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시공간 여행

매화 속 사람과 자연

봄은 매화와 더불어 오는가. 한겨울 매서운 날씨를 견디고 고고하게 계절의 변화를 알라는 매화의 향기가 곳곳에서 풍겨난다. 예로부터 매화는 그 기개와 품성이 선비와 닮았다 해서 사군자의 첫 소재로 꼽혔고 고택이나 서원의 한 켠에 자리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남도 섬진강변과 하동지방은 산기슭을 온통 매화가 차지할 정도로 군락을 이룬 곳들이 적지 않다. 매실을 재배하는 농원들이 많기 때문이겠지만 남도의 야트막한 산세와 풍광이 일조를 했을 터이다. 하동에서 벌어지는 매화축제에는 100만명을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한국사회사학회 활동을 처음부터 함께 했고 이제는 학계에서 퇴임하여 정담을 나누던 사시친 멤버들이 모처럼 매화 답사길에 나섰다. 고매로 이름난 승주의 선암사, 홍매로 유명한 화엄사를 비롯하여 사람들로 들끓는 매화축제장 농원도 들렀다. 여행이 꽃구경 만일 수는 없는 법, 박경리의 토지의 무대로 알려진 악양에 묵으면서 이런 저런 사람도 만났다. 악양별서라는 멋진 이름의 집에서 시와 춤과 노래의 작은 모임도 갖고, 오래된 집을 멋진 전시관으로 만든 빈산 갤러리에서 작품도 감상했으며 조씨 고택에서 조선조 명문가의 위세와 품격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높은 산마루에 올라 사방을 에워싼 지리산 능선, 그 속에 넓게 자리잡은 땅, 굽이치는 섬진강을 한 눈에 바라보는 즐거움도 맛보았다.

선암사의 고매는 아름다운 사찰의 풍경과 어우러져 장관이었다. 태고종으로 많은 불사를 하지 않아 오히려 고풍스런 옛 아름다움이 유지되고 있다는 역설이 새삼스러웠다. 이곳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롯하여 이름있는 사람들의 현판들이 여럿 있다. 화엄사는 홍매 한 그루가 대웅전에 맞먹는 높이로 장중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전에 이곳을 왔을 때 국보로 지정된 각황전 앞의 사자석등에 눈이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우람한 기세의 등걸과 붉은 색의 화려함으로 사찰의 분위기를 일거에 바꾸는 홍매의 절경에 사로잡혀 다른 곳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가히 명불허전이다. 평소에 매화는 백매가 본류이고 홍매는 웬지 아류 같이 여겨졌는데 화엄사 홍매는 내 편견을 일순간 날려버렸다.

재작년 이맘때 제자들이 매암동인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내가 정년을 기념하여 제자들에게 써준 글씨들로 ‘以文會友’ 전시화를 열게 된 것을 계기로 서로의 근황과 관심사를 나누고 소중한 학연을 이어가자는 뜻에서였다. 지금도 개인적으로 또 몇명씩 간간히 만나면서 학문의 길에서 부딪친 생각과 경험들을 나누곤 하는 고마운 제자들이다. 광주과학기술원에서는 또다른 학생들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이런 저런 꿈과 뜻을 지닌 사람들이 개성있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들을 본다. 선암사의 고매, 화엄사의 홍매만 아니라 내가 인연한 이 모든 이들이 각각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매화 나무란 생각을 했다. 좋은 제자를 만난 복을 감사하고 새롭게 이어지는 인연들을 생각하며 선암사 백매의 모습을 화선지에 옮겨본다.