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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위기 시대의 평화론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평화포럼’에 기조강연을 부탁받았다. 정부의 대외정책을 다루는 주요한 정책연구소인데 평소 별다른 연관이 없었던 나로서는 의외의 초청이었다. 포럼의 주제인 ‘평화체제구축’ 논의는 오래된 주제이고 나도 무관심하지는 않았으나 주요한 발언자로 참여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현실적인 정책논의에는 내 스스로 잘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파적으로 한 편에 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제도 부담스럽고 대부분 국제정치 전공자들로 구성된 심포지엄 구성과도 다소 거리가 있어 고민을 했지만 내 스스로도 정리를 해보고 싶은 욕심에 수락을 했다. 하지만 글을 준비하면서 몇 번 후회를 했다. 쉽지 않은 주제인데다 당장의 정책현안에 대해선 확신이 서지 않는 쟁점들도 많았다. 그래서 원칙적인 차원에서 발제를 하기로 마음먹고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려 했다. 첫째는 오늘날 평화를 위협하는 환경은 단순하지 않아 북한의 위협과 분단의 무게 못지 않게 21세기 국제절서의 변화, 지구생태계의 위험, 한국사회 내부의 갈등과 혐오도 주목해야 함을 지적했다. 복합위기의 시대 환경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중요성을 주문했다.

둘째로는 정중동의 한반도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살펴볼 것을 강조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이후 일각에서는 2018년의 시대로 되돌아갈 것을 기대하고 실제로 그런 정책을 주문하기도 한다. 그 당시 남북의 지도자가 판문점에서 밀담을 나누고 평양의 시민들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한국의 주선으로 북미간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싱가포르 북미공동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한반도의 먹구름이 걷히리라는 기대를 한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도 가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상황은 지금 현저히 변했고 그 변화가 구조적이고 불가역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고 했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더이상 동족, 동질의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국가관계로 재설정했다. 금년 7월 29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담화에서 “지난 몇년 간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한국은 절대로 화해와 협력의 대상으로 될수 없다는 대단히 중대한 력사적 결론에 도달” 했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동족이라는 수사적 표현에 구속되여 매우 피곤하고 불편했던 력사와 결별하고 현실모순적인 기성개념까지 말끔히 털어”버렸다고 했다. 남북교류의 확대를 내심 원치 않았던 곤혹스러움과 이제 그 현실모순적인 상황과 결별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평화론은 이전의 문제의식을 이어가면서도 이처럼 달라진 현실을 반영하여 업그레이드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냉전기의 안보평화론, 탈냉전기의 공존평화론, 핵위기 이후의 비핵평화론은 지금도 평화정책의 주요한 내용을 구성한다. 안보평화론은 오래된 고전적 평화론이다. 외부침략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힘을 가져야 평화가 가능하다는 관점은 지금도 중요하다. 동시에 탈냉전 이후 강조된 공존평화론의 유산도 여전히 주목되어야 한다. 남북간에 맺어진 모든 공동선언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군사적 신뢰를 구축하고 교류협력을 통해 상생공영을 추구함으로써 평화를 달성한다는 원칙을 표방한다.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되고 비핵화 의제가 국제적인 공동목표가 된 이후 평화논의는 비핵화 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비핵평화론이라 할 수 있는 이런 평화구상 아래 6자회담을 비롯한 다자적 프레임이 북한 비핵화를 위해 가동되었고 유엔의 많은 대북제제 역시 핵능력 고도화를 억제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현재 여러 어려움에 봉착해 있고 북한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비핵화가 평화의 핵심이라는 시각은 여전히 평화론의 주요 내용을 차지한다.

그래서 새로운 평화를 구상할 때 다음과 같은 세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첫째로 ‘복합역량으로서의 평화’라는 사고다. 평화는 구호나 이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고상한 슬로건으로 대체될 수도 없다. 평화는 비평화적 상황을 변화시키고 평화상태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역량이다. 전쟁억지력을 갖추는 것은 물론이고 내부의 갈등과 혐오, 환경이나 기후에서 오는 재난, 정보화 시대의 사이버 테러에도 대응할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로 ‘공존양식으로서의 평화’라는 시각이 중요하다. 평화의 최종상태는 갈등이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갈등의 부재나 종식이 아니라 갈등이 관리되고 조율되며 해소될 수 있는 역량이 자리잡는 것이다. 평화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주체들, 이질적 가치들의 공존양식이다. 민주주의 원리가 평화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이유도 이런 공존의 방식 때문이다. 완전한 화해보다는 상호 인정을 전제로 한 공존질서가 곧 평화일 수 있다는 관점인데 냉전기 ‘평화공존론’의 기본논리와 상통한다. 상이한 문화, 인종, 가치의 공존을 포함하는 다문화적 평화론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셋째로는 ‘미래전략으로서의 평화’ 에 대한 시각을 갖출 필요가 있다. 평화는 단지 갈등없는 상태가 아니며 평화가 내포하는 다양한 가치들을 실현하고 지향하는 공동체의 기본속성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이 경우 평화는 국가간에 한정되지 않고 시민사회 내 다양한 주체들의 일상에도 자리잡는 총체적인 것이 된다. 국제적으로, 내부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평화가 제도화하고 일상화하는 공동체를 구현하는 전략적 비전이 평화인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 나아가 한반도 국가공동체가 추구하려는 미래공동체의 모습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마무리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란 말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무는 중한데 갈 길이 멀다는 말을 ‘갈 길이 멀지만 임무가 중하다’는 의미로 고쳐 읽고 최선을 다하자는 덕담으로 끝을 맺었다. 안팎의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은 분명 멀고 어렵지만 그럴수록 이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는 임무의 중대함도 뚜렷하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지만, 현실 정책을 다루는 전문가들에게는 너무 원론적인 발제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기본과 원칙은 중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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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50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긴지 50주년이 된다. 2년여에 걸쳐 그 반세기를 지성사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공동연구를 수행했다. 나는 사회학 분과학 50년사와 별도로 전체 총론이 될 ‘사회과학 50년 지성사’도 집필을 부탁받았다. 그 결과물이 [서울대 사회대를 통해 본 사회과학 50년 지성사]라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10월 14일 그 내용을 발표하는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내가 총론을 발표하고 각 분과별로 집필자들이 개별 학문의 역사를 정리하는 시간으로 뜻깊은 자리였다.

1975년 서울대학교의 대대적 학제개편을 기점으로 문리대, 상대가 없어지고 인문대, 자연대, 사회대의 소위 ‘기초과학 3 대학’ 체제가 자리잡았다. 이것은 단지 한 대학의 행정편제 개편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한국사회에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이라는 학문분류방식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 ‘사회과학’이란 말이 소개된지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학문영역이라기보다 일종의 이데올로기, 좌파적 정치담론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오랜동안 ‘사회과학’이란 이름을 단 연구나 교육단위는 자리잡지 못했다. 북한에서 일찌기 ‘사회과학연구원’이 매우 중요한 정치이념기관으로 자리잡았던 것과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

한국의 사회과학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밀접히 연결되어 전개되었다. 대학의 팽창과 대학교육의 확장은 근대화의 주요 동력이자 그 결과였다. 한국의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세계화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회과학은 중요한 지적 자원을 제공했고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들이 그 인적 지적 자원을 제공했다. 1975년 사회대 출범을 가능케 했던 것은 1968년 4월에 확정된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이었는데 국가주도의 발전모델을 심화시키려던 시대적 상황이 그 배경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이 종합화계획은 정부의 강력한 법적 재정적 지원을 배경으로 추진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나는 총론을 발표하면서 반세기 지성사의 성과와 성취 못지 않게 여러 문제점도 지적했다. 80년대 사회대가 보여주었던 다학제적이고 종합적인 연구협력의 전통이 확대발전되었다기 보다는 학과별 내부화와 전문화로 더욱 치달은 점, 아카데미즘과 정책연구의 관계에 대해서도 대학의 자율성과 다양성, 교수의 독자성이라는 틀 속에서 공존해온 셈이지만, 진지한 논의를 통해 아카데미즘의 기본성격을 새롭게 정립하는 노력은 그다지 없었던 점도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어떤 학생을 키워낼 것인가라는 교육론에 있어서의 반성이 부족하고 여전히 최고대학이라는 이름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성찰해야 할 것을 주문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1999년 임마뉴엘 왈러스틴은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이라 책을 편집 출간하면서 “21세기를 위한 사회과학”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근대형성기에 구축된 사회과학의 적합성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새로운 세계질서는 새로운 사회과학을 필요로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책자였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그의 비관적 전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근대 초기 정립된 지식체계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데는 대부분 공감한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혁명의 급진전 속에서 대학의 개혁이 화두로 부상하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회과학은 미래를 위한 어떤 전망을 내놓을 수 있으며 우리 시대에 어떤 희망과 꿈을 던져줄 수 있을까? 융복합의 시대에 인문-사회-자연의 학문 3분류는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온라인에 쏟아지고 인공지능의 능력에 전인류가 놀라고 있는 상황에 대학은 언제까지 지식생산과 고등교육의 전담기구로 존속할 수 있을까? 각자도생의 경쟁에 함몰된 젊은 청년들에게 사회대가 제공하는 삶의 향방과 지혜는 무엇이어야 할까? 그 답을 얻었노라 자만하지 않고 이 질문들을 진실되게 되물으며 지식인으로서의 존재양식을 새롭게 고민하는 것, 시대적 우환의식을 공유하는 것에서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해 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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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그리다

광복 80주년 기념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개최하고 있는 “향수 고향을 그리다” 전시회를 관람했다. “일제강점기에서 현대까지 각 시대의 표정이 담긴 한국의 풍경화를 살펴본다”는 것이 이 전시의 기획의도라 한다. ‘Landscape of Homeland and Longing“이라는 영어 표현 그대로 ‘고향’과 ‘향수’와 ‘풍경’이 핵심 키워드이고 작품명에도 피난, 먕향, 귀로 등의 단어가 종종 등장한다.

총 4부로 나뉘어진 전시실을 둘러보면 한국현대사를 파노라마처럼 만난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20세기를 고향이란 화두로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풍경화라는 그림 장르가 그런 정서에 잘 어울리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림 사이에 배치된 정지용, 윤동주, 이상화, 김기림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들의 시도 그런 느낌을 더한다.

전시의 첫 공간은 1920-40년대에 그려진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빼앗긴 땅‘ 이미지로 식민지 상황을 형상화한 풍경들이다. 암울한 시대를 조선색, 향토색을 탐구하면서 견뎌내려 한 이들의 정서를 지금 내가 공감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론 새로운 미학적 표현욕을 추구하면서도 식민지라는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딜렘마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김용조, 이인성, 금정연 등의 작품이 언뜻 유럽의 미술관에서 보던 풍경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가로수, 마을, 인물 등 소재가 모두 향토에 대한 짙은 애정을 담고 있는 것이 그런 내면을 드러낸 것 아닌가 싶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의 형 이상정의 작품은 처음 보았다. 군인이자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망향곡’이란 서정시를 쓰기도 했고 망명생활을 ’표박기‘라는 일기로 남겼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가 사용하던 여러 중류의 낙관도 전시되어 있는데 작년에 그의 백부가 조카의 귀국을 기다리며 쓴 서예작품을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이상정, 이상화를 보니 뛰어난 사회학자이자 초대 IOC 위원이었던 이상백의 얼굴도 떠오른다. 한국 대표 명문가의 3형제를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셈이다.

2부는 광복 직후의 상황을 그린 작품들이다. 입구에 전시된 이상범의 6폭 병풍은 ’효천귀로‘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1945년 작품이다. 해방 직후 고향으로 돌아오는 감격을 풍경 속에 담은 것이 아닌가 싶은데 수묵화의 잔잔한 배치 속에 정겨움과 그리움이 안개처럼 서려있다. 나는 1948년 문신의 작품인 ’뒷산과 하늘‘ 앞에서 한참 머물렀다. 파란 하늘의 색감과 구름의 흰색이 너무도 선명해서 광복 이후의 흥분과 기대감이 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오지호의 1948년 풍경도 당시의 기대와 희망 속에 약간의 염려를 담고 있는 듯 했다.

3부는 ’실향‘이란 타이틀 하에 ’폐허의 땅‘이란 부제를 붙인 전시공간이다. 6.25 전쟁의 참화와 피난의 애환을 담은 그림들이다. 피난민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이종무, 서석규, 윤중식, 남관의 여러 그림들은 당시의 상황을 찍은 보도 사진 이상으로 시대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증언자료라 할 만하다. 솔직히 나는 전쟁과 분단, 이산의 역사가 이렇게 많은 미술 작품으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수억의 ‘625 동란’, 남관의 ‘피난길’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고 1951년 전쟁 중 윤중식이 그린 ‘전쟁드로잉’과 이달주의 ‘귀로’ 앞에서는 작가가 느꼈을 비애를 공감하는 듯 했다. 후일 한글의 조형화에 앞장섰던 이응노 화백이 전쟁의 폐허와 전후 도시풍경을 여러 화폭에 담았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전시실 한 켠에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가 걸려있다. “아모도 그에게 수심을 알려준 적이 없기에 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 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려서 공주처럼 지쳐서 도라온다 ” 인터넷 상의 설명을 빌어본다면 시에서 나비는 순수하고 연약한 인간존재를, 바다는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혹독하고 냉혹한 현실세계를 상징한다. 해방 후의 현실이 ‘청무우밭’인 양 환호했던 자신의 모습이 마치 물정모르는 흰 나비같다는 당혹감이 이런 시상을 낳았을 것이다.

마지막 전시실은 ’망향‘이라는 타이틀 하에 ’그리움의 땅‘이란 부제를 달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수많은 실향민들의 한, 망향의 그리움이 핵심 주제다. 대부분의 실향작가들은 개인적으로 이산과 가난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한국화단의 중심에 서기도 어려운 시기를 살았다. 박성환, 이중섭, 홍종명, 최영림, 전화황 등의 그림에는 주변성이란 값비싼 비용을 치루면서 일구어낸 독특한 미학이 아름답게 담겨있다. 이석우의 ‘피란길’은 남부여대하고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작년 그리스에서 보았던 ‘이주인의 애환’ 전시의 대표작을 생각나게 했다. 실향과 이산의 경험은 전세계 공통의 이미지를 낳는게 아닌가 싶다.

급격한 근대화 속 60년대 변화상을 그린 작품들을 만난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만익의 서울역 (1962)과 청계천 (1964), 김원의 서울전경 (1961) 등은 60년대 초 한국사회가 겪은 대변혁의 현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들 작품이 어떤 사진자료나 신문기사보다 이 시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느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소망을 그린 작가들의 상상력과 이상향의 추구도 새롭게 와 닿았다. 박돈의 ’성지‘ (1957), 홍종명의 환희 (1970), 윤종식의 삶(1953) , 이석우의 ’낙원‘(1970) 등이 그러하다. 굳이 사회성이나 시대성을 명시적으로 표방하지 않아도 구도와 소재, 표현에서 드러나는 당대의 분위기는 그 자체가 역사적 자료라 할 만하다.

21세기 오늘 젊은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노년세대들조차 고향의 정서는 예전같지 않다. 죽기 전 고향땅을 밟아보겠다던 실향민의 망향 정서도 세월과 더불어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래서인가, 망향으로 끝나는 전시가 웬지 허전하다. 어딘가 망향 이후의 그리움을 전시하는 공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21세기 도시인은 어디를 향한 향수를 노래하고 어떤 그리움을 그릴 수 있을까? 인생이 지향해야 할 ‘본향’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 덕수궁을 나서면서 그런 물음들을 혼자 던졌다. ‘본향을 향하네’ 흑인 영가의 한 귀절이 귓전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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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자본의 유형학

‘꿈의 사회학’ 강좌를 개설한 지 다섯 해가 되었다. 강좌가 개설된 학기에는 예외없이 학생들의 관심이 높았다. 매번 수강신청이 조기마감되고 추가신청자의 요구를 거절하느라 힘이 들었다. 이 과목이 자신의 삶, 미래설계와 직결되는 내용이리라는 기대가 관심을 끈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전에 없던 새 과목을 개설한 이유가 학생들의 고민에 부응하는 강의를 하려는 의도였으니 그런 반응은 반갑고 고마운 것이다.

매년 강의 내용을 업데이트하고 또 학생들이 쓴 보고서를 읽으면서 원래의 시각이 조정되기도 하고 새로운 쟁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이 과목이 유용하고 필요하다는 애초의 생각이 좀더 강한 확신으로 자리잡는 것을 느낀다. 다만, 꿈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이나 이론화 작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국내외를 통털어 이 강좌명으로 개설된 것이 거의 유일한 탓에 강의내용 구성에 힘이 꽤 많이 든다. 자칫 내 편견이나 생각이 수업내용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따르는 심리적 부담감도 크다.

사실 꿈이란 단어는 매력적이지만 정작 그것을 직면하고 분석하려들면 애매하고 부담스럽다. 꿈을 가지라는 조언은 상대방을 격려하는 말로 편하게 쓰이기도 하지만 맥락과 형편에 따라서는 자제하거나 피해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너도 큰 꿈을 키워라’는 말은 상대방을 믿어주는 호의의 표시일 수 있지만 자칫 성공을 향한 집념을 요구하는 강요가 될 수 있다. ‘너는 꿈도 없냐?’라든지 ‘그래서야 뭐가 되겠니?’라는 압박감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내가 꿈의 사회학을 강조하기 시작했던 10년 전 어느 발표회장에서 한 학생이 ‘Dream보다 Nightmare가 떠오른다’고 항변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꿈자본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내가 느끼는 딜렘마도 이와 연관된다. 애초 꿈자본이란 개념화를 시도한 김홍중 교수는 너무 생존과 경쟁에 허덕이는 청년층에게 새로운 방향과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음을 강조하려 했다. 꿈이 일종의 자산이자 자본일 수 있다는 말은 경제적 보상이 따르지 않아도 젊음과 열정 그 자체를 사랑하라는 격려성 의도가 강했다. 하지만 자본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순간, 그것은 많고 적음을 전제하는 정량적 속성을 수반한다. 꿈자본을 측정하고 객관화하면 할수록 그 자본의 크기에 따라 우열을 나누고 평가하는 경향도 함께 커진다.

분명히 꿈자본도 인적 자본 (human capital)의 하나이고 포괄적으로는 사회적 자본의 일부다. 그것이 자본인 한 크고 많은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실제로 학생들에게 꿈자본을 키우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록 현재 가진 것은 없고 당장 실현되기 어려운 미래일지라도 그것을 꿈꾸고 희구할 수 있는 것이 젊은이의 특권이 아니냐고 강조한다. 안팎의 상황이 어렵더라도 너무 위축되거나 기죽지 말라는 뜻이지만, 실제 학생들에게 가닿는 의미와 효과가 과연 그러할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자기의 꿈자본이 약하다고 자책하는 보고서도 없지 않다.

김석호 주윤정 교수팀이 꿈자본을 측정하고 유형화한 것은 이 분야의 선구적 시도로 그 의의가 크다. 다만 선구적인만큼 시론적인 차원에 머물러 여러가지 보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나로서는 꿈의 경로와 방식이라는 심리적 차원에 주목함으로써 꿈의 지향성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꿈은 개인이 꾸는 것이고 그 강도도 심리적인 속성이 강하지만 그 지향과 방향은 그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역사에서나 사회에서 강조되는 다양한 꿈, 그에 따르는 꿈자본의 다차원성이 좀더 부각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꿈의 사회학적 속성을 주목하는 내 입장에서는 꿈의 내용이 공동체 차원을 지향하는 것과 개인적 차원을 중시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유형화의 한 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신문화적 가치와 정치경제적 효용의 어느 부분을 강조하는가가 또 다른 한 축이 될 수 있다. 이 두 축으로 유형화를 하면 김석호 교수와는 다른 또다른 범주구분이 가능해진다. 그 유형은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1유형 – 공동체 차원을 중시하고 정치경제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꿈자본 / 2유형 – 공동체 차원을 중시하되 정신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는 꿈자본 / 3유형 – 개인 차원을 중시하고 정신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는 꿈자본 / 4유형 – 개인 차원을 중시하고 정치경제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꿈자본. 이를 그림으로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유형화는 지나치게 1유형의 꿈자본이 강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비판을 담고 있다. 우리 시대는 정치경제적으로 영향력이 크고 국가나 기업, 사회 전반을 염려하는 위인, 영웅, 큰 인물에 대한 선호가 강하다. 꿈을 키우라는 말이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연봉, 더 강한 권력을 향유하려는 성취지향성과 같이 이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결과는 끝없는 경쟁이고 비교이며 결과적으로 다수의 좌절감과 열패감이 커지는 것이다.

이에 대척점에 있는 것이 3유형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 전반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으면서 개인의 내면적 가치나 의미를 추구하는데 열심인 경우다. 사회적 관계에 서투르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유형이다. 일반적으로는 원대한 꿈이 없고 경쟁을 회피하는 소극적 인간으로 평가받기 쉽다. 하지만 많은 창의적 인간, 예술적 창조가 이런 덕후형 인간에게서 나타났음을 경시해서는 안되고 이 유형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 꿈이 지나치게 공동체 차원에서 고려되는 것은 문제다. 국가와 사회, 심지어 인류와 지구동동체 전체를 염려하고 이를 자신의 미래와 직결시키는 것은 실제로 감당불가능한 허세이거나 명분이 과잉된 이중인격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그렇다고 꿈이 개인적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을 전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환영할 수만은 없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적 세계, 개인적 차원의 행복만 추구한다면 그 공동체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웃과 공동체, 사회전체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꿈으로 내면화할 수 있어야 한다.

꿈자본도 사회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어느 정도 유형적 균형이 필요하다. 꿈자본의 사회적 포트폴리오라 할 수도 있겠다. 좋은 사회란 다양한 유형이 적절한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고 모든 구성원이 자기에게 맞는 꿈을 추구할 수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꿈의 사회학적 논의, 꿈자본의 유형화가 힘든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꿈의 지향성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내적인 자신감과 회복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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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의 두 메시지

해방 80주년이 되는 2025년 광복절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안으로는 탄핵정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 정부가 출범하여 남북관계 개선을 강조하고 있는데다 밖으로는 트럼프 충격 속에서 미러간 정상회담과 한미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서울과 평양에서 전해질 이 날의 메시지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는 북한을 향한 메시지를 비중있게 담고 있다. “현재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 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고 “일체의 적대행위를 할 뜻도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했다. “남과 북은 원수가 아니다.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고 인정하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의 특수관계”라며 “특히 남북 간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해 9·19 군사합의를 선제적·단계적으로 복원해 나가겠다”고 했다. 동시에 “비핵화는 복합적이고 어려운 과제임을 인정”하면서도 “평화로운 한반도는 ‘핵 없는 한반도'”임을 강조하고 남북, 미북 대화와 국제사회의 협력을 통해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겠다고 했다.

서울의 시각은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선언, 판문점 선언, 9·19 공동선언까지 남북 간 합의를 관통”하는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는 입장에 서 있다. 남북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전제가 바탕에 놓여 있다. 북한이 몇차례 담화를 통해 남북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가 아니며 적대적인 국가관계로 변화했다고 주장해온 것에 대한 정중한 반론인 셈이다. 한국은 대북적대시 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이고 평화와 공동번영을 지향하지만 한 민족으로서 남북이 공동으로 점진적인 통일을 추구할 것을 확실히 표명했다.

평양에서도 “조국해방 여든 돐” 기념식이 김정은 위원장 참여하에 거행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념식의 발언 어디에도 남북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루 전날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명의의 담화에서 한국에 보내는 메시지가 충분히 담겨있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대남관계에 대해 굳이 김정은 위원장 수준에서 언급하지 않겠다는 무시의 의미도 담겨있을지 모르겠다. 대신 2차대전에서의 쏘련의 역할을 강조하고 현재 ‘조로관계’가 새로운 동맹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힘주어 역설하고 있다. 기념식에서 러시아 국가회의 의장 바체슬라브 월로찐이 푸찐의 축사를 대독했고 ‘인터내셔널’ 가의 연주로 대회를 마감했다.

김정은 위원장도 ‘조국해방절’이 ‘우리 민족의 숙원이 실현된 승리의 날’이라고 했다. ‘조선인민’의 불굴의 애국심과 혁명열기가 김일성의 영도력 하에서 빛났던 역사임을 강조했다. 분단극복이나 조선해방, 한반도 평화구축 등 메시지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사회주의 애국주의, 우리국가 제일주의가 부각되고 있다. 특기할 점은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우리 혁명군과 어깨걸고 싸운 쏘련군 장병들의 숭고한 국제주의 정신’을 높이 치하하고 이것이 ‘위력한 동맹관계로 승화발전되는 “조로친선의 영원한 생명력” 을 강조한 점이다. 올해의 연설에서 새롭게 확인되는 바다.

서울과 평양의 광복절 메시지를 접하면서 예상은 했지만 마음은 더욱 무겁다. 두 메시지의 간극은 현재 한반도 상황의 엄중함을 반영함과 동시에 향후 남북관계의 전망도 어두울 수 있음을 예감케 한다. 비록 서울의 메시지는 작년에 비해 훨씬 유연해졌지만 평양의 반응은 이전 정부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김여정 부부장이 담화에서 말했던 “보수든 진보든 한국은 우리의 적”이란 기조가 강하게 관철되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라 하겠다. 이 기념식에서 유난히 ‘조로’동맹을 강조하면서 공산주의 국제주의를 소환하고 있는 것도 한반도 문제의 탈민족화, 이데올로기적 진영화로 이어질 개연성을 보여주어 걱정을 더한다.

어떤 적대행위도 흡수통일시도도 없을 것을 분명히 하고 평화와 공동번영을 향한 신뢰재구축을 제안한 이재명 정부의 메시지는 남북기본합의서 이래의 기존합의를 존중하려는 기존의 흐름과 부합한다. 하지만 북한이 적대적 2국가를 공언한 상황의 엄중함과 무게감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약화되는 민족감정과 커지는 대북불신의 내부변화도 너무 가볍게 취급된 것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급진전되고 있는 북러동맹의 강화와 조만간 열릴 미러대화, 미중대화 등의 국제적 상황변화가 충분히 감안된 것인지도 미지수다. 우리의 대응논리가 너무 오래되고 관성적인 것이 된 측면은 없는지 모르겠다. 임무는 중한데 갈길은 멀다는 임중도원(任重道遠) 이란 말이 절로 떠오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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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과 적대국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북한이 “서울의 희망은 어리석은 꿈에 불과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최근 한국 언론에 일부 언급된 대남 확성기 철거사실을 부인하면서 “철거할 의향도 없고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의지도 전혀 없다”고 확언했다. 지난 7월 28일에 발표한 “조한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제목의 담화와 그 내용의 기조는 동일하다. 두 담화 모두 비교적 정제된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내용은 매우 단호하고 냉정하다.

이번 담화에서 “미국의 충성스러운 하수인이고 충실한 동맹국인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입장이 “헌법에 고착될 것”이라 밝힌 것이 눈에 띤다. “우리의 국법에는 마땅히 대한민국이 그 정체성에 있어서 가장 적대적인 위협세력으로 표현되고 영구고착되여야 할것”이라고도 했다. 향후 북한이 헌법이나 법률조항을 통해 적대적 2국가론을 명료하게 규정할 것임을 예상케 한다.

이런 기조는 2023년 말 남북관계를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두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북한은 이것을 “강령적인 결론이자 중대한 정책적 결단이며 근본적인 방향전환”이라 했다. 북한의 일방적 선언이었지만 그 주장이 가져올 파장은 심히 크고 우려스럽다. 수십년간 남북이 공유해온 기본원칙, 즉 한반도에서의 전쟁방지와 신뢰조성, 점진적 교류와 단계적 통일이란 방향에 대한 전면부정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보면 ‘두 국가론’은 새로운 시대변화를 반영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남북한이 별개의 주권체로 80년을 지나왔고 유엔에 별도 의석으로 가입한 후에는 실질적인 두 국가상태가 공인되었다. 실향민이나 이산가족의 비중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통일에 대한 관심이 한국 내부에서도 크게 줄어들었다. 민족이나 동족감정 역시 크게 약화된 것이 현실이다. 한국판 두국가론이나 통일포기론을 접하는 것도 드물지 않은 것이 오늘이다.

문제는 두 국가론이 ‘적대성’으로 이어져야 할 필연성이 있는가다. “조선반도에 국가 대 국가간관계가 영구고착된 현실”과 “한국에 대한 우리 국가의 대적인식에서는 변화가 있을수 없다”는 두 주장이 반드시 연계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번 담화에서는 한국헌법의 통일지향, 한미합동군사훈련, 그리고 비핵화 전략 등을 그 이유로 내걸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 시점에서 ‘적대성’을 증명할 근거가 되기도 어렵다.

2023년의 근본적 방향전환은 최근 변화된 지정학적 환경과 핵무력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한이 선택한 전략적 판단에 기인한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아마도 가장 좋은 지정학적 환경을 맞이했다는 북한의 평가와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러시아와 정치군사적 협력관계가 일층 강화되고 중국과의 협력전망도 나쁘지 않다. 트럼프 미 정부의 일방적 미국우선주의가 한미동맹의 미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효력도 전같지 않다. 트럼프와의 정상간 좋은 사이로 인해 북미간 핵담판의 가능성조차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북한 나름대로 21세기 포스트 탈냉전기의 시대규정에 따른 전략적 변화를 반영한 것인데 ‘이미 완전히 되돌릴 수 없게’라는 표현 그대로 불가역의 역사진행이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통일을 주요 목표로 규정한 헌법적 가치와 같은 민족이라는 오랜 정체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남북한의 실질적 2주권 상태가 불가역의 상태로 수십년을 지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교류협력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낭만적 기대감도 약해졌고 북한 핵위협에 따른 불신도는 더 커졌는데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은 엄청난 환경 변화이자 도전적 과제다. 그동안 우리가 믿어온 여러 변수들, 민족적 감정이나 통일의 당위성, 남북교류의 아름다운 추억, 한미동맹의 견고함 등으로만 이 격랑을 해쳐가기는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달라지는 지정학적 환경에 어떻게 대응할지, 한반도의 평화와 신뢰를 어떻게 확보할지, 끝내 견지해야 할 우리 나름의 전략적 가치는 무엇일지 혁신적 사고와 역량결집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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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와 추론

Chat GP 3.5 가 세상에 나온지 채 3년이 되지 않는데 이제 인공지능은 지구적 차원에서 광범위한 관심 대상이 되었다. 엔비디아가 최고의 자산가치를 지닌 기업으로 급성장하고 미중의 패권경쟁에도 빠지지 않는 항목이 AI다. 다양한 정보를 검색하고 정리하는 기능때문에 기업이나 언론, 학술활동에도 급격히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국가들마다 인공지능 발전전략을 내세우고 평범한 시민들도 인공지능이 장착된 스마트폰 덕택에 고급 비서를 두고 살게 되었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정보로부터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찾아 일목요연하게 문장과 이미지를 산출해주는 인공지능의 능력은 놀랍다. 웬만한 프로그램도 순식간에 만들어 힘들게 훈련한 초급 프로그래머들의 일자리가 흔들린다. 몇 달 전에는 지브리풍 그림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오류와 환각 현상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최근 전거를 더 정확히 밝히고 자체 피드백을 통해 그 오류를 최소화했다고 하지만, 사실성 보다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도록 설계된 탓에 정확성을 확신할 수 없는 근원적 한계를 지닌다.

2025년에 들어 여러 회사들이 ‘추론'(reasoning) 기능을 내세운 진화된 버전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실제 최근 AI는 정확한 정보, 유려한 문장, 신속한 검색보다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인공일반지능 (AGI)으로 한발짝 진화한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스스로의 내부모델 (world model)에 따라 정보를 판단하고 평가하며 해석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해 의료, 법률, 금융, 언론, 학술, 예술 전 영역에 그 활용도도 높아지고 있다. 인간지능과 유사한 생각과 추론의 기능을 획기적으로 높인 인공지능의 진화를 어떻게 활용하고 그 부작용을 통제할 것인지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된다.

Chat GPT 3.5 버전이 현재의 4o 나 5.0 버전으로 진화하면서 보여주는 추론 능력은 놀라울 정도다. 인공지능이 ‘생각’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no’라 답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수많은 정보 속에 담겨있는 패턴이나 유형, 숨겨진 인과고리를 찾아내는 기능이 고도화되어 인간의 뇌연구와 단백질의 구조분석에 이미 놀라운 성과를 가져다 주었다. 구글의 하사비스가 노벨화학상을 수여받는 상황에서 사실과 허구, 옳고 그름을 중시하는 팩트중심적 비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사람들이 인공지능에게 단순정보나 사실확인보다 고급한 지적 설계나 창조적 사고, 평가적 추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언젠가 바둑품계론과 조지훈의 주도유단론을 비교한 적이 있다. 둘 다 인간의 능력을 평가하는 방식이고 1단에서 9단까지의 서열화를 활용하지만 무엇을 중시하는가는 사뭇 다르다. 바둑에서의 평가는 수를 읽고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확률에 따라 매우 정확하게 표준화되어 있다. 반면 조지훈의 분류는 단순히 술을 얼마나 잘 먹는가라는 실력평가가 아니라 술을 대하는 태도나 삶의 자세 같은 미학적 차원을 포함한다. 전자가 실력 중심이라면 후자는 풍류 차원의 분류라 할 수 있겠다. 실력주의가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바둑품계가 인간능력 평가방식으로 원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Chat GPT에게 이 두 분류체계를 비교해 보라 했더니 이렇게 시작했다.

“조지훈이 직접 쓴 <술의 9품>(혹은 <주구품酒九品>)은 다음과 같습니다. 표현과 해석은 약간씩 다른 전승이 있으나 대체로 이런 구조입니다.” 조지훈의 글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종합해서 설명한다는 친절한 부연이 다소 의아했다. 1품 –천상호(天上壺) -신선의 경지, 술과 내가 하나가 되어 자연과 합일되는 수준, 2품-지상호(地上壺) -속세에 살되 속세에 물들지 않는 자유인의 음주, 4품-풍류호(風流壺)- 멋과 여유를 즐기며 마시는 술, 5품-소요호(逍遙壺)-번뇌를 잠시 내려놓는 유유자적한 음주, 8품-해갈호(解渴壺) -단순히 목을 축이기 위한 술 등을 소개했다. 처음보는 내용이어서 아 조지훈이 이런 글을 썼었나 반신반의하면서 내 기억을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완벽한 허구다. 이런 표현과 글을 조지훈이 썼다는 기억이 전혀 없다고 지적하고 전거를 밝히라 했더니 한중일의 여러 자료에서 종합한 것이란다. 결국 거짓말이구나 했더니 끝까지 여러 설명자료들을 종합해서 자기가 재구성한 것일 뿐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허구와 환각이 훨씬 정교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이런 팩트의 오류와는 별개로 논리와 설명은 꽤 참고할만 했다. 바둑의 급수평가 모델은 ‘성취도·숙련도’를 측정하기에 적합해서 교육, 직무 역량 평가 등에 유용한데 반해 조지훈의 모델은 ‘태도·가치관·품격’을 평가하기에 적합해서 리더십, 인생관, 예술적 감수성 등을 논하기에 알맞다고 했다.

내가 이 두 방식의 장점을 반영한 새로운 틀을 만들어보자 했더니 ‘기량’과 ‘품격’을 두 축으로 1품에서 9품에 이르는 새로운 분류체계를 제시했다. 각 단계에 성인(聖人), 대가(大家), 거장(巨匠),명수(名手), 준거(準據), 능수(能手), 학수(學手), 입문(入門),미숙(未熟)이란 그럴듯한 이름까지 붙였다. 1품 성인은 역대급 통찰, 압도적 전문성을 갖고 자신·타인·자연과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자를 의미하고 4품 명수은 안정적 상위권에 속하며 혁신 능력과 타인의 기여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지닌 자이고 7품학수는 기본기를 다지고 성장 중이며 열린 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는자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런 한자어 구사능력은 요즘 왠만한 사람들이 흉내내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최근 많아진 중국 데이터의 학습효과가 아닌가 싶다. 어쨋든 동아시아 한자문명권에 좀더 친숙한 추론이나 대답이 강화된 셈이다. 바둑의 실력평가나 술먹는 태도유형을 넘어서 종합적인 인간평가를 하려면 세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좋으리라는 제안도 그럴 듯했다. “이 사람은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와 “이 사람은 어떻게 타인과 관계 맺는가?” 만이 아니라 “이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절의 주고받음을 통해 내 먹연했던 생각이 깊어지고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Chat GPT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거나 객관적 정보를 제공해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논리, 비교 분석, 색다른 아이디어와 이름짓기 같은 방식으로 나를 도왔다. 마치 유능한 후배교수나 대학원생과 함께 토론하면서 조금씩 생각을 발전시켜가는 공동작업 같은 느낌이었다. 팩트의 오류나 환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AI가 더 깊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추론과 상상의 기능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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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관계와 통미봉남

북한은 29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명의의 대미담화를 발표했다. 전날 대남담화를 발표한 것에 연이은, 일종의 연속 담화다. 두 담화 모두 2025년 오늘의 세계를 바라보는 북한 나름의 시대인식을 잘 보여주지만 대남 메시지와 대미 메시지의 결은 확연히 다르다.

두 담화는 2018년 이후의 변화로 인해 Again 2018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미국에 대해서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되었던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의 프로세스로 돌아갈 수 없다는 북한의 입장표명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서 그 전날 표명했던 이유가 남북관계의 질적 전환에서 찾았던 것에 비해 미국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핵능력 강화와 지정학적 변화를 주요 이유로 들고 있음이 눈에 띤다.

“지난 몇년 간 ….《민주》를 표방하든,《보수》의 탈을 썼든 한국은 절대로 화해와 협력의 대상으로 될수 없다는 대단히 중대한 력사적결론에 도달할수 있었으며 동족이라는 수사적표현에 구속되여 매우 피곤하고 불편했던 력사와 결별하고 현실모순적인 기성개념까지 말끔히 털어버릴수 있었다.”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은 지난 몇 년을 ‘동족이란 수사적 표현에 구속되어 매우 피곤하고 불편했던’ 때라고 했다. 피곤함과 불편함이란 단어 속에는 남북교류의 확대를 대놓고 반대할수 없으나 내심 원치 않았던 곤혹스러움이 담겨있다. 이제 그 현실모순적인 상황과 “결별”하고 “개념까지 말끔히 털어버렸다”는 말에 당위론의 부담을 벗어던진 후련함마저 읽혀진다.

대미 담화에서는 바이든 정부 시절의 격한 비방성 담화에 비해 향후 관계개선의 기대를 포함한 계산된 표현들이 담겨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개인적 관계가 좋다는 것, 새로운 접촉방안을 모색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숨기지 않는다. 다만 북한의 비핵화실현, 핵보유국지위 부정을 목표로 하는 그 어떤 시도도 철저히 배격될 것이라 단언한다. 싱가포르 합의와는 다르게 핵을 가진 국가대 국가로서의 대화를 압박하기 위해 2018년과의 차이를 극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계엄과 탄핵의 대혼란을 격던 상반기에 잠잠하다가 이 시점에서 ‘공식립장’의 담화를 발표한 것은 새 정부 출범 이후의 전략적 기조가 정해졌음을 시사한다. 그 기조는 신형 통미봉남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취한 “성의있는 조치”들도 평가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일축하고 한국과의 대화나 교류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대신 미국과는 핵보유국 지위를 유지하는 조건 하에서의 대화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2018년과는 달라야 한다는 같은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한국과 미국을 분리하고 서로 다른 방향의 전략을 구사하는 기본방향을 예상할 수 있다.

2025년의 시간은 확실히 이전과 다르다.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 이후의 서방진영의 혼선과 갈등, 유엔중심 다자주의 규범의 약화로 흔히 규범기반 자유주의 국제질서라 불리던 세계질서가 근본적으로 동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지속과 전지구적 군비강화 추세, 북러의 정치군사적 밀착은 안보와 평화, 신뢰와 협력의 기본틀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강화와 한미동맹의 동요가능성은 전례없는 충격파가 될 수 있다. 지정학적 환경변화와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이 맞물려 비핵화가 빠진 북미간 협상도 배제하기 어렵다. 21세기 한반도 현대사는 2025년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수도 있을 정도다.

우리는 오늘의 이 변화를 얼마나 진지하게 파악하고 있을까? 계엄과 탄핵이 몰고온 국내정치적 파장 탓에 시대적 흐름에 쏟아야 할 지적, 정치적 관심이 약화된 감이 없지 않다. 새로운 시대는 내부의 헌정수호나 ‘내란척결’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복합적 위기와 갈등에 대처할 혁신적인 역량구축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남북관계도 2018년과의 연속성에만 집착하거나 고정된 민족론, 주체론, 감정론에 경도되지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유연하고도 열려있는 패러다임으로 과거회귀형 사고, 정파적 포퓰리즘, 무익한 이념논쟁을 극복해야 한다. 북한의 담화는 ‘지피지기’의 역량과 시대감각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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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의 시간”

7월 28일 북한 노동당 김여정 부부장이 “조한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제목의 담화를 발표했다. 남북관계 개선을 주요한 정책의 하나로 내세운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의 첫 공식반응인 셈이다. 거친 언사나 비방보다는 비교적 정제된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내용은 매우 단호하고 냉정하다. 진보정부 출현이 남북관계에 미칠 단기적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란 예감을 갖게 한다.

담화는 최근 한국에서 논의되는 여러 “성의있는 노력”을 평가할만한 일이 못된다고 일축했다. 마땅히 취해야 할 당연한 조치일 뿐 북한이 호응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한국 정부가 어떤 정책을 내세우든 관심이 없고 대화할 필요도 없다고 단언했다. 김여정은 “《민주》를 표방하든《보수》의 탈을 썼든 한국은 절대로 화해와 협력의 대상으로 될수 없다는 대단히 중대한 력사적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2018년 평양회동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런 판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담화는 제목에서부터 전과 달라진 입장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익숙하던 ‘북남관계’ 대신 조선-한국의 관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더 이상 민족관계가 아닌 국가관계임을 강조하려는 시도다. “동족이라는 수사적표현에 구속되여 매우 피곤하고 불편했던 력사”를 겪었다는 표현 속에는 남북한이 같은 동족이고 한국가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가 북한 당국에게 준 딜렘마와 곤혹스러움을 반영한다. 실제로 이를 “현실모순적인 개념”이라고 지칭하고 민족이나 통일 같은 담론에 부수된 당위성을 걷어냄으로써 남북관계를 적대적 2국가로 규정한 자신들의 틀에 정당성을 보여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동족의 시간대’를 벗어났다는 표현에 담긴 북한 나름의 시대규정이 주목된다. 이 주장은 남북한이 공동의 목표를 갖고 통일을 지향해온 지난 역사를 ‘과거지사’로 돌리면서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미 2023년 말 북한은 남북관계를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두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한 바 있고 이것을 “강령적인 결론이자 중대한 정책적 결단이며 근본적인 방향전환”이라 했다. 이번 담화도 이 점을 재확인한 것인데 “동족이란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주장에 남북한이 합의하거나 논의한 바도 없으니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결국 북한 스스로의 전략적 ‘방향전환’인 셈이다.

동족이나 민족이란 범주가 영구불변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탈냉전 세계화의 시대 이후 ‘민족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주장이 그다지 새롭지도 않다. 남북한이 별개의 주권체로 80년을 지나오면서 공유하는 정체성의 강도나 내용에 큰 변화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21세기 오늘의 세계에서 다민족 국가는 꽤 많고 1민족 2국가 상태도 없는게 아니며 한국 내부에서도 그와 유사한 주장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남북한 관계에서 ‘동족의 시간’이 끝났다는 선언이나 주장은 어느 일방이 정치적으로 선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적대성’을 다시 강화하는 방향으로 주장되는 것은 우려스럽다.

현실적으로 동족관계의 부정은 남북관계를 규율했던 그동안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임을 시사한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규정했고 그 이후 남북교류의 기초가 된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는 더이상 통용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 함의 속에 담겼던 전쟁방지와 신뢰조성, 점진적 교류와 단계적 통일이란 원칙에 대한 전면 부정인 셈이다. “조선반도에 국가 대 국가간관계가 영구고착된 현실”과 “한국에 대한 우리 국가의 대적인식에서는 변화가 있을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지난 30여년 남북관계가 추구했던 교류협력과 신뢰조성에 대한 부인이고 더이상 민족이나 통일같은 명분의 부담을 지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탈냉전 이후 지속적으로 고난의 시기를 보내온 북한으로서는 지금 가장 좋은 지정학적 환경을 맞이했다. 러시아와 정치군사적 협력관계가 일층 강화되고 중국과의 경제적 단절도 개선되고 있다. 트럼프 미 정부의 일방적 미국우선주의가 한미동맹을 비롯한 기존의 안보지형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유엔 대북제재의 효력도 얼마나 강력하게 지속될지 불확실하다. 북한의 핵무력은 점점 기정사실화되고 북미간 핵담판의 가능성조차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조한관계”라는 새로운 용어로 남북관계를 대체한 것은 나름대로 21세기 포스트 탈냉전기의 시대성격을 반영한 것인데 ‘이미 완전히 되돌릴 수 없게’라는 표현 그대로 불가역의 역사진행이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리로선 통일이 헌법적 가치이고 남북한이 동족이라는 사실도 변함없지만 남북한의 실질적 2주권 상태가 지속된지 수십년이 지났다. 교류협력의 시간도 지나왔지만 북한 핵위기와 상호 불신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한반도 외부의 지정학적 상황도 전례없이 달라지는 중이고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천명 그 자체가 엄청난 변화다. 그동안 우리가 믿어온 여러 변수들, 민족적 감정이나 통일의 당위성, 남북교류의 아름다운 추억, 한미동맹의 견고함 등으로만 이 격랑을 해쳐가기는 어렵다. 우리로서 변함없이 견지해가야 할 기본원칙을 재확인하면서 새로운 미래전략을 재구축해야 한다. 달라지는 지정학적 환경에 어떻게 대응할지, 한반도의 평화와 신뢰를 어떻게 확보할지, 그 과정에서 끝내 견지해야 할 우리 나름의 전략적 가치의 우선순위는 무엇일지 혁신적 역량결집이 절실한 시점이다.

activities

白과 墨

흑백의 향연 – 바둑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이야기다. ”새 나라 새 미술“이란 타이틀로 조선의 건국을 예술사적으로 조명하려는 대형전시인데 평소 접하기 어려운 조선 전기의 자기, 서화, 서적, 조상 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국보 5점, 보물 12점을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니!!

조선은 새로이 성장한 신흥 사대부들이 기획한 국가다. 그 설계자라 할 정도전은 유학에 뿌리를 둔 문화국가를 지향했고 이를 위해 인문정신을 중시했다. ”일월성신은 天文이고 산천초목은 地文이며 시서예약은 人文“이라 말한데서 알 수 있듯 지식인의 고아한 품격에 어울리는 이상국가를 세우려 한 것이다. 하늘, 땅, 사람을 두루 아우르는 우주적 감각에 바탕을 두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흔적 (人之文)을 시, 서, 예, 악에서 찾는 발상은 독특하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전시는 흰색에서 시작하여 세가지 색을 키워드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백白의 흰색인데 ”조선의 꿈을 빚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2부는 묵墨의 검은색으로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라는 부제를 붙였다. 3부는 금金의 색인데 ”변치 않는 기도를 담다“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백, 묵, 금의 세 빛깔이 조선초기의 모습임을 보여준다는 의미인데 특히 백자로 대표되는 흰색을 시대적 전환의 상징으로 부각시켰다. 그런데 고려에 더 어울리는 금색이 포함된 것이 다소 의아했다. 이전의 예술이 단절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졌음을 보여주는데는 효과적임이 분명한데 내게는 백과 묵의 검박함으로 금의 화려함을 멀리하려던 사대부 노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처럼 느껴졌다.

백자의 흰빛 — 가까이서 살펴보니 그 빛의 아름다움이 정말 놀랍다. 흰색이라는 표현만으로는 포용하기 어려운 미묘한 색감을 제각기 지니고 있다. 백자는 주자와 매병, 합, 사발을 막론하고 대칭형의 담백한 곡선미를 지닌다. 복잡한 장식이나 화려한 문양이 없기에 더욱 색과 형태에 시선이 집중된다. 길이 14m, 높이 3m의 거대한 벽면에 도자기의 색의 변화에 따라 300여 점을 배치했는데 가장 왼쪽에 분청사기로부터 오른쪽 끝의 순백자에 이르기까지의 긴 세월이 한 벽에 담겼다. 마치 흰색을 향한 순례자들의 여정을 보는 듯 했다.

백자의 공간을 지나면 먹의 공간이다. ’묵-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란 부제처럼 먹은 조선의 정신, 인문적 사유를 반영하는 또하나의 문화다. 수묵으로 표현된 작품들은 물론이고 시서화를 중요한 인격공부로 여긴 선비의 삶 전반에서 먹은 핵심적 역할을 했다. 먹과 붓, 종이와 벼루를 가까운 친구로 삼던 인문정신이 글씨나 그림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저런 담백함으로 화려함과 세속적 욕망을 불식시키려는 꿈을 꾸다니 대단한 인문주의가 아닐 수 없다.

채색이 없는 수묵산수화는 단순소박하다. 안견풍으로 불리는 이 시기 그림에는 인물도 잘 드러나지 않고 자연의 모습도 진경이 아니다. 고려불화의 화려함이나 현대미술의 자유로움에 비해보면 그 정형성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먹은 5색을 담고 있다고 할 정도로 그 빛이 다양하다. 먹의 재료, 물의 농담, 붓놀림의 속도, 선의 굵기와 여백에 따른 구성은 생각보다 섬세하다. 서두르지 않고 현실의 이익을 우선하지 않으면서도 수신에는 누구보다 까다로운 선비다움이 저런 수묵의 정신과 상통한다는 생각을 했다.

도자기의 흰색과 시서화의 묵색은 제각기 어떤 정신을 지향한다. 간간히 이 두 색이 한데 모여있는 작품도 있다. 나는 힘찬 대나무가 그려진 백자 항아리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백과 묵의 놀라운 협연, 향연을 듣는 듯 했고 과거의 고결한 선비를 만난 듯 했다. 담백한 흰색, 단순한 곡선, 소탈한 표면, 날렵한 대나무 줄기와 잎 –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조선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했다. 편리함과 화려함을 좋아하는 현대인으로서 백, 묵의 인문정신은 멀리하고 싶을 수도 있으나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고 필요한 품격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문명사적으로 너무 앞서 나간 자들이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