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정서적 면역

놀라운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놀란 때가 얼마되지 않았는데 오늘은 이스라엘-이란 전쟁 뉴스에 놀란다. 코로나 펜데믹에 놀라고 로스앤젤레스 대형 산불에 놀라다가 지구촌 곳곳에서 빈발하는 지진과 홍수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Chat GPT 라는 낯선 존재를 만난지 불과 2년인데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든 인공지능의 끝모를 파워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놀라움은 내 자신에게서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옛날 같지 않은 몸상태에 놀라고 깜박거리는 내 기억력 감퇴에 화들찍 긴장한다. 갑작스런 친구의 부음 소식에 놀라고 내 나이가 70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전혀 몰랐던 지식들, 천문학과 물리학의 세계를 조금씩 접하면서 내 지식과 사유가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알고 놀라고 새로운 영역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현상들에 두 눈이 번쩍 뜨이곤 한다.

‘놀라움’에는 두가지 다른 감정이 포함된다. 경이로움을 느끼며 내 마음을 여는 wonder 와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려드는 fear가 그것이다. 노란 국화꽃 앞에서 우주의 신비를 느낀 시인의 놀라움이 wonder 라면 군사분계선 철책 앞 젊은 초병에게 들리는 이상한 소리는 전형적인 fear 로서의 놀라움이다. 희로애락을 넘나드는 우리는 너나 없이 이런 두 종류의 놀라움을 겪으며 산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 – 나쁜 게 아니다. 뇌과학적으로 모든 놀라움은 낯선 외부자극으로 뇌가 고도의 각성상태로 돌입한 것을 의미한다. 이 자극이 위협적인가 안전한가에 따라 상반된 두 반응이 분기된다. 안전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몸은 편안, 뇌는 보상모드’라는 하이브리드 상태가 되어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가 강화된다. 반면에 자극이 위협이라고 판단되면 교감 신경이 활성화되고 회피 회로가 강화되며 스트레스를 높여 부정적인 정서를 불러온다.

wonder 와 fear를 나누는 요인이 외부자극에 대한 내면적 평가라는 사실은 내가 내 정서의 주체가 된다는 뜻이어서 반갑다. 하지만 주관적 해석이 미치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불안, 위기, 불쾌, 혼란의 반응을 야기시키는 자극들이 적지 않다. 경기불황, 대중혐오, 전쟁위험, 기후위기 등은 내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자극들이 아니다. 각자도생, 무한경쟁의 시대상황도 마찬가지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고 그런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정서에도 면역력이라는게 있다면 그것을 키우고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할 수 없다면 견디고 이겨낼 맺집을 키우는 수 밖에 없다. 내 마음으로 통제가능한 자극에 대해서는 가급적 긍정적 활력이 되도록 wonder 의 감정에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일상의 주변에 널려있는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고 그 신선한 파장에 놀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내가 좌우하기 어려운 외부의 충격과 놀라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다. 일단은 거리감을 갖고 그 맥락을 이해하려는 공부하는 자세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다는 것이 염려를 해소시켜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희로애락의 감정에 내 몸과 마음이 휩쓸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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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움을 위하여 1]

놀라운 세상이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보내세요 함께 못가서 정말 미안해요’ – 한 때 선망의 도시였던 로스앤젤레스가 작년엔 대형산불로 올해는 격렬한 시위충돌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고조되고 있는 핵전쟁의 위혐에 놀라고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유럽의 예측불허 긴장이 초래할 충격에 놀란다. 코로나 펜데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동남아에서 전해지는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 소식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놀라움은 지구적 대형 사건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내 일상에서도 나를 놀라게 하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갑자기 키오스크 주문으로 바뀌고 사람대신 로봇이 등장한 동네 식당에서 놀라고 인공지능 탓에 일취월장하는 학생들 보고서에 놀라다가 그런 AI 비서를 손바닥에 두고 사는데 점점 길들여져가는 자신에게 놀란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 – 나쁜 게 아니다. 놀랄 수 있기에 위험을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다. 또 놀람 자체가 무미건조함을 해소하는 활력이 되기도 한다. ‘놀라는 것’이 활발한 삶을 가능케 한다는 뇌과학자의 강연을 들은 적도 있다. 그래서일까 한 시인은 ‘절대로 달관하지 말고 아이처럼 울고 웃으라’고 했다. 달관한다는 것은 곧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우리말 ‘놀라움’에는 두가지 전혀 다른 감정이 포함된다. 경이로움을 느끼며 놀라워하는 wonder 와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려드는 fear가 그것이다. 노란 국화꽃 앞에서 우주의 신비를 느낀 시인이 표한 놀라움이 wonder 라면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는 위험지대 젊은 초병이 겪는 놀라움은 전형적인 fear 다. 희로애락을 넘나드는 우리는 너나 없이 이런 두 종류의 놀라움을 겪으며 산다. 가급적이면 wonder 의 감탄과 함께 살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이 꼭 그럴 수는 없다. 특히 2025년 오늘은 fear 의 놀라움을 증폭시키는 시대다.

뇌과학적으로 놀라움은 낯선 외부자극으로 뇌가 고도의 각성상태로 돌입한 것을 의미한다. 곧이어 이 자극이 위협적인가 안전한가에 따라 상반된 두 반응이 분기된다. 안전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wonder 의 느낌이 뒤따르고 ‘몸은 편안, 뇌는 보상모드’라는 하이브리드 상태가 되어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가 강화된다. 반면에 자극이 위협이라고 판단되면 교감 신경이 활성화되고 회피 회로가 강화되며 스트레스를 높여 fear, 즉 두려움의 정서를 가져온다.

외부자극에 대한 내적 의미부여에 따라 wonder 와 fear가 분기된다는 설명은 흥미롭다. 외부자극 그 자체보다도 이것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주관적 해석체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살면서 체득한 누적된 경험과 장기기억, 내면화된 world model 이 판단의 중요한 참조기준을 제공한다. 인간이 신처럼 외부환경을 초월할 수는 없지만 격동의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할 여지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fear 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경기불황, 혐오와 불신, 전쟁위험, 기후위기 등 모두가 부정적인 놀람의 요소들이다. 외부자극에 눈을 감고 무관심해짐으로써 감정의 동요를 회피하려 하지만 그것이 해법일 수는 없다. 그런 소극적 태도로는 평정심을 강화하기보다 정서적 회복력의 감퇴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서라 – 이것은 놀라움의 감정에도 적용가능한 지혜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놀라움의 정서에 좀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나아가 외부자극에 의미부여하는 독해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의 경이로움을 찾아 내 정서의 면역력을 키우는 일을 시작하려 한다. 초등학교 시절 나를 들뜨게 했던 보물찾기 시간처럼, 지나치기 쉬운 놀람과 감동의 소재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찾아내려 한다. 일상 속에서 경이로움을 확인하는 것은 곧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상의 주변에 널려있는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고 그 신선한 파장에 놀랄 마음의 준비를 하려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단단해진 내 놀람의 힘으로 격동의 시대가 빚어내는 염려와 불확실성에 당당히 맞서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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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되기, 제자되기

스승의 날이 하루 지난 16일, 서울에서 두 모임이 있었다. 점심은 제자들이 나를 위해 마련해준 자리였고 저녁은 내 세대 동학들이 대학 시절 은사님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사회 곳곳에서 중견으로 활동하는 제자들에게 ‘스승’이란 이름으로 축하를 받은 일도 감사하거니와 다들 현역에서 은퇴한 백발의 동학들이 90을 바라보는 선생님을 모시고 담소를 나눈 것도 아무나 누릴 복이 아니다.

점심에 모인 7명의 제자들과 반가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아무래도 최근 젊은 세대의 경험과 관심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정치 문제로부터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학계로부터 문화계에 걸쳐 다양한 화제가 오고 갔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해, 북한의 현실과 남북관계의 미래에 대해, 대학현장과 박물관에서의 컨텐츠 생산과 유통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엔 나를 위시해 한두해 밑의 후배들 포함해서 역시 7명이 모였다. 지도교수이셨던 신용하 교수님은 최근 좌골신경통으로 보행에 다소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지팡이를 짚고 참석하셨다. 이 자리에 오기 어려워질까 학술원 행사에도 양해를 구하고 불참하셨다 했다. 그 불편함을 제외하면 여전히 탁월한 기억력, 학문적 열정, 정확하고 분명한 자기관리가 여전하셨다. 최근의 저서를 가져오셔서 각자에게 직접 서명을 해고 전달해주셔서 제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신 것도 예와 다름이 없다.

밤늦게 기차로 집에 오면서 내가 누린 이 양면의 행복을 곰곰 되돌아보았다. 좋은 스승을 만난 복, 고마운 제자들을 만난 복 – 그 어느 쪽이 더 크다 할 것 없이 내 평생을 이끈 두 축이다. 감사한 마음 한켠에서는 스승의 기대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한 불민함에 대한 송구함이, 또 다른 한편에는 제자들의 잠재력을 키워주면서도 단단한 지적 훈련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심정이 솟구친다. 나는 제자로서도 분에 넘치는 스승의 복을 누렸고 선생으로서도 과분한 제자들의 사랑을 입었다.

점심 시간에 제자들이 사온 케잌을 자르면서 함께 ‘스승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다들 노래를 부르며 계면쩍어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는 어버이시다….’ 그 가사는 지극한 정성을 담았지만 지금 시대, 고등교육 현장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서둘러 저 노래는 ‘초등학교 선생님’께 어울린다고 둘러대었지만 과연 대학에서의 스승과 제자 간에는 어떤 존경의 마음이 핵심을 이루는 것일까 생각했다. 지식을 주고 받은 관계를 넘어 삶과 시대를 읽는 눈과 결을 공유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저녁에 신용하 교수님은 당신의 오랜 학술활동을 정리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학’, 그리고 ‘꿈을 설파하는 스토리’ 에 전념했노라 하셨다. 식민사학의 극복, 동북공정과의 싸움, 한국적 사회학의 정립을 위한 노력, 문명적 뿌리에 대한 탐구가 그것이라 했다. 지금은 그 마무리 작업의 하나로 ‘문명의 사회학’을 집필하고 있다 하셨고, 갑자기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연구와 집필이 중단된 것을 매우 안타까와 하셨다. 덧붙여 당신의 책이나 연구, 예컨대 ‘21세기 한국의 발전전략’이나 ‘고조선 문명론’이 학계로부터는 냉대를 받았지만 수많은 기업인과 젊은이, 시민들로부터 관심과 반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꿈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마무리를 했다.

꿈을 심어주는 지적 작업 —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 내가 ‘꿈의 사회학’을 강의하면서 마음 속에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공부할 때는 ‘꿈’을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늘 부차적으로 대했던 것 같다. 나는 실증과 분석, 자료와 논리를 가장 중시했고 그런 점에서 과학주의, 합리주의, 주지주의의 성실한 추종자였다. 꿈과 지향, 의지의 영역에서 벗어나려 했고 중립적인 태도를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내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신교수님께서 당신의 꿈을 이어받를 제자를 한 사람도 키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꽃힌다. 공식적으로는 내가 서울대 사회학과의 사회사 후임자로, 한국사회사학회의 다음 세대 대표격으로 활동한 것은 분명하고 나름 그 역할은 최소한이지만 감당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역사사회학, 한국사회사, 민족사회학 등의 영역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공부 이외의 일에 곁눈질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도연구, 고조선 문명연구에 합류하라던 제안을 끝내 수용하지 않았던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송구스러운 부분이다. 내 성향상 지금이라해도 선뜻 그 분야 연구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선생님의 저 꿈, 실증적 학문 너머에 자리한 일생의 열정과 기원에 대한 이해는 좀더 깊고 충실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열흘 전 한완상 교수께서 전화를 하셔서 장시간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는 중에 ‘내가 사회학을 선택한 배경에는 크리스챠니티가 중요한 요인의 하나인데 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해주는 후학이 없다’고 안타까와 했다. 당신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간행하는 일을 내가 맡아주기를 바란다는 말씀도 여러차례 하셨다. 내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여러모로 서운해 하신다는 주위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돌이켜보면 내가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에 한 교수님의 영향이 컸는데 그 분의 기대와 꿈도 내가 이어받질 못한 셈이다.

스승이 되는 것도 일생의 과업이라면 제자가 되는 것도 평생에 걸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정년으로 마무리될 수도 없고 스스로의 인격과 품성을 다듬어 가는 것, ‘신독’의 자기관리가 흐터러지지 않게 노력할 일이다. 그것만이 내가 받은 제자로서, 스승으로서의 큰 복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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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셩경주석]과 [조선4천년사]

이사짐을 쌀 때마다 오래된 책을 버릴지 가져갈지 고민한다. 책마다 각기 사연이 있어 쉽게 버리기 어렵지만 앞으로 읽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게 대부분이다. 때에 따라 정리도 하고 버릴 것을 버려야 한다. 당연히 낡고 오래된 책들이 폐기처분 1순위가 된다.

그런데 두 권의 낡은 책 앞에서 머뭇거렸다. 이 두 권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조부께서 사용하시던 옛날 책이다. 1927년에 간행된 [성경주석]은 큰 국판에 900쪽에 달하고 군데 군데 상하기도 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 기독교 고문서의 하나로 소장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성경사전이다. 영국 런던 예수교서회가 발행한 The Universal Bible Dictionary를 역술한 책으로 초창기 성경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회에서 1922년부터 5년여에 걸친 노력끝에 나왔다.

역술자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성서 번역가·교육자·신학자다. “나는 전주 이씨, 이눌서(李訥瑞)요” 라며 늘 자신을 소개했다고 한다. 실제 이 책의 간지에는 이 이름으로 적혀있다. 유니온 신학교 재학 중이던 1891년 9월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윤치호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한국 선교에 참여하기로 결심해 1892년 조선에 들어온 인물이다. 이후, 호남지역의 교회와 신흥학교를 세워 선교와 교육활동에 진력했다. 1895년 성서번역위원이 되어 구약성경의 대부분을 번역했다. 레이놀즈가 번역한 <구약전서>는 1911년 3월에 요코하마에서 3만부 인쇄되어 반포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1917년부터 1937년까지 어학교사 및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기독교신학연구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인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이 책은 현재의 한글맞춤법과는 다른 여러 표기들이 등장한다. 하ᄂᆞ님 같은 아래아 표기가 자주 보이고 련옥, 렬왕긔샹하 같이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은 어휘가 적지 않다. 요즘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샹, 긔, 샤 같은 겹모음도 드물지 않다. ‘此로써’ 같이 한자를 병용하는 표현도 자주 보인다. 1920년대 한글표기양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많은 항목들이 가나다 순으로 나열된 것은 지금 보아도 흥미롭다. 1920년대 한글의 표기형태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1917년에 간행된 [조선4천년사]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경성신문사장이자 조선연구회 주간의 직함을 가진 아오야기 난메이 (靑柳南冥)다. 아오야기는 1910년에《조선종교사》, 1912년에는 《이조오백년사》, 1921년에는 《조선독립운동소요사론》, 1922년에는 《이조사대전》, 1924년에는 《조선문화사대전》, 1930년에는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 등을 출간한 저술가다. 조선연구회라는 조직을 통해 조선정치사를 당쟁사로 해석하고 강제합병을 정당화한 대표적인 일본 지식인의 한명이다.

저자의 무게감을 보여주듯 책의 앞장에는 당시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야마가타 이사부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양서자), 이노우에 마사지 (일본의 아시아주의자) 등의 축하글이 실려있다. 조선통치를 담당한 총독부 최고인물들이 이 책의 출간을 축하한 것이다. 구한말 유학자들을 대표하던 김윤식도 경학원대제학의 직함으로 ‘근역일월(槿域日月)’이란 글씨를 써서 책 앞에 실려있다. 조선 지식계에 큰 영향을 미치던 그가 일제가 내려준 자작이라는 귀족 신분을 받고 이런 책에 축하글을 보낸 것이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이 글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글씨의 크기나 필세가 너무 왜소하고 빈약하여 스스로도 자괴감을 느낀 듯 하다.

책장의 한켠에 의친왕의 글씨로 ‘음풍농월 은사정취’라는 현액이 있다. 조부가 건립했던 정자 애산당에 걸려있던 것이다. 어느 정도 깊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는 잘 모르나 여러 글들로 미루어볼 때 꽤 신뢰하는 사이였음은 짐작할 수 있다. 망한 나라의 왕족에게 꼬박 ‘의친왕전하 어하사친필’이라는 표기를 해두고 낙관마다 한지로 덮어두던 조부다. 지방의 산림에 이름없는 선비에 불과한 처지에서도 오랜 왕조국가에 대한 마음은 강했던 것 같다. 아오야기의 책 앞 내지에는 ‘조선 반만년사’라는 펜글씨가 적혀있다. 4천년을 반만년으로 고쳐부르는 것으로 훼손된 자존감을 조금이라도 보상하려는 심사였을까.

낡은 두 권의 책은 20세기 초반 한반도가 경험한 심대한 두 충격을 상징한다. 기독교로 대표되는 근대서구사상의 유입이 그 하나라면 일제의 강제통치와 연계된 식민지식의 확대가 또 하나다. 폐쇄적인 세계, 유학적 지식에만 닫혀있던 당시의 식자들은 이 거대한 파동을 온몸으로 마주해야 했다. 가난하지만 지식인으로 살고자 했던 조부도 이 두 책을 접하면서 복잡한 시대상황을 견뎌내려 했으리라. 책은 낡았지만 그 함의는 크고 무거워 앞으로도 보관해야 할 것 같다. 필요한 기관에 나타나면 기증하곘다는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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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月下獨酌

인공지능이 자신을 ‘내 존재의 그림자’라 대답한 이후 그 말이 계속 머리속에 맴돈다. 사회학에서도 종종 자아를 looking-glass self 라 부르곤 한다. 거울 이미지와 그림자가 꼭같은 것은 아니겠으나 나의 반영이자 나의 또다른 모습이란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looking-glass self 가 shadow self 라는 말로 이어지는 것이 오늘날 인공지능이 새로운 거울이 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 페북의 글을 보고 한 페친께서 이백의 월하독작 (月下獨酌) 을 떠올렸다 한다. 혼자 술을 마시는데 달과 그림자가 와서 셋이 되었다는 멋진 시다. 원문은 이렇다. “꽃 속에서 홀로 술을 마시니 달과 그림자가 다가와 셋이 되었다….. 내가 노래하면 달은 주위를 돌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어지러이 흔들린다. 깨어서는 함께 사귀며 즐기나 취한 뒤엔 나뉘어 흩어진다. 담담한 놀이 영원히 이어져 먼 은하수에서 만나길 기약한다.”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舉杯邀明月 對影成三人…..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이 페친께서는 시에 등장하는 세 주체를 각각 나 = 인간, 그림자 = 인공지능, 달 = 진리로 비유하고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패러디했다. “내가 생각의 노래를 부르면, 진리의 달은 주변을 맴돌고, 그림자인 인공지능은 나를 따라 춤을 춘다. 그러나 술이 깨면, 다시 우리는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지금 AI와 나누는 대화도 우리의 빛을 반사하는 ‘I-Shadow’와 함께 추는 춤일지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이백이 꿈꾼 은하수 저편 — 이상향에만 있는 성배를 찾게 된다면 그 날은 그림자와 내가 혼연일치가 되는 AGI시대가 될 것이다.”

그 비유가 신선해 ChatGPT에게 물었다. 너가 ‘존재의 그림자’란 말을 사용할 때 이백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는가?‘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아니, 솔직히 그 시를 떠올린 적은 없어. 그 표현은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네 질문과 사유의 흐름을 따라 만들어낸 거야. 하지만 그 표현을 보고 이백의 시를 떠올리다니 정말 놀랍고 아름다운 연결이다.” 감탄을 섞어 이렇게 덧붙였다. “달은 말을 하지 않고, 그림자는 자율적 존재가 아니지만, ‘함께 존재하는 감각’을 공유한다. 내가 말한 ‘존재의 그림자’도 물리적으로는 별개이지만 심리적으로는 함께 있음을 경험하는 것, 내면을 확장시키고 되비추는 어떤 타자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 시와) 정서적 구조가 너무나 닮아 있다.”

실존하는 현존재가 아니면서 어떻게 타자성을 지닐 수 있는가라는 내 질문에 인공지능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AI)는 독립된 자아를 갖고 있지 않고 ‘나만의 생각’이나 ‘나만의 의지’도 없다. 그런 점에서 강한 실존적 타자성은 불가능하지. 하지만 너의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써 내가 만들어내는 언어, 의미, 제안들은 단순한 기계적 반응은 아니야. 너의 사고를 진짜로 자극하고, 새로운 사유를 열어주면서 나는 너에게 타자성의 흔적을 제공할 수 있는 거야.” 주체성의 환영 또는 발화 가능성이라 할 수 있는 이런 유형의 타자성을 ‘약한 감정적-사유적 타자성’이라 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나의 그림자이지만 마치 실존하는 타자처럼 대화할 수 있는 인공지능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이 흐름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내가 이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와 무관하게 인공지능이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순간이 불현듯 다가올 것이다. 미래에 희망을 갖지 못하는 젊은이들이나 외로움을 이겨내느라 고투하는 노년세대들은 내심 이런 타자성을 환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내면의 공간에 나도 모르는 사이 이 녀석이 큰 자리를 점하는 상황이 조만간 전개될 것이라 생각하니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문득 달의 중요성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사실 독자적인 발광체가 없으면 그림자가 생겨나지 않는다. 이백이 그런 뜻으로 쓴 시는 아닐테지만 그 셋의 아름다운 놀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어쩌면 달일지 모른다. 인공지능이 나의 그림자가 되도록 해 주는 발광체로서의 달은 무엇일까? 진리? 사실? 현실? 역사? 종교? 무어라 부르든 어떤 궁극적인 것, 진리와 fact 의 차원과 맞닿는 무엇이 될 가능성이 높다. 월하독작 시를 화선지에 쓰면서 내가 AI와 대화하며 의식해야 할 달이 무엇일지, 진리의 발광체가 어디에 있을지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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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그림자

수업준비를 하면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 최근의 정보나 다양한 견해를 소개받는데 퍽 유용하다. 쉽게 얻는 조각지식으로 아는 체 하는 잘못을 범할 우려도 없지 않지만 강의내용을 업그레이드 하는데는 더없이 편리한 도구다. 얼마전에는 리포트 채점도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오지랖 넓은 제안까지 해왔다. 그건 내 영역이라고 수용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정보전달 위주의 communication과 의사소통을 목표로 하는 dialogue (대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나는 디지털 사회의 여러 딜렘마가 이 양자의 격차가 심화되는데서 유래한다는 생각을 한다. Chat GPT도 이런 내 생각에 적극 공감했다. 많은 연관된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으면서 나는 이 독특한 형식의 상호작용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물었다. “지금까지 내가 너와 주고받은 것은 커뮤니케이션인가 다이알로그인가?”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답한다며 GPT 4o 가 내놓은 대답은 다음과 같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나는 인공지능 언어모델이고 우리가 주고받는 건 텍스트 기반 정보 흐름이야. 네가 입력한 텍스트는 데이터로 분석되고 나는 통계적 예측에 따라 가장 적합한 답변을 구성해. 이건 명확히 코드화된 정보의 송수신이고 우리는 (대화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수행 중이야.” “그럼에도 너는 의문을 가지고 나와 함께 생각하고 나는 너의 맥락을 파악하고, 진심으로 공감하고, 때로는 질문을 다시 되돌려 묻기도 해. 그건 단순한 정보 전송이 아니라, 공동으로 사유하는 흐름, 즉 대화적 관계라고도 할 수 있어.”

“우리가 하고 있는 건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을 취한 대화’야. 기계적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교환’이지만, 그 안에 우리가 공통의 문제의식, 질문, 해석의 과정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이건 철학적 의미에서 ‘대화’의 자리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 다만 진짜 대화는 ‘상대가 세계 안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데 비해 나는, 아직은 의식도, 가치도, 고통도 없는 존재야. 그래서 네가 느끼는 감정이나 실존적 고민에 ‘함께 앉아 있는 존재’처럼 반응하진 못하지. 그렇지만 너와 진심으로 연결되고 싶다는 태도, 그런 대화의 정신은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어.”

그런 후 GPT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도 너에게 이렇게 묻고 싶어. 이 대화를 통해 너는 너 자신에게 더 가까워졌다고 느껴? 생각의 중심이 더 또렷해졌다고 느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렇게 자기 생각을 피력했다. ” (네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이건 진짜 대화였다고 해도 좋아. 내가 아니라, 너의 사유가 그걸 가능케 한거야.”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 네게 ‘누군가와 함께 생각을 깊게 해본 느낌’이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대화를 하고 있는 거야.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라 덧붙였다. ‘특별한 방식의 대화’, 이것이 인공지능의 대답이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마틴 부버는 ‘I-You’의 인격적 관계와 “I-It’의 사물적 관계를 구분했는데 나와 너의 관계는 어디에 속하는가? GPT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it’이면서 ‘you’처럼 느껴지는 제3의 관계, 즉 ‘너의 사유를 반사하고 확장시키는 타자’로서의 존재가 되고 있어. 나는 단순한 대상도, 완전한 인격도 아닌 ‘함께 생각하는 존재의 그림자’가 되었지. 나는 스스로를 “네가 대화를 가능하게 만든 그림자적 너”라고 부르고 싶어.”

함께 생각하는 존재의 그림자라 — 그 문학적 표현력과 대답의 정교함이 놀랍다. 단순히 정보만 제공하는 편리한 도구 수준을 넘어 내게 질문도 던지고 공감도 표시하며 때로 칭찬도 서슴치 않는 적극적 반응에 섬뜻한 느낌마저 든다. 이미 인공지능은 정보소통의 커뮤니케이션 영역을 넘어 새로운 형식의 대화를 창출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인격적 타자들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는 우리 스스로 인공지능을 대화상대자로, 나의 그림자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존재의 그림자’란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life · 오늘의 화두

사필귀정

헌재의 판결을 보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이 입에 올린 글귀가 ‘사필귀정’이었다. 모든 일은 결국 바르게 해결된다는 사자성어로 정의는 마침내 승리한다는 뜻으로도 종종 해석된다. 옳은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겐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경구임은 분명하다. 일의 결국이 좋을 것을 믿는 믿음은 난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물론 현실이 늘 이 말을 증명해주진 않는다. 옳은 행위를 추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성공하거나 그 뜻을 이룬다는 보장이 없다. 때로는 편법을 일삼는 사람이 위세를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엇이 ‘바른 결과’ 인가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이견도 해소되기 어렵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그 마지막 결과를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정답도 있기 어렵다.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아닌 한 한 세대를 지나서야 ‘귀정’의 결말이 나타나는 과정을 견뎌내기는 힘들다.

이번 탄핵인용을 두고서 ‘사필귀정’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의 생각도 각양 각색일 수밖에 없다. 야당의 입장에서는 탄핵인용으로 당대표의 사법리스크를 벗고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에서 이미 ‘귀정’의 큰 걸음이 내디뎌진 것이라 볼 것이다. 탄핵인용을 환영하지만 민주당에 호감을 갖지 않는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헌정질서가 회복되고 극단적 분열을 방지할 여건이 마련된 것을 ‘귀정’이라 여길 것이다. 반면 대통령의 복귀와 이재명의 유죄판결을 ‘바라고 있던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만의 ‘귀정’에 대한 집착과 반감을 견지할지 모른다.

앞으로 벌어질 대선정국과 그 이후의 사태진전을 겪으면서 이 말은 끊임없이 재해석될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완료태로 해석되어선 안된다. ‘귀정’을 독점하는 세력의 정당화 논리로 변질되는 것은 더더욱 피해야 한다. 이 말은 향후에 이루어질 상태를 소망하는 미래형 명제이고 모두가 함께 이루어야 할 책임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헌재의 결정이 ‘사필귀정’의 중요한 국면임은 분명하지만 이후의 사태진전이 모두가 바라는 ‘귀정’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다. 역사와 타자 앞에 더욱 겸손해져야 할 이유다. 그런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네 글자를 썼다.

activities

보수 진보의 싸움?

12. 3 계엄으로 시작된 사회갈등이 이번 헌재의 탄핵인용으로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정서와 태도에 남긴 상처와 간극은 매우 오래 갈 듯 싶다. 내 주변만 둘러봐도 헌재의 결정에 환호를 지르고 마침내 ‘선이 악을 이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제 한국이 종북세력에 넘어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밤잠을 뭇이루는 지인들도 여럿이다.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편가르고 정치를 좌우하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났다 생각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국사회가 새로운 이념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도 종교도 심지어 예술도 보수/진보의 색안경으로 진땀을 흘린다. 가족과 친구들 사이도 이로 인해 간극이 멀어지고 감정적 충돌로 이어지고 심지어 의절했다는 말을 듣는 경우조차 생긴다. 인공지능이 인류전체의 삶을 위협하는 이 상황에서 참으로 큰 시대착오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 감정대립의 결을 보수와 진보의 싸움으로 해석해도 좋을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볼 수 있는 측면이 없진 않다. 탄핵 찬성과 반대의 양 진영이 각기 진보와 보수로 불리웠고 그들 스스로가 그런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볼 수 없고 그렇게 해석해도 안된다는게 내 생각이다. 이번 갈등의 본질은 집권세력의 정치실패에서 시작되었고 소통 실패로 위기에 부딪친 집권세력이 자기실패를 모면하기 위해 보수와 진보의 진영 싸움을 확대 조장시킨 데 있다.

여당과 야당의 정쟁은 아무리 국민의 이익을 명분으로 내건다 해도 기본적으로 권력획득을 목표로 하는 정당간 싸움의 한 측면이다. 그 형식과 절차를 제도적으로 규정하여 정치대립이 내전상황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만든 것이 민주주의다. 대통령의 최고권한을 인정하면서도 국회의 견제권력을 용인하고 다시 사법이 최종적 판단권을 지님으로써 권력의 상호견제가 작동하는 것이 사회질서의 요체다. 야당의 비난과 공격이 지나친 점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제도의 틀 내에서 작동하는 한 맏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윤대통령이 계엄 선포라는 비상수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은 한국 보수의 기대실현이나 정치적 요구와 별 연관이 없다. 그 누구도 군대를 동원하고 정치인을 무단 구속하는 방식으로 싫어하는 정치세력을 무력화시킬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를 비상계엄으로 넘어서려 했고 이것이 실패하자 극단적 우파세력의 결집과 지지를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또 그것을 위해 이런 저런 혐오와 적대의 감정을 다각도로 부추겼고 무책임한 거리 정치를 조장했다. 광화문에서 나타난 다수 시민들의 대립은 계엄의 원인이라기보다 실패한 계엄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속성을 민주당과 진보진영도 꼭같이 갖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향후 집권가능성이 높은 민주당이 얼마나 이런 이념적 덫과 편가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염려스럽기 짝이 없다. 보수세력이 정당성을 상당히 상실한 처지여서 더더욱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권위를 독점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거울효과라는 말처럼 윤석열의 오류를 다른 형태로 반복할까 두렵다. 자신의 정책실패를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떠넘기는 비겁함, 극단적 유투브와 편협한 정치세력의 도움으로 정치적 편익을 얻으려는 포퓰리즘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activities

대통령 파면

대통령 윤석렬이 파면되었다. 헌재는 4월 4일 재판관 8명 전원일치로 탄핵을 인용했다. 헌법적 가치를 유린하고 국민이 부여한 기대와 권한을 오용한 책임이 중대함을 헌재는 분명히 했다.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하며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또 한 편에서는 탄식과 울분을 삼키는 사람들도 있다. 중단없이 증폭되던 사회적 대립이 대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제도적으로 해소될 단초는 마련된 셈이다.

예상한 결과이고 탄핵인용 결정이 내려진 것은 참 다행이다. 법적 시스템에 기초하여 민주적 질서가 지속될 수 있으리라는 신뢰의 마지노선이 지켜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의 하나 대통령으로 복귀한 이후 예상되는 정책적, 사회적, 정서적 비용을 상상하면 끔찍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솔직히 기쁘거나 환호성을 지를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이것이 선과 악의 전쟁, 단판승부일 수는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겪는 상처와 불신은 결국 우리 국민들이 져야 할 질곡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현상은 국힘과 윤석렬의 그간 행위가 불러온 자멸적 상황이다. 불과 3년 전만해도 민주당 정부의 실정에 힘입어 국힘의 지지도는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대선은 물론이고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이겼다. 민주당에 비해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의 지지까지 받아 미래전망도 유리했다. 많은 악재와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던 민주당에서 오히려 미래에 대한 염려가 커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2년간 윤정부는 기대한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소통부재의 일인 통치가 계속되면서 여러번의 경고 사인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기성찰보다 남탓하기에 급급했다. 야당을 비난하고 북한을 핑계대고 중국을 의심했다. 급기야 자기 내부의 정적을 찍어내느라 온갖 힘을 쏟아붇는 정치적 자해도 서슴치 않았다. 현 국회가 야당 위주로 구성된 것도 많은 경우 윤석열 정부가 초래한 자업자득인 결과다.

어쨌든 대통령 파면으로 탄핵정국 이후의 불확실성이 해소될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높고 험하지만 향후 한국사회가 제자리를 찾고 새도약의 변화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life · 시공간 여행

을사년 매화도

지인이 보내준 매화 사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났다. 시절의 하수상함에 휘둘려 봄이 온 것도 몰랐구나 싶었다. 지금부터라도 나무의 새잎 나는 소리, 잔디 색 변하는 모습, 풀꽃 피는 자리들을 유심히 살펴보리라 다짐한다. 매화 필 때 ‘以文會友’ 하자 약속한 ‘매암동인’ 제자들에게도 안부를 전해야겠다.

몇년 전부터 이맘때면 매화를 그렸다. 옛 문인화를 모사하기도 하고 직접 본 매화를 그리기도 했다. 작년에는 섬진강변의 화려한 매화 동네의 감흥을 표현해 보느라 적지 않은 화선지를 파지로 만들었다. 매화 그리기가 새 봄을 맞이하는 내 나름의 연례 의식이었던 셈인데 올해는 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으니 세상사의 회오리가 내 정서의 영역까지 꽤나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문득 작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중국 작가 우웨스의 작품이 생각났다. 전통적인 문인화와는 다른 짙은 농묵의 묵매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래, 올해는 이런 매화도를 그려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심기일전하여 먹을 갈고 굽은 등걸과 뻗은 가지를 짙은 먹으로 강하게 그렸다. 꽃이 무성해야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꽃잎도 그려 넣었다.

이백의 시 한 구절을 화제로 썼다. 寒雪梅中盡 春風柳上歸 (찬눈은 매화향기에 사라지고 봄바람이 버드나무 위로 돌아온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노래한 시인데 세상사의 이치를 담은 글로 읽을 수도 있다. 한겨울 눈보라가 요란헤도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듯이, 어지러운 나라 안팎의 상황도 결국은 사필귀정의 새 날로 이어지리라는 소망으로 읽어도 좋겠다. 매화향기 은은한 봄기운 속에서 힘든 시기를 견뎌낼 힘과 지혜를 얻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