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시공간 여행

조슈를 어떻게 만날까?

하기(萩)를 여행할 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하기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슈번의 번청이 있던, 인구 4만 정도의 소도시다. 토쿄는 물론이고 교토로부터도 꽤 떨어져 있고 항공편이나 신칸센이 닿지 않아 한국에서는 더더욱 접근하기가 불편한 곳이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탐방하고 싶었던 곳이인데 기회가 없었던 만큼 여느 일본 여행 때와는 다른 기대감이 느껴진다.

나는 하기보다 조슈(長州)란 지명에 더 친숙하다. 솔직히 말하면 하기가 조슈번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 알았다. 1988년부터 1년 반 동안 하바드 엔칭 도서관의 일본자료실에서 메이지 유신 관련 연구들을 조사하고 검토하면서 조슈와 사쓰마 이야기를 무척 많이 접했다. 특히 요시다 쇼인이 세운 소카손주쿠에서 막부를 무너뜨리는 핵심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것, 그들이 드라마 같은 메이지 유신 정치변동의 주역이었다는 것, 이들이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등을 알게 되면서 조슈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 사쓰마의 중심지인 가고시마는 두 차례 들릴 기회가 있었는데 하기는 이번에야 가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한국사회사학회에서 오랫동안 학문활동을 함께 해온 사사친 동료들과 이 여행을 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뜻깊다. 정근식 , 김필동 교수가 제안하고 나를 비롯하여 황경숙, 노치준, 김경일 교수 등이 동의하여 성사된 여행이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박맹수 총장도 참여한데다 서울교육감 당선으로 가지 못하는 정교수 대신 채규성 님이 합류했다. 모두 학구적인 타입인데다 야심차게 일정을 계획한 탓에 오가며 보고 들을 내용들이 기대가 되고 오래 전 해답을 찾아보려던 질문들이 새롭게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모처럼의 여행인만큼 너무 답사여행 같이 되지 않고 편하고 즐거운 여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모두 노는데는 재주가 없는 진지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관광청에서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야마구치를 검색하니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뜬다. “야마구치현은 조용한 시골이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적지가 많습니다. 한때 무사가 지배한 영지의 수도였던 하기에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게 잘 보존된 성곽 마을이 있고, 이 지방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야마구치는 고요한 해변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신사, 일본에서 가장 큰 석회동굴인 아키요시도 등 기막힌 경치로 유명합니다. 시모노세키 시내 시장과 식당에서는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데, 특히 복어가 이 지역 별미로 유명합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말로 일단 복잡한 역사적 기억을 둘러싼 논란은 괄호쳐두기로 하자.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태도는 여행의 즐거움을 잠식하기 마련이니 아름다운 자연, 오래된 유적들을 영화보듯 관람하는 마음의 여유를 준비할 일이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범주나 근대화 비교욕구 같은 지적 관심도 잠시 제쳐두고 가볍고 즐겁게 이질적인 문화에 대면해 보자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그러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눈, 낯선 지역을 방문하는 호기심 많은 여행자의 눈을 가질 필요가 있으리라. 어슬프게 갖고 있는 사전지식도 일단 내려놓고 몸도 마음도 시선도 가볍게…. ‘조슈’를 만나기 위한 첫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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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찿사 40주년

11월 2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40주년 기념공연이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있었다. 나는 서울대에 노래동아리 메아리가 만들어질 때 참여한 바 있으나 열심히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노찾사가 출범하는 과정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지만 노찿사의 출현에 메아리의 전사가 꽤 중요했던만큼 내 스스로는 노찾사의 활동에 남다른 애정을 느끼곤 했다. 물론 그 투쟁성과 운동성보다 서정적인 노랫말과 곡조를 더 사랑했던 것이었지만….

양현아 교수의 후의로 초대권 두 장을 받았다. 누구와 함께 이 공연을 관람할까 생각하다 대학시절 노래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동네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조형근 박사가 떠올랐다. 조박사는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마을문화운동을 주도하면서 깊이있는 글쓰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스스로 ‘동네 사회학자’라 하지만 그의 글과 책이 보여주는 시야의 너비와 사고의 깊이는 웬만한 유명학자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다. 마침 시간이 된다 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대부분 50,60대 이상의 세대인 듯 했다. 노찿사 노래가 영향을 미치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일테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실제로 공연 자체가 8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황에 맞서 노래운동이라는 양식을 만들어가던 이들의 열정을 새삼 되돌아본 자리였다. ‘노래를 찿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은 유명하지만 실제 누가 노래를 불렀는지 가수 개인의 이름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문학의 영역에서조차 공동창작을 중시하고 개인을 드러내기보다 계급을 앞세우던 시대의 한 반영이었다. 90년대 이후 이들 가운데서 유명 가수가 나타나기도 하고 노찿사의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공연 앞부분에서 김민기에 대한 감사와 그를 기리는 노래들이 불리워졌다. 아침이슬을 비롯해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어두운 시대를 건너왔던 기억을 모두가 떠올리는 듯 했다. 김광석이 불렀던 그루터기, 광야에서 등은 지금도 애창되는 곡이고 나도 간간히 부르곤 했던 노래다. 이들 노래를 40주년을 기념하면서 60대 청중들과 함께 부르니 감회가 새롭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들 노랫말을 다시 한번 적어본다.

천년을 굵어온 아름 등걸에 한올로 엉켜엉킨 우리의 한이 /고달픈 잠깨우고 사라져오면 그루터기 가슴엔 회한도 없다 / 하늘을 향해 벌린 푸른 가지와 쇳소리로 엉켜붙은 우리의 피가/ 안타까운 열매를 붉게 익히면 / 푸르던 날 어느새 단풍 물든다 //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 선 바쁜 의지로/ 초롱불 밝히는 이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 울음 있다 /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 /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 우리 어찌 가난 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 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겨 쥔 뜨거운 흙이여

지금 들어도 아름답고 비장한 노래다.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까지를 상상하는 웅원한 기상이 놀랍고 대지를 꿰뚫는 아름 등걸의 강인함이 뭉클하다. 그런가하면 한, 고단함, 회한, 피울음 같은 아픔과 좌절이 깊이 배여있다. 그래서 ‘초롱불 밝히는 이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넘친다’고 부르짖고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라 외치지만 그 바탕에는 짙은 탄식과 울음이 깔여있다. 아름답지만 슬픈 곡조가 가슴을 울린 것은 이런 정서에의 공감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80년대의 노래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다. 사랑,우정,인생 등을 노래하는 대중가요가 오랜 역사와 함께 주류를 형성했는데 우리는 종종 유행가라고 부르곤 했다. 대학생들은 뽕짝에 대한 거부감과 팝송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졌지만 노래의 메시지나 감성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에 김민기로부터 시작해서 노찿사로,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 이어지는 사회의식 지향의 노래가 있었다. 존 바에즈와 비틀즈의 노래들 가운데 일부도 이런 맥락에서 애창되었다. 그런가 하면 클래식, 가곡, 종교음악 등이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범주로 존재했다. 대중가요는 통속적이었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운동권 노래는 진지했지만 부담스러웠다. 클래식은 어쩐지 상층계급과 서구지향적인 분위기여서 접근하는데 문턱이 높았다.

나를 포함하여 꽤 많은 사람들은 대학에 들어와 두번째 유형의 노래를 접하기 시작했다. 억압의 시대, 분노의 시대를 반영하듯 데모는 늘 노래를 수반했고 노래는 그 자체가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런 흐름이 전부였던 것은 아니다. 통속적인 것은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 정서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노래가 투쟁의 도구가 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즐겨 부르던 성가곡과 흑인영가가 설 자리를 잃으면서 한동안 부를 노래를 찾지 못해 당혹스러웠던 기억도 떠오른다. 내가 초기의 노찿사 노래들, 서정적이고 은유적인 노래들을 좋아했던 것도, 그 이후 지나치게 정치화된 노래에 거리감을 느낀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노찾사 40년을 공연을 앞두고 아름답게 마무리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활동을 전개해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후자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날 공연도 ‘회고’에만 방점을 두지 않고 새로운 노래, 새로운 가수를 선보이는 부분을 담았고 앞으로의 성원을 부탁하는 메시지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재즈풍과 록 형식의 새로운 곡과 노랫말도 소개되었다. 그 결심이 뜻있는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새롭게 전개하는 앞으로의 음악 형식, 노래형태의 특성이 무엇일지 다소 궁금했다. 공연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러하듯 어디에서 매듭과 혁신을 추구할지 잘 와닿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과거 7,80년대와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확신하기가 어렵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느껴질 정도로 해묵은 모순과 좌절이 거듭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감수성과 문화적 취향은 엄청나게 변했다. K-Pop의 아이돌 노래가 전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가 하면 임영웅 등 트롯트 열풍이 전국민을 격동시키는 오늘이다. 21세기 문화운동이 새로운 힘을 얻으려면 그 형식과 감성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꿈이 사라지는 시대에 필요한 희망의 메시지와 선율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그래서 노래가 힘이 되는 동력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 중대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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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를 어떻게 만날까? (3)

하기 여행의 두번째 지역은 조카마치 구역이다. 일본에서 가장 잘 보존된 막부 시대 조카마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옛 성곽, 성주인 모리가문의 저택 유적, 사무라이 거주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관과 박물관, 미술관 등을 방문하여 이곳의 내용을 좀더 세밀하게 접해볼 수 있다. 조카마치를 이해하기 위해 하기시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하기는 현재 야마구치현에 위치한 인구 4만 4천명의 도시다. 한편은 동해에 면하고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막부 말기부터 대동아전쟁 전까지는 정·재계의 거물을 다수 배출하는 주요 지역이었다. 하기가 배출한 지사 8인 가운데 일본 총리가 5명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도로, 철도, 항만의 정비가 늦어 발전이 더딘 곳으로 평가된다. 인구의 감소가 현저하며 최근에는 진학·취직 등도 규슈로의 지향이 강하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인 《세상에 사는 나날》과 《화신》은 모두 하기를 무대로 한다.

옛날에는 오우치 가문의 가신인 요시미 가문의 영지였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인 1608년에 모리 데루모토가 시즈키산의 기슭에 하기성을 축성해 이후 야마구치의 정사당에 번청이 옮겨질 때까지의 약 260년간 조슈 번 36만석의 성시로서 발전했다. 에도 막부 말기에는 요시다 쇼인이 쇼카손주쿠에서 많은 인재를 육성해 이곳에서 기도 다카요시, 요시다 토시마로, 다카스기 신사쿠, 쿠사카 겐즈이, 이토 히로부미 등을 배출하고 이들과 우호가 있던 이노우에 가오루 등을 배출했다. 또 일본의 근대적 군사제도를 만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고향이기도 하다. 막부 말기 유명한 이케다야 사건의 발단이 된 과격파 유신지사들의 교토 방화 계획에서 천황의 거처를 이곳으로 옮기려는 계획이 있기도 했다

메이린 학사는 하기번교로서 상층 사무라이의 교육기관이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박물관

명륜학사

우라가미 기념관

크리스천 순교자 기념공원

유네스코 문화유산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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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레그넘

외교협회의 학술지인 [외교]지가 151호의 특집으로 ‘불확실성의 세계와 한국’이란 주제를 설정하고 내게 권두논문을 청탁했다. 전지구적 불확실성을 조망하고 필요한 시대정신을 언급해달라는 쉽지 않은 주문이어서 망설였지만 내 스스로 정리해볼 필요를 느끼던 바라 응락했다. 글을 쓰면서 공부도 되고 내 생각을 다듬는 계기가 되었지만 더위 속에서 진땀을 많이 흘렸다.

나는 인터레그넘이란 개념을 시대적 불확실성을 풀어가는 키워드로 삼았다. 인터레그넘은 원래 한 국왕이 죽고 그 후계자가 취임하지 않은, 지체된 궐위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후 이태리의 정치철학자 그람시는 이 말을 재구성해서 사회질서를 지탱해온 기존의 프레임은 약화되는데 새로운 질서는 채 형성되지 못한 예외적 상태를 뜻하는 개념으로 활용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말을 차용해서 오늘날 지구세계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자 했는데 나도 그런 시각에 동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2024년 8월 빠리올림픽은 자유, 평화, 우애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다양한 인종, 문화, 국가들의 연대를 과시하면서 종료되었다. 올림픽 내내 한국선수들의 선전 소식도 좋았고 세계적 선수들의 높은 기량을 접하는 즐거움이 컸다. 하지만 규칙에 승복하는 스포츠와 달리 현실세계는 혼란의 연속이다. 이스라엘-하마스의 무력충돌은 언제 마무리될지 알 수가 없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핵전쟁을 염려해야 할 지경에까지 치닫고 있다. 9월 초엔 극우 이념을 표방하는 정치세력인 ‘독일을 위한 대안’ (AFD)이 튀링겐주의 제1당으로, 작센 주의 강력한 2당으로 약진하여 나찌즘의 역사를 기억하는 독일은 물론 유럽과 세계의 우려를 더하는 중이다.

눈 앞으로 다가온 미국의 대선은 더욱 혼란스럽다. 새로운 세계적 리더십이 출현하리라는 기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 채 지역분열, 계층갈등, 인종분규가 착종된 진영 대립으로 민주주의의 심각한 퇴행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푸틴 및 김정은과의 친분을 강조하면서 동맹의 가치를 폄훼하는 트럼프 후보의 메시지는 나토의 집단방위에 의존하는 유럽이나 한미동맹의 오랜 전통을 중시해온 한국에 큰 당혹감을 안겨주고 있다. 대선 결과가 어떠하듯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은 강화될 것이란 전망과 함께 일종의 ‘내전’ 상태가 지속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반도의 불안감도 전례없이 커지고 있다. 핵무력강화정책을 헌법에 명기한 북한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국가관계로 재규정했고 남북간의 모든 교류와 접촉은 차단되었다. 한미일 협력체제가 군사협력의 영역에까지 확장되면서 북중러의 결속과 한중마찰 심화의 우려도 함께 커진다. 새로운 안보위기론과 함께 한국 독자핵무장론이 등장하는가 하면 제2의 한국전쟁 가능성을 말하는 국내외 견해도 나타나고 있다. 친숙하던 세계질서가 흔들리고 익숙했던 한반도 환경에 심대한 변화가 진행 중임을 우리는 매일의 뉴스에서 확인하고 느끼는 중이다.

I2차대전 이후 정착된 질서, 즉 주권국가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과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세계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제분쟁을 규율하고 세계경제를 뒷받침해온 다자적 국제기구가 이전만큼 효율적으로 또 포괄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 늘어간다. 국제사회의 일관된 반대와 제재에도 여섯 차례 핵실험을 실시한 북한에 IAEA도 유엔 안보리도 실질적인 통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구생태계의 난개발을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려는 유엔의 원대한 목표나 탄소감축을 위한 빠리협약의 실천도 개별 국가의 반발과 성장주의를 규율하는데는 불충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주의 세계질서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고 세계화의 흐름에 강력하게 연동되어 선진국의 대열에까지 발전하고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구현한 한국으로서는 다자주의 원칙에의 확실한 지지에 더해 인터레그넘 상황의 양면성을 민감하게 이해하고 대응하는 전략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지구적 차원의 불확실성과 복합위기에 더해 한반도적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고전적 위기에도 대처하기 위한 총체적 역량구축, 혁신적 버넌스의 구축에 힘을 다해야 하는 시대다. 미래충격, 뉴파워, 책임윤리의 화두 속에 담긴 시대정신을 견실하게 추구해가는 탁월한 리더십도 절실하다. 레트로토피아의 유혹을 벗어나기 위해 민주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과 미래를 향한 희망서사를 구축하는 일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전환기의 시대정신은 희망과 염려, 가능성과 제약조건, 미래와 과거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면서 레트로토피아로의 유혹을 이겨내고 국가공동체의 질적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인류적 시야의 책임윤리를 확대해가는 포괄적 역량에서 찾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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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를 어떻게 만날까? (2)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조슈와 사쓰마에 관련된 글들을 많이 접했다. 가고시마는 들릴 기회가 있어 사쓰마 시대의 박물관과 사이고 다카모리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슈는 막부 말기 가장 많은 인물들이 피해를 입었던 곳인데다 한국과 악연이 깊은 인물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어서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지금껏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정년을 한 지금에야 이곳 탐방을 하게 되니 내가 조슈에 관심을 가졌던 때로부터 거의 35년만이다. 하기 일원의 지도를 펴고 여행계획을 구상하다 보니 하바드 엔칭 도서관에서 독학의 편식증을 무릅쓰고 조슈 지방사 책자들을 열독했던 때가 새삼 생각난다.

“한국과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과정의 비교사적 연구”라는 타이틀의 내 학위논문은 19세기 말 조선과 일본의 근대개혁이 왜 실패와 성공이라는 차이로 나타났는가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개항기 조선과 막부 일본의 내적 역량이나 개혁지향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고 다만 개혁과정에 작용한 외세의 강도와 성격 차이가 결정적이었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세계체제론적 사고와 민족주의적 열정이 뒤섞인 가설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조선의 ‘개화파’와 일본의 ‘개혁파’를 가급적 상세히 비교하고 그 차이가 대단치 않았음을 밝히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요시다 쇼인, 다카스키 신사쿠,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등 일본의 토막유신파들에 대한 상세한 연구에 비해 김옥균, 김윤식, 유길준, 김홍집 등의 전기적 연구가 부족해 비교에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행을 앞두고 도서관에서 메이지 시기를 다룬 책자들을 빌렸다. 그 중 미요시 도오루가 쓴 [史傳 이토 히로부미] 책자가 상세하면서도 흥미있어 보여 먼저 읽기 시작했다. 조슈와 사쓰마에서 활동한 여러 인물들의 일화와 인물평들까지 담겨있어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저자가 저널리스트 작가라는 점에서 학계의 신중한 평가보다 대중의 반응을 염두에 둔 책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이토를 비롯한 당대의 주역들이 모두 대단한 기지와 역량, 헌신성을 지닌 인물이고 일본의 미래를 염려하는 지사들로 그려져있다. 시바 료타로 사관이라 불리는 대중적 영웅주의의 또다른 버전일 수 있어서 주의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박영신 교수께서 내 학위논문을 출간하겠다고 동의를 구하신 적이 있다. 그때 선뜻 응하지 못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내 논지에 대한 논증이 아직 불충분하다는 판단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약간 더 실증적인 자료를 보완하면 출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관련 자료를 더 찾아보고 일본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나는 내 기본논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크게 두 가지 쟁점이 심각한 질문으로 내게 떠올랐는데 1) 19세기 후반 한일의 정치변동을 성공과 실패라는 시각에서 대비하는 것이 타당한가 2) 한말 개화파 세력이 막부말기 개혁파세력과 역량과 세력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내리지 못해 결국 출간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유신에 대한 평가는 성공과 실패라는 시각과 직결되어 있다. 한편에서는 일본의 근대국가형성에 성공하고 동북아에서 서구문명화를 선도하는 문명국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를 높이 평가한다. 반면 천황제 군국주의로의 진행으로 일본이 전쟁국가가 되고 결국 패전으로 이르게 된 계기가 메이지유신에 있다고 보아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통상 보수적인 역사관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높이 평가하는데 비해 진보적인 역사학계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다. 최근에는 [메이지유신이라는 과오] 란 책이 간행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을 멸망시킨 요시다 쇼인과 조슈 테러리스트”라는 부제를 달고 있을 정도로 조슈의 메이지 주역들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유교의 선린평화론적 사상을 확장할 수 있는 싹을 억누르고 대외침략의 길로 나가게 된 결정적인 책임이 이들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중심의 역사해석은 불가피한 것일까? 근대 역사학이 국가학과 밀접하고 민족주의와 친연성이 강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내가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를 비교하겠다고 생각한 발상 그 자체가 이미 국가중심적인 패러다임을 수용한 것임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고보면 메이지 시기 조슈의 인물들을 다룬 많은 글들도 전형적으로 ‘국가사’의 관점에서 평가되고 있다.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영웅시되어 영화로 만들어지고 도사의 사카모도 료마가 시바 료타로의 작품에 의해 구국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것이 그 전형적 사례다. 조슈를 만나면서 그들의 영광과 우리의 치욕, 그들의 성공과 우리의 패배라는 이분법을 넘어설 어떤 스토리를 준비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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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노래들

10월 17알부터 4일간 “이적의 노래들”이라는 타이틀로 가수 이적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열었다. 나는 이적의 초대로 첫날 공연을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공연은 엄청난 팬들의 운집과 알찬 노래향연으로 풍성했다. 이제 셀럽의 반열에 오른 유명가수로부터 초청을 받아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함성 속에 뭍혀보는 자리는 뿌듯하고 감동스러웠다.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왔지만 오래 전 졸업해서 유명인이 된 제자가 학창 시절 교수와 끈끈한 유대를 지속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문화사회학 수업에서 이적이 쓴 보고서의 내용이 탁월해서 내 기억에 깊이 남은 학생이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대화의 기회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미 대가수가 되어 있는 그가 내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예비 신부와 함께 연구실을 찾아왔을 때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주례를 허락하면서 두 사람에게 어떻게 만났고 어떤 각오로 가정을 꾸리기로 했는지 적어서 보내 달라 했다. 두 사람은 정말 진지하고 성실하게 각자 살아온 여정과 생각, 앞으로 기대하고 지켜가려는 가치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써서 보내왔다. 나는 그 글을 바탕으로 주례사를 작성했고 진심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축복했다. 이적은 그 만남의 감격을 ‘다행이다’라는 노래를 통해 표현했고 결혼식에서 스스로 축가로 불렀다. 내가 한국사회학회장으로 사회학회 60주년 행사를 연세대에서 개최했을 때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와서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내 퇴임에 즈음해서 나는 내가 지도했던 박사 제자들에게 글씨를 하나씩 써 주기로 했다. 글씨를 받은 수십명은 대부분 교수로서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중 두세명 학자가 아니면서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도 제안을 했다. 이적은 그 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매우 고마와하면서 자신의 노래인 ‘나침반’ 의 내용을 써주기 부탁했다. 이후 ‘이문회우 정헌 박명규 서예전’에 와서 진심으로 내 정년을 축하해 주었고 심보선 교수와 함께 자신의 서명을 담은 음반과 플레이어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이적은 그때 내가 써준 글을 자신의 SNS에 올려놓고 자랑을 하기도 했으니 나와는 꽤 오래 깊은 인연을 이어오는 셈이다.

난 다시 일어날 수 있어/ 아직 내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 아직 이 황량한 세상 속에/ 너는 내 곁에 있어주니까 /어지러웠던 하루하루가/ 먹구름처럼 내 앞을 가로막아도 /너의 눈빛이/ 마치 꼭 나침반처럼/ 내 갈 길 일러주고 있으니 /아직 내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아직 이 황량한 세상 속에/ 너는 내 곁에 있어주니까

공연 중 김동률이 우정 출연을 해서 열렬한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김동률은 이적의 결혼식에서도 축가를 불렀던 것 같은데 그 때의 기억으로는 매우 장난끼 어린 느낌이었는데 이날은 매우 조용하고 사색형의 연예인 풍모가 느껴졌다. 그 다름 사이에 짙게 확인되는 우정이 보기 좋았다. 이적은 자신의 노래를 부르던 중간에 얼마전 타계한 김민기의 노래를 불러 그의 삶을 기렸다. 70년대 후반 내 대학시절의 떠올라 마음이 찡했는데 청중들도 대부분 그러했던 것 같다.

공연을 보며 80년대의 노래를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노래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랑,우정,인생 등을 노래하는 대중가요가 오랜 역사와 함께 주류를 형성하는 한편에 김민기로부터 시작해서 노찿사로,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 이어지는 강렬한 사회의식 지향의 노래가 있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제3의 범주로 클래식, 가곡, 종교음악 등이 있었다. 대중가요는 통속적이었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운동권 노래는 진지했지만 부담스러웠다. 클래식은 어쩐지 상층계급과 서구지향적인 분위기여서 접근하는데 문턱이 높았다. ‘유행가’라 불리던 대중가요에 대해선 거리감을 보였지만 술집에서는 즐겨 부르기도 했다. 팝송을 즐겨 듣기도 했고 익숙한 노래에 가사를 바꿔 시대적 정서를 표출하기도 했다.

이적의 노래는 이 세 부류의 틀을 재조합하고 재구성하여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음악이 아닐까 싶다. 그는 통속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탈대중적이지도 않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지만 운동권 가요처럼 투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의 곡의 선율은 고급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지만 클래식처럼 부담스럽거나 고고한 분위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가 탁월한 작곡가이자 가창력 있는 가수일 뿐 아니라 좋은 작사가라는 사실이 이런 종합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의 노래, 특히 노랫말이 젊은 세대 뿐 아니라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적의 노랫말에는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은유’가 포함되어 있다. 너무 현학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으면서도 통속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삶의 다양한 면모를 성찰하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의 힘이 이적 노래를 다른 어떤 가수와도 다른 것으로 만드는게 아닐까. 거위의 꿈, 다행이다, 거짓말, 물좀 줘요, 같이 걸을까 등의 노랫말은 이 시대의 정조와 혼동을 확인하고 음미하는 소중한 메타포이자 코드라 여겨진다. 이날 공연에서 청중들과 열정적으로 함께 불렀던 ‘물 좀 줘요’는 그의 노래에 담긴 시대정서를 잘 표현한 것 아닐까 싶다.

한눈팔지 말고 나만 봐줘요/ 아직 나는 잔뜩 목이 말라요 / 숨이 넘어갈 듯 노랠 부르며/ 그대가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 땀이 비 오도록 눈이 빠지도록/ 여기 이 자리에서 그대가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 내게 약속해 떠나지 않겠다고 /우리 꿈꿨던 그곳에 닿을 때까지 // 물 물 물 물 물 물 좀 줘요 목 목 목 목 목말라요 / 내 머리가 흠뻑 젖게 해줘요 난 그대 거예요 // … 핏빛이 지워지지 않아 자꾸만 어지러워져/ 붙잡을 사람이 필요해 여보세요 날 다시 일으켜주세요/ 물 물 물 물 물 물 좀 줘요 목 목 목 목 목말라요

1988 드라마 OST 로 이적이 부른 걱정 말아요 그대 역시 그의 음악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 아닐까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인권이 불렀던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하지만 이적이 부른 노래도 그에 못지 않게 와 닿았다. 같이 걸을까 라는 노래의 노랫말도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피곤하면 잠깐 쉬어가 / 갈길은 아직 머니깐 / 물이라도 한잔 마실까 / 우리는 이미 오랜 먼길을/ 걸어온 사람들 이니깐 //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 깊은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오늘도 // 길을 잃은 때도 있었지/ 쓰러진 적도 있었지/ 그러던 때마다 서로 다가와 / 좁은 어깨라도 내주어 / 다시 무릎에 힘을 넣어 //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 깊은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 오늘도 // 어느 곳에 있을까/ 그 어디로 향하는 걸까/ 누구에게 물어도 모른 채 다시 일어나 /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 오늘도

이적은 삶이 여러모로 모순적이고 ‘만만치 않더라’고 고백하는 가운데서도 꿈과 기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노래가 있고 누군가 함께 하는 이웃이 있고 또 나도 모르던 세포까지 깨어나는 순간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적은 스스로 이런 경험을 했기에 독특한 예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노래’라는 가사는 노래에 담긴 힘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런 힘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노래는 소리칠 수 있게 해줬고 / 노래는 울어도 괜찮다 해줬고 / 노래는 내 몸 속에 감춰진 / 나도 모르던 세포까지 / 한꺼번에 잠 깨웠지 // 문도 없는 벽에 부딪혀 / 무릎 꿇으려 했을 때 / 손 내밀어 일으킨 건/ 결국 내 맘속 노래야 / 노래는 꿈을 꿀 수 있게 해줬고 / 노래는 다시 힘을 내게 해줬고 / 노래는 독약 같은 세상에/
더럽혀졌던 혈관까지/ 짜릿하게 뚫어주었지

life · 오늘의 화두

결혼 41주년

10월 1일 오늘은 결혼 41주년이 되는 날이다. 눈을 감고 생각하니 노경혜를 아내로 맞아 가족을 이루고 지내온 지난 세월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신혼시절 전주, 서울, 부산을 오가던 일, 두 딸 선영과 윤영을 얻은 일, 하바드대학으로 연구년을 떠난 일, 그곳에서 아들 종인을 얻은 일, 전주에서 첫 아파트를 장만한 일, 부모님 질환으로 예수병원을 수없이 오가던 일, 어머님 소천하신 일, 서울대학교로 직장과 집을 옮긴 일, 아버님 수술 후 돌아가신 일, 강남에 내 아파트를 구하고 이사한 일, 아내가 권사 취임한 일, 두 딸이 결혼하고 두 사위를 얻은 일, 네 명의 외손주를 보게 된 일, 서울대를 정년하고 광주과기원 석좌교수로 부임한 일, 세종으로 이사를 한 일 등…

부부의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다. 아내는 결혼 2년전 이대 대학원에 재학중일 때 선배의 소개로 만났었다.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다소곳하며 차분했다. 눈매가 곱고 사람을 편하게 해 주어 마음에 들었지만 쾌활하거나 적극적인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도 재미있는 대화거리를 찾는데는 재주가 없는 탓에 우리의 데이트는 늘 첫 미팅하는 사람 마냥 데먼데먼 했던 것 같다. 처가 부산여전에 교수로 채용되어 처가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간 후에는 한동안 만나지도 못했다. 이후 다시 연락이 닿았던 때 곧바로 부산으로 달려간 날이 생각난다. 그 날의 재회가 결혼으로 이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육사 교수부에서 지내던 3년의 교관생활은 재미있었지만 살림살이가 힘들었다. 내 적은 교관 월급으로 정년 후 서울로 올라오신 부모님과 대학을 다니던 동생 양규의 생활을 지탱해야 했다. 1983년 새해 첫날을 나는 기도원에서 보냈는데 군복무가 끝나는대로 가능하다면 직장을 얻기를 기도했다. 또 결혼이 대책일리도 없었을텐데 결혼할 수 있기를 원했다. 놀랍게도 9월부터 전북대학교 교수로 임용이 되었고 10월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100 퍼센트 응답이 된 셈이다. 아내가 다니던 부산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장소가 낯설어서였는지 먼길 오신 하객들에 대한 송구한 마음때문이었는지 마음이 부산했고 내가 자주 웃었다고 친구들의 핀잔을 들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제주로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전주에서 하숙생활을 계속했고 아내는 처가가 있는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결혼 후 주말마다 서울, 부산, 전주를 오가느라 힘들었던 생각이 난다. 아내가 전주로 직장을 옮긴 후 우아아파트 16평 전셋집에서 본격적인 신혼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작은 아파트가 좁게 느껴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후 41년을 살아오면서 아파트 평수도 늘어나고 큰 질병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에 처하지 않았으니 감사한 일이다. 서울대 교수로서 뛰어난 제자들을 만났고 정년 후에도 석좌교수로 가르치는 복을 누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1남 2녀의 소중한 아이들을 선물로 얻은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가정을 꾸리기 위한 마음 준비는 제대로 못했던 것 같다. 남편으로서의 역할, 자식으로서의 역할, 아빠로서의 역할이 어떠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거나 배우려는 생각도 없었다. 그냥 저절로 잘 되리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좋은 교수가 되려고 애썼던 것에 비해 좋은 남편과 부모가 되기 위한 노력은 부족했던 것이다. 가끔씩 어머니의 서운해 하시는 모습과 처의 힘들어하는 모습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적도 있었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채 내 욕심을 강변하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늘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인데 또 다른 한켠에 미안한 마음도 자리하고 있는 이유다.

결혼 41주년을 맞이하여 그간의 삶을 돌아보니 감사한 것 일색이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기도 덕분일 것이다. 간간히 이런 저런 아쉬움이 생기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생각한다. 넘치는 복을 받은 41년이 아니었던가.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찬송가사를 떠올린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내가 받은 이 축복이 자녀들에게 이어지기를 기도한다. 세상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요동하겠지만 봄 새싹의 신선하고 역동적인 생명력으로 잘 이겨낼 힘을 얻기를 ….

life · 시공간 여행

그리스 미학 2

그리스는 올림픽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인간의 강인한 육체의 힘을 최대로 발휘하려는 이 제전은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발전하고 있다. 얼마전 끝난 올림픽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월드컵, NBA, 각종 스포츠 경기의 배후에도 그리스의 유산이 어른거린다. 물론 돈과 명예, 경쟁과 좌절이 너무 크게 결합된 프로 스포츠의 경우 그리스에서의 정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테네에서 나는 사라진 고대문명의 정신적 자취를 찾아보려 애썼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르스토텔레스의 철학자들과 아고라에서 공화정을 이끌던 자유 시민들의 숨결을 만나보고 싶었다. 파르테논과 로만 아고라 광장을 둘러보면서 그런 모습을 느껴본 듯 하지만 엄밀하게는 내 상상의 소산일 뿐이다. 실제 아테네의 현장에는 말없는 고고학적 유물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나는 그리스인들이 강조했던 또다른 모습에 주목했다. 육체의 강인함을 통해 용맹과 용기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음을 새삼 느꼈던 것이다. 특히 올림픽의 배경이 되었을 남성적인 힘, 불굴의 투지를 상징하는 근육질의 육체성을 작품 속에서 만났다. 오늘날 ‘남성성’은 종종 페미니즘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지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여성성과 꼭같이 남성성도 하나님이 주신 품성으로서 그것은 아름답게 구현되고 다듬어가야 할 자질이다. 그 모습의 한 부분을 스케치로 옮겨둔다.

    life · 시공간 여행

    그리스 미학 1

    그리스 아테네를 둘러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먼 옛날 그들이 보여준 조형미의 아름다움은 대단했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위용을 접했을 때 느낀 감동은 말로 하기 어렵다. 사진으로 본 바와 다를 바 없고 원형도 많이 훼손된 상태인데도 가히 건축미학의 최고경지라 일컬을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중국의 만리장성이 놀랍고 경이로우며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장대하지만 이런 미학을 표현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난 조각품에서 그리스인들의 미학을 좀더 가까이 느꼈던 것 같다. 조각품의 섬세한 기법은 물론이고 인체의 아름다움을 놀랍도록 표현한 예술적 감각이 가히 압권이다. 인간이 추한 면모도 적지 않지만 만물 중 인간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리스 조각의 최고품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의 박물관에 가 있다고 한다. 온전하지 못하거나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작품일지라도 아테네 현장에서 직접 만나는 유물이 풍기는 아우라는 남다르다.

    르네상스는 이런 그리스 미학을 부흥시키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카톨릭 하의 중세 유럽은 영혼을 중시하고 육체를 경시하는 엄숙주의가 강했다. 그리스 예술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인간의 욕망을 승인함으로써 중세 암흑기를 해체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제국 박물관에서 그리스 조각작품을 최고의 소장품으로 전시하는 것도 이런 르네상스 미학에 대한 공감과 무관치 않으리라. 약소국 유물의 약탈이라는 제국주의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서구문명의 계승자로 자처하고픈 그들 욕망의 소산인 셈이다.

    그리스 조각은 인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많다. 남성의 경우는 용맹함과 근육질의 신체, 역동적인 움직임 등이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다. 통상 다산과 풍요의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던 여타 문화권과는 다르게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을 극단적으로 추구했다. 특히 여성은 우아한 얼굴과 균형잡힌 몸매, 신비로운 곡선미가 유난히 돋보인다. 개인적 느낌으로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느끼는 바지만 하나님이 여성을 남성보다 더 정교하게 빚으신 것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어릴 적 도덕론이 우세한 환경에서 성장한 탓에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내겐 낯설었다. 유교적 가풍과 기독교적 가르침이 독특하게 혼합되어 의복, 치장, 춤, 음식 등에 대한 무관심이 몸에 배었다. 하지만 성장해 가면서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도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영육 이원론을 넘어서 아름다움, 감성, 충동, 축제, 욕망 등의 가치를 새롭게 느끼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종의 내 의식의 르네상스였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리스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난 많은 작품들이 주는 감흥이 남달랐다. 그 중에서도 고개를 들고 무릎을 꿇은 상반신 여인상은 정말 인상 깊었다. 아름다움과 우수가 함께 뭍어나는 그 작품을 앞뒤로 오가며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중앙 홀에 서있는 아프로디테의 상은 놀라운 균형미와 곡선미로 내 눈을 끌었다. 이들 작품은 오늘 현대의 작가들도 쉽게 따라가기 어려운 명실상부 최고의 수준이다. 누군지 모르는 그 시대 조각가들의 손과 마음을 떠올리며 나도 도화지에 선을 그리며 음영을 넣었다. 미학은 이렇게 시대를 넘어 교감할 수 있는 것인 모양이다.

    activities

    세 얼굴의 그리스

    짧은 아테네 여행이었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그리스의 면모들을 접할 수 있었다. 예상했거나 기대한 것이 아니었는데 아크로폴리스, 역사박물관, 고고학박물관, 그리고 아테네 시내를 방문하면서 적어도 세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그리스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깊이 있는 이해는 아니지만 내 지식의 편협함을 확인하고 교정할 수 있었던 귀한 여정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텥레스로 대표되는 철학과 지성, 아테네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폴리스 공화국이 내게 가장 친숙하고 깊이 자리잡은 이미지다. 이곳에 오고 싶었던 오랜 꿈도 이런 심상 이미지에 기반한다. 이런 모습은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광장, 파르테논 신전과 디오니소스 공연장에서 감동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나는 아테네 시내를 오가면서 2천년 전 이곳에서 꽃피웠던 철학과 미학과 건축과 예술을 떠올렸고 뛰어난 사상가들이 곳곳에서 대화하고 토론했을 모습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잔해만 남은 현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융성한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적지 않은 사전 지식과 상상력이 요구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런 선행지식이나 오랜 기대감이 없었다면 흩어져 있는 유적지에서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마지막날 방문했던 고고학 박물관에서 이 고대 그리스의 모습을 좀더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아프로디테와 포세이돈의 조각상, 검은 빛과 정교한 그림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그리스 도자기, 그리고 이곳에서 살았던 사상가들의 얼굴상을 모아놓은 전시실 앞에서 고대그리스에서 꽃피웠던 문명적 지혜와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 있었다.

    둘째날 오후 탐방했던 국립역사박물관은 내게 전혀 다른 그리스 이미지를 선사했다. 이곳은 그리스의 근현대 역사를 보여주는 곳으로 그리스 옛 의회 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데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전쟁, 외교, 갈등 등이 나열되어 있어서 독립운동사박물관이라 할 만했다.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나는 줄곧 당혹스러웠는데 그리스 근현대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별무했기 때문이다. 전시를 보면서 오랜 세월 그리스는 로마제국, 라틴제국,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그 제국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음을 깨달았다. 1830년대 일련의 혁명과 전쟁을 통해 독립국가건설의 노력이 전개되었고 거의 1세기에 걸친 격변을 거쳐 오늘의 그리스가 출범한 것이다. 전시물은 대부분 오스만제국과 싸울 때 사용된 군대의 깃발, 항쟁을 주도했던 군인들의 초상화, 그리스 정교의 수장들 및 상징물이었다. 어디에도 파르테논 신전이나 아테네 민주주의, 소크라테스의 철학 같은 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터키와의 악연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고대와는 거의 단절된 근현대 그리스의 모습은 솔직히 낯설었고 컨텐츠 역시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리스 국가형성과정이 힘들었음을 반증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세번째 모습은 내가 아테네 길거리에서 받은 인상에 기초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은 건물 외벽에 무질서하게 그려져있는 수많은 그래피티였다. 뉴욕같은 도시라면 어울릴지 모르겠으나 페인트 낙서들이 아테네의 거리 곳곳에 널려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모습이었다. 중심부의 많은 건물 철제셔터와 외벽에 그려진 그래피티는 아테네 도시의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드러낸다기보다 어딘지 불안하고 쇠락해가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실제로 거리 곳곳에 노숙자의 모습도 보이고 문이 닫힌 상점들도 자주 보였다. 2015년 그리스 경제위기가 미친 충격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2000년대 초반 호황을 누리던 그리스는 외환위기 이후 5년 사이에 경제 규모가 4분의 1이나 쪼그라들었고 실업자는 약 2.5배로 폭증했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가 짜준 경제 프로그램을 가동했는데도 형편은 거의 경제공황에 가까와 그리스는 심각한 사회불안을 겪어야 했다. 정부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유럽연합에서는 ‘유로존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고 위협하면서 불편한 갈등이 지속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이나 튀르케에와의 독립전쟁에서 보인 강인한 국가의식에 비해 실제 생활상의 그리스, 먹고사는 현장의 모습은 또다른 얼굴로 비쳐졌다.

    세가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며 국립역사박물관에서 본 Refugee (난민) 라는 주제의 특별기획전을 생각한다. 이 전시의 부제는 “From Greater Greece to Contemporary Greece”라 되어 있다. 19세기 독립과정에서 옛 비잔틴 제국시절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귀속시키려는 발상이 ‘greater Greece’ 구상을 강화시켰다고 한다. 1821년 그리스 혁명의 시작부터 1923년 로잔 협약으로 현재의 그리스가 출범한 100년간의 역사는 유럽사의 격변, 정치적 대응, 거대한 인구이동으로 특징지워지는 시기인데 그 핵심에 난민이 자리한다는 것을 이 전시는 강조하고 있었다. 독립의 과정에서 터키를 비롯한 곳곳에 거주해온 그리스인들이 다수 이주해왔지만 이들의 정착은 쉽지 않았고 많은 고통과 가난, 불안의 삶을 겪어야 했다. 정치적 독립은 이루어졌지만 사회적 통합이나 경제적 안정은 요원했던 수난의 난민사를 보면서 고대 그리스와는 너무 다른 현대 그리스의 실상을 미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듯했다. 사실 20세기 지구상에서 독립운동을 추구한 약소국가들에게서 이런 모습은 공통적이라 할 수도 있다. 난민문제가 다시 지구적 현안이 되고 있는 지금, 인간의 이동과 정착이란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읽는 작업이 필요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