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vities

두 과거사와의 재회

하기 여행은 두 과거사와 만나는 여정이다. 사건으로 말하면 메이지 유신과 한일합방이고 인물로 말하자면 요시다 쇼인과 이토 히로부미와의 대면이다. 비록 하기 방문은 처음이지만 저 두 사건과 인물은 낯선 대상이 아니다. 내 역사의식의 바탕에 중요한 자리를 이미 점하고 있기에 저들과의 조우는 첫 만남이라기 보다는 이전에 종종 마주쳤던 대상과의 재회라 함이 옳을지 모르겠다.

메이지 유신과 조선침략은 연결되면서도 구별된다. 그 양면을 하기의 인물들이 제각기 보여준다.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제창했지만 메이지 유신의 당사자는 아니다. 키도 타카요시는 유신의 주역이지만 정한론의 실천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가하면 이노우에 가오루는 강화도의 불평등 조약을 강제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 속으로 끌어들였다. 오시마 요시마사는 청일전쟁, 동학농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약소국 조선을 유린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온건개혁파로 평가되지만 실질적으로 초대 통감으로 조선의 강제병탄의 주역이 됨으로써 정한론의 실현에 앞장섰다. 이들 모두가 하기 출신의 유신지사이자 메이지 시대 고위직 들이다.

개인적으로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 줄곧 양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배외적이고 낡은 막부체제를 근대문명국가로 탈바꿈시킨 놀라운 역사적 성취라는 일반적 평가에 나는 공감했다. 목숨을 아끼지 않은 유신 지사들의 활동에서 신선한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정한론의 신봉자들이었고 실제로 제국주의 침탈의 당사자들이어서 비판과 비난도 불가피했다. 메이지 유신에 대한 찬양이 조선의 상대적 낙후성을 강조하고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될 때는 분심을 억제치 못한 적도 있었다.

대학원 시절 탐독했던 배링턴 무어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독일과 함께 메이지 일본을 ‘위로부터의 혁명’ 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다루었다. 큰 틀에서 그 논지에 공감했고 나도 저런 책을 써 보리라는 꿈도 꾸곤 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이 이웃 국가의 침탈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저자가 서구의 눈, 강대국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견의 소산이라 생각했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총체적 문명전환과정에 대한 부러움과 조선병탄이라는 침략행위에 대한 비판의식 사이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거나 오락가락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나는 조선에도 ‘위로부터의 혁명’ 시도가 있었음을 밝힘으로써 내 인식의 불편함을 극복해 보려 했다. 일본과 조선 두 나라 모두 체제변혁을 향한 개혁세력이 존재했고 그 주체역량이나 사상적 지향에 큰 차이가 있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존중하는 한편으로, 정치변동의 시점에 작용한 외압의 성격차이가 한일간 상반된 결과를 초래한 주원인임을 밝힘으로써 침략 행위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고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당시 유행하던 세계체제론이나 종속이론의 도움도 받았고 식민사관 극복을 내세운 내재적 발전론의 영향도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내 박사논문의 얼개는 메이지 유신과 갑신 갑오개혁의 비교에 바탕한 것이었다. 비교사 연구가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탄탄한 배경지식을 요구하는지 잘 모르면서 겁없이 덤벼든 시도였다. 일본사에 대한 얕은 지식을 커버하느라 하바드 엔칭 도서관에서 닥치는대로 메이지 유신 관련 저작들을 찾아 읽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조금씩 알게되면서 오히려 같은 수준의 상세한 한국 자료를 찾기 어려워 비교 자체가 벽에 부딪치는 경우도 많았다. Meiji Restoration 이라는 책을 쓴 하바드 일본사 전문가 알버트 크레이그 교수에게 내 연구주제를 말했다가 ‘잘못된 연구가설’이라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처음 요시다 쇼인이 유학자였다는 점과 강렬한 반서양 배외사상을 주창했음에 주목하고 면암 최익현과 유사한 인물이 아닐까 여겼다. 실제로 유학적 배경을 가진 지식인이면서 목숨을 걸고 서양에 맞설 것을 요구한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이 둘은 유사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실제 두 사람의 행동과 지향은 물과 기름마냥 이질적이었음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차이는 단지 두 인물의 개성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무라이와 양반사족의 오랜 행동양식, 그 배후에 작동한 막부체제와 중앙집권체제의 간격이 깊고 뚜렷했다. 그 다름의 성격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내겐 오랜 숙제가 되었다.

강렬한 배외의식이 근대문명 수용을 포함한 개방적 주권의식으로 변하는 계기가 어디서 가능했는지를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요시다 쇼인과 그 제자들이 문명개화와 서구화의 지지자가 되었던 것처럼 한국의 김옥균과 대원군, 김홍집과 전봉준의 연대는 왜 불가능했을까 궁금했다. 일본에 영향을 미치던 영국과 프랑스 세력과 조선에 개입하던 일본 세력의 성격 차이가 워낙 커서 내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초기의 가설을 논문에서는 일관되게 견지했다. 하지만 한일 간의 내재적 차이가 지닌 무게감을 경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내 박사논문을 빨리 출간하라는 몇 분의 고마운 권유에 끝내 부응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최근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라는 과오] 라는 책이 나왔는데 “일본을 멸망시킨 요시다 쇼인과 조슈 테러리스트”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하기가 자랑하는 유신주역들을 테러리스트, 나아가 일본을 망친 인물로 규정하는 책이어서 눈길을 끈다. 저자 하라다 이오리는 요시다 쇼인과 그 제자들이 막부의 평화로운 개혁과정을 무력으로 뒤엎고 그 공을 탈취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진보적이거나 국제주의적 역사관을 펴는 것은 아니고 정한론과 조선침략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막부중심의 일본사관에 철저한 시각으로 한국인 독자로서는 당혹스러울만큼 우파적이고 보수적인 관점을 견지한다고 알려져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은 다양하게 평가되고 역사논쟁의 한 축을 이루는 주제임을 보여준다.

메이지 시기 9명의 총리 중 5명을 배출한 지역이지만 현재의 하기는 인구가 줄고 교통도 불편한 낙후한 곳이 되고 말았다. 해체된 하기성의 천수각을 재건하려는 계획도 예산 부족으로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교토는 물론이고 옛 사쓰마 지역인 가고시마에 비해서도 하기의 변화는 더디고 역사관광지로의 존재감도 크지 않다. 메이지 유신을 지역 상징으로 갖고 있는 도시로서는 다소 의아스러울 정도다. 메이지 유신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퇴락한 탓일까 생각도 들지만 최근 일본의 역사해석을 보면 결코 그럴 것 같진 않다. 옛 조슈의 역사를 상징화하고 역사로 해석하는 오늘의 일본은 여전히 메이지 유신을 드높이고 정한론과 조선침략의 역사는 드러내지 않는다.

박사논문을 쓴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 하기에서 다시 만나게 될 이 두 과거사는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까? 일본의 대변혁 역량이 자라난 쇼카손주쿠의 모습은 21세기 오늘의 내 눈에 어떻게 비춰질까? 조슈 5 걸로 상찬되는 유신지사들의 삶과 행적을 다시 접하면서 내 마음엔 어떤 파문이 일까? 여러모로 궁금하지만 굳이 산뜻한 답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를 내려놓기로 한다. 언젠가 더 나은 해석과 공감의 서사가 등장할 것을 믿는 열린 소망으로 두 과거사와의 재회를 담담히 대면할 마음의 빈공간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