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북한이 “서울의 희망은 어리석은 꿈에 불과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최근 한국 언론에 일부 언급된 대남 확성기 철거사실을 부인하면서 “철거할 의향도 없고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의지도 전혀 없다”고 확언했다. 지난 7월 28일에 발표한 “조한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제목의 담화와 그 내용의 기조는 동일하다. 두 담화 모두 비교적 정제된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내용은 매우 단호하고 냉정하다.
이번 담화에서 “미국의 충성스러운 하수인이고 충실한 동맹국인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입장이 “헌법에 고착될 것”이라 밝힌 것이 눈에 띤다. “우리의 국법에는 마땅히 대한민국이 그 정체성에 있어서 가장 적대적인 위협세력으로 표현되고 영구고착되여야 할것”이라고도 했다. 향후 북한이 헌법이나 법률조항을 통해 적대적 2국가론을 명료하게 규정할 것임을 예상케 한다.
이런 기조는 2023년 말 남북관계를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두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북한은 이것을 “강령적인 결론이자 중대한 정책적 결단이며 근본적인 방향전환”이라 했다. 북한의 일방적 선언이었지만 그 주장이 가져올 파장은 심히 크고 우려스럽다. 수십년간 남북이 공유해온 기본원칙, 즉 한반도에서의 전쟁방지와 신뢰조성, 점진적 교류와 단계적 통일이란 방향에 대한 전면부정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보면 ‘두 국가론’은 새로운 시대변화를 반영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남북한이 별개의 주권체로 80년을 지나왔고 유엔에 별도 의석으로 가입한 후에는 실질적인 두 국가상태가 공인되었다. 실향민이나 이산가족의 비중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통일에 대한 관심이 한국 내부에서도 크게 줄어들었다. 민족이나 동족감정 역시 크게 약화된 것이 현실이다. 한국판 두국가론이나 통일포기론을 접하는 것도 드물지 않은 것이 오늘이다.
문제는 두 국가론이 ‘적대성’으로 이어져야 할 필연성이 있는가다. “조선반도에 국가 대 국가간관계가 영구고착된 현실”과 “한국에 대한 우리 국가의 대적인식에서는 변화가 있을수 없다”는 두 주장이 반드시 연계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번 담화에서는 한국헌법의 통일지향, 한미합동군사훈련, 그리고 비핵화 전략 등을 그 이유로 내걸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 시점에서 ‘적대성’을 증명할 근거가 되기도 어렵다.
2023년의 근본적 방향전환은 최근 변화된 지정학적 환경과 핵무력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한이 선택한 전략적 판단에 기인한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아마도 가장 좋은 지정학적 환경을 맞이했다는 북한의 평가와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러시아와 정치군사적 협력관계가 일층 강화되고 중국과의 협력전망도 나쁘지 않다. 트럼프 미 정부의 일방적 미국우선주의가 한미동맹의 미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효력도 전같지 않다. 트럼프와의 정상간 좋은 사이로 인해 북미간 핵담판의 가능성조차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북한 나름대로 21세기 포스트 탈냉전기의 시대규정에 따른 전략적 변화를 반영한 것인데 ‘이미 완전히 되돌릴 수 없게’라는 표현 그대로 불가역의 역사진행이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통일을 주요 목표로 규정한 헌법적 가치와 같은 민족이라는 오랜 정체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남북한의 실질적 2주권 상태가 불가역의 상태로 수십년을 지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교류협력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낭만적 기대감도 약해졌고 북한 핵위협에 따른 불신도는 더 커졌는데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은 엄청난 환경 변화이자 도전적 과제다. 그동안 우리가 믿어온 여러 변수들, 민족적 감정이나 통일의 당위성, 남북교류의 아름다운 추억, 한미동맹의 견고함 등으로만 이 격랑을 해쳐가기는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달라지는 지정학적 환경에 어떻게 대응할지, 한반도의 평화와 신뢰를 어떻게 확보할지, 끝내 견지해야 할 우리 나름의 전략적 가치는 무엇일지 혁신적 사고와 역량결집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