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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3) – 영화로의 초대

소록도 답사기를 공유했더니 도진순, 한경구 두 분이 각각 한센병과 관련된 일본 영화를 소개했다. 도 교수가 추천한 ’앙, 단팥인생 이야기‘는 일본식 단팥빵인 ‘도라야키’를 만들어 파는 중년남자 센타로를 주인공으로 한 단정한 스토리다. 어느 날 기형 손가락을 가진 도쿠에 할머니가 나타나 자신을 아르바이트생으로 써달라고 말한다. 처음엔 거절했다가 마지못해 받아들였는데 할마니가 정성스레 씻고 달여서 만든 앙의 맛이 소문이 나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정작 단것을 싫어하던 센타로도 비로소 도라야키의 참맛을 알게 되고 일상이 상당한 활력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도쿠에 할머니가 한센병 환자임이 알려지면서 가게는 손님이 뚝 끊긴다. 그 사실은 안 도쿠에는 가게를 그만두고 격리시설로 돌아갔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대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벚꽃이 참 아름답지 않나”라는 말을 하며 주변 사람들이 한 번 더 하늘을 올려다보도록 만들고, “팥에는 진심을 담아야 해”라며 열성을 다해 팥을 젓는다. 벗을 삼으라고 가져다 준 새장의 새를 숲속으로 날려보냄으로써 자유에의 갈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의 시나리오와 연출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맡았고 이 영화는 제68회 칸 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초청작·개막작이었다. 나가세 마사토시가 센타로를, 영화 <도쿄 타워> 등에 출연했던 배우 기키 기린이 도쿠에 역을 맡았다. 일본다운 잔잔한 영화로 한센병 환자의 차별과 격기에 대한 문제제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경구 교수는 ‘모래그릇’이란 일본 영화를 강추했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작가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모태로 한 것인데 노무라 요시타로 감독이 1974년에 발표한 영화다. 이 ‘모래그릇’은 이 작품 외에도 2004년, 2011년 TV 드라마로 거듭 제작될 정도로 인기를 끈 작품이었다 한다.

도쿄 열차역에서 한 노인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어 수사가 진행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신원조차 밝혀지지 않았던 그 희생자는 한 시골 마을에서 순경으로 재직하며 많은 덕망을 얻었던 선량하고 성실한 인물이었다. 아내와 사별하고 퇴직을 한 뒤 고향에 와서 잡화점을 운영하다가 어느 날 그렇게 시체로 발견된 것인데 대체 그는 누구고 왜 죽었으며 누가 살해한 것인가를 추적하는 형사의 집념을 그린 내용이다.

작은 단서를 바탕으로 수사를 집요하게 전개해가는 중견형사 이마니시(탄바 테츠로)와 젊은 형사 요시무라(모리타 켄사쿠)가 스토리를 구성하는 주역이다. 이 두 형사는 ‘카메다’ 라는 단어의 추적에서 시작하여 흥미로운 발상의 고리를 통해 좀더 분명한 단서를 찾게 된다. 마침내 정치계의 거물의 딸과 연애하는 젊고 유망한 음악가 와가 에이료(가토 고)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된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고아라고 알려진 에이료는 스스로 자수성가한 음악가로 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고, 전직 장관의 딸 사치코 라는 아름다운 연인과 연인 관계이지만 뭔가 외골수적 모습으로 음악에 몰두하는 인간이다.

많은 대사와 복잡한 수사극으로 전개되던 작품이 어느 순간 대사도 거의 없이 거지처럼 유랑하는 소년과 병든 아버지의 가슴 아픈 여정으로 돌변함으로써 영화는 전혀다른 결말로 이어진다. 나병에 걸려서 정처없는 떠도는 아버지와 함께 거지 부자 생활을 하던 어린 소년, 이 소년을 양자로 받은 이가 곧 죽은 형사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자신을 철저히 숨겨서 비로소 사회적으로 성공 직전에 다달은 에이료가 자신의 신원을 눈치 챈 은인을 죽이게 될 정도로 한센병에 대한 극도의 혐오와 배제가 심했던 사회의 비극적인 결말이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수사 드마라 장르지만 잔혹하고 비정한 내용이라기 보다는 가슴 아픈 인간적 내용을 담은 전개. 사건의 진실을 발표하는 이마니시 형사가 감정에 북받쳐하는 장면도 인상적이고, 한센병 이라고 불리우는 나병환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을 지적하는 엔딩 부분도 인상적이다. 현재 이 한센병은 적절한 치료가 되면 전염되지 않고 치료와 완치가 가능한 병으로 분류되지만 예전에는 문둥이라고 불치병처럼 인식되었다. ‘벤허’ ‘빠삐용’처럼 이 영화도 모든 비극의 시작이 나병이 원인이 된 것이고 복잡한 인간사, 가족사를 거치면서 30여년전의 비극이 결국 예기치 못한 살인사건으로 옮겨간 종말이었다.

두 작품 모두 한센인과 한센병을 직접 조명하거나 거대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을 매개로 작동하는 일본 사회내의 강한 편견, 거부감, 그로 인한 아픔과 비극을 그리고 있다. 아름다운 인간애, 한센인도 꼭같은 인간이라는 자각, 잘못된 사회적 관습과 규범에 대한 비판이 잔잔하게 깔려져 있는 수작들이다. 소리높여 외치는 개혁이나 정의의 주장이 아닌, 평범한 일상 속에서 확인하는 고귀함과 어리석음이 새삼스럽다. 일본에 비해 우리는 너무 요란한 구호들이 난무하면서 저런 조용한 내면적 성찰은 오히려 부족한 면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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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면역

놀라운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놀란 때가 얼마되지 않았는데 오늘은 이스라엘-이란 전쟁 뉴스에 놀란다. 코로나 펜데믹에 놀라고 로스앤젤레스 대형 산불에 놀라다가 지구촌 곳곳에서 빈발하는 지진과 홍수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Chat GPT 라는 낯선 존재를 만난지 불과 2년인데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든 인공지능의 끝모를 파워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놀라움은 내 자신에게서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옛날 같지 않은 몸상태에 놀라고 깜박거리는 내 기억력 감퇴에 화들찍 긴장한다. 갑작스런 친구의 부음 소식에 놀라고 내 나이가 70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전혀 몰랐던 지식들, 천문학과 물리학의 세계를 조금씩 접하면서 내 지식과 사유가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알고 놀라고 새로운 영역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현상들에 두 눈이 번쩍 뜨이곤 한다.

‘놀라움’에는 두가지 다른 감정이 포함된다. 경이로움을 느끼며 내 마음을 여는 wonder 와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려드는 fear가 그것이다. 노란 국화꽃 앞에서 우주의 신비를 느낀 시인의 놀라움이 wonder 라면 군사분계선 철책 앞 젊은 초병에게 들리는 이상한 소리는 전형적인 fear 로서의 놀라움이다. 희로애락을 넘나드는 우리는 너나 없이 이런 두 종류의 놀라움을 겪으며 산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 – 나쁜 게 아니다. 뇌과학적으로 모든 놀라움은 낯선 외부자극으로 뇌가 고도의 각성상태로 돌입한 것을 의미한다. 이 자극이 위협적인가 안전한가에 따라 상반된 두 반응이 분기된다. 안전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몸은 편안, 뇌는 보상모드’라는 하이브리드 상태가 되어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가 강화된다. 반면에 자극이 위협이라고 판단되면 교감 신경이 활성화되고 회피 회로가 강화되며 스트레스를 높여 부정적인 정서를 불러온다.

wonder 와 fear를 나누는 요인이 외부자극에 대한 내면적 평가라는 사실은 내가 내 정서의 주체가 된다는 뜻이어서 반갑다. 하지만 주관적 해석이 미치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불안, 위기, 불쾌, 혼란의 반응을 야기시키는 자극들이 적지 않다. 경기불황, 대중혐오, 전쟁위험, 기후위기 등은 내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자극들이 아니다. 각자도생, 무한경쟁의 시대상황도 마찬가지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고 그런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정서에도 면역력이라는게 있다면 그것을 키우고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할 수 없다면 견디고 이겨낼 맺집을 키우는 수 밖에 없다. 내 마음으로 통제가능한 자극에 대해서는 가급적 긍정적 활력이 되도록 wonder 의 감정에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일상의 주변에 널려있는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고 그 신선한 파장에 놀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내가 좌우하기 어려운 외부의 충격과 놀라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다. 일단은 거리감을 갖고 그 맥락을 이해하려는 공부하는 자세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다는 것이 염려를 해소시켜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희로애락의 감정에 내 몸과 마음이 휩쓸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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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움을 위하여 1]

놀라운 세상이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보내세요 함께 못가서 정말 미안해요’ – 한 때 선망의 도시였던 로스앤젤레스가 작년엔 대형산불로 올해는 격렬한 시위충돌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고조되고 있는 핵전쟁의 위혐에 놀라고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유럽의 예측불허 긴장이 초래할 충격에 놀란다. 코로나 펜데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동남아에서 전해지는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 소식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놀라움은 지구적 대형 사건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내 일상에서도 나를 놀라게 하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갑자기 키오스크 주문으로 바뀌고 사람대신 로봇이 등장한 동네 식당에서 놀라고 인공지능 탓에 일취월장하는 학생들 보고서에 놀라다가 그런 AI 비서를 손바닥에 두고 사는데 점점 길들여져가는 자신에게 놀란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 – 나쁜 게 아니다. 놀랄 수 있기에 위험을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다. 또 놀람 자체가 무미건조함을 해소하는 활력이 되기도 한다. ‘놀라는 것’이 활발한 삶을 가능케 한다는 뇌과학자의 강연을 들은 적도 있다. 그래서일까 한 시인은 ‘절대로 달관하지 말고 아이처럼 울고 웃으라’고 했다. 달관한다는 것은 곧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우리말 ‘놀라움’에는 두가지 전혀 다른 감정이 포함된다. 경이로움을 느끼며 놀라워하는 wonder 와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려드는 fear가 그것이다. 노란 국화꽃 앞에서 우주의 신비를 느낀 시인이 표한 놀라움이 wonder 라면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는 위험지대 젊은 초병이 겪는 놀라움은 전형적인 fear 다. 희로애락을 넘나드는 우리는 너나 없이 이런 두 종류의 놀라움을 겪으며 산다. 가급적이면 wonder 의 감탄과 함께 살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이 꼭 그럴 수는 없다. 특히 2025년 오늘은 fear 의 놀라움을 증폭시키는 시대다.

뇌과학적으로 놀라움은 낯선 외부자극으로 뇌가 고도의 각성상태로 돌입한 것을 의미한다. 곧이어 이 자극이 위협적인가 안전한가에 따라 상반된 두 반응이 분기된다. 안전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wonder 의 느낌이 뒤따르고 ‘몸은 편안, 뇌는 보상모드’라는 하이브리드 상태가 되어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가 강화된다. 반면에 자극이 위협이라고 판단되면 교감 신경이 활성화되고 회피 회로가 강화되며 스트레스를 높여 fear, 즉 두려움의 정서를 가져온다.

외부자극에 대한 내적 의미부여에 따라 wonder 와 fear가 분기된다는 설명은 흥미롭다. 외부자극 그 자체보다도 이것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주관적 해석체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살면서 체득한 누적된 경험과 장기기억, 내면화된 world model 이 판단의 중요한 참조기준을 제공한다. 인간이 신처럼 외부환경을 초월할 수는 없지만 격동의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할 여지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fear 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경기불황, 혐오와 불신, 전쟁위험, 기후위기 등 모두가 부정적인 놀람의 요소들이다. 외부자극에 눈을 감고 무관심해짐으로써 감정의 동요를 회피하려 하지만 그것이 해법일 수는 없다. 그런 소극적 태도로는 평정심을 강화하기보다 정서적 회복력의 감퇴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서라 – 이것은 놀라움의 감정에도 적용가능한 지혜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놀라움의 정서에 좀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나아가 외부자극에 의미부여하는 독해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의 경이로움을 찾아 내 정서의 면역력을 키우는 일을 시작하려 한다. 초등학교 시절 나를 들뜨게 했던 보물찾기 시간처럼, 지나치기 쉬운 놀람과 감동의 소재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찾아내려 한다. 일상 속에서 경이로움을 확인하는 것은 곧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상의 주변에 널려있는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고 그 신선한 파장에 놀랄 마음의 준비를 하려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단단해진 내 놀람의 힘으로 격동의 시대가 빚어내는 염려와 불확실성에 당당히 맞서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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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되기, 제자되기

스승의 날이 하루 지난 16일, 서울에서 두 모임이 있었다. 점심은 제자들이 나를 위해 마련해준 자리였고 저녁은 내 세대 동학들이 대학 시절 은사님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사회 곳곳에서 중견으로 활동하는 제자들에게 ‘스승’이란 이름으로 축하를 받은 일도 감사하거니와 다들 현역에서 은퇴한 백발의 동학들이 90을 바라보는 선생님을 모시고 담소를 나눈 것도 아무나 누릴 복이 아니다.

점심에 모인 7명의 제자들과 반가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아무래도 최근 젊은 세대의 경험과 관심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정치 문제로부터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학계로부터 문화계에 걸쳐 다양한 화제가 오고 갔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해, 북한의 현실과 남북관계의 미래에 대해, 대학현장과 박물관에서의 컨텐츠 생산과 유통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엔 나를 위시해 한두해 밑의 후배들 포함해서 역시 7명이 모였다. 지도교수이셨던 신용하 교수님은 최근 좌골신경통으로 보행에 다소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지팡이를 짚고 참석하셨다. 이 자리에 오기 어려워질까 학술원 행사에도 양해를 구하고 불참하셨다 했다. 그 불편함을 제외하면 여전히 탁월한 기억력, 학문적 열정, 정확하고 분명한 자기관리가 여전하셨다. 최근의 저서를 가져오셔서 각자에게 직접 서명을 해고 전달해주셔서 제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신 것도 예와 다름이 없다.

밤늦게 기차로 집에 오면서 내가 누린 이 양면의 행복을 곰곰 되돌아보았다. 좋은 스승을 만난 복, 고마운 제자들을 만난 복 – 그 어느 쪽이 더 크다 할 것 없이 내 평생을 이끈 두 축이다. 감사한 마음 한켠에서는 스승의 기대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한 불민함에 대한 송구함이, 또 다른 한편에는 제자들의 잠재력을 키워주면서도 단단한 지적 훈련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심정이 솟구친다. 나는 제자로서도 분에 넘치는 스승의 복을 누렸고 선생으로서도 과분한 제자들의 사랑을 입었다.

점심 시간에 제자들이 사온 케잌을 자르면서 함께 ‘스승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다들 노래를 부르며 계면쩍어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는 어버이시다….’ 그 가사는 지극한 정성을 담았지만 지금 시대, 고등교육 현장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서둘러 저 노래는 ‘초등학교 선생님’께 어울린다고 둘러대었지만 과연 대학에서의 스승과 제자 간에는 어떤 존경의 마음이 핵심을 이루는 것일까 생각했다. 지식을 주고 받은 관계를 넘어 삶과 시대를 읽는 눈과 결을 공유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저녁에 신용하 교수님은 당신의 오랜 학술활동을 정리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학’, 그리고 ‘꿈을 설파하는 스토리’ 에 전념했노라 하셨다. 식민사학의 극복, 동북공정과의 싸움, 한국적 사회학의 정립을 위한 노력, 문명적 뿌리에 대한 탐구가 그것이라 했다. 지금은 그 마무리 작업의 하나로 ‘문명의 사회학’을 집필하고 있다 하셨고, 갑자기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연구와 집필이 중단된 것을 매우 안타까와 하셨다. 덧붙여 당신의 책이나 연구, 예컨대 ‘21세기 한국의 발전전략’이나 ‘고조선 문명론’이 학계로부터는 냉대를 받았지만 수많은 기업인과 젊은이, 시민들로부터 관심과 반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꿈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마무리를 했다.

꿈을 심어주는 지적 작업 —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 내가 ‘꿈의 사회학’을 강의하면서 마음 속에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공부할 때는 ‘꿈’을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늘 부차적으로 대했던 것 같다. 나는 실증과 분석, 자료와 논리를 가장 중시했고 그런 점에서 과학주의, 합리주의, 주지주의의 성실한 추종자였다. 꿈과 지향, 의지의 영역에서 벗어나려 했고 중립적인 태도를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내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신교수님께서 당신의 꿈을 이어받를 제자를 한 사람도 키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꽃힌다. 공식적으로는 내가 서울대 사회학과의 사회사 후임자로, 한국사회사학회의 다음 세대 대표격으로 활동한 것은 분명하고 나름 그 역할은 최소한이지만 감당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역사사회학, 한국사회사, 민족사회학 등의 영역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공부 이외의 일에 곁눈질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도연구, 고조선 문명연구에 합류하라던 제안을 끝내 수용하지 않았던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송구스러운 부분이다. 내 성향상 지금이라해도 선뜻 그 분야 연구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선생님의 저 꿈, 실증적 학문 너머에 자리한 일생의 열정과 기원에 대한 이해는 좀더 깊고 충실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열흘 전 한완상 교수께서 전화를 하셔서 장시간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는 중에 ‘내가 사회학을 선택한 배경에는 크리스챠니티가 중요한 요인의 하나인데 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해주는 후학이 없다’고 안타까와 했다. 당신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간행하는 일을 내가 맡아주기를 바란다는 말씀도 여러차례 하셨다. 내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여러모로 서운해 하신다는 주위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돌이켜보면 내가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에 한 교수님의 영향이 컸는데 그 분의 기대와 꿈도 내가 이어받질 못한 셈이다.

스승이 되는 것도 일생의 과업이라면 제자가 되는 것도 평생에 걸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정년으로 마무리될 수도 없고 스스로의 인격과 품성을 다듬어 가는 것, ‘신독’의 자기관리가 흐터러지지 않게 노력할 일이다. 그것만이 내가 받은 제자로서, 스승으로서의 큰 복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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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

헌재의 판결을 보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이 입에 올린 글귀가 ‘사필귀정’이었다. 모든 일은 결국 바르게 해결된다는 사자성어로 정의는 마침내 승리한다는 뜻으로도 종종 해석된다. 옳은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겐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경구임은 분명하다. 일의 결국이 좋을 것을 믿는 믿음은 난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물론 현실이 늘 이 말을 증명해주진 않는다. 옳은 행위를 추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성공하거나 그 뜻을 이룬다는 보장이 없다. 때로는 편법을 일삼는 사람이 위세를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엇이 ‘바른 결과’ 인가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이견도 해소되기 어렵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그 마지막 결과를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정답도 있기 어렵다.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아닌 한 한 세대를 지나서야 ‘귀정’의 결말이 나타나는 과정을 견뎌내기는 힘들다.

이번 탄핵인용을 두고서 ‘사필귀정’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의 생각도 각양 각색일 수밖에 없다. 야당의 입장에서는 탄핵인용으로 당대표의 사법리스크를 벗고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에서 이미 ‘귀정’의 큰 걸음이 내디뎌진 것이라 볼 것이다. 탄핵인용을 환영하지만 민주당에 호감을 갖지 않는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헌정질서가 회복되고 극단적 분열을 방지할 여건이 마련된 것을 ‘귀정’이라 여길 것이다. 반면 대통령의 복귀와 이재명의 유죄판결을 ‘바라고 있던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만의 ‘귀정’에 대한 집착과 반감을 견지할지 모른다.

앞으로 벌어질 대선정국과 그 이후의 사태진전을 겪으면서 이 말은 끊임없이 재해석될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완료태로 해석되어선 안된다. ‘귀정’을 독점하는 세력의 정당화 논리로 변질되는 것은 더더욱 피해야 한다. 이 말은 향후에 이루어질 상태를 소망하는 미래형 명제이고 모두가 함께 이루어야 할 책임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헌재의 결정이 ‘사필귀정’의 중요한 국면임은 분명하지만 이후의 사태진전이 모두가 바라는 ‘귀정’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다. 역사와 타자 앞에 더욱 겸손해져야 할 이유다. 그런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네 글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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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매화도

지인이 보내준 매화 사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났다. 시절의 하수상함에 휘둘려 봄이 온 것도 몰랐구나 싶었다. 지금부터라도 나무의 새잎 나는 소리, 잔디 색 변하는 모습, 풀꽃 피는 자리들을 유심히 살펴보리라 다짐한다. 매화 필 때 ‘以文會友’ 하자 약속한 ‘매암동인’ 제자들에게도 안부를 전해야겠다.

몇년 전부터 이맘때면 매화를 그렸다. 옛 문인화를 모사하기도 하고 직접 본 매화를 그리기도 했다. 작년에는 섬진강변의 화려한 매화 동네의 감흥을 표현해 보느라 적지 않은 화선지를 파지로 만들었다. 매화 그리기가 새 봄을 맞이하는 내 나름의 연례 의식이었던 셈인데 올해는 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으니 세상사의 회오리가 내 정서의 영역까지 꽤나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문득 작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중국 작가 우웨스의 작품이 생각났다. 전통적인 문인화와는 다른 짙은 농묵의 묵매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래, 올해는 이런 매화도를 그려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심기일전하여 먹을 갈고 굽은 등걸과 뻗은 가지를 짙은 먹으로 강하게 그렸다. 꽃이 무성해야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꽃잎도 그려 넣었다.

이백의 시 한 구절을 화제로 썼다. 寒雪梅中盡 春風柳上歸 (찬눈은 매화향기에 사라지고 봄바람이 버드나무 위로 돌아온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노래한 시인데 세상사의 이치를 담은 글로 읽을 수도 있다. 한겨울 눈보라가 요란헤도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듯이, 어지러운 나라 안팎의 상황도 결국은 사필귀정의 새 날로 이어지리라는 소망으로 읽어도 좋겠다. 매화향기 은은한 봄기운 속에서 힘든 시기를 견뎌낼 힘과 지혜를 얻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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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아일랜드 여행길

2박 3일간 로드 아일랜드 여행을 다녀왔다. 바닷가에서 잠시라도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처의 희망을 따라 로드 아일랜드 일대에서 전망이 좋은 숙소를 찾았다. 위릭, 뉴포트, 브리스톨 등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한 집을 빌렸다. 브리스톨 해변가에 위치한 작은 주택으로 사진으로 보고 선택한 곳인데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내부는 깔끔했고 거실의 전면이 통유리창으로 되어 탁트인데다 그 앞으로는 넓은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여행을 매우 뜻깊게 해 준 것은 날씨였다. 보스턴을 출발할 당시만해도 눈발이 날리고 예보 상으로는 궂은 날씨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숙소에 도착한 직후 2시경부터 날씨는 활짝 개이고 파란 하늘과 햇살이 강렬했다. 거실에서 구름이 걷히고 그 사이로 파란 하늘과 붉은 태양이 나타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잠시 휴식한 후 반대편 해안으로 건너가 일몰을 보기로 했다. 역시 해변가에 위치한 비치 레스토랑은 음식보다도 분위기와 풍경이 일품이었다.

말을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일몰을 보는 호사를 누리고 나니 밤에 선명한 별자리를 보고 싶은 욕심이 솟아났다. 실제 이 정도면 총총한 밤하늘을 기대할 만 했다. 평소보다 훨씬 선명한 오리온,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등을 만났지만 은하수를 보려던 꿈은 이루지 못했다. 도시의 불빛이 가까이 있는 지역에서 이것까지 바라다니, 지나친 기대였을 수도 있다. 그 아쉬움을 달래준 것은 아침의 일출 광경이었다. 이 일출을 여유있게 보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던킨 도너츠와 커피를 사왔다. 도너츠의 맛을 잃게 만들 정도로 일출 모습은 장관이었다. 넓게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부터 붉은 기운이 펼쳐나가는 모습 앞에서 우리는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프로비던스를 둘러보고 한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장님 내외분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부산에서 지내다가 미국으로 건너온지 23년이 넘었다니 아마도 IMF 직후 미국행을 결심했던 분들이 아닐까 싶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말에 반가와하면서 최근 대통령의 계엄과 탄핵 사태로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라고 했다. 트럼프 정부의 출범에 대해서는 미국의 백인들이 대체로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이 어려운 상황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민을 왔지만 한국상황에 대한 관심은 결코 약해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날은 밤새 눈이 내려 또다른 바닷가 설경을 선사했다. 불과 2박 3일의 여행인데 일출, 일몰, 밤하늘, 설경을 모두 감상할 수 있었으니 큰 다행이었다.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길에 샌드위치 시의 조그만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지중해식 움식이 전문인 듯 했고 주문을 받는 젊은 여성도 그쪽 출신으로 보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갑자기 표정과 어투가 달라졌다. ‘아 정말요? 너무나 가고 싶은 곳이에요. 내가 제일 좋아하고 보고싶은 곳입니다’ 라고 했다. 한국의 위상, 문화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하는 기회였다. 이들에게는 계엄과 탄핵이라는 정치적 격랑은 관심 바깥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믿기 어려운 이중적 상황이 계속될 경우 한국을 보는 대중적 인식에도 영향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까움을 또 한번 느끼며 돌아왔다.

life · 시공간 여행

보스턴과의 긴 인연

보스턴 – 1989년 하바드 엔칭연구소의 방문학자로 와서 1년 8개월을 살면서 박사논문의 초고를 만든 곳이며 내 평생의 학문적 자산이 된 소중한 경험을 얻은 곳이다. 그런가하면 아들이 이곳에서 태어난 덕분에 엔칭 관계자 및 여러 나라의 학자들로부터 큰 축하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아들일지 딸일지를 놓고 20여명 학자들이 1달러씩 모아 베이비 샤워를 해준 멋진 추억이 앨범과 뇌리에 남아있다. 갓난 아기를 낳고 키우느라 Womens and Brigham Hospital 과 Childrens Hospital 을 오갔고 딸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데려다 주느라 분주했던 기억도 새롭다.

이곳의 학자들을 만나 내 좁은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두고두고 내 생애의 자산이 되었다. 카터 에커트, 에드워드 베이커, 낸시 에이블먼, 존 리, 김선주 교수와의 이런 저런 인연도 이곳을 통해 맺어졌다. 낸시는 내가 이곳에 올 수 있도록 추천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하바드 의대 교수로 재직하시던 그 부모님 댁으로 우리 가족을 초청해 주었다. 오랜동안 이 분들과 교류했지만 내가 도움을 준 것보다 그들로부터 받은 것이 훨씬 많다. 특히 고마운 에커트와 낸시 두 분이 모두 타계하셔서 감사함을 좀더 자주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곳과의 인연은 둘째가 유학을 오면서 새롭게 이어졌다. 약학을 전공한 둘째는 식약청에 잠시 재직하다가 하바드 보건대학원으로 유학을 와 약물역학 epidemiology 과 의료통계 medical statistics 를 함께 전공했다. 재학 중에 몇 번 오가면서 격려도 했지만 그 모든 학업과정은 결국 혼자의 몫이었는데 잘 감당하고 견뎌주었다. 2017년 딸이 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에 부모로서 하바드대 졸업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가문의 영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딸은 이곳에서 멋진 신랑감을 찾아서 결혼을 했다. 둘이 잠시 한국으로 나와 작은 결혼식만 마치고 다시 돌아와 공부를 마무리하고 학위 취득 후 취업을 했다. 사위도 이곳에 직장을 갖고 있어서 둘 다 보스턴에 정착하게 되었다. 첫 손녀가 태어나던 2018년에 다시 하바드 엔청연구소 방문학자로 와서 8개월을 지냈고 둘째 손녀가 태어날 때도 짧은 시간 와서 머물렀다. 이제 두 손녀가 자라 학교와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으니 이곳과의 인연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 같다. 낯익은 찰스 강변을 지나면서 내 인생사 속에 깊이 자리한 하바드와 보스턴이 새삼 와닿아 마음이 뭉클하다.

딸 내외가 마련한 벨몬트의 집을 들어서면서 더욱 감사한 마음이 벅차오른다. 재택근무로 오전 회의를 막 마친 딸과 반가운 포옹을 했다. 한국에서의 대학공부는 물론이고 미국 유학시절까지 부모의 경제적 뒷바라지가 필요없을 정도로 장학금으로 전과정을 마친 자랑스런 딸이다. 먼 외국에서 결혼할 상대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며 두 딸을 키우고 마침내 좋은 지역에 좋은 거처를 마련하는 과정도 전적으로 스스로 해결해온 대견한 아이다. 그 독립성이 고마우면서도 힘들고 외로운 때가 어찌 없었을까 싶어 짠한 마음이 솟구친다.

미국도 아이들 교육여건과 안전정도에 따라 주택지 선호도가 크게 달라진다. 벨몬트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곳 주민들도 선호하는 좋은 지역이었다. 집은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3층 건물로 4 룸 4 화장실 구조다. 1층에 거실과 주방과 응접실이 있고 2층에 침실 2개와 놀이방, 그리고 재택근무용 작업실이 있다. 3층에는 방문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침대와 소파와 여유공간이 있다. 뒤로는 호수가 보이고 각종 물건들을 넣어둘 꽤 넓은 지하공간이 별도로 있다. 뒷마당은 바비큐 파티가 가능한 데크와 작은 창고가 있고 토끼들이 오가는 아담한 잔디밭이 있으며 주위로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둘러서 있다. 창이 많은데다 내부 공간이 모두 흰색 톤으로 되어 있어 종일 햇살이 쏟아들어와 밝고 아늑한 느낌이다.

저녁에 손녀들과 반갑게 만났다. 하루가 멀다하고 화상으로 통화하고 사진을 보던 아이들이었지만 직접 만나니 더욱 새롭다. 둘째 손녀가 먼저 집으로 와서 반갑게 만났다. 말도 배우기 전에 잠시 함께 있었을 뿐이었는데 잠시 어색한 듯 머뭇거리다가 곧 2층으로 뛰어 올라가 공주옷을 갈아입고 내려와 애교를 부렸다. 조금 후 큰 손녀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이젠 많이 커서 제법 학생티가 났다. 첫째도 곧장 2층으로 올라가더니 팅크벨 요정의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와 거실을 뛰어다니며 인사를 했다. 두 명의 예쁜 천사를 보는 듯 황홀한 기쁨이었다.

언젠가 딸은 아이들이 너무 여성스러움을 강요받지 않게 키우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두 손녀는 하나같이 공주옷을 좋아하고 화장품 장난감을 좋아한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런 모습은 타고나는 모양이라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다들 자기 재능과 개성을 갖고 태어나는게 아닌가 싶다. 저 아이들이 평생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또 키우느라 애쓰는 딸과 사위가 힘들지 않고 기쁨 가운데 미국생활을 잘 해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life · 시공간 여행

두 번의 13일 아침

2025년 1월 13일 아침을 두 번 맞았다. 인천공항에서 아침 해를 보면서 떠나 13시간을 날아 왔는데 보스턴 공항에서 또다시 13일 아침 해를 마주한 것이다. 탑승한 후 한 숨 잤을 뿐인데 태평양 건너 지구 반대편에 나를 데려다주는 비행기라는 문명 모빌리티에 또한번 놀란다. 동시에 날짜와 시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는다.

1989년 내가 해외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 이곳 보스턴이다. 하바드 엔칭연구소에 있는 동안 탈냉전 선언과 독일통일 소식을 접했고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학자들의 우려를 가까이서 보았다. 내 학문적 자산의 한부분이 형성되고 좋은 연구자들과의 인연이 맺어진 곳이기도 하다. 한달 전 타계한 카터 에커트 교수는 잠시 자신의 아파트에 내가 기거할 수 있게 해 줄 정도로 여러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곳 마운트 어번 묘지에 잠들어 있는 낸시 교수는 한국의 세대와 계층, 사회운동 연구에 큰 성과를 낸 탁월한 학자이면서도 늘 나를 지적 멘토처럼 여기며 한국학계를 존중한 분이셨다.

이번은 이전까지와는 달라 더이상 학술적 방문이 아니다. 대학이나 연구소를 찾을 계획도 없고 특별히 지적 대화를 나눌 상대나 계기를 애써 마련하지도 않았다. 내 여행 가방은 손녀들에게 줄 한글동화책과 과자봉지로 가득 채워졌고 대부분의 시간을 딸과 손녀를 위해 쓸 마음의 각오도 충분하다. 손녀가 다닐 초등학교와 동네 도서관을 함께 가거나 좋아하는 옷이나 장난감을 사주면서 인기를 얻는데 최대의 노력을 할 생각이다. 딸과 사위가 근무하는 회사 상황과 출석하는 교회공동체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면서 과거에 나누지 못한 정을 되살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으려 한다.

한국을 떠난지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한국뉴스로부터 멀어진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한편의 궁금함과 또한편의 회피심리가 뒤섞여 마음은 염려와 무심의 이상한 조합상태다. 주요 현안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초조한 바 없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애써 뉴스를 뒤지고 조바심을 내지는 않을 작정이다. 이런 저런 주장들이 내 정서와 의식을 마냥 흔들지 못하도록 현실을 긴 호흡으로 직시하고 냉정한 거리감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볼까 한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 이곳에서도 뉴스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현 한국상황을 트럼프 신정부가 어떻게 평가할지 어떤 요구를 내놓을지, 미국의 새 정책기조에 한국은 얼마나 지혜롭고 효율적인 대응책을 마련할지 따라올 걱정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정파적 이익투쟁과 내부의 정치동학을 넘어 불확실성이 커지는 국제환경에 대응할 집단적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때다. 위기 속에서 미래의 복합 충격을 감당할 역량이 성장하는, 대전환의 역설적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life · 오늘의 화두

에커트 교수 부음

카터 에커트 교수님 부음을 뒤늦게 접했다. 그의 온화한 웃음과 다정한 모습이 떠오른다. 4년 전 하바드대 패컬티 하우스에서 함께 점심을 하며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건강이 그동안 많이 나빠지셨다는 후문이다. 이제 뵐 수 없게 되었다니 안타깝고 황망하다.

에커트 교수님과의 인연은 1989년 내가 엔칭펠로우로 간 후부터 맺어졌다. 그때 에커트 교수님은 UW에서 학위를 받고 막 하바드에 합류한 젊은 교수였다. 아직 테뉴어를 받지 않았지만 한국 근현대사를 책임진 자리인데다 제자와 후배를 잘 챙기고 폭넓은 식견의 소유자여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당시 하바드의 한국학 연구는 족보연구의 대가인 와그너 교수가 대표하고 있었기에 근현대사보다는 조선시대사가 더 중심을 이루었던 것 같다. 엔칭연구소 부소장인 베이커 씨도 한국관련 연구자들에겐 큰 힘이 되어 주셨다.

나는 체류기간이 좀더 연장되어 가족들이 먼지 귀국하고 혼자 6개월을 더 머무르게 되었다. 새로운 집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에커트 교수께서 여름기간 해외에 가 계실 예정이라며 자신의 집을 쓰도록 해 주셨다. 덕분에 무더운 여름 두 달을 켐브리지의 멋진 아파트에서 기거하는 행운을 누렸다. 집을 깔끔하게 관리하시던 분이셨기에 여간 큰 호의가 아닐 수 없었다.

90년대에는 한국학과 관련한 국내외의 시각차가 현저해지던 때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청소년기를 지나는 때와 비슷하다할까. 주관적인 고집도 형성되지만 아직 어른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과도기… 당시 나는 청소년 같은 기개로 해외의 한국학자들을 다소 낮추어 보았다. 그건 80년대의 시대정신을 공유했던 많은 사람들과 다를바 없었다. 하지만 에커트 교수는 그런 태도들을 별로 개의치 않으셨을 뿐 아니라 종종 경청하기도 했다.

이후 에커트 교수는 자신의 박사논문을 수정해서 Offsprings of the Empire 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후일 [제국의 후예]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왔는데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민중주의 시관이 널리 확대되면서 민족주의적인 자의식도 강한 때였던 까닭에 삼양사라는 기업사를 통해 한국 근대의 식민지적 기원을 밝힌 저작에 호감을 갖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서평이나 학술적 토론보다 막연한 거부감과 선입견이 작용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신기욱과 로빈슨이 편집한 Colonial Modernity in Korea 책자에 에커트 교수가 쓴 “Hegel’s Ghost” 라는 챕터는 에커트 교수에 대한 한국학자들의 비판을 더욱 가중시켰다. 나 역시 이 글에 대해선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국연구자들이 스스로의 세계관과 학문적 패러다임을 성찰적으로 사고하기 어려웠던 지적 지체의 소산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몇 년 후 나 스스로 한국사회사연구가 민족주의적 지향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고 나아가 근대성과 식민성의 착종을 주요한 연구쟁점으로 제기하게 되었음을 에커트 교수가 아셨을까…

이 년 전 낸시가 저 세상으로 갔는데 이제 에커트 교수가 별세하셔서 내가 하바드에서 교류하고 인연을 맺었던 두 분의 소중한 분들을 더이상 볼 수가 없다. 안타깝지만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길… 명복을 빌며 지난 후의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