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서 자연과학개론 강의로 명성을 떨치셨던 고 김희준 교수는 문학과 종교에 깊은 식견을 가진 과학자셨다. 나보다 몇 년 선배시지만 서울대에 같은 해에 부임했고 퇴임 후 광주과학기술원에 초빙받아 가르치게 된 인연도 겹친다. 잔잔한 목소리의 그의 강의는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명공학의 지식은 물론이고 노자 도덕경과 성경의 세계관, 세익스피어의 영시 등으로 흥미롭고 풍성했다. 내가 뒤늦게 빅뱅 우주론으로부터 입자물리학과 주기율표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그 분의 영향이 적지 않다.
폴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도 그의 강의에서 종종 언급되었다. 우주탄생으로부터 지구행성의 생명현상으로 이어지는 긴 진화과정을 탐구하는 과학자의 시선과, 남태평양의 원시자연 속에서 인간의 존재의미를 추구하려던 예술가의 문제의식이 맛닿아 있다고 했다.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고갱이 심리적 좌절상태로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어제 보스턴 미술관을 들러 이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호사를 누렸다. 크기나 구도, 색체와 함의 등에서 가히 고갱의 대표작이라 함 직하다.
오른편에 갓난 아이가 있고 왼편에는 늙은 노파가 그려져 있다. 한 가운데에는 건장한 인물이 우뚝 서서 과일 열매를 따고 있는데 선악과를 따는 아담을 연상케 한다. 왼쪽 뒷편에는 불상같은 신상이 그러져 있고 윗 구석에는 긴 제목을 불어로 써 놓았다. 생노병사의 인생사를 그렸다는 항간의 해석은 너무 평면적이어서 한참 미흡한데 작가는 어떤 마음을 이 작품에 담으려 했을까? 얼마전 고갱의 발자취를 따라 타이티 여행을 다녀오신 우한용 교수께서 이 작품을 언급하며 왜 웃음 띤 사람이 없는가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과연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하다. 생명의 탄생에 기뻐하는 얼굴도 늙었다고 괴로와하는 표정도 찾기 어렵다. 이집트 벽화의 인물같기도 하고 제주도 돌하루방 같기도 한 무심함이 푸른 색조와 맞물려 무거운 분위기를 더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주요한 특징 하나가 안면근육의 미세한 발달과 섬세한 희로애락의 표정짓기라 한다. 그 비중은 현대문명에서 더욱 커져 인기를 위한 과장된 웃음과 울음이 도처에 넘쳐난다. 비주얼이 강조되는 미디어의 시대에 표정을 관리하고 조절하는 기술은 삶의 필수품이 되었다. 그럴수록 우리는 표정에 속고 겉모습의 노예가 된다. 그런데 왜 고갱은 표정을 저토록 무덤덤하게 그렸을까? 고갱이 타이티 수도 파페에테의 근대화된 모습에 실망했다는 사실과 서구 문명의 비인간성을 싫어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그림의 가로 길이가 거의 4 미터에 달하는 이 작품의 양 옆에 고갱의 목제 조각 작품이 걸려있다. 왼쪽에는 ‘Be in Love and You will be Happy’라는 제목의 1889년 작품이, 오른쪽에는 1901년 작 ’Peace and War’라는 부조가 걸려 있다. 그러고 보니 세 작품의 제목들이 예사롭지 않다. ‘사랑과 행복’, ‘전쟁과 평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마치 2025년 혼돈의 시대를 사는 인류에게 던지는 문명적 화두같다. 하나같이 무표정한 인물모습과 투박하게 새겨진 작품의 제목은 그 질문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부탁인지 모르겠다. 별의 탄생에서 생명의 진화로 이어지는 과학의 역사를 노자의 ‘道可道 非常道’ 란 말과 연결시켜 설명하시던 김교수님 생각이 났다.

졸저 에서 고갱의 이 작품을 논의했습니다. 저도 하버드에 있을 때에 고갱 특별전을 감상했습니다.
그러셨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