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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탄핵, 면책

1월 30일 오후 하바드대에서 열린 “대통령 권력과 면책특권 – 한국과 미국의 비교”라는 제목의 콜로키움에 참석했다. 하바드대 한국학 연구소가 주최하고 케네디스쿨의 ‘민주적 거버넌스와 혁신센터’ 및 로스쿨의 ‘동아시아법 연구소’가 공동후원했다. 콜로키움은 한국학센터 소장인 하크니스 교수 사회 하에 노아 펠트만 (Harvard Law School), 토마스 리 (Fordham Law School), 홍은기 (NYU) 세 분의 발제와 이어진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꽤 많은 청중들이 모여 경청했고 김구 재단의 후원으로 행사 후 리셉션도 준비되었지만 주제가 주제인만큼 무거운 분위기였다.

한국과 미국의 비교를 표방했지만 한국 상황에 초점이 맞추어진 행사였다. 한국학연구소 주관 행사이기도 하고 이제 막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미국의 상황과 현직 대통령이 구속되고 탄핵이 진행 중인 한국의 상황이 크게 다른 탓도 있을 터이다. NYU에 방문학자로 와 있는 홍은기 판사는 작년 12월 3일 계엄선포와 해제, 뒤이은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과정을 정리하고 각 단계에서 중요한 법적 쟁점들을 발표했다. 토마스 리 교수는 대통령의 특별권한과 탄핵절차, 면책특권에 관하여 미국과 한국의 법체계를 비교했다. 노아 펠트만 교수는 두 발제를 아우르면서 민주주의 및 법사회학적 맥락에서 고려할 쟁점들을 포괄적으로 언급했다. 모두 시의적절하고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었다.

한국은 대통령의 계엄권한이 헌법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비해 미국에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점이 우선 부각되었다. 물론 미국에도 대통령이 유사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일부 조항이 있고 실제 그런 사례들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조치에 한정된다. 반면 한국에서는 계엄이 거의 모든 영역을 통제할 수 있는 포괄적인 비상조치이다. 실제로 한국의 헌정사에서 중요한 정치변동은 대부분 계엄행위를 동반하면서 사회전반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87년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공고해지고 평화로운 권력교체가 일상화되어 더이상 계엄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암묵적 평가가 공유되었다. 최근 한국의 계엄선포는 그런 점에서 이곳 학자들에게도 큰 충격이자 놀라움의 대상이 된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의 비상계엄권에 대한 한미간의 차이가 어디서 유래했는가는 법사회학이나 사회사연구의 맥락에서 흥미있는 주제겠지만 이 자리에서 깊이 논의될 여유는 없었다. 다만 토마스 리 교수는 외침에 대한 염려가 거의 없는 미국에 비해 심한 이념갈등과 전쟁을 거쳐야 했던 한국의 국가형성과정의 특수함을 주목했는데 타당성 있는 견해다. 물론 그런 국가형성기를 지나온지 80년이 넘고 상당한 민주화, 산업화를 성취한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초기조건이 중요하게 작용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토마스 리 교수는 이제 한국이 초기의 ‘전시상태’라는 위기의식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공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듯 하다. 하지만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험도를 미국과 같은 차원에서 보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 점에서 ‘예외상태’ (state of exception) 는 법철학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현실정치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된다. 예외상태란 정상적인 법치 시스템으로 대응할 수 없는 총체적 위기로 인해 특별한 정치군사적 권한행사가 필요한 순간을 의미한다. 펠트만 교수는 계엄이나 탄핵 등이 모두 예외상태라는 쟁점과 관련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에서 중요하게 부각된 이 개념은 독일에서 나찌즘의 철학적 기초가 되었기에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비판적으로 취급되는 사안이다. 민주주의가 일상화된 국가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화두일수도 있다. 하지만 헌법상 규정된 계엄의 권한은 언제나 이런 예외상태를 전제로 하고 실제로 그동안의 계엄사례도 그런 명분을 내걸었다. 계엄선포가 종종 독재권력의 권한강화 수단으로 오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예외상태’라는 규정의 애매함과 무관치 않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의 직을 박탈해야 하는 상황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탄핵도 일종의 예외상태에 해당한다. 계엄과 탄핵이 동시진행되는 현재의 한국은 예외상태와 관련한 두 사안이 동시에 나타난 사례라 할 것이다. 펠트만 교수는 민주주의 체제의 탄력성과 관련하여 사회적 불만을 법적 체계가 얼마나 유연하게 수용하고 해결하는가, 그 과정에서 군사력이 적절히 통제되는가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최근 한국에서 헌법적 절차가 잘 지켜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과 건강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런 평가가 다행스러운 것은 분명하지만 뜬금없이 벌어진 한국의 현 계엄과 탄핵 사태가 참담한 비극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법학적 차원에서의 검토가 주를 이룬 심포지엄이서 좀더 포괄적인 쟁점들은 남은 숙제로 미루어졌다. 일반 시민들 내부에서 점증하고 있는 대립과 균열을 민주주의 체제가 어떻게 수렴하고 개선해갈 수 있는지도 잠시 언급되었을 뿐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점점 더 계층적, 이념적, 문화적, 정서적 분열이 심화되고 집단간의 혐오와 비난이 확대되는 상황을 보고 있다. 민주주의가 소극적인 자유주의나 다원주의를 넘어 모든 구성원을 보호하고 바람직한 정치공동체를 구축하는 핵심 원리가 되기 위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할지 좀더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유럽에서도 극우세력이 부상하고 혐오문화가 힘을 얻으며 포퓰리즘이 대두하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

대통령의 면책특권에 관한 논의도 부분적으로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2020년 당시 의회난입사태로 구속되어 처벌받은 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져 여러 논란이 제기되었다. 그런가하면 개인적인 여러 불법과 부적절한 처신에 대한 형사 민사상의 소추들이 대통령 당선과 취임 이후 흐지부지되는 모습이어서 법치와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탄핵과 형사소추가 동시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대통령이라는 헌법적 지위를 특별하게 보장해야 하는 이유와 대통령을 초법적 지위에 위치시켜서는 안된다는 주장 사이의 간극도 생각보다 크다. 리더십의 법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 도덕적 차원이 서로 맞물리는 지점이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안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정치적인 사안들이 터져나오는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좀더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법적 측면을 넘어서 사회학적, 정치학적, 문화적 변수들과 자국중심주의 시대조류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들이 적지 않았다. 걱정스럽고 우려스러운 사안을 중심으로 한국과 미국이 함께 논의되는 것이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의 지배라는 약속에 대한 합의가 민주주의 퇴행을 막을 수 있는 일차적인 조건임을 확인한 중요한 기회였다. 인공지능의 충격과 기후위기로 전지구적으로 문명적 위기를 겪고 있는 중이다. 불안함과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권위주의의 부상과 비상대권에 관한 요구가 터져나올 가능성을 민주주의 체제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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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0 시대

보스턴 일대에 폭설이 내리고 한파가 몰아친 1월 20일 오전,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지켜보았다. 화면에 비친 국회의사당 광경이 마치 중세시대 대관식을 연상케 했다. 남의 나라 일인데 취임사 메시지를 긴장감을 갖고 귀기울이게 된 것은 트럼프의 귀환이 전세계는 물론이고 계엄과 탄핵으로 불확실성이 커진 한국의 미래에 더없이 큰 변수가 될 것이 분명한 까닭이겠다.

취임사는 전반적으로 미국 국내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자국민을 향한 메시지가 전체를 지배했고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며 미국은 다시 위대해질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가득했다. 국제문제는 그다지 많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미국 국익 취우선의 기조가 확고한 만큼이나 향후 여러 측면에서 적지 않은 충격이 예상된다.

트럼프의 현실진단이 일차적으로 내 주의를 끌었다. 트럼프는 현재의 미국이 쇠퇴와 위기, 불신의 늪에 빠져 있고 재난, 범죄, 의료,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 실패의 상황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불법이주자들과 그로 인한 범죄의 확대, 이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호하는 공권력의 권위하락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취임 직후 멕시코 국경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불법이주자들을 추방하며 법이 이들을 보호하는데 이용되지 못하도록 할 것을 분명히 했다. 위대한 미국은 국가의 힘이 다시 회복되는 것에서 시작되리라는 생각이 전해져 오는 듯 했다.

트럼프의 독특한 시각은 이런 정부실패의 배후에 잘못된 이념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젠더와 인종, 환경 등과 관련된 진보주의, 다원주의, PC 주의가이 미국의 국익을 훼손하고 미국 사회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었다고 본다. ‘급진적이고 부패한 기득권층’이 법과 권력을 악용하고 시민의 자유와 선택을 가로막았다고 비판하면서 상식의 혁명을 강조했다. 앞으로 공식적으로 남성과 여성만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데서 드러나듯 그동안의 성정체성과 관련한 페미니즘과 진보적 사회의식에 대해 강력한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2.0 시대의 경제정책과 관련해서는 미국이 석유기반 제조업 강국이 될 것을 강조했다. 동시에 글로벌 분업보다 미국 내에서 중요한 산업이 가동되도록 주요 산업정책이 추진될 것임을 강조했다. 전기자동차 의무제도를 철폐하고 석유시추를 확대하며 전통적인 자동차 산업을 회복시킬 것임을 약속했다. 탄소감축이나 기후협약, 신재생에너지 중심의 정책으로부터 탈피할 것이 확실하고 기업경영에서 다양성이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DEI 나 ESG 원칙이 약화될 것도 분명해 보인다. 관세 문제는 대외수입청을 신설하겠다는 구상으로만 언급되었는데 외국으로부터 거두어들일 재원을 극대화하겠다는 정책기조가 만만치 않을 후폭풍을 예감케 한다.

전쟁과 갈등이 커지는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강력한 군사적 위상과 함께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이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전투능력을 극대화하는데 장애를 초래한 군대 내의 잘못된 이념화와 정책들을 폐지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파나마운하가 중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되찾을 것을 공언했다. 중국이나 러시아, 이란 등에 대한 직접적 비난은 없고 오히려 자신은 평화주의자이며 중동의 휴전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전했지만 취임식 직후 파리 기후협약, WHO 등으로부터의 탈퇴를 공식화함으로써 다자주의 책무에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입장에서 지역별 외교정책이 나타날 것이 예상된다.

취임식을 보면서 세계가 강한 리더, 카리스마적 권위를 요구하는 시대로 옮겨가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자유민주주의의 본거지라 할 미국에서 저토록 강력한 대통령이 출현하다니 내겐 여전히 미스테리다. 이곳 보스턴에서 만난 리버럴한 한 지인이 지나치게 급진적인 워키즘 (wokeism)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을 들었다. 직장을 다니고 자녀를 키우면서 트럼프의 메시지에 점점 더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말에서 일말의 분위기를 느낄 수는 있었다. 경제적 양극화, 실업, 인종문제 등 구조적인 이유들이 있겠지만 기존의 리버럴리즘에 내재된 한계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 세기 전 대중의 불안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온상이 되었다. 오늘도 보호받지 못하는 다수의 불만은 혐오감정과 포퓰리즘을 확대시키는 바탕이 된다. 첨단의 인공지능과 해묵은 생존경쟁이 공존하는 유동적인 21세기에 공동체의 절실한 문제해결과 인간성 회복을 함께 해낼 사상적 지향은 무엇일까? 미국을 보면서 떠올린 생각들이 다시 우리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지금 한국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격동의 갈등은 이런 시대적 조류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트럼프 2.0 시대의 개막은 정치경제적인 새 시대가 되는데 그치지 않고 지성사와 사상사 차원에서도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는 대전환의 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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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별미 한중서화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관에서 ‘수묵별미’ 근대 한중서화전을 관람했다. 한중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한 기획전인데 코로나 상황으로 연기되다가 마침내 성사된 것이라 한다. 두 나라를 대표하는 국립미술관이 공동으로 마련한 최초의 전시라는 설명에 무색하지 않게 작품의 질과 양 모두 좋았다. 두 나라의 수묵을 ‘別美’로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이 분야에 식견이 높은 이주현 교수 제안으로 김현택 교수와 함께 관람했는데 이런 고퀄리티 문화를 65세가 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는게 감사하다 못해 이래도 되는가 미안한 마음조차 들었다.

중국측 작품은 작가별로 또 시기별로 다양했다. 전통적인 수묵화의 흐름을 잇는 작품도 있지만 새로운 형식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전체적으로 먹과 붓, 화선지의 질감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강렬한 붓터치와 섬세한 선으로 수묵의 멋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준 수작들이었다. 우창숴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중국 근대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라 하는데 그의 1920년 작품은 등나무를 어지러울 정도로 자유롭게 그렸음에도 전체 구도와 나뭇잎의 배치가 탁월하고 이를 ‘구슬 빛’으로 표현한 제목도 신선하다. 이 그림이 전시포스터를 장식하고 있는 걸 보면 이 작가가 중국 화단의 대표적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겠다. 장다첸 역시 대표적인 중국의 작가로 유명한데 그의 1944년 작 ‘시구를 찾는 그림’에서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자주 접하는 소나무와 바위를 배치한 구도가 익숙하면서도 아름답다.

수묵화의 양식 속에 시대상을 담은 작품들도 더러 있었다. 문화혁명를 겪던 시기의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개혁개방 이후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여전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고수한 작품들은 몇 눈에 띠었다. 잘사는 중국, 건강한 인민생활을 표방한 선전화 형태 작품으로 북한의 화풍과도 유사하고 한때 한국 민중화가들이 그린 그림과도 닮았다. 하지만 전형적인 선전화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형식을 찾는 모습이 훨씬 뚜렷하다. 중국의 현대화를 상징하는 홍콩 옆 선전의 고층빌딩군을 ‘대지의 새로운 현’으로 묘사한 황안런의 작품과 논덮인 하얼빈의 풍경을 그린 자오룽의 작품은 서로 다른 느낌이지만 고층빌딩과 도시풍경을 통해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공통점이 확인된다.

그림에 담긴 메시지나 내용 모두 독특하여 눈길을 끈 것은 랴오빙슝의 작품 ‘자조’다. 1979년 작품이니 문화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막 시작되던 시점의 그림인데 억압된 지식인의 자조적인 자화상이 리얼하다. 항아리는 깨어져 자유롭게 된 상황이지만 스스로의 몸과 의식은 여전히 옥죄이고 부자유한 상황을 만화적인 분위기 속에 담았다. 4흉이 실각한 후 자신 및 자신과 유사한 부류들을 조롱한다는 제사가 그림만큼이나 직설적이다. 장젠의 ‘이브닝드레스’는 수묵형식을 빌어 유럽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화를 보여주는데 다소 독특한 작품으로 2002년의 시대적 분위기가 담긴 것이 아닌가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어슬프게나마 매화도를 여러번 그려보았던 탓인지 우웨스의 ‘성긴 그림자와 그윽한 향기’ 작품이 좋았다. 2023년 최근 작품인데 전통적인 매화도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 제목만큼이나 새로운 멋이 느껴졌다. 올 봄에는 이 작품을 저본 삼아 내 나름의 매화도를 그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장리천의 ‘포도’ (1986)와 우웨이산의 ‘선운묘묘사기봉’ (2024), 류강의 인자요산 (2017), 류윈취안의 ‘넓은 마음으로 바로본 세계’ (2018) 등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들이다. 쉬베이홍의 ‘천마’ (1942), 황츄위안의 ‘정강산도’ (1977) 등도 전통적인 중국서화의 맥을 잇는 작품들로 다시 보게 만든 작품들이다.

한국 측도 대표적인 작가들을 잘 선별해서 양국의 균형이 잘 나타났다. 붓과 먹, 화선지와 농담을 중시하는 동양화, 수묵화의 맥을 두 나라가 공유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고희동, 김기창, 김은호, 노수현, 박노수, 박대성, 박래현, 박생광, 변관식, 서세옥, 송수남, 안중식, 오태학, 이상범, 이응노, 이종상, 이철량, 장우성, 천경자, 허건, 허백련, 허진 등 가히 대표급 작가들이 망라되어 있다. 제목 그대로 한중 두 나라가 수묵이라는 공통의 양식을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개성과 미학이 구별되는 ‘수묵별미’의 모습이 느껴지는 듯 했다.

나의 비전문가적 시선에서 볼 때 1970년대까지는 한국의 수묵화가 중국보다 더 전통적인 면모를 잘 보존했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다. 중국의 20세기 격동이 미술양식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던 탓일지 모른다. 그에 비해 최근으로 올수록 한국 작가들은 수묵형식이지만 보다 추상적인 구도와 내용을 추구하려는 특징이 있어 보인다. 반면 중국은 다시 자신의 전통을 찾으려는 노력을 더 강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21세기 두 나라 수묵의 ‘별미’가 어떻게 진행될지, 여기에 일본의 수묵까지 더해본다면 그 삼자간의 같음과 다름이 어떠할지 궁금해진다.

life · 시공간 여행

보스턴과의 긴 인연

보스턴 – 1989년 하바드 엔칭연구소의 방문학자로 와서 1년 8개월을 살면서 박사논문의 초고를 만든 곳이며 내 평생의 학문적 자산이 된 소중한 경험을 얻은 곳이다. 그런가하면 아들이 이곳에서 태어난 덕분에 엔칭 관계자 및 여러 나라의 학자들로부터 큰 축하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아들일지 딸일지를 놓고 20여명 학자들이 1달러씩 모아 베이비 샤워를 해준 멋진 추억이 앨범과 뇌리에 남아있다. 갓난 아기를 낳고 키우느라 Womens and Brigham Hospital 과 Childrens Hospital 을 오갔고 딸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데려다 주느라 분주했던 기억도 새롭다.

이곳의 학자들을 만나 내 좁은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두고두고 내 생애의 자산이 되었다. 카터 에커트, 에드워드 베이커, 낸시 에이블먼, 존 리, 김선주 교수와의 이런 저런 인연도 이곳을 통해 맺어졌다. 낸시는 내가 이곳에 올 수 있도록 추천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하바드 의대 교수로 재직하시던 그 부모님 댁으로 우리 가족을 초청해 주었다. 오랜동안 이 분들과 교류했지만 내가 도움을 준 것보다 그들로부터 받은 것이 훨씬 많다. 특히 고마운 에커트와 낸시 두 분이 모두 타계하셔서 감사함을 좀더 자주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곳과의 인연은 둘째가 유학을 오면서 새롭게 이어졌다. 약학을 전공한 둘째는 식약청에 잠시 재직하다가 하바드 보건대학원으로 유학을 와 약물역학 epidemiology 과 의료통계 medical statistics 를 함께 전공했다. 재학 중에 몇 번 오가면서 격려도 했지만 그 모든 학업과정은 결국 혼자의 몫이었는데 잘 감당하고 견뎌주었다. 2017년 딸이 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에 부모로서 하바드대 졸업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가문의 영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딸은 이곳에서 멋진 신랑감을 찾아서 결혼을 했다. 둘이 잠시 한국으로 나와 작은 결혼식만 마치고 다시 돌아와 공부를 마무리하고 학위 취득 후 취업을 했다. 사위도 이곳에 직장을 갖고 있어서 둘 다 보스턴에 정착하게 되었다. 첫 손녀가 태어나던 2018년에 다시 하바드 엔청연구소 방문학자로 와서 8개월을 지냈고 둘째 손녀가 태어날 때도 짧은 시간 와서 머물렀다. 이제 두 손녀가 자라 학교와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으니 이곳과의 인연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 같다. 낯익은 찰스 강변을 지나면서 내 인생사 속에 깊이 자리한 하바드와 보스턴이 새삼 와닿아 마음이 뭉클하다.

딸 내외가 마련한 벨몬트의 집을 들어서면서 더욱 감사한 마음이 벅차오른다. 재택근무로 오전 회의를 막 마친 딸과 반가운 포옹을 했다. 한국에서의 대학공부는 물론이고 미국 유학시절까지 부모의 경제적 뒷바라지가 필요없을 정도로 장학금으로 전과정을 마친 자랑스런 딸이다. 먼 외국에서 결혼할 상대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며 두 딸을 키우고 마침내 좋은 지역에 좋은 거처를 마련하는 과정도 전적으로 스스로 해결해온 대견한 아이다. 그 독립성이 고마우면서도 힘들고 외로운 때가 어찌 없었을까 싶어 짠한 마음이 솟구친다.

미국도 아이들 교육여건과 안전정도에 따라 주택지 선호도가 크게 달라진다. 벨몬트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곳 주민들도 선호하는 좋은 지역이었다. 집은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3층 건물로 4 룸 4 화장실 구조다. 1층에 거실과 주방과 응접실이 있고 2층에 침실 2개와 놀이방, 그리고 재택근무용 작업실이 있다. 3층에는 방문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침대와 소파와 여유공간이 있다. 뒤로는 호수가 보이고 각종 물건들을 넣어둘 꽤 넓은 지하공간이 별도로 있다. 뒷마당은 바비큐 파티가 가능한 데크와 작은 창고가 있고 토끼들이 오가는 아담한 잔디밭이 있으며 주위로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둘러서 있다. 창이 많은데다 내부 공간이 모두 흰색 톤으로 되어 있어 종일 햇살이 쏟아들어와 밝고 아늑한 느낌이다.

저녁에 손녀들과 반갑게 만났다. 하루가 멀다하고 화상으로 통화하고 사진을 보던 아이들이었지만 직접 만나니 더욱 새롭다. 둘째 손녀가 먼저 집으로 와서 반갑게 만났다. 말도 배우기 전에 잠시 함께 있었을 뿐이었는데 잠시 어색한 듯 머뭇거리다가 곧 2층으로 뛰어 올라가 공주옷을 갈아입고 내려와 애교를 부렸다. 조금 후 큰 손녀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이젠 많이 커서 제법 학생티가 났다. 첫째도 곧장 2층으로 올라가더니 팅크벨 요정의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와 거실을 뛰어다니며 인사를 했다. 두 명의 예쁜 천사를 보는 듯 황홀한 기쁨이었다.

언젠가 딸은 아이들이 너무 여성스러움을 강요받지 않게 키우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두 손녀는 하나같이 공주옷을 좋아하고 화장품 장난감을 좋아한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런 모습은 타고나는 모양이라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다들 자기 재능과 개성을 갖고 태어나는게 아닌가 싶다. 저 아이들이 평생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또 키우느라 애쓰는 딸과 사위가 힘들지 않고 기쁨 가운데 미국생활을 잘 해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life · 시공간 여행

두 번의 13일 아침

2025년 1월 13일 아침을 두 번 맞았다. 인천공항에서 아침 해를 보면서 떠나 13시간을 날아 왔는데 보스턴 공항에서 또다시 13일 아침 해를 마주한 것이다. 탑승한 후 한 숨 잤을 뿐인데 태평양 건너 지구 반대편에 나를 데려다주는 비행기라는 문명 모빌리티에 또한번 놀란다. 동시에 날짜와 시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는다.

1989년 내가 해외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 이곳 보스턴이다. 하바드 엔칭연구소에 있는 동안 탈냉전 선언과 독일통일 소식을 접했고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학자들의 우려를 가까이서 보았다. 내 학문적 자산의 한부분이 형성되고 좋은 연구자들과의 인연이 맺어진 곳이기도 하다. 한달 전 타계한 카터 에커트 교수는 잠시 자신의 아파트에 내가 기거할 수 있게 해 줄 정도로 여러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곳 마운트 어번 묘지에 잠들어 있는 낸시 교수는 한국의 세대와 계층, 사회운동 연구에 큰 성과를 낸 탁월한 학자이면서도 늘 나를 지적 멘토처럼 여기며 한국학계를 존중한 분이셨다.

이번은 이전까지와는 달라 더이상 학술적 방문이 아니다. 대학이나 연구소를 찾을 계획도 없고 특별히 지적 대화를 나눌 상대나 계기를 애써 마련하지도 않았다. 내 여행 가방은 손녀들에게 줄 한글동화책과 과자봉지로 가득 채워졌고 대부분의 시간을 딸과 손녀를 위해 쓸 마음의 각오도 충분하다. 손녀가 다닐 초등학교와 동네 도서관을 함께 가거나 좋아하는 옷이나 장난감을 사주면서 인기를 얻는데 최대의 노력을 할 생각이다. 딸과 사위가 근무하는 회사 상황과 출석하는 교회공동체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면서 과거에 나누지 못한 정을 되살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으려 한다.

한국을 떠난지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한국뉴스로부터 멀어진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한편의 궁금함과 또한편의 회피심리가 뒤섞여 마음은 염려와 무심의 이상한 조합상태다. 주요 현안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초조한 바 없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애써 뉴스를 뒤지고 조바심을 내지는 않을 작정이다. 이런 저런 주장들이 내 정서와 의식을 마냥 흔들지 못하도록 현실을 긴 호흡으로 직시하고 냉정한 거리감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볼까 한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 이곳에서도 뉴스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현 한국상황을 트럼프 신정부가 어떻게 평가할지 어떤 요구를 내놓을지, 미국의 새 정책기조에 한국은 얼마나 지혜롭고 효율적인 대응책을 마련할지 따라올 걱정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정파적 이익투쟁과 내부의 정치동학을 넘어 불확실성이 커지는 국제환경에 대응할 집단적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때다. 위기 속에서 미래의 복합 충격을 감당할 역량이 성장하는, 대전환의 역설적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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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주술

오늘 한국사회는 종교사회학의 주된 관점에 근본적 수정이 불가피함을 또렷이 보여준다.

첫째로 종교는 점차 영향력이 약화되리라는 세속화 명제는 그대로 수용되기 어렵다. 현재 한국은 세계 3대 종교인 불교, 기독교, 천주교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종 종교와 신흥종교를 포함하면 인구의 상당수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엘리트층이 다양한 종교적 자원을 공유하고 종교적 네트워크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둘째로 종교는 공적 영역에서는 퇴장하고 사적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시각에도 수정이 필요하다. 대통령 부부를 비롯하여 총리, 국회의원, 권력에 줄서려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주술적 예지력을 가졌다는 자칭 도사나 인사들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사실은 부끄럽고도 놀랍다. 군의 최고지도자였던 예비역 장성은 스스로 점집을 열었을 정도다. 드러나지 않은 경제와 문화 영역에도 종교가 권력과 금력을 동원하여 개입하는 정도가 상당하리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셋째로 종교와 주술을 구분하지 않고 ‘믿는 행위’ 일반을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해석도 수정되어야 한다. 제도종교를 중시하는 태도를 서구중심적이라고 비판하고 민간신앙과 주술신앙을 종교의 반열에 함께 올려놓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라는 다원주의적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양자의 질적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오늘 한국사회가 보여준다. 주술적 예언을 믿고 그것이 공공영역을 왜곡시키는 현실에서 주술과 사술의 해악을 가려내는 지적 엄밀성이 필수적이다. 세속적 가치와 맞설 종교적 세계관의 존재여부로 양자를 구분하려 했던 베버의 관점을 되살려야 할 때다.

life · 오늘의 화두

에커트 교수 부음

카터 에커트 교수님 부음을 뒤늦게 접했다. 그의 온화한 웃음과 다정한 모습이 떠오른다. 4년 전 하바드대 패컬티 하우스에서 함께 점심을 하며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건강이 그동안 많이 나빠지셨다는 후문이다. 이제 뵐 수 없게 되었다니 안타깝고 황망하다.

에커트 교수님과의 인연은 1989년 내가 엔칭펠로우로 간 후부터 맺어졌다. 그때 에커트 교수님은 UW에서 학위를 받고 막 하바드에 합류한 젊은 교수였다. 아직 테뉴어를 받지 않았지만 한국 근현대사를 책임진 자리인데다 제자와 후배를 잘 챙기고 폭넓은 식견의 소유자여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당시 하바드의 한국학 연구는 족보연구의 대가인 와그너 교수가 대표하고 있었기에 근현대사보다는 조선시대사가 더 중심을 이루었던 것 같다. 엔칭연구소 부소장인 베이커 씨도 한국관련 연구자들에겐 큰 힘이 되어 주셨다.

나는 체류기간이 좀더 연장되어 가족들이 먼지 귀국하고 혼자 6개월을 더 머무르게 되었다. 새로운 집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에커트 교수께서 여름기간 해외에 가 계실 예정이라며 자신의 집을 쓰도록 해 주셨다. 덕분에 무더운 여름 두 달을 켐브리지의 멋진 아파트에서 기거하는 행운을 누렸다. 집을 깔끔하게 관리하시던 분이셨기에 여간 큰 호의가 아닐 수 없었다.

90년대에는 한국학과 관련한 국내외의 시각차가 현저해지던 때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청소년기를 지나는 때와 비슷하다할까. 주관적인 고집도 형성되지만 아직 어른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과도기… 당시 나는 청소년 같은 기개로 해외의 한국학자들을 다소 낮추어 보았다. 그건 80년대의 시대정신을 공유했던 많은 사람들과 다를바 없었다. 하지만 에커트 교수는 그런 태도들을 별로 개의치 않으셨을 뿐 아니라 종종 경청하기도 했다.

이후 에커트 교수는 자신의 박사논문을 수정해서 Offsprings of the Empire 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후일 [제국의 후예]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왔는데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민중주의 시관이 널리 확대되면서 민족주의적인 자의식도 강한 때였던 까닭에 삼양사라는 기업사를 통해 한국 근대의 식민지적 기원을 밝힌 저작에 호감을 갖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서평이나 학술적 토론보다 막연한 거부감과 선입견이 작용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신기욱과 로빈슨이 편집한 Colonial Modernity in Korea 책자에 에커트 교수가 쓴 “Hegel’s Ghost” 라는 챕터는 에커트 교수에 대한 한국학자들의 비판을 더욱 가중시켰다. 나 역시 이 글에 대해선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국연구자들이 스스로의 세계관과 학문적 패러다임을 성찰적으로 사고하기 어려웠던 지적 지체의 소산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몇 년 후 나 스스로 한국사회사연구가 민족주의적 지향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고 나아가 근대성과 식민성의 착종을 주요한 연구쟁점으로 제기하게 되었음을 에커트 교수가 아셨을까…

이 년 전 낸시가 저 세상으로 갔는데 이제 에커트 교수가 별세하셔서 내가 하바드에서 교류하고 인연을 맺었던 두 분의 소중한 분들을 더이상 볼 수가 없다. 안타깝지만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길… 명복을 빌며 지난 후의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life · 오늘의 화두 / 시공간 여행

타산지석의 역사인식

오래 전 예정했던 일본 하기 지역 답사여행을 12월 9-12일에 마무리했다. 복잡한 과거나 논란은 일단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말로 괄호쳐두자. 대신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 유적을 관광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 답사 여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생각하고 다짐했던 바다. 함께 한 분들 모두 사려깊고 넓은 시야를 지닌 동학들이고 답사지역도 잘 선정되어 뜻깊고 즐거운 여정이 되었다.

하기, 시모노세키, 야마구치 등 지방도시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오가는 길이 너무 좁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연의 산세와 풍경은 별로 훼손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듯했다. 시멘트 빌딩은 거의 보이지 않고 일본식 기와집 위주의 농촌 풍경이 전통의 강인한 존속력을 보여주는 듯 했다. 수백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했던 영주 가문의 집과 유적이 그대로 유지되고 이들을 기리는 신사와 사찰이 방대한 면적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이 놀라왔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곳조차 예상보다 아름다운 단풍과 이끼낀 바위, 고즈녁한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유적지마다 공간배치와 건축양식이 다르고 시대적 역할과 성격이 뚜렷해 현장에서 배우는 맛이 있었다.

하기박물관과 메이린학사는 일본 역사교육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학습장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국가사, 지방사, 세계사와 자연사를 한데 결합시키려 한 전시구성이 와 닿았다. 특히 하기박물관은 규모가 크지 않지만 깔끔하게 디자인된 공간구성과 알찬 내용이 좋았고 19세기 후반 격동기를 내우외환 – 흑선도래 – 구미열강 – 개국 – 공무합체 – 존왕양이 – 토막 – 명치유신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소용돌이로 그려놓은 도해가 시선을 끌었다. ’내우외환‘에서 시작하여 ’존왕양이‘를 거쳐 ’토막유신‘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각 단계에서 작동하는 안과 밖, 수구와 개혁, 국가와 세계의 역동성을 종합적으로 드러내려는 내공이 만만찮게 느껴졌다.

장소마다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하비에르 기념성당과 크리스쳔 순교기념공원은 고결한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의 눈물섞인 수난을 전하는 숙연한 공간이었다. 자발성과 희생, 종교성과 비극성에서 비롯하는 숭고함이 전해지는 듯 했다. 그에 반해 요시다 쇼인을 추모하는 쇼카순주쿠 일대에서는 메이지 국가주의를 부르짖은 주역들에 대한 영웅화의 시도가 역력했다. 어떤 공간보다 정치적인 그림자가 짙게 어른거려 실망스러웠다. 하기의 상징으로 요시다 쇼인을 내세우려는 지방적 이해관계로 치부하기에는 최근 일본의 전반적 역사인식 기조를 반영하는 흐름으로 느껴졌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삼삼오오 관람자들을 대상으로 자랑스럽게 이곳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기특한 역사교육이라는 느낌보다 정교한 정치교육의 기제를 보는 듯 해서 적지 않이 불편했다.

생각처럼 가볍게 여행하는게 쉽지는 않았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리가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임진왜란과 끌려온 도공의 애환, 조선침략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슌판로 기념관에서 ’청은 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승인하고..‘라는 청일강화조약문 1조의 실물을 보는 순간 1894년 한반도 안팎의 갈등과 위기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국제적 논의 현장에 정작 우리는 참여하지도 못하는 비극이 1943년의 카이로 회담,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회담, 1953년의 정전협정체결회담에서 계속되었음이 떠올랐다. 그 비극적 반복이 앞으로도 나타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한반도와 아름다운 인연으로 이어질 요소들도 없지 않았다. 이 지역 초기 지배자인 오우치가가 스스로를 백제 임성태자 후손임을 강조했던 사실이나 담백미를 자랑하는 이곳 도자기가 조선도공의 손끝에서 빚어진 것은 한일간의 멋진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활용할 만한 요소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을 ’한국 독립운동가‘로 적어둔 설명문도 본격적으로 그 의미를 확장하여 동양평화론을 매개로 우애의 국제협력을 향한 미래전망을 부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최소한으로 언급되거나 대부분 은폐되어 있다. 일제의 조선병탄, 만주침략과 대동아전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고 정한론의 역사가 남긴 부정적 유산에 대해서도 일언반구가 없다. 과거사는 기억되고 전승되지 않으면 잊혀지거나 왜곡된다는 점에서 이런 설명회피의 뒷면에 작동하는 고의성과 편협함에 내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귀국하는 비행기 속에서 우리의 역사인식 방식과 역사교육의 현주소를 생각했다. 식민사관의 극복과 주체적 역사인식을 강조하면서 남의 문제를 비판하고 지적하는데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지만 스스로를 성찰하고 업그레이드하는 노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 것 아닌가 자문한다. 21세기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자 K-Pop의 역동성을 자랑하는 문화강국이면서 주체성과 배외성을 동일시하거나 전통과 혁신, 보수와 진보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면서 위정척사나 반제투쟁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면도 없지 않다. 국가사 일변도의 정답찾기 교육이 역사를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의 자발성, 다원성, 개별성을 억압해 온 것도 향후 넘어서야 할 과제다. 앞으로 갈 길은 여전히 먼데 우리는 지금 어떤 준비와 노력을 하고 있는가 – 가벼운 여행이 끝나자 다시 무거운 질문들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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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과거사와의 재회

하기 여행은 두 과거사와 만나는 여정이다. 사건으로 말하면 메이지 유신과 한일합방이고 인물로 말하자면 요시다 쇼인과 이토 히로부미와의 대면이다. 비록 하기 방문은 처음이지만 저 두 사건과 인물은 낯선 대상이 아니다. 내 역사의식의 바탕에 중요한 자리를 이미 점하고 있기에 저들과의 조우는 첫 만남이라기 보다는 이전에 종종 마주쳤던 대상과의 재회라 함이 옳을지 모르겠다.

메이지 유신과 조선침략은 연결되면서도 구별된다. 그 양면을 하기의 인물들이 제각기 보여준다.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제창했지만 메이지 유신의 당사자는 아니다. 키도 타카요시는 유신의 주역이지만 정한론의 실천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가하면 이노우에 가오루는 강화도의 불평등 조약을 강제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 속으로 끌어들였다. 오시마 요시마사는 청일전쟁, 동학농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약소국 조선을 유린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온건개혁파로 평가되지만 실질적으로 초대 통감으로 조선의 강제병탄의 주역이 됨으로써 정한론의 실현에 앞장섰다. 이들 모두가 하기 출신의 유신지사이자 메이지 시대 고위직 들이다.

개인적으로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 줄곧 양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배외적이고 낡은 막부체제를 근대문명국가로 탈바꿈시킨 놀라운 역사적 성취라는 일반적 평가에 나는 공감했다. 목숨을 아끼지 않은 유신 지사들의 활동에서 신선한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정한론의 신봉자들이었고 실제로 제국주의 침탈의 당사자들이어서 비판과 비난도 불가피했다. 메이지 유신에 대한 찬양이 조선의 상대적 낙후성을 강조하고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될 때는 분심을 억제치 못한 적도 있었다.

대학원 시절 탐독했던 배링턴 무어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독일과 함께 메이지 일본을 ‘위로부터의 혁명’ 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다루었다. 큰 틀에서 그 논지에 공감했고 나도 저런 책을 써 보리라는 꿈도 꾸곤 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이 이웃 국가의 침탈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저자가 서구의 눈, 강대국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견의 소산이라 생각했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총체적 문명전환과정에 대한 부러움과 조선병탄이라는 침략행위에 대한 비판의식 사이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거나 오락가락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나는 조선에도 ‘위로부터의 혁명’ 시도가 있었음을 밝힘으로써 내 인식의 불편함을 극복해 보려 했다. 일본과 조선 두 나라 모두 체제변혁을 향한 개혁세력이 존재했고 그 주체역량이나 사상적 지향에 큰 차이가 있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존중하는 한편으로, 정치변동의 시점에 작용한 외압의 성격차이가 한일간 상반된 결과를 초래한 주원인임을 밝힘으로써 침략 행위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고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당시 유행하던 세계체제론이나 종속이론의 도움도 받았고 식민사관 극복을 내세운 내재적 발전론의 영향도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내 박사논문의 얼개는 메이지 유신과 갑신 갑오개혁의 비교에 바탕한 것이었다. 비교사 연구가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탄탄한 배경지식을 요구하는지 잘 모르면서 겁없이 덤벼든 시도였다. 일본사에 대한 얕은 지식을 커버하느라 하바드 엔칭 도서관에서 닥치는대로 메이지 유신 관련 저작들을 찾아 읽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조금씩 알게되면서 오히려 같은 수준의 상세한 한국 자료를 찾기 어려워 비교 자체가 벽에 부딪치는 경우도 많았다. Meiji Restoration 이라는 책을 쓴 하바드 일본사 전문가 알버트 크레이그 교수에게 내 연구주제를 말했다가 ‘잘못된 연구가설’이라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처음 요시다 쇼인이 유학자였다는 점과 강렬한 반서양 배외사상을 주창했음에 주목하고 면암 최익현과 유사한 인물이 아닐까 여겼다. 실제로 유학적 배경을 가진 지식인이면서 목숨을 걸고 서양에 맞설 것을 요구한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이 둘은 유사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실제 두 사람의 행동과 지향은 물과 기름마냥 이질적이었음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차이는 단지 두 인물의 개성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무라이와 양반사족의 오랜 행동양식, 그 배후에 작동한 막부체제와 중앙집권체제의 간격이 깊고 뚜렷했다. 그 다름의 성격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내겐 오랜 숙제가 되었다.

강렬한 배외의식이 근대문명 수용을 포함한 개방적 주권의식으로 변하는 계기가 어디서 가능했는지를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요시다 쇼인과 그 제자들이 문명개화와 서구화의 지지자가 되었던 것처럼 한국의 김옥균과 대원군, 김홍집과 전봉준의 연대는 왜 불가능했을까 궁금했다. 일본에 영향을 미치던 영국과 프랑스 세력과 조선에 개입하던 일본 세력의 성격 차이가 워낙 커서 내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초기의 가설을 논문에서는 일관되게 견지했다. 하지만 한일 간의 내재적 차이가 지닌 무게감을 경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내 박사논문을 빨리 출간하라는 몇 분의 고마운 권유에 끝내 부응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최근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라는 과오] 라는 책이 나왔는데 “일본을 멸망시킨 요시다 쇼인과 조슈 테러리스트”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하기가 자랑하는 유신주역들을 테러리스트, 나아가 일본을 망친 인물로 규정하는 책이어서 눈길을 끈다. 저자 하라다 이오리는 요시다 쇼인과 그 제자들이 막부의 평화로운 개혁과정을 무력으로 뒤엎고 그 공을 탈취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진보적이거나 국제주의적 역사관을 펴는 것은 아니고 정한론과 조선침략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막부중심의 일본사관에 철저한 시각으로 한국인 독자로서는 당혹스러울만큼 우파적이고 보수적인 관점을 견지한다고 알려져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은 다양하게 평가되고 역사논쟁의 한 축을 이루는 주제임을 보여준다.

메이지 시기 9명의 총리 중 5명을 배출한 지역이지만 현재의 하기는 인구가 줄고 교통도 불편한 낙후한 곳이 되고 말았다. 해체된 하기성의 천수각을 재건하려는 계획도 예산 부족으로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교토는 물론이고 옛 사쓰마 지역인 가고시마에 비해서도 하기의 변화는 더디고 역사관광지로의 존재감도 크지 않다. 메이지 유신을 지역 상징으로 갖고 있는 도시로서는 다소 의아스러울 정도다. 메이지 유신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퇴락한 탓일까 생각도 들지만 최근 일본의 역사해석을 보면 결코 그럴 것 같진 않다. 옛 조슈의 역사를 상징화하고 역사로 해석하는 오늘의 일본은 여전히 메이지 유신을 드높이고 정한론과 조선침략의 역사는 드러내지 않는다.

박사논문을 쓴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 하기에서 다시 만나게 될 이 두 과거사는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까? 일본의 대변혁 역량이 자라난 쇼카손주쿠의 모습은 21세기 오늘의 내 눈에 어떻게 비춰질까? 조슈 5 걸로 상찬되는 유신지사들의 삶과 행적을 다시 접하면서 내 마음엔 어떤 파문이 일까? 여러모로 궁금하지만 굳이 산뜻한 답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를 내려놓기로 한다. 언젠가 더 나은 해석과 공감의 서사가 등장할 것을 믿는 열린 소망으로 두 과거사와의 재회를 담담히 대면할 마음의 빈공간을 준비한다.

life · 시공간 여행

하기의 문화와 경관

일본은 영주가 지배하는 번국체제를 오래 유지했던 탓에 지역별로 고유한 풍습과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4면이 바다이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지형에다 화산지대여서 자연풍경도 이색적인 곳이 적지 않다.

하기의 문화로 햐기 야키로 불리는 도자기가 우선적으로 꼽힌다. 일본의 유명 도자기가 다 그러하듯 이곳 도자기 역사도 임진왜란에서 끌려온 조선도공으로부터 시작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조선에 출병했던 영주 모리 데루모토는 도공인 이작광과 이경을 데려와 영지에서 사용될 도기 제품을 만들도록 했다. 가고시마에서 활동중인 심수관 집안이나 아리타의 이삼평 가문과 비슷한 역사인 셈이다. 다만 이들 두 지역에 비해서 하기 야키와 아직광 집안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야마구치 지역이 관광이나 접근성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탓일지 모르겠다.

하기 야키의 두드러진 특징은 흡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차나 사케를 담는 용도로 제품을 오래 사용하면 물이 들어 색상이 변한다. 그래서 하기 야키는 특히 차 애호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는데 사용할수록 미세하게 변하는 빛깔이 심미적으로 독특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기 야키의 또다른 특징은 형태와 장식의 단순함이다. 밑그림이나 상회칠 장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구울 때 도공이 어떤 효과가 예상되는지를 알고 그 예상을 최대한 활용하여 단순한 미감을 드러내려 한다. 초기엔 조선의 스타일을 따랐지만 점차 소박한 일본적 특성이 추가되어 오늘날의 개성적인 스타일이 되었다고 한다.

400년 역사의 하기야키 모습은 우라가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이 미술관은 하기시 출신의 실업가 우라가미 도시로가 17세기 풍속화인 우키요에, 동양 도자기 등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1996년에 개관했다.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우키요에는 화려한 색채가 특징인데 현재 약 5,500여점이 소장되어 있고 매월 30여점을 테마별로 전시한다. 2010년에는 도예의 진흥을 목적으로 새로이 도예관을 증축. 하기 야키를 포함하여 한국과 중국의 도자기 약 500점, 근현대 도예작품 약 750점(2015년 현재)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지역별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마츠리 (祭つり)는 일본 문화의 대표적 아이템의 하나다. ‘제사를 지낸다’는 동사 마츠루(祭る)가 명사화하여 축제를 뜻하게 되었다는 해석도 있듯이 전통적인 마츠리의 대부분은 제사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절이나 신사와 무관한 전통적인 영주가문의 행사나 막부시대 의례가 그 기원이 되는 경우도 있고 마을공동체의 세시풍습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된다. 규모가 큰 대규모 마츠리는 지역민들이 함께 참가할 뿐 아니라 지방정부가 행정적 재정적으로 뒷받침하여 지역의 공식적인 축제가 되어 있다.

히기에서는 ‘하기 시대 퍼레이드’이라 불리는 축제가 유명하다. 1603년에 시작된 에도시대. 전국의 다이묘들은 2년마다 많은 사무라이를 거느리고 쇼군을 찾아가는 의례 습관이 있었다. ‘다이묘 행렬’이라 불리던 이 이동은 각 영주들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규모가 크고 호화로웠다. 하기에서는 에도시대의 무사와 성주, 기타 중요한 사람들이 그 신분을 드러내는 의상을 입고 퍼레이드하는 다이묘 행렬을 매년 거행한다. 행진의 마무리는 무사의 무구와 의상을 신사에 봉납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막부전통과 신토 문화가 결합된 흥미로운 사례라 하겠다.

하기의 등불축제도 오래된 축제의 하나인데 조상숭배와 관련된다. 일본의 불교 전통에 따르면 여름의 오본(백중맞이) 동안 조상들의 영혼을 기리게 되는데 하기 등불 출제는 이곳 영주였던 모리 가문의 제사 행위를 그 내용으로 한다. 다이쇼인 절에서 8월 13일 500개가 넘는 석재 등불에 불을 붙이며, 8월 15일에는 도코지 절에서 등불을 밝히는데 마법 같은 분위기가 인상적이라 알려져 있다. 시모노세키 쵸후에 위치한 이미노미야신사에서는 매년 수호테이 마츠리가 열린다. 옛날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으로 춤을 춘 것이 그 유래라고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조상에 대한 감사와 풍년 기원 등의 뜻을 담은 행사가 되어 있다.

일대의 자연경관으로는 아키요시다이를 우선 꼽는다. 석회암이 늘어선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한 자연공원인 아키요시다이는 3억 5,000만년 전에는 바다였고 산호초가 오랜 시간에 걸쳐 석회암이 되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아키요시다이의 석회암에는 태곳적 바다에서 서식했던 생물 화석이 다량 포함되어 있어 산호초였던 바다의 기억을 현대에 남기고 있는 셈이다. 초원과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초록색과 흰색의 풍경미가 대단하다.

멀리서 보면 삿갓모양이어서 ‘카사야마’ 라는 이름이 붙은 카사야마산과 그 안의 동백나무길도 유명하다. 현무암류로 이루어진 성층화산으로 60m 화산대지 위에 분화구가 있고 화산 언덕에는 소규모이지만 완벽한 모양의 화구가 남아있다. 작은 활화산으로 산 속에는 한난지성 식물이 혼생하고 있어 학술상 가치가 높다. 산의 정상까지 드라이브웨이가 있어 정상에서 일본해와 떠오르는 섬들을 바라볼 수 있다. 넓은 지역에 25,000의 그루의 동백꽃이 꽃을 피워, 한겨울 화려한 색조를 보여주는 경관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