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침묵’과 숨은 기독교인

막부 시대 무사 전통이 뚜렷한 도시 하기에 다소 어울리지 않은 유적이 하나 있다. 기독교 순교자 기념공원이다. 기독교 탄압이 혹독했던 시기,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마을의 신도 3800명이 전국 각지로 유배되었고 그 중 약 300여 명이 하기로 보내졌다. 이들은 삼 년간 혹독한 고문과 굶주림 때문에 40 여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고난을 받았다. 그때의 박해와 인고의 흔적을 기려 세워진 것이 이 순교자 기념공원이다. 1605년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한 모리 번의 중신 부젠 수령 구마가야 모토나오의 비도 함께 서 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우리에도 잘 알려진 소설인데 일본의 기독교 박해가 그 배경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려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 그 숭고한 죽음에도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허무감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작중의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뜻하는 후미에를 밟으면서 “밟아라. 아픔을 알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나는 그 아픔을 알고 있다”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비로소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요지의 소설인데 그 배경은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일본에 전파한 이들은 센고쿠 시대 일본과 무역을 하던 스페인,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이전엔 ‘자비엘’로 불렸던 프란시스 하비에르(F. Xavier) 가 그 선구자였고 현재 야마구치에는 하비에르 기념성당이 있다. 그의 일본선교에 도움을 준 장본인이 하기 일대의 다이묘 오우치였다. 야마구치와 나가사키 일원의 다이묘들은 서양 세력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톨릭 전래를 허가했고 신자도 늘어났다. 다이묘 가운데서 신자가 된 자들도 여럿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조선에 온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후 지방의 다이묘들이 서양과 무역으로 세력을 키울 것을 우려하여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강력한 기독교 탄압정책으로 선회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1597년에 자행된 나가사키 기독교도들의 집단 처형이다. 도요토미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도 금교령을 내리고,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나가사키의 애환은 그 때부터 여러 차례 계속되어 메이지 유신 직후까지 이어졌다. 이로 인해 숨어 지내게 된 기독교인을 가쿠레 키리스탄이라 부른다.

1637년 키리시탄을 중심으로 막부의 지배에 저항하는 시마바라 난이 일어났다. 일본 최대의 농민봉기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혹독한 기독교 탄압의 계기가 되었다. 에도 막부는 ‘키리시탄은 정권을 엎으려는 반란분자’라고 생각하여 기독교인을 색출하는 악명높은 후미에를 만들어 철저한 박해를 가했다. 엔도 슈사쿠 [침묵]의 배경도 바로 이 시기인데 당시 순교한 많은 신자들이 후미에 앞에서 침묵하는 신에 대해 물었을 법한 주제를 다룬 것이다.

1858년 개항 이후 외국인에 한해 신앙 활동이 허가되었고, 나가사키에 오우라 천주당이 건립되었다. 성당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은 250여 년 전 순교한 바스챤의 예언을 이곳에서 확인하고자 했다. 1865년 4월 일부 카쿠레 키리시탄이 신부에게 “성모 마리아님의 성상은 어디 계시나요?”라고 물었고 신부가 안내해 주자 전원이 함께 기도를 했다. 오랜동안 숨겨왔던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신자 발견’이라고 부른다.

2년 뒤인 1867년 우라카미 지역의 신도들이 불교식 장례를 거부함으로써 숨어 지내던 키리스탄의 존재가 드러났다. 비밀 교회당을 급습한 것을 시작으로 신도 68명이 일제히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외국 공사들이 강하게 항의하여 처형은 면했지만 대부분 하기, 후쿠야마 등지로 유배되었다. 이들은 노골적인 고문만 받지 않았을 뿐 물과 음식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지급되었고 더위와 추위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식으로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유배된 3394명 중 무려 662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1873년 금교령이 폐지되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살아 남은 이들은 대부분 유배지에서 풀려났고 통상적인 형태의 가톨릭으로 원복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종교적 내용과 형식이 많이 변해서 오히려 “조상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라며 가톨릭으로의 원복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몇 안 되는 구전 전승만으로 종교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실제 이들의 신앙은 매우 밀교적인 특성이 강했고 불교 등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또한 라틴어 기도문이 음차된 염불같은 오라쇼를 주문처럼 외우기도 해서 인류학자나 종교학자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과 유사하면서도 희생자 솟자가 더 많았을 일본의 기독교 순교사를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한국은 그 순교자들의 희생 위에 기독교가 널리 받아들여졌고 크게 융성했지만 일본은 지금도 기독교인의 숫자가 매우 적다. 엔도 슈사쿠가 카쿠레 키리스탄의 발견을 주제로 새로운 소설을 쓴다면, 아니 오늘의 일본 기독교를 대상으로 소설을 쓴다면 제목을 무엇으로 했을지 궁금하다. 여전한 침묵? 깨어진 침묵? 이상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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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와 감사

오늘이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이다.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주일이긴 하지만 사실 자연적 조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전통시대의 절기가 기독교와 결합된 문화적 현상이다. 농사든 목축이든 한 해의 소출을 거두어야 할 계절에 그 때까지 얻은 축복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기독교 문명이 아닌 사회에도, 또 세속화가 현저히 진행된 21세기에도 가을의 추석이나 Thanksgiving Day를 기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릴 적 시골에서 이 계절엔 추수가 일상이었다. 들판에는 누런 곡식이 익고 그것을 베어 탈곡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국민학교에까지 ‘가정실습’이란 이름으로 며칠 쉬곤 했는데 추수에 바쁜 일손을 도우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농사를 짓던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 시기에 크고 작은 일들을 하느라 바빴다. 나처럼 농사와는 무관한 아이들은 추수가 끝난 논에서 ‘이삭줍기’를 하곤 했다. 추수가 끝난 허허벌판 같은 논밭에서 하나 둘 주운 이삭들이 모여 가마니가 되는 모습을 보고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었다.

추수를 상징하는 것은 주곡인 벼가 자란 논 만이 아니었다. 겨울을 대비하여 김장과 월동에 필요한 무, 배추, 고추를 비롯하여 밭농사의 마무리도 중요했다. 누런 호박도 거두어 들이고 타작이 끝난 작물의 잎이나 줄기로 자반을 준비하기도 했다. 내게는 나무에 열린 과일들을 따던 기억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마을 곳곳에 감나무들이 있어 빨간 감들이 달려 익어가는 가을 풍치를 더하곤 했는데 대부분 이 계절에 따서 보관하거나 곶감으로 만들게 된다. 높은 곳의 일부 감은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다. 그래서인가 지금도 상점에서 감을 보면 다른 어떤 과일보다 ‘가을’을 떠올리게 된다.

추수를 하면 감사가 따르게 마련이었던 것 같다. 흉년도 있고 생각보다 소출이 적은 경우도 태반이지만 추수하는 그 시간만은 풍요롭고 뿌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감사의 대상은 ‘자연’이나 ‘신’을 향하게 되니 바울의 표현대로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었다고 할 것이다. 농부의 땀과 수고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바람 햇볕의 도움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농부들로서 추수와 감사가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를 따라 비가 내리고 햇볓이 쬐어 이루어진 결실이라는 것이 너무도 절실하여 표하게 되는 감사를 폄하할 일은 아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보면 우주적 절대자, 삼라만상의 창조주에 대한 감사라 해도 무방할 일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현대사회에서 추수는 더 이상 자연과 계절에 연동되지 않는다. 월급형태의 소득이 주어지고 주식시장은 거의 실시간으로 이익이 달라진다. 더구나 학생이나 청소년, 퇴직한 세대나 실직자들은 ‘추수’의 감격을 느낄 새도 없다. 그러다보니 추수경험과 감사행위는 단절되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감사가 어느 때든지 필요한 일상이 되었다 볼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더이상 감사를 절감할 절기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자연과 환경, 우주적인 섭리에 대한 생각을 할 기회가 사라진 셈이다. 햇빛과 바람, 비와 온도 대신 직장과 가정, 국가와 사회를 생각하게 된 것이 근대화이고 합리화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댓가로 소중한 것을 잃은 셈이다.

자나간 내 생활을 되돌아보면 이런 사회적 변화가 내 일생 속에 고스란히 재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의식 속에서 감사하는 태도가 옅어진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사람이나 사회적 조건에 대한 것이었을 뿐 자연과 우주에까지 시선이 확장될 겨를이 없었다. 아니 어릴적에 지녔던 순수한 추수에의 감사도 ‘계몽’의 이름 속에서 사라졌다. 평소 감사한다는 생각 없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감사하자는 덕담도 적지 않이 했다. 하지만 세속적 잣대와 가치로 여러가지 염려와 후회들을 무시로 겪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총체적으로 감사의 마음, 추수의 기쁨이 사라진 탓일텐데 신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건강상으로도 넘어서야 할 내적 문제다.

스펄전 목사님의 ‘자아가 내게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자아에게 선포하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는다. 자아를 나와 등치시키면서 자아에 이끌려 다니는 것은 결국 나를 비주체적인 존재로 만들 우려가 크다. 인간은 본명 사회학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실존적인 단독자이기도 하다. 내 자아가 나의 중요한 실체이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일 수는 없다. 미드의 표현대로 ‘me’ 를 넘어서는 ‘I’에 대한 감각, 그 존재론적 자의식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 것은 인생 후반에서 더더욱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종종 접하던 감사 관련 성구들을 되새겨보는 추수감사주일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전 5:16~18)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 95:2~3),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 4:2)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역상 16:3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시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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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의 전통건축물

시모노세키는 동아시아 근대화 과정과 관련이 깊은 도시인만큼 구시가지 일대에는 영국영사관, 니베초 우체국, 아키타 상회 건물 등 많은 근대건축이 남아있다. 반면 하기는 막부시대 이래의 오래된 전통마을, 구가옥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다. 특히 조카마치로 불리는 번청 성곽 주변의 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을만큼 과거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시간 관계로 모든 곳을 방문할 수는 없지만 오가는 길에 마주칠 수 있는 곳들이어서 하기시의 공간배치와 건물의 형태 차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걷는 것 만으로도 고급스런 여행이 될 수 있다. 상층 무사의 저택, 하급 사무라이의 집, 상인의 가옥 들이 어떤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는지, 사찰과 신사, 교육기관 등이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흙벽 담장과 좁은 도로를 걸어보는 것은 즐거움과 공부의 두마리 토끼를 잡는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기 일대의 대표적인 것을 간추려 소개해본다.

도코지 (동광사) – 1691년 3대 번주 모리 요시나리가 하기 출신의 명승 혜극을 개산으로 창건한 황파종의 사원이다. 총문, 삼문, 종루, 대웅보전은 모두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본당 뒤쪽 모리가문 묘소는 국가지정의 사적이며 요시나리에서 11대까지의 기수대 번주와 그의 부인 및 일족, 관계자의 무덤이 있다. 묘지 앞에는 500여개의 석등이 줄지어 있고 순난 11열사묘, 유신지사 위령묘 팔기 등이 있다.

쇼카손주쿠 – 요시다 쇼인이 1857년부터 2 년 반 동안 하급 무사와 서민의 자제들을 교육한 사설학원이다. 원래 야마가류 병학을 가르치던 사숙으로 설립자의 조카 요시다 쇼인이 재인수하여 존왕양이와 정한론를 가르치고 전파했다. 키토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타카스기 신사쿠 등 유신 지사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어 유신의 정신적 근거지로 평가받는다. 1859년 요시다 쇼인이 처형당하며 1차로 폐쇄당하고 1868년 메이지 유신 후 부활했다가 1876년 하기의 난으로 다시 폐교되었고 1890년 교육칙어로 완전 폐교됐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이 주변에 쇼인 신사가 건립되었고 2015 년 7 월 세계 유산 등록으로 등재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구옥 및 별저 – 이토 히로부미 옛 주택은 단층에 초가지붕을 얹은 100㎡ 넓이의 목재 가옥으로 1854년 그 부친이 입양을 통해 사무라이의 하인이던 미즈이 다케베 소유의 이 집에 정착했다. 이 구옥은 이토의 신분이 매우 낮았음을 잘 보여준다. 그 옆의 잘 지어진 별저는 1907년 일본 정계의 거두가 된 히토 히로부미가 도쿄 중부의 에바라군 오이무라 마을에 지은 별장의 현관,대청, 별실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기토 다카요시 주택 – 목조 2층 건물 카와라부키(기와로 뒤덮인 지붕)형식으로 방 12개의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기토는 조슈와 사쓰마의 연합을 성공시켜 막부타도를 가능케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후일 정한론을 반대하고 입헌정체를 주장하였다. 그 아버지 와다 마사카게는 번의였는데, 하기의 주택에는 그 시절 의사의 생활을 엿볼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타카스키 신사쿠 집 – 일본판 양요였던 시모노세키 전투를 몸소 겪었던 타카스카 신사쿠는 막부의 조슈 정벌이 시작되자 고잔지에서 막부타도의 거병을 주도하여 메이지 유신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 동상이나 회천 기념비 등은 시모노세키에서 만날 수 있다. 하기의 집에는 산유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우물과 자작의 구비가 있다.

메이린칸 (명륜관) – 상층 사무라이만 입학할 수 있었던 하기번의 번교였다. 쇼카손주쿠가 신분에 무관하게 입학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하급무사는 물론이고 중인계급도 들어갈 수 없었던 전형적인 신분제 교육기관이었다. 국가 등록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본관 건물은 오랫동안 명륜 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고 최근 박물관으로 재정비되었다.

키쿠야 가문 저택 – 조슈번의 대표적 거상인 키쿠야 가문의 집으로 에도 초기에 건축된 일본 최고 주택에 속한다. 원래 오우치 가문의 호위무사로서 야마구치에서 살고 있었지만 오우치 가문이 멸망한 후에 상인이 되었다. 1604년에 모리 데루모토가 하기번으로 오면서 그에게 현재 장소의 부지를 하사받아 집을 지었다. 상인 가문으로서는 전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측에 속하는 400년의 역사가 있다. 본채에는 넓은 객실이 있으며, 본채를 비롯한 다섯 채가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약 2000평의 부지중 3분의 1만을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쿠보타 가문 주택 – 쿠보다 가문도 포목상으로 시작하여 2대 번주 때부터 주조업으로 전환해 큰 부를 축적한 거상이다. 구보타 가옥의 주건물은 에도 시대 후기에 지어졌는데 창고와 노동자의 숙소가 합쳐진 형태로 마주보는 기쿠야 가옥의 주 건물보다 높이가 더 높다. 메이지시대 중기까지 사용한 이 건물은 메이지 시대 명사들의 숙소로서 자주 이용되었다.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전기에 걸친 건물로서 하기성 조카마치를 대표하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조카마치 (성하마을) 구역 – 모리 데루모토가 1604년에 지은 하기성 아래 마을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은 지금 남아있지 않으나 260년간 번성했던 하기의 구 사무라이 가옥, 낡은 흙벽과 마을의 배치 구조는 막부시대 상인이나 번의 가신들이 살던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지역이다. 모리 가문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했던 부유한 상인 가문의 주택, 도쿠가와 막부나 천황가에서 온 방문객의 숙소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환상적인 전통 고산수(가레산스이) 정원을 대중에게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하마사키 지구 – 하기성으로 들어오는 항구지대로 전통적인 마을 도로, 부지 할당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조슈번의 수도 하기가 모리 가문의 통치하에 발전하면서 항구 하마사키도 함께 커졌다. 1998년부터 항구의 역사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하마사키는 2001년에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현재 100채가 넘는 건물이 역사 지구의 일부로 보존되고 있고 이 중 44채는 1868년 이전에 지어졌다고 한다. 상당수의 건물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어 일본의 건축사를 알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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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를 어떻게 만날까?

하기(萩)를 여행할 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하기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슈번의 번청이 있던, 인구 4만 정도의 소도시다. 토쿄는 물론이고 교토로부터도 꽤 떨어져 있고 항공편이나 신칸센이 닿지 않아 한국에서는 더더욱 접근하기가 불편한 곳이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탐방하고 싶었던 곳이인데 기회가 없었던 만큼 여느 일본 여행 때와는 다른 기대감이 느껴진다.

나는 하기보다 조슈(長州)란 지명에 더 친숙하다. 솔직히 말하면 하기가 조슈번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 알았다. 1988년부터 1년 반 동안 하바드 엔칭 도서관의 일본자료실에서 메이지 유신 관련 연구들을 조사하고 검토하면서 조슈와 사쓰마 이야기를 무척 많이 접했다. 특히 요시다 쇼인이 세운 소카손주쿠에서 막부를 무너뜨리는 핵심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것, 그들이 드라마 같은 메이지 유신 정치변동의 주역이었다는 것, 이들이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등을 알게 되면서 조슈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 사쓰마의 중심지인 가고시마는 두 차례 들릴 기회가 있었는데 하기는 이번에야 가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한국사회사학회에서 오랫동안 학문활동을 함께 해온 사사친 동료들과 이 여행을 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뜻깊다. 정근식 , 김필동 교수가 제안하고 나를 비롯하여 황경숙, 노치준, 김경일 교수 등이 동의하여 성사된 여행이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박맹수 총장도 참여한데다 서울교육감 당선으로 가지 못하는 정교수 대신 채규성 님이 합류했다. 모두 학구적인 타입인데다 야심차게 일정을 계획한 탓에 오가며 보고 들을 내용들이 기대가 되고 오래 전 해답을 찾아보려던 질문들이 새롭게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모처럼의 여행인만큼 너무 답사여행 같이 되지 않고 편하고 즐거운 여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모두 노는데는 재주가 없는 진지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관광청에서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야마구치를 검색하니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뜬다. “야마구치현은 조용한 시골이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적지가 많습니다. 한때 무사가 지배한 영지의 수도였던 하기에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게 잘 보존된 성곽 마을이 있고, 이 지방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야마구치는 고요한 해변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신사, 일본에서 가장 큰 석회동굴인 아키요시도 등 기막힌 경치로 유명합니다. 시모노세키 시내 시장과 식당에서는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데, 특히 복어가 이 지역 별미로 유명합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말로 일단 복잡한 역사적 기억을 둘러싼 논란은 괄호쳐두기로 하자.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태도는 여행의 즐거움을 잠식하기 마련이니 아름다운 자연, 오래된 유적들을 영화보듯 관람하는 마음의 여유를 준비할 일이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범주나 근대화 비교욕구 같은 지적 관심도 잠시 제쳐두고 가볍고 즐겁게 이질적인 문화에 대면해 보자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그러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눈, 낯선 지역을 방문하는 호기심 많은 여행자의 눈을 가질 필요가 있으리라. 어슬프게 갖고 있는 사전지식도 일단 내려놓고 몸도 마음도 시선도 가볍게…. ‘조슈’를 만나기 위한 첫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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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노래들

10월 17알부터 4일간 “이적의 노래들”이라는 타이틀로 가수 이적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열었다. 나는 이적의 초대로 첫날 공연을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공연은 엄청난 팬들의 운집과 알찬 노래향연으로 풍성했다. 이제 셀럽의 반열에 오른 유명가수로부터 초청을 받아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함성 속에 뭍혀보는 자리는 뿌듯하고 감동스러웠다.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왔지만 오래 전 졸업해서 유명인이 된 제자가 학창 시절 교수와 끈끈한 유대를 지속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문화사회학 수업에서 이적이 쓴 보고서의 내용이 탁월해서 내 기억에 깊이 남은 학생이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대화의 기회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미 대가수가 되어 있는 그가 내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예비 신부와 함께 연구실을 찾아왔을 때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주례를 허락하면서 두 사람에게 어떻게 만났고 어떤 각오로 가정을 꾸리기로 했는지 적어서 보내 달라 했다. 두 사람은 정말 진지하고 성실하게 각자 살아온 여정과 생각, 앞으로 기대하고 지켜가려는 가치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써서 보내왔다. 나는 그 글을 바탕으로 주례사를 작성했고 진심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축복했다. 이적은 그 만남의 감격을 ‘다행이다’라는 노래를 통해 표현했고 결혼식에서 스스로 축가로 불렀다. 내가 한국사회학회장으로 사회학회 60주년 행사를 연세대에서 개최했을 때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와서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내 퇴임에 즈음해서 나는 내가 지도했던 박사 제자들에게 글씨를 하나씩 써 주기로 했다. 글씨를 받은 수십명은 대부분 교수로서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중 두세명 학자가 아니면서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도 제안을 했다. 이적은 그 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매우 고마와하면서 자신의 노래인 ‘나침반’ 의 내용을 써주기 부탁했다. 이후 ‘이문회우 정헌 박명규 서예전’에 와서 진심으로 내 정년을 축하해 주었고 심보선 교수와 함께 자신의 서명을 담은 음반과 플레이어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이적은 그때 내가 써준 글을 자신의 SNS에 올려놓고 자랑을 하기도 했으니 나와는 꽤 오래 깊은 인연을 이어오는 셈이다.

난 다시 일어날 수 있어/ 아직 내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 아직 이 황량한 세상 속에/ 너는 내 곁에 있어주니까 /어지러웠던 하루하루가/ 먹구름처럼 내 앞을 가로막아도 /너의 눈빛이/ 마치 꼭 나침반처럼/ 내 갈 길 일러주고 있으니 /아직 내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아직 이 황량한 세상 속에/ 너는 내 곁에 있어주니까

공연 중 김동률이 우정 출연을 해서 열렬한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김동률은 이적의 결혼식에서도 축가를 불렀던 것 같은데 그 때의 기억으로는 매우 장난끼 어린 느낌이었는데 이날은 매우 조용하고 사색형의 연예인 풍모가 느껴졌다. 그 다름 사이에 짙게 확인되는 우정이 보기 좋았다. 이적은 자신의 노래를 부르던 중간에 얼마전 타계한 김민기의 노래를 불러 그의 삶을 기렸다. 70년대 후반 내 대학시절의 떠올라 마음이 찡했는데 청중들도 대부분 그러했던 것 같다.

공연을 보며 80년대의 노래를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노래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랑,우정,인생 등을 노래하는 대중가요가 오랜 역사와 함께 주류를 형성하는 한편에 김민기로부터 시작해서 노찿사로,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 이어지는 강렬한 사회의식 지향의 노래가 있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제3의 범주로 클래식, 가곡, 종교음악 등이 있었다. 대중가요는 통속적이었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운동권 노래는 진지했지만 부담스러웠다. 클래식은 어쩐지 상층계급과 서구지향적인 분위기여서 접근하는데 문턱이 높았다. ‘유행가’라 불리던 대중가요에 대해선 거리감을 보였지만 술집에서는 즐겨 부르기도 했다. 팝송을 즐겨 듣기도 했고 익숙한 노래에 가사를 바꿔 시대적 정서를 표출하기도 했다.

이적의 노래는 이 세 부류의 틀을 재조합하고 재구성하여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음악이 아닐까 싶다. 그는 통속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탈대중적이지도 않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지만 운동권 가요처럼 투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의 곡의 선율은 고급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지만 클래식처럼 부담스럽거나 고고한 분위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가 탁월한 작곡가이자 가창력 있는 가수일 뿐 아니라 좋은 작사가라는 사실이 이런 종합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의 노래, 특히 노랫말이 젊은 세대 뿐 아니라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적의 노랫말에는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은유’가 포함되어 있다. 너무 현학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으면서도 통속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삶의 다양한 면모를 성찰하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의 힘이 이적 노래를 다른 어떤 가수와도 다른 것으로 만드는게 아닐까. 거위의 꿈, 다행이다, 거짓말, 물좀 줘요, 같이 걸을까 등의 노랫말은 이 시대의 정조와 혼동을 확인하고 음미하는 소중한 메타포이자 코드라 여겨진다. 이날 공연에서 청중들과 열정적으로 함께 불렀던 ‘물 좀 줘요’는 그의 노래에 담긴 시대정서를 잘 표현한 것 아닐까 싶다.

한눈팔지 말고 나만 봐줘요/ 아직 나는 잔뜩 목이 말라요 / 숨이 넘어갈 듯 노랠 부르며/ 그대가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 땀이 비 오도록 눈이 빠지도록/ 여기 이 자리에서 그대가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 내게 약속해 떠나지 않겠다고 /우리 꿈꿨던 그곳에 닿을 때까지 // 물 물 물 물 물 물 좀 줘요 목 목 목 목 목말라요 / 내 머리가 흠뻑 젖게 해줘요 난 그대 거예요 // … 핏빛이 지워지지 않아 자꾸만 어지러워져/ 붙잡을 사람이 필요해 여보세요 날 다시 일으켜주세요/ 물 물 물 물 물 물 좀 줘요 목 목 목 목 목말라요

1988 드라마 OST 로 이적이 부른 걱정 말아요 그대 역시 그의 음악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 아닐까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인권이 불렀던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하지만 이적이 부른 노래도 그에 못지 않게 와 닿았다. 같이 걸을까 라는 노래의 노랫말도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피곤하면 잠깐 쉬어가 / 갈길은 아직 머니깐 / 물이라도 한잔 마실까 / 우리는 이미 오랜 먼길을/ 걸어온 사람들 이니깐 //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 깊은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오늘도 // 길을 잃은 때도 있었지/ 쓰러진 적도 있었지/ 그러던 때마다 서로 다가와 / 좁은 어깨라도 내주어 / 다시 무릎에 힘을 넣어 //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 깊은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 오늘도 // 어느 곳에 있을까/ 그 어디로 향하는 걸까/ 누구에게 물어도 모른 채 다시 일어나 /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 오늘도

이적은 삶이 여러모로 모순적이고 ‘만만치 않더라’고 고백하는 가운데서도 꿈과 기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노래가 있고 누군가 함께 하는 이웃이 있고 또 나도 모르던 세포까지 깨어나는 순간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적은 스스로 이런 경험을 했기에 독특한 예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노래’라는 가사는 노래에 담긴 힘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런 힘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노래는 소리칠 수 있게 해줬고 / 노래는 울어도 괜찮다 해줬고 / 노래는 내 몸 속에 감춰진 / 나도 모르던 세포까지 / 한꺼번에 잠 깨웠지 // 문도 없는 벽에 부딪혀 / 무릎 꿇으려 했을 때 / 손 내밀어 일으킨 건/ 결국 내 맘속 노래야 / 노래는 꿈을 꿀 수 있게 해줬고 / 노래는 다시 힘을 내게 해줬고 / 노래는 독약 같은 세상에/
더럽혀졌던 혈관까지/ 짜릿하게 뚫어주었지

life · 오늘의 화두

결혼 41주년

10월 1일 오늘은 결혼 41주년이 되는 날이다. 눈을 감고 생각하니 노경혜를 아내로 맞아 가족을 이루고 지내온 지난 세월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신혼시절 전주, 서울, 부산을 오가던 일, 두 딸 선영과 윤영을 얻은 일, 하바드대학으로 연구년을 떠난 일, 그곳에서 아들 종인을 얻은 일, 전주에서 첫 아파트를 장만한 일, 부모님 질환으로 예수병원을 수없이 오가던 일, 어머님 소천하신 일, 서울대학교로 직장과 집을 옮긴 일, 아버님 수술 후 돌아가신 일, 강남에 내 아파트를 구하고 이사한 일, 아내가 권사 취임한 일, 두 딸이 결혼하고 두 사위를 얻은 일, 네 명의 외손주를 보게 된 일, 서울대를 정년하고 광주과기원 석좌교수로 부임한 일, 세종으로 이사를 한 일 등…

부부의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다. 아내는 결혼 2년전 이대 대학원에 재학중일 때 선배의 소개로 만났었다.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다소곳하며 차분했다. 눈매가 곱고 사람을 편하게 해 주어 마음에 들었지만 쾌활하거나 적극적인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도 재미있는 대화거리를 찾는데는 재주가 없는 탓에 우리의 데이트는 늘 첫 미팅하는 사람 마냥 데먼데먼 했던 것 같다. 처가 부산여전에 교수로 채용되어 처가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간 후에는 한동안 만나지도 못했다. 이후 다시 연락이 닿았던 때 곧바로 부산으로 달려간 날이 생각난다. 그 날의 재회가 결혼으로 이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육사 교수부에서 지내던 3년의 교관생활은 재미있었지만 살림살이가 힘들었다. 내 적은 교관 월급으로 정년 후 서울로 올라오신 부모님과 대학을 다니던 동생 양규의 생활을 지탱해야 했다. 1983년 새해 첫날을 나는 기도원에서 보냈는데 군복무가 끝나는대로 가능하다면 직장을 얻기를 기도했다. 또 결혼이 대책일리도 없었을텐데 결혼할 수 있기를 원했다. 놀랍게도 9월부터 전북대학교 교수로 임용이 되었고 10월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100 퍼센트 응답이 된 셈이다. 아내가 다니던 부산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장소가 낯설어서였는지 먼길 오신 하객들에 대한 송구한 마음때문이었는지 마음이 부산했고 내가 자주 웃었다고 친구들의 핀잔을 들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제주로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전주에서 하숙생활을 계속했고 아내는 처가가 있는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결혼 후 주말마다 서울, 부산, 전주를 오가느라 힘들었던 생각이 난다. 아내가 전주로 직장을 옮긴 후 우아아파트 16평 전셋집에서 본격적인 신혼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작은 아파트가 좁게 느껴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후 41년을 살아오면서 아파트 평수도 늘어나고 큰 질병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에 처하지 않았으니 감사한 일이다. 서울대 교수로서 뛰어난 제자들을 만났고 정년 후에도 석좌교수로 가르치는 복을 누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1남 2녀의 소중한 아이들을 선물로 얻은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가정을 꾸리기 위한 마음 준비는 제대로 못했던 것 같다. 남편으로서의 역할, 자식으로서의 역할, 아빠로서의 역할이 어떠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거나 배우려는 생각도 없었다. 그냥 저절로 잘 되리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좋은 교수가 되려고 애썼던 것에 비해 좋은 남편과 부모가 되기 위한 노력은 부족했던 것이다. 가끔씩 어머니의 서운해 하시는 모습과 처의 힘들어하는 모습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적도 있었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채 내 욕심을 강변하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늘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인데 또 다른 한켠에 미안한 마음도 자리하고 있는 이유다.

결혼 41주년을 맞이하여 그간의 삶을 돌아보니 감사한 것 일색이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기도 덕분일 것이다. 간간히 이런 저런 아쉬움이 생기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생각한다. 넘치는 복을 받은 41년이 아니었던가.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찬송가사를 떠올린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내가 받은 이 축복이 자녀들에게 이어지기를 기도한다. 세상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요동하겠지만 봄 새싹의 신선하고 역동적인 생명력으로 잘 이겨낼 힘을 얻기를 ….

life · 시공간 여행

그리스 미학 2

그리스는 올림픽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인간의 강인한 육체의 힘을 최대로 발휘하려는 이 제전은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발전하고 있다. 얼마전 끝난 올림픽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월드컵, NBA, 각종 스포츠 경기의 배후에도 그리스의 유산이 어른거린다. 물론 돈과 명예, 경쟁과 좌절이 너무 크게 결합된 프로 스포츠의 경우 그리스에서의 정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테네에서 나는 사라진 고대문명의 정신적 자취를 찾아보려 애썼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르스토텔레스의 철학자들과 아고라에서 공화정을 이끌던 자유 시민들의 숨결을 만나보고 싶었다. 파르테논과 로만 아고라 광장을 둘러보면서 그런 모습을 느껴본 듯 하지만 엄밀하게는 내 상상의 소산일 뿐이다. 실제 아테네의 현장에는 말없는 고고학적 유물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나는 그리스인들이 강조했던 또다른 모습에 주목했다. 육체의 강인함을 통해 용맹과 용기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음을 새삼 느꼈던 것이다. 특히 올림픽의 배경이 되었을 남성적인 힘, 불굴의 투지를 상징하는 근육질의 육체성을 작품 속에서 만났다. 오늘날 ‘남성성’은 종종 페미니즘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지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여성성과 꼭같이 남성성도 하나님이 주신 품성으로서 그것은 아름답게 구현되고 다듬어가야 할 자질이다. 그 모습의 한 부분을 스케치로 옮겨둔다.

    life · 시공간 여행

    그리스 미학 1

    그리스 아테네를 둘러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먼 옛날 그들이 보여준 조형미의 아름다움은 대단했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위용을 접했을 때 느낀 감동은 말로 하기 어렵다. 사진으로 본 바와 다를 바 없고 원형도 많이 훼손된 상태인데도 가히 건축미학의 최고경지라 일컬을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중국의 만리장성이 놀랍고 경이로우며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장대하지만 이런 미학을 표현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난 조각품에서 그리스인들의 미학을 좀더 가까이 느꼈던 것 같다. 조각품의 섬세한 기법은 물론이고 인체의 아름다움을 놀랍도록 표현한 예술적 감각이 가히 압권이다. 인간이 추한 면모도 적지 않지만 만물 중 인간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리스 조각의 최고품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의 박물관에 가 있다고 한다. 온전하지 못하거나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작품일지라도 아테네 현장에서 직접 만나는 유물이 풍기는 아우라는 남다르다.

    르네상스는 이런 그리스 미학을 부흥시키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카톨릭 하의 중세 유럽은 영혼을 중시하고 육체를 경시하는 엄숙주의가 강했다. 그리스 예술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인간의 욕망을 승인함으로써 중세 암흑기를 해체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제국 박물관에서 그리스 조각작품을 최고의 소장품으로 전시하는 것도 이런 르네상스 미학에 대한 공감과 무관치 않으리라. 약소국 유물의 약탈이라는 제국주의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서구문명의 계승자로 자처하고픈 그들 욕망의 소산인 셈이다.

    그리스 조각은 인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많다. 남성의 경우는 용맹함과 근육질의 신체, 역동적인 움직임 등이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다. 통상 다산과 풍요의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던 여타 문화권과는 다르게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을 극단적으로 추구했다. 특히 여성은 우아한 얼굴과 균형잡힌 몸매, 신비로운 곡선미가 유난히 돋보인다. 개인적 느낌으로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느끼는 바지만 하나님이 여성을 남성보다 더 정교하게 빚으신 것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어릴 적 도덕론이 우세한 환경에서 성장한 탓에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내겐 낯설었다. 유교적 가풍과 기독교적 가르침이 독특하게 혼합되어 의복, 치장, 춤, 음식 등에 대한 무관심이 몸에 배었다. 하지만 성장해 가면서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도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영육 이원론을 넘어서 아름다움, 감성, 충동, 축제, 욕망 등의 가치를 새롭게 느끼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종의 내 의식의 르네상스였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리스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난 많은 작품들이 주는 감흥이 남달랐다. 그 중에서도 고개를 들고 무릎을 꿇은 상반신 여인상은 정말 인상 깊었다. 아름다움과 우수가 함께 뭍어나는 그 작품을 앞뒤로 오가며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중앙 홀에 서있는 아프로디테의 상은 놀라운 균형미와 곡선미로 내 눈을 끌었다. 이들 작품은 오늘 현대의 작가들도 쉽게 따라가기 어려운 명실상부 최고의 수준이다. 누군지 모르는 그 시대 조각가들의 손과 마음을 떠올리며 나도 도화지에 선을 그리며 음영을 넣었다. 미학은 이렇게 시대를 넘어 교감할 수 있는 것인 모양이다.

    life · 오늘의 화두

    탄식과 감탄

    무더위가 계속이다. 에어컨을 켜고 산과 강을 찾아도 열대야의 고통을 참기가 어렵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교훈을 따라 여름을 노래한 두 편의 시를 화선지에 담았다. 서울대 화묵회 전시회 출품작으로 준비한 것이지만 무더위와 싸우는 내 나름의 방편이기도 했다.

    두보의 夏夜歎은 ‘여름밤의 탄식’이란 제목 그대로 참기 어려운 무더위 속에서 나온 시다. 시인은 푹푹 찌는 열기 속에서 ‘만리청풍’을 기대하면서도 달, 빛, 바람, 벌레 등 만물이 크고 작음의 구별없이 제 스스로 편안코자 하는 것이 본성임을 확인한다. (物情無巨細 自適固基常) 이런 깨달음은 후반부에서 변방의 병사들의 고통스런 모습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져 세상사에 대한 탄식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나는 자적의 소중함을 노래한 전반부를 행초로 썼다.

    안도현의 시는 여름으로 오는 길목에 만나는 싸리꽃, 산벌, 칡꽃 향기, 백도라지 미동, 소나기 소리, 매미울음 등을 ‘공양’이라는 화두 속에 담았다. 뭇 생명의 소리와 향기와 미동이 제각기 무언가를 향한 정성스런 기원이라고 본 시인의 시선이 놀랍고 그 무게감을 근, 평, 치, 발, 되 같은 척도로 표현한 신선한 발상이 아름답다. 이런 시인의 서정에 공감하면서 나도 대상마다 서로 다른 서체로 작품을 구성했다.

    나라 안팎의 인간사를 보면 ‘탄식’을 금하기 어려운 요즈음이다. 무더위가 더하는 짜증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만물이 제각각의 아름다움, 지극함, 기원과 정성들을 지니고 있다는 섭리를 확인하는 것은 이런 답답함을 이기게 하는 소중한 깨달음이다. 힘든 더위와 성가신 벌레 조차도 우주와 나를 이어주는 생명 연쇄의 고리임을 확인한다면 두보와는 달리 ‘탄식’에서 시작해서 ‘감탄’으로 끝나는 발상의 전환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모든 분들의 건강한 여름나기를 기원한다.

    activities · life · 시공간 여행

    김민기, 70년대, 노래

    김민기의 부음을 접했다. 얼마전 학전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과 함께 병세가 위중하다는 사실도 알려졌던만큼 뜻밖의 놀랄 뉴스는 아니다. 그래도 여느 유명인사의 죽음을 접할 때와는 다른 아련한 감정이 생겨난다. 그의 이름과 노래가 70년대 내 대학시절에 미친 영향 탓일 것이다. 페북에는 여러 사람들이 그의 노래와 엵힌 경험과 기억들을 적어 놓고 있다. 결혼식 축가로 김민기의 노래를 합창했다는 기억에서부터 그가 어두운 세월에 ‘푸른 하늘’을 보여준 사람이었다고 쓴 글도 있다. 쉽지 않았다는 그의 인터뷰 기사들도 여기저기 나타난다. 학전의 마지막 공연장에서 찍은 사진을 애도의 글과 함께 올린 글도 여럿 보였다. 그의 영향력이 오랫동안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모습들이다.

    카톡방에선 때아닌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암울했던 시대’에 맞선 김민기라는 글에 대해 그런 표현은 불성실한 왜곡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70년대는 정치적으로 불행했지만 긴 한국현대사에서 결코 암울한 시대로 단정할 일이 아니라는 항변이었다. 김민기의 생애를 두고 70년대의 성격을 논하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맥락을 벗어난 것이다. 우리의 시대인식은 너무 정치화되어 있어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도 이런 논쟁이 생기는구나 다소 씁쓸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표준화된 역사인식이나 관용적인 서술어가 얼마나 실체적 진실과 가까운가는 사실 쉬운 문제가 아니다. 김민기의 죽음을 계기로 70년대를 어찌 이해해야할까 자문해본다.

    대학생으로 보낸 70년대 중후반을 우울하고 답답하게 경험했던 것은 분명하다. 일상의 생활전선에 힘겨워하던 사회인들이 당시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자유로운 삶과 지성인되기를 꿈꾸던 사람들에겐 참으로 힘든 시대였다. 외마디 외침 한두마디로 제적과 투옥을 감내해야 했던 친구들이 느낀 절박함은 더욱 컸을 터이다. 그래서일까 내 주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고 몸부림치던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하던 한 친구는 진지하게 신학교 진학을 고려한다고 내게 말했는데 사회를 바꿀 저항운동을 위해 ‘종교인의 외피’, 특히 기독교의 힘을 빌리는게 유용할 것같다는게 그 이유였다. 또 한 친구는 유명가수를 ‘의식화’ 시키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수의 영향력을 이용하자는 것인데 남진은 너무 의식이 없으니 생각이 깊은 조용필을 그 대상으로 하는게 좋으리라는 구체적인 구상도 덧붙였다. 두 제안 모두 실현 되지 않았고 뜬금없는 망상같은 발상이었지만 각자 제 나름대로 시대의 중압감을 벗어나려던 몸부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시절에 노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 저곳 생겨났다. 노래를 이용하여 메시지를 퍼트리고 사람들을 결집시키려는 노력이었는데 초기엔 출처도 잘 모르는 노래들 (알고 보니 러시아 민요이거나 미국의 반전가요 등이었다), 또는 찬송가 같은 노래도 활용되었다. 노래가사바꿔부르기 (노가바)는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좀더 목적의식적으로 메시지를 담으려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가사내용도 점점 더 과격하고 노골적인 것으로 변했다. 77년 소위 26동 사건이라 불리는 대형 시위를 촉발시킨 사회학과 심포지엄이 있었다. 진행 사회를 맡은 나는 미리 행사장에 가 았었는데 시간이 넘어도 발제와 토론을 맡은 후배들이 나타나질 않았다. 시위로 번질 것을 우려한 교직원들이 이들을 격리시킨 탓인데 그 사정을 알 수 없는 현장에서는 웅성거림이 시작되고 청중석에서는 자연스럽게 구호와 노래가 시작되었다. 잘 알려져 있는 건전가요의 곡에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노랫말이 그날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날 밤 많은 친구들이 관악경찰서로 잡혀갔다. 밤샘 취조의 내용은 이 행사를 시위로 이어지게 사전에 모의했는지, 누가 기획했는지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경찰은 그날 새롭게 불린 노랫말 가사에 주목하고 이 노래를 퍼트린 사람을 찾아내려 했다. 거짓말을 못하던 1학년 후배가 일부 기억이 난다고 가사를 불러주었고 그는 이 날의 시위를 기획하고 주동한 인물의 하나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다. 후일 그가 학교에서도 제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 속에 분노와 계면쩍음이 뒤섞여 올랐던 기억이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마음 한켠에 남아있다.

    대학4학년 때 주변의 몇몇이 노래모임을 만들자고 권유했다. ‘메아리’라는 이 노래동아리는 실천과 노래를 연결하는 일종의 문화운동을 모색했던 것으로 나는 초창기에 함께 하다가 꾸준히 참여하진 않았다. 메아리는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들을 확산시키고자 애썼는데 그 가운데 김민기의 노래는 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후일 80년대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이어져 큰 주목을 받고 이들의 노래 중에는 아름다운 선율과 묵직한 노랫말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곳이 적지 않다. 광주의 비극을 거치고 노동운동이 확대되면서 노랫말과 곡조도 점점 강하고 투쟁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70년대에 바탕한 내 생활세계의 경험 속에는 작은 연못, 아침이슬, 상록수, 공장의 불빛, 금관의 예수 등 혼자 조용히 읖조리며 부르던 김민기 노래의 서정성이 깊이 자리한다. 존 바에즈를 좋아하던 친구가 김민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내 자신 70이 되어 그 시절을 상징하던 인물의 부음을 들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미자가 ‘노래는 나의 인생’이라 했지만 우리의 개인사나 시대사도 노래의 변천사와 겹친다. 뽕짝이라 부르며 도외시하고 공순이들의 노래라 천시했던 가요는 트로트 열풍을 타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다. 통기타를 치며 청년세대의 우울한 감수성을 일깨우던 노래는 사랑을 노래하는 발라드 가수들의 감미로운 정조로 이어지고 있다. 노찻사 출신의 가수가 유명인의 대열에 올라서기도 하고 각종 시위에 운동가요가 여전히 불리지만 더이상 독특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런가하면 서태지와 아이들을 효시로 터저나온 새로운 복합장르는 오늘날 K-Pop이란 대형 문화현상이자 기획산업으로 발전했다.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 숱한 아이돌 그룹이 나타나고 이들의 노래는 이해하기조차 어려울만큼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소비와 자극을 찾는 포스트 시대의 경향을 대변하는 노래도 있지만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게릴라 정신을 내거는 노래도 인기를 끈다.

    리듬과 운율, 달라진 노랫말을 보노라면 반세기 한국사회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해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노래를 좋아하던 나도 이젠 거의 대부분의 노래가 생소하고 곡조를 흉내내기조차 쉽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함께 노래한다는 것, 합창으로 연대하고 노랫말에 공감하는 감수성 자체가 크게 변하고 있다. 70년대 우리의 삶에 녹아있던 김민기, 노가바, 번안가요의 노래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김민기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