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시공간 여행

하기의 문화와 경관

일본은 영주가 지배하는 번국체제를 오래 유지했던 탓에 지역별로 고유한 풍습과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4면이 바다이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지형에다 화산지대여서 자연풍경도 이색적인 곳이 적지 않다.

하기의 문화로 햐기 야키로 불리는 도자기가 우선적으로 꼽힌다. 일본의 유명 도자기가 다 그러하듯 이곳 도자기 역사도 임진왜란에서 끌려온 조선도공으로부터 시작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조선에 출병했던 영주 모리 데루모토는 도공인 이작광과 이경을 데려와 영지에서 사용될 도기 제품을 만들도록 했다. 가고시마에서 활동중인 심수관 집안이나 아리타의 이삼평 가문과 비슷한 역사인 셈이다. 다만 이들 두 지역에 비해서 하기 야키와 아직광 집안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야마구치 지역이 관광이나 접근성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탓일지 모르겠다.

하기 야키의 두드러진 특징은 흡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차나 사케를 담는 용도로 제품을 오래 사용하면 물이 들어 색상이 변한다. 그래서 하기 야키는 특히 차 애호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는데 사용할수록 미세하게 변하는 빛깔이 심미적으로 독특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기 야키의 또다른 특징은 형태와 장식의 단순함이다. 밑그림이나 상회칠 장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구울 때 도공이 어떤 효과가 예상되는지를 알고 그 예상을 최대한 활용하여 단순한 미감을 드러내려 한다. 초기엔 조선의 스타일을 따랐지만 점차 소박한 일본적 특성이 추가되어 오늘날의 개성적인 스타일이 되었다고 한다.

400년 역사의 하기야키 모습은 우라가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이 미술관은 하기시 출신의 실업가 우라가미 도시로가 17세기 풍속화인 우키요에, 동양 도자기 등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1996년에 개관했다.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우키요에는 화려한 색채가 특징인데 현재 약 5,500여점이 소장되어 있고 매월 30여점을 테마별로 전시한다. 2010년에는 도예의 진흥을 목적으로 새로이 도예관을 증축. 하기 야키를 포함하여 한국과 중국의 도자기 약 500점, 근현대 도예작품 약 750점(2015년 현재)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지역별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마츠리 (祭つり)는 일본 문화의 대표적 아이템의 하나다. ‘제사를 지낸다’는 동사 마츠루(祭る)가 명사화하여 축제를 뜻하게 되었다는 해석도 있듯이 전통적인 마츠리의 대부분은 제사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절이나 신사와 무관한 전통적인 영주가문의 행사나 막부시대 의례가 그 기원이 되는 경우도 있고 마을공동체의 세시풍습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된다. 규모가 큰 대규모 마츠리는 지역민들이 함께 참가할 뿐 아니라 지방정부가 행정적 재정적으로 뒷받침하여 지역의 공식적인 축제가 되어 있다.

히기에서는 ‘하기 시대 퍼레이드’이라 불리는 축제가 유명하다. 1603년에 시작된 에도시대. 전국의 다이묘들은 2년마다 많은 사무라이를 거느리고 쇼군을 찾아가는 의례 습관이 있었다. ‘다이묘 행렬’이라 불리던 이 이동은 각 영주들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규모가 크고 호화로웠다. 하기에서는 에도시대의 무사와 성주, 기타 중요한 사람들이 그 신분을 드러내는 의상을 입고 퍼레이드하는 다이묘 행렬을 매년 거행한다. 행진의 마무리는 무사의 무구와 의상을 신사에 봉납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막부전통과 신토 문화가 결합된 흥미로운 사례라 하겠다.

하기의 등불축제도 오래된 축제의 하나인데 조상숭배와 관련된다. 일본의 불교 전통에 따르면 여름의 오본(백중맞이) 동안 조상들의 영혼을 기리게 되는데 하기 등불 출제는 이곳 영주였던 모리 가문의 제사 행위를 그 내용으로 한다. 다이쇼인 절에서 8월 13일 500개가 넘는 석재 등불에 불을 붙이며, 8월 15일에는 도코지 절에서 등불을 밝히는데 마법 같은 분위기가 인상적이라 알려져 있다. 시모노세키 쵸후에 위치한 이미노미야신사에서는 매년 수호테이 마츠리가 열린다. 옛날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으로 춤을 춘 것이 그 유래라고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조상에 대한 감사와 풍년 기원 등의 뜻을 담은 행사가 되어 있다.

일대의 자연경관으로는 아키요시다이를 우선 꼽는다. 석회암이 늘어선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한 자연공원인 아키요시다이는 3억 5,000만년 전에는 바다였고 산호초가 오랜 시간에 걸쳐 석회암이 되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아키요시다이의 석회암에는 태곳적 바다에서 서식했던 생물 화석이 다량 포함되어 있어 산호초였던 바다의 기억을 현대에 남기고 있는 셈이다. 초원과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초록색과 흰색의 풍경미가 대단하다.

멀리서 보면 삿갓모양이어서 ‘카사야마’ 라는 이름이 붙은 카사야마산과 그 안의 동백나무길도 유명하다. 현무암류로 이루어진 성층화산으로 60m 화산대지 위에 분화구가 있고 화산 언덕에는 소규모이지만 완벽한 모양의 화구가 남아있다. 작은 활화산으로 산 속에는 한난지성 식물이 혼생하고 있어 학술상 가치가 높다. 산의 정상까지 드라이브웨이가 있어 정상에서 일본해와 떠오르는 섬들을 바라볼 수 있다. 넓은 지역에 25,000의 그루의 동백꽃이 꽃을 피워, 한겨울 화려한 색조를 보여주는 경관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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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과 힐링

일본은 단층대에 있어서 화산과 온천이 많다. 2022년 일본 환경청 발표에 따르면 일본의 온천지는 약 2,900 여곳, 원천 총수는 약 28,000개나 있다. 거의 모든 곳에 온천이 있다고 보면 된다. 온천은 질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탕치(湯治)라 불리는 온천 요법이 널리 행해져왔다. 에도시대에 특히 탕치가 유행했고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의학적으로도 온천의 효능이 확인되면서 더욱 인기가 높아졌다.

영화나 홍보매체에서 보는, 눈쌓인 절경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모습은 유키미부로(雪見風呂)라 불리는 곳이다, 탁트인 설원이나 설산을 보며 자연 속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이런 곳은 경치가 좋은 대신 교통편이 대체로 좋지 않고 규모도 크지 않다. 또한 눈이 너무 쌓이거나 혹은 눈이 자주 내려 시계가 좋지 않아 실제로 그림 같은 정경을 즐기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성공했을때 보는 절경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여서 마니아들은 기상자료를 확인하면서 찾아가곤 한다.

유명한 온천은 료칸이라는 전통 숙박시설과 함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료칸은 일본의 전통 주택 형식의 시설로 다다미방과 온천욕장, 그리고 일식 코스인 가이세키 요리가 제공된다. 객실 내에 독립된 노천탕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료칸온천도 접근성이 그다지 좋지 않은 곳이 많고 가격도 비싸 편리하거나 가성비가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유카타를 입고 정성스러운 서비스를 받으면서 일본의 문화를 맛볼 수 있는 기회여서 찾는 사람이 많다. 최근 관광문화가 변화하면서 이런 전통적 료칸온천의 비중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온천욕장에는 사찰의 약수터마냥 온천수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이런 방식을 카케나가시(かけ流し) 라 하는데 뜨거운 물이 새롭게 계속 공급되어 깨끗하고 신선하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려면 욕탕의 규모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실제 이 방식을 사용하는 온천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무리 일본이라고 해도 온천이 대규모로 커지면 유량이 부족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여서 다소 인공적인 조처가 따를 수밖에 없다. 흘러내린 온천수를 다시 되돌려 사용하는 방법도 종종 사용된다고 한다.

물의 온도는 법률상 25도만 넘으면 온천으로 인정된다. 원천(原泉)의 온도는 각기 달라서 사람이 사용하기 편하도록 데우거나 식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여행객이 많이 몰리는 온천지역은 온천수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부분적으로 재활용한다. 조성온천(造成温泉)이라 해서 물을 땅속이나 화산의 증기를 이용해 끓이기도 한다. 이것도 온천이라 할 수 있느냐는 논란도 있지만 카케나가시를 무난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물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온천여행이 보편화되면서 전통적인 료칸온천보다 좀더 편리하고 대중적인 방식이 확대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숙박, 음식, 온천을 같은 장소에서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온천호텔이다. 온천 료칸에 비해 저렴하고 다수가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유명한 온천 관광지에는 거의 온천호텔이 존재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료칸 형식을 따라 가이세키같은 식사를 제공하는 곳도 있다, 야마구치 일원에서는 유다온천이 유명한데 옛날에 흰여우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발을 담근 연못에서 온천물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하기에도 전통적인 료칸온천과 함께 바다를 내다보며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온천호텔이 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여러가지이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와 쉼을 얻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다. 이미 정년을 지나 해야할 과제나 공부거리가 딱히 부여되지 않는 즐거운 여행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야마구치와 하기의 온천에서 설산의 노천온천에서 느낄 법한 고급한 경치감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탕치는 경치의 좋고 나쁨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해묵은 상념과 욕심을 내려놓고 자연이 주는 따뜻함으로 몸과 마음의 찌꺼기를 닦는 것에서 힐링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일본의 ‘탕치’를 즐기고 21세기 형 ‘힐링’도 누려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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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숨은 기독교인

막부 시대 무사 전통이 뚜렷한 도시 하기에 다소 어울리지 않은 유적이 하나 있다. 기독교 순교자 기념공원이다. 기독교 탄압이 혹독했던 시기,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마을의 신도 3800명이 전국 각지로 유배되었고 그 중 약 300여 명이 하기로 보내졌다. 이들은 삼 년간 혹독한 고문과 굶주림 때문에 40 여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고난을 받았다. 그때의 박해와 인고의 흔적을 기려 세워진 것이 이 순교자 기념공원이다. 1605년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한 모리 번의 중신 부젠 수령 구마가야 모토나오의 비도 함께 서 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우리에도 잘 알려진 소설인데 일본의 기독교 박해가 그 배경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려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 그 숭고한 죽음에도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허무감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작중의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뜻하는 후미에를 밟으면서 “밟아라. 아픔을 알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나는 그 아픔을 알고 있다”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비로소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요지의 소설인데 그 배경은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일본에 전파한 이들은 센고쿠 시대 일본과 무역을 하던 스페인,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이전엔 ‘자비엘’로 불렸던 프란시스 하비에르(F. Xavier) 가 그 선구자였고 현재 야마구치에는 하비에르 기념성당이 있다. 그의 일본선교에 도움을 준 장본인이 하기 일대의 다이묘 오우치였다. 야마구치와 나가사키 일원의 다이묘들은 서양 세력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톨릭 전래를 허가했고 신자도 늘어났다. 다이묘 가운데서 신자가 된 자들도 여럿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조선에 온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후 지방의 다이묘들이 서양과 무역으로 세력을 키울 것을 우려하여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강력한 기독교 탄압정책으로 선회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1597년에 자행된 나가사키 기독교도들의 집단 처형이다. 도요토미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도 금교령을 내리고,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나가사키의 애환은 그 때부터 여러 차례 계속되어 메이지 유신 직후까지 이어졌다. 이로 인해 숨어 지내게 된 기독교인을 가쿠레 키리스탄이라 부른다.

1637년 키리시탄을 중심으로 막부의 지배에 저항하는 시마바라 난이 일어났다. 일본 최대의 농민봉기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혹독한 기독교 탄압의 계기가 되었다. 에도 막부는 ‘키리시탄은 정권을 엎으려는 반란분자’라고 생각하여 기독교인을 색출하는 악명높은 후미에를 만들어 철저한 박해를 가했다. 엔도 슈사쿠 [침묵]의 배경도 바로 이 시기인데 당시 순교한 많은 신자들이 후미에 앞에서 침묵하는 신에 대해 물었을 법한 주제를 다룬 것이다.

1858년 개항 이후 외국인에 한해 신앙 활동이 허가되었고, 나가사키에 오우라 천주당이 건립되었다. 성당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은 250여 년 전 순교한 바스챤의 예언을 이곳에서 확인하고자 했다. 1865년 4월 일부 카쿠레 키리시탄이 신부에게 “성모 마리아님의 성상은 어디 계시나요?”라고 물었고 신부가 안내해 주자 전원이 함께 기도를 했다. 오랜동안 숨겨왔던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신자 발견’이라고 부른다.

2년 뒤인 1867년 우라카미 지역의 신도들이 불교식 장례를 거부함으로써 숨어 지내던 키리스탄의 존재가 드러났다. 비밀 교회당을 급습한 것을 시작으로 신도 68명이 일제히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외국 공사들이 강하게 항의하여 처형은 면했지만 대부분 하기, 후쿠야마 등지로 유배되었다. 이들은 노골적인 고문만 받지 않았을 뿐 물과 음식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지급되었고 더위와 추위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식으로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유배된 3394명 중 무려 662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1873년 금교령이 폐지되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살아 남은 이들은 대부분 유배지에서 풀려났고 통상적인 형태의 가톨릭으로 원복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종교적 내용과 형식이 많이 변해서 오히려 “조상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라며 가톨릭으로의 원복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몇 안 되는 구전 전승만으로 종교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실제 이들의 신앙은 매우 밀교적인 특성이 강했고 불교 등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또한 라틴어 기도문이 음차된 염불같은 오라쇼를 주문처럼 외우기도 해서 인류학자나 종교학자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과 유사하면서도 희생자 솟자가 더 많았을 일본의 기독교 순교사를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한국은 그 순교자들의 희생 위에 기독교가 널리 받아들여졌고 크게 융성했지만 일본은 지금도 기독교인의 숫자가 매우 적다. 엔도 슈사쿠가 카쿠레 키리스탄의 발견을 주제로 새로운 소설을 쓴다면, 아니 오늘의 일본 기독교를 대상으로 소설을 쓴다면 제목을 무엇으로 했을지 궁금하다. 여전한 침묵? 깨어진 침묵? 이상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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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와 감사

오늘이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이다.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주일이긴 하지만 사실 자연적 조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전통시대의 절기가 기독교와 결합된 문화적 현상이다. 농사든 목축이든 한 해의 소출을 거두어야 할 계절에 그 때까지 얻은 축복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기독교 문명이 아닌 사회에도, 또 세속화가 현저히 진행된 21세기에도 가을의 추석이나 Thanksgiving Day를 기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릴 적 시골에서 이 계절엔 추수가 일상이었다. 들판에는 누런 곡식이 익고 그것을 베어 탈곡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국민학교에까지 ‘가정실습’이란 이름으로 며칠 쉬곤 했는데 추수에 바쁜 일손을 도우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농사를 짓던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 시기에 크고 작은 일들을 하느라 바빴다. 나처럼 농사와는 무관한 아이들은 추수가 끝난 논에서 ‘이삭줍기’를 하곤 했다. 추수가 끝난 허허벌판 같은 논밭에서 하나 둘 주운 이삭들이 모여 가마니가 되는 모습을 보고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었다.

추수를 상징하는 것은 주곡인 벼가 자란 논 만이 아니었다. 겨울을 대비하여 김장과 월동에 필요한 무, 배추, 고추를 비롯하여 밭농사의 마무리도 중요했다. 누런 호박도 거두어 들이고 타작이 끝난 작물의 잎이나 줄기로 자반을 준비하기도 했다. 내게는 나무에 열린 과일들을 따던 기억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마을 곳곳에 감나무들이 있어 빨간 감들이 달려 익어가는 가을 풍치를 더하곤 했는데 대부분 이 계절에 따서 보관하거나 곶감으로 만들게 된다. 높은 곳의 일부 감은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다. 그래서인가 지금도 상점에서 감을 보면 다른 어떤 과일보다 ‘가을’을 떠올리게 된다.

추수를 하면 감사가 따르게 마련이었던 것 같다. 흉년도 있고 생각보다 소출이 적은 경우도 태반이지만 추수하는 그 시간만은 풍요롭고 뿌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감사의 대상은 ‘자연’이나 ‘신’을 향하게 되니 바울의 표현대로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었다고 할 것이다. 농부의 땀과 수고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바람 햇볕의 도움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농부들로서 추수와 감사가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를 따라 비가 내리고 햇볓이 쬐어 이루어진 결실이라는 것이 너무도 절실하여 표하게 되는 감사를 폄하할 일은 아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보면 우주적 절대자, 삼라만상의 창조주에 대한 감사라 해도 무방할 일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현대사회에서 추수는 더 이상 자연과 계절에 연동되지 않는다. 월급형태의 소득이 주어지고 주식시장은 거의 실시간으로 이익이 달라진다. 더구나 학생이나 청소년, 퇴직한 세대나 실직자들은 ‘추수’의 감격을 느낄 새도 없다. 그러다보니 추수경험과 감사행위는 단절되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감사가 어느 때든지 필요한 일상이 되었다 볼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더이상 감사를 절감할 절기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자연과 환경, 우주적인 섭리에 대한 생각을 할 기회가 사라진 셈이다. 햇빛과 바람, 비와 온도 대신 직장과 가정, 국가와 사회를 생각하게 된 것이 근대화이고 합리화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댓가로 소중한 것을 잃은 셈이다.

자나간 내 생활을 되돌아보면 이런 사회적 변화가 내 일생 속에 고스란히 재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의식 속에서 감사하는 태도가 옅어진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사람이나 사회적 조건에 대한 것이었을 뿐 자연과 우주에까지 시선이 확장될 겨를이 없었다. 아니 어릴적에 지녔던 순수한 추수에의 감사도 ‘계몽’의 이름 속에서 사라졌다. 평소 감사한다는 생각 없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감사하자는 덕담도 적지 않이 했다. 하지만 세속적 잣대와 가치로 여러가지 염려와 후회들을 무시로 겪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총체적으로 감사의 마음, 추수의 기쁨이 사라진 탓일텐데 신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건강상으로도 넘어서야 할 내적 문제다.

스펄전 목사님의 ‘자아가 내게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자아에게 선포하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는다. 자아를 나와 등치시키면서 자아에 이끌려 다니는 것은 결국 나를 비주체적인 존재로 만들 우려가 크다. 인간은 본명 사회학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실존적인 단독자이기도 하다. 내 자아가 나의 중요한 실체이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일 수는 없다. 미드의 표현대로 ‘me’ 를 넘어서는 ‘I’에 대한 감각, 그 존재론적 자의식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 것은 인생 후반에서 더더욱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종종 접하던 감사 관련 성구들을 되새겨보는 추수감사주일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전 5:16~18)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 95:2~3),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 4:2)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역상 16:3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시 100:4)

activities

평화재단 20년

법륜 스님이 주도해온 평화재단이 20주년을 맞았다. 11월 14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2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개되되고 저녁에는 축하모임도 있었다. 한동안 그 활동을 지원하고 참여하기도 했던 터라 축하모임 자리에 함께 했다. 헌신적인 활동가들, 오랫동안 참여해온 전문가들, 종교단체 대표들, 후원하던 단체와 정치인들 등이 꽤 많이 모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차분하다 못해 다소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남북교류와 대북지원, 평화구축이라는 재단의 활동이 거의 모두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그래도 저 정도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것은 법륜 특유의 친화력과 함께 종교적인 헌신성을 내장한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법륜은 인사말에서 20년을 회고하며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했다. ‘예측은 맞았는데 실현해낼 힘이 부족했다’는 그의 자평이 가슴에 남았다. 그가 말한 예측은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고난– 중국이 세계적 강국으로 힘을 얻기 전에, 북한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생긴 시기에 남북간 평화를 이루고 통일의 기틀을 놓아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다만 역부족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었고 북한은 핵무력에 의존하는 퇴행적인 노선을 선택했다.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고 느끼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참석자들의 연령대였다. 지난 시기 활동했던 분들 중심으로 초청된 결과 그리되었겠지만 60대 전후의 세대가 대부분이었다. 남북관계 민간단체와 민간운동을 담당할 젊은 세대, 새로운 역량이 양성되지 못한 현실의 반영인 듯 해서 마음이 아팠다. 사실 이것은 비단 평화재단에 한정할 일이 아닌 보편적인 현상이다.

평화재단의 성격 상 종교들과의 관계도 강했다. 소위 7대종단협의회가 남북교류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그 활동폭을 넓힌 것이 지난 20여년이었다. 천도교를 비롯하여 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 등이 두루 참여했다. 하지만 상당히 형식적이고 느슨한 연대였을 뿐 개별 종교들 간에 편차는 심했다. 한국 종교계의 현실과는 무관하게 구색에 맞춘 평균주의, 민족종교의 과잉대표성도 뚜렷한 한계로 보였다. 그것을 반영하듯 개신교 대표는 아무도 없었고 불교나 천주교 역시 종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또 하나 주목된 것은 참석한 정치인 면면이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비교적 중도적이라 할 분들의 모습은 여럿 보였다. 안철수, 이준석, 정세균, 김성곤… 내가 일면식이 있고 두어번 자리도 함께 했던 사람들인데 현재의 정치인, 특히 민주당 주류세력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그러고보면 인권문제나 인도적 지원에 주목하는 평화재단 활동을 강성 진보정치인들은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기차 시간에 맞춰 조금 일찍 나서 서울역으로 걸어오면서 마음이 여러모로 착잡했다. 이렇게 한 시대가 흘러가고 이제 저런 활동이 가능한 시절은 요원해진 것인가? 이들 세대가 지나고 나면 어떤 세력과 지향들이 인도주의와 평화주의를 부르짖게 될까? 종교가 그 마지막 보루일수도 있는데 최근 종교조차도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그 힘을 잃어가는 듯해서 앞날을 내다보려는 마음이 자꾸 어두워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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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시모노세키, 한반도

현재의 큐슈지방과 서일본 일대는 일찍부터 한반도와 접촉이 많았다. 애매한 이웃 사이가 종종 그러하듯 선린교린의 활동도 있고 원한과 대립의 역사도 있어 그 관계는 양면적이다. 시모노세키와 하기는 특히 그런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는 곳이다.

시모노세키는 조선의 앞선 문물을 일본에 전수하는 뱃길이 닿았던 항구다. 현재 시모노세키에는 조선통신사 내왕을 기념하는 비가 서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신의 존재는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하고 그 명칭도 통신사 이외에 회례사, 보빙사, 경차관 등이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통신사는 동등한 국가간의 외교 사절과 비슷해서 왜구의 단속 요청, 대장경의 증정 등을 논했고 피차 존중의 예로 대했다.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일본의 정세와 조선 침공 가능성을 알아볼 목적으로 파견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시모노세키는 또한 1894년 청일전쟁을 마무리하는 쳥일강화회담이 개최된 곳으로 현재도 그 기념관이 있다.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두 나라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인 어처구니 없는 전쟁의 마무리 장소였다. 전통 료칸인 슌판로에서 1895년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양국 전권대사로 만나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것이 명문화되었고 청의 한반도 종주권이 부정되었다. 실제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독립국가로서의 도약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뒷받침하는 빌미로 작용해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조선으로의 영향력을 급격히 키워나갔다.

1905년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에 ‘관부연락선’이 취항하면서 인적 물적 왕래의 거점으로 발전했다. 부산역과 시모노세키역을 통해 경성과 도쿄까지 철도로 이어져 일본의 대륙진출에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다. 한반도에서는 유학생, 노동자 들이 주로 이용했고 일본에서는 농업이민자, 대륙진출의 야망을 가진 자들이 탑승했다.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많아 소설과 연극, 영화 등의 소재로 종종 등장했고 조선 최초의 성악가 윤심덕이 정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일화는 유명하다. 해방 직후에는 많은 재일조선인의 귀국편으로, 또 조선거주 일본인의 환국편으로 이용되었다.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다가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1970년 부관페리가 취항하여 노선이 재개되었다. 지금은 한일간 관광객과 중소상인의 편리한 교통편으로 자리잡았다.

하기도 초기엔 한반도와 우호적인 지역이었다. 이곳의 원 지배자였던 오우치(大內)가는 7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26대 성왕(일본에서는 성명왕이라고 한다)의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다이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들과의 교류가 기록되어 있는데 대내전(大內殿)으로 지칭될 정도로 상호 예를 갖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도 그 후손 가운데 백제 및 한반도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오우치가가 가신인 모리 모토나리에 의해 멸명한 이후 하기와 조선의 관계는 악연이라 할 만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모토니라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553년~1625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112만석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받았다. 데루모토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3만병력을 이끌고 출동했고 그의 숙부인 히데모토는 정유재란때 가토 기요마사군과 합세해 조명연합군과 싸웠다. 그 공으로 1597년 데루모토는 도요토미 정권을 받치는 5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 되었다. 전국시대에 모리가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을 들어 도쿠카와와 대립했다가 패하여 250년간 중앙 정계로부터 철저히 배제당한 채 지방의 소영주로만 존속했다.

하기와 한반도의 악연은 19세기 말 요시다 쇼인이 제창한 정한론에 의해 심화되고 강화되었다. 요시다 쇼인은 서양을 이기려면 서양을 알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페리의 흑선으로 밀항을 도모하려 한 인물이다. 하기 지역에 유폐당한 상태에서 천황 중심의 정치변혁과 개혁구상을 다듬어나갔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는 서양 함대와 무력에 굴복했던 일본의 치욕을 이웃 나라 조선에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보상받으려는 정한론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강자에 대한 숭배와 약자에 대한 지배라는 이중적 태도가 독특하게 결합된 정치구상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치를 좌우했던 조슈 출신 정치인들은 모두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다. ‘조슈 3존’이라 불리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실제로 조선 침략의 주역들로 정한론을 실행에 옮겼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정부의 초대총리이자 이후 네 번이나 총리를 역임한 일본근대의 최고 정치인의 한명이다. 조선통감부의 초대통감으로 고종의 강제선양을 강요하고 강제병탄의 길을 닦은 인물이어서 한국으로서는 원한이 깊은 대상이다. 1909년 의병대장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에서 포살되었지만 일본에서는 근대 최고의 영웅처럼 평가되고 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팔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다. 1863년, 이토 히로부미 등과 함께 영국 유학을 떠난 이후 적극적인 개국론자로 바뀌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많은 활동을 했다. 1876년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체결에서 일본측 협상 대표였고, 갑신정변 후에는 조선 주재 일본 공사로 장기간 재임했다. 민비 시해가 있었던 1895년 을미사변 당시 공사는 미우라였지만 이 사건의 기획과 실행에 이노우에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신생 일본 육군을 독일식의 근대 육군으로 변모시켜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 창설에 참여했고 징병제의 도입과 육군성과 해군성의 설치 등 군제 개혁을 주도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조선 주둔 제1군사령관이었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공작 작위를 받았다. 독일로부터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도입하여 주권선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이익선 안에 조선과 대만, 사할린을 포함시킨 장본인이었다. 강점 이후에는 조선과 대만이 주권선으로 편입되고 이익선은 만주와 필리핀으로 확장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온 오시마 요시마사도 하기 출신이다. 당시 그는 경복궁을 점거하고 고종을 겁박하여 청일전쟁 발발의 빌미를 만들었고 농민군 토벌 명복으로 대민군사작전도 벌였다. 야마구치 현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미나미 고시로 문서는 동학 농민군에 관한 기록들이다. 이 때의 공으로 남작직을 수여받았으며 러일전쟁시 육군 대장으로 진급되어 관동지역의 총독이 되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포살한 안중근을 형장에 세우기도 했다. 일본 제 90, 96-98대 총리를 역임한 아베 신조의 친외조부이자 아베가 가장 존경한다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기의 인물들이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구상한 개혁과 부국강병노선은 일본으로선 근대화와 산업화의 중요한 계기였지만 조선으로의 침략정책과 깊이 맞물려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에까지, 최근으로 오면 아베 신조의 우경화 노선에까지 그 맥이 이어져 있어서 지나간 한 시대의 과거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일 역사논쟁의 한 거대한 뿌리가 이곳 조슈에 깊숙히 내려져 있는 셈인데 여행을 통해서 이런 기억을 단순히 반복하고 싶진 않다. 21세기 시공간을 반영하는 새로운 시야, 국가단위 해석을 넘어서는 보편적 전망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을까? 역사적 악연은 어떻게 단절할 수 있고 舊怨은 어디서 망각될 수 있을까? 답이 없을 듯 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life · 오늘의 화두

하기의 전통건축물

시모노세키는 동아시아 근대화 과정과 관련이 깊은 도시인만큼 구시가지 일대에는 영국영사관, 니베초 우체국, 아키타 상회 건물 등 많은 근대건축이 남아있다. 반면 하기는 막부시대 이래의 오래된 전통마을, 구가옥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다. 특히 조카마치로 불리는 번청 성곽 주변의 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을만큼 과거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시간 관계로 모든 곳을 방문할 수는 없지만 오가는 길에 마주칠 수 있는 곳들이어서 하기시의 공간배치와 건물의 형태 차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걷는 것 만으로도 고급스런 여행이 될 수 있다. 상층 무사의 저택, 하급 사무라이의 집, 상인의 가옥 들이 어떤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는지, 사찰과 신사, 교육기관 등이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흙벽 담장과 좁은 도로를 걸어보는 것은 즐거움과 공부의 두마리 토끼를 잡는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기 일대의 대표적인 것을 간추려 소개해본다.

도코지 (동광사) – 1691년 3대 번주 모리 요시나리가 하기 출신의 명승 혜극을 개산으로 창건한 황파종의 사원이다. 총문, 삼문, 종루, 대웅보전은 모두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본당 뒤쪽 모리가문 묘소는 국가지정의 사적이며 요시나리에서 11대까지의 기수대 번주와 그의 부인 및 일족, 관계자의 무덤이 있다. 묘지 앞에는 500여개의 석등이 줄지어 있고 순난 11열사묘, 유신지사 위령묘 팔기 등이 있다.

쇼카손주쿠 – 요시다 쇼인이 1857년부터 2 년 반 동안 하급 무사와 서민의 자제들을 교육한 사설학원이다. 원래 야마가류 병학을 가르치던 사숙으로 설립자의 조카 요시다 쇼인이 재인수하여 존왕양이와 정한론를 가르치고 전파했다. 키토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타카스기 신사쿠 등 유신 지사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어 유신의 정신적 근거지로 평가받는다. 1859년 요시다 쇼인이 처형당하며 1차로 폐쇄당하고 1868년 메이지 유신 후 부활했다가 1876년 하기의 난으로 다시 폐교되었고 1890년 교육칙어로 완전 폐교됐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이 주변에 쇼인 신사가 건립되었고 2015 년 7 월 세계 유산 등록으로 등재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구옥 및 별저 – 이토 히로부미 옛 주택은 단층에 초가지붕을 얹은 100㎡ 넓이의 목재 가옥으로 1854년 그 부친이 입양을 통해 사무라이의 하인이던 미즈이 다케베 소유의 이 집에 정착했다. 이 구옥은 이토의 신분이 매우 낮았음을 잘 보여준다. 그 옆의 잘 지어진 별저는 1907년 일본 정계의 거두가 된 히토 히로부미가 도쿄 중부의 에바라군 오이무라 마을에 지은 별장의 현관,대청, 별실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기토 다카요시 주택 – 목조 2층 건물 카와라부키(기와로 뒤덮인 지붕)형식으로 방 12개의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기토는 조슈와 사쓰마의 연합을 성공시켜 막부타도를 가능케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후일 정한론을 반대하고 입헌정체를 주장하였다. 그 아버지 와다 마사카게는 번의였는데, 하기의 주택에는 그 시절 의사의 생활을 엿볼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타카스키 신사쿠 집 – 일본판 양요였던 시모노세키 전투를 몸소 겪었던 타카스카 신사쿠는 막부의 조슈 정벌이 시작되자 고잔지에서 막부타도의 거병을 주도하여 메이지 유신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 동상이나 회천 기념비 등은 시모노세키에서 만날 수 있다. 하기의 집에는 산유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우물과 자작의 구비가 있다.

메이린칸 (명륜관) – 상층 사무라이만 입학할 수 있었던 하기번의 번교였다. 쇼카손주쿠가 신분에 무관하게 입학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하급무사는 물론이고 중인계급도 들어갈 수 없었던 전형적인 신분제 교육기관이었다. 국가 등록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본관 건물은 오랫동안 명륜 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고 최근 박물관으로 재정비되었다.

키쿠야 가문 저택 – 조슈번의 대표적 거상인 키쿠야 가문의 집으로 에도 초기에 건축된 일본 최고 주택에 속한다. 원래 오우치 가문의 호위무사로서 야마구치에서 살고 있었지만 오우치 가문이 멸망한 후에 상인이 되었다. 1604년에 모리 데루모토가 하기번으로 오면서 그에게 현재 장소의 부지를 하사받아 집을 지었다. 상인 가문으로서는 전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측에 속하는 400년의 역사가 있다. 본채에는 넓은 객실이 있으며, 본채를 비롯한 다섯 채가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약 2000평의 부지중 3분의 1만을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쿠보타 가문 주택 – 쿠보다 가문도 포목상으로 시작하여 2대 번주 때부터 주조업으로 전환해 큰 부를 축적한 거상이다. 구보타 가옥의 주건물은 에도 시대 후기에 지어졌는데 창고와 노동자의 숙소가 합쳐진 형태로 마주보는 기쿠야 가옥의 주 건물보다 높이가 더 높다. 메이지시대 중기까지 사용한 이 건물은 메이지 시대 명사들의 숙소로서 자주 이용되었다.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전기에 걸친 건물로서 하기성 조카마치를 대표하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조카마치 (성하마을) 구역 – 모리 데루모토가 1604년에 지은 하기성 아래 마을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은 지금 남아있지 않으나 260년간 번성했던 하기의 구 사무라이 가옥, 낡은 흙벽과 마을의 배치 구조는 막부시대 상인이나 번의 가신들이 살던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지역이다. 모리 가문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했던 부유한 상인 가문의 주택, 도쿠가와 막부나 천황가에서 온 방문객의 숙소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환상적인 전통 고산수(가레산스이) 정원을 대중에게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하마사키 지구 – 하기성으로 들어오는 항구지대로 전통적인 마을 도로, 부지 할당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조슈번의 수도 하기가 모리 가문의 통치하에 발전하면서 항구 하마사키도 함께 커졌다. 1998년부터 항구의 역사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하마사키는 2001년에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현재 100채가 넘는 건물이 역사 지구의 일부로 보존되고 있고 이 중 44채는 1868년 이전에 지어졌다고 한다. 상당수의 건물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어 일본의 건축사를 알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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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 유네스코 문화유산

일본에는 현재 총 25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호류지 불교미술유적, 히메지성, 교토의 역사유적,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나라 유적, 닛코 신궁 및 사찰, 구스쿠 유적 및 류쿠왕국 유적, 히라이즈미 불교유적, 후지산, 도미오카 방적공장 및 유적지, 일본 메이지 산업 혁명 유적, 르 코르뷔지에 근대건축, 나가사키 기독교 은둔유적, 모즈 후르이치 고대고분군, 조몬 선사시대 유적 등이 그것이다, 고고학 유적, 고대 문화 유적, 불교나 신도 등 종교유적, 무사문화, 근대화 관련 유적 등으로 다채롭고 다양하다.

하기 일대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다섯 곳이 있다. 하기 반사로, 에비스가하나 조선소 유적, 오이타야마 타타라 제철소 유적 등 세 곳은 조슈번 당시의 제철공업과 조선업의 기반시설을 보여주는 곳이고 소카손주쿠와 하기 성하촌 마을은 막말 유신기의 교육기관 및 생활공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다섯 곳이 모두 ‘메이지 근대산업화 문화유산’이라는 항목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게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 제강·조선·석탄 산업 유적’이다.

이 항목에 속한 유적들은 하기시에 한정되지 않고 무려 8개 현에 걸쳐 산재하고 있다. 2009년 초기 잠정목록 등재 당시에는 ‘큐슈와 야마구치의 근대화산업유산군’이라는 이름이었다 한다. 규슈와 야마구치에 대부분의 유적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광범위한 지역의 유적들이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야마구치 (조슈)의 하기 반사로나 가고시마 (사쓰마)의 구 집성관 유적은 메이지 유신 이전에 세워진 것이다. 두 지역이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유신을 주도했던 것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메이지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이 그런 시각을 잘 드러낸다.

제철소 및 탄광 유적과 무사집단의 생활공간을 같은 범주로 묶는 이 발상은 경제부처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일본 문화청이 근대유산의 활용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경제산업성이 ‘산업유산’과 연계하여 ‘근대화산업유산’이라는 범주를 고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전국 각지의 유적들이 역사문화유산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결국 2015년 ‘메이지산업혁명: 철강·조선·석탄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유산 등재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갈등이 새롭게 분출했고 그 파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주요 근대산업시설 중 몇 곳이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현장이었고 조선인 수탈과 직결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산업화 유적을 등재하면서 일제시대의 부정적 역사를 은폐하거나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샀다. 중국은 일본의 시도에 항의하면서 같은 해 ‘난징대학살’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였다. 한국에서는 일본군‘위안부’ 기록물을 기록유산으로 지정하는 노력을 국제간 연대로 추진하고자 했다.

특히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가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일본은 유네스코에 사도광산 등록신청서를 내면서, 등재 대상 기간을 에도시대(1603~1868년)로 한정했다. “17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금 생산지였던 사도광산을 알리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이 이뤄졌던 20세기를 제외하려는 꼼수로 받아들여졌다. 당연히 한국으로부터의 반발이 거셌고 ‘군함도’라는 영화까지 제작되어 대중적 비난이 거셌다. 하지만 올 8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서 사도광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통과되었다. “우리 정부는 ‘전체 역사’를 사도광산 ‘현장에’ 반영하라는 유네스코측의 권고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일본이 성실히 이행할 것, 또 이를 위한 선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전제로 등재 결정에 동의했다”고 외교부가 밝혔지만 그 이행의 수준과 속도는 미덥지 않아 불씨가 남아있는 상태다.

하기의 소카손주쿠도 요시다 쇼인의 삶과 사상,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그 제자들의 행적 중심으로 일본의 근대화 산업화 유적으로만 설명되고 있다. 요시다쇼인과 젊은 무사들이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론을 주창한 것, 서양 열강에 침탈당한 일본의 국익을 조선과 만주에서 벌충하자는 침략주의를 내세운 것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하기시에서 한국과 관련된 문구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구절 뿐이라 하니 세계문화유산의 등재 제도에 담긴 인류보편적 함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섬세하고 실증적인 면모도 강한 일본사회가 유독 근현대사의 역사인식에서만 그 집단편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중국 역시 동북공정에서 드러나듯 자국 중심의 역사해석과 유적활용이 무서울 정도다. 그렇다고 한국이 특별히 보편주의적 역사인식을 내세울만한 처지에 있지도 않다. 애초 세계주의적인 지향을 지닌 기관이었던 유네스코도 점차 개별 국가의 입장과 이익을 내세우는 장이 되었고 세계문화유산 역시 민족주의 문화정치에 좌우되는 흐름이 강해졌다. 언제나 한 중 일의 문화유산을 인류문명사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해질까. 하기의 유네스코 유적들을 살펴보면서 저들의 한계 못지 않게 우리들의 역사인식, 문화정치의 내면도 살펴볼 일이겠다.

life · 시공간 여행

조슈를 어떻게 만날까?

하기(萩)를 여행할 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하기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슈번의 번청이 있던, 인구 4만 정도의 소도시다. 토쿄는 물론이고 교토로부터도 꽤 떨어져 있고 항공편이나 신칸센이 닿지 않아 한국에서는 더더욱 접근하기가 불편한 곳이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탐방하고 싶었던 곳이인데 기회가 없었던 만큼 여느 일본 여행 때와는 다른 기대감이 느껴진다.

나는 하기보다 조슈(長州)란 지명에 더 친숙하다. 솔직히 말하면 하기가 조슈번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 알았다. 1988년부터 1년 반 동안 하바드 엔칭 도서관의 일본자료실에서 메이지 유신 관련 연구들을 조사하고 검토하면서 조슈와 사쓰마 이야기를 무척 많이 접했다. 특히 요시다 쇼인이 세운 소카손주쿠에서 막부를 무너뜨리는 핵심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것, 그들이 드라마 같은 메이지 유신 정치변동의 주역이었다는 것, 이들이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등을 알게 되면서 조슈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 사쓰마의 중심지인 가고시마는 두 차례 들릴 기회가 있었는데 하기는 이번에야 가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한국사회사학회에서 오랫동안 학문활동을 함께 해온 사사친 동료들과 이 여행을 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뜻깊다. 정근식 , 김필동 교수가 제안하고 나를 비롯하여 황경숙, 노치준, 김경일 교수 등이 동의하여 성사된 여행이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박맹수 총장도 참여한데다 서울교육감 당선으로 가지 못하는 정교수 대신 채규성 님이 합류했다. 모두 학구적인 타입인데다 야심차게 일정을 계획한 탓에 오가며 보고 들을 내용들이 기대가 되고 오래 전 해답을 찾아보려던 질문들이 새롭게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모처럼의 여행인만큼 너무 답사여행 같이 되지 않고 편하고 즐거운 여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모두 노는데는 재주가 없는 진지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관광청에서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야마구치를 검색하니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뜬다. “야마구치현은 조용한 시골이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적지가 많습니다. 한때 무사가 지배한 영지의 수도였던 하기에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게 잘 보존된 성곽 마을이 있고, 이 지방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야마구치는 고요한 해변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신사, 일본에서 가장 큰 석회동굴인 아키요시도 등 기막힌 경치로 유명합니다. 시모노세키 시내 시장과 식당에서는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데, 특히 복어가 이 지역 별미로 유명합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말로 일단 복잡한 역사적 기억을 둘러싼 논란은 괄호쳐두기로 하자.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태도는 여행의 즐거움을 잠식하기 마련이니 아름다운 자연, 오래된 유적들을 영화보듯 관람하는 마음의 여유를 준비할 일이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범주나 근대화 비교욕구 같은 지적 관심도 잠시 제쳐두고 가볍고 즐겁게 이질적인 문화에 대면해 보자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그러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눈, 낯선 지역을 방문하는 호기심 많은 여행자의 눈을 가질 필요가 있으리라. 어슬프게 갖고 있는 사전지식도 일단 내려놓고 몸도 마음도 시선도 가볍게…. ‘조슈’를 만나기 위한 첫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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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찿사 40주년

11월 2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40주년 기념공연이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있었다. 나는 서울대에 노래동아리 메아리가 만들어질 때 참여한 바 있으나 열심히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노찾사가 출범하는 과정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지만 노찿사의 출현에 메아리의 전사가 꽤 중요했던만큼 내 스스로는 노찾사의 활동에 남다른 애정을 느끼곤 했다. 물론 그 투쟁성과 운동성보다 서정적인 노랫말과 곡조를 더 사랑했던 것이었지만….

양현아 교수의 후의로 초대권 두 장을 받았다. 누구와 함께 이 공연을 관람할까 생각하다 대학시절 노래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동네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조형근 박사가 떠올랐다. 조박사는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마을문화운동을 주도하면서 깊이있는 글쓰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스스로 ‘동네 사회학자’라 하지만 그의 글과 책이 보여주는 시야의 너비와 사고의 깊이는 웬만한 유명학자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다. 마침 시간이 된다 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대부분 50,60대 이상의 세대인 듯 했다. 노찿사 노래가 영향을 미치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일테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실제로 공연 자체가 8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황에 맞서 노래운동이라는 양식을 만들어가던 이들의 열정을 새삼 되돌아본 자리였다. ‘노래를 찿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은 유명하지만 실제 누가 노래를 불렀는지 가수 개인의 이름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문학의 영역에서조차 공동창작을 중시하고 개인을 드러내기보다 계급을 앞세우던 시대의 한 반영이었다. 90년대 이후 이들 가운데서 유명 가수가 나타나기도 하고 노찿사의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공연 앞부분에서 김민기에 대한 감사와 그를 기리는 노래들이 불리워졌다. 아침이슬을 비롯해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어두운 시대를 건너왔던 기억을 모두가 떠올리는 듯 했다. 김광석이 불렀던 그루터기, 광야에서 등은 지금도 애창되는 곡이고 나도 간간히 부르곤 했던 노래다. 이들 노래를 40주년을 기념하면서 60대 청중들과 함께 부르니 감회가 새롭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들 노랫말을 다시 한번 적어본다.

천년을 굵어온 아름 등걸에 한올로 엉켜엉킨 우리의 한이 /고달픈 잠깨우고 사라져오면 그루터기 가슴엔 회한도 없다 / 하늘을 향해 벌린 푸른 가지와 쇳소리로 엉켜붙은 우리의 피가/ 안타까운 열매를 붉게 익히면 / 푸르던 날 어느새 단풍 물든다 //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 선 바쁜 의지로/ 초롱불 밝히는 이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 울음 있다 /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 /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 우리 어찌 가난 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 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겨 쥔 뜨거운 흙이여

지금 들어도 아름답고 비장한 노래다.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까지를 상상하는 웅원한 기상이 놀랍고 대지를 꿰뚫는 아름 등걸의 강인함이 뭉클하다. 그런가하면 한, 고단함, 회한, 피울음 같은 아픔과 좌절이 깊이 배여있다. 그래서 ‘초롱불 밝히는 이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넘친다’고 부르짖고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라 외치지만 그 바탕에는 짙은 탄식과 울음이 깔여있다. 아름답지만 슬픈 곡조가 가슴을 울린 것은 이런 정서에의 공감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80년대의 노래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다. 사랑,우정,인생 등을 노래하는 대중가요가 오랜 역사와 함께 주류를 형성했는데 우리는 종종 유행가라고 부르곤 했다. 대학생들은 뽕짝에 대한 거부감과 팝송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졌지만 노래의 메시지나 감성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에 김민기로부터 시작해서 노찿사로,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 이어지는 사회의식 지향의 노래가 있었다. 존 바에즈와 비틀즈의 노래들 가운데 일부도 이런 맥락에서 애창되었다. 그런가 하면 클래식, 가곡, 종교음악 등이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범주로 존재했다. 대중가요는 통속적이었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운동권 노래는 진지했지만 부담스러웠다. 클래식은 어쩐지 상층계급과 서구지향적인 분위기여서 접근하는데 문턱이 높았다.

나를 포함하여 꽤 많은 사람들은 대학에 들어와 두번째 유형의 노래를 접하기 시작했다. 억압의 시대, 분노의 시대를 반영하듯 데모는 늘 노래를 수반했고 노래는 그 자체가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런 흐름이 전부였던 것은 아니다. 통속적인 것은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 정서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노래가 투쟁의 도구가 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즐겨 부르던 성가곡과 흑인영가가 설 자리를 잃으면서 한동안 부를 노래를 찾지 못해 당혹스러웠던 기억도 떠오른다. 내가 초기의 노찿사 노래들, 서정적이고 은유적인 노래들을 좋아했던 것도, 그 이후 지나치게 정치화된 노래에 거리감을 느낀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노찾사 40년을 공연을 앞두고 아름답게 마무리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활동을 전개해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후자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날 공연도 ‘회고’에만 방점을 두지 않고 새로운 노래, 새로운 가수를 선보이는 부분을 담았고 앞으로의 성원을 부탁하는 메시지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재즈풍과 록 형식의 새로운 곡과 노랫말도 소개되었다. 그 결심이 뜻있는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새롭게 전개하는 앞으로의 음악 형식, 노래형태의 특성이 무엇일지 다소 궁금했다. 공연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러하듯 어디에서 매듭과 혁신을 추구할지 잘 와닿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과거 7,80년대와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확신하기가 어렵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느껴질 정도로 해묵은 모순과 좌절이 거듭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감수성과 문화적 취향은 엄청나게 변했다. K-Pop의 아이돌 노래가 전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가 하면 임영웅 등 트롯트 열풍이 전국민을 격동시키는 오늘이다. 21세기 문화운동이 새로운 힘을 얻으려면 그 형식과 감성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꿈이 사라지는 시대에 필요한 희망의 메시지와 선율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그래서 노래가 힘이 되는 동력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 중대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