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시공간 여행

금성산성

11일 오후 담양 금성산성을 올랐다. 원래 광주시 양림역사문화마을을 둘러볼 계획으로 출발했는데 노치준 목사께서 당신이 안내할 수 있는 날 오기를 원하는 문자를 보고 행선지를 도중에 바꾼 것이다. 금성산성은 의병운동과 동학농민운동 관련 자료에서 본 적이 있고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이 멋있어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가로수가 멋지게 도열한 옛 신작로 길을 꽤 달려 도착한 금성산성 주변은 갓 시작한 듯 보이는 고급 팬션이 주인공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멀리 산자락을 내다보는 좋은 자리에 멋진 카페와 숙소가 있고 잔디마당에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그 아래에는 캠핑장도 있다고 하니 이 일대가 이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보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굳이 금성산성이란 역사적 유적을 의식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주차장에서 산성까지는 2키로의 산길을 올라야 한다. 비교적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군데 군데 돌언덕을 넘어야 해서 손쉽게 오르기엔 다소 벅찬 거리다. 올라가는 동안 꼭 한 명이 호젓이 그 길을 오르고 있었고 산성 주변도 인적을 찾을 수 없었다. 길을 오르면서 계속 떠오른 생각은 이 높은 곳에 성을 쌓고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런 수고와 정성을 쏟았던 것일까?

높은 산 정상 가까이 바위 위에 세워진 성문과 누각을 보면서 나는 견고한 성문이라기 보다는 중세의 수도원 입구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임진왜란에서 또 동학농민전쟁 과정에서 이곳이 쓰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피란처 역할에 더 가까왔을 법하다. 성문에 ‘보국문’이라는 현편이 걸려있는 걸로 보아 분명 ‘나라’를 지키는 것임은 틀림없는데 그 나라를 이런 산꼭데기에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신앙을 지키려 수도원에 은거하던 마음을 빗대어 본다면 이들에게 국가는 그런 신앙의 대상, 신성한 무엇으로 표상되었을지 모르겠다. ,

정작 이곳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 것은 성문 누각에 서서 멀리 첩첩의 산자락을 바라볼 때였다. 여러 산줄기들이 앞뒤로 겹쳐 이어지는 산맥과 그 사이의 들판을 바라보면서 ‘국토산하’라는 말이 실감있게 와 닿았다. 이들이 지키려던 것은 결국 이 땅이었고 산과 강을 내다보는 이 자리가 그런 산하의식을 자각케 하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