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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레그넘

외교협회의 학술지인 [외교]지가 151호의 특집으로 ‘불확실성의 세계와 한국’이란 주제를 설정하고 내게 권두논문을 청탁했다. 전지구적 불확실성을 조망하고 필요한 시대정신을 언급해달라는 쉽지 않은 주문이어서 망설였지만 내 스스로 정리해볼 필요를 느끼던 바라 응락했다. 글을 쓰면서 공부도 되고 내 생각을 다듬는 계기가 되었지만 더위 속에서 진땀을 많이 흘렸다.

나는 인터레그넘이란 개념을 시대적 불확실성을 풀어가는 키워드로 삼았다. 인터레그넘은 원래 한 국왕이 죽고 그 후계자가 취임하지 않은, 지체된 궐위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후 이태리의 정치철학자 그람시는 이 말을 재구성해서 사회질서를 지탱해온 기존의 프레임은 약화되는데 새로운 질서는 채 형성되지 못한 예외적 상태를 뜻하는 개념으로 활용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말을 차용해서 오늘날 지구세계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자 했는데 나도 그런 시각에 동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2024년 8월 빠리올림픽은 자유, 평화, 우애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다양한 인종, 문화, 국가들의 연대를 과시하면서 종료되었다. 올림픽 내내 한국선수들의 선전 소식도 좋았고 세계적 선수들의 높은 기량을 접하는 즐거움이 컸다. 하지만 규칙에 승복하는 스포츠와 달리 현실세계는 혼란의 연속이다. 이스라엘-하마스의 무력충돌은 언제 마무리될지 알 수가 없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핵전쟁을 염려해야 할 지경에까지 치닫고 있다. 9월 초엔 극우 이념을 표방하는 정치세력인 ‘독일을 위한 대안’ (AFD)이 튀링겐주의 제1당으로, 작센 주의 강력한 2당으로 약진하여 나찌즘의 역사를 기억하는 독일은 물론 유럽과 세계의 우려를 더하는 중이다.

눈 앞으로 다가온 미국의 대선은 더욱 혼란스럽다. 새로운 세계적 리더십이 출현하리라는 기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 채 지역분열, 계층갈등, 인종분규가 착종된 진영 대립으로 민주주의의 심각한 퇴행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푸틴 및 김정은과의 친분을 강조하면서 동맹의 가치를 폄훼하는 트럼프 후보의 메시지는 나토의 집단방위에 의존하는 유럽이나 한미동맹의 오랜 전통을 중시해온 한국에 큰 당혹감을 안겨주고 있다. 대선 결과가 어떠하듯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은 강화될 것이란 전망과 함께 일종의 ‘내전’ 상태가 지속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반도의 불안감도 전례없이 커지고 있다. 핵무력강화정책을 헌법에 명기한 북한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국가관계로 재규정했고 남북간의 모든 교류와 접촉은 차단되었다. 한미일 협력체제가 군사협력의 영역에까지 확장되면서 북중러의 결속과 한중마찰 심화의 우려도 함께 커진다. 새로운 안보위기론과 함께 한국 독자핵무장론이 등장하는가 하면 제2의 한국전쟁 가능성을 말하는 국내외 견해도 나타나고 있다. 친숙하던 세계질서가 흔들리고 익숙했던 한반도 환경에 심대한 변화가 진행 중임을 우리는 매일의 뉴스에서 확인하고 느끼는 중이다.

I2차대전 이후 정착된 질서, 즉 주권국가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과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세계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제분쟁을 규율하고 세계경제를 뒷받침해온 다자적 국제기구가 이전만큼 효율적으로 또 포괄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 늘어간다. 국제사회의 일관된 반대와 제재에도 여섯 차례 핵실험을 실시한 북한에 IAEA도 유엔 안보리도 실질적인 통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구생태계의 난개발을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려는 유엔의 원대한 목표나 탄소감축을 위한 빠리협약의 실천도 개별 국가의 반발과 성장주의를 규율하는데는 불충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주의 세계질서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고 세계화의 흐름에 강력하게 연동되어 선진국의 대열에까지 발전하고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구현한 한국으로서는 다자주의 원칙에의 확실한 지지에 더해 인터레그넘 상황의 양면성을 민감하게 이해하고 대응하는 전략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지구적 차원의 불확실성과 복합위기에 더해 한반도적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고전적 위기에도 대처하기 위한 총체적 역량구축, 혁신적 버넌스의 구축에 힘을 다해야 하는 시대다. 미래충격, 뉴파워, 책임윤리의 화두 속에 담긴 시대정신을 견실하게 추구해가는 탁월한 리더십도 절실하다. 레트로토피아의 유혹을 벗어나기 위해 민주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과 미래를 향한 희망서사를 구축하는 일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전환기의 시대정신은 희망과 염려, 가능성과 제약조건, 미래와 과거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면서 레트로토피아로의 유혹을 이겨내고 국가공동체의 질적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인류적 시야의 책임윤리를 확대해가는 포괄적 역량에서 찾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