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양림동 근대문화유적

12월 6일 광주시 양림문화마을을 탐방했다. 호남지방의 근대화 과정, 특히 기독교를 중심으로 진행된 초기의 다양한 변화가 역사적인 건물과 함께 농축되어 있는 곳이다. 이전부터 남도답사 대상 리스트에 올려 놓았었는데 이제야 현장을 오게 되었다. 오웬, 유진벨 등 이름이 익숙한 초기 선교사들의 삶이 배어있는 공간과 기념물을 둘러보았고 최흥종, 조아라, 김필례, 김현승 등 이곳에서 배출된 초기 한국 지도자들의 행적도 그들이 활동했던 병원,교회, 학교, 기념관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

도로변의 한 건물이 눈에 띠었다. 붉은 3층 건물의 외벽에 이국적인 선교사 얼굴이 장식처럼 붙어있고 흰색의 부조로 제작된 ‘최후의 만찬’ 작품이 걸려있다. 가만히 보니 예수를 한 가운데 두고 좌우로 이 지역에서 헌신했던 선교사와 초기 기독교 리더들 11명을 배치한 것이다. 베드로, 요한 등을 대신하여 오웬, 유진벨, 쉐핑, 정율성, 최흥봉, 조아라 등을 식탁 주위에 배치한 창조적 구성이 놀랍다. 저런 작품을 상상하고 저런 컨텐츠를 거리에 조성할 수 있는 이 지역의 문화적 안목이 대단하다.

호남신학교에 연한 작은 동산에는 이곳에서 활동하고 생을 마친 벽안의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 있다. 그 뒤에는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순교한 호남지방의 850여 순교자들을 기리는 돌비가 세워져 있다. 동산을 돌아나가는 곳에 이들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긴 돌계단이 있는데 ‘고난의 길’이란 이름처럼 한발 한발 걸으며 인생을 생각하게 한다. 종교사회학자로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양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셨던 노치준 목사께서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어 더욱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묘역에서 내려오면서 유진밸 기념관을 들러 4대에 걸친 이 가문의 헌신적 활동을 살펴보았다. 100년 이전 가난하고 낙후한 한국,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인들과 살기로 작정한 저들의 헌신과 수고는 참으로 고귀한 것인데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생각만큼 살갑지 않다. 한 때 북한돕기활동으로 만나곤 했던 인세반, 인요한 형제의 사진도 반갑게 확인했다.

이 지역에 큰 발자취를 남긴 오방 최흥종 목사의 일생을 자세히 알게 된 것도 큰 보람이었다. 3년전 완공되었다는 오방기념관에서 손자인 최협 교수를 반갑게 만났고 그로부터 직접 여러 설명을 들었다. 낯선 선교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회심한 이후 평생 한센인을 위한 헌신자로 생활했고 평양신학교를 거쳐 시베리아 선교사로 활동한 신앙인이었으면서 3.1운동, 신간회, YMCA, 노동공제회 등 한국의 근현대사 곳곳에 깊은 족적을 남긴 최 목사의 활동 폭은 참으로 놀랍다.

기념관의 전시 내용을 통해 초기 한국기독교에는 참으로 폭이 넓고 뜻이 깊은 어른들이 계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옥고도 치루었고 해방 직후 사회정치적 영향력이 컸을 법한데 스스로 권력과 명성을 멀리했다 하니 왜 백범 김구가 그에게 ‘和光同塵’이란 휘호를 남겼는지 이해될 듯 했다. 공식역사에서조차 힘있는 유명인들만 기억되는 오늘날 뒤늦게라도 이런 기념관이 세워진 것이 얼마나 다행한가.

최근 젊은 여행객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는 펭귄마을도 양림동의 중요한 한 모습이다. 정겨운 골목길, 오랜 담장들 곳곳에 재미있는 사진과 글귀를 붙이고 옛날 형식의 사진관과 점방 등을 만든 도시재생의 한 사례다. 선교와 교육과 계몽과 의료라는 중요하면서도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깉은 공간과 달리 이곳은 일반인들의 일상적 삶에 기반한 만큼 유쾌하고 소박한 느낌이 강했다.

골목길에 선교사와 기독교 지도자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고 담장에 이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걸로 미루어 당시의 근대문물이 주민들에게 이질적이거나 거부감을 주진 않았음이 분명하다. 종교적 가치와 계몽적 과학이 잘 어우러진 현장이었다 하겠다. 선교사들의 집과 기념관은 대체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영화를 찍을 때 배경으로 선호되기도 하고 문화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는 것도 좋아보인다.

다만 유산으로 남는 것과 현실의 영향력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종교와 역사가 지닌 무게감과 여행과 소비의 즐거움 사이의 차이도 점점 커진다. 한국의 기독교가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며 성장해오는 동안 가난하고 병든 민중과 함께 했던 모습은 점점 기념관 속으로 박제화되고 있는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저 유서깊은 공간과 건물에 담겨있는 숭고한 헌신과 교훈이 과거의 유적이나 기념물로만 남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이 더해져야 할까 내내 머리에 맴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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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대화

11월 30일 현 한반도 위기상황에서 평화를 모색하는 모임이 평창동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개최되었다. 나는 이 좌담의 사회자로 초청을 받아 세 시간을 넘기는 대화시간을 주재했다. 평창동 높은 곳에 호젓하게 위치한 이 아담한 4층 공간은 경동교회 목사로 한국의 기독교와 사회운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던 여해 강원룡의 정신을 기려 如海軒이라 이름붙인 곳이다. 이홍구 전 총리, 하태경 국민의 힘 의원, 이재정 민주당 의원, 이삼열 대화아카데미 이사장, 최상룡 전 주일대사, 이부영 전 의원, 이현숙 WPS 아카데미 이사장 등 다수의 원로와 전문가들이 자리를 같이 했고 줌으로 참여한 분도 여럿 되었다.

기조발제를 맡은 박명림 교수는 중요한 쟁점들과 제안들을 포괄적으로 제시했다. 미중대립은 신냉전이라기보다 과학기술과 문명의 표준을 둘러싸고 복합적으로 진행되는 다층적 경쟁임을 강조하고 구별된 대응을 통해 패권경쟁에 한국이 휩쓸리지 않아야 할 것을 주장했다.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위에 통일보다 평화에 주목하는 남북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 비핵화 원칙을 견지하면서 안보와 대화의 병행전략을 추구해야 할 것도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선진국으로 부상하여 제국적 속성까지 지니게 된 한국이 민족주의적 특수주의를 벗어나 보편적이고 문명사적인 시야를 확보해야 할 것을 제안했다. 역사적 경험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발상을 강조한 박교수의 진지한 발제 내용에 대체로 공감하면서 참석자들은 그 실행방안, 구체적 실마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를 두고 여려 견해들을 주고 받았다.

잔잔하지만 경륜이 담긴 이홍구 전 총리의 언급도 나로선 인상적이었다. 몇년전 같은 모임에서 나는 신냉전이 오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섞인 발언을 그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YS,DJ,JP,노태우 같은 큰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과 함께 북한변수 특히 김정은 위원장의 판단과 행동이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한반도 미래를 생각할 때 비관적인 느낌이 강해진다는 발언을 들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사회자로서 다른 분들께는 좀더 긍정적 미래전망을 말해달라고 주문하기는 했지만 문명사의 흐름은 반드시 진보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바우만이 말한 레트로토피아적 경로가 한반도에서 나타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쉽게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70년대 아카데미의 대화 모임은 사회적 소통을 증진시키고 민주주의 정신을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실현되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혼재하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존재감이 크게 약화되었다. 언론과 국회가 사회적 소통의 기제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시민들의 일상적 대화는 굳이 무거운 쟁점들에 주목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숱한 미디어와 말들의 잔치 속에서 오히려 신뢰도 화해도 힘들어진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거대양당의 정략적 판단이 일사분란하게 작동하는 국회는 고급한 대화의 장이라기보다 말의 오남용과 논리싸움의 현장이 되고 있다. 유투버, 1인 미디어, 인플루언서, 소문과 팬덤이 혼합된 디지털 시대에 대화의 존재양식도 크게 달라졌다. 신뢰와 합의를 위한 의사소통 방식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가 새로운 과제로 대두되는 상황인 것이다.

2022년 말, 유럽은 전쟁과 에너지난으로 뒤숭숭하고 미중의 대립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는데 남북관계도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다. 믿을 것은 무력 뿐이라는 신념으로 핵위협을 고도화하는 북한과 그에 따른 불안감을 호소하는 우리 내부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남남갈등은 다시 고개를 들고 정치권은 해묵은 보수 진보의 대립를 반복한다. 말이 정치가 되고 논리가 승패의 무기로 간주되는 시대에 위기해소의 지혜를 제공하는 대화란 어떤 것일까? 날선 편가름과 원초적 무력 숭배가 상황을 좌우할 때 대화가 제공하는 솔루션의 효용성은 어디까지일까? 일방적인 자기 주장, 타자와의 차별화를 목표로 한 진열장식 대화가 빈발하는 오늘, 대화가 진정 문제해결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근거와 조건은 무엇일까? 남북간에, 미중간에, 여야간의 갈등이 대화로 해소될 수 있으리란 믿음을 정말 우리는 공유하는가? 이런 근본적 질문들에 대한 겸허한 성찰과 새로운 소통양식을 탐구해야 할 문명적 전환기에 있다는 생각을 더욱 절감하게 된 자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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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藝無疆

서울대 문화관에서 10월 24일부터 28일까지 열린 한중합동의 [가없는 서예술: 書藝無疆] 서예전에 참가했다. 한국측은 소동파를 비롯한 중국의 시문을, 중국측은 이규보와 퇴계 등 한국의 문장을 쓰는 방식으로 기획된 일종의 문화교류 행사다. 서울대 교직원 서예모임인 화묵회가 홍콩 학자들의 서예단체 集古學社와 함께 개최한 이 전시에 나는 전적벽부 전문을 쓴 작품을 출품했다.

적벽부는 첫 문장을 비롯해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구절이 더러 있다. 하지만 올 여름 文徵明 서첩을 구해 그의 행서를 임서해보면서 비로소 내용 전체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배 위에서 동파와 객이 주고받는 대화는 지금 읽어도 우아한 품격이 느껴지는 고품질의 토크다. 한 때 일세영웅이었던 조조를 생각하다가 그도 세월이 흐르니 흔적조차 없어졌음을 깨달은 객은 “장강의 끝없음을 부러워하고 인생의 유한함을 슬퍼” 하는 마음을 담아 애절한 통소를 불었다.

그 소리에 화답하여 소동파는 “만물을 그 변하는 것에서 보면 어느 것 하나 순간이 아닌 것 없지만, 변하지 않는 면에서 보면 모든 것이 끝없이 존속하는 것” 임을 강조한다. 인생도 산하도 변화하는 것과 지속되는 것이 동전의 양면이니 어느 한 면에 매달려 자만하거나 애석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조물자’가 우리에게 준 무진장의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도 덧붙인다. 造物者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종교적 깨달음이라 할까, 인간과 자연을 함께 생각하는 달관이라 할까 독특한 여유와 정조가 마음에 와 닿는다.

중국측 출품작 가운데서는 홍콩 중문대학 심천학장 徐揚生이 퇴계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글을 쓴 작품이 글씨도 멋스럽고 내용과 구도도 마음에 들었다. “선비가 태어나 혹 출세하기도 하고 혹 은거하기도 하며 혹 뜻을 이루기도 하고 혹 불우하기도 하지만 오로지 자기 몸을 정결하게 하고 옳음을 행할 뿐 禍福을 논할 것은 아니다.” 조선 유자의 반듯함이 드러나는 글인데 소동파의 도학적인 분위기와 이퇴계의 유학적인 정신이 같은 듯 다른 듯, 화이부동의 싫지않은 긴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현실을 돌아보면 삽시간에 저련 정신의 여유가 사라지고 만다. 도무지 품격이란 찾아볼 수 없고 개인과 자파의 ‘화복’만 따지는 국내의 정치현실, 자국의 이익 앞에 인류의 공존이 위협받는 국제정세, 핵무장론이 등장할만큼 어려워진 남북관계 등 답답한 상황을 앞에 두고 소동파와 이퇴계는 무어라 조언할까? 또 통소를 불던 저 객은 어떤 노래를 부를까? 한중 민간의 문화교류가 정치갈등의 파고를 넘어 서로를 존중하며 순항할 것인가? 전시회를 지키면서 자문해본 물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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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공동체 통일방안 평가

10월 21일 통일부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함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수정 보완 필요성에 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박영호, 전재성, 김병연 등 세 분의 발제와 8명의 패널 토론이 다양한 쟁점들을 심도있게 부각시킨 자리였다. 전체 발표와 토론을 이끄는 좌장역할을 부탁받았을 때 선약을 취소하면서까지 그 제안을 수락했을만큼 내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큰 행사였다.

발제자들은 각기 다른 맥락에서 이 방안의 수정보완, 발전적 계승을 주장했다. 박영호 박사는 30년간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방안이 갖는 의의를 강조했고 전재성 교수는 탈근대적 시대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변화를 주문했다. 특히 십여년 전 내가 주도해서 서울대 통평원에서 내놓았던 [연성복합통일론]의 문제의식이 더욱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해서 반가왔다. 김병연 교수는 중간단계로서 경제통합을 좀더 구체화하고 그 실현을 향한 보완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패널의 토론은 다양했는데 나는 대략 다음 몇가지로 그 쟁점을 요약할 수 있다고 보았다. 1) 30년간 잘 유지되어온 통일방안을 굳이 다시 건드릴 필요성이 있는가 2) 민족이란 개념과 범주를 여전히 중시할 것인가 3) 중간단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 4) 통일방안은 남북이 함께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의 전략구상으로 추구할 것인가 5) 국내정치에서 이 사안이 정쟁과 이념분쟁의 소재로 오용되지 않고 큰 국가전략으로서의 통합적 지위를 갖도록 할 방안이 있는가 6) MZ 세대의 반응과 생각을 어떻게 통일이란 미래전략에 결합할 것인가.

뚜렷한 답은 얻기 어려웠고 사안별로 의견은 갈렸다. 무엇보다도 이 사안을 들고 나온 통일부나 통평원이 이것을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아젠다로 생각하고 있는지가 불확실해 보였다. 나로서는 반드시 다루어야 할 쟁점이고 지금이 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진지함과 결의가 없이 많은 사안들 중 하나로 다루어보고 그 효과를 이용해 보려는 차원이라면 별반 의미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두번의 선약을 바꾸면서까지 참여하고 싶었던 자리였고 실제 발제와 토론이 매우 격조높고 충실해서 대단히 유익한 행사였지만,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이 사안에 대해 얼마나 깊은 무게감을 우리 사회가 부여하고 있는가에 대해선 의구심을 버리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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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과 한반도 평화

10월 20일 제6회 포스텍 포스리 평화포럼을 조직하여 포스코센터 세미나롬에서 개최하고 좌장 역할을 수행했다. 북한이 핵을 방어용이 아닌 공격용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핵교리를 법제화하고 전술핵운용부대를 창설하는 등 북핵의 위협이 고도화되는 가운데 7차 핵실험 임박설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그간 금기시되었던 한국의 독자핵무장론이 고개를 들고 있고 군사충돌의 위험에 대한 안보불안도 대두되는 시점인만큼 전문가들의 격의없는 토론장으로 유익한 자리였다.

그간의 핵정책 전반에 대한 전문가로 한용섭 전 국방대 부총장과 세종연구소 정성장 박사 두 분의 발제를 듣고 십여명 전문가들이 패널로 토론에 참여했다. 한교수는 확장억제정책의 강화를, 정박사는 독자핵무장을 대응책으로 주장했고 다양한 배경을 지닌 패널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국제정치, 남북관계, 군사안보, 평화구축, 한국경제 등 여러 관점에서 이 사안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논의되었다.

참가자들은 지난 30년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 한미의 대응정책은 총체적으로 실패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미 독자적 핵국가임을 주장하는 북한이고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국제사회가 받아들이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핵을 가진 북한과 어떻게 한반도 평화를 지속가능한 형태로 보장할 수 있는가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난무했다. 핵이란 특수무기가 갖는 비대칭성을 고려하면 보다 발본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었지만 대응방식에 대해서는 시원한 합의를 얻기 어려웠다.

결국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인데 이것이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향설정과 무관치 않다는게 사안의 무거움이다.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한 비핵화의 원칙과 비핵화 정책을 여전히 견지하면서 북한의 변화를 견인할 것인가, 북한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한미동맹의 가시적 확장억제정책 방안이 있을 수 있는가, 독자 핵무장을 추구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익과 부담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등이 그 핵심적인 쟁점이라 하겠다.

전문가들의 대체적 견해는 고도화된 북핵에 대응하는 새로운 접근이 필수적이지만 한국의 독자 핵개발은 득보다 실이 만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미국핵에 의존하면서 기존의 3축체제를 비롯한 국방능력의 획기적 강화를 추구하는 것이 그 대안으로 언급되었고 주한미군의 존재 자체가 강력한 확장억제의 근간이라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미국이 자국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에 대한 확장억제정책을 언제까지나 견지할 것인가, 언젠가 도래할 수도 있는 미군철수나 한미동맹 약화의 때 한국의 안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핵을 가진 북한이 북미수교라는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경우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등.. 쟁점이 무엇인지는 꽤 확인되었지만 여전히 시원한 답을 얻기 어려운, 그러나 유익한 포럼이었다. 다만 점점 어려운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던 자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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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성

11일 오후 담양 금성산성을 올랐다. 원래 광주시 양림역사문화마을을 둘러볼 계획으로 출발했는데 노치준 목사께서 당신이 안내할 수 있는 날 오기를 원하는 문자를 보고 행선지를 도중에 바꾼 것이다. 금성산성은 의병운동과 동학농민운동 관련 자료에서 본 적이 있고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이 멋있어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가로수가 멋지게 도열한 옛 신작로 길을 꽤 달려 도착한 금성산성 주변은 갓 시작한 듯 보이는 고급 팬션이 주인공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멀리 산자락을 내다보는 좋은 자리에 멋진 카페와 숙소가 있고 잔디마당에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그 아래에는 캠핑장도 있다고 하니 이 일대가 이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보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굳이 금성산성이란 역사적 유적을 의식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주차장에서 산성까지는 2키로의 산길을 올라야 한다. 비교적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군데 군데 돌언덕을 넘어야 해서 손쉽게 오르기엔 다소 벅찬 거리다. 올라가는 동안 꼭 한 명이 호젓이 그 길을 오르고 있었고 산성 주변도 인적을 찾을 수 없었다. 길을 오르면서 계속 떠오른 생각은 이 높은 곳에 성을 쌓고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런 수고와 정성을 쏟았던 것일까?

높은 산 정상 가까이 바위 위에 세워진 성문과 누각을 보면서 나는 견고한 성문이라기 보다는 중세의 수도원 입구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임진왜란에서 또 동학농민전쟁 과정에서 이곳이 쓰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피란처 역할에 더 가까왔을 법하다. 성문에 ‘보국문’이라는 현편이 걸려있는 걸로 보아 분명 ‘나라’를 지키는 것임은 틀림없는데 그 나라를 이런 산꼭데기에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신앙을 지키려 수도원에 은거하던 마음을 빗대어 본다면 이들에게 국가는 그런 신앙의 대상, 신성한 무엇으로 표상되었을지 모르겠다. ,

정작 이곳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 것은 성문 누각에 서서 멀리 첩첩의 산자락을 바라볼 때였다. 여러 산줄기들이 앞뒤로 겹쳐 이어지는 산맥과 그 사이의 들판을 바라보면서 ‘국토산하’라는 말이 실감있게 와 닿았다. 이들이 지키려던 것은 결국 이 땅이었고 산과 강을 내다보는 이 자리가 그런 산하의식을 자각케 하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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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최재석 학술상

한국사회사학회가 주관하는 최재석 학술상 3회 시상식이 열렸다. 고려대학교 수암패컬티 하우스에서 학회 임원진, 유족대표를 포함한 운영위원들, 심사위원들이 모여 수상자들에게 시상하고 성과를 치하했다. 나는 이사장으로서 인사말을 하고 상패를 수여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느라 몸도 마음도 바빴다.

내실이 있고 학문적 내공도 만만찮지만 규모는 크지 않은 학회에서 이만한 학술상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자원이다. 고 최재석 교수의 유지가 뚜렷했고 또 그 뜻을 깊이 새겨 실행한 부인 이춘계 여사의 거액 쾌척이 이것을 가능케 했지만, 한국사회사학회를 이만큼 신뢰할만한 학술단체로 키운 여러 선학, 동학 들의 수고와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내심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김상준 교수가 본상을 받았다. 동서양 문명을 큰 틀에서 조감하면서 과거와 미래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야심찬 저작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결과다. 사실 동서양의 비교는 해묵은 주제이지만 정작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는 지적 탐구 수준은 그다지 깊다 하기 어려운 탓에 김교수의 노력이 더욱 기대되는 것이다. 우수박사학위논문으로 선정된 박해남 박사의 논문은 내가 지도했던 것이어서 더욱 고맙고 기뻤다. 1980년대 올림픽이라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전후하여 진행된 다양한 생활세계 재조정 노력을 사회정책으로 개념화한 신선한 시각이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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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聲

가을비가 온 종일 내리면서 채 물들지 못한 낙엽들로 마당이 어지럽다. 비 내리는 소리를 듣다가 중국 송대 문장가 구양수의 글 추성부(秋聲賦)가 생각났다. 한 폐친이 이에 관한 이야기를 올려놓은 글을 읽었던 기억 때문일터이다. 인터넷에서 전문을 다운 받아 다시 읽어보았다. 지금 읽어도 명문이니 명불허전이다.

동자와의 문답으로 시작해서 동자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글이다. 때론 조용한 듯 때론 요란한 듯 들리는 것이 무엇인가 물으니 동자는 나무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소리라 한다. 시인은 이것이 바로 秋聲 곧 ‘가을소리’라 했다. 차갑고 냉정한 기운으로 무성함을 자랑하던 초목의 잎을 떨어뜨리는 가을은 만물변화의 섭리를 드러내는 기운이 드러나는 계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말년의 김홍도가 추성부를 화제로 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불현듯 나도 그 기분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먹을 갈고 붓을 잡아 잎이 떨어진 나목 두 그루를 그리고 추성부 문장 가운데 마음에 와닿는 부분들을 적었다. ‘성정이 없는 초목도 때가 오면 내려놓을 줄 안다’고 노래한 시인은 “사람이 금석의 몸을 지닌 것도 아닌데 어찌 초목과 더불어 영욕을 다툴 것인가”라고 자문한다. 그래서 가을소리를 안타까와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덧붙인다.

시인은 가을 소리를 들으면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동자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한다. 계절을 즐기지 못하고 인생사의 교훈만 찾으려는 식자들의 버릇에 대한 따끔한 일침을 이런 천진스런 행동 속에 담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보니 가을비를 그냥 즐기지 못하고 이런 저런 일거리를 만들려는 나한테도 던지는 가르침일지 모르겠다. 어쨋든 가을의 정서만은 담뿍 담으려 노력한 소품 한 점이 만들어졌다. 올 가을 거실에 걸어두고 추성을 들어보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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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聲

가을비가 온 종일 내리면서 채 물들지 못한 나뭇잎들도 떨어진다. 조용히 비 내리는 소리를 듣다가 중국 당대 문장가 구양수의 명문 추성부를 떠올렸다. 한 폐친이 이에 관한 이야기를 올려놓은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지만 인터넷에서 추성부 전문을 다운 받아 천천히 읽어보았다. 명문으로 알려져온 글귀 답게 지금 읽어도 글맛이 좋다.

동자와의 문답으로 시작해서 동자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글이다. 때론 조용한 듯 때론 요란한 듯 들리는 것이 무엇인가 물으니 동자는 나무들 사이에서 나오는 소리라 한다. 작자는 이것을 ‘가을소리’라 했다. 그리고 곧 가을풍경으로 시선을 옮긴다. 가을은 그 차갑고 냉정한 기운으로 무성함을 자랑하던 초목의 색을 물들이고 잎을 떨어뜨린다. 시인은 가을을 만물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하는 기운으로 파악한다.

불현듯 추성부의 기분을 표현해 보고 싶어 붓을 잡았다. 잎이 떨어진 나목 두 그루를 앞에 배치하고 마음에 와닿는 문장의 대부분을 화제처럼 담았다. ‘초목은 성정이 없으나 때가 오면 내려놓을 줄 안다’고 노래한 시인은 다시 “사람이 금석의 몸을 지닌 것도 아닌데 어찌 초목과 더불어 영욕을 다툴 것인가”라고 자문하고 마침내 가을소리를 안타까와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마무리한다. 이런 감정을 획 속에 충분히 담아내기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마음만은 글씨 속에 담뿍 담으려 노력했다.

과거의 명문들 속에는 종종 제3자가 등장하여 작가의 허세를 뒤흔드는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던지곤 한다. 이 글에 등장한 동자는 가을 소리를 배경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다. 계절을 즐기지 못하고 인생사의 교훈만 찾으려는 식자들의 버릇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보니 가을비를 그냥 즐기지 못하고 이런 저런 일거리를 만들고 만 나한테도 던지는 동자의 가르침일지로 모르겠다.

life · 시공간 여행

미암박물관

미암일기의 필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 유희춘의 종가와 박물관이 있는 담양 장산마을을 다녀왔다. 오랜 고택과 정자, 박물관의 멋진 배치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특히 연못 한가운데 서 있는 모현관은 그 규모나 배치, 건물양식 등 여러 면에서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이색적인 모습으로 눈길을 모은다.

자그마하지만 독특한 양식의 이 건물은 한국전쟁 직후 미암일기의 가치를 인식한 서울대총장, 전남대총장, 광주시장 등이 참여한 유적보존회가 후손과 함께 건립한 것이라 한다. 유서깊은 종택과 사당 앞에 기하학적 모양을 담은 서양식 석조 건물을 짓기로 한 이들의 미학과 결단이 놀랍다. 모현관이란 글씨는 허백련이 썼다 하는데 단아하면서도 힘이 있다. 돌에 새긴 글씨가 생각보다 건물과 잘 어울려 굳이 나무 편액을 달려 하지 않은 유연함이 신선하게 와닿는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평생 쓴 일기인데 현재는 1567년부터 1577년까지 쓴 일기 11권이 전해져온다. 조선중기의 사회상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특히 사대부 집안의 부부간 역할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조선가족사를 연구하는 이들이 종종 언급하곤 한다. 미암의 부인인 송덕봉은 유교적 가치에 얽메이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매우 분명하게 내세운 당당한 여성이었고 자신의 문집을 남길 정도로 학식도 남달랐다. 입구의 미암박물관에 미암일기를 비롯한 여러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소나무들이 울창한 먼산을 배경으로 수백년 역사가 여러 건물 속에 쌓여있는 이 마을의 모습이 정겹다. 종택 뒤에는 16세기 건축양식과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벽화가 담긴 사당이 있고 언덕위의 단아한 정자에는 이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던 자취가 서려있다. 종택과 박물관 사이의 연못 속에는 한말과 일제하, 전쟁기의 힘들었던 세월이 뭍혀있을 것이다. 서양식 모현관과 한식풍의 박물관은 20세기 문명개화의 힘이 이곳에까지 미친 자취일 터인데 이런 궁벽진 곳을 찾는 이가 점점 없어지는 21세기에는 어떤 자취와 이야기가 이 공간에 새로이 덧붙여질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