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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박물관

미암일기의 필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 유희춘의 종가와 박물관이 있는 담양 장산마을을 다녀왔다. 오랜 고택과 정자, 박물관의 멋진 배치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특히 연못 한가운데 서 있는 모현관은 그 규모나 배치, 건물양식 등 여러 면에서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이색적인 모습으로 눈길을 모은다.

자그마하지만 독특한 양식의 이 건물은 한국전쟁 직후 미암일기의 가치를 인식한 서울대총장, 전남대총장, 광주시장 등이 참여한 유적보존회가 후손과 함께 건립한 것이라 한다. 유서깊은 종택과 사당 앞에 기하학적 모양을 담은 서양식 석조 건물을 짓기로 한 이들의 미학과 결단이 놀랍다. 모현관이란 글씨는 허백련이 썼다 하는데 단아하면서도 힘이 있다. 돌에 새긴 글씨가 생각보다 건물과 잘 어울려 굳이 나무 편액을 달려 하지 않은 유연함이 신선하게 와닿는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평생 쓴 일기인데 현재는 1567년부터 1577년까지 쓴 일기 11권이 전해져온다. 조선중기의 사회상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특히 사대부 집안의 부부간 역할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조선가족사를 연구하는 이들이 종종 언급하곤 한다. 미암의 부인인 송덕봉은 유교적 가치에 얽메이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매우 분명하게 내세운 당당한 여성이었고 자신의 문집을 남길 정도로 학식도 남달랐다. 입구의 미암박물관에 미암일기를 비롯한 여러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소나무들이 울창한 먼산을 배경으로 수백년 역사가 여러 건물 속에 쌓여있는 이 마을의 모습이 정겹다. 종택 뒤에는 16세기 건축양식과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벽화가 담긴 사당이 있고 언덕위의 단아한 정자에는 이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던 자취가 서려있다. 종택과 박물관 사이의 연못 속에는 한말과 일제하, 전쟁기의 힘들었던 세월이 뭍혀있을 것이다. 서양식 모현관과 한식풍의 박물관은 20세기 문명개화의 힘이 이곳에까지 미친 자취일 터인데 이런 궁벽진 곳을 찾는 이가 점점 없어지는 21세기에는 어떤 자취와 이야기가 이 공간에 새로이 덧붙여질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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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GIST에 와 있는 기간동안 강의가 없는 시간을 이용해서 남도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녀보고 싶었지만 좀처럼 짬을 내지 못한 곳이 적지 않은데 광주를 거점으로 오갈 수 있으니 비교적 수월하게 길을 나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 그 첫 장소로 담양의 소쇄원을 택했는데 약 30분이면 갈 수 있다는 후배교수의 조언이었다. 실제로 주중이어서 길은 크게 붐비지 않았고 소쇄원을 찾은 방문객도 많지 않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소쇄원(瀟灑園)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지은 별서정원이다. 소쇄라는 말은 ‘밝고 깨끗하다’는 뜻인데 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조선시대 정원 중에서 첫손으로 꼽힌다. 1983년 7월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 5월에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조선 중기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인물들, 예컨대 면앙 송순,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이곳에서 교유하며 정치, 학문, 시를 논했다.

울창한 대숲을 배후로 하고 작지만 아름다운 계곡을 굽어보며 중앙에 ‘光風閣’이란 현판이 걸린 정자가 서 있다. 꾸미지 않은 담백한 모습이 주위와 잘 어울려 마치 원래부터 있던 자연물처럼 느껴진다. 왜 저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국민학교 시절 매일 오가던 금호강변에도 ‘光風樓’라는 2층 누각이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처음 짓고 선화루라 이름 지었던 것을 성종 25년(1494)에 당시 안의 현감 정여창이 광풍루라고 이름을 바꾼 곳이다. 광풍각과 광풍루 – 어린 시절 고향의 기억을 남도여행 첫 날 담양에서 떠올리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광풍(光風)은 ‘비가 갠 뒤에 맑은 햇살과 함께 부는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이란 뜻이다. 과연 두 곳 모두 그런 곳이어서 이름과 실제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저 이름 속에 그런 뜻만 담겨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후 향리로 내려온 양산보는 은거하는 선비의 삶에 더 이상 조정 권력다툼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말기를 바라는 심정을 저 현판에 담고싶지 않았을까. 강직한 성품에 김종직 문하였던 정여창이 선화루를 광풍루로 바꿔 부른 것도 장차 무오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자신도 연루되어 유배될 것을 예감한 탓일지 모르겠다는 과한 상상까지 해보게 된다.

상쾌한 光風을 바랬는데 성난 狂風을 만나는 역경을 양산보도 정여창도 겪었다. 그런 인생사 아이러니는 지금 우리도 종종 접하지만, 자연은 그때나 오늘이나 멋과 여유를 잃지 않는게 중요하다고 교훈하는 듯 하다. 소쇄나 광풍의 뜻에는 그렇게 살리라 다짐하는 사림 처사 특유의 결기가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며 21세기 오늘 내 삶도 되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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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5 의연함과 떨림

독도를 오가는 뱃길은 편치 않았다. 흐린 날씨에 파도도 높아 배는 꽤나 흔들렸다. 바다는 한 곳도 고요하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마주친 독도는 의연했다. 끝없는 파도의 요동과 바람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독도의 모습에서 의연함이란 이런 것이라는 메시지를 듣는 듯 했다. 청마 유치환의 “저 먼 아라비아의 사막”이 이와 같았을까 모르겠다. 하늘과 바다가 함께 연출하는 거대한 정적 속에서 독도는 ‘존재 그 자체의 힘’ 을 강렬하게 대변했다. 우주에 비하면 티끌같은 크기이지만 그 우주적 스케일에 당당히 맞서는 인간이 저런 모습 아닐까.

돌아오는 뱃길은 더욱 파도가 거셌다. 순식간에 생겨나 몰려왔다가 부서지는 물결을 보면서 고등과학원 이필진 교수의 강의 “거시세계의 양자물리”를 떠올렸다. 최근 즐겨듣는 동영상 강좌 중 하나인데 미시세계든 거시세계든 존재의 본질은 일종의 파동 즉 움직임이며 모든 물질과 존재는 그 떨림으로부터 생성된다는 것이다. 입자와 반입자의 생성과 소멸이 끝없이 진행되는 양자요동의 이미지가 파도치는 바다에서 연상된 것은 엉뚱하면서도 신기했다. 자칫 색즉시공의 동양철학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할 일이지만 최신 물리학의 설명이 내 근대적 사유의 틀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좋은 자극제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의연함과 떨림, 그것은 모든 존재가 지닌 두 속성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요동않는 무게감과 한없이 가벼운 떨림 사이를 수시로 오간다. 때론 손해를 알면서도 내 주장과 의지를 고수해 보지만 자신만만했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또한 얼마나 많은가. 나침반이 언제나 북쪽을 가르칠 수 있으려면 미세한 움직임에도 흔들리는 가벼움이 필수적이라 했다. 그런 점에서 의연함과 떨림은 양자택일의 대상이라기 보다 동전의 양면이다. 문제는 균형이다.

국악 페스티벌 풍류대장 1회 우승팀 서도밴드가 ‘바다’란 노래를 불렀었다. 굿을 하듯 토해내는 그 노래는 끝없는 파도의 요동침을 moving 과 무너짐으로 표현했다. “이미 너는 알지 이 moving / 다시 무너진다는 걸.” 무너져 버리지만 끝없이 쉬임없이 움직이고 요동치는 것 – 이 속에 바다의 의연함과 떨림이 함께 하는 것이리라. 그 노래를 들으며 인생을 떠올리기도 했었다. 물리학자와 천문학자, 시인과 가수가 함께하는 섬여행, 별여행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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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4, 마음 속 그림

가없는 바다 한 가운데 동도와 서도가 마주하고 그 사이에 작은 바위가 점처럼 이어진 독도전경은 그 자체로 한폭의 수묵화다. 잿빛 하늘과 검푸른 파도를 배경으로 암갈색의 독도를 향해 배 위에서 마구 누른 카메라 샷 어느 것 하나 명장면이 아닌 것이 없다. 독도는 그 자체가 그림이지만 그리기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유명한 화가들이 독도를 그리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전국의 학교, 단체들이 독도그림 그리기, 독도그림 전시회를 주도한다.

일찌기 독도 그림그리기를 주도한 서울대 이종상 화백은 그것을 민족문화를 지키는 운동이라 했다. 초등학생들의 독도그리기는 그림 자체보다 영토주권을 상상하게 만드는 일종의 교육이다. 그래서 독도 그림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이다. 올해 초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 일본 대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설 선물을 수취거부하고 반송했는데 선물상자에 독도로 보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독도가 빠진 한반도 그림을 사용한 단체나 책자가 대중의 비난을 받는 사례도 적지 않다. 추상화된 독도 그림이 격렬한 감정정치의 진원이 되는 미묘한 현실이다.

그래서 독도 그림은 백두산, 금강산과 함께 남북간에 공통의 정서를 확인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남북이 함께 모이는 곳에는 으례 금강산과 백두산 그림이 걸리는데 독도도 비슷한 기능을 지닌다. 남북관계 개선의 기대가 있던 2019년에는 북한의 대표적 화가 정창모와 선우영의 독도 그림 전시회가 경북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정창모의 이름은 십수년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들었고 만수대 창작소에서 담묵과 농묵만으로 그린 백두산 설경 그림에 경탄한 적이 있다.

독도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이종상의 “독도의 기 II” 작품은 수묵의 농담으로 상하 대칭의 삼각형 형상을 배치한 것인데 이 그림에서 굳이 정치역사적 의미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먹의 농담만으로 바다위 독도를 그린 정창모의 수묵화 마찬가지다. 사실 독도 앞에 서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바다와 하늘, 섬이 빚어내는 모습에 감탄한다. 흰 화선지 위에 검은 먹으로 잿빛 하늘과 바다 가운데 짙은 색의 독도를 그려보고 싶지만 당분간 머리 속에만 담아두기로 한다. 남북이, 한일이 손잡고 독도를 다시 갈 때면 얼마나 감격스럽게 마음 속 그림이 바깥으로 표출될 것인가! 그 날이 언제나 올까 궁금함과 함께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의구심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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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2, 컨텐츠의 시간성

울릉도에는 여러 기념관과 전시관이 있다. 방문자들로 하여금 독도가 한국령임을 확신하게 만드는 교육공간의 성격이 강하다. 울릉도와 독도의 한반도 귀속을 보여주는 과거의 문서와 지도들이 전시되어 있는가 하면 이곳을 생활터전으로 삼고 살았던 사람들의 행적이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수토사와 같이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의 문서와 활동도 있고 홍순칠 등 독도의용수비대와 같이 민간인의 활동이 중심이 된 전시도 있다. 시마네현 고시를 시작으로 일본이 독도를 침탈한 과정도 소개되어 있는가 하면 해방후 미군정이 독도의 한국령임을 명확히 확인해준 SCAPIN 자료 등도 전시되고 있다.

뜻밖에 방문하게 된 박정희 기념관은 또다른 공간이었다. 1962년 울릉도를 방문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회의 의장이 묵었던 일본식 관사를 개조하여 제3공화국 시기 개발정책과 성과들을 종합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소위 국적있는 교육을 내세워 국가주의 역사관을 강조했는데 그 맥락에서 안용복 기념비를 세우고 독도의용수비대를 청와대로 초청하는 등 독도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었다. 이 기념관은 박정희 정부 시기에 진행된 개발과 동원, 상징정치의 여러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전시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1960년대와 70년대의 기억을 재생하고 있다.

21세기 울릉도의 변화는 심대하다. 관광객은 늘어나지만 2만명에 달하던 주민 숫자는 8,000명 수준으로 줄었다. 어업이 주를 이루던 경제활동 양상도 관광서비스업 중심으로 변모하고 있다. 고즈넉하던 항구와 마을은 관광버스와 렌트카로 혼잡하다. 이미 생태환경의 파괴가 적지 않이 진행되었는데 장차 공항이 들어서면 더 가속화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대중 정부 하에서 조인된 신한일어업협정이 울릉도와 오키도를 기점으로 중간공동수역을 결정한 것 때문에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 이후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이곳의 어업활동이나 이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궁금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최근의 생활상, 진행되는 문화사를 보여주는 전시관도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독도영유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전시가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동시에 나날이 바뀌는 현실과 궁금해하는 내용의 다양성을 반영할 컨텐츠 보완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세대감각이 다르고 우리 사회의 문제가 복합적인 만큼 과거와 현재, 육지와 바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생태 전반을 아우르는 폭넓은 내용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일은 단순한 전시방식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일대 혁신이 필요한 어려운 과제이긴 하다. 任重道遠, 임무는 중한데 갈길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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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1, 유치환과 김민기

청마 유치환의 ‘울릉도’ 시비가 독도박물관 입구에 서 있다. 울릉도를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묏부리 방울 튀어” 이루어진 “애닯은 국토의 막내”라고 노래한 시인의 상상이 기발하다. 울릉도와 한반도의 밀접한 연결성을 이 표현 이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문화와 역사, 정치로까지 이어져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미칠 수 없음이 이렇게도 간절”한 “어린 마음”을 울릉도에서 읽어낸다. 식민지와 분단, 전쟁의 험난한 역사를 살아와야 했던 시인 자신의 정서가 먼 바다 외딴 섬의 모습 속에 투영되었을 법하다.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앞에도 또다른 시비 하나가 서 있다. 70년대 문화운동의 주역이었던 김민기의 “내 나라 내 겨레” 라는 시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위에 이글거리나”로 시작되는 이 글은 송창식이 곡을 붙인 노래로도 널리 알려졌다. “피어린 항쟁의 세월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라거나 “눈부신 선조의 얼 속에 고요히 기다려온 우리 민족”이라는 표현 속에서 전쟁과 가난과 독재를 뚫고 의연히 성장해온 한반도 백성에 대한 강한 신뢰를 읽을 수 있다. 이 시비 건립을 위해 2000년에 김민기가 새로 글씨를 썼다는데 민주화된 21세기를 맞이하는 감격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이 글에 덧입혀 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유치환의 시와 김민기의 시는 정서와 분위기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 청마의 시에서는 애절함과 고독함이 강하게 느껴지고 김민기의 노래에선 자신감과 공동체성이 읽혀진다. 청마는 바다, 파도, 바위, 사막 등을 통해 꺾이지 않는 생명의 강인함을 확인하려 한데 반해 김민기는 항쟁의 역사와 선조의 얼, 순결함과 기다림의 공동체를 노래한다. 유치환이 울릉도를 통해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을 읽어내는 것과는 달리 김민기는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라며 선언하듯 과감하게 자신감을 피력한다. 이 두 시비 건립의 사이에는 수십년 한국 현대사가 자리하고 두 시인의 감성 사이에는 그동안 변해온 시대정서의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2022년 지금 또 다른 시인이 이곳에서 노래한다면 어떤 정서를 담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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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덕.체와 친구들

지난 주 오랜 친구인 태영, 희용, 명곤과 귀한 모임을 가졌다. 중학교 시절 학교와 교회를 함께 다니면서 우정이 시작된 사이이니 무려 50년이 넘었다. 그동안 각기 목회, 군인, 학자의 길을 걷는라 잘 만나지 못했다. 더구나 남을 가르치는 역할을 해야 하고 일요일엔 교회 일에 바쁘다 보니 현직에 있을 때는 좀처럼 편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이제 대부분 퇴직을 해서 몸도 마음도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되어 다시 만나니 반백년의 세월도 어제인 듯 반갑고 기쁘다. 잘 치지 못하는 골프를 핑게삼아 푸른 잔디를 밟으며 하루를 즐겁게 이야기하며 보냈다.

경남의 한 작은 마을에서 혼자 올라와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니던 내게 당시 수유리는 내 주말과 정서를 책임지던 곳이었다. 백운대와 4.19 탑은 답답할 때 가곤 했던 산책로였고 우이감리교회는 주말마다 들리던 집과 같았다. 하교길에 교회당을 들리면 반가운 친구를 만날 수도 있고 간간히 목사님이 나를 불러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해 주셨다. 태영, 명곤, 희용, 은영, 후용, 승기 등은 내 정서의 빈구석을 채워주던 고마운 동기들인데 특히 태영, 명곤은 학교도 같아서 등하교를 함께 하곤 했다. 언젠가 태영, 희용과 어느 자리에서 지, 덕, 체라는 가치를 한 사람이 모두 갖기는 어려우니 한가지씩 나눠 가지자고 했다. 당시는 재미삼아 했던 말이었을텐데 약속을 지켰다고 할까 아니면 말이 씨가 되었다고 할까 실제로 그 다짐은 실현되었다. ‘덕’을 맡기로 한 희용은 신학교를 거쳐 목회자가 되었고 ‘용’을 맡은 태영은 공군사관학교를 거쳐 유능한 조종사이자 비행 교관이 되었다. ‘지’를 맡기로 한 나는 학자의 길을 밟아 모교인 서울대 교수를 하고 다시 광주과학기술원 석좌교수가 되어 있으니 돌이켜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이제 정년 이후의 삶은 다시 지, 덕, 체의 통합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똑똑한 것도, 후덕한 것도, 건강한 것도 그 어느 하나만으로는 점점 노령화 시대를 헤쳐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랜 생활에서 몸에 밴 생각과 행동 탓에 각자의 개성은 쉽게 변하지 않아 운동하는 과정에서도 각자의 기질이 드러나곤 한다. 육군의 장군으로 제대한 명곤과 공군의 고급장교였던 태영 덕에 간간히 함께 운동을 하게 된 것은 참으로 소중한데 옛날 수유리 학창 시절을 떠올릴 정도의 장난기와 농담이 스스럼없이 오가는 것을 보면 오랜 우정이 갖는 강한 힘이 놀랍다. 친구들의 만남에서는 운동을 잘 하거나 못하는 것이 자랑도 흠도 아니며 신앙의 깊이와 지식의 많고 적음도 큰 변수가 되지 않음을 실감한다. 지금은 연락이 없어 만지지 못하는 다른 친구들도 비슷할 것이다. 젊은 시절 각기 나누어 갖기로 했던 지, 덕, 체를 이제 다시 개성적인 삶 속에 녹아내야 하는 단계에 접어 들었음을 느끼면서 우정의 소중함에 감사하게 된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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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장군총

중국 집안 – 고구려의 유적들이 널려 있는 곳이지만 좀처럼 가볼 기회가 닿지 않던 곳이다. 티벳을 가려던 여정이 갑자기 변경되면서 그 대체지로 가게 된 것인데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가는 길은 따분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고구려 고분을 들러보고 습기로 훼손되고 있는 벽화의 현장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다행스럽다. 광개토대왕비도 가까이서 둘러볼 수 있었는데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지금은 그것조차 쉽지 않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지막 기회를 잡았던 것인가 싶다. 장군총을 오르며 역사의 무게, 영웅의 죽음, 민족의 성쇄와 문명의 경계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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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순감옥

여순, 뤼순이라고도 하는 곳은 동북아 근대사의 요충지였고 20세기 한국사와도 연관이 깊다. 러시아의 영향 하에 개발된 곳이면서 러일전쟁으로 승리한 일본이 할양받았다가 3국간섭으로 내놓은 곳이다.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사 안중근이 투옥,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곳이다.  신채호를 비롯한 적지 않은 한국의 독립지사들이 옥고를 치루고 심지어 옥사한 가슴 아픈 역사가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사학회의 학술회의를 마치고 현지 교수의 도움으로 이곳을 방문, 곳곳을 둘러보면서 동북아 지정학의 안타까운 엇갈림을 생각했다. 이곳이 유럽 지중해의 도시처럼 중국과 조선, 러시아와 일본을 잇고 서로의 문물이 섞이며 신뢰와 호혜의 도시를 건설할 가능성이 없진 않았을 터… 그 길이 막힌 연유가 어디에 있었을까를 생각하며 동북아의 초국가적 도시형성의 미래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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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철교의 일출

중국과 북한을 잇는 도시 단둥의 정경은 특이하다. 압록강을 경계로 대비되는 양 지역의 변화상은 개혁개방으로 대국굴기를 이루어가는 중국과 자력갱생을 부르짖는 위기의 북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곳에는 두 개의 철교가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존재하던 압록강철교는 한국전쟁때 파괴되어 중간이 끊긴 모습 그대이고 그 옆에 새로이 세워진 철교 위로 열차와 화물차들이 오간다. 이 두 철교는 한반도 근현대의 안타까운 역사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역사의 조형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