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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계몽 – 3

”독일통일의 오늘“을 발표한 토마스 크뢰거 연방정치교육원 원장의 내용은 무겁고 진지했다. 어떤 의례적 서두도 없이 그는 독일통일로 인해 ‘뒤쳐진’ 사람들의 분노와 굴욕감을 이야기하는데서 발제를 시작했다. 그는 1989/1990년을 전후하여 깊은 단절과 무력감을 겪은 세대의 감정이 결코 약화되지 않고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깊고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동독의 많은 낙오자들의 분노가 오늘날 극우정치를 부상시키는 원천이 되었고 독일 통일이 유럽통합의 징검다리가 되리라던 믿음과 달리 종족주의의 배타성을 확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분노감정의 바탕에는 속았다는 느낌, 식민지화 되었다는 굴욕감이 자리한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이다’라고 외쳤던 통일 당시의 외침이 이제 ”우리부터 통합하라“는 포퓰리즘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통합을 위해 진력해온 정치교육이 이 문제를 다루는데 실패한 것인가? 발제자는 아직 갈 길이 멀고 특히 접근법에 새로운 성찰이 필요하다는 입장인 듯 했다. 정치교육은 세뇌와 선동이 아닌 성찰과 각성을 통해 자신의 잘못과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게 돕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통합은 자발성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이 맥락에서 트라우마를 가져온 과거를 어떻게 대면하고 기억하는가가 중요하다고 크뢰거는 진단한다. 문화연구자 아스만은 사회적 상호작용과 문화적 의미를 형성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기억을 기능적 기억(functional memory)이라 했는데 동독의 경험과 통일의 충격을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관건일 테다. 정치교육은 민주적 역량과 소통을 통해 건강한 기능적 기억, 집합적 해석 형성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연대감을 형성하고, 문화적 지속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며 과거의 경험과 상호작용하여 현재와 미래를 조직하고 지시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발제자는 통일 이후의 두 과제가 청산과 정치교육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두 작업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청산은 과거의 잘못을 밝혀내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피해자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반면 정치교육은 다중관점적인 시각에서 모든이의 참여를 장려하고 회색지대를 허용하며 과거보다 현재에 더 많은 관심을 둘 것을 요구한다. 상이한 관점과 모호함을 용인하고 ‘많은’ 과거들이 있었음을 용납함으로써 기억의 단순화, 기억의 독점화를 방지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러려면 순응과 반항 사이의 회색지대, 심지어 ‘독재에의 유혹’까지도 조망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나찌와 사통당 독재는 공포와 억압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독재를 찬양하도록 만든 유혹의 기제도 꼭같이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동독지역에서 발견되는 오스탈기 역시 이런 유혹심리의 연장인 셈인데 이 미묘한 독재의 구속력을 드러냄으로써 내면의 회복을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계몽과 정치교육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토론에서 나는 기억의 정치가 과거와의 화해가 아닌 새로운 갈등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음을 지적하고 어떤 조건이 더해져야 할 것인지 물었다. 발제자는 쉬운 처방은 없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결국 민주주의의 역량강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동시에 기억이 분노나 좌절로 이어지지 않고 건강한 성찰로 이어지려면 유럽차원의 이주경험을 기억의 영역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유럽통합의 과정에서 각 개인들이 겪은 다양한 경험들은 과거를 독일민족이나 백인중심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편향을 벗어나게 도와준다. 이런 다중적 경험, 혼성적 기억을 통해 ‘독일중심 역사서술’과 싸우는 것이 가능해 진다. 사회는 점점 더 혼종적으로 되어가고 그 과정에서 독일은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는 바, 이런 다양한 기억을 수용함으로써 기억의 정치가 승자중심으로 단순화하거나 집단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럴 때에야 기억의 정치가 ‘미래를 마주’할 민주적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이 발제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분석적이면서도 문제의식이 분명하고 비판적이면서도 균형잡혀있다. 통일을 주요한 성취로 수용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좌절하고 실패한 사람들의 스토리에도 사회적 기억의 정당한 자리를 부여하려 한다. 혐오와 분노의 감정이 어떤 뿌리에서 연유했는지를 냉정히 분석하면서, 그러나 역시 계몽과 성찰이라는 오랜 교육철학의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 입장을 견지한다. 회색지대와 애매함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민주주의와 성숙함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애씀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인데 이런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오늘 독일의 깊은 갈등들이 여실히 보여준다. 과연 계몽이라는 칸트적 교육론이 감정과 정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속시원한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찰과 계몽을 향한 진지한 고민을 산출할 수 있는 독일은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남북한의 대립과 논란, 통일을 향한 민족감성의 이중성, 국내 정치의 이데올로기로 활용되는 단순화 논리, 여전히 민족주의 정서를 벗어나지 못하는 통일론의 한계 등..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사실 이 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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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4월 28일,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 가족이 한국을 방문해서 오랫만에 만났다.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기쁜 일이다. 공자 역시 인생 3락의 하나로 ‘벗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을 꼽았을 정도가 아닌가. 비록 내 집을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먼나라에 떨어져 있다가 한국을 모처럼 오게되었으니 ‘자원방래’라 할만하다. 마침 오전에 월봉상 시상식이 있었던 터라 오후엔 편안한 마음으로 봄 빛 가득한 삼청동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더 글로리 촬영장소라는 까페로쏘 골목의 풍경도 보기 좋았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을 거쳐 이어진 우정이니 거의 50년이 넘었다. 반세기 넘도록 각각의 인생길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고 만날 기회도 거의 없었지만 간간히 소식이 전해질 계기가 생기고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해후하게 되는 날도 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싶다. 수유리 한 구석에서 맺어진 인연이 관악을 거쳐 샌디에고로 또 보스턴의 하바드 스퀘어에서 이어지는 것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얼마전 타계한 테너 박인수가 부른 ‘친구이야기’ 영상을 누군가 보내주었다. 그 노랫말과 곡조가 좋아 나도 몇 친구에게 전달한 적이 있다. 집으로 내려오는 기차 속에서 이 가사가 새삼 생각났다. <많지 않아도/ 그리고 자주 만날 수 없어도 / 내게 친구가 있음은 /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 멀리 있어도 / 가만히 이름 불러볼 수 있는 / 친구가 나에게 있음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내 좋은 친구를 만날때면/ 웃음마다 봄날 기쁨입니다 /보고픈 친구를 생각할때면 /그리움은 잔잔한 행복입니다.>

곧이어 5월 2일에는 역시 우이교회에서 함께 지냈던 오랜 친구 태영, 희용, 명곤 등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육군과 공군의 지휘관이었던 두 친구 덕분에 간간히 골프모임을 하는 호사를 누리는데 실력은 제각각 다르고 특히 나는 점수를 기록할수도 없을 정도지만 옛 우정이 이어주는 만남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느끼게 하는 모임이다. 세월이 가는만큼 사회적 활동이 줄어들수록 친구의 소중함은 더 뚜렷해지지 않을까 싶다. 오랫만에 고국을 찾은 친구 은영씨와 선배님이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특히 멋지게 자란 두 따님 가원 승원의 앞길에 좋은 일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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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으로 그린 초상

광주시립미술관의 김호석 수묵화전 개막전에 참석했다. 먹과 붓 만으로 오랜 동안 작업을 해 온 작가인데 정근식 교수가 축사를 한다고 알려와서 가게 되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GIST에서 외곽 고속도로를 통해 많은 시간 걸리지 않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전시회 장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뜻밖에 시인 박남준도 반갑게 만났다. 화동 악양 마을에서 살고 있는 그도 이 전시회를 보러 일부러 광주를 찾았다 했다.

초기 작품에는 더러 채색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된 수묵 담채였다. 통상의 전통 수묵화가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한 것이 많은데 비해 이 작가는 인물과 동물을 주로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현실 속의 인물들을 초상화의 형태로 그려왔는데 최근에 오면서 역사성이 담긴 시대화를 그리기도 하고 작은 곤충의 모습을 통해 환경주의적 메시지를 담으려 한 모습도 보인다. 사실성에 기초한 섬세한 묘사에 과감한 붓질, 생략과 추가의 독창적 구도를 통해 작가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고 있는 듯 했다.

미국 화단에서 주목을 받았다고 언론에 소개되었던 황희의 초상화는 마치 흔들려 찍은 사진처럼 눈과 코와 입술이 모두 두 겹으로 그려져 있다. 한 인물이 보여주는 상이한 면모를 이런 입체적 기법으로 드러내려 했다고 설명되는 모양이다. 실제로 위 아래로 그려진 네 개의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노라면 외양의 눈과 내면의 눈을 함께 그린 것이 더욱 사실적이라는 느낌조차 갖게 된다. 도산 안창호의 얼굴을 그린 거대한 초상은 살아있는 듯한 눈매와 결연한 표정, 힘찬 붓질의 수염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좋아하는 인물을 저런 붓터치로 나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개인적으로는 ‘아들인 줄 알았는데 허공이었다’는 제목의 그림이 강렬해서 그 작품 앞에서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어머니인듯 한 여성이 누군가를 안고 있는데 정작 그 품에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다. 언뜻 보면 그리다 만 미완성 작품 같기도 한데 제목을 읽으면서 비로소 이 빈 공간의 의미가 와 닿는다. 허공이지만 아들인 줄 알고 감싸안은 여인의 모습을 통해 빈 여백 속에 귀한 무언가가 담겨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는 듯 하다. 그런가하면 무언가 소중했던 것이 사라지고 없다는 안타까움을 그린 것 같다. 보기에 따라서는 허공조차도 아들로 알고 따뜻하게 껴안을 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를 읽을 수도 있겠다. 작가의 어머니가 그 아들을 군대에 보내며 그린 것이라는 누군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연민, 사랑, 회한 등의 복잡한 심사를 함께 느껴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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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과 수성동계곡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수성동계곡과 인왕산 성곽길을 다녀왔다. 한반도평화연구원 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분들과 모처럼의 저녁 모임을 갖게 된 곳이 이 주변이어서 미리 마음을 정해둔 여정이었다. 마침 날씨도 좋고 벗꽃도 만개한데다 곳곳에 진달래가 화사하게 피어 생각지 않은 즐거움도 컸다. 호젓하게 자유로이 윤동주 기념관과 한양도성 성곽길을 둘러본 것은 덤으로 누린 기쁨이었다.

수성동계곡은 겸재 정선의 그림 [장동팔경첩] 수성동의 현장이고 서울의 난개발 과정에서 사라져버렸던 돌다리와 계곡이 아파트 철거로 다시 드러나 옛모습을 찾게 된 곳이다. 겸재가 이곳을 유명하게 만들었고 이곳 둘레길에는 진경산수탐방이라는 팻말이 붙여져 있다. 하지만 이곳은 그 이전부터 풍류를 즐기던 문사들이 즐겨 찾던 장소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이곳에 비해당이란 정자를 짓고 당대 최고의 선비들과 시를 짓고 담소를 나누었는데 이들이 이곳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48詠詩’ 일부가 전해져 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수 년 전 서울대 화묵회 전시에 대나무 수묵화를 출품했다. 그림에 어떤 글을 적을까 생각하다가 성삼문이 안평대군과 더불어 주고받은 ’48영시’의 한 부분을 썼다. “度竹風聲碧 含風竹影淸” (대 숲 지나는 바람소리 푸르고/ 바람 머금은 대 그림자 맑다). 심경호 교수의 저서 덕분에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을 비롯한 조선조 선비들과 안평대군 간에 주고받은 시들을 접해본 덕택이다. 수성동계곡을 오르면서 나는 안평, 안견, 성삼문, 박팽년, 겸재 등 만나본 적 없는 이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돌다리가 있는 수성동 입구는 버스 종점 바로 앞이었다. 조용하고 멋진 계곡의 풍광을 상상했던 나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계곡의 규모가 작아 물이 제대로 흘러도 작은 개울 수준을 넘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인왕산 정상을 향한 길을 오르면서 아름다움은 반드시 장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이내 깨달았다. 다양한 모양의 바위와 작은 골짜기, 크고 작은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진경산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복궁 옆부터 인가 없는 길을 지나 이곳으로 오르던 이들에게 수성동은 말 그대로 조선산수의 정형과도 같은 풍경으로 와 닿았을 법하다.

인왕산 정상에서 내다보는 서울의 풍경은 장쾌하고 시원했다. 남산을 바라보면 시내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고 백운대 방면으로 눈길을 돌리면 아스라히 북한산 줄기가 다가온다. 그 사이로 청와대를 품은 북악산의 아름다운 자태도 또렷하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성곽둘레길이 이어져 있어 또다른 멋스러움을 더한다. 이곳의 성곽은 그 높이가 낮고 주변과 너무 잘 어우러져 외침을 막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위한 미학적인 이유로 세운 것 아닐까 여겨질 정도다. 모처럼의 멋진 기억을 오래 간직하려 겸재의 문하생이 된 기분으로 화선지를 펴고 수묵으로 인왕산과 기린교, 계곡을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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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속 사람과 자연

봄은 매화와 더불어 오는가. 한겨울 매서운 날씨를 견디고 고고하게 계절의 변화를 알라는 매화의 향기가 곳곳에서 풍겨난다. 예로부터 매화는 그 기개와 품성이 선비와 닮았다 해서 사군자의 첫 소재로 꼽혔고 고택이나 서원의 한 켠에 자리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남도 섬진강변과 하동지방은 산기슭을 온통 매화가 차지할 정도로 군락을 이룬 곳들이 적지 않다. 매실을 재배하는 농원들이 많기 때문이겠지만 남도의 야트막한 산세와 풍광이 일조를 했을 터이다. 하동에서 벌어지는 매화축제에는 100만명을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한국사회사학회 활동을 처음부터 함께 했고 이제는 학계에서 퇴임하여 정담을 나누던 사시친 멤버들이 모처럼 매화 답사길에 나섰다. 고매로 이름난 승주의 선암사, 홍매로 유명한 화엄사를 비롯하여 사람들로 들끓는 매화축제장 농원도 들렀다. 여행이 꽃구경 만일 수는 없는 법, 박경리의 토지의 무대로 알려진 악양에 묵으면서 이런 저런 사람도 만났다. 악양별서라는 멋진 이름의 집에서 시와 춤과 노래의 작은 모임도 갖고, 오래된 집을 멋진 전시관으로 만든 빈산 갤러리에서 작품도 감상했으며 조씨 고택에서 조선조 명문가의 위세와 품격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높은 산마루에 올라 사방을 에워싼 지리산 능선, 그 속에 넓게 자리잡은 땅, 굽이치는 섬진강을 한 눈에 바라보는 즐거움도 맛보았다.

선암사의 고매는 아름다운 사찰의 풍경과 어우러져 장관이었다. 태고종으로 많은 불사를 하지 않아 오히려 고풍스런 옛 아름다움이 유지되고 있다는 역설이 새삼스러웠다. 이곳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롯하여 이름있는 사람들의 현판들이 여럿 있다. 화엄사는 홍매 한 그루가 대웅전에 맞먹는 높이로 장중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전에 이곳을 왔을 때 국보로 지정된 각황전 앞의 사자석등에 눈이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우람한 기세의 등걸과 붉은 색의 화려함으로 사찰의 분위기를 일거에 바꾸는 홍매의 절경에 사로잡혀 다른 곳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가히 명불허전이다. 평소에 매화는 백매가 본류이고 홍매는 웬지 아류 같이 여겨졌는데 화엄사 홍매는 내 편견을 일순간 날려버렸다.

재작년 이맘때 제자들이 매암동인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내가 정년을 기념하여 제자들에게 써준 글씨들로 ‘以文會友’ 전시화를 열게 된 것을 계기로 서로의 근황과 관심사를 나누고 소중한 학연을 이어가자는 뜻에서였다. 지금도 개인적으로 또 몇명씩 간간히 만나면서 학문의 길에서 부딪친 생각과 경험들을 나누곤 하는 고마운 제자들이다. 광주과학기술원에서는 또다른 학생들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이런 저런 꿈과 뜻을 지닌 사람들이 개성있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들을 본다. 선암사의 고매, 화엄사의 홍매만 아니라 내가 인연한 이 모든 이들이 각각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매화 나무란 생각을 했다. 좋은 제자를 만난 복을 감사하고 새롭게 이어지는 인연들을 생각하며 선암사 백매의 모습을 화선지에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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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

감동이었다. 숭고한 정신과 아픈 역사, 그리고 탁월한 건축양식이 함께 빚는 숙연한 아름다움 –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받은 인상이다. 떠들석한 말과 번잡한 물증 없이도 인생과 역사, 정치와 종교, 서구와 동양, 삶과 죽음의 관계를 묵상하게 만드는 종교적 학습장이다. 어두움과 빛, 직선과 곡선, 절제된 구성에서 성스러움을 실감하는 체험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죄인들을 처형하던 장소인데 특히 많은 천주교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 곳이다. 그 아픔을 망각하지 않고 내면의 성찰로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이런 공간을 서울의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마왔다.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들렀을 때, 또 뉴욕 그라운드 제로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받았던, 장중하면서도 슬픈 다크 투어리즘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특히 지하의 어두움과 지상의 밝음이 다양한 방식으로 교차되고 대비되는 절묘한 구성이 감동적이었다.

공원 입구 기념탑에는 성인과 순교자들의 명단과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중앙 석판이 새겨져 있다.  공원의 한 구석 벤치에는 ‘노숙자 예수’란 청동상이 누워있다. 티모시 슈말츠라는 작가의 작품이란 설명문을 보지 못하면 실제로 한 사람이 공원에서 노숙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하다. 청동상이든 노숙자든 오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강도만난 사람을 두고 지나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태도가 오늘날 도시의 바쁜 사람들의 자세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작가가 묻는 듯 하지만 그 어떤 명시적 메시지도 생략되어 있다.

카톨릭이 서학의 이름으로 전래된 과정을 보여주는 지하의 전시실 역시 절제되어 있다. 유학이 지배하던 조선후기 사회 곳곳에 새로운 사상이 전파되고 생겨나는 흐름을 당대의 전적과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서학은 물론이고 실학과 동학, 개화사상이 그 흐름 속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이 눈에 띤다. 기독교의 종교적 측면에 한정하지 않고 그 정신이 지니는 세계문명사적 함의를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의도가 고급스럽고 반가왔다. 그래서일까 한쪽 벽면에 걸린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의 유묵, ‘평화’가 더욱 묵직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지하 3층의 콘솔레이션 홀은 역사 속에서 희생당한 자들을 추모하고 현실에서 지친 인생을 위로하는 곳이라 한다. 공간 전체를 채우는 짙은 어두움 속에 은은한 빛이 비치는 제단이 있어 누구든 무릎을 꿇고 싶은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그 제단 옆에 무릎을 꿇은 한 참배객의 굽은 어깨가 한폭의 성화 같은 실루엣을 만들고 있다. 고개를 돌리면 하늘광장이라 이름한, 위로 뚫린 광장에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지키러다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서있고 그 옆 좁은 문을 열면 순례길을 연상케 하는 어두운 회랑 끝에 별같은 빛이 손짓하고 있다. 누군가를 추념하는 장소라기보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유받는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과 한국순교자 124위의 시복을 기념하기 위해 김경자 작가가 제작한 ‘일어나 비추어라’라는 제목의 나전칠기 작품도 눈이 갔다. 과거, 현재, 미래의 세 부분으로 좁게는 카톨릭 이백년사를 넓게는 한국 근현대사를 그리고 있는데 동양의 예술적 상징과 기독교적 성서관이 아름답게 혼융되어 있다. 십장생도의 미학과 불화의 분위기, 무릉도원에의 꿈도 있고 몽둥이와 칼을 든 사람들,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 예수를 품에 안은 피에타상도 있고 각국의 국기들도 있다. 일견 복잡해 보이는 이 모든 상징물들이 희생과 수난을 거쳐 모든이의 평화를 이루는 미래에의 도정을 드러내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기능적 효율성이나 과욕의 메시지 전달, 다수 대중의 이목끌기에 급급한 현대사회에 이런 절제된 공간미학을 구현하고 만들어가는 카톨릭의 문화역량에 깊은 존경의 뜻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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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와 real life

보스턴 아트 뮤지엄의 특별전시를 관람했다. The Power of Photography 라는 부제를 달고 잡지 The Life 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전쟁, 폭동, 축제, 슬픔, 기술 등 삶의 현장 곳곳을 카메라에 담으려 애쓴 작가들, 그 순간의 진실을 보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던 기자와 편집인들의 수고와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대전, 한국전쟁, 아폴로 달착륙, 르완다 내전 등 현대사의 장면들이 여러 사진 속에 담겨있었다.

아마도 사진의 힘은 현실의 정확한 재현능력에 있을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현장성, 살아있고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의 사실성을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호소력과 증언력을 지닌다. 죽음이 널려있던 전장에서 망연해하는 병사의 모습이나 1945년 8월 17일 종전 소식을 듣고 길거리에서 환호하는 시민의 모습은 평화에의 갈망을 그 어떤 매체보다 더 리얼하게 보여주는 힘을 지녔다.

하지만 사진의 힘을 대체하는 매체환경의 변화로 인해 The Life 지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퇴장을 안타까와하는 여러 움직임과 목소리가 있지만 텔레비젼을 필두로 하는 전자영상 기술의 확대는 사진의 힘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아폴로 우주선의 달착륙 소식을 전하는 순간, The Life 지의 독점적 영향력을 텔레비젼 중계가 대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전시공간에는 웬지 쓸쓸함이 자리한 듯 했다.

온갖 영상물이 범람하고 사진이 일상의 취미가 되어버린 요즈음 ‘사진의 힘’은 더 이상 사실성과 재현성에 있지 않다. 사진은 과시와 자랑과 취향의 도구가 되거나 상상의 이미지로 변형되기 일쑤여서 이제 사진 그 자체의 사실성에 감동하는 경우는 현저히 사라졌다. 팩트와 허구가 결합된 팩션 (faction)이 강조되는 것도 이런 영상 기술의 발전과 깊이 결부된 현상이다. 이미지의 시대, 상상력의 시대라고 불리는 21세기에 사진의 힘은 어떻게 변형되고 존속할 것인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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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도원기

날씨는 차가왔지만 꿈같은 기간이었다. 보스턴에서의 가족여행은 기대 이상의 만족감으로 마치 ‘도원’에 와 있는 듯 했다. 새롭고 멋진 장소나 유적을 여행해서가 아니라 가족과의 대화와 여유로운 휴식, 그 가운데서 잔잔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여건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나는 안견의 ‘몽유도원기’를 떠올리면서 이번 여정에 ‘보스턴 도원기’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늘 바빴고 일에 부대꼈던 지난 시기, 부담없이 평안하게 가족들과 감정과 시간을 공유한 기회가 너무 적었다. 사랑을 표하는데도 인색했고 아이들과 대화하는 역량도 부족했다. 잘 자라준 아이들이 고마우면서 마음 속 깊이 미안한 감정이 적지 않다. 그래서인가 더욱 이번의 시간이 너무 뜻깊고 소중했다. 그냥 같이 있는 것, 함께 먹고 마시며 쉬는 것, 그러면서 잔잔한 사랑을 확인하는 것 – 최고의 여행이라 할 만 했다.

손녀 이든과 올리브의 재롱과 웃음은, 그것만으로 하루 종일을 보내도 모자랄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영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이게 뭐에요?’ 라고 묻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토라지고 또 금방 기쁘게 안겨오는 아이는 소중하고 역동적인 생명 그 자체다. 이런 아이로부터 할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인생의 축복이다.

특히 장성한 아들 종인이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 이곳 저곳을 다니며 식사를 함께 하고, 저녁엔 술 한잔을 나누며 시간을 공유한 기억은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내가 대학을 입학했을 때 아버지가 다방에서 아들과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무척 기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때 그 분도 지금 나와 같은 심정이셨으리라. 여행 내내 아들이 살아갈 미래에 건강과 행복, 자신감과 활력이 늘 함께 하기를 마음으로 기도했다.

귀한 휴가시간을 모두 내어 화이트마운틴 좋은 곳에 집을 얻고 긴 시간 가족과 함께 할 여건을 만든 딸과 사위가 고마왔다. 어린 어이들을 키우면서 하루도 단잠을 자기가 어려운 형편인데도 기쁘게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직장에서도 능력을 발휘해가는 것이 대견하고 든든했다. 이렇게 있다가 떠나면 당분간 허전함이 있을텐데 몸과 마음이 늘 건강하고 삶의 보람이 계속되기를 내내 기도했다. ‘도원’이라고 이름할 정도로 좋았던 시간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한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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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藝無疆

서울대 문화관에서 10월 24일부터 28일까지 열린 한중합동의 [가없는 서예술: 書藝無疆] 서예전에 참가했다. 한국측은 소동파를 비롯한 중국의 시문을, 중국측은 이규보와 퇴계 등 한국의 문장을 쓰는 방식으로 기획된 일종의 문화교류 행사다. 서울대 교직원 서예모임인 화묵회가 홍콩 학자들의 서예단체 集古學社와 함께 개최한 이 전시에 나는 전적벽부 전문을 쓴 작품을 출품했다.

적벽부는 첫 문장을 비롯해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구절이 더러 있다. 하지만 올 여름 文徵明 서첩을 구해 그의 행서를 임서해보면서 비로소 내용 전체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배 위에서 동파와 객이 주고받는 대화는 지금 읽어도 우아한 품격이 느껴지는 고품질의 토크다. 한 때 일세영웅이었던 조조를 생각하다가 그도 세월이 흐르니 흔적조차 없어졌음을 깨달은 객은 “장강의 끝없음을 부러워하고 인생의 유한함을 슬퍼” 하는 마음을 담아 애절한 통소를 불었다.

그 소리에 화답하여 소동파는 “만물을 그 변하는 것에서 보면 어느 것 하나 순간이 아닌 것 없지만, 변하지 않는 면에서 보면 모든 것이 끝없이 존속하는 것” 임을 강조한다. 인생도 산하도 변화하는 것과 지속되는 것이 동전의 양면이니 어느 한 면에 매달려 자만하거나 애석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조물자’가 우리에게 준 무진장의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도 덧붙인다. 造物者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종교적 깨달음이라 할까, 인간과 자연을 함께 생각하는 달관이라 할까 독특한 여유와 정조가 마음에 와 닿는다.

중국측 출품작 가운데서는 홍콩 중문대학 심천학장 徐揚生이 퇴계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글을 쓴 작품이 글씨도 멋스럽고 내용과 구도도 마음에 들었다. “선비가 태어나 혹 출세하기도 하고 혹 은거하기도 하며 혹 뜻을 이루기도 하고 혹 불우하기도 하지만 오로지 자기 몸을 정결하게 하고 옳음을 행할 뿐 禍福을 논할 것은 아니다.” 조선 유자의 반듯함이 드러나는 글인데 소동파의 도학적인 분위기와 이퇴계의 유학적인 정신이 같은 듯 다른 듯, 화이부동의 싫지않은 긴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현실을 돌아보면 삽시간에 저련 정신의 여유가 사라지고 만다. 도무지 품격이란 찾아볼 수 없고 개인과 자파의 ‘화복’만 따지는 국내의 정치현실, 자국의 이익 앞에 인류의 공존이 위협받는 국제정세, 핵무장론이 등장할만큼 어려워진 남북관계 등 답답한 상황을 앞에 두고 소동파와 이퇴계는 무어라 조언할까? 또 통소를 불던 저 객은 어떤 노래를 부를까? 한중 민간의 문화교류가 정치갈등의 파고를 넘어 서로를 존중하며 순항할 것인가? 전시회를 지키면서 자문해본 물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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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성

11일 오후 담양 금성산성을 올랐다. 원래 광주시 양림역사문화마을을 둘러볼 계획으로 출발했는데 노치준 목사께서 당신이 안내할 수 있는 날 오기를 원하는 문자를 보고 행선지를 도중에 바꾼 것이다. 금성산성은 의병운동과 동학농민운동 관련 자료에서 본 적이 있고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이 멋있어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가로수가 멋지게 도열한 옛 신작로 길을 꽤 달려 도착한 금성산성 주변은 갓 시작한 듯 보이는 고급 팬션이 주인공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멀리 산자락을 내다보는 좋은 자리에 멋진 카페와 숙소가 있고 잔디마당에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그 아래에는 캠핑장도 있다고 하니 이 일대가 이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보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굳이 금성산성이란 역사적 유적을 의식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주차장에서 산성까지는 2키로의 산길을 올라야 한다. 비교적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군데 군데 돌언덕을 넘어야 해서 손쉽게 오르기엔 다소 벅찬 거리다. 올라가는 동안 꼭 한 명이 호젓이 그 길을 오르고 있었고 산성 주변도 인적을 찾을 수 없었다. 길을 오르면서 계속 떠오른 생각은 이 높은 곳에 성을 쌓고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런 수고와 정성을 쏟았던 것일까?

높은 산 정상 가까이 바위 위에 세워진 성문과 누각을 보면서 나는 견고한 성문이라기 보다는 중세의 수도원 입구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임진왜란에서 또 동학농민전쟁 과정에서 이곳이 쓰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피란처 역할에 더 가까왔을 법하다. 성문에 ‘보국문’이라는 현편이 걸려있는 걸로 보아 분명 ‘나라’를 지키는 것임은 틀림없는데 그 나라를 이런 산꼭데기에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신앙을 지키려 수도원에 은거하던 마음을 빗대어 본다면 이들에게 국가는 그런 신앙의 대상, 신성한 무엇으로 표상되었을지 모르겠다. ,

정작 이곳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 것은 성문 누각에 서서 멀리 첩첩의 산자락을 바라볼 때였다. 여러 산줄기들이 앞뒤로 겹쳐 이어지는 산맥과 그 사이의 들판을 바라보면서 ‘국토산하’라는 말이 실감있게 와 닿았다. 이들이 지키려던 것은 결국 이 땅이었고 산과 강을 내다보는 이 자리가 그런 산하의식을 자각케 하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