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 북한 노동당 김여정 부부장이 “조한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제목의 담화를 발표했다. 남북관계 개선을 주요한 정책의 하나로 내세운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의 첫 공식반응인 셈이다. 거친 언사나 비방보다는 비교적 정제된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내용은 매우 단호하고 냉정하다. 진보정부 출현이 남북관계에 미칠 단기적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란 예감을 갖게 한다.
담화는 최근 한국에서 논의되는 여러 “성의있는 노력”을 평가할만한 일이 못된다고 일축했다. 마땅히 취해야 할 당연한 조치일 뿐 북한이 호응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한국 정부가 어떤 정책을 내세우든 관심이 없고 대화할 필요도 없다고 단언했다. 김여정은 “《민주》를 표방하든《보수》의 탈을 썼든 한국은 절대로 화해와 협력의 대상으로 될수 없다는 대단히 중대한 력사적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2018년 평양회동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런 판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담화는 제목에서부터 전과 달라진 입장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익숙하던 ‘북남관계’ 대신 조선-한국의 관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더 이상 민족관계가 아닌 국가관계임을 강조하려는 시도다. “동족이라는 수사적표현에 구속되여 매우 피곤하고 불편했던 력사”를 겪었다는 표현 속에는 남북한이 같은 동족이고 한국가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가 북한 당국에게 준 딜렘마와 곤혹스러움을 반영한다. 실제로 이를 “현실모순적인 개념”이라고 지칭하고 민족이나 통일 같은 담론에 부수된 당위성을 걷어냄으로써 남북관계를 적대적 2국가로 규정한 자신들의 틀에 정당성을 보여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동족의 시간대’를 벗어났다는 표현에 담긴 북한 나름의 시대규정이 주목된다. 이 주장은 남북한이 공동의 목표를 갖고 통일을 지향해온 지난 역사를 ‘과거지사’로 돌리면서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미 2023년 말 북한은 남북관계를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두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한 바 있고 이것을 “강령적인 결론이자 중대한 정책적 결단이며 근본적인 방향전환”이라 했다. 이번 담화도 이 점을 재확인한 것인데 “동족이란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주장에 남북한이 합의하거나 논의한 바도 없으니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결국 북한 스스로의 전략적 ‘방향전환’인 셈이다.
동족이나 민족이란 범주가 영구불변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탈냉전 세계화의 시대 이후 ‘민족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주장이 그다지 새롭지도 않다. 남북한이 별개의 주권체로 80년을 지나오면서 공유하는 정체성의 강도나 내용에 큰 변화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21세기 오늘의 세계에서 다민족 국가는 꽤 많고 1민족 2국가 상태도 없는게 아니며 한국 내부에서도 그와 유사한 주장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남북한 관계에서 ‘동족의 시간’이 끝났다는 선언이나 주장은 어느 일방이 정치적으로 선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적대성’을 다시 강화하는 방향으로 주장되는 것은 우려스럽다.
현실적으로 동족관계의 부정은 남북관계를 규율했던 그동안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임을 시사한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규정했고 그 이후 남북교류의 기초가 된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는 더이상 통용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 함의 속에 담겼던 전쟁방지와 신뢰조성, 점진적 교류와 단계적 통일이란 원칙에 대한 전면 부정인 셈이다. “조선반도에 국가 대 국가간관계가 영구고착된 현실”과 “한국에 대한 우리 국가의 대적인식에서는 변화가 있을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지난 30여년 남북관계가 추구했던 교류협력과 신뢰조성에 대한 부인이고 더이상 민족이나 통일같은 명분의 부담을 지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탈냉전 이후 지속적으로 고난의 시기를 보내온 북한으로서는 지금 가장 좋은 지정학적 환경을 맞이했다. 러시아와 정치군사적 협력관계가 일층 강화되고 중국과의 경제적 단절도 개선되고 있다. 트럼프 미 정부의 일방적 미국우선주의가 한미동맹을 비롯한 기존의 안보지형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유엔 대북제재의 효력도 얼마나 강력하게 지속될지 불확실하다. 북한의 핵무력은 점점 기정사실화되고 북미간 핵담판의 가능성조차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조한관계”라는 새로운 용어로 남북관계를 대체한 것은 나름대로 21세기 포스트 탈냉전기의 시대성격을 반영한 것인데 ‘이미 완전히 되돌릴 수 없게’라는 표현 그대로 불가역의 역사진행이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리로선 통일이 헌법적 가치이고 남북한이 동족이라는 사실도 변함없지만 남북한의 실질적 2주권 상태가 지속된지 수십년이 지났다. 교류협력의 시간도 지나왔지만 북한 핵위기와 상호 불신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한반도 외부의 지정학적 상황도 전례없이 달라지는 중이고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천명 그 자체가 엄청난 변화다. 그동안 우리가 믿어온 여러 변수들, 민족적 감정이나 통일의 당위성, 남북교류의 아름다운 추억, 한미동맹의 견고함 등으로만 이 격랑을 해쳐가기는 어렵다. 우리로서 변함없이 견지해가야 할 기본원칙을 재확인하면서 새로운 미래전략을 재구축해야 한다. 달라지는 지정학적 환경에 어떻게 대응할지, 한반도의 평화와 신뢰를 어떻게 확보할지, 그 과정에서 끝내 견지해야 할 우리 나름의 전략적 가치의 우선순위는 무엇일지 혁신적 역량결집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