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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1, 1947 & 2022

독도를 다녀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주관한 “일제침탈과 역사왜곡 인식제고를 위한 독도탐방” 에 참여한 것이다. 답사단은 명실상부 최고위 기관장,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재단의 이영호 이사장을 비롯하여 국사편찬위원회 김인걸 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안병우 원장, 독립기념관 한시준 관장, 중앙도서관 서혜란 관장, 인문지리학자 양보경 총장,고고학자 강현숙 교수, 한국근현대사 전문가 박찬승 교수와 박명림 교수가 함께 했다. 울릉도 출신이면서 독도연구가인 홍성근 박사가 안내와 설명을 맡아 세세한 현지의 상황까지 배우고 확인하는 고품격 답사여행이었다.

독도와 울릉도에 첫 조사단이 파견된 것은 해방 직후인 1947년이었다. 과도정부 민정장관이었던 안재홍의 후원 하에 조선산악회 주도로 국사관 관장 신석호, 진단학회장이자 국립민속박물관장 송석하, 언어학자 방종현 등이 포함된 63명의 대규모 조사단이었다. 역사, 문화, 민속, 언어, 생활실태 뿐 아니라 동식물과 지질광물에 걸친 광범위한 학술조사를 목표했는데 모든 여건이 미비했을 당시를 생각하면 그 규모와 열정이 놀랍다. 이들의 사명감을 바탕으로 독도연구자 1세대가 성장했고 독도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논란에 대응할 자산들이 준비될 수 있었으니 가히 독도연구의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7년은 또한 미국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독도를 두고 한국, 미국, 일본의 줄다리기가 시작된 해다. 미 국무부는 대일평화조약의 체결을 준비하면서 1947년 초안을 마련했는데 거기엔 리앙쿠르암 (독도)의 한국귀속이 분명히 적시되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과의 평화조약 체결과정에서 독도를 한국으로 반환하지 않기 위한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의 억지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에 있던 독도의 한국귀속이 최종안에 명기되지 않음으로써 논란이 계속될 빌미를 남겨 놓았다.

그로부터 75년이 지났다. 가난한 은둔의 나라는 어엿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학계의 연구 수준도 크게 발전했다. 스포츠와 음악, 영화 등 K-Culture의 파급력도 세계적이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권도 확장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독도여행에 나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부당한 독도영유권 주장은 계속되고 식민지 시대를 둘러싼 한일간 역사전쟁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이 어긋남의 일차적 원인이 일본의 우경화 탓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해법이 생길지는 모를 일이다. 향후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연구일까 더 세련된 외교일까 더 강한 국력일까? 더 강한 민족주의가 요청되는가 아니면 세계주의와 지역연대의 정신을 강화해야 할까? 홍박사는 1947년 이래 가장 권위있는 답사단이 아닌가 자찬하기도 했지만 그 때 이후 우리 역량은 얼마나 더 강해졌을까 곰곰 자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