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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과거사와의 재회

하기 여행은 두 과거사와 만나는 여정이다. 사건으로 말하면 메이지 유신과 한일합방이고 인물로 말하자면 요시다 쇼인과 이토 히로부미와의 대면이다. 비록 하기 방문은 처음이지만 저 두 사건과 인물은 낯선 대상이 아니다. 내 역사의식의 바탕에 중요한 자리를 이미 점하고 있기에 저들과의 조우는 첫 만남이라기 보다는 이전에 종종 마주쳤던 대상과의 재회라 함이 옳을지 모르겠다.

메이지 유신과 조선침략은 연결되면서도 구별된다. 그 양면을 하기의 인물들이 제각기 보여준다.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제창했지만 메이지 유신의 당사자는 아니다. 키도 타카요시는 유신의 주역이지만 정한론의 실천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가하면 이노우에 가오루는 강화도의 불평등 조약을 강제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 속으로 끌어들였다. 오시마 요시마사는 청일전쟁, 동학농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약소국 조선을 유린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온건개혁파로 평가되지만 실질적으로 초대 통감으로 조선의 강제병탄의 주역이 됨으로써 정한론의 실현에 앞장섰다. 이들 모두가 하기 출신의 유신지사이자 메이지 시대 고위직 들이다.

개인적으로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 줄곧 양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배외적이고 낡은 막부체제를 근대문명국가로 탈바꿈시킨 놀라운 역사적 성취라는 일반적 평가에 나는 공감했다. 목숨을 아끼지 않은 유신 지사들의 활동에서 신선한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정한론의 신봉자들이었고 실제로 제국주의 침탈의 당사자들이어서 비판과 비난도 불가피했다. 메이지 유신에 대한 찬양이 조선의 상대적 낙후성을 강조하고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될 때는 분심을 억제치 못한 적도 있었다.

대학원 시절 탐독했던 배링턴 무어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독일과 함께 메이지 일본을 ‘위로부터의 혁명’ 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다루었다. 큰 틀에서 그 논지에 공감했고 나도 저런 책을 써 보리라는 꿈도 꾸곤 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이 이웃 국가의 침탈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저자가 서구의 눈, 강대국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견의 소산이라 생각했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총체적 문명전환과정에 대한 부러움과 조선병탄이라는 침략행위에 대한 비판의식 사이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거나 오락가락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나는 조선에도 ‘위로부터의 혁명’ 시도가 있었음을 밝힘으로써 내 인식의 불편함을 극복해 보려 했다. 일본과 조선 두 나라 모두 체제변혁을 향한 개혁세력이 존재했고 그 주체역량이나 사상적 지향에 큰 차이가 있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존중하는 한편으로, 정치변동의 시점에 작용한 외압의 성격차이가 한일간 상반된 결과를 초래한 주원인임을 밝힘으로써 침략 행위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고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당시 유행하던 세계체제론이나 종속이론의 도움도 받았고 식민사관 극복을 내세운 내재적 발전론의 영향도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내 박사논문의 얼개는 메이지 유신과 갑신 갑오개혁의 비교에 바탕한 것이었다. 비교사 연구가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탄탄한 배경지식을 요구하는지 잘 모르면서 겁없이 덤벼든 시도였다. 일본사에 대한 얕은 지식을 커버하느라 하바드 엔칭 도서관에서 닥치는대로 메이지 유신 관련 저작들을 찾아 읽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조금씩 알게되면서 오히려 같은 수준의 상세한 한국 자료를 찾기 어려워 비교 자체가 벽에 부딪치는 경우도 많았다. Meiji Restoration 이라는 책을 쓴 하바드 일본사 전문가 알버트 크레이그 교수에게 내 연구주제를 말했다가 ‘잘못된 연구가설’이라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처음 요시다 쇼인이 유학자였다는 점과 강렬한 반서양 배외사상을 주창했음에 주목하고 면암 최익현과 유사한 인물이 아닐까 여겼다. 실제로 유학적 배경을 가진 지식인이면서 목숨을 걸고 서양에 맞설 것을 요구한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이 둘은 유사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실제 두 사람의 행동과 지향은 물과 기름마냥 이질적이었음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차이는 단지 두 인물의 개성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무라이와 양반사족의 오랜 행동양식, 그 배후에 작동한 막부체제와 중앙집권체제의 간격이 깊고 뚜렷했다. 그 다름의 성격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내겐 오랜 숙제가 되었다.

강렬한 배외의식이 근대문명 수용을 포함한 개방적 주권의식으로 변하는 계기가 어디서 가능했는지를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요시다 쇼인과 그 제자들이 문명개화와 서구화의 지지자가 되었던 것처럼 한국의 김옥균과 대원군, 김홍집과 전봉준의 연대는 왜 불가능했을까 궁금했다. 일본에 영향을 미치던 영국과 프랑스 세력과 조선에 개입하던 일본 세력의 성격 차이가 워낙 커서 내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초기의 가설을 논문에서는 일관되게 견지했다. 하지만 한일 간의 내재적 차이가 지닌 무게감을 경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내 박사논문을 빨리 출간하라는 몇 분의 고마운 권유에 끝내 부응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최근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라는 과오] 라는 책이 나왔는데 “일본을 멸망시킨 요시다 쇼인과 조슈 테러리스트”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하기가 자랑하는 유신주역들을 테러리스트, 나아가 일본을 망친 인물로 규정하는 책이어서 눈길을 끈다. 저자 하라다 이오리는 요시다 쇼인과 그 제자들이 막부의 평화로운 개혁과정을 무력으로 뒤엎고 그 공을 탈취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진보적이거나 국제주의적 역사관을 펴는 것은 아니고 정한론과 조선침략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막부중심의 일본사관에 철저한 시각으로 한국인 독자로서는 당혹스러울만큼 우파적이고 보수적인 관점을 견지한다고 알려져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은 다양하게 평가되고 역사논쟁의 한 축을 이루는 주제임을 보여준다.

메이지 시기 9명의 총리 중 5명을 배출한 지역이지만 현재의 하기는 인구가 줄고 교통도 불편한 낙후한 곳이 되고 말았다. 해체된 하기성의 천수각을 재건하려는 계획도 예산 부족으로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교토는 물론이고 옛 사쓰마 지역인 가고시마에 비해서도 하기의 변화는 더디고 역사관광지로의 존재감도 크지 않다. 메이지 유신을 지역 상징으로 갖고 있는 도시로서는 다소 의아스러울 정도다. 메이지 유신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퇴락한 탓일까 생각도 들지만 최근 일본의 역사해석을 보면 결코 그럴 것 같진 않다. 옛 조슈의 역사를 상징화하고 역사로 해석하는 오늘의 일본은 여전히 메이지 유신을 드높이고 정한론과 조선침략의 역사는 드러내지 않는다.

박사논문을 쓴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 하기에서 다시 만나게 될 이 두 과거사는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까? 일본의 대변혁 역량이 자라난 쇼카손주쿠의 모습은 21세기 오늘의 내 눈에 어떻게 비춰질까? 조슈 5 걸로 상찬되는 유신지사들의 삶과 행적을 다시 접하면서 내 마음엔 어떤 파문이 일까? 여러모로 궁금하지만 굳이 산뜻한 답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를 내려놓기로 한다. 언젠가 더 나은 해석과 공감의 서사가 등장할 것을 믿는 열린 소망으로 두 과거사와의 재회를 담담히 대면할 마음의 빈공간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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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재단 20년

법륜 스님이 주도해온 평화재단이 20주년을 맞았다. 11월 14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2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개되되고 저녁에는 축하모임도 있었다. 한동안 그 활동을 지원하고 참여하기도 했던 터라 축하모임 자리에 함께 했다. 헌신적인 활동가들, 오랫동안 참여해온 전문가들, 종교단체 대표들, 후원하던 단체와 정치인들 등이 꽤 많이 모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차분하다 못해 다소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남북교류와 대북지원, 평화구축이라는 재단의 활동이 거의 모두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그래도 저 정도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것은 법륜 특유의 친화력과 함께 종교적인 헌신성을 내장한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법륜은 인사말에서 20년을 회고하며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했다. ‘예측은 맞았는데 실현해낼 힘이 부족했다’는 그의 자평이 가슴에 남았다. 그가 말한 예측은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고난– 중국이 세계적 강국으로 힘을 얻기 전에, 북한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생긴 시기에 남북간 평화를 이루고 통일의 기틀을 놓아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다만 역부족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었고 북한은 핵무력에 의존하는 퇴행적인 노선을 선택했다.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고 느끼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참석자들의 연령대였다. 지난 시기 활동했던 분들 중심으로 초청된 결과 그리되었겠지만 60대 전후의 세대가 대부분이었다. 남북관계 민간단체와 민간운동을 담당할 젊은 세대, 새로운 역량이 양성되지 못한 현실의 반영인 듯 해서 마음이 아팠다. 사실 이것은 비단 평화재단에 한정할 일이 아닌 보편적인 현상이다.

평화재단의 성격 상 종교들과의 관계도 강했다. 소위 7대종단협의회가 남북교류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그 활동폭을 넓힌 것이 지난 20여년이었다. 천도교를 비롯하여 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 등이 두루 참여했다. 하지만 상당히 형식적이고 느슨한 연대였을 뿐 개별 종교들 간에 편차는 심했다. 한국 종교계의 현실과는 무관하게 구색에 맞춘 평균주의, 민족종교의 과잉대표성도 뚜렷한 한계로 보였다. 그것을 반영하듯 개신교 대표는 아무도 없었고 불교나 천주교 역시 종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또 하나 주목된 것은 참석한 정치인 면면이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비교적 중도적이라 할 분들의 모습은 여럿 보였다. 안철수, 이준석, 정세균, 김성곤… 내가 일면식이 있고 두어번 자리도 함께 했던 사람들인데 현재의 정치인, 특히 민주당 주류세력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그러고보면 인권문제나 인도적 지원에 주목하는 평화재단 활동을 강성 진보정치인들은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기차 시간에 맞춰 조금 일찍 나서 서울역으로 걸어오면서 마음이 여러모로 착잡했다. 이렇게 한 시대가 흘러가고 이제 저런 활동이 가능한 시절은 요원해진 것인가? 이들 세대가 지나고 나면 어떤 세력과 지향들이 인도주의와 평화주의를 부르짖게 될까? 종교가 그 마지막 보루일수도 있는데 최근 종교조차도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그 힘을 잃어가는 듯해서 앞날을 내다보려는 마음이 자꾸 어두워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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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시모노세키, 한반도

현재의 큐슈지방과 서일본 일대는 일찍부터 한반도와 접촉이 많았다. 애매한 이웃 사이가 종종 그러하듯 선린교린의 활동도 있고 원한과 대립의 역사도 있어 그 관계는 양면적이다. 시모노세키와 하기는 특히 그런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는 곳이다.

시모노세키는 조선의 앞선 문물을 일본에 전수하는 뱃길이 닿았던 항구다. 현재 시모노세키에는 조선통신사 내왕을 기념하는 비가 서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신의 존재는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하고 그 명칭도 통신사 이외에 회례사, 보빙사, 경차관 등이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통신사는 동등한 국가간의 외교 사절과 비슷해서 왜구의 단속 요청, 대장경의 증정 등을 논했고 피차 존중의 예로 대했다.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일본의 정세와 조선 침공 가능성을 알아볼 목적으로 파견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시모노세키는 또한 1894년 청일전쟁을 마무리하는 쳥일강화회담이 개최된 곳으로 현재도 그 기념관이 있다.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두 나라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인 어처구니 없는 전쟁의 마무리 장소였다. 전통 료칸인 슌판로에서 1895년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양국 전권대사로 만나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것이 명문화되었고 청의 한반도 종주권이 부정되었다. 실제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독립국가로서의 도약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뒷받침하는 빌미로 작용해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조선으로의 영향력을 급격히 키워나갔다.

1905년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에 ‘관부연락선’이 취항하면서 인적 물적 왕래의 거점으로 발전했다. 부산역과 시모노세키역을 통해 경성과 도쿄까지 철도로 이어져 일본의 대륙진출에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다. 한반도에서는 유학생, 노동자 들이 주로 이용했고 일본에서는 농업이민자, 대륙진출의 야망을 가진 자들이 탑승했다.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많아 소설과 연극, 영화 등의 소재로 종종 등장했고 조선 최초의 성악가 윤심덕이 정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일화는 유명하다. 해방 직후에는 많은 재일조선인의 귀국편으로, 또 조선거주 일본인의 환국편으로 이용되었다.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다가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1970년 부관페리가 취항하여 노선이 재개되었다. 지금은 한일간 관광객과 중소상인의 편리한 교통편으로 자리잡았다.

하기도 초기엔 한반도와 우호적인 지역이었다. 이곳의 원 지배자였던 오우치(大內)가는 7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26대 성왕(일본에서는 성명왕이라고 한다)의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다이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들과의 교류가 기록되어 있는데 대내전(大內殿)으로 지칭될 정도로 상호 예를 갖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도 그 후손 가운데 백제 및 한반도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오우치가가 가신인 모리 모토나리에 의해 멸명한 이후 하기와 조선의 관계는 악연이라 할 만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모토니라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553년~1625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112만석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받았다. 데루모토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3만병력을 이끌고 출동했고 그의 숙부인 히데모토는 정유재란때 가토 기요마사군과 합세해 조명연합군과 싸웠다. 그 공으로 1597년 데루모토는 도요토미 정권을 받치는 5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 되었다. 전국시대에 모리가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을 들어 도쿠카와와 대립했다가 패하여 250년간 중앙 정계로부터 철저히 배제당한 채 지방의 소영주로만 존속했다.

하기와 한반도의 악연은 19세기 말 요시다 쇼인이 제창한 정한론에 의해 심화되고 강화되었다. 요시다 쇼인은 서양을 이기려면 서양을 알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페리의 흑선으로 밀항을 도모하려 한 인물이다. 하기 지역에 유폐당한 상태에서 천황 중심의 정치변혁과 개혁구상을 다듬어나갔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는 서양 함대와 무력에 굴복했던 일본의 치욕을 이웃 나라 조선에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보상받으려는 정한론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강자에 대한 숭배와 약자에 대한 지배라는 이중적 태도가 독특하게 결합된 정치구상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치를 좌우했던 조슈 출신 정치인들은 모두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다. ‘조슈 3존’이라 불리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실제로 조선 침략의 주역들로 정한론을 실행에 옮겼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정부의 초대총리이자 이후 네 번이나 총리를 역임한 일본근대의 최고 정치인의 한명이다. 조선통감부의 초대통감으로 고종의 강제선양을 강요하고 강제병탄의 길을 닦은 인물이어서 한국으로서는 원한이 깊은 대상이다. 1909년 의병대장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에서 포살되었지만 일본에서는 근대 최고의 영웅처럼 평가되고 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팔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다. 1863년, 이토 히로부미 등과 함께 영국 유학을 떠난 이후 적극적인 개국론자로 바뀌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많은 활동을 했다. 1876년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체결에서 일본측 협상 대표였고, 갑신정변 후에는 조선 주재 일본 공사로 장기간 재임했다. 민비 시해가 있었던 1895년 을미사변 당시 공사는 미우라였지만 이 사건의 기획과 실행에 이노우에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신생 일본 육군을 독일식의 근대 육군으로 변모시켜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 창설에 참여했고 징병제의 도입과 육군성과 해군성의 설치 등 군제 개혁을 주도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조선 주둔 제1군사령관이었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공작 작위를 받았다. 독일로부터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도입하여 주권선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이익선 안에 조선과 대만, 사할린을 포함시킨 장본인이었다. 강점 이후에는 조선과 대만이 주권선으로 편입되고 이익선은 만주와 필리핀으로 확장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온 오시마 요시마사도 하기 출신이다. 당시 그는 경복궁을 점거하고 고종을 겁박하여 청일전쟁 발발의 빌미를 만들었고 농민군 토벌 명복으로 대민군사작전도 벌였다. 야마구치 현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미나미 고시로 문서는 동학 농민군에 관한 기록들이다. 이 때의 공으로 남작직을 수여받았으며 러일전쟁시 육군 대장으로 진급되어 관동지역의 총독이 되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포살한 안중근을 형장에 세우기도 했다. 일본 제 90, 96-98대 총리를 역임한 아베 신조의 친외조부이자 아베가 가장 존경한다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기의 인물들이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구상한 개혁과 부국강병노선은 일본으로선 근대화와 산업화의 중요한 계기였지만 조선으로의 침략정책과 깊이 맞물려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에까지, 최근으로 오면 아베 신조의 우경화 노선에까지 그 맥이 이어져 있어서 지나간 한 시대의 과거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일 역사논쟁의 한 거대한 뿌리가 이곳 조슈에 깊숙히 내려져 있는 셈인데 여행을 통해서 이런 기억을 단순히 반복하고 싶진 않다. 21세기 시공간을 반영하는 새로운 시야, 국가단위 해석을 넘어서는 보편적 전망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을까? 역사적 악연은 어떻게 단절할 수 있고 舊怨은 어디서 망각될 수 있을까? 답이 없을 듯 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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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 유네스코 문화유산

일본에는 현재 총 25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호류지 불교미술유적, 히메지성, 교토의 역사유적,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나라 유적, 닛코 신궁 및 사찰, 구스쿠 유적 및 류쿠왕국 유적, 히라이즈미 불교유적, 후지산, 도미오카 방적공장 및 유적지, 일본 메이지 산업 혁명 유적, 르 코르뷔지에 근대건축, 나가사키 기독교 은둔유적, 모즈 후르이치 고대고분군, 조몬 선사시대 유적 등이 그것이다, 고고학 유적, 고대 문화 유적, 불교나 신도 등 종교유적, 무사문화, 근대화 관련 유적 등으로 다채롭고 다양하다.

하기 일대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다섯 곳이 있다. 하기 반사로, 에비스가하나 조선소 유적, 오이타야마 타타라 제철소 유적 등 세 곳은 조슈번 당시의 제철공업과 조선업의 기반시설을 보여주는 곳이고 소카손주쿠와 하기 성하촌 마을은 막말 유신기의 교육기관 및 생활공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다섯 곳이 모두 ‘메이지 근대산업화 문화유산’이라는 항목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게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 제강·조선·석탄 산업 유적’이다.

이 항목에 속한 유적들은 하기시에 한정되지 않고 무려 8개 현에 걸쳐 산재하고 있다. 2009년 초기 잠정목록 등재 당시에는 ‘큐슈와 야마구치의 근대화산업유산군’이라는 이름이었다 한다. 규슈와 야마구치에 대부분의 유적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광범위한 지역의 유적들이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야마구치 (조슈)의 하기 반사로나 가고시마 (사쓰마)의 구 집성관 유적은 메이지 유신 이전에 세워진 것이다. 두 지역이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유신을 주도했던 것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메이지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이 그런 시각을 잘 드러낸다.

제철소 및 탄광 유적과 무사집단의 생활공간을 같은 범주로 묶는 이 발상은 경제부처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일본 문화청이 근대유산의 활용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경제산업성이 ‘산업유산’과 연계하여 ‘근대화산업유산’이라는 범주를 고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전국 각지의 유적들이 역사문화유산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결국 2015년 ‘메이지산업혁명: 철강·조선·석탄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유산 등재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갈등이 새롭게 분출했고 그 파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주요 근대산업시설 중 몇 곳이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현장이었고 조선인 수탈과 직결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산업화 유적을 등재하면서 일제시대의 부정적 역사를 은폐하거나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샀다. 중국은 일본의 시도에 항의하면서 같은 해 ‘난징대학살’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였다. 한국에서는 일본군‘위안부’ 기록물을 기록유산으로 지정하는 노력을 국제간 연대로 추진하고자 했다.

특히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가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일본은 유네스코에 사도광산 등록신청서를 내면서, 등재 대상 기간을 에도시대(1603~1868년)로 한정했다. “17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금 생산지였던 사도광산을 알리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이 이뤄졌던 20세기를 제외하려는 꼼수로 받아들여졌다. 당연히 한국으로부터의 반발이 거셌고 ‘군함도’라는 영화까지 제작되어 대중적 비난이 거셌다. 하지만 올 8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서 사도광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통과되었다. “우리 정부는 ‘전체 역사’를 사도광산 ‘현장에’ 반영하라는 유네스코측의 권고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일본이 성실히 이행할 것, 또 이를 위한 선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전제로 등재 결정에 동의했다”고 외교부가 밝혔지만 그 이행의 수준과 속도는 미덥지 않아 불씨가 남아있는 상태다.

하기의 소카손주쿠도 요시다 쇼인의 삶과 사상,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그 제자들의 행적 중심으로 일본의 근대화 산업화 유적으로만 설명되고 있다. 요시다쇼인과 젊은 무사들이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론을 주창한 것, 서양 열강에 침탈당한 일본의 국익을 조선과 만주에서 벌충하자는 침략주의를 내세운 것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하기시에서 한국과 관련된 문구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구절 뿐이라 하니 세계문화유산의 등재 제도에 담긴 인류보편적 함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섬세하고 실증적인 면모도 강한 일본사회가 유독 근현대사의 역사인식에서만 그 집단편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중국 역시 동북공정에서 드러나듯 자국 중심의 역사해석과 유적활용이 무서울 정도다. 그렇다고 한국이 특별히 보편주의적 역사인식을 내세울만한 처지에 있지도 않다. 애초 세계주의적인 지향을 지닌 기관이었던 유네스코도 점차 개별 국가의 입장과 이익을 내세우는 장이 되었고 세계문화유산 역시 민족주의 문화정치에 좌우되는 흐름이 강해졌다. 언제나 한 중 일의 문화유산을 인류문명사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해질까. 하기의 유네스코 유적들을 살펴보면서 저들의 한계 못지 않게 우리들의 역사인식, 문화정치의 내면도 살펴볼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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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찿사 40주년

11월 2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40주년 기념공연이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있었다. 나는 서울대에 노래동아리 메아리가 만들어질 때 참여한 바 있으나 열심히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노찾사가 출범하는 과정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지만 노찿사의 출현에 메아리의 전사가 꽤 중요했던만큼 내 스스로는 노찾사의 활동에 남다른 애정을 느끼곤 했다. 물론 그 투쟁성과 운동성보다 서정적인 노랫말과 곡조를 더 사랑했던 것이었지만….

양현아 교수의 후의로 초대권 두 장을 받았다. 누구와 함께 이 공연을 관람할까 생각하다 대학시절 노래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동네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조형근 박사가 떠올랐다. 조박사는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마을문화운동을 주도하면서 깊이있는 글쓰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스스로 ‘동네 사회학자’라 하지만 그의 글과 책이 보여주는 시야의 너비와 사고의 깊이는 웬만한 유명학자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다. 마침 시간이 된다 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대부분 50,60대 이상의 세대인 듯 했다. 노찿사 노래가 영향을 미치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일테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실제로 공연 자체가 8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황에 맞서 노래운동이라는 양식을 만들어가던 이들의 열정을 새삼 되돌아본 자리였다. ‘노래를 찿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은 유명하지만 실제 누가 노래를 불렀는지 가수 개인의 이름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문학의 영역에서조차 공동창작을 중시하고 개인을 드러내기보다 계급을 앞세우던 시대의 한 반영이었다. 90년대 이후 이들 가운데서 유명 가수가 나타나기도 하고 노찿사의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공연 앞부분에서 김민기에 대한 감사와 그를 기리는 노래들이 불리워졌다. 아침이슬을 비롯해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어두운 시대를 건너왔던 기억을 모두가 떠올리는 듯 했다. 김광석이 불렀던 그루터기, 광야에서 등은 지금도 애창되는 곡이고 나도 간간히 부르곤 했던 노래다. 이들 노래를 40주년을 기념하면서 60대 청중들과 함께 부르니 감회가 새롭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들 노랫말을 다시 한번 적어본다.

천년을 굵어온 아름 등걸에 한올로 엉켜엉킨 우리의 한이 /고달픈 잠깨우고 사라져오면 그루터기 가슴엔 회한도 없다 / 하늘을 향해 벌린 푸른 가지와 쇳소리로 엉켜붙은 우리의 피가/ 안타까운 열매를 붉게 익히면 / 푸르던 날 어느새 단풍 물든다 //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 선 바쁜 의지로/ 초롱불 밝히는 이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 울음 있다 /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 /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 우리 어찌 가난 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 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겨 쥔 뜨거운 흙이여

지금 들어도 아름답고 비장한 노래다.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까지를 상상하는 웅원한 기상이 놀랍고 대지를 꿰뚫는 아름 등걸의 강인함이 뭉클하다. 그런가하면 한, 고단함, 회한, 피울음 같은 아픔과 좌절이 깊이 배여있다. 그래서 ‘초롱불 밝히는 이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넘친다’고 부르짖고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라 외치지만 그 바탕에는 짙은 탄식과 울음이 깔여있다. 아름답지만 슬픈 곡조가 가슴을 울린 것은 이런 정서에의 공감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80년대의 노래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다. 사랑,우정,인생 등을 노래하는 대중가요가 오랜 역사와 함께 주류를 형성했는데 우리는 종종 유행가라고 부르곤 했다. 대학생들은 뽕짝에 대한 거부감과 팝송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졌지만 노래의 메시지나 감성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에 김민기로부터 시작해서 노찿사로,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 이어지는 사회의식 지향의 노래가 있었다. 존 바에즈와 비틀즈의 노래들 가운데 일부도 이런 맥락에서 애창되었다. 그런가 하면 클래식, 가곡, 종교음악 등이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범주로 존재했다. 대중가요는 통속적이었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운동권 노래는 진지했지만 부담스러웠다. 클래식은 어쩐지 상층계급과 서구지향적인 분위기여서 접근하는데 문턱이 높았다.

나를 포함하여 꽤 많은 사람들은 대학에 들어와 두번째 유형의 노래를 접하기 시작했다. 억압의 시대, 분노의 시대를 반영하듯 데모는 늘 노래를 수반했고 노래는 그 자체가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런 흐름이 전부였던 것은 아니다. 통속적인 것은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 정서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노래가 투쟁의 도구가 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즐겨 부르던 성가곡과 흑인영가가 설 자리를 잃으면서 한동안 부를 노래를 찾지 못해 당혹스러웠던 기억도 떠오른다. 내가 초기의 노찿사 노래들, 서정적이고 은유적인 노래들을 좋아했던 것도, 그 이후 지나치게 정치화된 노래에 거리감을 느낀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노찾사 40년을 공연을 앞두고 아름답게 마무리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활동을 전개해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후자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날 공연도 ‘회고’에만 방점을 두지 않고 새로운 노래, 새로운 가수를 선보이는 부분을 담았고 앞으로의 성원을 부탁하는 메시지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재즈풍과 록 형식의 새로운 곡과 노랫말도 소개되었다. 그 결심이 뜻있는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새롭게 전개하는 앞으로의 음악 형식, 노래형태의 특성이 무엇일지 다소 궁금했다. 공연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러하듯 어디에서 매듭과 혁신을 추구할지 잘 와닿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과거 7,80년대와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확신하기가 어렵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느껴질 정도로 해묵은 모순과 좌절이 거듭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감수성과 문화적 취향은 엄청나게 변했다. K-Pop의 아이돌 노래가 전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가 하면 임영웅 등 트롯트 열풍이 전국민을 격동시키는 오늘이다. 21세기 문화운동이 새로운 힘을 얻으려면 그 형식과 감성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꿈이 사라지는 시대에 필요한 희망의 메시지와 선율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그래서 노래가 힘이 되는 동력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 중대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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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레그넘

외교협회의 학술지인 [외교]지가 151호의 특집으로 ‘불확실성의 세계와 한국’이란 주제를 설정하고 내게 권두논문을 청탁했다. 전지구적 불확실성을 조망하고 필요한 시대정신을 언급해달라는 쉽지 않은 주문이어서 망설였지만 내 스스로 정리해볼 필요를 느끼던 바라 응락했다. 글을 쓰면서 공부도 되고 내 생각을 다듬는 계기가 되었지만 더위 속에서 진땀을 많이 흘렸다.

나는 인터레그넘이란 개념을 시대적 불확실성을 풀어가는 키워드로 삼았다. 인터레그넘은 원래 한 국왕이 죽고 그 후계자가 취임하지 않은, 지체된 궐위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후 이태리의 정치철학자 그람시는 이 말을 재구성해서 사회질서를 지탱해온 기존의 프레임은 약화되는데 새로운 질서는 채 형성되지 못한 예외적 상태를 뜻하는 개념으로 활용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말을 차용해서 오늘날 지구세계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자 했는데 나도 그런 시각에 동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2024년 8월 빠리올림픽은 자유, 평화, 우애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다양한 인종, 문화, 국가들의 연대를 과시하면서 종료되었다. 올림픽 내내 한국선수들의 선전 소식도 좋았고 세계적 선수들의 높은 기량을 접하는 즐거움이 컸다. 하지만 규칙에 승복하는 스포츠와 달리 현실세계는 혼란의 연속이다. 이스라엘-하마스의 무력충돌은 언제 마무리될지 알 수가 없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핵전쟁을 염려해야 할 지경에까지 치닫고 있다. 9월 초엔 극우 이념을 표방하는 정치세력인 ‘독일을 위한 대안’ (AFD)이 튀링겐주의 제1당으로, 작센 주의 강력한 2당으로 약진하여 나찌즘의 역사를 기억하는 독일은 물론 유럽과 세계의 우려를 더하는 중이다.

눈 앞으로 다가온 미국의 대선은 더욱 혼란스럽다. 새로운 세계적 리더십이 출현하리라는 기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 채 지역분열, 계층갈등, 인종분규가 착종된 진영 대립으로 민주주의의 심각한 퇴행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푸틴 및 김정은과의 친분을 강조하면서 동맹의 가치를 폄훼하는 트럼프 후보의 메시지는 나토의 집단방위에 의존하는 유럽이나 한미동맹의 오랜 전통을 중시해온 한국에 큰 당혹감을 안겨주고 있다. 대선 결과가 어떠하듯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은 강화될 것이란 전망과 함께 일종의 ‘내전’ 상태가 지속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반도의 불안감도 전례없이 커지고 있다. 핵무력강화정책을 헌법에 명기한 북한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국가관계로 재규정했고 남북간의 모든 교류와 접촉은 차단되었다. 한미일 협력체제가 군사협력의 영역에까지 확장되면서 북중러의 결속과 한중마찰 심화의 우려도 함께 커진다. 새로운 안보위기론과 함께 한국 독자핵무장론이 등장하는가 하면 제2의 한국전쟁 가능성을 말하는 국내외 견해도 나타나고 있다. 친숙하던 세계질서가 흔들리고 익숙했던 한반도 환경에 심대한 변화가 진행 중임을 우리는 매일의 뉴스에서 확인하고 느끼는 중이다.

I2차대전 이후 정착된 질서, 즉 주권국가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과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세계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제분쟁을 규율하고 세계경제를 뒷받침해온 다자적 국제기구가 이전만큼 효율적으로 또 포괄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 늘어간다. 국제사회의 일관된 반대와 제재에도 여섯 차례 핵실험을 실시한 북한에 IAEA도 유엔 안보리도 실질적인 통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구생태계의 난개발을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려는 유엔의 원대한 목표나 탄소감축을 위한 빠리협약의 실천도 개별 국가의 반발과 성장주의를 규율하는데는 불충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주의 세계질서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고 세계화의 흐름에 강력하게 연동되어 선진국의 대열에까지 발전하고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구현한 한국으로서는 다자주의 원칙에의 확실한 지지에 더해 인터레그넘 상황의 양면성을 민감하게 이해하고 대응하는 전략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지구적 차원의 불확실성과 복합위기에 더해 한반도적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고전적 위기에도 대처하기 위한 총체적 역량구축, 혁신적 버넌스의 구축에 힘을 다해야 하는 시대다. 미래충격, 뉴파워, 책임윤리의 화두 속에 담긴 시대정신을 견실하게 추구해가는 탁월한 리더십도 절실하다. 레트로토피아의 유혹을 벗어나기 위해 민주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과 미래를 향한 희망서사를 구축하는 일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전환기의 시대정신은 희망과 염려, 가능성과 제약조건, 미래와 과거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면서 레트로토피아로의 유혹을 이겨내고 국가공동체의 질적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인류적 시야의 책임윤리를 확대해가는 포괄적 역량에서 찾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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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얼굴의 그리스

짧은 아테네 여행이었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그리스의 면모들을 접할 수 있었다. 예상했거나 기대한 것이 아니었는데 아크로폴리스, 역사박물관, 고고학박물관, 그리고 아테네 시내를 방문하면서 적어도 세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그리스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깊이 있는 이해는 아니지만 내 지식의 편협함을 확인하고 교정할 수 있었던 귀한 여정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텥레스로 대표되는 철학과 지성, 아테네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폴리스 공화국이 내게 가장 친숙하고 깊이 자리잡은 이미지다. 이곳에 오고 싶었던 오랜 꿈도 이런 심상 이미지에 기반한다. 이런 모습은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광장, 파르테논 신전과 디오니소스 공연장에서 감동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나는 아테네 시내를 오가면서 2천년 전 이곳에서 꽃피웠던 철학과 미학과 건축과 예술을 떠올렸고 뛰어난 사상가들이 곳곳에서 대화하고 토론했을 모습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잔해만 남은 현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융성한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적지 않은 사전 지식과 상상력이 요구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런 선행지식이나 오랜 기대감이 없었다면 흩어져 있는 유적지에서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마지막날 방문했던 고고학 박물관에서 이 고대 그리스의 모습을 좀더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아프로디테와 포세이돈의 조각상, 검은 빛과 정교한 그림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그리스 도자기, 그리고 이곳에서 살았던 사상가들의 얼굴상을 모아놓은 전시실 앞에서 고대그리스에서 꽃피웠던 문명적 지혜와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 있었다.

둘째날 오후 탐방했던 국립역사박물관은 내게 전혀 다른 그리스 이미지를 선사했다. 이곳은 그리스의 근현대 역사를 보여주는 곳으로 그리스 옛 의회 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데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전쟁, 외교, 갈등 등이 나열되어 있어서 독립운동사박물관이라 할 만했다.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나는 줄곧 당혹스러웠는데 그리스 근현대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별무했기 때문이다. 전시를 보면서 오랜 세월 그리스는 로마제국, 라틴제국,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그 제국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음을 깨달았다. 1830년대 일련의 혁명과 전쟁을 통해 독립국가건설의 노력이 전개되었고 거의 1세기에 걸친 격변을 거쳐 오늘의 그리스가 출범한 것이다. 전시물은 대부분 오스만제국과 싸울 때 사용된 군대의 깃발, 항쟁을 주도했던 군인들의 초상화, 그리스 정교의 수장들 및 상징물이었다. 어디에도 파르테논 신전이나 아테네 민주주의, 소크라테스의 철학 같은 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터키와의 악연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고대와는 거의 단절된 근현대 그리스의 모습은 솔직히 낯설었고 컨텐츠 역시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리스 국가형성과정이 힘들었음을 반증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세번째 모습은 내가 아테네 길거리에서 받은 인상에 기초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은 건물 외벽에 무질서하게 그려져있는 수많은 그래피티였다. 뉴욕같은 도시라면 어울릴지 모르겠으나 페인트 낙서들이 아테네의 거리 곳곳에 널려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모습이었다. 중심부의 많은 건물 철제셔터와 외벽에 그려진 그래피티는 아테네 도시의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드러낸다기보다 어딘지 불안하고 쇠락해가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실제로 거리 곳곳에 노숙자의 모습도 보이고 문이 닫힌 상점들도 자주 보였다. 2015년 그리스 경제위기가 미친 충격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2000년대 초반 호황을 누리던 그리스는 외환위기 이후 5년 사이에 경제 규모가 4분의 1이나 쪼그라들었고 실업자는 약 2.5배로 폭증했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가 짜준 경제 프로그램을 가동했는데도 형편은 거의 경제공황에 가까와 그리스는 심각한 사회불안을 겪어야 했다. 정부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유럽연합에서는 ‘유로존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고 위협하면서 불편한 갈등이 지속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이나 튀르케에와의 독립전쟁에서 보인 강인한 국가의식에 비해 실제 생활상의 그리스, 먹고사는 현장의 모습은 또다른 얼굴로 비쳐졌다.

세가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며 국립역사박물관에서 본 Refugee (난민) 라는 주제의 특별기획전을 생각한다. 이 전시의 부제는 “From Greater Greece to Contemporary Greece”라 되어 있다. 19세기 독립과정에서 옛 비잔틴 제국시절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귀속시키려는 발상이 ‘greater Greece’ 구상을 강화시켰다고 한다. 1821년 그리스 혁명의 시작부터 1923년 로잔 협약으로 현재의 그리스가 출범한 100년간의 역사는 유럽사의 격변, 정치적 대응, 거대한 인구이동으로 특징지워지는 시기인데 그 핵심에 난민이 자리한다는 것을 이 전시는 강조하고 있었다. 독립의 과정에서 터키를 비롯한 곳곳에 거주해온 그리스인들이 다수 이주해왔지만 이들의 정착은 쉽지 않았고 많은 고통과 가난, 불안의 삶을 겪어야 했다. 정치적 독립은 이루어졌지만 사회적 통합이나 경제적 안정은 요원했던 수난의 난민사를 보면서 고대 그리스와는 너무 다른 현대 그리스의 실상을 미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듯했다. 사실 20세기 지구상에서 독립운동을 추구한 약소국가들에게서 이런 모습은 공통적이라 할 수도 있다. 난민문제가 다시 지구적 현안이 되고 있는 지금, 인간의 이동과 정착이란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읽는 작업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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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테네

드디어 그리스 아테네에 왔다. 내가 파르테논 신전과 올림푸스, 제우스와 신탁의 이야기에 접한 것이 초등학교 시절이었고 그때부터 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 무려 50년이 훌쩍 넘어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아테네에서의 첫 날 저녁 아크로폴리스가 올려다 보이는 아고라 광장 주변 거리 까페에서 식사를 했다. 주위엔 신나는 음악과 춤이,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줄을 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의 유쾌한 목소리와 붉은 색 조명들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광장 위편으로 아크로폴리스의 모습이 조명 속에 드러났다. 때마침 보름달에 가까워 온 밝은 달이 휘영청 떠올라 광장과 신전, 둥근 달이 한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이 주변에 도서관과 학당, 공연장 등이 두루 배치되어 있었으니 고대 아테네 폴리스의 진면목이 이 공간에 남아 있는 셈이다. 2천년전 이곳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치고 대화하며 때론 격론을 벌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에 뭉클한 무엇이 느껴진다.

첫날 밤 야경으로만 만족했던 아크로폴리스 방문길을 다음날 아침부터 준비했다. 시간대 별로 입장권 가격도 달라 인터넷으로 10시 예약을 했다. 비교적 이른 9시에 호텔을 나섰지만 내리쬐는 태양열은 무서울 정도였고 아무런 그늘도 없는 언덕 위에서 느끼는 열기는 참기 어려웠다. 그래도 어릴적 해외여행을 꿈꾸게 만들었던 곳에 왔다는 생각이 더위도 잊을만치 나를 들뜨게 했다. 마침내 들어가 만난 파르테논 신전은 아직 복원이 채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어릴 적 사전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오랫동안 원형이 유지되었다는데 17세기 이 지역을 공격한 베네치아와의 전투시 튀르크군의 화약이 폭발하여 건물의 원형이 상당부분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웅장함이나 균형미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명불허전이라 할까.

아크로폴리스 정상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5세기에 아테나 여신에게 봉헌된 신전으로 건립되었다. 대리석으로 된 높은 도리아식 기둥들로 둘러싸인 전체 건축 양식은 특히 아름다와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 제1호로 등재되어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복원공사에도 유럽연합의 재정지원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멀리 아테네 도시를 바라보는 중간언덕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보인다. 파르테논 신전과 유사한 모습인데 파르테논 신전을 제일로 치는 연유 때문인지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파르테논 신전의 옆으로는 규모가 제법되는 원형극장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네 명의 여신상이 벽면을 채운 또 하나의 작은 신전이 있다. 산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한 모서리에는 그리스 국기가 높이 걸린 전망대가 있다. 산정의 바닥은 약한 핑크빛 색깔을 띤 바위들로 덮여있는데 반들거리는 모양으로 미루어 대리석이 아닌가 싶다.

내려오는 길에 로만 아고라와 하드리안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원래 아테네 시민들이 모여 토론하고 공연하며 향연을 베풀기도 했던 곳은 ‘고대 아고라’였는데 그곳이 로마의 지배하에서 훼파된 이후 다시 형성된 것이 ‘로만 아고라’라 한다. 아고라라는 이름이 붙은 걸로 짐작하면 시민들이 모여 토론하고 상대를 설득하며 때로 권력을 비판하던 민주적 공론장의 역할이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도서관이 설립되어 있었고 많은 서적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하니 고대 그리스 시민문화의 수준이 놀랍다. 주위 회랑의 기둥들이 여럿 남아 있는 이곳에서 많은 시민 들이 토론하고 대화하며 공론을 만들어 갔을 것이다. 더위도 식힐 겸 이 로만 아고라 문 앞에서 한참을 앉아 먼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보는 즐거움을 가졌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교회를 만났다. 주변 건물들에 비해 너무 작아 초라해 보이지만 독특한 건물양식과 길 모퉁이 위치가 남달라 조심스레 들어가보았다. 내부는 생각보다 화려하고 정교한 디자인과 성화들로 눈부실 정도였다. 천장의 벽화는 오랜 세월 보수되지 않아 어둡게 변색되고 부분적으로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금칠을 한 부분들, 정면의 제대 주변과 벽면의 성화는 무척 아름다왔다. 변색된 어두운 천정과 화려한 성화의 대조가 마치 기독교 문명의 찬란했던 과거와 약화된 오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는 여러모로 결이 다른 기독교 문화가 이곳에 자리잡고 동로마 건립 이후에는 콘스탄티토플과 함께 그리스 정교 발상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는데 15세기 이후엔 오스만 제국 하에서 이슬람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니 역동적인 역사라 할지 기구한 운명이라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작은 교회를 나서며 나는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도여행을 떠났던 바울을 떠올렸다. 그는 이곳 아데테에서 만난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면서 자신이 믿는 구원의 신앙을 열정적으로 설파했다. 바울은 아데네 사람들이 종교성이 많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진정으로 신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유일신앙을 설파했었다. 그가 열정적으로 논쟁했던 아레오바고 언덕도 이 주위 어딘가에 있으리라. 바울의 확신과 열정으로 이루어진 작은 만남이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씨앗이 되고 이곳 그리스 정교회의 형성으로 이어졌으니 참으로 경이로운 역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그리스는 정교회를 국교로 믿는 나라인데 다른 유럽 도시에 비해 눈에 띠는 교회나 성당 건물이 없고 관광안내서에도 정교회 관련 유적은 별로 나오지 않는 것이 다소 의아스러웠다.

오늘날 파르테논은 건축미학이 뛰어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간주된다. 인류적 차원의 문화유산보존을 주도하는 유네스코가 엠블렘으로 사용할 만하다. 하지만 종교성이 없는 파르테논은 무언가 핵심이 빠진 느낌이다. 돌이켜보면 파르테논은 종교성을 핵심으로 하는 공간이었다. 원래 아테나 여신을 위한 신전이었고 비진틴 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정교회 성당으로 활용되었다. 15세기 오스만 튀르크가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는 이슬람 모스크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 내부에 있던 신상, 제대, 벽화, 성상은 훼파되고 교체되었다. 1832년 그리스가 독립한 이후에는 종교와 무관한 문화재가 되었고 이제는 탈종교화된 세계적 관광지가 되었다. 신전에서 교회로 그리고 모스크를 거쳐 문화재로 변모해오는 과정에 남은 것은 무엇이고 사라진 것은 무엇일까? 대리석 건물의 미학과 아름다움 속에 간직되어 있던 오랜 종교성과 그 교대 과정에서의 공존과 갈등은 더이상 기념할 대상이 아니어도 좋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유태인 출신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저서를 쓰고 현대 정치사상에 한 획을 그은 한나 아렌트는 자유를 공적이고 시민적인 것으로 위치지으면서 아테네 폴리스를 소환했다. 과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 아고라의 민주정치가 이 시대에 필요한 시민들의 참여정신과 집단 숙의의 유산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중세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예술을 되살리면서 새로운 문예부흥을 주도했는데 21세기 르네상스를 다시 꽃피울 전통은 어디서 찾아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답하려면 파르테논 신전과 아고라 광장을 고고학적 유적으로만 바라보는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공간의 안팎에서 살아 숨쉬었을 풍부한 종교성, 예술적 감성, 인류적 지혜의 유산들을 상상할 수 있는 안목이 필수적이다. 그게 쉬울 리 없는 내 안목의 협소함이 안타깝지만 아테네 방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며 잠시나마 인류적 차원에서의 미학과 숭고함을 상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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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차 세계코리아포럼

제25차 세계코리아포럼 (WKF)이 8월 14, 15 양일간 이스탄불 공과대학에서 개최되었다. “글로벌 대전환과 한반도의 대응”을 주제로 총 7개 세션에서 40여편의 발제와 패널, 토론이 이어졌고 마지막 행사로 국악 공연도 있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 일본 등 전세계에서 온 50여명의 전문가들이 최근 세계정세의 변화와 한반도 문제를 중심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4반세기의 기간동안 주요국 전문가들이 매년 만나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고 의견을 조율해온 이 포럼은 보기 드문 민간주도 지식인포럼의 한 사례라 할 만하다.

제1회 모임이 2000년 뉴욕에서 “남북정상회담과 동북아 신질서”를 주제로 개최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포럼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난 남북정상회담이 자리한다. 그 이후 전개된 남북한 협력과 교류, 한반도 평화정착을 향한 전세계의 공조가 이 포럼의 성장과 발전의 조건으로 작용한 셈이다. 물론 이창주 의장의 헌신적 수고와 주위의 협력이 일차적인 동력이었지만 탈냉전기 한반도 주변상황이 이런 만남을 가능케 해준 긍정적인 배후환경의 도움도 부인할 수 없다. 참석자들의 국적과 전공, 배경이 서로 달라도 전문가들의 의사소통과 국제협력의 가능성을 공유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남북간의 협력과 화해, 평화와 통일이라는 큰 지향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포럼이 지속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지난 수년간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국제정세가 달라지며 국내의 정치지형과 국민정서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북핵위기가 고조화되는 가운데 남북간 협력과 화해의 기조가 현저히 약화되었고 북한정권 및 남북협력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훨씬 차가와졌다. 북한은 ‘적대적 2국가론’을 주창하고 러시아와 새로운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수립하면서 선대 이래의 남북 교류와 상호협력을 단절했다. 미중간 패권대립과 상호긴장이 커지고 한미일 공조가 기술경제 차원을 넘어 군사분야에까지 확대되면서 신냉전이란 시각도 커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전쟁의 여파가 다시금 안보불안, 이념적 대결, 민주주의 위기의식을 불러온다. 요동치는 국제정세의 충돌지점으로 한반도나 양안이 심심찮게 언급될 정도로 실질적인 전쟁 우려조차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 사정을 반영하듯 이번 모임에서는 학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두드러졌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측 발제자들은 자국의 입장을 반영하여 한국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쏟아냈다. 어쩌면 신냉전은 담론의 장에서 더 먼저 형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국측 6자회담 대북특사를 지낸 조셉 디트라니는 미리 보낸 원고에서 북한의 더욱 대담해진 위협을 언급하면서 북한은 단지 한국에의 위협에 그치지 않고 동북아 지정학적 불안의 핵심임을 지적했다. 이제는 중국이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할 때임을 강조했다. 그린 포드 전 유럽의회 10선의원이자 아시아 투트랙포럼 대표는 달라지는 지정학적 상황에서 북한이 어떤 임장에 놓여있는지를 검토하면서 약자로서의 블러핑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가장 큰 견해차는 신냉전의 도래와 같은 대립상황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을 보는 관점의 차이임이 확연이 드러났다. 중국과 러시아측 발제자들은 일관되게 한미일 연대가 위기의 본질이고 이에 적극 동참하는 한국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에 반해 유럽 및 한국, 인도의 학자들은 고조되는 북핵위협, 북중 및 북러 결속을 선행하는 위협으로 간주한다. 지구적 현안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시진핑-푸틴 정상회담, 북한의 대러시아 무기제공과 김정은-푸틴 회담과 조약갱신 및 핵무력 강화시도 등을 보는 시선에서도 양자의 입장차는 현저하게 컸다. 숩슬라 스텐젤 전EU 의회 한반도위원장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유럽에서 나토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국은 러시아의 길에 동참하기를 꺼려하고 미국은 일본과 한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있으며 유럽은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을 반영하듯 신냉전 상황을 야기한 근본원인을 미국에서 찾으려는 러시아 학자들에 대해 EU의 전문가들은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중국 인민대 스인홍 교수는 현재의 한중관계가 자칫 ‘블랙홀’로 이어질 수도 있을만치 악화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야기하는 주요인이 한미일 동맹강화와 이를 최우선시하는 한국의 가치외교 탓이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길림대학 장예지 교수도 한미일 협력강화가 신냉전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는 중국측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북중관계는 언제나 전략적이고 그런 속성은 지속적일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은 신냉전 상황을 원하지 않으며 여전히 지역내 안정과 평화를 바라고 유엔합의를 존중한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중국의 국가이익을 견고히 지킬 것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알렉산더 제빈 박사도 현재의 위기 상황이 한미일 동맹강화에서 초래된 것이라 지적하고 러시아로서는 한러관계를 존중하지만 한국의 행동여하에 따라 보복성 조치도 나올 수 있다는 발언까지 덧붙였다.

전 북한주재 영국대사를 역임한 외교관 존 에버레드는 중국과 러시아의 현실인식의 기본구조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즉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기본적으로 북한, 러시아, 중국에 있는 것이고 한미일 협력강화는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것임을 잊어선 안된다고 했다. 연세대 장동진 명예교수 역시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고 인도 델리대학의 선닐 교수도 동북아 및 동남아, 서남아 등지에서 중국이 지역의 불안과 우려를 심화시키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영국 캠브리지대 라이트 교수는 북한의 위협이 심화되고 북중러 협력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삼자협력구조가 어떻게 형성되고 추진되어 왔는지, 그 중요성과 함께 과정상의 여러 어려움을 정리한 발제를 했다. 임반석 교수는 중국몽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 중국의 전략적 지향이 제국주의 경쟁시대 열강이 보여준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지적했다. 중국은 주변 국가들과의 협력과 공존을 통해 지역평화와 발전의 공공재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변모해야 함을 주장했다.

오프닝 세션에서 문정인 교수는 현재 상황을 보는 여러 시각들을 조망하는 발제를 했다. 미중 패권대립으로 큰 변화가 진행중이지만 신냉전이란 개념보다 차가운 평화의 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평가하면서 지금이라도 평화와 안보를 향한 새로운 처방으로 유엔협약에 기초한 다자주의를 강화해야 함을 주장했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에서 동북아 안보협의체, 동복아 안보정상회의, 동북아 비핵지대화 등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장동진 연세대 명예교수는 이러한 시각이 과연 현실성이 있겠느냐고 비판적 코멘트를 했고 청중석에서 동북아비핵지대화를 중국이 받아들이겠느냐는 질문도 제기되었다. 오랫동안 한국의 대외정책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현실정치에 깊이 관여해온 학자의 발제로서는 너무 막연하고 이상적인 내용이란 느낌을 피하기 어려웠다.

25년을 이어온 이 포럼이 더이상 지속되기 어려워졌다는 사실 자체가 변화한 현실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북정상회담과 뒤이은 서울-평양의 교류확대, 북핵해결을 위한 국제공조가 이루어지던 시기의 동력이 현저이 약화되면서 그 계기로 출범한 포럼의 역동성 역시 약화될 것은 예상되는 바였다. 하지만 어려워진 재정여건과 세대 교체 등으로 이 포럼의 지속여부가 불투명해진 모양이다. 민간 분야에서 이만큼 광범위한 국제적 네트워크가 지속되어온 다자적 학술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상황이 아쉽지 않을 수 없다. 변화한 시대상황에 걸맞는 또다른 형태의 플랫폼이 새롭게 출현하리라 믿으면서도 당분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대화와 이해보다 비난과 논쟁이 심화될 것을 예감하는 듯해서 염려가 앞선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국악공연에서의 퉁소 소리가 더욱 애잔하게 내 마음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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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서 맞은 광복절

올해로 25주년을 맞는 국제코리아포럼 참석차 오게된 이스탄불에서 제79회 광복절을 맞이했다. 이스탄불 거리와 건물 곳곳에 걸려있는 붉은색 국기를 보면서 튀르키에 역시 국가상징을 유난히 강조하는구나 생각을 했다. 군부가 주도하여 서구적 문명국가로의 길을 연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 그와 유사한 모델로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슬람 정체성과 세속적 근대성의 공존방식을 두고 긴장이 커지고 있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되어온 민족적 자부심과 국가의식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역사박물관에서만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재확인되는 느낌이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 세션에서 영국 캠브리지대학 존 닐슨 라이트 교수의 발제를 들으면서 한국에서 진행중인 역사논쟁을 떠올렸다. 라이트 교수는 ‘동아시아 신냉전 형성과정에서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제목의 글에서 미국이 지속적으로 일본 및 한국과의 연대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한일간의 여러 문제로 인해 번번히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본의 기시다 내각 출범과 한국의 윤석렬 정부 출범은 삼자협력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2023년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삼자회동이 상징하듯 한미일 협력의 강도와 수준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라이트 교수는 북중러의 위협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한미일 삼자협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보면서도 여전히 한일간의 역사쟁점이 큰 장애물로 남아 있다고 보았다. 한일이 모두 직면하고 있는 포퓰리즘도 중대한 걸림돌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

광복절 당일 행사 중간 중간 한국 뉴스를 검색해 보았다. 예상대로 야권 및 광복회의 불참 속에 반쪽의 광복절 기념식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윤석렬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도 부분적으로 알게 되었다. 한일관계의 미래를 강조하면서 과거를 벗어나자 했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통일방안도 내놓았다 한다. 하지만 적절치 않은 연이은 인사들로 해묵은 역사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이나 진지한 토론과 전략적 평가가 수반되지 않은 새로운 통일방안의 제시가 얼마나 의미있는 결실을 맺을지 의심스러웠다. 평화와 우호의 한일관계를 열어가야 한다는 큰 방향은 공감되고 새로운 남북관계의 구상이 필요하다는 데도 동의하지만 정교한 로드맵이나 국민적 공감대나 상호신뢰구축의 준비 없는 선언적 논의가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움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때마침 카톡으로 이철우 교수가 동아일보에서 대담한 기사를 보내주어 읽었다. 착잡한 심정이 더해졌다. 대통령 주위에 아마도 한미일 연대를 위해 역사논란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조언을 하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외교안보의 중요성을 내세워 역사논란을 장애물로 여겼을 수도 있겠다. 어떠하든 그런 인물들을 중용한 대통령 책임이 아닐 수 없다. 광복절 행사논란을 보면서 해방 직후 3.1절 기념식을 둘러싸고 좌우진영이 대립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그때도 한반도 상황은 미소의 전략적 입장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국제환경의 조건을 강조하고 그 흐름과 함께 가는 체제수립을 추구한 세력이 남북한에서 권력을 잡았다. 민족자주론은 내부적으로는 대중의 심정적 공감을 불러올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허약할 수밖에 없는 자기중심적 대응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로부터 8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세계는 분열되고 강대국간 대립은 심화되면서 신냉전의 도래가 운위되는 형국이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진행중이고 동아시아가 다음 격전지가 될지 모른다는 염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북한의 위협은 커지고 북중러 연대도 강화되는 상황에 미국은 고립주의의 유혹을 받고 있다. 큰 전략적 사고와 외교적 지혜가 절실한 시기에 여전히 우리 논의가 친일논쟁, 과거사 논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우려스럽다. 대중의 지적 자폐증, 포퓰리즘의 문제도 있지만 이런 잠재적 우려들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우리 정치권의 문제가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상황이 초래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중지를 모으기는커녕 오히려 역사논쟁의 자중지란을 벌이게 만든 윤석렬 정부 거버넌스의 편협함과 무감각이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