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 여행

하바드옌칭연구소

하바드 옌칭연구소는 내 삶의 여정에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Visiting Fellow 로 1년 반을 지냈던 1989-1990년, 이곳에서 조선과 일본의 근대국가형성을 비교한 박사논문을 마무리했고 아들 종인이도 여기서 태어났다. 이 시기는 탈냉전과 천안문 사건, 베를린 장벽붕괴와 독일통일 등 굵직한 사건들이 줄을 잇던 때였고 민족사에 갇혀있던 내가 세계사의 감각에 눈을 뜬 곳도 이곳이었다. 둘째 윤영이가 하버드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케임브리지에 정착하게 된 것, 2019년 다시 이곳을 방문해서 마지막 연구학기를 보내게 된 것, 하버드옌칭한국학회의 회장을 맡게 된 것 등도 내 삶의 여정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것들이다. 내 삶의 종반전에는 어떤 오아시스를 만날 것인가 …  

시공간 여행

뫼들라로이트

베를린 대학 석좌교수인 박성조 교수의 안내로 통일독일의 현장을 둘러보던 여행길에 들린  마을. 이 작은 마을은 분단으로 동네 한 가운데에 장벽이 생기고 감시탑이 높이 세워져 작은 베를린이라고 불린 곳이다. 지금은 그 장벽의 일부와 철조망, 감시탑 등이 모두 관광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 터무니없던 역사는 기록관에서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었다. 장벽이 서 있던 곳에 작업용 포크레인이 그려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construction 은 물리적 건설을 뜻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 새로운 관계, 새로운 기억의 구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런 문화적 포크레인이 한반도의 휴전선 지대에 세워질 날은 언제일까…

시공간 여행

알함브라 궁전

기타연주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감미로운 선율로 일찍이 친숙해진 노래다. 하지만 정작 알함브라 궁전을 가보고 싶은 마음은 크지 않았다. 그럴 기회가 내게 올 리 없으리라는 지레 짐작이 이유였을지 모른다. 스페인의 중부도시 그라나다에서 회의가 있는 절호의 기회, 한 여행단에 섞여 안달루시아 지방을 둘러보았다. 이슬람 문명의 아름다움과 건축미가 온축되어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섬세한 배치, 선, 대칭, 구도에 놀랐던 감동이 새롭다. 기독교 국가의 문화 속에 이슬람 문명의 예술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모습은 21세기 인류가 본받아야 할 어떤 방향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날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내 마음 속에 선율없는 노래로 남아있다.   

시공간 여행

효경언해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오랜 문집들을 정리하다 발견한 책. 효경을 번역하여 부녀자들의 교육용으로 사용한 언해본으로 16세기에 처음 간행되었다. 이 판본을 사진으로 본 한 전문가의 견해로는 17세기에 제작된 목판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경상도의 궁벽진 지역에까지 이런 언해본이 퍼져서 활용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이 목판본의 한글체가 매우 아름답고 정갈해서 더욱 관심이 간다. 

시공간 여행

명사산의 선

어릴 적부터 사막을 가보고 싶었다. 고운 모래만 한없이 펼쳐진 땅, 바람이 만들고 부수는 기이한 선, 그 속에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낙타행렬 등이 마음 속 사막의 이미지였다. 쓸모없는 땅을 뜻하는 황무지와는 달리 사막은 신비감과 장엄함의 아우라를 지닌, 살아있는 공간이다.  청마 유치환의 ‘그곳은 熱沙의 끝’ 이란 시구를 접했을 때 장엄한 불모성을 떠올렸던 것도 그런 감각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돈황을 가면서 들렀던 명사산은 글자 그대로 모래가 만든 산인데 그 아름다운 선은 바람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내 삶이 특별한 소출을 남기지 못해도 황무지의 삭막함이 아닌, 사막의 신비함으로 장엄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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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등정

2008년 겨울 금강산을 찾던 날 폭설이 내렸다. 등산이 불가능할까 염려했지만 이튿날은 활짝 개여 중턱까지의 산행에 지장이 없었다. 고려시대 이래 문인들이 일생 한번은 가보고자 했던 곳이다. 최남선, 이광수 등 이곳에서 명문을 남긴 이들이 적지 않다. 눈덮인 금강산은 과연  명승지요 절경이었다. 겨울 금강산을 일컫는 개골산이란 이름처럼 기암괴석과 흰 눈의 대비가 현란하게 아름다웠다. 그 중간 중간 솟아있는 금강송의 자태는 금상첨화라 할까. 중턱에서 잠시 쉬면서 찍은 한 컷. 지금 되돌아보니 실감이 나질 않는다. 이 느낌이 현실로 되살아날 때는 언제 다시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