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vities

세 얼굴의 그리스

짧은 아테네 여행이었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그리스의 면모들을 접할 수 있었다. 예상했거나 기대한 것이 아니었는데 아크로폴리스, 역사박물관, 고고학박물관, 그리고 아테네 시내를 방문하면서 적어도 세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그리스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깊이 있는 이해는 아니지만 내 지식의 편협함을 확인하고 교정할 수 있었던 귀한 여정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텥레스로 대표되는 철학과 지성, 아테네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폴리스 공화국이 내게 가장 친숙하고 깊이 자리잡은 이미지다. 이곳에 오고 싶었던 오랜 꿈도 이런 심상 이미지에 기반한다. 이런 모습은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광장, 파르테논 신전과 디오니소스 공연장에서 감동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나는 아테네 시내를 오가면서 2천년 전 이곳에서 꽃피웠던 철학과 미학과 건축과 예술을 떠올렸고 뛰어난 사상가들이 곳곳에서 대화하고 토론했을 모습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잔해만 남은 현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융성한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적지 않은 사전 지식과 상상력이 요구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런 선행지식이나 오랜 기대감이 없었다면 흩어져 있는 유적지에서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마지막날 방문했던 고고학 박물관에서 이 고대 그리스의 모습을 좀더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아프로디테와 포세이돈의 조각상, 검은 빛과 정교한 그림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그리스 도자기, 그리고 이곳에서 살았던 사상가들의 얼굴상을 모아놓은 전시실 앞에서 고대그리스에서 꽃피웠던 문명적 지혜와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 있었다.

둘째날 오후 탐방했던 국립역사박물관은 내게 전혀 다른 그리스 이미지를 선사했다. 이곳은 그리스의 근현대 역사를 보여주는 곳으로 그리스 옛 의회 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데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전쟁, 외교, 갈등 등이 나열되어 있어서 독립운동사박물관이라 할 만했다.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나는 줄곧 당혹스러웠는데 그리스 근현대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별무했기 때문이다. 전시를 보면서 오랜 세월 그리스는 로마제국, 라틴제국,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그 제국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음을 깨달았다. 1830년대 일련의 혁명과 전쟁을 통해 독립국가건설의 노력이 전개되었고 거의 1세기에 걸친 격변을 거쳐 오늘의 그리스가 출범한 것이다. 전시물은 대부분 오스만제국과 싸울 때 사용된 군대의 깃발, 항쟁을 주도했던 군인들의 초상화, 그리스 정교의 수장들 및 상징물이었다. 어디에도 파르테논 신전이나 아테네 민주주의, 소크라테스의 철학 같은 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터키와의 악연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고대와는 거의 단절된 근현대 그리스의 모습은 솔직히 낯설었고 컨텐츠 역시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리스 국가형성과정이 힘들었음을 반증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세번째 모습은 내가 아테네 길거리에서 받은 인상에 기초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은 건물 외벽에 무질서하게 그려져있는 수많은 그래피티였다. 뉴욕같은 도시라면 어울릴지 모르겠으나 페인트 낙서들이 아테네의 거리 곳곳에 널려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모습이었다. 중심부의 많은 건물 철제셔터와 외벽에 그려진 그래피티는 아테네 도시의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드러낸다기보다 어딘지 불안하고 쇠락해가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실제로 거리 곳곳에 노숙자의 모습도 보이고 문이 닫힌 상점들도 자주 보였다. 2015년 그리스 경제위기가 미친 충격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2000년대 초반 호황을 누리던 그리스는 외환위기 이후 5년 사이에 경제 규모가 4분의 1이나 쪼그라들었고 실업자는 약 2.5배로 폭증했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가 짜준 경제 프로그램을 가동했는데도 형편은 거의 경제공황에 가까와 그리스는 심각한 사회불안을 겪어야 했다. 정부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유럽연합에서는 ‘유로존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고 위협하면서 불편한 갈등이 지속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이나 튀르케에와의 독립전쟁에서 보인 강인한 국가의식에 비해 실제 생활상의 그리스, 먹고사는 현장의 모습은 또다른 얼굴로 비쳐졌다.

세가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며 국립역사박물관에서 본 Refugee (난민) 라는 주제의 특별기획전을 생각한다. 이 전시의 부제는 “From Greater Greece to Contemporary Greece”라 되어 있다. 19세기 독립과정에서 옛 비잔틴 제국시절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귀속시키려는 발상이 ‘greater Greece’ 구상을 강화시켰다고 한다. 1821년 그리스 혁명의 시작부터 1923년 로잔 협약으로 현재의 그리스가 출범한 100년간의 역사는 유럽사의 격변, 정치적 대응, 거대한 인구이동으로 특징지워지는 시기인데 그 핵심에 난민이 자리한다는 것을 이 전시는 강조하고 있었다. 독립의 과정에서 터키를 비롯한 곳곳에 거주해온 그리스인들이 다수 이주해왔지만 이들의 정착은 쉽지 않았고 많은 고통과 가난, 불안의 삶을 겪어야 했다. 정치적 독립은 이루어졌지만 사회적 통합이나 경제적 안정은 요원했던 수난의 난민사를 보면서 고대 그리스와는 너무 다른 현대 그리스의 실상을 미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듯했다. 사실 20세기 지구상에서 독립운동을 추구한 약소국가들에게서 이런 모습은 공통적이라 할 수도 있다. 난민문제가 다시 지구적 현안이 되고 있는 지금, 인간의 이동과 정착이란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읽는 작업이 필요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