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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진보의 싸움?

12. 3 계엄으로 시작된 사회갈등이 이번 헌재의 탄핵인용으로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정서와 태도에 남긴 상처와 간극은 매우 오래 갈 듯 싶다. 내 주변만 둘러봐도 헌재의 결정에 환호를 지르고 마침내 ‘선이 악을 이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제 한국이 종북세력에 넘어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밤잠을 뭇이루는 지인들도 여럿이다.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편가르고 정치를 좌우하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났다 생각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국사회가 새로운 이념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도 종교도 심지어 예술도 보수/진보의 색안경으로 진땀을 흘린다. 가족과 친구들 사이도 이로 인해 간극이 멀어지고 감정적 충돌로 이어지고 심지어 의절했다는 말을 듣는 경우조차 생긴다. 인공지능이 인류전체의 삶을 위협하는 이 상황에서 참으로 큰 시대착오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 감정대립의 결을 보수와 진보의 싸움으로 해석해도 좋을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볼 수 있는 측면이 없진 않다. 탄핵 찬성과 반대의 양 진영이 각기 진보와 보수로 불리웠고 그들 스스로가 그런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볼 수 없고 그렇게 해석해도 안된다는게 내 생각이다. 이번 갈등의 본질은 집권세력의 정치실패에서 시작되었고 소통 실패로 위기에 부딪친 집권세력이 자기실패를 모면하기 위해 보수와 진보의 진영 싸움을 확대 조장시킨 데 있다.

여당과 야당의 정쟁은 아무리 국민의 이익을 명분으로 내건다 해도 기본적으로 권력획득을 목표로 하는 정당간 싸움의 한 측면이다. 그 형식과 절차를 제도적으로 규정하여 정치대립이 내전상황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만든 것이 민주주의다. 대통령의 최고권한을 인정하면서도 국회의 견제권력을 용인하고 다시 사법이 최종적 판단권을 지님으로써 권력의 상호견제가 작동하는 것이 사회질서의 요체다. 야당의 비난과 공격이 지나친 점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제도의 틀 내에서 작동하는 한 맏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윤대통령이 계엄 선포라는 비상수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은 한국 보수의 기대실현이나 정치적 요구와 별 연관이 없다. 그 누구도 군대를 동원하고 정치인을 무단 구속하는 방식으로 싫어하는 정치세력을 무력화시킬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를 비상계엄으로 넘어서려 했고 이것이 실패하자 극단적 우파세력의 결집과 지지를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또 그것을 위해 이런 저런 혐오와 적대의 감정을 다각도로 부추겼고 무책임한 거리 정치를 조장했다. 광화문에서 나타난 다수 시민들의 대립은 계엄의 원인이라기보다 실패한 계엄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속성을 민주당과 진보진영도 꼭같이 갖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향후 집권가능성이 높은 민주당이 얼마나 이런 이념적 덫과 편가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염려스럽기 짝이 없다. 보수세력이 정당성을 상당히 상실한 처지여서 더더욱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권위를 독점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거울효과라는 말처럼 윤석열의 오류를 다른 형태로 반복할까 두렵다. 자신의 정책실패를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떠넘기는 비겁함, 극단적 유투브와 편협한 정치세력의 도움으로 정치적 편익을 얻으려는 포퓰리즘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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