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책 속에 담긴 학연

신복룡 교수께서 보내주신 [전봉준 평전]을 읽었다. 영웅이라 할만한 인물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영웅주의에 빠지지 않고 평범한 민중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저자 스스로 원했던 사람냄새 나는 정치전기학의 한 사례라 함직하다. 오래 전에 출간했던 자신의 책을 꼼꼼히 다시 보완하고 새로이 밝혀진 자료와 내용들을 보충하면서 도움을 입은 후학들과의 학연에 감사함을 밝힌 것 참 아름답고 귀한 모습이다.

적확한 말, 살아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학자에게 필수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 점을 잊고 지낸다. 이 점에서 최근 삼국지와 플루타르크 영웅전 번역본을 연이어 출간했고 성경 신구약을 새롭게 다듬은 작업까지 마무리하신 신교수님 열정은 놀랍다. 과거에도 구한말 주요한 책들을 꼼꼼히 번역하면서 잘못 알려진 사실과 상식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진력하셨는데 그런 정성과 집념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이 책에서도 본다. 수십년간 몸처럼 익숙해졌을 자신의 글투를 새롭게 고쳐쓰는 것은 웬만한 성찰과 노력 없이는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 나와의 인연을 언급한 부분을 읽으며 전주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나보다 앞서 동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여러분들을 만나 이곳 저곳 답사하며 이야기 나누었던 행복한 인연들에 감사한다. 박맹수 총장, 이종민 교수, 신순철 교수, 이진영 교수, 최현식 원장, 표영삼 선생, 김은정 기자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분들의 도움을 입었다. 서울로 올라온 이후 자연스레 내 연구관심도 만나는 사람도 달라졌지만 언젠가 나도 그때의 학연들을 떠올리며 지난 글을 고쳐 쓸 때가 올 지 모르겠다. 그러려면 저 열정과 수고, 기억력과 성실함이 내게도 있어야 할텐데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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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통령 선거와 ‘민심’

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비호감 선거라는 말들이 많았고 실제로 지지할 후보가 마땅찮다는 견해가 적지 않았던 것에 비해 선거에 대한 관심과 투표열은 매우 높았다. 사전선거에서의 관리소홀로 잡음이 있었고 1%도 채 되지 않는 근소한 표차로 승패가 갈라졌지만 패자는 깨끗이 승복하고 선거불복 운운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코로나 위험 속에서도 길게 줄 선 유권자들의 모습과 결과를 수용하고 격려와 협치를 당부하는 말들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함과 공고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 응어리진 대립과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이 넘쳐나 후유증과 상처가 만만치 않다. 내가 폐친을 맺고 있는 SNS 상에는 환호와 기대를 표하는 글도 있지만 분노와 좌절의 목소리가 훨씬 많고 그 강도도 심하다. 서로 다른 글들 속에 담겨진 감정의 색깔과 농도는 너무 다르고 날이 서 있어서 저토록 불안한 감정의 힘이 어디서 언제 충돌할지 걱정스럽다. 진보와 보수, 노년과 청년, 남성과 여성, 영남과 호남 사이에 정서적 대립과 균열이 커진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터한 전국적 촛불시위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현 문재인 대통령을 선출하고 민주당을 여당으로 만들어준 거대한 민심이 어떻게 불과 4년만에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힘으로 바뀌었는가? 이 질문은 이번 대선의 분석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깊이 고찰해야 할 쟁점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를 비롯한 여러 잘잘못과 함께 권력주도세력의 내로남불, 정파적 태도가 불러온 정서적 반감이 그에 못지 않은 요인이 되었음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바다. 민심이란 살아있고 늘 변화하지만 반드시 합리적인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한 이상 선거동학에 작동하는 합리적 선택과 비합리적 정동의 상호성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저야 할 듯 싶다. 우리 정치와 지성계의 담론은 너무 논리와 말에 의존하고 있어 마음과 감정의 흐름을 제대로 포착하는데 한계가 커 보인다. 이성과 감성, 논리와 정서를 아우르는 품격, 지혜, 공감이 더 요청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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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만에 다시 핀 梅巖同人 난향

1년 전 정년기념 서예전을 열었을 때 제자들로부터 받은 난이 새 봄을 맞아 우아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꽃대가 올라온 것은 두어주 전인데 이제 멋진 꽃잎이 하나 둘 벌어지면서 은은한 난향으로 온 거실을 채운다. 온도 변화가 크지 않은 집안에서도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정확히 알고 반응하는 식물의 예지에 새삼 놀란다.

코로나 상황으로 모든 것이 어려웠던 때, ‘以文會友’ 서예전을 열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제자들에게 줄 글씨를 준비하면서 得天下英才 하여 맺었던 학연들을 되돌아보고 함께 기리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매화가 피던 계절이라 그 글씨를 받을 제자들이 ‘매암동인’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나누었던 정담의 시간은 고맙고도 감동적인 우정의 ‘詩會’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 때 선물로 받은 난화분에 달려 있던 리본은 지금도 그대로 꽂혀 있다. 내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우리 선생님 행복하세요 제자 일동’이라고 쓰인 글귀를 유심히 보는 모습들도 종종 본다. GIST 에서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고 새로운 인연을 맺어가는 것도 참 귀하지만 서울대 재직 시절 제자들과 맺었던 지적 교분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력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다시 매화 피는 계절에 새로이 난향을 맡으니 지난 일년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모두들 건강하고 잘 지내기를 마음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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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 – 가르침과 희망

2022년도 1학기 개강을 했다. 코로나 3년을 맞아 여전히 정상적인 캠퍼스 생활은 요원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느낌은 새롭다. 이제는 비대면 화상강의가 일상이 되었다. 처음의 불편함은 많이 가시고 나름의 편리함과 유용함에 적응되어 가는 느낌이다. 학생들은 더더욱 그러하리란 생각이 든다.

이번 학기에는 [꿈의 사회학]과 [현대사회사상의 흐름] 두 강좌를 개설했다. 작년에는 수강인원이 10여명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두 과목 모두 정원 30명을 채웠다. 꿈의 사회학은 추가신청으로 부탁하는 학생이 상당히 많아 적절한 선에서 중단하느라 고생을 했다. 내 과목에 대한 관심이 크니 고마운 마음이지만 그만큼 부담이기도 하다.

간디학교 교가인 ‘꿈꾸지 않으면’의 한 귀절을 떠올리며 새 학기를 시작한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 그렇다면 학교는 꿈을 꾸고 희망을 만들어가는 공간인 셈인데 과연 내 수업이 이에 부합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애쓴다면 크던 적던 나름의 열매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화이팅을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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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문 횡단의 다리”

신한대 탈경계문명연구원 (원장 최완규)과 연천군이 2월 17일 공동으로 개최한 [경제횡단연합과 한반도] 국제학술회의에서 기조강연을 했다. 급하게 부탁을 받아 준비하기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주제가 흥미로왔고 낮익은 후배 제자들이 참여하는 회의여서 수락을 했다.

발제문을 준비하면서 [남북경계선의 사회학] 책을 출간한 10여년 전 생각을 떠올렸다. 그 당시 내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남북한 사이에 형성된 다양한 경계들의 성격과 변화, 그 다중적 기능을 주목하는 사회문화적 연구의 필요성이었다. 휴전선 일대의 군사분계선은 물론이고 체제, 이념, 문화, 의식, 기호와 감정의 영역에까지 드리운 다양한 경계의 존재와 그 동학을 무시한 채 민족동일성이나 체제중심적 접근만으로 남북관계를 논의하는 것은 한계가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맥락에서 게오르그 짐멜이 말했던 경계의 양면적 기능을 주목했다. 분단 70년을 지나면서 다양한 경계선이 형성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현상일 뿐 아니라 그 경계가 반드시 단절과 분리만 가져오지 않을 가능성에 주목하자는 뜻이었다. 나는 짐멜의 “다리와 문”이라는 건축학적 비유를 차용하여 경계가 양쪽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접경이 될 수 있음을 언급했다. 당시는 아직 개성공단이 가동중이었고 남북교류의 동력도 곳곳에서 확인되던 시점이어서 경계횡단의 힘이 점차 커지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그때로부터도 크게 달라졌다. 코로나 상황과 미중대립의 격화가 큰 변수지만 남북간 단절이 더욱 심해진 것도 큰 변화다. 2018년 이후 한반도 평화를 향한 큰 움직임이 1년 여 지속되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휴전선의 담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개성공단도 폐쇄되었고 다시 열릴 전망도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분리와 접촉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 경계가 있는 곳에 횡단의 가능성도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그 가능성을 구체화하려면 우리사회 전 영역을 나누고 있는 분할과 대립의 경계들을 넘어설 경계횡단의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다. 탈경계가 시대적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흐름과 같이 가면서 그런 역량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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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의 법인화와 자율성

한국사회사학회 총회가 2월 16일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에서 개최되었다. 법인화된 사단법인의 이사회와 총회, 그리고 연구단체 학회의 총회를 연속했다. 코로나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긴 어려웠지만 힘든 걸음을 해준 이사진과 학회 운영진, 그리고 온라인으로 참석한 곳곳의 회원들 덕분에 원만하게 잘 마무리되었다.

법인화로 인해 학회의 운영방식이 체계화하고 외부기부를 받아 규모가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커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연구자들간의 자발적이고 정서적인 신뢰와 유대에 기초해서 발전되어온 학회 본연의 성격과는 잘 맞지 않은 행정적 절차와 그로 인한 부담이 커질 우려도 상존한다. 학회 조직을 합리화하면서 학문공동체의 자율적 역동성을 살리는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지속적인 과제라 하겠다.

한국사회사학회가 비교적 그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법인화 초기의 궂은 일을 잘 감당해준 은기수 회장, 김인수 운영위원장 수고가 컸지만 오랫동안 학회의 주축이 되었던 분들이 법인의 이사진으로 역할해 준 도움도 크다. 작년 8월에 정년을 하신 황경숙 교수와 금년 2월에 정년을 하는 김필동 교수가 법인 이사로서 늘 참석하여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이미 정년을 하신 이창기, 정진성 교수는 물론이고 제1회 최재석 학술상을 받은 강인철 교수도 이사로서 늘 도움을 주셨다. 장기적으로 학회라는 자발적 연구조직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학문세대간에 우애공동체 같은 요소가 필수적이지 않나 생각된다.

이번 학회의 총회에서는 김백영 교수가 새 회장에 만장일치로 선임되었고 부회장엔 정준영 교수와 김원 교수, 편집위원장엔 채오병 교수, 운영위원장에 조정우 교수, 학술위원장에 김재형 교수가 위촉되었다. 바쁜 가운데 학회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후배 교수들의 열정이 고마왔다. 개별 연구자들에게 가해지는 대학당국, 연구재단의 업적주의와 경쟁주의는 더 강화되고 ‘사회사’ 영역에 대한 젊은 세대의 기대와 생각도 달라지고 있는 가운데 지식창출이라는 대의에 자발적으로 헌신할 다음세대와 새로운 아젠다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쉽지 않은 숙제다. 새 회장단이 그 역할을 잘 감당해주리라는 기대로 가뿐한 마음으로 세종행 기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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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SDGs와 북한의 변화

유엔이 추구하고 있는 지속가능발목표 (SDGs)에 대한 북한의 반응과 변화에 대한 발표를 들었다. 통일연구원 최규빈 박사가 한반도평화연구원 세미나에서 발제한 것인데 요지는 지난 10여년간 북한 내부에서 SDGs에 대한 국제사회의 흐름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유의미한 대응과 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작년 7월 자신들의 SDGs 추전상황에 대한 자발적국가검토보고서 (VNR) 를 유엔에 제출함으로써 그 의지를 과시했다.

이 VNR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SDGs 이행을 위해 17개 목표, 95개 세부목표, 132개의 지표를 제시하고 전국 단위에 조정, 평가, 모니터링을 할 수 있는 제반여건을 마련했다. 또한 인구•경제성장, 자연재해•식량문제, 보건•위생, 기후 변화 대응 등 지표별로 북한의 현황과 한계, 향후 추진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필요한 영역에서 양자 및 다자 협력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VNR 보고서에 대해 대북협력과 개발에 참여해온 국내외의 민간단체들이 깊은 관심을 보인 바 있다.

토론에서 이런 북한의 대응의 진정성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제재 국면을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 조치일 가능성은 없는지, 이것을 어느 수준에서 얼마나 책임감 있게 추진하는지, 지표산정의 객관성을 담보할 자료가 제시되는지 등 여러 쟁점들이 논의되었다. 발제자는 북한이 SGDs의 가치를 북한의 국가목표와 갈등하지 않도록 일정한 변형을 하고 있지만 적지 않은 개발도상국에서도 보이는 그런 반응이 진정성을 부인할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북한의 여건과 그들 체제내에서 수용가능한 항목들을 중심으로 제한적이긴 하지만 국제사회의 담론과 흐름을 수용하려는 기조 자체는 의미가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내가 원장으로 있었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연변대학의 협력으로 어렵사리 개최할 수 있었던 김일성종합대학과의 심포지엄 경험도 토론에서 잠시 논의되었다. 나는 첫 모임에서 김일성대학 교수들이 자신들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글로벌한 수준에 맞춘 종합적인 발전계획을 이야기하던 모습과, 그 다음 모임에서 오히려 그런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모습이 위축되어 놀랐던 경험을 회고하면서 각 영역의 자발적 역량강화와 주체적인 성장을 수반하지 못한 채 일방적 정부목표로 SDGs의 추진이 이루어지는 데서 오는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북한의 변화를 새로운 맥락에서 접근해보는 뜻깊은 세미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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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명시대의 인문학’

2월 10일 정책기획위원회가 주관한 세미나의 지정토론자로 초청을 받아 참여했다. ‘신문명시대의 인문학 역할’이라는 다소 광범위한 주제로 두 분이 발제를 하고 세 명이 패널로 참여하는 전문가 워크샵 형식이었다. 작년 대우학술재단의 발표나 GIST 문명강의의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는 주제여서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

이욱연 교수는 인문학의 역할을 보다 강화하고 심화시키기 위한 대학운영, 커리큘럼, 학사행정 상의 여러 개혁안들을 발표했다. 이교수는 인문학의 핵심을 인간의 주체성과 성찰성을 함양하는 기능에서 찾았고 그 역할은 기술문명이 고도화되는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하리라고 전망했다. 독립연구자인 이병헌 박사는 대학 교육 차원이 아닌, 인문정신이라 할 종합적 사유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독창적인 개념들을 구사하면서 문명전환의 큰 흐름을 강조한 이 박사 발제의 핵심은 인간과 자연, 인공과 기계가 융합하고 뒤섞이는 신문명의 시대에 필요한 지혜는 이전의 분과학을 넘어선 총체적인 문명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대학의 인문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점점 더 대학 내부의 인문학중심주의는 한계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좌장인 백영서 교수가 농반 진반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학을 떠나면 대학의 중요성을 낮게 보는 경향이 생기는 것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학 자체도 신문명 전환의 큰 흐름에서 비켜설 수 없음은 분명하다. 대학을 넘어 문화 일반, 생활세계 전반에 필요한 인문정신의 내용과 형식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런 문제에 대한 정부의 간여는 어디까지여야 할끼? 이에 대한 대답찾기가 곧 새로운 시대의 인문학이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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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음식점의 AI 로봇

30여년 전 간간히 들리던 화산의 작은 음식점을 찾아 나섰다. 당시 거주하던 전주에서 고향 안의를 방문할 때면 으례 진안, 장계를 거쳐 육십령 고개를 넘었다. 돌아오면서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내려오면 허름하지만 정겨운 순두부집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서울로 직장을 옮긴 이후 한번도 가 보지 못했는데 모처럼 기회를 만든 것이다.

가는 길이 고속화되고 새로 지은 큰 식당과 엄청난 넓이의 대형 주차장으로 여기가 내가 찾던 곳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낡은 마당이 있던 기와집, 좁은 방들로 이어지던 식당, 두부를 만들고 오가는 손길들을 바라보던 풍경은 머리 속에만 남아있는 기억이었다. 주변은 예나 크게 달라진 바 없는데 식당만 대형화한 변화가 낯설게 다가왔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음식 배달 로봇의 등장이었다. 주문한 도토리묵을 얹은 자그만 로봇이 테이블 옆에와서 파란 표지등을 깜박였다. 옆에 있던 손님이 음식을 꺼내고 ‘가라’고 말하라 가르쳐준다. 수고했다 가라고 하니 꾸벅 뒤돌아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한다. 시골 한적한 음식점에 찾아와 글로만 접하던 변화의 한 단면을 실감있게 확인한다. 30여년의 시간이 빚어낸 다이나믹 코리아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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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국립수목원

설날 연휴 첫날인 1일에 세종 수목원을 관람했다. 규모가 아주 크진 않았지만 매우 잘 디자인되고 또 깔끔하게 관리되는 전사관이란 인상을 받았다. 지중해 및 열대수목들 중에는 처음보는 것도 여럿이었고 크고 작은 식물 하나 하나에서 풍기는 생기가 신선했다 . 가까이에 이처럼 잘 꾸며진 수목원이 있다는 것에 놀라고 또 반가왔다.

연말 연시를 염두에 둔 전시장과 새해 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야외에 특별 공간을 만든 것도 좋았다. 다른 수목원을 들렀을 때에 비해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요즘 세대들의 취향을 고려한 듯한 배치가 눈에 띠었다. 포토존이라 할만한 장소가 곳곳에 있고 실제 식물과 여러 보조물 들의 색감과 디자인이 예쁘고 정겨웠다.

이제 전시는 종합적 문화공간을 지향하는 것이 대세다. 그 흐름을 박물관, 전시관, 수목원, 도서관이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정보, 관람, 자료, 지식에 더하여 경험, 오락, 촬영, 참여의 기능이 더해진다. 아마 메타버스의 진전과 함께 디지털 융합도 가속화될 것이다. 지방마다 이런 문화공간들이 세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