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관에서 ‘수묵별미’ 근대 한중서화전을 관람했다. 한중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한 기획전인데 코로나 상황으로 연기되다가 마침내 성사된 것이라 한다. 두 나라를 대표하는 국립미술관이 공동으로 마련한 최초의 전시라는 설명에 무색하지 않게 작품의 질과 양 모두 좋았다. 두 나라의 수묵을 ‘別美’로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이 분야에 식견이 높은 이주현 교수 제안으로 김현택 교수와 함께 관람했는데 이런 고퀄리티 문화를 65세가 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는게 감사하다 못해 이래도 되는가 미안한 마음조차 들었다.
중국측 작품은 작가별로 또 시기별로 다양했다. 전통적인 수묵화의 흐름을 잇는 작품도 있지만 새로운 형식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전체적으로 먹과 붓, 화선지의 질감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강렬한 붓터치와 섬세한 선으로 수묵의 멋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준 수작들이었다. 우창숴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중국 근대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라 하는데 그의 1920년 작품은 등나무를 어지러울 정도로 자유롭게 그렸음에도 전체 구도와 나뭇잎의 배치가 탁월하고 이를 ‘구슬 빛’으로 표현한 제목도 신선하다. 이 그림이 전시포스터를 장식하고 있는 걸 보면 이 작가가 중국 화단의 대표적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겠다. 장다첸 역시 대표적인 중국의 작가로 유명한데 그의 1944년 작 ‘시구를 찾는 그림’에서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자주 접하는 소나무와 바위를 배치한 구도가 익숙하면서도 아름답다.
수묵화의 양식 속에 시대상을 담은 작품들도 더러 있었다. 문화혁명를 겪던 시기의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개혁개방 이후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여전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고수한 작품들은 몇 눈에 띠었다. 잘사는 중국, 건강한 인민생활을 표방한 선전화 형태 작품으로 북한의 화풍과도 유사하고 한때 한국 민중화가들이 그린 그림과도 닮았다. 하지만 전형적인 선전화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형식을 찾는 모습이 훨씬 뚜렷하다. 중국의 현대화를 상징하는 홍콩 옆 선전의 고층빌딩군을 ‘대지의 새로운 현’으로 묘사한 황안런의 작품과 논덮인 하얼빈의 풍경을 그린 자오룽의 작품은 서로 다른 느낌이지만 고층빌딩과 도시풍경을 통해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공통점이 확인된다.
그림에 담긴 메시지나 내용 모두 독특하여 눈길을 끈 것은 랴오빙슝의 작품 ‘자조’다. 1979년 작품이니 문화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막 시작되던 시점의 그림인데 억압된 지식인의 자조적인 자화상이 리얼하다. 항아리는 깨어져 자유롭게 된 상황이지만 스스로의 몸과 의식은 여전히 옥죄이고 부자유한 상황을 만화적인 분위기 속에 담았다. 4흉이 실각한 후 자신 및 자신과 유사한 부류들을 조롱한다는 제사가 그림만큼이나 직설적이다. 장젠의 ‘이브닝드레스’는 수묵형식을 빌어 유럽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화를 보여주는데 다소 독특한 작품으로 2002년의 시대적 분위기가 담긴 것이 아닌가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어슬프게나마 매화도를 여러번 그려보았던 탓인지 우웨스의 ‘성긴 그림자와 그윽한 향기’ 작품이 좋았다. 2023년 최근 작품인데 전통적인 매화도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 제목만큼이나 새로운 멋이 느껴졌다. 올 봄에는 이 작품을 저본 삼아 내 나름의 매화도를 그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장리천의 ‘포도’ (1986)와 우웨이산의 ‘선운묘묘사기봉’ (2024), 류강의 인자요산 (2017), 류윈취안의 ‘넓은 마음으로 바로본 세계’ (2018) 등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들이다. 쉬베이홍의 ‘천마’ (1942), 황츄위안의 ‘정강산도’ (1977) 등도 전통적인 중국서화의 맥을 잇는 작품들로 다시 보게 만든 작품들이다.
한국 측도 대표적인 작가들을 잘 선별해서 양국의 균형이 잘 나타났다. 붓과 먹, 화선지와 농담을 중시하는 동양화, 수묵화의 맥을 두 나라가 공유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고희동, 김기창, 김은호, 노수현, 박노수, 박대성, 박래현, 박생광, 변관식, 서세옥, 송수남, 안중식, 오태학, 이상범, 이응노, 이종상, 이철량, 장우성, 천경자, 허건, 허백련, 허진 등 가히 대표급 작가들이 망라되어 있다. 제목 그대로 한중 두 나라가 수묵이라는 공통의 양식을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개성과 미학이 구별되는 ‘수묵별미’의 모습이 느껴지는 듯 했다.
나의 비전문가적 시선에서 볼 때 1970년대까지는 한국의 수묵화가 중국보다 더 전통적인 면모를 잘 보존했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다. 중국의 20세기 격동이 미술양식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던 탓일지 모른다. 그에 비해 최근으로 올수록 한국 작가들은 수묵형식이지만 보다 추상적인 구도와 내용을 추구하려는 특징이 있어 보인다. 반면 중국은 다시 자신의 전통을 찾으려는 노력을 더 강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21세기 두 나라 수묵의 ‘별미’가 어떻게 진행될지, 여기에 일본의 수묵까지 더해본다면 그 삼자간의 같음과 다름이 어떠할지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