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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최재석 학술상

한국사회사학회가 주관하는 최재석 학술상 3회 시상식이 열렸다. 고려대학교 수암패컬티 하우스에서 학회 임원진, 유족대표를 포함한 운영위원들, 심사위원들이 모여 수상자들에게 시상하고 성과를 치하했다. 나는 이사장으로서 인사말을 하고 상패를 수여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느라 몸도 마음도 바빴다.

내실이 있고 학문적 내공도 만만찮지만 규모는 크지 않은 학회에서 이만한 학술상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자원이다. 고 최재석 교수의 유지가 뚜렷했고 또 그 뜻을 깊이 새겨 실행한 부인 이춘계 여사의 거액 쾌척이 이것을 가능케 했지만, 한국사회사학회를 이만큼 신뢰할만한 학술단체로 키운 여러 선학, 동학 들의 수고와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내심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김상준 교수가 본상을 받았다. 동서양 문명을 큰 틀에서 조감하면서 과거와 미래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야심찬 저작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결과다. 사실 동서양의 비교는 해묵은 주제이지만 정작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는 지적 탐구 수준은 그다지 깊다 하기 어려운 탓에 김교수의 노력이 더욱 기대되는 것이다. 우수박사학위논문으로 선정된 박해남 박사의 논문은 내가 지도했던 것이어서 더욱 고맙고 기뻤다. 1980년대 올림픽이라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전후하여 진행된 다양한 생활세계 재조정 노력을 사회정책으로 개념화한 신선한 시각이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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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친, 사비넷

오랜 대학생활을 하면서 주로 학술조직이나 연구관련 학회들에 참여해왔다. 사회학자로서 한국사회학회와 사회사 연구자로서 한국사회사학회는 내 오랜 학교생활과 거의 겹칠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낸 학술조직이다. 그래서일까 지금 나는 두 학회의 법인 이사장 직을 맡고 있다. 학회의 이사장이란 직책이 별 권한이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생 관여해온 학술조직을 그런 모양으로라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명예로운 일임은 분명하다.

정년을 하고 나니 새로운 모임에 참여할 기회가 생긴다. 포럼이란 이름을 지닌 모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정기적으로 만나 강연을 듣거나 정보를 공유하는 자리다. 형태에 따라 꽤 제도화가 된 규모있는 포럼도 있고 그동안 활동해온 개별적 인연을 바탕으로 가벼운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포럼도 있다. 개인적으로 어떤 포럼에는 수동적으로 참여하고 더이상 참여하지 않는 포럼도 있지만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포럼도 있다.

거창한 이름을 내걸지 않으면서 참여하게 되는 모임들도 있다. 최근 참여하게 된 사비넷과 사사친이 그런 사례다. 사비넷은 사회학과 비즈니스 네트워크란 말에서 짐작하듯 사회학과 동문들 가운데 비지니스 활동을 하는 분들 중심으로 이어져온 모임이다. 사회학과 동문회가 출범하고 주로 학계 바깥에서 중요한 활동을 하던 분들 중심으로 이 모임이 시작되었고 개인적으로는 그 출범과정을 지켜보면서 일부 뒷바라지를 했던 기억이 있다. 학교를 정년하자 김병용 회장께서 나도 초청해주어 참여하기 시작했다.

사사친은 사회사학회 친구들이란 말의 줄임말 격인데 한국사회사학회 활동에 깊이 참여해온 연구자들 가운데 이제 정년을 한 노학자들 중심의 친목모임이다. 사사친은 대체로 비슷한 연배의 학자들로 구성된 소규모 모임인 탓에 아직은 학술적인 주제나 학회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주를 이룬다. 반면 사비넷은 세대를 달리하는 다양한 연령층의 모임으로 골프를 통해 친목을 도모하면서 서로의 유대를 확인하는 모임이다.

지난 주말 사비넷의 모임이 있었고 나로선 처음으로 참여했다. 오랫동안 기업을 경영해온 선배도 있고 퇴직을 한 분도 있지만 대부분 다양한 영역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동문 후배와 제자들이었다. 골프라는 운동이 한편으로 높은 문턱이 될 수 도 있어 보이지만 역으로 그 운동이 지닌 특성이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묶어주고 또 정서적인 유대감을 강화하는 듯 했다. 학계 중심의 모임과는 그 색깔과 분위기가 다른, 독특한 정감과 적절한 자율성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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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의 독도 그림

8월 15일 77주년 광복절이다.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날로서 기미년 3.1 독립선언서에 쓰인대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이 확인된 날이다. 3년 뒤 대한민국 헌법에 기초한 제1공화국이 출범한 정부수립일이기도 하다. 이 날에 담긴 의미는 다중적이고 기념하는 내용도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어서 단일하진 않다.

3.1운동 이래 널리 공유된 함성은 ‘대한독립만세’였고 여운형은 ‘건국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임시정부의 대일투쟁조직은 ‘광복군’이었다. 그래서 독립, 광복, 건국, 자주 등의 개념이 늘 함께 한다. 우리는 이 날을 광복절로 기념하지만 범국민적 열성으로 건립된 기념관의 이름은 독립기념관이다. 독립이란 말에는 과거에 국가가 없었던 신생국의 이미지가 있고 광복이란 말은 이전 시대와의 질적 차별성을 드러내는데 한계가 있다. 신생이나 회복의 의미를 넘어서는 역사적 이중성, 즉 복구하면서도 극복하는 질적 전환을 드러낼 개념화가 절실하다. 동시에 분단으로 인한 미완의 한계, 남은 과제까지도 포함될 수 있는 개념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광복절 하루를 나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2주전 다녀온 독도를 그려보기로 했다. 풍랑으로 인해 상륙은 못했지만 망망 대해의 한가운데 의연한 자태로 서 있는 작은 섬의 모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 언젠가는 그 이미지를 표현해보리라 생각했었다. 지금도 한일간 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곳이지만 비바람, 풍랑, 고독, 정치 등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의연하게 지켜내는 당당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화선지 위에 검은 먹의 농담으로 찌푸린 하늘, 넘실대는 바다, 그 가운데 당당히 선 독도의 모습을 그려보며, 21세기 독립자주와 인생살이에서의 의연함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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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과 사회의 탄생

포스텍 융합문명연구원장 박상준 교수의 신작 [현대 한국인과 사회의 탄생]을 중심으로 한 세미나에 줌으로 참여했다. 흥미로운 주제인데다 박교수로부터 그 책을 증정받은 고마움도 있어 즐겁게 동참했다. 융합문명연구원을 설립한 초대원장 송호근 교수, 토론자로 온 권보드레 교수, 작가이자 사회학자인 정수복 박사도 볼 수 있어서 더욱 반가왔다.

한국에서의 사회 형성은 나도 관심을 가져온 주제다. 개념사와 사회사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전환기 역사를 해석하는데 미력이지만 애를 썼다. 유교적이고 자족적이었던 전통체제로부터 벗어나 낯선 시대에 직면한 한국인들에게 ‘사회’란 ‘문학’이나 ‘개인’ 못지 않게 새로운 현상이었고 그것은 현실보다 개념의 형태로 ‘다가올 미래’를 표상했다. 애국계몽운동기, 글쓰기를 담당한 식자층들이 이런 미래를 상상하고 새로이 등장한 매체가 그것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인직이 사회 개념을 ‘만세보’에 소개하고 이광수가 문학을 강조하며 청년들이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인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문제는 식민지라는 조건, 국가를 잃게 된 상황에서의 ‘새로운 미래’ 상상이 겪어야 하는 제약이었다. 사회, 문화, 개인은 국가라는 정치공동체를 전제함으로써 그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근대의 특징이다. 1910년 국가의 소멸은 식민지 하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개인과 사회, 문화를 어떻게 사고해야할지 새로운 곤경을 야기했다. 이 시기 등장한 민족범주는 혈연적이고 문화역사적인 공동체로서 국가를 대체하는 효율적인 주체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과 사회의 공간을 열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현대한국인의 탄생을 국가나 민족이 아닌 사회의 탄생과 연결시키고 그것을 문학의 장에서 확인하려는 발제자의 시각은 참신하다. 권보드레 교수도 민주주의의 문제를 소환한 것을 중요하게 평가했다. 20세기 한국의 지성사를 꿰는 화두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주목할 때 사회의 영역과 개인의 존재가 좀더 잘 부각될 수 있는 것도 분명하다. 어쩌면 민족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의 과도한 영향을 벗어날 때 문학이 미친 심대한 영향을 더욱 또렷이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종교의 문제가 결락된 것 아닌가는 질문이 청중에게서 제기되었다. 내 개인의 체험으로도 개인과 사회라는 말에 이끌린 바탕에는 기독교적 사유가 작용했음을 또렷하게 느낀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던 동학과 천도교의 영향도 20세기 초반에는 매우 강력했다. 실제로 개인의 존재, 그들의 자발적인 연대로 형성되는 사회를 강력히 옹호한 것은 정부도 민족도 아니었고 종교단체를 비롯한 민중의 결사체들이었다. 개인의 각성이 정치적 권리나 경제적 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 맞서는 종교적 윤리체계에서 비롯되었다는 막스 베버의 명제를 떠올렸다. 그런 점에서 문학과 종교는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세미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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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판의 댓가, 무능의 비용

외우 조태열 전 유엔대사가 27일 매일경제에 실린 컬럼에서 2018년 전격적으로 추진된 북미정상회담이 중국을 alert 시켜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만들었고 북중을 밀착시켜 결국 북한비핵화를 위한 국제협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돌이켜보면 2017년 당시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유엔 차원의 국제공조는 꽤 잘 작동했고 여러 제재가 합의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목을 끌었던 남북미 탑다운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난 후 오히려 북한 비핵화를 위한 국제공조는 더욱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남북간의 불신과 갈등이 해소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북한의 대남비방과 핵위협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이 역설적 상황을 직시하고 북한비핵화 전략구상 전반을 재검토하고 플랜B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조대사는 주문한다.

29일 아침엔 최근 혹서와 전력난의 전례없는 어려움을 겪는 유럽 현지의 위기가 결국 러시아 위험에 대한 전략적 판단미스에 기인한 것이란 컬럼을 읽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의 급격한 가스공급 축소는 유럽이 기후위기와 에너지 위기, 사회적 불안과 안보위기를 동시에 겪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가스 의존도가 50% 이상인 독일은 특히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치고 있는데 장차 환경오염이 심한 갈탄 화력까지 사용할 각오지만 장기적 전망은 불투명하다. [더컬럼니스트]의 컬럼은 이런 상황을 초래한 이유가 독일의 “과도한 친러시아 정책의 안일함”에 있다고 지적한다. 탈냉전 이래 러시아와의 지정학적 리스크, 전략적 위험성을 경시해온 결과라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정부가 북한에 대해 가졌던 기대와 탈냉전 후 독일이 러시아에 보인 대응을 같은 차원에서 취급할 순 없다. 하지만 그 기대가 좌절당한 현실 앞에서 그간의 전략구상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아야 할 상황 자체는 확실히 유사하다. 또 한국의 진보정부가 북한 정권과의 협력가능성을 강조할 때 늘 독일의 ‘접촉을 통한 변화’는 좋은 참조이자 선례이기도 했다. 독일은 탈냉전과정에서의 성공적인 통일과 유럽통합의 경험 위에서 신뢰와 통합의 힘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새롭게 변화시키리라 믿었을 듯 하다. 하지만 2022년 현재 한반도도 독일도 그간 견지해온 정책적 전망의 타당성이 흔들리고 그 바탕을 이룬 이론적 공감력도 크게 동요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누구도 원치않던 오늘의 현실은 정책적 오판의 아픈 댓가라 해야 할까? 타당한 정책이었는데 상대방의 배신이 빚은 어쩔 수 없는 결과일까? 대국주의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횡행하는 국제질서의 퇴행 탓일까? 탓할 대상 찾기가 능사는 아니지만 역설적 결과를 가져온 정책에 대한 냉정한 검토 없이는 오류를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우리의 현실판단과 정책형성 프로세스 전반을 전면적으로 성찰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하지만 새정부의 어슬픈 언행과 정치권의 구태를 보노라면 오판의 댓가 못지 않게 무능의 비용도 크게 치루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과학기술 영역에서 논의되는 “혁신”이 정작 절실히 필요한 곳은 오히려 정치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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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3, 石 돌 獨

독도가 석도임을 논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얻은 중요한 성과다. 1900년에 제정된 대한제국칙령 제41호에 의해 울릉도가 울도군으로 지정되면서 그 관할지역으로 울릉전도와 죽도, 그리고 석도가 적시되었다. 죽도가 어디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석도란 지명이 논란이다. 한국은 석도가 곧 독도이며 역사적으로 지녀온 영유권을 1900년 대한제국 칙령으로 재확인한 것으로 설명한다. 반면 일본은 이 석도가 현재의 관음도라고 주장하면서 독도의 한국영유권을 부인하는 근거로 삼으려 한다.

제한된 문서자료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현장의 공간감과 생태적 특징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영호 이사장의 주장에 모두 공감하면서 관음도, 죽도를 방문하고 이름과의 연관성을 비교했다. 죽도에는 산죽이 곳곳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죽도 또는 댓섬이란 이름이 그 생태적 특성에서 온 것임이 분명했다. 반면 관음도는 나무가 울창하고 경관도 수려해서 석도라는 이름과는 그 생태적 특성이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현지인들이 부른다는 섬목이라는 지명 역시 석도나 돌섬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반해 독도를 본 첫 이미지는 분명한 돌섬이었고 그것은 석도라는 이름값과 정확히 부합한다. 독도와 죽도, 관음도를 둘러본 후 나는 돌섬과 석도, 그리고 독도가 같은 지명이라는 설명이 타당하리라는 확신이 보다 강해졌다.

기록상 독도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1905년 일본 해군성 소속 군함 신고호의 항해일지인데 여기에는 ‘리앙쿠르토 암을 한인들은 독도라고 쓰고 본방인들은 줄여 량코도라고 부른다’라고 되어 있다. 1906년 울도 군수 심흥택이 오키도 관리들의 방문을 받고 그 결과를 보고한 기록이 ‘본군 소속 독도가…’라고 시작함으로써 한국 문헌 속에 독도가 처음 등장했다. 기술 내용으로 미루어 이전부터 독도라는 이름이 울릉도 주민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고 그것이 현지의 돌섬, 석도와 같다는 추정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한글학회의 지명조사나 신용하 교수 연구서에는 돌섬을 독섬 또는 석도로 표기하는 다른 사례들이 여럿 언급되어 있다. 울릉도에서 나고 자란 홍성근 박사의 상세한 지명 고찰 역시 그것을 뒷받침한다.

1900년대 초반은 일제의 조선병탄이 본격화되던 때이면서 동시에 갑오개혁 이후 표기법의 심대한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다. 많은 고유어들이 한자어로 바뀌고 그 과정에서 동음이의어가 혼용된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 돌섬이 석도로, 다시 독도로 달리 불리고 쓰이게 된 것도 현지의 우리말, 그것의 한자표기, 음차와 훈독의 뒤섞임이 초래한 결과다. 전라도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이 돌을 독이라 부르는 방언을 사용하여 멀리 있는 돌섬을 독섬이라 불렀고 그것을 관리가 표기할 때 어떤 경우는 석도로 또 다른 곳에서는 한자를 음차하여 독도로 기록했던 것이다.

인터넷에는 독도를 ‘외로운 섬’으로 부른 홀로 아리랑 노래 가사를 수정해야 한다는 글이 올라와 있다. ‘獨島’의 獨은 음차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냥 독이나 돌로 읽어야 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독도와 석도와 돌섬을 연결하는 논지와 부합하는 타당한 주장이다. 그렇지만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서 독도를 보면 외롭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으니 실효적 지배가 확실한 오늘 외로운 섬이라 부르는 문학적 표현을 막을 수도 없어 보인다. 어쨋든 돌섬, 석도가 독도임을 확증해주는 분명한 문서자료가 부재한다는 점은 아쉬운 현실인데 일본의 부당한 주장을 완전히 잠재줄 수 있을 명료한 문서가 발굴될 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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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2, 역사와 생태

독도는 특별한 곳이다. 꽤 많은 시간 파도의 시달림을 감내하면서 가야 하지만 상륙 여부가 불확실하며 접안에 성공해도 30분 내외 머물 뿐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독도를 찾는다. 어떤 이는 답사라 하고 어떤 이는 관광이라 부르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독도방문 자체가 정치외교적 논란이 되었지만 지금은 하루에도 수차례 꽤 큰 선박이 독도를 오가고 있고 인터넷에는 독도관광을 선전하는 글귀가 널려 있다.

누구나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독도는 특별한 곳이다. 유별난 애국자가 아니더라도 독도라는 말에서 빼앗긴 주권과 되찻은 주권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무명용사의 기념탑에서 민족을 가시적으로 경험한다고 주장했는데 독도는 그런 상징적 공간에 해당한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어민들의 위령비와 독도의용수비대의 활동사진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의 용사탑인 셈이다. 그래서 독도앞에서 누구나 민족감정을 느끼고 국가를 체험한다. 독도로의 여정은 어쩔 수 없이 역사기행이자 애국여행이다.

독도에서 국가를 떠올린다면 울릉도에선 새로운 자연을 만난다. 화산섬의 위용과 용암석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대단한 경이이고 바다를 끼고 있는 한반도 생태의 살아있는 공부시간이다. 울릉도 관광이 독도상징을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생태와 지질관광 역시 중시할 일이다. 독도와 울릉도의 이 절묘힌 조합은 역사와 자연, 정치와 생태, 답사와 관광이 공존하는 여행문화를 가능케 한다. 공들여 지은 전시관을 찾는 여행자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걱정을 들었는데 어쩌면 이런 균형이 좀더 필요함을 알려주는 사인일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또 버스 속에서 역사공부와 쟁점정리의 유익한 시간을 가진 것 못지 않게 울릉도와 독도의 지질적 특성,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고 감상한 시간 역시 더없이 소중했다. 독도와 울릉도, 울릉도와 독도가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굳이 어민들의 생활권 차원이나 영유권 문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의미있는 여행이 되기 위해서도 독도와 울릉도, 역사와 자연은 함께 있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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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1, 1947 & 2022

독도를 다녀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주관한 “일제침탈과 역사왜곡 인식제고를 위한 독도탐방” 에 참여한 것이다. 답사단은 명실상부 최고위 기관장,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재단의 이영호 이사장을 비롯하여 국사편찬위원회 김인걸 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안병우 원장, 독립기념관 한시준 관장, 중앙도서관 서혜란 관장, 인문지리학자 양보경 총장,고고학자 강현숙 교수, 한국근현대사 전문가 박찬승 교수와 박명림 교수가 함께 했다. 울릉도 출신이면서 독도연구가인 홍성근 박사가 안내와 설명을 맡아 세세한 현지의 상황까지 배우고 확인하는 고품격 답사여행이었다.

독도와 울릉도에 첫 조사단이 파견된 것은 해방 직후인 1947년이었다. 과도정부 민정장관이었던 안재홍의 후원 하에 조선산악회 주도로 국사관 관장 신석호, 진단학회장이자 국립민속박물관장 송석하, 언어학자 방종현 등이 포함된 63명의 대규모 조사단이었다. 역사, 문화, 민속, 언어, 생활실태 뿐 아니라 동식물과 지질광물에 걸친 광범위한 학술조사를 목표했는데 모든 여건이 미비했을 당시를 생각하면 그 규모와 열정이 놀랍다. 이들의 사명감을 바탕으로 독도연구자 1세대가 성장했고 독도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논란에 대응할 자산들이 준비될 수 있었으니 가히 독도연구의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7년은 또한 미국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독도를 두고 한국, 미국, 일본의 줄다리기가 시작된 해다. 미 국무부는 대일평화조약의 체결을 준비하면서 1947년 초안을 마련했는데 거기엔 리앙쿠르암 (독도)의 한국귀속이 분명히 적시되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과의 평화조약 체결과정에서 독도를 한국으로 반환하지 않기 위한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의 억지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에 있던 독도의 한국귀속이 최종안에 명기되지 않음으로써 논란이 계속될 빌미를 남겨 놓았다.

그로부터 75년이 지났다. 가난한 은둔의 나라는 어엿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학계의 연구 수준도 크게 발전했다. 스포츠와 음악, 영화 등 K-Culture의 파급력도 세계적이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권도 확장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독도여행에 나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부당한 독도영유권 주장은 계속되고 식민지 시대를 둘러싼 한일간 역사전쟁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이 어긋남의 일차적 원인이 일본의 우경화 탓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해법이 생길지는 모를 일이다. 향후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연구일까 더 세련된 외교일까 더 강한 국력일까? 더 강한 민족주의가 요청되는가 아니면 세계주의와 지역연대의 정신을 강화해야 할까? 홍박사는 1947년 이래 가장 권위있는 답사단이 아닌가 자찬하기도 했지만 그 때 이후 우리 역량은 얼마나 더 강해졌을까 곰곰 자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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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를 향한 에코백

작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기증했던 한글 병풍의 글을 활용해 제작한 에코백을 건네 받았다. 내 글씨가 이런 형태로도 도움될 수 있다니 기쁘다. 푸른 색 바탕에 흰 글씨 색채 대비가 청명한 하늘의 하얀 구름마냥 상큼하다. 네모꼴로 발췌된 글씨를 배치해 전통적 전각작품을 떠올리게 한 디자인도 산뜻한 느낌을 더한다. 화선지의 먹과 붓의 느낌이 사라진 대신 글의 내용은 더욱 또렷히 부각된다. “정부의 정치적 경제적 조정에만 기초를 둔 평화는 세계국민들의 일치되고 영속적이고 성실한 지지를 확보할 수 없다. 인류의 지적 도덕적 연대 위에 평화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패권경쟁이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세계는 자국주의와 혐오의 감정정치로 곳곳에서 균열한다. 자기 죽음을 염려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할 정도로 급진전하는 과학문명이 인류공동체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구축할 수 있을지 여전히 논란 중이다. 동북아는 상호소통과 문화교류보다 국가주의와 신냉전의 암운이 짙어지고 한반도 긴장은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국력과 역동적 민주주의를 자랑하지만 낡은 남탓정치와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바람잘 날 없어 도덕적 연대를 말하기조차 민망할 지경이다.

인류의 지적 도덕적 유대라는 유네스코의 화두는 실현가능한 꿈인가? 유네스코는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라는 긴 이름에서 보듯 교육, 과학, 예술, 문화의 힘을 강조해 온 국제기구다. 출범 당시부터 정부관료나 기업가보다 교육자, 과학자, 예술가, 문화인의 보편적 정신을 중시하는 지향이 강했다. 실제로 지금도 인류적 문화다양성과 지식교류, 과학적 접근과 생태적 사유의 종합을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하지만 자국주의와 이익추구의 힘이 여전한 오늘, 과연 과학자와 예술가, 교사와 문화인이 국가의 경계를 넘어 인류공동체의 연대를 주도할 주체가 될 것이란 확신을 갖기는 쉽지 않다. 과학과 교육, 예술과 문화의 힘이 인류적 차원의 지적 권위와 도덕적 유대를 구축하는 시대가 올 것을 기대해도 좋을까? 상큼한 디자인의 에코백을 보면서 해 보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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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복 지성사 북토크

작가이자 사회학자인 정수복 박사의 역저 [한국사회학의 지성사] 4권 북토크가 군산의 인문학까페 정담에서 있었다. 김백영 교수가 사회를 보고 저자의 발제를 들은 후 나와 김민환 교수, 최민석 교수가 차례로 논평을 하고 이후 청중들과 대화하는 방식이었다. 참석자 모두 앞선 군산 일대의 답사로 피곤할수도 있었을텐데 모두들 진지하게 3시간 가까운 시간 대화를 주고 받았다. 오랜 건물의 분위기가 더해져 가히 지식의 향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즐겁고 뜻깊은 자리였다.

책 1-4권은 각각 ‘한국사회학과 세계사회학’, ‘아카데미 사회학의 계보학’, ‘비판사회학의 계보학’, ‘역사사회학의 계보학’이란 제목을 달았다. 학사 대신 지성사라고 한 데서 한국사회학을 분과학차원을 넘어 지식의 형성과 변동이려는 맥락에서 살펴보려는 문제의식이 느껴진다. 실제로 이 책은 사회학적 사유나 지식의 전개가 개인의 성장배경과 활동영역, 시대의 사회정치적 조건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계보학이란 어휘도 지식이 다양한 시대적 조건과 여러 사람들의 복합적 상호작용 속에서 구성된 것임을 강조하려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아직 생존해 있는 분들을 포함하는 이런 유형의 저설은 늘 이런저런 학문외적 논란이 따르기 마련이어서 선뜻 추진하기가 쉽지 않다. 저자 역시 연구대상 인물을 설정하는데 고민이 컸을 법하다. 저자는 섬세하게 균형을 추구하면서도 서울과 서울대학 중심이라는 한국사회의 지적 사회적 편중성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저자 자신의 경험과 무관치 않을 부분에 대해서도 생경한 회한이나 감정적 평가가 아닌 극도의 절제와 자기겸양을 견지하는 글쓰기 격조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경험과 정서조차도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조건 속에서 상대화시킬 줄 아는 고도의 지적 자제력이 돋보이는 책이라 할만하다.

이 책을 일별하고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학계에도 적용된다는 생각을 했다. 학문공동체 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많은 개별적 구슬들을 발굴하고 연결시키며 체계적으로 꿰어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단순한 과거회고가 그 몫을 할 수는 없는 일. 그런 흩어진 구슬들, 개인들의 작은 작업들을 한데 꿰어 큰 지식으로 만드는 학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한국사회학은 정수복이란 학자를 만나고 그가 쓴 이 책을 통해서 곳곳에 흩어져 있던 구슬들로 멋진 작품을 만들게 된 셈이다. 이 작업을 통해 아카데미 사회학, 비판사회학, 역사사회학을 한국사회학의 세 영역으로 구획한 것도 향후 의미있는 지적 지형도가 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