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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 소회

폭우로 인한 전국적 재난상황 속에서 77주년 제헌절을 보냈다. 국경일이 평범한 휴일로 변한지 오래인데 휴일도 아닌 제헌절을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듯 하다. 그련데 공휴일 지정이 그 날짜의 무게감과 비례하는 것이라면 제헌절이야말로 휴일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최근에도 계엄 선포와 탄핵공방, 선거와 새 정부 출범의 격랑을 거치면서 헌법이라는 공통의 기준, 합의된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감한 우리가 아닌가.

프랑스 혁명기 선포된 인간의 권리에 대한 선언은 모든 주권이 ’나시옹‘에 있다고 규정했다. 그것은 개인의 권리 선언임과 동시에 근대국가의 성격을 규정한 역사적 명제이기도 했다. ’나시옹‘이란 범주로 인해 인종, 신분, 종교를 뛰어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과 이민자 까지도 포괄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상정될 수 있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곧 나시옹이다. 에르네스트 르낭은 ’나시옹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이를 매일 매일의 국민투표라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나시옹은 곧 헌법정신이다. 헌법이 담고 있는 정신을 공유하는 범주가 나시옹이고 이것이 근대국가의 주권담지자인 것이다. 헌법은 당대의 정치질서를 기초하고 권력투쟁의 규준을 제공하는 현실규범임과 동시에 고도의 공유가치를 내포하는 당위적 규범이기도 하다. 그 당위성은 개별 국가의 경계에 한정되지 않으며 전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닌다. 적어도 근대국가의 헌법은 그런 문명적 보편성을 기저에 깔고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헌법이 제정된 것은 이런 공동의 가치확인, 그 공유가치를 매개로 결속한 민족이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한국역사에서 근대민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여전한 과제인데, 혈통과 문화에 기초하는 에쓰니적 범주가 헌법과 정신의 공유집단으로서 변모한 전환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대한민국헌법 전문을 쓰면서 이런 정신을 구현하느라 애쓴 제헌의원 및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 경의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