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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 유네스코 문화유산

일본에는 현재 총 25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호류지 불교미술유적, 히메지성, 교토의 역사유적,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나라 유적, 닛코 신궁 및 사찰, 구스쿠 유적 및 류쿠왕국 유적, 히라이즈미 불교유적, 후지산, 도미오카 방적공장 및 유적지, 일본 메이지 산업 혁명 유적, 르 코르뷔지에 근대건축, 나가사키 기독교 은둔유적, 모즈 후르이치 고대고분군, 조몬 선사시대 유적 등이 그것이다, 고고학 유적, 고대 문화 유적, 불교나 신도 등 종교유적, 무사문화, 근대화 관련 유적 등으로 다채롭고 다양하다.

하기 일대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다섯 곳이 있다. 하기 반사로, 에비스가하나 조선소 유적, 오이타야마 타타라 제철소 유적 등 세 곳은 조슈번 당시의 제철공업과 조선업의 기반시설을 보여주는 곳이고 소카손주쿠와 하기 성하촌 마을은 막말 유신기의 교육기관 및 생활공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다섯 곳이 모두 ‘메이지 근대산업화 문화유산’이라는 항목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게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 제강·조선·석탄 산업 유적’이다.

이 항목에 속한 유적들은 하기시에 한정되지 않고 무려 8개 현에 걸쳐 산재하고 있다. 2009년 초기 잠정목록 등재 당시에는 ‘큐슈와 야마구치의 근대화산업유산군’이라는 이름이었다 한다. 규슈와 야마구치에 대부분의 유적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광범위한 지역의 유적들이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야마구치 (조슈)의 하기 반사로나 가고시마 (사쓰마)의 구 집성관 유적은 메이지 유신 이전에 세워진 것이다. 두 지역이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유신을 주도했던 것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메이지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이 그런 시각을 잘 드러낸다.

제철소 및 탄광 유적과 무사집단의 생활공간을 같은 범주로 묶는 이 발상은 경제부처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일본 문화청이 근대유산의 활용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경제산업성이 ‘산업유산’과 연계하여 ‘근대화산업유산’이라는 범주를 고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전국 각지의 유적들이 역사문화유산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결국 2015년 ‘메이지산업혁명: 철강·조선·석탄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유산 등재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갈등이 새롭게 분출했고 그 파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주요 근대산업시설 중 몇 곳이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현장이었고 조선인 수탈과 직결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산업화 유적을 등재하면서 일제시대의 부정적 역사를 은폐하거나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샀다. 중국은 일본의 시도에 항의하면서 같은 해 ‘난징대학살’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였다. 한국에서는 일본군‘위안부’ 기록물을 기록유산으로 지정하는 노력을 국제간 연대로 추진하고자 했다.

특히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가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일본은 유네스코에 사도광산 등록신청서를 내면서, 등재 대상 기간을 에도시대(1603~1868년)로 한정했다. “17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금 생산지였던 사도광산을 알리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이 이뤄졌던 20세기를 제외하려는 꼼수로 받아들여졌다. 당연히 한국으로부터의 반발이 거셌고 ‘군함도’라는 영화까지 제작되어 대중적 비난이 거셌다. 하지만 올 8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서 사도광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통과되었다. “우리 정부는 ‘전체 역사’를 사도광산 ‘현장에’ 반영하라는 유네스코측의 권고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일본이 성실히 이행할 것, 또 이를 위한 선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전제로 등재 결정에 동의했다”고 외교부가 밝혔지만 그 이행의 수준과 속도는 미덥지 않아 불씨가 남아있는 상태다.

하기의 소카손주쿠도 요시다 쇼인의 삶과 사상,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그 제자들의 행적 중심으로 일본의 근대화 산업화 유적으로만 설명되고 있다. 요시다쇼인과 젊은 무사들이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론을 주창한 것, 서양 열강에 침탈당한 일본의 국익을 조선과 만주에서 벌충하자는 침략주의를 내세운 것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하기시에서 한국과 관련된 문구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구절 뿐이라 하니 세계문화유산의 등재 제도에 담긴 인류보편적 함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섬세하고 실증적인 면모도 강한 일본사회가 유독 근현대사의 역사인식에서만 그 집단편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중국 역시 동북공정에서 드러나듯 자국 중심의 역사해석과 유적활용이 무서울 정도다. 그렇다고 한국이 특별히 보편주의적 역사인식을 내세울만한 처지에 있지도 않다. 애초 세계주의적인 지향을 지닌 기관이었던 유네스코도 점차 개별 국가의 입장과 이익을 내세우는 장이 되었고 세계문화유산 역시 민족주의 문화정치에 좌우되는 흐름이 강해졌다. 언제나 한 중 일의 문화유산을 인류문명사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해질까. 하기의 유네스코 유적들을 살펴보면서 저들의 한계 못지 않게 우리들의 역사인식, 문화정치의 내면도 살펴볼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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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찿사 40주년

11월 2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40주년 기념공연이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있었다. 나는 서울대에 노래동아리 메아리가 만들어질 때 참여한 바 있으나 열심히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노찾사가 출범하는 과정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지만 노찿사의 출현에 메아리의 전사가 꽤 중요했던만큼 내 스스로는 노찾사의 활동에 남다른 애정을 느끼곤 했다. 물론 그 투쟁성과 운동성보다 서정적인 노랫말과 곡조를 더 사랑했던 것이었지만….

양현아 교수의 후의로 초대권 두 장을 받았다. 누구와 함께 이 공연을 관람할까 생각하다 대학시절 노래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동네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조형근 박사가 떠올랐다. 조박사는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마을문화운동을 주도하면서 깊이있는 글쓰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스스로 ‘동네 사회학자’라 하지만 그의 글과 책이 보여주는 시야의 너비와 사고의 깊이는 웬만한 유명학자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다. 마침 시간이 된다 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대부분 50,60대 이상의 세대인 듯 했다. 노찿사 노래가 영향을 미치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일테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실제로 공연 자체가 8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황에 맞서 노래운동이라는 양식을 만들어가던 이들의 열정을 새삼 되돌아본 자리였다. ‘노래를 찿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은 유명하지만 실제 누가 노래를 불렀는지 가수 개인의 이름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문학의 영역에서조차 공동창작을 중시하고 개인을 드러내기보다 계급을 앞세우던 시대의 한 반영이었다. 90년대 이후 이들 가운데서 유명 가수가 나타나기도 하고 노찿사의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공연 앞부분에서 김민기에 대한 감사와 그를 기리는 노래들이 불리워졌다. 아침이슬을 비롯해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어두운 시대를 건너왔던 기억을 모두가 떠올리는 듯 했다. 김광석이 불렀던 그루터기, 광야에서 등은 지금도 애창되는 곡이고 나도 간간히 부르곤 했던 노래다. 이들 노래를 40주년을 기념하면서 60대 청중들과 함께 부르니 감회가 새롭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들 노랫말을 다시 한번 적어본다.

천년을 굵어온 아름 등걸에 한올로 엉켜엉킨 우리의 한이 /고달픈 잠깨우고 사라져오면 그루터기 가슴엔 회한도 없다 / 하늘을 향해 벌린 푸른 가지와 쇳소리로 엉켜붙은 우리의 피가/ 안타까운 열매를 붉게 익히면 / 푸르던 날 어느새 단풍 물든다 //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 선 바쁜 의지로/ 초롱불 밝히는 이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 울음 있다 /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 /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 우리 어찌 가난 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 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겨 쥔 뜨거운 흙이여

지금 들어도 아름답고 비장한 노래다.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까지를 상상하는 웅원한 기상이 놀랍고 대지를 꿰뚫는 아름 등걸의 강인함이 뭉클하다. 그런가하면 한, 고단함, 회한, 피울음 같은 아픔과 좌절이 깊이 배여있다. 그래서 ‘초롱불 밝히는 이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넘친다’고 부르짖고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라 외치지만 그 바탕에는 짙은 탄식과 울음이 깔여있다. 아름답지만 슬픈 곡조가 가슴을 울린 것은 이런 정서에의 공감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80년대의 노래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다. 사랑,우정,인생 등을 노래하는 대중가요가 오랜 역사와 함께 주류를 형성했는데 우리는 종종 유행가라고 부르곤 했다. 대학생들은 뽕짝에 대한 거부감과 팝송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졌지만 노래의 메시지나 감성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에 김민기로부터 시작해서 노찿사로,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 이어지는 사회의식 지향의 노래가 있었다. 존 바에즈와 비틀즈의 노래들 가운데 일부도 이런 맥락에서 애창되었다. 그런가 하면 클래식, 가곡, 종교음악 등이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범주로 존재했다. 대중가요는 통속적이었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운동권 노래는 진지했지만 부담스러웠다. 클래식은 어쩐지 상층계급과 서구지향적인 분위기여서 접근하는데 문턱이 높았다.

나를 포함하여 꽤 많은 사람들은 대학에 들어와 두번째 유형의 노래를 접하기 시작했다. 억압의 시대, 분노의 시대를 반영하듯 데모는 늘 노래를 수반했고 노래는 그 자체가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런 흐름이 전부였던 것은 아니다. 통속적인 것은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 정서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노래가 투쟁의 도구가 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즐겨 부르던 성가곡과 흑인영가가 설 자리를 잃으면서 한동안 부를 노래를 찾지 못해 당혹스러웠던 기억도 떠오른다. 내가 초기의 노찿사 노래들, 서정적이고 은유적인 노래들을 좋아했던 것도, 그 이후 지나치게 정치화된 노래에 거리감을 느낀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노찾사 40년을 공연을 앞두고 아름답게 마무리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활동을 전개해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후자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날 공연도 ‘회고’에만 방점을 두지 않고 새로운 노래, 새로운 가수를 선보이는 부분을 담았고 앞으로의 성원을 부탁하는 메시지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재즈풍과 록 형식의 새로운 곡과 노랫말도 소개되었다. 그 결심이 뜻있는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새롭게 전개하는 앞으로의 음악 형식, 노래형태의 특성이 무엇일지 다소 궁금했다. 공연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러하듯 어디에서 매듭과 혁신을 추구할지 잘 와닿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과거 7,80년대와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확신하기가 어렵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느껴질 정도로 해묵은 모순과 좌절이 거듭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감수성과 문화적 취향은 엄청나게 변했다. K-Pop의 아이돌 노래가 전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가 하면 임영웅 등 트롯트 열풍이 전국민을 격동시키는 오늘이다. 21세기 문화운동이 새로운 힘을 얻으려면 그 형식과 감성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꿈이 사라지는 시대에 필요한 희망의 메시지와 선율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그래서 노래가 힘이 되는 동력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 중대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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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레그넘

외교협회의 학술지인 [외교]지가 151호의 특집으로 ‘불확실성의 세계와 한국’이란 주제를 설정하고 내게 권두논문을 청탁했다. 전지구적 불확실성을 조망하고 필요한 시대정신을 언급해달라는 쉽지 않은 주문이어서 망설였지만 내 스스로 정리해볼 필요를 느끼던 바라 응락했다. 글을 쓰면서 공부도 되고 내 생각을 다듬는 계기가 되었지만 더위 속에서 진땀을 많이 흘렸다.

나는 인터레그넘이란 개념을 시대적 불확실성을 풀어가는 키워드로 삼았다. 인터레그넘은 원래 한 국왕이 죽고 그 후계자가 취임하지 않은, 지체된 궐위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후 이태리의 정치철학자 그람시는 이 말을 재구성해서 사회질서를 지탱해온 기존의 프레임은 약화되는데 새로운 질서는 채 형성되지 못한 예외적 상태를 뜻하는 개념으로 활용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말을 차용해서 오늘날 지구세계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자 했는데 나도 그런 시각에 동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2024년 8월 빠리올림픽은 자유, 평화, 우애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다양한 인종, 문화, 국가들의 연대를 과시하면서 종료되었다. 올림픽 내내 한국선수들의 선전 소식도 좋았고 세계적 선수들의 높은 기량을 접하는 즐거움이 컸다. 하지만 규칙에 승복하는 스포츠와 달리 현실세계는 혼란의 연속이다. 이스라엘-하마스의 무력충돌은 언제 마무리될지 알 수가 없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핵전쟁을 염려해야 할 지경에까지 치닫고 있다. 9월 초엔 극우 이념을 표방하는 정치세력인 ‘독일을 위한 대안’ (AFD)이 튀링겐주의 제1당으로, 작센 주의 강력한 2당으로 약진하여 나찌즘의 역사를 기억하는 독일은 물론 유럽과 세계의 우려를 더하는 중이다.

눈 앞으로 다가온 미국의 대선은 더욱 혼란스럽다. 새로운 세계적 리더십이 출현하리라는 기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 채 지역분열, 계층갈등, 인종분규가 착종된 진영 대립으로 민주주의의 심각한 퇴행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푸틴 및 김정은과의 친분을 강조하면서 동맹의 가치를 폄훼하는 트럼프 후보의 메시지는 나토의 집단방위에 의존하는 유럽이나 한미동맹의 오랜 전통을 중시해온 한국에 큰 당혹감을 안겨주고 있다. 대선 결과가 어떠하듯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은 강화될 것이란 전망과 함께 일종의 ‘내전’ 상태가 지속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반도의 불안감도 전례없이 커지고 있다. 핵무력강화정책을 헌법에 명기한 북한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국가관계로 재규정했고 남북간의 모든 교류와 접촉은 차단되었다. 한미일 협력체제가 군사협력의 영역에까지 확장되면서 북중러의 결속과 한중마찰 심화의 우려도 함께 커진다. 새로운 안보위기론과 함께 한국 독자핵무장론이 등장하는가 하면 제2의 한국전쟁 가능성을 말하는 국내외 견해도 나타나고 있다. 친숙하던 세계질서가 흔들리고 익숙했던 한반도 환경에 심대한 변화가 진행 중임을 우리는 매일의 뉴스에서 확인하고 느끼는 중이다.

I2차대전 이후 정착된 질서, 즉 주권국가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과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세계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제분쟁을 규율하고 세계경제를 뒷받침해온 다자적 국제기구가 이전만큼 효율적으로 또 포괄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 늘어간다. 국제사회의 일관된 반대와 제재에도 여섯 차례 핵실험을 실시한 북한에 IAEA도 유엔 안보리도 실질적인 통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구생태계의 난개발을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려는 유엔의 원대한 목표나 탄소감축을 위한 빠리협약의 실천도 개별 국가의 반발과 성장주의를 규율하는데는 불충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주의 세계질서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고 세계화의 흐름에 강력하게 연동되어 선진국의 대열에까지 발전하고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구현한 한국으로서는 다자주의 원칙에의 확실한 지지에 더해 인터레그넘 상황의 양면성을 민감하게 이해하고 대응하는 전략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지구적 차원의 불확실성과 복합위기에 더해 한반도적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고전적 위기에도 대처하기 위한 총체적 역량구축, 혁신적 버넌스의 구축에 힘을 다해야 하는 시대다. 미래충격, 뉴파워, 책임윤리의 화두 속에 담긴 시대정신을 견실하게 추구해가는 탁월한 리더십도 절실하다. 레트로토피아의 유혹을 벗어나기 위해 민주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과 미래를 향한 희망서사를 구축하는 일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전환기의 시대정신은 희망과 염려, 가능성과 제약조건, 미래와 과거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면서 레트로토피아로의 유혹을 이겨내고 국가공동체의 질적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인류적 시야의 책임윤리를 확대해가는 포괄적 역량에서 찾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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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얼굴의 그리스

짧은 아테네 여행이었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그리스의 면모들을 접할 수 있었다. 예상했거나 기대한 것이 아니었는데 아크로폴리스, 역사박물관, 고고학박물관, 그리고 아테네 시내를 방문하면서 적어도 세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그리스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깊이 있는 이해는 아니지만 내 지식의 편협함을 확인하고 교정할 수 있었던 귀한 여정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텥레스로 대표되는 철학과 지성, 아테네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폴리스 공화국이 내게 가장 친숙하고 깊이 자리잡은 이미지다. 이곳에 오고 싶었던 오랜 꿈도 이런 심상 이미지에 기반한다. 이런 모습은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광장, 파르테논 신전과 디오니소스 공연장에서 감동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나는 아테네 시내를 오가면서 2천년 전 이곳에서 꽃피웠던 철학과 미학과 건축과 예술을 떠올렸고 뛰어난 사상가들이 곳곳에서 대화하고 토론했을 모습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잔해만 남은 현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융성한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적지 않은 사전 지식과 상상력이 요구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런 선행지식이나 오랜 기대감이 없었다면 흩어져 있는 유적지에서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마지막날 방문했던 고고학 박물관에서 이 고대 그리스의 모습을 좀더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아프로디테와 포세이돈의 조각상, 검은 빛과 정교한 그림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그리스 도자기, 그리고 이곳에서 살았던 사상가들의 얼굴상을 모아놓은 전시실 앞에서 고대그리스에서 꽃피웠던 문명적 지혜와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 있었다.

둘째날 오후 탐방했던 국립역사박물관은 내게 전혀 다른 그리스 이미지를 선사했다. 이곳은 그리스의 근현대 역사를 보여주는 곳으로 그리스 옛 의회 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데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전쟁, 외교, 갈등 등이 나열되어 있어서 독립운동사박물관이라 할 만했다.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나는 줄곧 당혹스러웠는데 그리스 근현대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별무했기 때문이다. 전시를 보면서 오랜 세월 그리스는 로마제국, 라틴제국,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그 제국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음을 깨달았다. 1830년대 일련의 혁명과 전쟁을 통해 독립국가건설의 노력이 전개되었고 거의 1세기에 걸친 격변을 거쳐 오늘의 그리스가 출범한 것이다. 전시물은 대부분 오스만제국과 싸울 때 사용된 군대의 깃발, 항쟁을 주도했던 군인들의 초상화, 그리스 정교의 수장들 및 상징물이었다. 어디에도 파르테논 신전이나 아테네 민주주의, 소크라테스의 철학 같은 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터키와의 악연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고대와는 거의 단절된 근현대 그리스의 모습은 솔직히 낯설었고 컨텐츠 역시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리스 국가형성과정이 힘들었음을 반증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세번째 모습은 내가 아테네 길거리에서 받은 인상에 기초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은 건물 외벽에 무질서하게 그려져있는 수많은 그래피티였다. 뉴욕같은 도시라면 어울릴지 모르겠으나 페인트 낙서들이 아테네의 거리 곳곳에 널려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모습이었다. 중심부의 많은 건물 철제셔터와 외벽에 그려진 그래피티는 아테네 도시의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드러낸다기보다 어딘지 불안하고 쇠락해가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실제로 거리 곳곳에 노숙자의 모습도 보이고 문이 닫힌 상점들도 자주 보였다. 2015년 그리스 경제위기가 미친 충격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2000년대 초반 호황을 누리던 그리스는 외환위기 이후 5년 사이에 경제 규모가 4분의 1이나 쪼그라들었고 실업자는 약 2.5배로 폭증했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가 짜준 경제 프로그램을 가동했는데도 형편은 거의 경제공황에 가까와 그리스는 심각한 사회불안을 겪어야 했다. 정부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유럽연합에서는 ‘유로존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고 위협하면서 불편한 갈등이 지속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이나 튀르케에와의 독립전쟁에서 보인 강인한 국가의식에 비해 실제 생활상의 그리스, 먹고사는 현장의 모습은 또다른 얼굴로 비쳐졌다.

세가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며 국립역사박물관에서 본 Refugee (난민) 라는 주제의 특별기획전을 생각한다. 이 전시의 부제는 “From Greater Greece to Contemporary Greece”라 되어 있다. 19세기 독립과정에서 옛 비잔틴 제국시절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귀속시키려는 발상이 ‘greater Greece’ 구상을 강화시켰다고 한다. 1821년 그리스 혁명의 시작부터 1923년 로잔 협약으로 현재의 그리스가 출범한 100년간의 역사는 유럽사의 격변, 정치적 대응, 거대한 인구이동으로 특징지워지는 시기인데 그 핵심에 난민이 자리한다는 것을 이 전시는 강조하고 있었다. 독립의 과정에서 터키를 비롯한 곳곳에 거주해온 그리스인들이 다수 이주해왔지만 이들의 정착은 쉽지 않았고 많은 고통과 가난, 불안의 삶을 겪어야 했다. 정치적 독립은 이루어졌지만 사회적 통합이나 경제적 안정은 요원했던 수난의 난민사를 보면서 고대 그리스와는 너무 다른 현대 그리스의 실상을 미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듯했다. 사실 20세기 지구상에서 독립운동을 추구한 약소국가들에게서 이런 모습은 공통적이라 할 수도 있다. 난민문제가 다시 지구적 현안이 되고 있는 지금, 인간의 이동과 정착이란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읽는 작업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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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테네

드디어 그리스 아테네에 왔다. 내가 파르테논 신전과 올림푸스, 제우스와 신탁의 이야기에 접한 것이 초등학교 시절이었고 그때부터 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 무려 50년이 훌쩍 넘어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아테네에서의 첫 날 저녁 아크로폴리스가 올려다 보이는 아고라 광장 주변 거리 까페에서 식사를 했다. 주위엔 신나는 음악과 춤이,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줄을 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의 유쾌한 목소리와 붉은 색 조명들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광장 위편으로 아크로폴리스의 모습이 조명 속에 드러났다. 때마침 보름달에 가까워 온 밝은 달이 휘영청 떠올라 광장과 신전, 둥근 달이 한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이 주변에 도서관과 학당, 공연장 등이 두루 배치되어 있었으니 고대 아테네 폴리스의 진면목이 이 공간에 남아 있는 셈이다. 2천년전 이곳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치고 대화하며 때론 격론을 벌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에 뭉클한 무엇이 느껴진다.

첫날 밤 야경으로만 만족했던 아크로폴리스 방문길을 다음날 아침부터 준비했다. 시간대 별로 입장권 가격도 달라 인터넷으로 10시 예약을 했다. 비교적 이른 9시에 호텔을 나섰지만 내리쬐는 태양열은 무서울 정도였고 아무런 그늘도 없는 언덕 위에서 느끼는 열기는 참기 어려웠다. 그래도 어릴적 해외여행을 꿈꾸게 만들었던 곳에 왔다는 생각이 더위도 잊을만치 나를 들뜨게 했다. 마침내 들어가 만난 파르테논 신전은 아직 복원이 채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어릴 적 사전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오랫동안 원형이 유지되었다는데 17세기 이 지역을 공격한 베네치아와의 전투시 튀르크군의 화약이 폭발하여 건물의 원형이 상당부분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웅장함이나 균형미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명불허전이라 할까.

아크로폴리스 정상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5세기에 아테나 여신에게 봉헌된 신전으로 건립되었다. 대리석으로 된 높은 도리아식 기둥들로 둘러싸인 전체 건축 양식은 특히 아름다와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 제1호로 등재되어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복원공사에도 유럽연합의 재정지원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멀리 아테네 도시를 바라보는 중간언덕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보인다. 파르테논 신전과 유사한 모습인데 파르테논 신전을 제일로 치는 연유 때문인지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파르테논 신전의 옆으로는 규모가 제법되는 원형극장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네 명의 여신상이 벽면을 채운 또 하나의 작은 신전이 있다. 산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한 모서리에는 그리스 국기가 높이 걸린 전망대가 있다. 산정의 바닥은 약한 핑크빛 색깔을 띤 바위들로 덮여있는데 반들거리는 모양으로 미루어 대리석이 아닌가 싶다.

내려오는 길에 로만 아고라와 하드리안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원래 아테네 시민들이 모여 토론하고 공연하며 향연을 베풀기도 했던 곳은 ‘고대 아고라’였는데 그곳이 로마의 지배하에서 훼파된 이후 다시 형성된 것이 ‘로만 아고라’라 한다. 아고라라는 이름이 붙은 걸로 짐작하면 시민들이 모여 토론하고 상대를 설득하며 때로 권력을 비판하던 민주적 공론장의 역할이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도서관이 설립되어 있었고 많은 서적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하니 고대 그리스 시민문화의 수준이 놀랍다. 주위 회랑의 기둥들이 여럿 남아 있는 이곳에서 많은 시민 들이 토론하고 대화하며 공론을 만들어 갔을 것이다. 더위도 식힐 겸 이 로만 아고라 문 앞에서 한참을 앉아 먼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보는 즐거움을 가졌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교회를 만났다. 주변 건물들에 비해 너무 작아 초라해 보이지만 독특한 건물양식과 길 모퉁이 위치가 남달라 조심스레 들어가보았다. 내부는 생각보다 화려하고 정교한 디자인과 성화들로 눈부실 정도였다. 천장의 벽화는 오랜 세월 보수되지 않아 어둡게 변색되고 부분적으로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금칠을 한 부분들, 정면의 제대 주변과 벽면의 성화는 무척 아름다왔다. 변색된 어두운 천정과 화려한 성화의 대조가 마치 기독교 문명의 찬란했던 과거와 약화된 오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는 여러모로 결이 다른 기독교 문화가 이곳에 자리잡고 동로마 건립 이후에는 콘스탄티토플과 함께 그리스 정교 발상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는데 15세기 이후엔 오스만 제국 하에서 이슬람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니 역동적인 역사라 할지 기구한 운명이라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작은 교회를 나서며 나는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도여행을 떠났던 바울을 떠올렸다. 그는 이곳 아데테에서 만난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면서 자신이 믿는 구원의 신앙을 열정적으로 설파했다. 바울은 아데네 사람들이 종교성이 많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진정으로 신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유일신앙을 설파했었다. 그가 열정적으로 논쟁했던 아레오바고 언덕도 이 주위 어딘가에 있으리라. 바울의 확신과 열정으로 이루어진 작은 만남이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씨앗이 되고 이곳 그리스 정교회의 형성으로 이어졌으니 참으로 경이로운 역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그리스는 정교회를 국교로 믿는 나라인데 다른 유럽 도시에 비해 눈에 띠는 교회나 성당 건물이 없고 관광안내서에도 정교회 관련 유적은 별로 나오지 않는 것이 다소 의아스러웠다.

오늘날 파르테논은 건축미학이 뛰어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간주된다. 인류적 차원의 문화유산보존을 주도하는 유네스코가 엠블렘으로 사용할 만하다. 하지만 종교성이 없는 파르테논은 무언가 핵심이 빠진 느낌이다. 돌이켜보면 파르테논은 종교성을 핵심으로 하는 공간이었다. 원래 아테나 여신을 위한 신전이었고 비진틴 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정교회 성당으로 활용되었다. 15세기 오스만 튀르크가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는 이슬람 모스크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 내부에 있던 신상, 제대, 벽화, 성상은 훼파되고 교체되었다. 1832년 그리스가 독립한 이후에는 종교와 무관한 문화재가 되었고 이제는 탈종교화된 세계적 관광지가 되었다. 신전에서 교회로 그리고 모스크를 거쳐 문화재로 변모해오는 과정에 남은 것은 무엇이고 사라진 것은 무엇일까? 대리석 건물의 미학과 아름다움 속에 간직되어 있던 오랜 종교성과 그 교대 과정에서의 공존과 갈등은 더이상 기념할 대상이 아니어도 좋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유태인 출신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저서를 쓰고 현대 정치사상에 한 획을 그은 한나 아렌트는 자유를 공적이고 시민적인 것으로 위치지으면서 아테네 폴리스를 소환했다. 과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 아고라의 민주정치가 이 시대에 필요한 시민들의 참여정신과 집단 숙의의 유산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중세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예술을 되살리면서 새로운 문예부흥을 주도했는데 21세기 르네상스를 다시 꽃피울 전통은 어디서 찾아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답하려면 파르테논 신전과 아고라 광장을 고고학적 유적으로만 바라보는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공간의 안팎에서 살아 숨쉬었을 풍부한 종교성, 예술적 감성, 인류적 지혜의 유산들을 상상할 수 있는 안목이 필수적이다. 그게 쉬울 리 없는 내 안목의 협소함이 안타깝지만 아테네 방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며 잠시나마 인류적 차원에서의 미학과 숭고함을 상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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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차 세계코리아포럼

제25차 세계코리아포럼 (WKF)이 8월 14, 15 양일간 이스탄불 공과대학에서 개최되었다. “글로벌 대전환과 한반도의 대응”을 주제로 총 7개 세션에서 40여편의 발제와 패널, 토론이 이어졌고 마지막 행사로 국악 공연도 있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 일본 등 전세계에서 온 50여명의 전문가들이 최근 세계정세의 변화와 한반도 문제를 중심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4반세기의 기간동안 주요국 전문가들이 매년 만나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고 의견을 조율해온 이 포럼은 보기 드문 민간주도 지식인포럼의 한 사례라 할 만하다.

제1회 모임이 2000년 뉴욕에서 “남북정상회담과 동북아 신질서”를 주제로 개최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포럼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난 남북정상회담이 자리한다. 그 이후 전개된 남북한 협력과 교류, 한반도 평화정착을 향한 전세계의 공조가 이 포럼의 성장과 발전의 조건으로 작용한 셈이다. 물론 이창주 의장의 헌신적 수고와 주위의 협력이 일차적인 동력이었지만 탈냉전기 한반도 주변상황이 이런 만남을 가능케 해준 긍정적인 배후환경의 도움도 부인할 수 없다. 참석자들의 국적과 전공, 배경이 서로 달라도 전문가들의 의사소통과 국제협력의 가능성을 공유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남북간의 협력과 화해, 평화와 통일이라는 큰 지향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포럼이 지속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지난 수년간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국제정세가 달라지며 국내의 정치지형과 국민정서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북핵위기가 고조화되는 가운데 남북간 협력과 화해의 기조가 현저히 약화되었고 북한정권 및 남북협력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훨씬 차가와졌다. 북한은 ‘적대적 2국가론’을 주창하고 러시아와 새로운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수립하면서 선대 이래의 남북 교류와 상호협력을 단절했다. 미중간 패권대립과 상호긴장이 커지고 한미일 공조가 기술경제 차원을 넘어 군사분야에까지 확대되면서 신냉전이란 시각도 커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전쟁의 여파가 다시금 안보불안, 이념적 대결, 민주주의 위기의식을 불러온다. 요동치는 국제정세의 충돌지점으로 한반도나 양안이 심심찮게 언급될 정도로 실질적인 전쟁 우려조차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 사정을 반영하듯 이번 모임에서는 학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두드러졌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측 발제자들은 자국의 입장을 반영하여 한국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쏟아냈다. 어쩌면 신냉전은 담론의 장에서 더 먼저 형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국측 6자회담 대북특사를 지낸 조셉 디트라니는 미리 보낸 원고에서 북한의 더욱 대담해진 위협을 언급하면서 북한은 단지 한국에의 위협에 그치지 않고 동북아 지정학적 불안의 핵심임을 지적했다. 이제는 중국이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할 때임을 강조했다. 그린 포드 전 유럽의회 10선의원이자 아시아 투트랙포럼 대표는 달라지는 지정학적 상황에서 북한이 어떤 임장에 놓여있는지를 검토하면서 약자로서의 블러핑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가장 큰 견해차는 신냉전의 도래와 같은 대립상황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을 보는 관점의 차이임이 확연이 드러났다. 중국과 러시아측 발제자들은 일관되게 한미일 연대가 위기의 본질이고 이에 적극 동참하는 한국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에 반해 유럽 및 한국, 인도의 학자들은 고조되는 북핵위협, 북중 및 북러 결속을 선행하는 위협으로 간주한다. 지구적 현안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시진핑-푸틴 정상회담, 북한의 대러시아 무기제공과 김정은-푸틴 회담과 조약갱신 및 핵무력 강화시도 등을 보는 시선에서도 양자의 입장차는 현저하게 컸다. 숩슬라 스텐젤 전EU 의회 한반도위원장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유럽에서 나토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국은 러시아의 길에 동참하기를 꺼려하고 미국은 일본과 한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있으며 유럽은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을 반영하듯 신냉전 상황을 야기한 근본원인을 미국에서 찾으려는 러시아 학자들에 대해 EU의 전문가들은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중국 인민대 스인홍 교수는 현재의 한중관계가 자칫 ‘블랙홀’로 이어질 수도 있을만치 악화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야기하는 주요인이 한미일 동맹강화와 이를 최우선시하는 한국의 가치외교 탓이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길림대학 장예지 교수도 한미일 협력강화가 신냉전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는 중국측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북중관계는 언제나 전략적이고 그런 속성은 지속적일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은 신냉전 상황을 원하지 않으며 여전히 지역내 안정과 평화를 바라고 유엔합의를 존중한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중국의 국가이익을 견고히 지킬 것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알렉산더 제빈 박사도 현재의 위기 상황이 한미일 동맹강화에서 초래된 것이라 지적하고 러시아로서는 한러관계를 존중하지만 한국의 행동여하에 따라 보복성 조치도 나올 수 있다는 발언까지 덧붙였다.

전 북한주재 영국대사를 역임한 외교관 존 에버레드는 중국과 러시아의 현실인식의 기본구조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즉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기본적으로 북한, 러시아, 중국에 있는 것이고 한미일 협력강화는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것임을 잊어선 안된다고 했다. 연세대 장동진 명예교수 역시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고 인도 델리대학의 선닐 교수도 동북아 및 동남아, 서남아 등지에서 중국이 지역의 불안과 우려를 심화시키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영국 캠브리지대 라이트 교수는 북한의 위협이 심화되고 북중러 협력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삼자협력구조가 어떻게 형성되고 추진되어 왔는지, 그 중요성과 함께 과정상의 여러 어려움을 정리한 발제를 했다. 임반석 교수는 중국몽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 중국의 전략적 지향이 제국주의 경쟁시대 열강이 보여준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지적했다. 중국은 주변 국가들과의 협력과 공존을 통해 지역평화와 발전의 공공재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변모해야 함을 주장했다.

오프닝 세션에서 문정인 교수는 현재 상황을 보는 여러 시각들을 조망하는 발제를 했다. 미중 패권대립으로 큰 변화가 진행중이지만 신냉전이란 개념보다 차가운 평화의 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평가하면서 지금이라도 평화와 안보를 향한 새로운 처방으로 유엔협약에 기초한 다자주의를 강화해야 함을 주장했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에서 동북아 안보협의체, 동복아 안보정상회의, 동북아 비핵지대화 등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장동진 연세대 명예교수는 이러한 시각이 과연 현실성이 있겠느냐고 비판적 코멘트를 했고 청중석에서 동북아비핵지대화를 중국이 받아들이겠느냐는 질문도 제기되었다. 오랫동안 한국의 대외정책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현실정치에 깊이 관여해온 학자의 발제로서는 너무 막연하고 이상적인 내용이란 느낌을 피하기 어려웠다.

25년을 이어온 이 포럼이 더이상 지속되기 어려워졌다는 사실 자체가 변화한 현실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북정상회담과 뒤이은 서울-평양의 교류확대, 북핵해결을 위한 국제공조가 이루어지던 시기의 동력이 현저이 약화되면서 그 계기로 출범한 포럼의 역동성 역시 약화될 것은 예상되는 바였다. 하지만 어려워진 재정여건과 세대 교체 등으로 이 포럼의 지속여부가 불투명해진 모양이다. 민간 분야에서 이만큼 광범위한 국제적 네트워크가 지속되어온 다자적 학술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상황이 아쉽지 않을 수 없다. 변화한 시대상황에 걸맞는 또다른 형태의 플랫폼이 새롭게 출현하리라 믿으면서도 당분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대화와 이해보다 비난과 논쟁이 심화될 것을 예감하는 듯해서 염려가 앞선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국악공연에서의 퉁소 소리가 더욱 애잔하게 내 마음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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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서 맞은 광복절

올해로 25주년을 맞는 국제코리아포럼 참석차 오게된 이스탄불에서 제79회 광복절을 맞이했다. 이스탄불 거리와 건물 곳곳에 걸려있는 붉은색 국기를 보면서 튀르키에 역시 국가상징을 유난히 강조하는구나 생각을 했다. 군부가 주도하여 서구적 문명국가로의 길을 연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 그와 유사한 모델로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슬람 정체성과 세속적 근대성의 공존방식을 두고 긴장이 커지고 있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되어온 민족적 자부심과 국가의식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역사박물관에서만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재확인되는 느낌이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 세션에서 영국 캠브리지대학 존 닐슨 라이트 교수의 발제를 들으면서 한국에서 진행중인 역사논쟁을 떠올렸다. 라이트 교수는 ‘동아시아 신냉전 형성과정에서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제목의 글에서 미국이 지속적으로 일본 및 한국과의 연대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한일간의 여러 문제로 인해 번번히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본의 기시다 내각 출범과 한국의 윤석렬 정부 출범은 삼자협력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2023년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삼자회동이 상징하듯 한미일 협력의 강도와 수준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라이트 교수는 북중러의 위협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한미일 삼자협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보면서도 여전히 한일간의 역사쟁점이 큰 장애물로 남아 있다고 보았다. 한일이 모두 직면하고 있는 포퓰리즘도 중대한 걸림돌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

광복절 당일 행사 중간 중간 한국 뉴스를 검색해 보았다. 예상대로 야권 및 광복회의 불참 속에 반쪽의 광복절 기념식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윤석렬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도 부분적으로 알게 되었다. 한일관계의 미래를 강조하면서 과거를 벗어나자 했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통일방안도 내놓았다 한다. 하지만 적절치 않은 연이은 인사들로 해묵은 역사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이나 진지한 토론과 전략적 평가가 수반되지 않은 새로운 통일방안의 제시가 얼마나 의미있는 결실을 맺을지 의심스러웠다. 평화와 우호의 한일관계를 열어가야 한다는 큰 방향은 공감되고 새로운 남북관계의 구상이 필요하다는 데도 동의하지만 정교한 로드맵이나 국민적 공감대나 상호신뢰구축의 준비 없는 선언적 논의가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움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때마침 카톡으로 이철우 교수가 동아일보에서 대담한 기사를 보내주어 읽었다. 착잡한 심정이 더해졌다. 대통령 주위에 아마도 한미일 연대를 위해 역사논란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조언을 하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외교안보의 중요성을 내세워 역사논란을 장애물로 여겼을 수도 있겠다. 어떠하든 그런 인물들을 중용한 대통령 책임이 아닐 수 없다. 광복절 행사논란을 보면서 해방 직후 3.1절 기념식을 둘러싸고 좌우진영이 대립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그때도 한반도 상황은 미소의 전략적 입장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국제환경의 조건을 강조하고 그 흐름과 함께 가는 체제수립을 추구한 세력이 남북한에서 권력을 잡았다. 민족자주론은 내부적으로는 대중의 심정적 공감을 불러올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허약할 수밖에 없는 자기중심적 대응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로부터 8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세계는 분열되고 강대국간 대립은 심화되면서 신냉전의 도래가 운위되는 형국이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진행중이고 동아시아가 다음 격전지가 될지 모른다는 염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북한의 위협은 커지고 북중러 연대도 강화되는 상황에 미국은 고립주의의 유혹을 받고 있다. 큰 전략적 사고와 외교적 지혜가 절실한 시기에 여전히 우리 논의가 친일논쟁, 과거사 논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우려스럽다. 대중의 지적 자폐증, 포퓰리즘의 문제도 있지만 이런 잠재적 우려들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우리 정치권의 문제가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상황이 초래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중지를 모으기는커녕 오히려 역사논쟁의 자중지란을 벌이게 만든 윤석렬 정부 거버넌스의 편협함과 무감각이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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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화묵회 전시

서울대 교직원 서예전시회가 8월 5일 서울대 미술대학 우석전시실에서 개막했다. 올해의 전시 컨셉은 여름을 보내는 서정… 무더운 날의 시상을 화선지 묵향에 담아보려는 의도였으리라. 두달전 전시계획을 통보받고 나는 바로 두 작품을 마음에 떠올렸다. 무더운 여름날 변방의 병사들의 수고를 보며 멋진 시를 남긴 두보의 ‘하야탄’과 여름의 길목에서 자연의 역동적 흐름을 ‘공양’이라는 화두로 담은 안도현의 시다.

사실 봄이나 가을에 비해 여름을 주제로 한 시는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과거에도 지금도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두보는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만물이 각기 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임을 일깨우고 인간사의 부자유함과 억지스러움을 변방의 병사들을 통해 노래한다. 안도현은 풀, 비, 바람, 새 등 만물이 제나름의 공을 들여 여름의 무성함을 만들어왔음을 신선한 감각으로 표현했다.

두보의 한시의 전반부를 행초로 썼다. 자유롭게 운필하려 했는데 그럴수록 기본기가 바탕임을 절감했다. 작품을 써보다가 황희지의 초천문을 다시 연습하곤 했다. 한글도 좀더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해보고 싶어 여러 서체를 섞어 써보았다. 한자와 한글의 아름다움이 서로 다르면서도 붓의 감각에서는 상통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activities · life · 시공간 여행

김민기, 70년대, 노래

김민기의 부음을 접했다. 얼마전 학전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과 함께 병세가 위중하다는 사실도 알려졌던만큼 뜻밖의 놀랄 뉴스는 아니다. 그래도 여느 유명인사의 죽음을 접할 때와는 다른 아련한 감정이 생겨난다. 그의 이름과 노래가 70년대 내 대학시절에 미친 영향 탓일 것이다. 페북에는 여러 사람들이 그의 노래와 엵힌 경험과 기억들을 적어 놓고 있다. 결혼식 축가로 김민기의 노래를 합창했다는 기억에서부터 그가 어두운 세월에 ‘푸른 하늘’을 보여준 사람이었다고 쓴 글도 있다. 쉽지 않았다는 그의 인터뷰 기사들도 여기저기 나타난다. 학전의 마지막 공연장에서 찍은 사진을 애도의 글과 함께 올린 글도 여럿 보였다. 그의 영향력이 오랫동안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모습들이다.

카톡방에선 때아닌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암울했던 시대’에 맞선 김민기라는 글에 대해 그런 표현은 불성실한 왜곡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70년대는 정치적으로 불행했지만 긴 한국현대사에서 결코 암울한 시대로 단정할 일이 아니라는 항변이었다. 김민기의 생애를 두고 70년대의 성격을 논하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맥락을 벗어난 것이다. 우리의 시대인식은 너무 정치화되어 있어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도 이런 논쟁이 생기는구나 다소 씁쓸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표준화된 역사인식이나 관용적인 서술어가 얼마나 실체적 진실과 가까운가는 사실 쉬운 문제가 아니다. 김민기의 죽음을 계기로 70년대를 어찌 이해해야할까 자문해본다.

대학생으로 보낸 70년대 중후반을 우울하고 답답하게 경험했던 것은 분명하다. 일상의 생활전선에 힘겨워하던 사회인들이 당시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자유로운 삶과 지성인되기를 꿈꾸던 사람들에겐 참으로 힘든 시대였다. 외마디 외침 한두마디로 제적과 투옥을 감내해야 했던 친구들이 느낀 절박함은 더욱 컸을 터이다. 그래서일까 내 주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고 몸부림치던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하던 한 친구는 진지하게 신학교 진학을 고려한다고 내게 말했는데 사회를 바꿀 저항운동을 위해 ‘종교인의 외피’, 특히 기독교의 힘을 빌리는게 유용할 것같다는게 그 이유였다. 또 한 친구는 유명가수를 ‘의식화’ 시키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수의 영향력을 이용하자는 것인데 남진은 너무 의식이 없으니 생각이 깊은 조용필을 그 대상으로 하는게 좋으리라는 구체적인 구상도 덧붙였다. 두 제안 모두 실현 되지 않았고 뜬금없는 망상같은 발상이었지만 각자 제 나름대로 시대의 중압감을 벗어나려던 몸부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시절에 노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 저곳 생겨났다. 노래를 이용하여 메시지를 퍼트리고 사람들을 결집시키려는 노력이었는데 초기엔 출처도 잘 모르는 노래들 (알고 보니 러시아 민요이거나 미국의 반전가요 등이었다), 또는 찬송가 같은 노래도 활용되었다. 노래가사바꿔부르기 (노가바)는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좀더 목적의식적으로 메시지를 담으려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가사내용도 점점 더 과격하고 노골적인 것으로 변했다. 77년 소위 26동 사건이라 불리는 대형 시위를 촉발시킨 사회학과 심포지엄이 있었다. 진행 사회를 맡은 나는 미리 행사장에 가 았었는데 시간이 넘어도 발제와 토론을 맡은 후배들이 나타나질 않았다. 시위로 번질 것을 우려한 교직원들이 이들을 격리시킨 탓인데 그 사정을 알 수 없는 현장에서는 웅성거림이 시작되고 청중석에서는 자연스럽게 구호와 노래가 시작되었다. 잘 알려져 있는 건전가요의 곡에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노랫말이 그날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날 밤 많은 친구들이 관악경찰서로 잡혀갔다. 밤샘 취조의 내용은 이 행사를 시위로 이어지게 사전에 모의했는지, 누가 기획했는지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경찰은 그날 새롭게 불린 노랫말 가사에 주목하고 이 노래를 퍼트린 사람을 찾아내려 했다. 거짓말을 못하던 1학년 후배가 일부 기억이 난다고 가사를 불러주었고 그는 이 날의 시위를 기획하고 주동한 인물의 하나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다. 후일 그가 학교에서도 제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 속에 분노와 계면쩍음이 뒤섞여 올랐던 기억이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마음 한켠에 남아있다.

대학4학년 때 주변의 몇몇이 노래모임을 만들자고 권유했다. ‘메아리’라는 이 노래동아리는 실천과 노래를 연결하는 일종의 문화운동을 모색했던 것으로 나는 초창기에 함께 하다가 꾸준히 참여하진 않았다. 메아리는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들을 확산시키고자 애썼는데 그 가운데 김민기의 노래는 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후일 80년대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이어져 큰 주목을 받고 이들의 노래 중에는 아름다운 선율과 묵직한 노랫말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곳이 적지 않다. 광주의 비극을 거치고 노동운동이 확대되면서 노랫말과 곡조도 점점 강하고 투쟁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70년대에 바탕한 내 생활세계의 경험 속에는 작은 연못, 아침이슬, 상록수, 공장의 불빛, 금관의 예수 등 혼자 조용히 읖조리며 부르던 김민기 노래의 서정성이 깊이 자리한다. 존 바에즈를 좋아하던 친구가 김민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내 자신 70이 되어 그 시절을 상징하던 인물의 부음을 들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미자가 ‘노래는 나의 인생’이라 했지만 우리의 개인사나 시대사도 노래의 변천사와 겹친다. 뽕짝이라 부르며 도외시하고 공순이들의 노래라 천시했던 가요는 트로트 열풍을 타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다. 통기타를 치며 청년세대의 우울한 감수성을 일깨우던 노래는 사랑을 노래하는 발라드 가수들의 감미로운 정조로 이어지고 있다. 노찻사 출신의 가수가 유명인의 대열에 올라서기도 하고 각종 시위에 운동가요가 여전히 불리지만 더이상 독특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런가하면 서태지와 아이들을 효시로 터저나온 새로운 복합장르는 오늘날 K-Pop이란 대형 문화현상이자 기획산업으로 발전했다.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 숱한 아이돌 그룹이 나타나고 이들의 노래는 이해하기조차 어려울만큼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소비와 자극을 찾는 포스트 시대의 경향을 대변하는 노래도 있지만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게릴라 정신을 내거는 노래도 인기를 끈다.

리듬과 운율, 달라진 노랫말을 보노라면 반세기 한국사회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해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노래를 좋아하던 나도 이젠 거의 대부분의 노래가 생소하고 곡조를 흉내내기조차 쉽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함께 노래한다는 것, 합창으로 연대하고 노랫말에 공감하는 감수성 자체가 크게 변하고 있다. 70년대 우리의 삶에 녹아있던 김민기, 노가바, 번안가요의 노래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김민기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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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속 세대 감각

내 수업에서는 학생들에게 한 학기에 7-8 차례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요구한다. 한두번의 시험으로 성적을 평가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불합리하기도 해서 학생 개개인의 글쓰기 수준이나 생각의 깊이를 확인할 기회를 확대한 것이 그 첫 이유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에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을 조건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 개개인의 진솔한 생각을 정리해보고 다른 친구들의 견해와 비교해보는 간접토론의 효과를 기대한 것도 그에 못지 않은 의도다.

실제로 그런 효과가 제법 뚜렷하다. 모든 글쓰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몇 주제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견해들이 제시되고 그 차이를 요약해주고 서로 의견을 주고 받게 하면 꽤 진지한 토론이 오가는 것을 확인했다. 때로는 문제 자체가 너무 거창하고 손쉽게 결론내리기 어려운 것들이어서 과연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까 싶은 것도 있지만 글 속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그 이유를 분명히 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학기 초에 엉성한 글을 쓰다가 점차 자기 생각을 뚜렷하게 피력하는 경우를 보노라면 나름 괜찮은 훈련이 된다는 생각도 든다.

평가할 자료가 많아지면 채점은 그만큼 피곤해진다. 단지 양이 많아서만 아니라 주제에 따라 학생들의 글내용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나름 애써서 자기 생각을 서술한 보고서를 객관적인 지표에 맞춰 평가할 기준도 없고 엉뚱하지만 재미있는 글을 만나면 어떤 점수를 주어야 할지 한동안 고민에 쌓이기도 한다. 성적 평가에서 겪는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다양한 생각을 접하는 즐거움이 생각보다 크다. 이들이 MZ세대 전반을 대표하는 집단일 수는 없지만 간간히 신선한 의견이나 개성적인 주장을 만나면 요즘 세대의 감각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내가 대학생일 때 저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후생이 가회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이번에 평가하면서 본 흥미로운 견해들 두어가지 정리해본다. 뒤르켐의 시민종교 개념을 오늘 한국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수강생의 80% 정도는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한국도 애국심이 강하고 축구나 문화 영역에서 강력한 동일시가 나타나고 있음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런데 20% 정도는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그 이유는 개인주의와 아노미 수준이 매우 강하여 국가공동체에 대한 관심조차도 개인의 이익추구에 종속되기 때문이라 했다. 전쟁희생자나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들에 대한 존경심이나 명예부여의 수준이 매우 낮다는 것이 그런 기저를 보여주는 현상이라는 주장인데 흥미로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베버의 합리화에 대한 논의를 근거로하여 한국사회가 과잉합리화 상태인지 아니면 합리성의 부족 상태인지를 물어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흥미로왔다. 대부분 과잉합리화라고 대답했는데 주로 단일한 성공도식, 성적 중심의 교육, 지나친 경쟁문화를 그 결과로 지적했다. 돈이 최고 가치가 되는 현실이 과잉합리화의 징조라고 지적한 글도 눈에 띄었다. 동시에 한국사회는 합리성이 퇴조하고 있고 집단주의와 정서적 휩쓸림이 지배하는 비합리화가 진전되고 있다고 주장한 학생도 있었다. 형식합리성과 가치합리성의 불일치와 모순이 심화되면서 합리성 전체의 기저를 흔들고 있다는 주장도 보였다.

복합적인 문제가 속출하는 21세기에 과학적인 대응과 인간적인 소통 중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할지에 대한 물음에는 후자에 손을 든 학생들이 많았다. 과학기술대학에 재학한 젊은 세대의 반응인데 다소 의외였지만 개인주의적 성향의 한켠에 나름대로 공동체적 지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개성적이고 다양한 견해들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저들 세대의 특징일수도 있겠다. 경청할만한 의견들을 읽는 즐거움이 있어 채점의 수고를 꽤나 상쇄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