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vities

독도 3, 石 돌 獨

독도가 석도임을 논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얻은 중요한 성과다. 1900년에 제정된 대한제국칙령 제41호에 의해 울릉도가 울도군으로 지정되면서 그 관할지역으로 울릉전도와 죽도, 그리고 석도가 적시되었다. 죽도가 어디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석도란 지명이 논란이다. 한국은 석도가 곧 독도이며 역사적으로 지녀온 영유권을 1900년 대한제국 칙령으로 재확인한 것으로 설명한다. 반면 일본은 이 석도가 현재의 관음도라고 주장하면서 독도의 한국영유권을 부인하는 근거로 삼으려 한다.

제한된 문서자료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현장의 공간감과 생태적 특징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영호 이사장의 주장에 모두 공감하면서 관음도, 죽도를 방문하고 이름과의 연관성을 비교했다. 죽도에는 산죽이 곳곳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죽도 또는 댓섬이란 이름이 그 생태적 특성에서 온 것임이 분명했다. 반면 관음도는 나무가 울창하고 경관도 수려해서 석도라는 이름과는 그 생태적 특성이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현지인들이 부른다는 섬목이라는 지명 역시 석도나 돌섬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반해 독도를 본 첫 이미지는 분명한 돌섬이었고 그것은 석도라는 이름값과 정확히 부합한다. 독도와 죽도, 관음도를 둘러본 후 나는 돌섬과 석도, 그리고 독도가 같은 지명이라는 설명이 타당하리라는 확신이 보다 강해졌다.

기록상 독도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1905년 일본 해군성 소속 군함 신고호의 항해일지인데 여기에는 ‘리앙쿠르토 암을 한인들은 독도라고 쓰고 본방인들은 줄여 량코도라고 부른다’라고 되어 있다. 1906년 울도 군수 심흥택이 오키도 관리들의 방문을 받고 그 결과를 보고한 기록이 ‘본군 소속 독도가…’라고 시작함으로써 한국 문헌 속에 독도가 처음 등장했다. 기술 내용으로 미루어 이전부터 독도라는 이름이 울릉도 주민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고 그것이 현지의 돌섬, 석도와 같다는 추정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한글학회의 지명조사나 신용하 교수 연구서에는 돌섬을 독섬 또는 석도로 표기하는 다른 사례들이 여럿 언급되어 있다. 울릉도에서 나고 자란 홍성근 박사의 상세한 지명 고찰 역시 그것을 뒷받침한다.

1900년대 초반은 일제의 조선병탄이 본격화되던 때이면서 동시에 갑오개혁 이후 표기법의 심대한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다. 많은 고유어들이 한자어로 바뀌고 그 과정에서 동음이의어가 혼용된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 돌섬이 석도로, 다시 독도로 달리 불리고 쓰이게 된 것도 현지의 우리말, 그것의 한자표기, 음차와 훈독의 뒤섞임이 초래한 결과다. 전라도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이 돌을 독이라 부르는 방언을 사용하여 멀리 있는 돌섬을 독섬이라 불렀고 그것을 관리가 표기할 때 어떤 경우는 석도로 또 다른 곳에서는 한자를 음차하여 독도로 기록했던 것이다.

인터넷에는 독도를 ‘외로운 섬’으로 부른 홀로 아리랑 노래 가사를 수정해야 한다는 글이 올라와 있다. ‘獨島’의 獨은 음차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냥 독이나 돌로 읽어야 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독도와 석도와 돌섬을 연결하는 논지와 부합하는 타당한 주장이다. 그렇지만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서 독도를 보면 외롭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으니 실효적 지배가 확실한 오늘 외로운 섬이라 부르는 문학적 표현을 막을 수도 없어 보인다. 어쨋든 돌섬, 석도가 독도임을 확증해주는 분명한 문서자료가 부재한다는 점은 아쉬운 현실인데 일본의 부당한 주장을 완전히 잠재줄 수 있을 명료한 문서가 발굴될 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