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 인생에서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는 경구다. 성경은 ‘입에 재갈을 물리라’는 표현으로 말의 무게를 강조했고 유학자들은 ‘신언서판’이란 표현으로 말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미드를 비롯한 사회학자들은 자아정체성을 구성하고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근본요소가 언어라고 주장했다. 유럽의 학계에서는 문명과 지식 자체가 ‘언어’라는 상징에 근거한다고 보는 ‘언어학적 전회’가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개념사는 이런 관점을 수용한 역사연구의 한 흐름이다. 담론 discourse 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와 기본개념 basic concept 에 주목하는 독일의 접근법이 다소 다르지만, 개념과 언어가 지닌 복합적인 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즉 언어, 개념, 담론 등으로 표상되는 인간 고유의 상징화 능력이 미시적인 생활세계를 지탱하게 할 뿐 아니라 정치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죽음 이후를 상상하는 능력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시각에 공감하여 십수년 국내외의 학자들과 개념사 연구에 힘을 보탰고 [국민, 인민, 시민]이란 저작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사회정치적 담론을 구성하는 이런 어휘들을 코젤렉은 역사적 기본개념이라 불렀다. 이런 개념은 역사변동의 방향성,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필수요소가 되어 강력한 문화적 힘을 행사한다. 지금도 자기정당화 논리나 상대방에 대한 공격무기로 이곳 저곳에서 끝없이 논의되는 어휘들이다. 소통의 도구였던 말이 내편과 네편을 가르는 근거가 되기도 하고 대중의 이목을 끄는 선전 카피로 변질되기도 한다. ‘입을 조심하라’는 잠언의 가르침이나 ‘도는 말로 할 수 없다’던 노자의 경구가 무색하게 각종 담화 생산자들, 유투버들, 달변가들이 인기를 끌고 그 틈새에서 선동가, 언어유희자, 가짜뉴스 발신자도 자라난다. 그만큼 새로운 소통과 대화, 말의 기능을 회복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비언어적인 감성과 표정, 이미지와 몸의 제스쳐 등이 더욱 강조되고 문학의 시대가 영화와 음악의 시대로, 문자의 감각이 영상의 공감으로 이행하는 시대다. 당연히 언어와 영상, 문학과 예술이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찾아나서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이적은 그런 점에서 매우 강력한 소통력을 소유한 이 시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다. 그는 대중의 광범한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가수이면서 멋진 노랫말의 작사자로서 문자적 공감능력도 탁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에 대한 대중의 높은 사랑은 가창력과 노랫말, 대화능력의 멋진 조합이 주는 매력으로 상당부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적이 [이적의 단어들]이란 제목을 단 단행본 책을 출간했다. 일상의 단어 속에 담긴 경험들과 애환들을 되살리고 때로는 정형화된 의미를 비틀고 뒤집어 딱딱해진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우치려는 책이다. 영화관, 리셋, 라면, 가르마, 라이터, AI, 물수제비 등의 단어들을 저자와 함께 다시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조용히 미소짓게 되는 경험은 즐겁다. 이 책의 표지에는 [천부적 이야기꾼 이적의 첫 산문집]이라는 띠지가 붙어있는데, 나는 산문집이라기 보다 잠언이라 해도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활발한 저술과 강연을 통해 세계적 대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문명사가 유발 하리리는 현생인류가 지구의 우세종으로 진화한 힘의 원천을 ‘이야기 능력’ story telling 에서 찾았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꾼’이란 문명의 기획자이고 그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사람들은 문명의 수행자인 셈이다. 모든 사람들이 무심코 사용하는 일상의 대화, 글쓰기, 말하기 속에는 인류의 오랜 진화과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말배움 속에 담긴 신비로운 도약과 상상의 능력을 점점 상실했지만 말 속엔 문명의 DNA가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 지금도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기상천외한 질문과 말 속에서 그 DNA를 발견하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저쟈의 상상력 역시 상당부분 어린 아이의 시선, 어릴적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럽고 흥미롭다. 할머니의 말에서 인생이 ‘닷새’라고 정리하는 참신한 발상이나 (인생 2), 어른의 말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깨어진 아이의 아픔과 당혹스러움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첫 아이의 중독송에서 이끌어낸 상상력 (렛잇고) 등 그 예는 적지 않다 . “한번 홀딱 젖고 나면/ 더 젖을 수는 없다/ 그때부터 자유” (자유)라는 깨달음 역사 빗속에서 숨바꼭질하던 아이의 감각과 일맥상통한다. 만물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무엇이나 배우는 아이의 감수성, 적당한 게으름과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아이다운 처신이 소중해지는 시대에 더욱 와닿는 책이다. 이적이 사인과 함께 책의 첫 장에 자필로 써준 “존경하고 사랑하는 박명규 교수님께”라는 글귀를, 인사의 표현인줄 알면서도 짐짓 아이처럼 믿고 행복해 하는 것도 그래서 용인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