 가거나 좋아하는 옷이나 장난감을 사주면서 인기를 얻는데 최대의 노력을 할 생각이다. 딸과 사위가 근무하는 회사 상황과 출석하는 교회공동체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면서 과거에 나누지 못한 정을 되살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으려 한다.

한국을 떠난지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한국뉴스로부터 멀어진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한편의 궁금함과 또한편의 회피심리가 뒤섞여 마음은 염려와 무심의 이상한 조합상태다. 주요 현안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초조한 바 없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애써 뉴스를 뒤지고 조바심을 내지는 않을 작정이다. 이런 저런 주장들이 내 정서와 의식을 마냥 흔들지 못하도록 현실을 긴 호흡으로 직시하고 냉정한 거리감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볼까 한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 이곳에서도 뉴스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현 한국상황을 트럼프 신정부가 어떻게 평가할지 어떤 요구를 내놓을지, 미국의 새 정책기조에 한국은 얼마나 지혜롭고 효율적인 대응책을 마련할지 따라올 걱정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정파적 이익투쟁과 내부의 정치동학을 넘어 불확실성이 커지는 국제환경에 대응할 집단적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때다. 위기 속에서 미래의 복합 충격을 감당할 역량이 성장하는, 대전환의 역설적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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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커트 교수 부음

카터 에커트 교수님 부음을 뒤늦게 접했다. 그의 온화한 웃음과 다정한 모습이 떠오른다. 4년 전 하바드대 패컬티 하우스에서 함께 점심을 하며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건강이 그동안 많이 나빠지셨다는 후문이다. 이제 뵐 수 없게 되었다니 안타깝고 황망하다.

에커트 교수님과의 인연은 1989년 내가 엔칭펠로우로 간 후부터 맺어졌다. 그때 에커트 교수님은 UW에서 학위를 받고 막 하바드에 합류한 젊은 교수였다. 아직 테뉴어를 받지 않았지만 한국 근현대사를 책임진 자리인데다 제자와 후배를 잘 챙기고 폭넓은 식견의 소유자여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당시 하바드의 한국학 연구는 족보연구의 대가인 와그너 교수가 대표하고 있었기에 근현대사보다는 조선시대사가 더 중심을 이루었던 것 같다. 엔칭연구소 부소장인 베이커 씨도 한국관련 연구자들에겐 큰 힘이 되어 주셨다.

나는 체류기간이 좀더 연장되어 가족들이 먼지 귀국하고 혼자 6개월을 더 머무르게 되었다. 새로운 집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에커트 교수께서 여름기간 해외에 가 계실 예정이라며 자신의 집을 쓰도록 해 주셨다. 덕분에 무더운 여름 두 달을 켐브리지의 멋진 아파트에서 기거하는 행운을 누렸다. 집을 깔끔하게 관리하시던 분이셨기에 여간 큰 호의가 아닐 수 없었다.

90년대에는 한국학과 관련한 국내외의 시각차가 현저해지던 때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청소년기를 지나는 때와 비슷하다할까. 주관적인 고집도 형성되지만 아직 어른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과도기… 당시 나는 청소년 같은 기개로 해외의 한국학자들을 다소 낮추어 보았다. 그건 80년대의 시대정신을 공유했던 많은 사람들과 다를바 없었다. 하지만 에커트 교수는 그런 태도들을 별로 개의치 않으셨을 뿐 아니라 종종 경청하기도 했다.

이후 에커트 교수는 자신의 박사논문을 수정해서 Offsprings of the Empire 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후일 [제국의 후예]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왔는데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민중주의 시관이 널리 확대되면서 민족주의적인 자의식도 강한 때였던 까닭에 삼양사라는 기업사를 통해 한국 근대의 식민지적 기원을 밝힌 저작에 호감을 갖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서평이나 학술적 토론보다 막연한 거부감과 선입견이 작용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신기욱과 로빈슨이 편집한 Colonial Modernity in Korea 책자에 에커트 교수가 쓴 “Hegel’s Ghost” 라는 챕터는 에커트 교수에 대한 한국학자들의 비판을 더욱 가중시켰다. 나 역시 이 글에 대해선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국연구자들이 스스로의 세계관과 학문적 패러다임을 성찰적으로 사고하기 어려웠던 지적 지체의 소산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몇 년 후 나 스스로 한국사회사연구가 민족주의적 지향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고 나아가 근대성과 식민성의 착종을 주요한 연구쟁점으로 제기하게 되었음을 에커트 교수가 아셨을까…

이 년 전 낸시가 저 세상으로 갔는데 이제 에커트 교수가 별세하셔서 내가 하바드에서 교류하고 인연을 맺었던 두 분의 소중한 분들을 더이상 볼 수가 없다. 안타깝지만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길… 명복을 빌며 지난 후의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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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의 역사인식

오래 전 예정했던 일본 하기 지역 답사여행을 12월 9-12일에 마무리했다. 복잡한 과거나 논란은 일단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말로 괄호쳐두자. 대신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 유적을 관광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 답사 여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생각하고 다짐했던 바다. 함께 한 분들 모두 사려깊고 넓은 시야를 지닌 동학들이고 답사지역도 잘 선정되어 뜻깊고 즐거운 여정이 되었다.

하기, 시모노세키, 야마구치 등 지방도시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오가는 길이 너무 좁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연의 산세와 풍경은 별로 훼손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듯했다. 시멘트 빌딩은 거의 보이지 않고 일본식 기와집 위주의 농촌 풍경이 전통의 강인한 존속력을 보여주는 듯 했다. 수백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했던 영주 가문의 집과 유적이 그대로 유지되고 이들을 기리는 신사와 사찰이 방대한 면적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이 놀라왔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곳조차 예상보다 아름다운 단풍과 이끼낀 바위, 고즈녁한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유적지마다 공간배치와 건축양식이 다르고 시대적 역할과 성격이 뚜렷해 현장에서 배우는 맛이 있었다.

하기박물관과 메이린학사는 일본 역사교육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학습장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국가사, 지방사, 세계사와 자연사를 한데 결합시키려 한 전시구성이 와 닿았다. 특히 하기박물관은 규모가 크지 않지만 깔끔하게 디자인된 공간구성과 알찬 내용이 좋았고 19세기 후반 격동기를 내우외환 – 흑선도래 – 구미열강 – 개국 – 공무합체 – 존왕양이 – 토막 – 명치유신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소용돌이로 그려놓은 도해가 시선을 끌었다. ’내우외환‘에서 시작하여 ’존왕양이‘를 거쳐 ’토막유신‘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각 단계에서 작동하는 안과 밖, 수구와 개혁, 국가와 세계의 역동성을 종합적으로 드러내려는 내공이 만만찮게 느껴졌다.

장소마다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하비에르 기념성당과 크리스쳔 순교기념공원은 고결한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의 눈물섞인 수난을 전하는 숙연한 공간이었다. 자발성과 희생, 종교성과 비극성에서 비롯하는 숭고함이 전해지는 듯 했다. 그에 반해 요시다 쇼인을 추모하는 쇼카순주쿠 일대에서는 메이지 국가주의를 부르짖은 주역들에 대한 영웅화의 시도가 역력했다. 어떤 공간보다 정치적인 그림자가 짙게 어른거려 실망스러웠다. 하기의 상징으로 요시다 쇼인을 내세우려는 지방적 이해관계로 치부하기에는 최근 일본의 전반적 역사인식 기조를 반영하는 흐름으로 느껴졌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삼삼오오 관람자들을 대상으로 자랑스럽게 이곳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기특한 역사교육이라는 느낌보다 정교한 정치교육의 기제를 보는 듯 해서 적지 않이 불편했다.

생각처럼 가볍게 여행하는게 쉽지는 않았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리가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임진왜란과 끌려온 도공의 애환, 조선침략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슌판로 기념관에서 ’청은 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승인하고..‘라는 청일강화조약문 1조의 실물을 보는 순간 1894년 한반도 안팎의 갈등과 위기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국제적 논의 현장에 정작 우리는 참여하지도 못하는 비극이 1943년의 카이로 회담,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회담, 1953년의 정전협정체결회담에서 계속되었음이 떠올랐다. 그 비극적 반복이 앞으로도 나타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한반도와 아름다운 인연으로 이어질 요소들도 없지 않았다. 이 지역 초기 지배자인 오우치가가 스스로를 백제 임성태자 후손임을 강조했던 사실이나 담백미를 자랑하는 이곳 도자기가 조선도공의 손끝에서 빚어진 것은 한일간의 멋진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활용할 만한 요소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을 ’한국 독립운동가‘로 적어둔 설명문도 본격적으로 그 의미를 확장하여 동양평화론을 매개로 우애의 국제협력을 향한 미래전망을 부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최소한으로 언급되거나 대부분 은폐되어 있다. 일제의 조선병탄, 만주침략과 대동아전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고 정한론의 역사가 남긴 부정적 유산에 대해서도 일언반구가 없다. 과거사는 기억되고 전승되지 않으면 잊혀지거나 왜곡된다는 점에서 이런 설명회피의 뒷면에 작동하는 고의성과 편협함에 내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귀국하는 비행기 속에서 우리의 역사인식 방식과 역사교육의 현주소를 생각했다. 식민사관의 극복과 주체적 역사인식을 강조하면서 남의 문제를 비판하고 지적하는데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지만 스스로를 성찰하고 업그레이드하는 노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 것 아닌가 자문한다. 21세기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자 K-Pop의 역동성을 자랑하는 문화강국이면서 주체성과 배외성을 동일시하거나 전통과 혁신, 보수와 진보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면서 위정척사나 반제투쟁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면도 없지 않다. 국가사 일변도의 정답찾기 교육이 역사를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의 자발성, 다원성, 개별성을 억압해 온 것도 향후 넘어서야 할 과제다. 앞으로 갈 길은 여전히 먼데 우리는 지금 어떤 준비와 노력을 하고 있는가 – 가벼운 여행이 끝나자 다시 무거운 질문들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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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의 문화와 경관

일본은 영주가 지배하는 번국체제를 오래 유지했던 탓에 지역별로 고유한 풍습과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4면이 바다이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지형에다 화산지대여서 자연풍경도 이색적인 곳이 적지 않다.

하기의 문화로 햐기 야키로 불리는 도자기가 우선적으로 꼽힌다. 일본의 유명 도자기가 다 그러하듯 이곳 도자기 역사도 임진왜란에서 끌려온 조선도공으로부터 시작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조선에 출병했던 영주 모리 데루모토는 도공인 이작광과 이경을 데려와 영지에서 사용될 도기 제품을 만들도록 했다. 가고시마에서 활동중인 심수관 집안이나 아리타의 이삼평 가문과 비슷한 역사인 셈이다. 다만 이들 두 지역에 비해서 하기 야키와 아직광 집안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야마구치 지역이 관광이나 접근성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탓일지 모르겠다.

하기 야키의 두드러진 특징은 흡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차나 사케를 담는 용도로 제품을 오래 사용하면 물이 들어 색상이 변한다. 그래서 하기 야키는 특히 차 애호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는데 사용할수록 미세하게 변하는 빛깔이 심미적으로 독특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기 야키의 또다른 특징은 형태와 장식의 단순함이다. 밑그림이나 상회칠 장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구울 때 도공이 어떤 효과가 예상되는지를 알고 그 예상을 최대한 활용하여 단순한 미감을 드러내려 한다. 초기엔 조선의 스타일을 따랐지만 점차 소박한 일본적 특성이 추가되어 오늘날의 개성적인 스타일이 되었다고 한다.

400년 역사의 하기야키 모습은 우라가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이 미술관은 하기시 출신의 실업가 우라가미 도시로가 17세기 풍속화인 우키요에, 동양 도자기 등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1996년에 개관했다.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우키요에는 화려한 색채가 특징인데 현재 약 5,500여점이 소장되어 있고 매월 30여점을 테마별로 전시한다. 2010년에는 도예의 진흥을 목적으로 새로이 도예관을 증축. 하기 야키를 포함하여 한국과 중국의 도자기 약 500점, 근현대 도예작품 약 750점(2015년 현재)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지역별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마츠리 (祭つり)는 일본 문화의 대표적 아이템의 하나다. ‘제사를 지낸다’는 동사 마츠루(祭る)가 명사화하여 축제를 뜻하게 되었다는 해석도 있듯이 전통적인 마츠리의 대부분은 제사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절이나 신사와 무관한 전통적인 영주가문의 행사나 막부시대 의례가 그 기원이 되는 경우도 있고 마을공동체의 세시풍습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된다. 규모가 큰 대규모 마츠리는 지역민들이 함께 참가할 뿐 아니라 지방정부가 행정적 재정적으로 뒷받침하여 지역의 공식적인 축제가 되어 있다.

히기에서는 ‘하기 시대 퍼레이드’이라 불리는 축제가 유명하다. 1603년에 시작된 에도시대. 전국의 다이묘들은 2년마다 많은 사무라이를 거느리고 쇼군을 찾아가는 의례 습관이 있었다. ‘다이묘 행렬’이라 불리던 이 이동은 각 영주들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규모가 크고 호화로웠다. 하기에서는 에도시대의 무사와 성주, 기타 중요한 사람들이 그 신분을 드러내는 의상을 입고 퍼레이드하는 다이묘 행렬을 매년 거행한다. 행진의 마무리는 무사의 무구와 의상을 신사에 봉납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막부전통과 신토 문화가 결합된 흥미로운 사례라 하겠다.

하기의 등불축제도 오래된 축제의 하나인데 조상숭배와 관련된다. 일본의 불교 전통에 따르면 여름의 오본(백중맞이) 동안 조상들의 영혼을 기리게 되는데 하기 등불 출제는 이곳 영주였던 모리 가문의 제사 행위를 그 내용으로 한다. 다이쇼인 절에서 8월 13일 500개가 넘는 석재 등불에 불을 붙이며, 8월 15일에는 도코지 절에서 등불을 밝히는데 마법 같은 분위기가 인상적이라 알려져 있다. 시모노세키 쵸후에 위치한 이미노미야신사에서는 매년 수호테이 마츠리가 열린다. 옛날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으로 춤을 춘 것이 그 유래라고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조상에 대한 감사와 풍년 기원 등의 뜻을 담은 행사가 되어 있다.

일대의 자연경관으로는 아키요시다이를 우선 꼽는다. 석회암이 늘어선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한 자연공원인 아키요시다이는 3억 5,000만년 전에는 바다였고 산호초가 오랜 시간에 걸쳐 석회암이 되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아키요시다이의 석회암에는 태곳적 바다에서 서식했던 생물 화석이 다량 포함되어 있어 산호초였던 바다의 기억을 현대에 남기고 있는 셈이다. 초원과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초록색과 흰색의 풍경미가 대단하다.

멀리서 보면 삿갓모양이어서 ‘카사야마’ 라는 이름이 붙은 카사야마산과 그 안의 동백나무길도 유명하다. 현무암류로 이루어진 성층화산으로 60m 화산대지 위에 분화구가 있고 화산 언덕에는 소규모이지만 완벽한 모양의 화구가 남아있다. 작은 활화산으로 산 속에는 한난지성 식물이 혼생하고 있어 학술상 가치가 높다. 산의 정상까지 드라이브웨이가 있어 정상에서 일본해와 떠오르는 섬들을 바라볼 수 있다. 넓은 지역에 25,000의 그루의 동백꽃이 꽃을 피워, 한겨울 화려한 색조를 보여주는 경관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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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과 힐링

일본은 단층대에 있어서 화산과 온천이 많다. 2022년 일본 환경청 발표에 따르면 일본의 온천지는 약 2,900 여곳, 원천 총수는 약 28,000개나 있다. 거의 모든 곳에 온천이 있다고 보면 된다. 온천은 질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탕치(湯治)라 불리는 온천 요법이 널리 행해져왔다. 에도시대에 특히 탕치가 유행했고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의학적으로도 온천의 효능이 확인되면서 더욱 인기가 높아졌다.

영화나 홍보매체에서 보는, 눈쌓인 절경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모습은 유키미부로(雪見風呂)라 불리는 곳이다, 탁트인 설원이나 설산을 보며 자연 속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이런 곳은 경치가 좋은 대신 교통편이 대체로 좋지 않고 규모도 크지 않다. 또한 눈이 너무 쌓이거나 혹은 눈이 자주 내려 시계가 좋지 않아 실제로 그림 같은 정경을 즐기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성공했을때 보는 절경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여서 마니아들은 기상자료를 확인하면서 찾아가곤 한다.

유명한 온천은 료칸이라는 전통 숙박시설과 함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료칸은 일본의 전통 주택 형식의 시설로 다다미방과 온천욕장, 그리고 일식 코스인 가이세키 요리가 제공된다. 객실 내에 독립된 노천탕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료칸온천도 접근성이 그다지 좋지 않은 곳이 많고 가격도 비싸 편리하거나 가성비가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유카타를 입고 정성스러운 서비스를 받으면서 일본의 문화를 맛볼 수 있는 기회여서 찾는 사람이 많다. 최근 관광문화가 변화하면서 이런 전통적 료칸온천의 비중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온천욕장에는 사찰의 약수터마냥 온천수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이런 방식을 카케나가시(かけ流し) 라 하는데 뜨거운 물이 새롭게 계속 공급되어 깨끗하고 신선하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려면 욕탕의 규모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실제 이 방식을 사용하는 온천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무리 일본이라고 해도 온천이 대규모로 커지면 유량이 부족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여서 다소 인공적인 조처가 따를 수밖에 없다. 흘러내린 온천수를 다시 되돌려 사용하는 방법도 종종 사용된다고 한다.

물의 온도는 법률상 25도만 넘으면 온천으로 인정된다. 원천(原泉)의 온도는 각기 달라서 사람이 사용하기 편하도록 데우거나 식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여행객이 많이 몰리는 온천지역은 온천수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부분적으로 재활용한다. 조성온천(造成温泉)이라 해서 물을 땅속이나 화산의 증기를 이용해 끓이기도 한다. 이것도 온천이라 할 수 있느냐는 논란도 있지만 카케나가시를 무난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물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온천여행이 보편화되면서 전통적인 료칸온천보다 좀더 편리하고 대중적인 방식이 확대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숙박, 음식, 온천을 같은 장소에서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온천호텔이다. 온천 료칸에 비해 저렴하고 다수가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유명한 온천 관광지에는 거의 온천호텔이 존재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료칸 형식을 따라 가이세키같은 식사를 제공하는 곳도 있다, 야마구치 일원에서는 유다온천이 유명한데 옛날에 흰여우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발을 담근 연못에서 온천물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하기에도 전통적인 료칸온천과 함께 바다를 내다보며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온천호텔이 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여러가지이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와 쉼을 얻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다. 이미 정년을 지나 해야할 과제나 공부거리가 딱히 부여되지 않는 즐거운 여행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야마구치와 하기의 온천에서 설산의 노천온천에서 느낄 법한 고급한 경치감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탕치는 경치의 좋고 나쁨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해묵은 상념과 욕심을 내려놓고 자연이 주는 따뜻함으로 몸과 마음의 찌꺼기를 닦는 것에서 힐링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일본의 ‘탕치’를 즐기고 21세기 형 ‘힐링’도 누려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