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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공동체성 세미나

공동체론에 대한 연구모임에서 성균관대 권철 교수의 프랑스 종교단체 법제에 관한 발제를 들었다. 종교는 오래된 공동체의 하나이지만 근대 이후 그 법적 사회적 지위는 사회마다 또 시대마다 달라져왔다. 근대화를 탈종교화와 동일시하는 견해가 많을 정도로 종교의 우월한 지위가 오늘날은 크게 약화되어 최소한 공적으로는 특권적인 위상을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회단체와는 달리 종교는 그 역사가 오래고 신성한 가치를 향한 신자들의 전적 헌신에 기초한 공동체인만큼 관습적인 자율성과 법적 통제가 충돌을 빚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교회나 성당, 사찰 경내에 공적 이유로 경찰이 들어가는 것조차 큰 반발을 불러오는 것을 지금도 종종 보고 있다. 특히 종교국가가 아니지만 불교, 기독교, 천주교가 각기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점하는 다종교사회 한국에서 이들 종교의 공동체적 속성이 어떻게 유지되고 변화하는지는 흥미롭고 중요한 주제다.

프랑스는 근대사회를 연 최초의 국가이자 전형적인 사회로 알려져왔다. 특히 프랑스혁명은 네이션에 입각한 근대국가주의를 천명하고 카톨릭이 지녀온 오랜 권한을 국가로 귀속시킴으로써 이후 역사과정의 한 모델이 되었다. 이번 발표에서 프랑스혁명 이후 공화파는 국가와 개인 사이에 어떤 중간집단의 특수한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 원칙을 강력히 고수했음을 확인했다. 구체제와의 대결에서 종교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중대한 비중을 점했음을 알게 되었다.

발제를 들으면서 에밀 뒤르켐이 계속 생각났다. 그는 종교가 사라지는 시대에 종교적인 것이 어떻게 지속되는가를 물었고 그것이 결국 근대국가의 시민종교로 나타날 것이라 예상했다. 국가가 도덕공동체가 되기를 바란 그의 가치관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종교와 국가가 단순한 대립관계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고찰이기도 하다. 법적인 시각과 사회학적 관점의 접점과 차이를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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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정치의 시작?

’20대 대선과 한국사회’란 주제의 발표를 부탁받았다. 그것도 대선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3월 11일 조찬모임에서다. 대통령 선거 자체가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이해를 결집시키는 큰 이벤트이고 그 결과가 많은 정책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지만 특히 이번 대선에 쏠린 시선은 놀라울 정도다. 사회의 여러 쟁점들을 진지하게 토론하는 지혜포럼에서 이 주제를 선정하고 발제를 요청했는데 생각을 정리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공동의 화두를 던지는 수준의 발표를 하는 것으로 수락했다.

결과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화두를 정리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결국 선거일까지의 과정에서 표출된 여러 현상들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특히 1 ) 많은 논란에도 강한 정권교체론이 지속된 이유 2) 세대변수, 특히 젊은 세대의 성향이 부각된 이유 3) 이대남, 이대녀 논란에서 드러난 젠더이슈의 정치화 4) 진보와 보수 진영의 대립이 정서적 균열과 집단감정에 의존하는 경향 5) 비호감선거라는 평가에도 높은 투표율을 보인 까닭을 중심으로 검토하면서 대선 결과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변화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채 1%도 되지 않는 표차로 야당의 윤석렬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새벽에 확인하고, 출구조사 분석에 기초한 언론기사를 살펴본 후 핸드폰의 SNS 글들도 잠시 훑어보았다. 언론은 야당의 신승은 부동산정책실패와 내로남불 정치에 대한 정권교체론에 의한 것임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이대녀의 정치적 결집이 나타났다는 점에 근거하여 이준석 류의 젠더 갈라치기가 성공할 수 없었음을 지적한 글이 눈에 띠었다. SNS에서는 예상대로 극단적으로 다른 감정들이 생경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어 당분간 저 후유증이 정치영역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에도 오래 가겠구나 싶었다.

이전의 대선과는 달리 정책평가보다 혐오와 분노가 집단동학의 주요한 자원으로 등장한 것, 그것을 의도적으로 동원하고 소비하며 증폭시키는 기술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이 마련된 것, 그리하여 옳바름을 둘러싼 공정한 경쟁이나 소통가능한 정책싸움의 장으로부터 노골적인 피아구분과 무조건적인 팬덤정서에 바탕한 감정정치로 퇴행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사실 감정의 문제는 정치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 보여지는데 개인이나 집단이나 감정동학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온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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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꽃을 저녁에 줍다

지천에 꽃이다. 봄에 이렇게 많은 꽃이 피는 줄 정말 몰랐다. 모두의 눈을 끌면서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매화, 목련, 개나리, 벗꽃, 진달래는 그들 스스로 자태를 뽐내지만 몸을 굽혀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띠지도 않을 작은 풀꽃들도 너무 많다. 명자나무 꽃이 피는가 했더니 이제 집앞 가로수의 꽃사과가 그림같이 화사하다.

매일 달라지는 꽃나무들을 보면서 루쉰의 ‘아침의 꽃을 저녁에 줍다’는 산문집을 떠올린다. 수년전 이욱연 교수가 번역한 책을 보내와 잠시 본 적이 있고 동료 권현지 교수가 이 글을 좋아해 작품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최근 유난히 이 말이 와닿는 것은 새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즐기다가 어느새 그 꽃들이 떨어지는 모습 또한 매일같이 접하기 때문인 것 같다.

왜 루쉰은 아침의 꽃을 저녁에 줍는다 했을까? 한자어의 특성상 朝花와 夕拾간의 의미연관을 해석하는 방식이 수학공식처럼 명료하긴 어렵다. 꽃이 아침에 피면 즐기고 저녁에 지면 쓰는 기다림의 철학,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자세를 노래한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고 아침에는 화사하게 피는 꽃도 저녁에는 시들어 버려지는 것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경계하는 화두로 삼을 수도 있겠다. 어쨋든 아침과 저녁, 피는 것과 지는 것, 활짝핀 꽃과 떨어진 낙화의 대비가 새삼 다가오는 계절이다. 화려한 봄꽃을 보면서 떠올리는 시어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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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팬데믹 일상의 회복

코로나 팬데믹으로 2년여 통제되던 사회생활이 바아흐로 정상화되려는 모양이다. 아직 수만명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고 코로나 후유증을 호소하는 소리들이 적지 않지만 더이상 격리와 통제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데 모두가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동안 여러 규제들로 고통을 받았던 학생들과 자영업자들이 특히 환영하고 실제 주변의 음식점과 까페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듯하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까? 모든 것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만남의 기쁨과 접촉의 즐거움이 회복된다 해서 비대면접촉이 생각보다 괜찮고 불필요한 회식이 사라져 저녁이 있는 워라밸을 가능케 했다는 놀라운 경험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물리적 거리두기는 사라지겠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는 자발적으로 유지될 수도 있다. 아니 효율을 중시하는 기업과 조직들이 앞서서 그런 방향으로 전환할지 모른다.

역시 문제는 불평등이 아닐까 싶다. 우리 일상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기게 된 디지털 변화가 종래의 정치경제적 불평등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가 관건이다. 온라인 플랫폼이 주는 혁신의 가능성과 공짜점심의 즐거움 못지 않게 지적 문화적 능력차이가 더욱 심화될 우려도 적지 않다. 로버트 라이시는 이미 펜데믹과 디지털화가 겹치면서 사회계급의 분류방식이 달려졌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The Remotes, The Essentials, The Unpaid, The Forgottens 라는 4 유형론을 제시했는데 단순한 부의 규모나 정규직 여부로 판단할 수 없는 구별선이 뚜렷해짐을 지적한 것이다.

이미 프레카리아트라 부르는 불안한 계층의 확대는 목도하는 바이고 정규직에 대한 처절한 경쟁을 강화시킨다. 그런가 하면 고령화의 진전과 교육기회의 불균형이 지속되면 유발 하라리가 ‘무용계급’ *useless class”라 부르는 사회적으로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집단도 점차 늘어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이 말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란 긍정적 미래가 열리기를 바라지만 새로운 격동과 저항을 불러올 모순의 축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염려와 우려가 대안일 수는 없지만, 그런 우환의식이 새로운 대응능력의 자원이 될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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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 – 자연과 세상

한국의 봄이 참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죽은 듯 했던 나뭇가지에 잎이 돋아나고 어느 순간 들풀과 민들레가 겨우내 얼었던 땅을 뒤덮는다. 만물이 같은 생명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생각을 절로 느끼게 하는 계절이다. 수십년간 이런 봄을 맞이했는데 유난히 그 느낌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매일 땅을 밟고 사는 환경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참 오랫동안 자연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셈이다.

그런데 사람사는 세상은 이런 자연의 흐름과는 전혀 다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경담장이 높아지고 이웃과도 눈길을 마주치지 않는 거리두기가 일상화되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반문명적 전쟁의 참상은 연일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야만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국제사회도 강력한 억지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중국은 오히려 러시아를 두둔하는 모양새고 프랑스는 극우정당의 힘이 커지고 있다. 굳이 미중 패권경쟁이 아니더라도 세계가 다시 분열될 조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근대 지식인들은 자연과 문명을 구별하고 인간이 자연상태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자랑했다. 과학기술과 시장경제를 앞세운 서구의 힘도 이런 문명중심적 세계관을 증명한 듯 보였고 실제 한국을 비롯한 많은 제3세계가 그 모델을 좇았다. 하지만 오늘 자연과 문명을 대비해 보노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만물이 생명으로 잔치를 벌이는 이 봄에 전쟁과 분열, 대립과 비난을 넘어서지 못하는 지구촌의 문명이 자랑스러울 수만은 없어 보인다. 촌래불사춘이란 시적 표현은 우리 문명의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는 화두가 아닐까 싶다. 자연의 봄처럼 문명에도 봄이 오게 할 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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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 두 목소리 – 有爲와 無爲

‘네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흔히 황금율로 불리면서 서구 윤리도덕의 근간으로 언급된다. 그런가 하면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이란 공자의 말은 예를 중시한 동양 윤리의 기초로 간주된다. 적극적 실천을 강조한 전자를 금율(golden rule), 소극적인 無爲를 강조한 후자를 은율(silver rule)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동서양을 서열화하는 듯한 표현이라 최근에는 두개의 황금율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요즈음 이 두 목소리가 내 마음 속에서 종종 부딪친다. 내가 바라는 바를 위해 새로운 일과 활동의 기회를 확장하고픈 마음이 한켠에 뚜렷한 반면 새 일을 벌이기보다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또다른 목소리도 또렷하다. 되돌아보면 정년기념 서예전을 준비하면서 제자들에게 써준 글도 이 두 유형으로 나뉘어지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나 노자의 글들은 후자에 기울어져 있었다면 최승자나 심보선의 시는 전자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애써서 노력하고 바라는 바에 힘을 쏟는 것과 세상사의 흐름을 섭리로 수용하고 순응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 – 어느 것도 현재의 나로서는 포기하기 어려운 덕목이자 내면의 지향이다.

지혜포럼을 이끌어가시는 몇 분들과 앞으로 어떤 새로운 일을 기획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면서 내 마음 속 두 지향의 불편한 공존을 또 한번 절감했다.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들, 대선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 세대간 젠더간 갈등, 맘몬주의라 부를만큼 강한 돈의 위세 앞에서 가치의 아노미를 겪고 있는 현실을 단지 언급하고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한가라는 물음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덕이라는 생각이 혼란스럽게 부딪친다. 공신력이 하락하고 많은 안팎의 어려움에 부딪친 기독교계를 위한 어떤 노력이 절실한 시대임은 분명하고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분들의 헌신이 존경스러운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된 사람이 미칠 거대한 힘을 믿는 것이 교육과 신앙의 중요한 가치임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욕과 당위에 비해 내가 가진 경험과 식견, 신앙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조심스러운 마음이 커지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진솔한 성찰일지 비겁한 머뭇거림일지 확신이 서질 않지만 이 두 마음은 당분간 내 속에 함께 있을 것 같다. 어떤 새로운 계기가 오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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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담긴 학연

신복룡 교수께서 보내주신 [전봉준 평전]을 읽었다. 영웅이라 할만한 인물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영웅주의에 빠지지 않고 평범한 민중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저자 스스로 원했던 사람냄새 나는 정치전기학의 한 사례라 함직하다. 오래 전에 출간했던 자신의 책을 꼼꼼히 다시 보완하고 새로이 밝혀진 자료와 내용들을 보충하면서 도움을 입은 후학들과의 학연에 감사함을 밝힌 것 참 아름답고 귀한 모습이다.

적확한 말, 살아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학자에게 필수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 점을 잊고 지낸다. 이 점에서 최근 삼국지와 플루타르크 영웅전 번역본을 연이어 출간했고 성경 신구약을 새롭게 다듬은 작업까지 마무리하신 신교수님 열정은 놀랍다. 과거에도 구한말 주요한 책들을 꼼꼼히 번역하면서 잘못 알려진 사실과 상식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진력하셨는데 그런 정성과 집념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이 책에서도 본다. 수십년간 몸처럼 익숙해졌을 자신의 글투를 새롭게 고쳐쓰는 것은 웬만한 성찰과 노력 없이는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 나와의 인연을 언급한 부분을 읽으며 전주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나보다 앞서 동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여러분들을 만나 이곳 저곳 답사하며 이야기 나누었던 행복한 인연들에 감사한다. 박맹수 총장, 이종민 교수, 신순철 교수, 이진영 교수, 최현식 원장, 표영삼 선생, 김은정 기자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분들의 도움을 입었다. 서울로 올라온 이후 자연스레 내 연구관심도 만나는 사람도 달라졌지만 언젠가 나도 그때의 학연들을 떠올리며 지난 글을 고쳐 쓸 때가 올 지 모르겠다. 그러려면 저 열정과 수고, 기억력과 성실함이 내게도 있어야 할텐데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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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통령 선거와 ‘민심’

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비호감 선거라는 말들이 많았고 실제로 지지할 후보가 마땅찮다는 견해가 적지 않았던 것에 비해 선거에 대한 관심과 투표열은 매우 높았다. 사전선거에서의 관리소홀로 잡음이 있었고 1%도 채 되지 않는 근소한 표차로 승패가 갈라졌지만 패자는 깨끗이 승복하고 선거불복 운운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코로나 위험 속에서도 길게 줄 선 유권자들의 모습과 결과를 수용하고 격려와 협치를 당부하는 말들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함과 공고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 응어리진 대립과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이 넘쳐나 후유증과 상처가 만만치 않다. 내가 폐친을 맺고 있는 SNS 상에는 환호와 기대를 표하는 글도 있지만 분노와 좌절의 목소리가 훨씬 많고 그 강도도 심하다. 서로 다른 글들 속에 담겨진 감정의 색깔과 농도는 너무 다르고 날이 서 있어서 저토록 불안한 감정의 힘이 어디서 언제 충돌할지 걱정스럽다. 진보와 보수, 노년과 청년, 남성과 여성, 영남과 호남 사이에 정서적 대립과 균열이 커진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터한 전국적 촛불시위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현 문재인 대통령을 선출하고 민주당을 여당으로 만들어준 거대한 민심이 어떻게 불과 4년만에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힘으로 바뀌었는가? 이 질문은 이번 대선의 분석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깊이 고찰해야 할 쟁점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를 비롯한 여러 잘잘못과 함께 권력주도세력의 내로남불, 정파적 태도가 불러온 정서적 반감이 그에 못지 않은 요인이 되었음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바다. 민심이란 살아있고 늘 변화하지만 반드시 합리적인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한 이상 선거동학에 작동하는 합리적 선택과 비합리적 정동의 상호성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저야 할 듯 싶다. 우리 정치와 지성계의 담론은 너무 논리와 말에 의존하고 있어 마음과 감정의 흐름을 제대로 포착하는데 한계가 커 보인다. 이성과 감성, 논리와 정서를 아우르는 품격, 지혜, 공감이 더 요청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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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만에 다시 핀 梅巖同人 난향

1년 전 정년기념 서예전을 열었을 때 제자들로부터 받은 난이 새 봄을 맞아 우아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꽃대가 올라온 것은 두어주 전인데 이제 멋진 꽃잎이 하나 둘 벌어지면서 은은한 난향으로 온 거실을 채운다. 온도 변화가 크지 않은 집안에서도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정확히 알고 반응하는 식물의 예지에 새삼 놀란다.

코로나 상황으로 모든 것이 어려웠던 때, ‘以文會友’ 서예전을 열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제자들에게 줄 글씨를 준비하면서 得天下英才 하여 맺었던 학연들을 되돌아보고 함께 기리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매화가 피던 계절이라 그 글씨를 받을 제자들이 ‘매암동인’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나누었던 정담의 시간은 고맙고도 감동적인 우정의 ‘詩會’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 때 선물로 받은 난화분에 달려 있던 리본은 지금도 그대로 꽂혀 있다. 내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우리 선생님 행복하세요 제자 일동’이라고 쓰인 글귀를 유심히 보는 모습들도 종종 본다. GIST 에서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고 새로운 인연을 맺어가는 것도 참 귀하지만 서울대 재직 시절 제자들과 맺었던 지적 교분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력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다시 매화 피는 계절에 새로이 난향을 맡으니 지난 일년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모두들 건강하고 잘 지내기를 마음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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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 – 가르침과 희망

2022년도 1학기 개강을 했다. 코로나 3년을 맞아 여전히 정상적인 캠퍼스 생활은 요원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느낌은 새롭다. 이제는 비대면 화상강의가 일상이 되었다. 처음의 불편함은 많이 가시고 나름의 편리함과 유용함에 적응되어 가는 느낌이다. 학생들은 더더욱 그러하리란 생각이 든다.

이번 학기에는 [꿈의 사회학]과 [현대사회사상의 흐름] 두 강좌를 개설했다. 작년에는 수강인원이 10여명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두 과목 모두 정원 30명을 채웠다. 꿈의 사회학은 추가신청으로 부탁하는 학생이 상당히 많아 적절한 선에서 중단하느라 고생을 했다. 내 과목에 대한 관심이 크니 고마운 마음이지만 그만큼 부담이기도 하다.

간디학교 교가인 ‘꿈꾸지 않으면’의 한 귀절을 떠올리며 새 학기를 시작한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 그렇다면 학교는 꿈을 꾸고 희망을 만들어가는 공간인 셈인데 과연 내 수업이 이에 부합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애쓴다면 크던 적던 나름의 열매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화이팅을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