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시공간 여행

조슈를 어떻게 만날까?

하기(萩)를 여행할 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하기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슈번의 번청이 있던, 인구 4만 정도의 소도시다. 토쿄는 물론이고 교토로부터도 꽤 떨어져 있고 항공편이나 신칸센이 닿지 않아 한국에서는 더더욱 접근하기가 불편한 곳이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탐방하고 싶었던 곳이인데 기회가 없었던 만큼 여느 일본 여행 때와는 다른 기대감이 느껴진다.

나는 하기보다 조슈(長州)란 지명에 더 친숙하다. 솔직히 말하면 하기가 조슈번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 알았다. 1988년부터 1년 반 동안 하바드 엔칭 도서관의 일본자료실에서 메이지 유신 관련 연구들을 조사하고 검토하면서 조슈와 사쓰마 이야기를 무척 많이 접했다. 특히 요시다 쇼인이 세운 소카손주쿠에서 막부를 무너뜨리는 핵심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것, 그들이 드라마 같은 메이지 유신 정치변동의 주역이었다는 것, 이들이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등을 알게 되면서 조슈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 사쓰마의 중심지인 가고시마는 두 차례 들릴 기회가 있었는데 하기는 이번에야 가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한국사회사학회에서 오랫동안 학문활동을 함께 해온 사사친 동료들과 이 여행을 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뜻깊다. 정근식 , 김필동 교수가 제안하고 나를 비롯하여 황경숙, 노치준, 김경일 교수 등이 동의하여 성사된 여행이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박맹수 총장도 참여한데다 서울교육감 당선으로 가지 못하는 정교수 대신 채규성 님이 합류했다. 모두 학구적인 타입인데다 야심차게 일정을 계획한 탓에 오가며 보고 들을 내용들이 기대가 되고 오래 전 해답을 찾아보려던 질문들이 새롭게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모처럼의 여행인만큼 너무 답사여행 같이 되지 않고 편하고 즐거운 여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모두 노는데는 재주가 없는 진지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관광청에서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야마구치를 검색하니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뜬다. “야마구치현은 조용한 시골이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적지가 많습니다. 한때 무사가 지배한 영지의 수도였던 하기에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게 잘 보존된 성곽 마을이 있고, 이 지방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야마구치는 고요한 해변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신사, 일본에서 가장 큰 석회동굴인 아키요시도 등 기막힌 경치로 유명합니다. 시모노세키 시내 시장과 식당에서는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데, 특히 복어가 이 지역 별미로 유명합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말로 일단 복잡한 역사적 기억을 둘러싼 논란은 괄호쳐두기로 하자.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태도는 여행의 즐거움을 잠식하기 마련이니 아름다운 자연, 오래된 유적들을 영화보듯 관람하는 마음의 여유를 준비할 일이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범주나 근대화 비교욕구 같은 지적 관심도 잠시 제쳐두고 가볍고 즐겁게 이질적인 문화에 대면해 보자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그러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눈, 낯선 지역을 방문하는 호기심 많은 여행자의 눈을 가질 필요가 있으리라. 어슬프게 갖고 있는 사전지식도 일단 내려놓고 몸도 마음도 시선도 가볍게…. ‘조슈’를 만나기 위한 첫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