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의 부음을 접했다. 얼마전 학전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과 함께 병세가 위중하다는 사실도 알려졌던만큼 뜻밖의 놀랄 뉴스는 아니다. 그래도 여느 유명인사의 죽음을 접할 때와는 다른 아련한 감정이 생겨난다. 그의 이름과 노래가 70년대 내 대학시절에 미친 영향 탓일 것이다. 페북에는 여러 사람들이 그의 노래와 엵힌 경험과 기억들을 적어 놓고 있다. 결혼식 축가로 김민기의 노래를 합창했다는 기억에서부터 그가 어두운 세월에 ‘푸른 하늘’을 보여준 사람이었다고 쓴 글도 있다. 쉽지 않았다는 그의 인터뷰 기사들도 여기저기 나타난다. 학전의 마지막 공연장에서 찍은 사진을 애도의 글과 함께 올린 글도 여럿 보였다. 그의 영향력이 오랫동안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모습들이다.
카톡방에선 때아닌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암울했던 시대’에 맞선 김민기라는 글에 대해 그런 표현은 불성실한 왜곡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70년대는 정치적으로 불행했지만 긴 한국현대사에서 결코 암울한 시대로 단정할 일이 아니라는 항변이었다. 김민기의 생애를 두고 70년대의 성격을 논하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맥락을 벗어난 것이다. 우리의 시대인식은 너무 정치화되어 있어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도 이런 논쟁이 생기는구나 다소 씁쓸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표준화된 역사인식이나 관용적인 서술어가 얼마나 실체적 진실과 가까운가는 사실 쉬운 문제가 아니다. 김민기의 죽음을 계기로 70년대를 어찌 이해해야할까 자문해본다.
대학생으로 보낸 70년대 중후반을 우울하고 답답하게 경험했던 것은 분명하다. 일상의 생활전선에 힘겨워하던 사회인들이 당시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자유로운 삶과 지성인되기를 꿈꾸던 사람들에겐 참으로 힘든 시대였다. 외마디 외침 한두마디로 제적과 투옥을 감내해야 했던 친구들이 느낀 절박함은 더욱 컸을 터이다. 그래서일까 내 주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고 몸부림치던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하던 한 친구는 진지하게 신학교 진학을 고려한다고 내게 말했는데 사회를 바꿀 저항운동을 위해 ‘종교인의 외피’, 특히 기독교의 힘을 빌리는게 유용할 것같다는게 그 이유였다. 또 한 친구는 유명가수를 ‘의식화’ 시키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수의 영향력을 이용하자는 것인데 남진은 너무 의식이 없으니 생각이 깊은 조용필을 그 대상으로 하는게 좋으리라는 구체적인 구상도 덧붙였다. 두 제안 모두 실현 되지 않았고 뜬금없는 망상같은 발상이었지만 각자 제 나름대로 시대의 중압감을 벗어나려던 몸부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시절에 노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 저곳 생겨났다. 노래를 이용하여 메시지를 퍼트리고 사람들을 결집시키려는 노력이었는데 초기엔 출처도 잘 모르는 노래들 (알고 보니 러시아 민요이거나 미국의 반전가요 등이었다), 또는 찬송가 같은 노래도 활용되었다. 노래가사바꿔부르기 (노가바)는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좀더 목적의식적으로 메시지를 담으려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가사내용도 점점 더 과격하고 노골적인 것으로 변했다. 77년 소위 26동 사건이라 불리는 대형 시위를 촉발시킨 사회학과 심포지엄이 있었다. 진행 사회를 맡은 나는 미리 행사장에 가 았었는데 시간이 넘어도 발제와 토론을 맡은 후배들이 나타나질 않았다. 시위로 번질 것을 우려한 교직원들이 이들을 격리시킨 탓인데 그 사정을 알 수 없는 현장에서는 웅성거림이 시작되고 청중석에서는 자연스럽게 구호와 노래가 시작되었다. 잘 알려져 있는 건전가요의 곡에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노랫말이 그날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날 밤 많은 친구들이 관악경찰서로 잡혀갔다. 밤샘 취조의 내용은 이 행사를 시위로 이어지게 사전에 모의했는지, 누가 기획했는지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경찰은 그날 새롭게 불린 노랫말 가사에 주목하고 이 노래를 퍼트린 사람을 찾아내려 했다. 거짓말을 못하던 1학년 후배가 일부 기억이 난다고 가사를 불러주었고 그는 이 날의 시위를 기획하고 주동한 인물의 하나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다. 후일 그가 학교에서도 제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 속에 분노와 계면쩍음이 뒤섞여 올랐던 기억이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마음 한켠에 남아있다.
대학4학년 때 주변의 몇몇이 노래모임을 만들자고 권유했다. ‘메아리’라는 이 노래동아리는 실천과 노래를 연결하는 일종의 문화운동을 모색했던 것으로 나는 초창기에 함께 하다가 꾸준히 참여하진 않았다. 메아리는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들을 확산시키고자 애썼는데 그 가운데 김민기의 노래는 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후일 80년대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이어져 큰 주목을 받고 이들의 노래 중에는 아름다운 선율과 묵직한 노랫말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곳이 적지 않다. 광주의 비극을 거치고 노동운동이 확대되면서 노랫말과 곡조도 점점 강하고 투쟁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70년대에 바탕한 내 생활세계의 경험 속에는 작은 연못, 아침이슬, 상록수, 공장의 불빛, 금관의 예수 등 혼자 조용히 읖조리며 부르던 김민기 노래의 서정성이 깊이 자리한다. 존 바에즈를 좋아하던 친구가 김민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내 자신 70이 되어 그 시절을 상징하던 인물의 부음을 들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미자가 ‘노래는 나의 인생’이라 했지만 우리의 개인사나 시대사도 노래의 변천사와 겹친다. 뽕짝이라 부르며 도외시하고 공순이들의 노래라 천시했던 가요는 트로트 열풍을 타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다. 통기타를 치며 청년세대의 우울한 감수성을 일깨우던 노래는 사랑을 노래하는 발라드 가수들의 감미로운 정조로 이어지고 있다. 노찻사 출신의 가수가 유명인의 대열에 올라서기도 하고 각종 시위에 운동가요가 여전히 불리지만 더이상 독특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런가하면 서태지와 아이들을 효시로 터저나온 새로운 복합장르는 오늘날 K-Pop이란 대형 문화현상이자 기획산업으로 발전했다.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 숱한 아이돌 그룹이 나타나고 이들의 노래는 이해하기조차 어려울만큼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소비와 자극을 찾는 포스트 시대의 경향을 대변하는 노래도 있지만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게릴라 정신을 내거는 노래도 인기를 끈다.
리듬과 운율, 달라진 노랫말을 보노라면 반세기 한국사회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해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노래를 좋아하던 나도 이젠 거의 대부분의 노래가 생소하고 곡조를 흉내내기조차 쉽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함께 노래한다는 것, 합창으로 연대하고 노랫말에 공감하는 감수성 자체가 크게 변하고 있다. 70년대 우리의 삶에 녹아있던 김민기, 노가바, 번안가요의 노래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김민기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