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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찿사 40주년

11월 2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40주년 기념공연이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있었다. 나는 서울대에 노래동아리 메아리가 만들어질 때 참여한 바 있으나 열심히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노찾사가 출범하는 과정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지만 노찿사의 출현에 메아리의 전사가 꽤 중요했던만큼 내 스스로는 노찾사의 활동에 남다른 애정을 느끼곤 했다. 물론 그 투쟁성과 운동성보다 서정적인 노랫말과 곡조를 더 사랑했던 것이었지만….

양현아 교수의 후의로 초대권 두 장을 받았다. 누구와 함께 이 공연을 관람할까 생각하다 대학시절 노래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동네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조형근 박사가 떠올랐다. 조박사는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마을문화운동을 주도하면서 깊이있는 글쓰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스스로 ‘동네 사회학자’라 하지만 그의 글과 책이 보여주는 시야의 너비와 사고의 깊이는 웬만한 유명학자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다. 마침 시간이 된다 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대부분 50,60대 이상의 세대인 듯 했다. 노찿사 노래가 영향을 미치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일테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실제로 공연 자체가 8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황에 맞서 노래운동이라는 양식을 만들어가던 이들의 열정을 새삼 되돌아본 자리였다. ‘노래를 찿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은 유명하지만 실제 누가 노래를 불렀는지 가수 개인의 이름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문학의 영역에서조차 공동창작을 중시하고 개인을 드러내기보다 계급을 앞세우던 시대의 한 반영이었다. 90년대 이후 이들 가운데서 유명 가수가 나타나기도 하고 노찿사의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공연 앞부분에서 김민기에 대한 감사와 그를 기리는 노래들이 불리워졌다. 아침이슬을 비롯해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어두운 시대를 건너왔던 기억을 모두가 떠올리는 듯 했다. 김광석이 불렀던 그루터기, 광야에서 등은 지금도 애창되는 곡이고 나도 간간히 부르곤 했던 노래다. 이들 노래를 40주년을 기념하면서 60대 청중들과 함께 부르니 감회가 새롭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들 노랫말을 다시 한번 적어본다.

천년을 굵어온 아름 등걸에 한올로 엉켜엉킨 우리의 한이 /고달픈 잠깨우고 사라져오면 그루터기 가슴엔 회한도 없다 / 하늘을 향해 벌린 푸른 가지와 쇳소리로 엉켜붙은 우리의 피가/ 안타까운 열매를 붉게 익히면 / 푸르던 날 어느새 단풍 물든다 //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 선 바쁜 의지로/ 초롱불 밝히는 이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 울음 있다 /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 /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 우리 어찌 가난 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 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겨 쥔 뜨거운 흙이여

지금 들어도 아름답고 비장한 노래다.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까지를 상상하는 웅원한 기상이 놀랍고 대지를 꿰뚫는 아름 등걸의 강인함이 뭉클하다. 그런가하면 한, 고단함, 회한, 피울음 같은 아픔과 좌절이 깊이 배여있다. 그래서 ‘초롱불 밝히는 이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넘친다’고 부르짖고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라 외치지만 그 바탕에는 짙은 탄식과 울음이 깔여있다. 아름답지만 슬픈 곡조가 가슴을 울린 것은 이런 정서에의 공감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80년대의 노래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다. 사랑,우정,인생 등을 노래하는 대중가요가 오랜 역사와 함께 주류를 형성했는데 우리는 종종 유행가라고 부르곤 했다. 대학생들은 뽕짝에 대한 거부감과 팝송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졌지만 노래의 메시지나 감성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에 김민기로부터 시작해서 노찿사로,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 이어지는 사회의식 지향의 노래가 있었다. 존 바에즈와 비틀즈의 노래들 가운데 일부도 이런 맥락에서 애창되었다. 그런가 하면 클래식, 가곡, 종교음악 등이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범주로 존재했다. 대중가요는 통속적이었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운동권 노래는 진지했지만 부담스러웠다. 클래식은 어쩐지 상층계급과 서구지향적인 분위기여서 접근하는데 문턱이 높았다.

나를 포함하여 꽤 많은 사람들은 대학에 들어와 두번째 유형의 노래를 접하기 시작했다. 억압의 시대, 분노의 시대를 반영하듯 데모는 늘 노래를 수반했고 노래는 그 자체가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런 흐름이 전부였던 것은 아니다. 통속적인 것은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 정서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노래가 투쟁의 도구가 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즐겨 부르던 성가곡과 흑인영가가 설 자리를 잃으면서 한동안 부를 노래를 찾지 못해 당혹스러웠던 기억도 떠오른다. 내가 초기의 노찿사 노래들, 서정적이고 은유적인 노래들을 좋아했던 것도, 그 이후 지나치게 정치화된 노래에 거리감을 느낀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노찾사 40년을 공연을 앞두고 아름답게 마무리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활동을 전개해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후자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날 공연도 ‘회고’에만 방점을 두지 않고 새로운 노래, 새로운 가수를 선보이는 부분을 담았고 앞으로의 성원을 부탁하는 메시지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재즈풍과 록 형식의 새로운 곡과 노랫말도 소개되었다. 그 결심이 뜻있는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새롭게 전개하는 앞으로의 음악 형식, 노래형태의 특성이 무엇일지 다소 궁금했다. 공연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러하듯 어디에서 매듭과 혁신을 추구할지 잘 와닿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과거 7,80년대와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확신하기가 어렵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느껴질 정도로 해묵은 모순과 좌절이 거듭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감수성과 문화적 취향은 엄청나게 변했다. K-Pop의 아이돌 노래가 전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가 하면 임영웅 등 트롯트 열풍이 전국민을 격동시키는 오늘이다. 21세기 문화운동이 새로운 힘을 얻으려면 그 형식과 감성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꿈이 사라지는 시대에 필요한 희망의 메시지와 선율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그래서 노래가 힘이 되는 동력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 중대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