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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의 부상 – 5

[지리의 힘]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다. 탈냉전과 세계화의 조류에서 뒷켠으로 밀려난 듯 했던 지정학이 다시 각광을 받고 그에 따른 국제정치의 시각전환도 빠르게 진행 중이다. 독일과 한국이 이런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음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다. 20세기 분단의 역사가 국제정치와 지정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결과이고 21세기 현재 겪고 있는 각종 도전들도 지정학적 변수와 깊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독통일자문회의에서 지정학적 관심이 주요한 테마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해 보인다.

유럽국가인 독일은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난 등과 관련하여 러시아 변수에 좀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도 생각했는데 역시 지정학적 관심의 핵심은 중국의 부상과 미중대립이었다. 에릭 발바흐 박사에 따르면 독일은 부상하는 중국과 그에 연동된 인도 태평양 국가들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지로 파악한다. 현재의 국제질서는 과도기적 징후를 보이는데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여전히 강고하지만 더 이상 충분히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태로 제도, 규범 등에서 빈틈과 허점들이 나타나고 이 틈새를 중국이 기회로 삼고자 하는 국면이라 설명했다. 시진핑 체제의 중국이 국제규범을 따르기보다 국제질서를 중국중심으로 변경시키려 한다고 우려하면서도 독일은 중국과의 관계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중국의 행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대안이 없이 정치적 담론에 휩싸이지 말아야 하며 ‘독자적이고 강력한 유럽식 서술구조’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은 미국 주도의 시각과는 차별화되는 대중국 전략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인도 태평양 지역의 안보질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허브와 스포크 시스템이라고 본 발제자는 이 시스템을 중국이 흔들고 있고 미국의 동맹체제가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틈새를 파고 들고 있는 상황으로 판단한다.

한국측에서는 이정철 교수와 김재신 대사가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현황을 발제했다. 독일에 비해 북한 변수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한국적 특수성이라 할 것이다. 이교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지구적 변동국면과 관련지어 한국이 처한 딜렘마를 정리했다. 기디온 로즈가 분류한 시기별 변화와 연동하여 미국외교의 중심이 변화하는 네번째 국면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도발은 심해지고 가치동맹의 방어력은 상대적으로 불충분한데 한국정부가 내건 경제안보 역시 미중 기술패권 경쟁 과정에서 한국의 리스크가 적지 않다고 보았다. 북한의 도발이 대담해짐으로써 오히려 불안정성이 강화되는 모순적 상황도 커진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떤 방향을 취할지 아직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글로벌 중추국가로서의 역할론도 북한을 비롯한 지정학적 위기에 대한 평화관리의 과제해결에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김재신 대사 역시 미중 대립을 가장 핵심적인 상황변수로 간주하면서 양자택일식 논리를 지양하고 전략적 가치를 높이는 방안을 추구해야 할 것을 주문했다. 즉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하되, 가능한 중국으로부터 반발을 최소화하는 방향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지정학의 대두는 곧 국제질서의 틀이 변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 핵심에 중국이 있고 미중대립이 있으며 한반도는 그 최전선에 해당한다. 한국으로서는 다중적인 변수를 함께 고려하는 복합적 대응이 불가피한데 외교정책은 늘 친미, 반미, 친중, 반중, 친북, 반북 등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한미일 공조가 강화되고 가치동맹이 강조되면서 다시 이념적인 대립이 격화되는 추세인데 격변의 지정학 자체에 더해 오리 내부의 사고분열이 더욱 문제를 키우지 않을까 걱정이다. 신냉전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의 지정학적 변화 앞에서 더 높은 수준의 지혜를 창안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고의 혁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