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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매화도

지인이 보내준 매화 사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났다. 시절의 하수상함에 휘둘려 봄이 온 것도 몰랐구나 싶었다. 지금부터라도 나무의 새잎 나는 소리, 잔디 색 변하는 모습, 풀꽃 피는 자리들을 유심히 살펴보리라 다짐한다. 매화 필 때 ‘以文會友’ 하자 약속한 ‘매암동인’ 제자들에게도 안부를 전해야겠다.

몇년 전부터 이맘때면 매화를 그렸다. 옛 문인화를 모사하기도 하고 직접 본 매화를 그리기도 했다. 작년에는 섬진강변의 화려한 매화 동네의 감흥을 표현해 보느라 적지 않은 화선지를 파지로 만들었다. 매화 그리기가 새 봄을 맞이하는 내 나름의 연례 의식이었던 셈인데 올해는 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으니 세상사의 회오리가 내 정서의 영역까지 꽤나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문득 작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중국 작가 우웨스의 작품이 생각났다. 전통적인 문인화와는 다른 짙은 농묵의 묵매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래, 올해는 이런 매화도를 그려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심기일전하여 먹을 갈고 굽은 등걸과 뻗은 가지를 짙은 먹으로 강하게 그렸다. 꽃이 무성해야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꽃잎도 그려 넣었다.

이백의 시 한 구절을 화제로 썼다. 寒雪梅中盡 春風柳上歸 (찬눈은 매화향기에 사라지고 봄바람이 버드나무 위로 돌아온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노래한 시인데 세상사의 이치를 담은 글로 읽을 수도 있다. 한겨울 눈보라가 요란헤도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듯이, 어지러운 나라 안팎의 상황도 결국은 사필귀정의 새 날로 이어지리라는 소망으로 읽어도 좋겠다. 매화향기 은은한 봄기운 속에서 힘든 시기를 견뎌낼 힘과 지혜를 얻을 일이다.

16 Comments

  1. 정헌 선생님, 매화도도 그렇지만 소개문 또한 그윽한 향이 깊이 배어있어서 한참동안 눈을 감고 음미합니다. 고맙습니다.

  2. 단아함이야말로 이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미덕이라는 생각-선생님 시화 보고 떠올랐습니다. 감사합니다.

    1. 임교수님 감사합니다. 미덕이 옳은 것과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할텐데 우리는 늘 치우치기 쉬운 듯 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3. 올해 매화도는 유난히 마디마디에 서린 힘이 느껴지네요. 세파의 매서움을 이겨내달라는 의지와 염원이 담긴듯 합니다. 선생님, 강녕하시길 기원합니다.

  4. 전정과 전지를 거듭한 매화가지 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위해 또는 경관성이나 우리 삶의 편의를 위해 그리 하였겠지요.

    우여곡절이 고스란이 나무에 담겼고 교수님 붓긑에서 재차 그 의미를 느낍니다.
    하수상한 시절에 보내주신 벗꽃으로 희망을 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5. 고매의 굵은 등걸과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가지들, 그 위로 송송이 피어난 열매 품은 꽃잎의 어우러짐이 한겨울 눈보라를 견디며 꿋꿋이 생명을 일구어온 우리 민족의 기상과 얼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사필귀정의 믿음을 실어 보내주신 을사년 매화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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