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29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명의의 대미담화를 발표했다. 전날 대남담화를 발표한 것에 연이은, 일종의 연속 담화다. 두 담화 모두 2025년 오늘의 세계를 바라보는 북한 나름의 시대인식을 잘 보여주지만 대남 메시지와 대미 메시지의 결은 확연히 다르다.
두 담화는 2018년 이후의 변화로 인해 Again 2018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미국에 대해서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되었던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의 프로세스로 돌아갈 수 없다는 북한의 입장표명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서 그 전날 표명했던 이유가 남북관계의 질적 전환에서 찾았던 것에 비해 미국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핵능력 강화와 지정학적 변화를 주요 이유로 들고 있음이 눈에 띤다.
“지난 몇년 간 ….《민주》를 표방하든,《보수》의 탈을 썼든 한국은 절대로 화해와 협력의 대상으로 될수 없다는 대단히 중대한 력사적결론에 도달할수 있었으며 동족이라는 수사적표현에 구속되여 매우 피곤하고 불편했던 력사와 결별하고 현실모순적인 기성개념까지 말끔히 털어버릴수 있었다.”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은 지난 몇 년을 ‘동족이란 수사적 표현에 구속되어 매우 피곤하고 불편했던’ 때라고 했다. 피곤함과 불편함이란 단어 속에는 남북교류의 확대를 대놓고 반대할수 없으나 내심 원치 않았던 곤혹스러움이 담겨있다. 이제 그 현실모순적인 상황과 “결별”하고 “개념까지 말끔히 털어버렸다”는 말에 당위론의 부담을 벗어던진 후련함마저 읽혀진다.
대미 담화에서는 바이든 정부 시절의 격한 비방성 담화에 비해 향후 관계개선의 기대를 포함한 계산된 표현들이 담겨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개인적 관계가 좋다는 것, 새로운 접촉방안을 모색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숨기지 않는다. 다만 북한의 비핵화실현, 핵보유국지위 부정을 목표로 하는 그 어떤 시도도 철저히 배격될 것이라 단언한다. 싱가포르 합의와는 다르게 핵을 가진 국가대 국가로서의 대화를 압박하기 위해 2018년과의 차이를 극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계엄과 탄핵의 대혼란을 격던 상반기에 잠잠하다가 이 시점에서 ‘공식립장’의 담화를 발표한 것은 새 정부 출범 이후의 전략적 기조가 정해졌음을 시사한다. 그 기조는 신형 통미봉남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취한 “성의있는 조치”들도 평가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일축하고 한국과의 대화나 교류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대신 미국과는 핵보유국 지위를 유지하는 조건 하에서의 대화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2018년과는 달라야 한다는 같은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한국과 미국을 분리하고 서로 다른 방향의 전략을 구사하는 기본방향을 예상할 수 있다.
2025년의 시간은 확실히 이전과 다르다.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 이후의 서방진영의 혼선과 갈등, 유엔중심 다자주의 규범의 약화로 흔히 규범기반 자유주의 국제질서라 불리던 세계질서가 근본적으로 동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지속과 전지구적 군비강화 추세, 북러의 정치군사적 밀착은 안보와 평화, 신뢰와 협력의 기본틀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강화와 한미동맹의 동요가능성은 전례없는 충격파가 될 수 있다. 지정학적 환경변화와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이 맞물려 비핵화가 빠진 북미간 협상도 배제하기 어렵다. 21세기 한반도 현대사는 2025년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수도 있을 정도다.
우리는 오늘의 이 변화를 얼마나 진지하게 파악하고 있을까? 계엄과 탄핵이 몰고온 국내정치적 파장 탓에 시대적 흐름에 쏟아야 할 지적, 정치적 관심이 약화된 감이 없지 않다. 새로운 시대는 내부의 헌정수호나 ‘내란척결’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복합적 위기와 갈등에 대처할 혁신적인 역량구축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남북관계도 2018년과의 연속성에만 집착하거나 고정된 민족론, 주체론, 감정론에 경도되지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유연하고도 열려있는 패러다임으로 과거회귀형 사고, 정파적 포퓰리즘, 무익한 이념논쟁을 극복해야 한다. 북한의 담화는 ‘지피지기’의 역량과 시대감각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