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이 하루 지난 16일, 서울에서 두 모임이 있었다. 점심은 제자들이 나를 위해 마련해준 자리였고 저녁은 내 세대 동학들이 대학 시절 은사님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사회 곳곳에서 중견으로 활동하는 제자들에게 ‘스승’이란 이름으로 축하를 받은 일도 감사하거니와 다들 현역에서 은퇴한 백발의 동학들이 90을 바라보는 선생님을 모시고 담소를 나눈 것도 아무나 누릴 복이 아니다.
점심에 모인 7명의 제자들과 반가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아무래도 최근 젊은 세대의 경험과 관심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정치 문제로부터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학계로부터 문화계에 걸쳐 다양한 화제가 오고 갔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해, 북한의 현실과 남북관계의 미래에 대해, 대학현장과 박물관에서의 컨텐츠 생산과 유통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엔 나를 위시해 한두해 밑의 후배들 포함해서 역시 7명이 모였다. 지도교수이셨던 신용하 교수님은 최근 좌골신경통으로 보행에 다소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지팡이를 짚고 참석하셨다. 이 자리에 오기 어려워질까 학술원 행사에도 양해를 구하고 불참하셨다 했다. 그 불편함을 제외하면 여전히 탁월한 기억력, 학문적 열정, 정확하고 분명한 자기관리가 여전하셨다. 최근의 저서를 가져오셔서 각자에게 직접 서명을 해고 전달해주셔서 제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신 것도 예와 다름이 없다.
밤늦게 기차로 집에 오면서 내가 누린 이 양면의 행복을 곰곰 되돌아보았다. 좋은 스승을 만난 복, 고마운 제자들을 만난 복 – 그 어느 쪽이 더 크다 할 것 없이 내 평생을 이끈 두 축이다. 감사한 마음 한켠에서는 스승의 기대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한 불민함에 대한 송구함이, 또 다른 한편에는 제자들의 잠재력을 키워주면서도 단단한 지적 훈련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심정이 솟구친다. 나는 제자로서도 분에 넘치는 스승의 복을 누렸고 선생으로서도 과분한 제자들의 사랑을 입었다.
점심 시간에 제자들이 사온 케잌을 자르면서 함께 ‘스승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다들 노래를 부르며 계면쩍어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는 어버이시다….’ 그 가사는 지극한 정성을 담았지만 지금 시대, 고등교육 현장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서둘러 저 노래는 ‘초등학교 선생님’께 어울린다고 둘러대었지만 과연 대학에서의 스승과 제자 간에는 어떤 존경의 마음이 핵심을 이루는 것일까 생각했다. 지식을 주고 받은 관계를 넘어 삶과 시대를 읽는 눈과 결을 공유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저녁에 신용하 교수님은 당신의 오랜 학술활동을 정리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학’, 그리고 ‘꿈을 설파하는 스토리’ 에 전념했노라 하셨다. 식민사학의 극복, 동북공정과의 싸움, 한국적 사회학의 정립을 위한 노력, 문명적 뿌리에 대한 탐구가 그것이라 했다. 지금은 그 마무리 작업의 하나로 ‘문명의 사회학’을 집필하고 있다 하셨고, 갑자기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연구와 집필이 중단된 것을 매우 안타까와 하셨다. 덧붙여 당신의 책이나 연구, 예컨대 ‘21세기 한국의 발전전략’이나 ‘고조선 문명론’이 학계로부터는 냉대를 받았지만 수많은 기업인과 젊은이, 시민들로부터 관심과 반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꿈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마무리를 했다.
꿈을 심어주는 지적 작업 —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 내가 ‘꿈의 사회학’을 강의하면서 마음 속에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공부할 때는 ‘꿈’을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늘 부차적으로 대했던 것 같다. 나는 실증과 분석, 자료와 논리를 가장 중시했고 그런 점에서 과학주의, 합리주의, 주지주의의 성실한 추종자였다. 꿈과 지향, 의지의 영역에서 벗어나려 했고 중립적인 태도를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내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신교수님께서 당신의 꿈을 이어받를 제자를 한 사람도 키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꽃힌다. 공식적으로는 내가 서울대 사회학과의 사회사 후임자로, 한국사회사학회의 다음 세대 대표격으로 활동한 것은 분명하고 나름 그 역할은 최소한이지만 감당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역사사회학, 한국사회사, 민족사회학 등의 영역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공부 이외의 일에 곁눈질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도연구, 고조선 문명연구에 합류하라던 제안을 끝내 수용하지 않았던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송구스러운 부분이다. 내 성향상 지금이라해도 선뜻 그 분야 연구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선생님의 저 꿈, 실증적 학문 너머에 자리한 일생의 열정과 기원에 대한 이해는 좀더 깊고 충실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열흘 전 한완상 교수께서 전화를 하셔서 장시간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는 중에 ‘내가 사회학을 선택한 배경에는 크리스챠니티가 중요한 요인의 하나인데 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해주는 후학이 없다’고 안타까와 했다. 당신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간행하는 일을 내가 맡아주기를 바란다는 말씀도 여러차례 하셨다. 내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여러모로 서운해 하신다는 주위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돌이켜보면 내가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에 한 교수님의 영향이 컸는데 그 분의 기대와 꿈도 내가 이어받질 못한 셈이다.
스승이 되는 것도 일생의 과업이라면 제자가 되는 것도 평생에 걸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정년으로 마무리될 수도 없고 스스로의 인격과 품성을 다듬어 가는 것, ‘신독’의 자기관리가 흐터러지지 않게 노력할 일이다. 그것만이 내가 받은 제자로서, 스승으로서의 큰 복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