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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온 100세 시대

장인어른께서 올해 100세가 되셨다. 물론 전통적으로 세는 우리 나이여서 만으로 치자면 조금 더 있어야 하지만, 오히려 100세 느낌은 지금 더 나는 것 같다. 신문 지상에서 또는 남의 이야기로 간간히 100세란 말을 듣곤 했지만 가까운 집안 어른이 100세를 맞이하니 그 실감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마침 5월 초에 부산에 일정이 생겼는데 어버이날도 앞둔 시기라 장인 어른을 모시고 식사를 함께 했다. 모시고 나온 손윗 처남이 70을 훌쩍 넘기셨으니 두 분을 부자지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장인 어른께서는 기억력이 많이 퇴색되었을 뿐 여전히 꼿꼿하시고 스스로 걸으실 뿐 아니라 식사도 혼자 큰 어려움 없이 하셨다. 간간히 약간의 농담 섞인 대화에도 큰 어려움 없이 대꾸하실 정도로 객관적 연세에 비해 정정하셨다.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는 7순 아들의 효성이 그 일차적인 힘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 더하여 노인학교를 오갈 수 있는 여건, 이런 노인들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복지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는 덕분임도 분명하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이런 노인복지에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남의 나라 부러워한지 엊그제 같은데 이제 한국이 그런 부러움을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다만 이런 현상을 보노라면 세계최고의 저출산율을 보이는 또다른 한 측면을 떠올리게 된다.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감당해갈 수 있을까? 노인복지와 저출산율의 두 이미지가 빚어내는 어긋난 영상이 앞날에 대한 우리 생각을 어지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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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암동인과 節友

2024년도 1학기 개강을 했다. 서울대 정년 후 광주과학기술원에 부임한지 7번째 학기를 맞는 것이다. 봄같은 날씨 탓인지 학생들이 교내 곳곳에서 밝은 얼굴로 대화하고 오가는 모습이 유난히 정겹고 신선하다. 작년만해도 부분적으로 남아있던 코로나의 위축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난 실감이 든다.

교정을 걷다가 매화가 핀 것을 발견하고 3년전의 일을 떠올렸다. ‘이문회우’ 서예전을 개최한 후 제자들과 온라인으로 기념 모임을 했는데 이를 ‘매암동인’이라 불렀다. 매화가 피는 계절인 점도 고려했지만 그보다는 퇴계가 매화나무 아래 바위에서 그 후학들과 학문을 논의하던 정경을 기린 것이었다. 조선시대와 한학에 조예가 깊은 백광렬 박사의 제안을 따른 것인데 지금 들어도 멋스럽다. 퇴계는 매화를 좋아해서 ‘매형’이라 부르기도 했고 매화를 소재로 한 시가 백여수에 이르며 [매화시첩]이란 시집도 간행했다. 두향이라는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매화를 매개로 전해지기도 하며, 임종때 ‘매화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전한다. 그의 시에는 자연과 더불어 담담히 생활하는 선비의 자세가 여실하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속 집 창가에 기대서니 밤기운이 차가운데 / 梅梢月上正團團 매화 가지 끝에 둥그런 달이 두둥실 떠 있네 / 不須更喚微風至 새삼 살랑살랑 부는 미풍을 부를 새도 없이 / 自有淸香滿院間 온 집 안에 맑은 향기가 저절로 가득 넘쳐난다 /

步屧中庭月趁人 뜨락 거니노라니 달이 날 따라와서/ 梅邊行繞幾回巡 매화꽃 언저리 돌고 또 돌았다네/ 夜深坐久渾忘起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설 줄 몰랐더니/香滿衣布影滿身 향기는 옷에 가득하고 꽃 그림자는 몸에 가득하네 (陶山月夜詠梅)

퇴계의 매화사랑은 단지 음풍농월의 관조에 그친 것은 아니다. 퇴계는 매화가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의지를 특별히 강조 했다. 도연명이 난, 국, 죽만 노래한 것을 아쉬워하며 매화를 포함시켜 ‘절개있는 친구들’이라 불렀다. 松菊陶園與竹三 (도원엔 솔과 국화 대나무 더불어 셋이러니)/ 梅兄胡奈不同參 (매화는 어찌하여 함께 참여치 못했을까) / 我今倂作風霜契 (나 이제 모두 함께 풍상계를 만드니) 苦節淸芬儘飽諳 / (굳은 절개와 맑은 향기를 족히 알기 때문) — 그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사군자를 심은 화단을 조성하고 이를 節友社라 이름했는데 일종의 시적 의인화라 하겠지만 실제로 매화를 닮은 제자들에 대한 마음도 담겨 있었을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매화가 피니 [매암동인] 제자들이 생각난다. 다들 잘 지내며 새 봄을 맞아 그 향기가 옷과 정원에 그득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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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과 삼봉

큰 딸 내외, 아들, 손주 들과 단양 여행을 했다. 아시아나 마일리지 소멸분을 이용해서 편하게 가 볼 곳으로 이곳을 선택한 것이 한 달여 전이다. 단양은 이름만 들었지 실제로 가볼 기회가 없었다는 아이들은 좋아했다. 세종에서 단양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는데 어차피 손주들 중심의 여행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오가는 길의 풍광이나 문화적 요소는 큰 변수가 되지 않는다. 편안한 잠자리, 즐겁게 놀만한 시설과 공간, 맛있는 음식과 여행의 즐거움이 가장 중요한 것, 두루 괜찮은 가족여행이었다.

단양팔경이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지질학적으로 독특한 기암괴석이 산과 강과 어우러져 소금강이라 할만한 명승지가 여러 곳이라는 학창 시절의 교육 탓이다. 어릴적에 들었던 이런 내용은 대체로 현지에서는 실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솔직히 이번에도 실제 모습이 명성에 미치지 못한 느낌이 강했다. 지구 곳곳의 기이한 풍경과 관광지를 가보거나 영상으로 접하는 경우가 많은 현대인이 이동이 제한된 과거의 평가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오래전 역사지식과 여행객의 들뜬 정서를 잘 섞으면 명승지에 온 기분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상력이 쉽지 않은 아이들이나 일반인에게는 과거의 명성보다 맛집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도담삼봉의 모습은 아름다왔다. 차들이 달리는 큰 길과 바로 옆의 주차장, 그리고 멀리 보이는 아파트를 제외하고 보면 가히 명승지라 이름할만하다. 강 가운데 솟은 세 봉우리가 지는 해를 등지고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뒤섞여 한폭의 동양화를 선사한다. 조선왕조 창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으로 한 것이 이곳과 관계가 있다는 말도 전한다. 고려말 권신들을 비판하다가 유배와 유랑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때 제천 지방에도 잠시 머물렀다는 것이 근거인 모양이다. 하지만 삼봉이란 지명이 곳곳에 있는 데다가 정도전이 삼봉재라는 집을 지은 곳이 삼각산이었음을 고려하면 이곳보다 삼각산과 더 깊은 연관이 있을 개연성이 훨씬 높다. 불교에 기반한 고려체제를 혁신하고 신유학에 기초한 새 왕조 창건을 꿈꾸고 추진했던 혁명가 정도전을 생각하기에 도담 삼봉의 규모는 너무 작고 기세도 완만해 보였다.

삼봉 정도전은 한국사에서 접하는 몇 안되는 혁명적 사상가였다. 아니 사상적 혁명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권신배와는 전혀 달라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려 하지 않은 담대함이 있었고 당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 혁신적 인물이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쌓은 여러 조치들, 전제개혁, 사병철폐, 조선경국전, 한양천도, 숭유억불 등은 모두 정도전의 작품인데 어느 하나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정도전은 장량이란 별호를 갖고 있었는데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를 한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빗대었기 때문이라 한다. 정도전은 유방이 장량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하여 새 왕조를 개창했다고 할만큼 자부심이 컸으며 실제로 국왕보다도 재상의 역할을 중시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상상력과 미래비전의 폭과 깊이가 대단하다고 여겨지는데 이런 인물에 대한 우리의 이해수준은 너무 빈약하다.

온달산성 앞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궁궐과 왕성의 세트장에서 지난 역사를 떠올리게 된 것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경험이었다. 여러 사극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이용되었다는 이곳은 온달산성을 배후로 하고 앞으로 강이 흐르는 곳인데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실감 나게 만들어 특히 아이들에게 역사적인 시공간감각을 갖게 하는데 좋아 보였다. 유적지로서의 제약도 거의 없어 관람객이 왕궁의 용상에 올라 앉아 사진을 찍어도 괜찮았다. 쌀쌀한 겨울날,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산성 앞에서 왕실의 생활공간과 백성들의 마을 모습을 보노라니 나도 타임머신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온 느낌이 든다. 몇 년전 와본 최완규 총장의 멋진 별장에서 들렀던 보발재가 멀지 않아 그리로 가볼까 하다가 아이들 생각에 그만두었다. 이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 백제가 서로 다투던 ‘중원’ 지역이라는데 지금은 너무도 한적하고 온달산성조차 평온한 관광지가 되었으니 ‘산천은 의구하다’는 옛말도 언제나 맞는 말은 아닌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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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를 위하여

약 1년 만에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을 다시 들렀다. 비가 오는 겨울 오전이어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공원 입구 기념탑에 새겨진 성인과 순교자들의 명단과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중앙 석판이 눈에 띠어 잠시 묵념을 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벤치에 누워있는 청동 나그네 상을 보았다. 웅크린 채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이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한 이웃, 또는 ‘죽었으나 살아있는’ 어떤 이를 떠올리는 듯 하여 마음이 뭉클하다.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도진순 교수로부터 ‘모든 이를 위하여’ (Love and Peace for All) 라는 제목의 특별전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과 교황청의 수교 60주년을 기념한 기획전은 규모가 크진 않으나 짜임새 있고 새로운 내용을 볼 수 있어 좋았다. 19세기 초 조선신자들이 교황 비오 7세에게 보낸 편지의 실물을 보니 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1831년 교황청이 조선신자의 열망에 따라 조선을 중국 북경교구에서 완전히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한 사실, 그 이후 숱한 순교와 박해의 시기를 넘어야 한 아픔, 기해 병오 박해에서 수난당한 79명이 1925년 복자로 추대된 역사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와 사진이 전시되고 있었다. 조선말기와 일제시대 카톨릭의 사회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분석과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로마로부터 성직자의 파견을 간절히 원하고 목숨을 아까와하지 않으면서 믿음을 지키려던 이 땅의 신자들의 진정성에 의문을 표할 이유는 없다. 이들의 열망과 행동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오늘 우리는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곰곰 생각하게 된다.

‘모든 이를 위하여’는 이번 특별 기획전을 넘어 성지 역사박물관의 기본 컨셉이라 해도 좋을 듯 싶다. 다시 둘러본 지하층 상설전시에는 천주교의 전래와 실학 및 동학의 움직임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역사 속에서 이유없이 고통받고 이름없이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함께 기억하고 위무하는 정신이 자료의 선정과 조각 및 건물 곳곳에서 읽혀진다. 이곳이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된 장소라는 사실에 제대로 부합하는 방식이라 하겠다. 콘솔레이션 홀은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만이 아닌 모든 박해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무하고 포용하는 공간인 셈이다. 값싼 천국의 약속을 독점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카톨릭의 잔잔한 재현방식이 내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해방직후 정부수립 과정에 카톨릭이 관여한 부분은 이번 특별전에서 새롭게 확인한 내용이다. 1947년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소속 페트릭 빈 신부가 사도좌 순지자로 한국에 파견되었던 것, 1948년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 승인을 둘러싼 유엔에서의 각축전에서 교황청의 역할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1948년 8월 15일 11시에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정부수립축하식 순서지를 나는 처음 보았다. 오세창 개회사, 이승만 연설에 이어 미군정의 맥아더와 하지, 유엔한국위원단의 루나, 류유완에 이어 교황청의 빈 신부가 축사자 명단에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교황청의 역할이 실질적이건 상징적이건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국제적 승인을 위해 유엔에 파견된 장면의 제1호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과 유엔총회에서의 바티칸의 관심을 보여주는 문서도 흥미로왔다. 카톨릭 신자였던 장면을 외교장관 장택상의 반대를 무릅쓰고 특사로 파견한 이승만의 외교적 감각도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이전에 무심히 지나쳤던 지하 전시실의 나전칠화도 이번에는 뜻깊게 다가와 오랜 시간 그 앞에서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과 한국순교자 124위의 시복을 기념하기 위해 김경자 작가가 제작한 ‘일어나 비추어라’라는 제목의 거대한 작품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세 부분으로 좁게는 카톨릭 이백년사를 넓게는 한국 근현대사를 그리고 있는데 동양의 예술적 상징과 기독교적 성서관이 아름답게 혼융되어 있다. 십장생도의 미학과 불화의 분위기, 무릉도원에의 꿈도 있고 몽둥이와 칼을 든 사람들,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 예수를 품에 안은 피에타상도 있고 각국의 국기들도 있다. 일견 복잡해 보이는 이 모든 상징물들이 희생과 수난을 거쳐 모든이의 평화를 이루는 미래에의 도정을 드러내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카톨릭의 섬세한 스토리텔링과 고급한 전시역량에 또 한번 고마움을 느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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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과 사사친

덕수궁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 전시를 관람했다. 사사친 번개로 모이는 기회에 함께 고궁을 산책하고 좋은 그림 감상기회도 가지게 된 것이다. 노치준, 김필동, 황경숙, 정근식, 김경일, 박명규 등 여섯이 모여 고궁을 둘러보고 미술관을 관람하고 식사와 커피타임을 가졌는데 학창시절 소풍날의 즐거움을 잠시 느꼈다. 각자 올해 공직을 마감하기도 하고 새로이 손자를 얻기도 했으며 이사를 했거나 자녀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는 등 분주하게 2023년을 보냈지만 이전에는 누리기 어려운 망중한의 여유를 무료관람권으로 누리게 되었으니 복많은 백수세대의 일원이 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장욱진 화백은 1917년 생으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등과 함께 2세대 서양화가이자 1세대 모더니스트로 꼽힌다. 대부분 크지 않은 아담한 사이즈의 유화 730여점, 먹그림 300여점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전시는 총 4개 관으로 나뉘어져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의 작품 상당수가 전시되어 그의 그림 인생을 조감하기에 족했다. 그의 그림에는 까치와 나무와 길, 사람과 집과 태양 같은 단순하면서도 친숙한 일상의 대상이 거의 예외없이 등장한다. 작은 캔버스에 동화적인 분위기로 비슷한 대상과 소재를 자유롭게 담아내는 방식이 거의 전 기간을 관통하고 있다. 수십년 활동해온 화가 중에는 시기별로 화풍이 크게 달라지거나 실험적인 작업에 심취하는 시기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상대적으로 장욱진 화백은 일생 유사한 화풍을 견지하여 ‘일관성’이 특징으로 이야기 될 정도다. 일견 신선함과 다양성이 아쉬운 느낌도 없지 않지만 초기의 동화적인 분위기와 친근한 대상에 대한 애정을 평생동안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새 것 컴플렉스가 유난히 강할 창작예술계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일까 그림 못지 않게 곳곳에 배치된 장욱진 화백의 말과 글에 눈이 갔다. “그림처럼 정확한 나의 분신은 없다. 난 나의 그림에 나를 고백하고 나를 녹여서 넣는다. “/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저항 속에 사는 것 같다. …나는 이 저항이야말로 자기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 “한 작가의 개성적인 발상과 방법만이 그림의 기준이 된다. 개성적인 동시에 보편성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는 안된다. 항상 자기의 언어를 가지는 동시에 동시대인의 공동한 언어임을 또한 망각해서는 아니된다.”/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톡톡 튀어나온다. 마음으로부터….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맑은 거울이나 맑은 바다처럼 순수하게 비어 있어야 한다. 어린이의 마음처럼 조그만… 이런 텅 비워진 마음에는 모든 사물이 순수하게 비친다. 그런 마음이 되어야 붓을 든다.”

세번째 홀에는 상대적으로 실험적이고 불교적인 모티브가 강한 작품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아름다움, 진眞진眞묘妙”라 이름붙여진 이 곳에는 그의 불교적 세계관과 정신세계가 드러나는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유화의 형태가 아닌 동양화 풍의 먹그림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먹을 사용하지만 전통적인 동양화와는 다른 유화식 붓터치가 내게는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진진묘는 장욱진 화백의 부인인 이순경 여사의 법명인데 실제로 장화백은 아내를 보살로 지칭할 정도로 존중하고 귀하게 여겼다 한다. 또한 인간과 동물, 자연과 산천이 함께 가족처럼 등장하는 그림을 통해 만물이 가족처럼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정동교회, 정동극장 앞을 지나 이화여고로 이어지는 길은 유서깊은 문화지구로 젊은이들이 데이트 장소로 곧잘 오가던 곳이다. 하지만 미술관이나 주변 까페에는 젊은 세대보다 중년 및 노년의 사람들이 더 많이 눈에 띠었다. 평일의 업무 시간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시간과 돈에 여유가 있는 세대의 나들이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할 테다. 고령화의 실상을 커피숍과 산책로에서 실감하게 되고 우리 또한 그런 상황을 뒷받침하는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다소 어색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들도 대체로 중장년층이었던 것 같다. 오늘날 젊은 세대가 이런 형태의 그림에 어느 정도 정서적 공감을 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까치와 나무 대신 로봇과 자동차가 주된 이미지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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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등반

고등학교 시절 ‘벗’으로 만나 50년 가까이 우정을 이어온 친구들이 1박 2일의 오대산 여행을 했다. 다들 바쁘게 이곳 저곳에서 사느라 자주 만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현직에서 물러났거나 아들에게 일을 넘겨주어 다소 여유가 생기기도 해서 가을 단풍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횡성에서 새로운 사업을 일구고 성공적으로 경영을 하고 있는 친구가 적극적으로 모든 숙박과 여정을 기획해 준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청량리에서 탄 강릉행 KTX 는 불과 1시간 만에 강원도 입구인 서원주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이곳이 소금강으로 알려진 곳이라는데 나는 처음 가보는 곳이다. 짧은 시간에 서울의 번잡한 분위기와는 너무 다른 자연의 풍광으로 들어선 것이 선뜻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고보면 우리 일상이 너무 좁은 공간, 익숙한 둘레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쳇바퀴 돌 듯 한 것 아닐까 싶다. 마음만 먹으면 이처럼 광활하고 멋진 산들과 만나고 또 싱그러운 가을 하늘을 맛볼 수 있는데….

원주의 소금강은 과연 ‘작은 금강’이라 이름할 만했다. 산세도 바위도 강도 서로 잘 어우러져 아름다왔다. 무엇보다도 규모가 한 눈에 들어와 아담하고 포근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먼 발치로 바라만 보았을 곳에 다리와 부교, 바위 옆 둘레길을 만들어 사람들이 높은 곳에서 경치를 맛보게 만들었다. 바위에 구멍을 뚫고 허공에 철제통로를 만든 기술 덕택에 한적한 시골이 좋은 관광지로 변모한 셈이다. 또 새로운 공법을 활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비해 바위와 산의 모습을 크게 훼손시키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결국은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심산유곡에까지 닿게 만드는 것이니 친환경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듯 싶다. 개발과 환경보존의 딜렘마를 이곳에서도 벗어나긴 힘들 듯 하다.

둘째날은 오대산 월정사를 거쳐 유명한 선재길을 걸었다. 십수년 전에 왔을 때에 비해보면 길도 잘 다듬어져 있고 단풍도 더 아름다운 느낌이지만 사람과 차량이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다. 한국의 명산 대찰의 면모를 충분히 맛볼 수 있는 좋은 곳임은 분명한데 그만큼 몰려오는 인파가 남길 결과가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우리 사회 중년과 노년세대의 경제력과 체력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자리 같았다. 예전에는 주로 젊은 청년이나 학생들이 올라갔을 길을 이제 대부분 50대를 넘겼을 법한 중년의 사람들, 심지어 70대 이상으로 보이는 노인들이 왁자지껄 산길을 오르고 있다. 시끄럽고 유쾌한 말들 속에서 활력과 건강을 느끼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점점 노화되고 있는 모습을 접하는 느낌도 피하기 어려웠다.

평창의 한 호텔에서 숙박을 했다. 평창 올림픽 때 선수촌으로 건립한 건물을 개조한 듯 객실이 무척 많았다. 그 많은 방이 모두 동이 나 예약이 어려웠다는 신사장의 말처럼 이곳도 관광객, 여행객으로 넘쳐난다. 일에만 매몰되지 않고 가을의 풍광에 여유를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을 하려해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점차 존재의미를 잃어가는 부류들이 많아지는 현상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스친다.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배려해준 신언무 사장, 오랫동안 우정을 이어올 수 있는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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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단어와 이적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 인생에서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는 경구다. 성경은 ‘입에 재갈을 물리라’는 표현으로 말의 무게를 강조했고 유학자들은 ‘신언서판’이란 표현으로 말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미드를 비롯한 사회학자들은 자아정체성을 구성하고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근본요소가 언어라고 주장했다. 유럽의 학계에서는 문명과 지식 자체가 ‘언어’라는 상징에 근거한다고 보는 ‘언어학적 전회’가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개념사는 이런 관점을 수용한 역사연구의 한 흐름이다. 담론 discourse 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와 기본개념 basic concept 에 주목하는 독일의 접근법이 다소 다르지만, 개념과 언어가 지닌 복합적인 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즉 언어, 개념, 담론 등으로 표상되는 인간 고유의 상징화 능력이 미시적인 생활세계를 지탱하게 할 뿐 아니라 정치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죽음 이후를 상상하는 능력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시각에 공감하여 십수년 국내외의 학자들과 개념사 연구에 힘을 보탰고 [국민, 인민, 시민]이란 저작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사회정치적 담론을 구성하는 이런 어휘들을 코젤렉은 역사적 기본개념이라 불렀다. 이런 개념은 역사변동의 방향성,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필수요소가 되어 강력한 문화적 힘을 행사한다. 지금도 자기정당화 논리나 상대방에 대한 공격무기로 이곳 저곳에서 끝없이 논의되는 어휘들이다. 소통의 도구였던 말이 내편과 네편을 가르는 근거가 되기도 하고 대중의 이목을 끄는 선전 카피로 변질되기도 한다. ‘입을 조심하라’는 잠언의 가르침이나 ‘도는 말로 할 수 없다’던 노자의 경구가 무색하게 각종 담화 생산자들, 유투버들, 달변가들이 인기를 끌고 그 틈새에서 선동가, 언어유희자, 가짜뉴스 발신자도 자라난다. 그만큼 새로운 소통과 대화, 말의 기능을 회복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비언어적인 감성과 표정, 이미지와 몸의 제스쳐 등이 더욱 강조되고 문학의 시대가 영화와 음악의 시대로, 문자의 감각이 영상의 공감으로 이행하는 시대다. 당연히 언어와 영상, 문학과 예술이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찾아나서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이적은 그런 점에서 매우 강력한 소통력을 소유한 이 시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다. 그는 대중의 광범한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가수이면서 멋진 노랫말의 작사자로서 문자적 공감능력도 탁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에 대한 대중의 높은 사랑은 가창력과 노랫말, 대화능력의 멋진 조합이 주는 매력으로 상당부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적이 [이적의 단어들]이란 제목을 단 단행본 책을 출간했다. 일상의 단어 속에 담긴 경험들과 애환들을 되살리고 때로는 정형화된 의미를 비틀고 뒤집어 딱딱해진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우치려는 책이다. 영화관, 리셋, 라면, 가르마, 라이터, AI, 물수제비 등의 단어들을 저자와 함께 다시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조용히 미소짓게 되는 경험은 즐겁다. 이 책의 표지에는 [천부적 이야기꾼 이적의 첫 산문집]이라는 띠지가 붙어있는데, 나는 산문집이라기 보다 잠언이라 해도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활발한 저술과 강연을 통해 세계적 대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문명사가 유발 하리리는 현생인류가 지구의 우세종으로 진화한 힘의 원천을 ‘이야기 능력’ story telling 에서 찾았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꾼’이란 문명의 기획자이고 그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사람들은 문명의 수행자인 셈이다. 모든 사람들이 무심코 사용하는 일상의 대화, 글쓰기, 말하기 속에는 인류의 오랜 진화과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말배움 속에 담긴 신비로운 도약과 상상의 능력을 점점 상실했지만 말 속엔 문명의 DNA가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 지금도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기상천외한 질문과 말 속에서 그 DNA를 발견하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저쟈의 상상력 역시 상당부분 어린 아이의 시선, 어릴적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럽고 흥미롭다. 할머니의 말에서 인생이 ‘닷새’라고 정리하는 참신한 발상이나 (인생 2), 어른의 말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깨어진 아이의 아픔과 당혹스러움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첫 아이의 중독송에서 이끌어낸 상상력 (렛잇고) 등 그 예는 적지 않다 . “한번 홀딱 젖고 나면/ 더 젖을 수는 없다/ 그때부터 자유” (자유)라는 깨달음 역사 빗속에서 숨바꼭질하던 아이의 감각과 일맥상통한다. 만물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무엇이나 배우는 아이의 감수성, 적당한 게으름과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아이다운 처신이 소중해지는 시대에 더욱 와닿는 책이다. 이적이 사인과 함께 책의 첫 장에 자필로 써준 “존경하고 사랑하는 박명규 교수님께”라는 글귀를, 인사의 표현인줄 알면서도 짐짓 아이처럼 믿고 행복해 하는 것도 그래서 용인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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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코리아 판타지

경주 엑스포 공원에 있는 솔거미술관을 방문했다. 소산 박대성이 기증한 그림을 중심으로 세워진 이 미술관은 공원의 윗자락에 자리해 있어서 거대한 공원 입구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야트막하지만 정겨운 언덕길을 올라가면 아래를 굽어보는 시원한 언덕을 만나는데 빈지의 철학을 강조한 승효상의 작품 답게 소박한 건물을 만난다. 가까이 가서도 여느 미술관처럼 요란한 디자인이나 거창한 위용이 없이 단순한 사각 건물들만으로 건립되었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이나 과시적인 건축미보다 자연과의 친화성과 겸손함을 강조한 공간구성이란 인상을 받았다.

소산 박대성은 수묵화로 일가를 이룬 분이다. 그의 작품과 생애을 접한 이후 솔거미술관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 꼭 와보고 싶었다. 다행히 지금 전시중인 코리아판타지 전에서 그의 그림과 글씨 십수점을 볼 수 있어 큰 기쁨이었다. 불국사 전경을 그린 그의 대작은 내가 그의 수묵화에 처음 이끌렸던 작품인데, 수묵의 농담을 강력하게 대비시키면서 천년고찰의 위엄과 늠름한 소나무 자태를 배치시켰다. 소나무의 짙은 부분은 좀처럼 보기 어려울 정도의 강한 농묵을 사용해서 먹의 검은 색이 주는 강렬함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수묵과 글씨에서 붓에 못지 않게 먹을 강조하는 이유를 조금 알 듯 했다.

화면에는 그의 수목화론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는 수묵화의 핵심은 진정성이라 했는데 예술이나 기예이기 이전에 인격과 품위를 강조하던 동양적 예술론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는 기본적으로 글씨와 그림이 같이 가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번 전시에도 그는 여러점의 글씨를 선보였는데 이들 작품은 한결같이 글씨의 조형성, 즉 글씨 자체가 그림임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이런 관점은 결국 붓과 먹, 그리고 운필의 중요성으로 이어지는데 겸재 정선이 강조해 마지 않던 정신과도 상통한다. 그러고보니 소산의 그림들 속에서 겸재의 느낌이 나는 듯 하다.

코리아판타지는 소산 전시회의 제목이자 대표적인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작폼은 크기나 구성이 매우 야심찬대 작가가 담고싶은 모든 이야기와 이미지를 이 한폭에 담으려 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코리아 판타지’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고조선을 상징하는 인물이나 벽화로부터 신라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꽃피우고 변해왔던 다양한 자연과 문명의 흔적들을 담았다. 금강산과 백두산을 연상케 하는 산, 태양과 소나무, 한옥, 훈민정음, 문방사우 등 다양한 상징적 대상들이 빼곡히 거대한 캔버스에 담겨 있다. 지나치게 많은 소재와 대상들을 포함하려 한 탓에 작가의 의욕이 너무 과잉된 느낌마저 든다. 이것을 예술품으로 보지 않고 오늘 한국을 있게 한 긴 문명사의 지도로 바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전체 구도는 천전리 고분벽화를 떠올리게 한다. 오랜 시간, 문명의 흐름 속에서 이어져온 어떤 감수성과 정신을 찾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전시실에서는 파독 간호사로서 화가의 길을 걸었던 노은님 작가의 첫 유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1946년 해방 직후에 태어나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물고기, 새, 꽃 등 자연물을 소재로 강렬한 원색의 그림을 그려 ‘생명의 화가’라는 이름을 얻었던 작가인데 2022년 타계했다. 몇 달 전 튀빙겐 대학 이유재 교수가 주도하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파독한국인 생애사 연구서를 이교수로부터 받아 여러 파독 동포들의 삶을 잠시나마 훑어보았던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어러운 생활, 고국을 떠난 그리움, 그러면서 무언가 생명의 본질을 찾으려는 예술혼이 이렇게 그림으로 분출했구나 싶어 그림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수묵만을 고집한 소산과는 달리 강렬한 색감을 많이 사용한 노은님 작가 작품전은 ‘나, 종이, 붓’을 주제로 달았다. 두 작가의 그림과 감각은 매우 다르지만 붓과 종이를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공감의 정서가 있지 않나 싶다. 또 강렬한 농묵의 검은 색과 원색 물감의 선명함이 다르면서도 유사한 어떤 에너지를 발산하는 듯도 했다. 전시를 둘러보면서 신리, 솔거, 경주의 이미지와 파독간호사, 한반도 역사, 격동의 근대화가 오버랩된 어떤 복합적 이미지를 느꼈다. 21세기에 우리 주위에서 해체되고 변용되며 재구성되는 새로운 코리아 판타지는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상상될까 곰곰 생각해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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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스바써 -7

한독통일자문회의의 공식 회의가 시작되기 앞서 독일측에서 준비한 현장 답사가 있었다. 폴란드 국경가까이에 있는 작센 주의 바이스바써라는 작은 마을을 방문하여 그 지역이 겪고 있는 여러 변화와 도전들을 경청할 기회를 가졌다. 통일후 많은 동독지역 농촌이 경험한 것과 유사한 변화를 겪었고 특히 기후변화와 관련한 독일의 그린에너지 정책의 여파로 이 지역경제가 재조정을 강요받고 있는 곳이라 한다. 답사를 안내한 베를린 자유대학의 김박사는 이곳이 복합적 위기상황을 독특한 내적 발상으로 대응하고 있는 사례여서 답사의 대상지로 선정했다고 했다.

약 2시간이 넘는 시간을 버스로 달려 도착한 곳은 자그만 하지만 깔끔해 보이는 지방도시였다. 시청에 도착해보니 회의장에 식사가 케이터링 된 상태로 준비되어 있고 시장이 브리핑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소탈해 보이는 페취 시장은 휴일이어서인지 혼자 모든 방문객 응접과 시청 건물의 열고닫음을 감당했다. 상세하게 준비된 브리핑에서는 그의 열정과 수고가 전해졌다. 시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 도시는 38천명의 주민이 살던 곳이지만 지금은 15천명 수준으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동독의 빈곤한 농촌 10 분위 중 9분위에 속할 정도로 어려운 지역으로 평가되고 탄광산업의 사양화와 맞물려 더욱 미래가 밝지 않은 지역이다.

하지만 시장은 주민참여형 문화재생을 통해 이 도시에 새로운 활력과 비전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도시중심부의 활력 구축, 네트워크 강화, 공동협력과 참여, 그리고 디지털 인프라 구축의 네 가지 중점과제를 내걸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행정체계를 일원화하고 직업교육과 각종 훈련기회를 조성하며 주거지역을 새롭게 단장함으로써 300여 가구가 귀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했다. 과거 유리공장이었던 공장건물에 소규모 스타트업과 벤쳐기업을 유치하고 외부의 중소기업을 유치하기 위한 다각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현장을 가 보기도 했다. 동독 시절의 거대한 집단건물들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조성한 녹지공간을 지나며 주택과 환경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인다고 했다.

이 도시의 노력은 전형적인 도시재생사업이라 할만하다. 미국 뉴욕에서도 슬럼지역을 새롭게 탈바꿈하려는 노력이 추진되었고 서울에서도 성수동을 비롯한 여러 곳에 유사한 변화가 시도되었다. 군산이나 전주 등지는 특색있는 공간의 역사성을 새로운 문화관광지로 변화시킴으로써 도시의 활력을 강화하고자 한다. 상당한 성과를 거둔 곳도 있지만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비용만 증대시키고 토지소유주의 이익추구 사업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도 따라 다닌다. 이 도시가 고령화, 인구이동, 탈화석연료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을지는 단지 동독지역만이 아닌 21세기 인류공동체 공통의 관심사라 해도 좋을 듯 싶다. 자전거를 싣고 여러 곳을 다니며 열심히 설명하는 시장의 모습은 오늘날 지방소멸을 우려하는 한국 지방 소도시에서 벤치마킹할 만 했다.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극우의 부상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들었다. 도시의 한 빈 건물을 이들이 무단 점거한 적이 있는데 시는 그 건물을 매입해서 해체시켰다고 한다. 과감한 대응이 다행히 좋은 결과를 거두었고 극우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적극적 사례로 내세울만 했다. 다만 모든 도시가 같은 대응과 결과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어서 누군가는 이 지역이 예외적인 곳일 수도 있겠다고 했다. 현재 독일에서 극우정치를 대표하는 Alternative for Germany (AfD) 정당은 2013년에 설립된 이래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극우적, 국가주의적 가치와 이념을 중심으로 이민정책과 유럽 통합에 대한 비판을 주된 공격논리로 내세운다. 자유 시장 경제를 강조하고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와 적대성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불만과 불안정을 정치자산화 하려 한다. 이런 변화가 통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도시의 사례가 보여주듯 현상적으로는 중층적으로 겹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결국 사람이 사는 현장, 지방과 도시, 시민사회 곳곳에서 건강한 삶을 구축하기 위한 열정, 협력, 비전, 리더십이 삶의 현장을 풍요롭게 하고 극우도 잠재우는 처방이 될 것이다. 중앙집중성이 너무 강한 한국사회에 여러모로 던지는 메시지가 적지 않은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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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의 발명? – 4

동독이란 범주, 동독인이란 정체성은 통일 이후에 발명된 것이다 – 이번 한독통일자문회의 토론 과정에서 나온 말인데 최근 이런 시각이 독일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분단 시대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동독인’이란 범주가 오히려 통일 30년이 지나면서 ‘서독인’에 대비되는 실체로 뚜렷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동독(인)이라는 범주의 재창조는 사회경제적 차별과 ‘뒤처점’의 감정을 근거로 하여 구성된다. 독일측의 발제에서 확인되는 동독지역의 경제적 낙후, 엘리트의 부재, 기회구조의 약화, 분노의 정서 등은 암묵적으로나마 서독(인)과의 대비를 전제한다.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의 대립상태는 종식되었는데 통일독일 내부에서 동독이란 범주가 재창조되고 있다는 말은 역설적이다. 그런데 내 개인적 인상으로도 이전에 비해 이번 회의에서 동독(인)이란 표현이 더 뚜렷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은 동독지역이 겪는 여러 현실적 어려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와 관련된다. 동독지역은 서독지역에 비해 총소득수준이 15% 정도 낮고 엘리트층 배출비율도 현저히 낮으며 심리적 자존감도 낮다는 것인데 이런 현실을 통일의 귀결로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크게 나누어졌다. 텔칙은 당시 동독이 적극적으로 서독의 시스템 수용을 원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슈뢰더는 더욱 분명하게 소규모 동독인들의 불만이나 움직임을 동독인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당시 적극적으로 서독의 방식을 수용하려 한 동독혁명의 시대정신을 충분히 고려해서 통일을 이해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식민지화라는 표현은 신중하게 사용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글라이케 전 차관은 최근 ‘동독인’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열심히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 화가 난다고 했다. 도대체 2023년에 누가 동독인이란 말인가라는 그녀의 질문은 왜 이 시점에서 동서독인이라는 범주가 계속 사용되고 소비되는가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읽혔다.

나는 이 토론을 들으면서 북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북한’이란 말을 사용하지 못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북한이라는 용어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남한의 시각이라고 화를 냈고 그래서 늘 북측, 또는 귀측이란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기실 명맥하게 이질적인 국가성을 고집하면서도 두 국가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타난 임시변통인 셈이다. 어쩌면 통일이 되고 나면 저런 억지 방패도 어려워지고 북한(인)과 남한(인)이라는 범주가 더욱 분명한 실체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반도에서 북한과 남한이라는 말이 남북한간에 상호소통을 돕는 어휘로 자리잡지 못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철저한 분단과 단절의 결과일 터이다. 영남사람, 호남사람, 서울사람이라는 범주가 커다란 차별의식 없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이 국가적 통합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동서독 범주가 새로이 부상하는 것은 통일독일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현상의 하나라 볼 수도 있다.

몇년 만에 다시 가본 포츠담 플라츠 장벽들의 그림은 빛이 바랬고 베르나우의 장벽박물관 역시 퇴락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독일 통일은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다만 통일을 전후하여 개개인이 겪은 변화, 이동과 좌절과 성공의 이야기들은 시민들의 일상과 인생 경험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동독(인)의 담론이 최근 부상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현실의 반영이고 국가통일이라는 거시적 변화가 삶의 미시적 문제로 전환되었음을 말해준다. 동서독 정치통합의 숙제가 사회적 통합과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그런 연유일테다. 이 새로운 숙제가 유럽통합과 이주자 난민의 포용까지 포함하는 다차원적 통합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이 문제를 어렵게 만든다. 동독에서 부상하는 극우 포퓰리즘의 정서는 ‘보편적 통합’에 앞서서 ‘우리부터’ 통합하라는 목소리이고 그것은 결국 종족주의적인 지향, 인종차별주의의 정서를 띠기 쉽다.

개인적으로 재개장된 독일역사박물관이 이런 쟁점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려 하는지 보고 싶었다. 십여년 전 이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제국 독일의 역사서술에 비해 통일과정이 너무 소략하게 설명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다시 문을 닫고 재개장을 준비 중인데 2025년에야 문을 연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통일을 상징하는 거대한 기념물이나 떠들석한 전시관을 찾기 어려운 이유를 막연하게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통일과정을 해석하는 다양한 경험들을 역사적 기억으로 상징화하는 것은 종종 해석의 단순화, 국가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특히 통일 이후의 삶을 분노와 좌절로 경험한 사람들에게 통일의 기념물보다는 그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는 비전이 더욱 긴요할 것이다. 3만여명 탈북자의 수용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드러내고 외국인 정주자들과의 사회통합이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놓여있는 한국으로서 통일지향성이 여전히 민족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사고되는 현실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