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사회학’ 강좌를 개설한 지 다섯 해가 되었다. 강좌가 개설된 학기에는 예외없이 학생들의 관심이 높았다. 매번 수강신청이 조기마감되고 추가신청자의 요구를 거절하느라 힘이 들었다. 이 과목이 자신의 삶, 미래설계와 직결되는 내용이리라는 기대가 관심을 끈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전에 없던 새 과목을 개설한 이유가 학생들의 고민에 부응하는 강의를 하려는 의도였으니 그런 반응은 반갑고 고마운 것이다.
매년 강의 내용을 업데이트하고 또 학생들이 쓴 보고서를 읽으면서 원래의 시각이 조정되기도 하고 새로운 쟁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이 과목이 유용하고 필요하다는 애초의 생각이 좀더 강한 확신으로 자리잡는 것을 느낀다. 다만, 꿈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이나 이론화 작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국내외를 통털어 이 강좌명으로 개설된 것이 거의 유일한 탓에 강의내용 구성에 힘이 꽤 많이 든다. 자칫 내 편견이나 생각이 수업내용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따르는 심리적 부담감도 크다.
사실 꿈이란 단어는 매력적이지만 정작 그것을 직면하고 분석하려들면 애매하고 부담스럽다. 꿈을 가지라는 조언은 상대방을 격려하는 말로 편하게 쓰이기도 하지만 맥락과 형편에 따라서는 자제하거나 피해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너도 큰 꿈을 키워라’는 말은 상대방을 믿어주는 호의의 표시일 수 있지만 자칫 성공을 향한 집념을 요구하는 강요가 될 수 있다. ‘너는 꿈도 없냐?’라든지 ‘그래서야 뭐가 되겠니?’라는 압박감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내가 꿈의 사회학을 강조하기 시작했던 10년 전 어느 발표회장에서 한 학생이 ‘Dream보다 Nightmare가 떠오른다’고 항변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꿈자본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내가 느끼는 딜렘마도 이와 연관된다. 애초 꿈자본이란 개념화를 시도한 김홍중 교수는 너무 생존과 경쟁에 허덕이는 청년층에게 새로운 방향과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음을 강조하려 했다. 꿈이 일종의 자산이자 자본일 수 있다는 말은 경제적 보상이 따르지 않아도 젊음과 열정 그 자체를 사랑하라는 격려성 의도가 강했다. 하지만 자본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순간, 그것은 많고 적음을 전제하는 정량적 속성을 수반한다. 꿈자본을 측정하고 객관화하면 할수록 그 자본의 크기에 따라 우열을 나누고 평가하는 경향도 함께 커진다.
분명히 꿈자본도 인적 자본 (human capital)의 하나이고 포괄적으로는 사회적 자본의 일부다. 그것이 자본인 한 크고 많은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실제로 학생들에게 꿈자본을 키우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록 현재 가진 것은 없고 당장 실현되기 어려운 미래일지라도 그것을 꿈꾸고 희구할 수 있는 것이 젊은이의 특권이 아니냐고 강조한다. 안팎의 상황이 어렵더라도 너무 위축되거나 기죽지 말라는 뜻이지만, 실제 학생들에게 가닿는 의미와 효과가 과연 그러할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자기의 꿈자본이 약하다고 자책하는 보고서도 없지 않다.
김석호 주윤정 교수팀이 꿈자본을 측정하고 유형화한 것은 이 분야의 선구적 시도로 그 의의가 크다. 다만 선구적인만큼 시론적인 차원에 머물러 여러가지 보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나로서는 꿈의 경로와 방식이라는 심리적 차원에 주목함으로써 꿈의 지향성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꿈은 개인이 꾸는 것이고 그 강도도 심리적인 속성이 강하지만 그 지향과 방향은 그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역사에서나 사회에서 강조되는 다양한 꿈, 그에 따르는 꿈자본의 다차원성이 좀더 부각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꿈의 사회학적 속성을 주목하는 내 입장에서는 꿈의 내용이 공동체 차원을 지향하는 것과 개인적 차원을 중시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유형화의 한 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신문화적 가치와 정치경제적 효용의 어느 부분을 강조하는가가 또 다른 한 축이 될 수 있다. 이 두 축으로 유형화를 하면 김석호 교수와는 다른 또다른 범주구분이 가능해진다. 그 유형은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1유형 – 공동체 차원을 중시하고 정치경제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꿈자본 / 2유형 – 공동체 차원을 중시하되 정신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는 꿈자본 / 3유형 – 개인 차원을 중시하고 정신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는 꿈자본 / 4유형 – 개인 차원을 중시하고 정치경제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꿈자본. 이를 그림으로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유형화는 지나치게 1유형의 꿈자본이 강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비판을 담고 있다. 우리 시대는 정치경제적으로 영향력이 크고 국가나 기업, 사회 전반을 염려하는 위인, 영웅, 큰 인물에 대한 선호가 강하다. 꿈을 키우라는 말이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연봉, 더 강한 권력을 향유하려는 성취지향성과 같이 이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결과는 끝없는 경쟁이고 비교이며 결과적으로 다수의 좌절감과 열패감이 커지는 것이다.
이에 대척점에 있는 것이 3유형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 전반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으면서 개인의 내면적 가치나 의미를 추구하는데 열심인 경우다. 사회적 관계에 서투르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유형이다. 일반적으로는 원대한 꿈이 없고 경쟁을 회피하는 소극적 인간으로 평가받기 쉽다. 하지만 많은 창의적 인간, 예술적 창조가 이런 덕후형 인간에게서 나타났음을 경시해서는 안되고 이 유형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 꿈이 지나치게 공동체 차원에서 고려되는 것은 문제다. 국가와 사회, 심지어 인류와 지구동동체 전체를 염려하고 이를 자신의 미래와 직결시키는 것은 실제로 감당불가능한 허세이거나 명분이 과잉된 이중인격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그렇다고 꿈이 개인적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을 전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환영할 수만은 없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적 세계, 개인적 차원의 행복만 추구한다면 그 공동체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웃과 공동체, 사회전체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꿈으로 내면화할 수 있어야 한다.
꿈자본도 사회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어느 정도 유형적 균형이 필요하다. 꿈자본의 사회적 포트폴리오라 할 수도 있겠다. 좋은 사회란 다양한 유형이 적절한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고 모든 구성원이 자기에게 맞는 꿈을 추구할 수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꿈의 사회학적 논의, 꿈자본의 유형화가 힘든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꿈의 지향성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내적인 자신감과 회복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