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현재 총 25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호류지 불교미술유적, 히메지성, 교토의 역사유적,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나라 유적, 닛코 신궁 및 사찰, 구스쿠 유적 및 류쿠왕국 유적, 히라이즈미 불교유적, 후지산, 도미오카 방적공장 및 유적지, 일본 메이지 산업 혁명 유적, 르 코르뷔지에 근대건축, 나가사키 기독교 은둔유적, 모즈 후르이치 고대고분군, 조몬 선사시대 유적 등이 그것이다, 고고학 유적, 고대 문화 유적, 불교나 신도 등 종교유적, 무사문화, 근대화 관련 유적 등으로 다채롭고 다양하다.
하기 일대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다섯 곳이 있다. 하기 반사로, 에비스가하나 조선소 유적, 오이타야마 타타라 제철소 유적 등 세 곳은 조슈번 당시의 제철공업과 조선업의 기반시설을 보여주는 곳이고 소카손주쿠와 하기 성하촌 마을은 막말 유신기의 교육기관 및 생활공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다섯 곳이 모두 ‘메이지 근대산업화 문화유산’이라는 항목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게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 제강·조선·석탄 산업 유적’이다.
이 항목에 속한 유적들은 하기시에 한정되지 않고 무려 8개 현에 걸쳐 산재하고 있다. 2009년 초기 잠정목록 등재 당시에는 ‘큐슈와 야마구치의 근대화산업유산군’이라는 이름이었다 한다. 규슈와 야마구치에 대부분의 유적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광범위한 지역의 유적들이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야마구치 (조슈)의 하기 반사로나 가고시마 (사쓰마)의 구 집성관 유적은 메이지 유신 이전에 세워진 것이다. 두 지역이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유신을 주도했던 것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메이지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이 그런 시각을 잘 드러낸다.
제철소 및 탄광 유적과 무사집단의 생활공간을 같은 범주로 묶는 이 발상은 경제부처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일본 문화청이 근대유산의 활용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경제산업성이 ‘산업유산’과 연계하여 ‘근대화산업유산’이라는 범주를 고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전국 각지의 유적들이 역사문화유산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결국 2015년 ‘메이지산업혁명: 철강·조선·석탄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유산 등재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갈등이 새롭게 분출했고 그 파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주요 근대산업시설 중 몇 곳이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현장이었고 조선인 수탈과 직결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산업화 유적을 등재하면서 일제시대의 부정적 역사를 은폐하거나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샀다. 중국은 일본의 시도에 항의하면서 같은 해 ‘난징대학살’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였다. 한국에서는 일본군‘위안부’ 기록물을 기록유산으로 지정하는 노력을 국제간 연대로 추진하고자 했다.
특히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가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일본은 유네스코에 사도광산 등록신청서를 내면서, 등재 대상 기간을 에도시대(1603~1868년)로 한정했다. “17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금 생산지였던 사도광산을 알리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이 이뤄졌던 20세기를 제외하려는 꼼수로 받아들여졌다. 당연히 한국으로부터의 반발이 거셌고 ‘군함도’라는 영화까지 제작되어 대중적 비난이 거셌다. 하지만 올 8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서 사도광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통과되었다. “우리 정부는 ‘전체 역사’를 사도광산 ‘현장에’ 반영하라는 유네스코측의 권고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일본이 성실히 이행할 것, 또 이를 위한 선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전제로 등재 결정에 동의했다”고 외교부가 밝혔지만 그 이행의 수준과 속도는 미덥지 않아 불씨가 남아있는 상태다.
하기의 소카손주쿠도 요시다 쇼인의 삶과 사상,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그 제자들의 행적 중심으로 일본의 근대화 산업화 유적으로만 설명되고 있다. 요시다쇼인과 젊은 무사들이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론을 주창한 것, 서양 열강에 침탈당한 일본의 국익을 조선과 만주에서 벌충하자는 침략주의를 내세운 것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하기시에서 한국과 관련된 문구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구절 뿐이라 하니 세계문화유산의 등재 제도에 담긴 인류보편적 함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섬세하고 실증적인 면모도 강한 일본사회가 유독 근현대사의 역사인식에서만 그 집단편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중국 역시 동북공정에서 드러나듯 자국 중심의 역사해석과 유적활용이 무서울 정도다. 그렇다고 한국이 특별히 보편주의적 역사인식을 내세울만한 처지에 있지도 않다. 애초 세계주의적인 지향을 지닌 기관이었던 유네스코도 점차 개별 국가의 입장과 이익을 내세우는 장이 되었고 세계문화유산 역시 민족주의 문화정치에 좌우되는 흐름이 강해졌다. 언제나 한 중 일의 문화유산을 인류문명사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해질까. 하기의 유네스코 유적들을 살펴보면서 저들의 한계 못지 않게 우리들의 역사인식, 문화정치의 내면도 살펴볼 일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